작은책강의내용-사진으로 보는 평화 이야기2010/06/11 243

작은책 강좌에 서게 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감사드립니다.

2010년 5월 20일 목 7시 ‘작은책’에서 초대하여 주셔서 했던 강의 내용을 푼 것입니다

자작나무
제가 3월초에 한 과수원에 갔는데 그때는 마침 날이 풀려서 따뜻한 때였습니다. 과수원 주인께 “날씨가 빨리 풀려서 다행이겠습니다” 했더니 주인말씀이 그게 아주 큰 걱정이라는 거예요. 왜냐면 나무들은 추워지기 전에 물을 다 내려서 스스로를 마르게 했다가 따뜻해지면 다시 물을 끌어올리는데, 만약 지금 조금 따뜻해진 날씨 때문에 물을 끌어올렸다가 다시 날씨가 추워진다면 나무들은 다 얼어 죽는다고 해요. 근데 정말 그렇게 다시 추워졌잖아요. 그래서 사과 농사가 다 망했답니다. 제가 한번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는데 자작나무 숲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예요. 정말 유라시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수종이 자작나무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자작나무는 침엽수가 아니고 활엽수인데 추운 곳에 자란다는 게 참 희한하다 생각했죠.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자작나무 껍질이 희잖아요. 나무는 햇빛을 받으면 따뜻해져서 아래에 있던 물을 다 끌어올리잖아요. 그런데 흰 껍질은 또 큰 추위가 와서 다 동사할 것을 대비해서 웬만한 햇빛에는 작용하지 않도록 다 반사시키는 거죠. 그래서 자작나무 껍질이 검정색이 아니고 흰색이라고 해요. 덕분에 활엽수인 자작나무가 추운 지방에서도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자라고 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작나무가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요? 러시아에는 혁명이 있었잖아요. 그때 임시 정부 수상 겸 총사령관을 지낸 케렌스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합쳐 놓은 것보다 더 진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국민들은 케렌스키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몇 달 뒤에 레닌을 받아들여서 대혁명을 성공시킵니다. 그런 측면에서 웬만한 햇빛이나 개량에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는 러시아 국민들이 근성이 자작나무와 닮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지방 선거를 보면서 우리가 하게 될 선택이 어떠해야 할지 고민될 때 자작나무의 정신 같은 것을 한번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몸의 중심
제가 이전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몸의 중심이 어디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얼마 전에 이지상 선생도 바로 이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했더군요. 머리가 좋은 사람은 머리가 중심이라고 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심장이 중심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몸의 중심이 어디라고 말하는지를 들어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이나 생각이 보입니다. 제가 민통선 걷기 행사를 하면서 대학생들하고 한 20일 정도를 내리 걷는데, 제일 고비가 3일째 아니면 4일째입니다. 그 고비를 넘기면 끝까지 잘 가는데 그걸 못 넘기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4일째쯤 됐을 때 학생들한테 물어봤어요. 몸의 중심이 어디냐고. 그랬더니 학생들 대답은 ‘발바닥’이었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사람은 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몸의 어느 곳이 아프게 되면 온몸의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고 그래서 아픈 곳이 치유될 때까지는 그곳이 우리 몸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중심의 아픈 곳이듯 사회의 중심도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세계의 중심도 전쟁과 기아와 빈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아픔이 치유되기 전까지 세계는 결코 평화롭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아픔과 함께해야 한다고 당위적으로 말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아픔을 함께하는 것은 쉽지 않죠.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주 솔직히 이야기하면 손해를 보는 일이죠. 하지만 아픈 곳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면, 그 아픔을 함께하자고 하는 것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 나를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아니 세계의 역사에서 가장 아픔이 집중돼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비무장지대, 민통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픔은 사실 우리 몸에서 어디가 안 좋은지 신호가 오는 거잖아요. 아픈 걸 안다는 것 자체가 그걸 모르는 것보다 낫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픔이 쌓여서 어느 순간 죽어갈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어떤 때 보면 아픔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픔조차 모르는 상태, 아프다는 신호조차 보낼 수 없는 상태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우리가 보통 자유의 반대말을 뭐라고 하죠, 여러분? (청중 : 구속이요.) 네. 자유의 반대말로는 구속, 억압 이런 말이 떠오르죠. 그런데 프랑스의 베르그송은 이렇게 얘기했어요.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다.”
구속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죠. 외부로부터 오지만 내 마음의 자유 의지까진 어쩌지 못하기에 반발하고 저항해서 구속을 깨죠. 관성이라는 것도 외부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백화점에 가서 뭔가를 살 때, 자기의 자유 의지에 따라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제 본 홈쇼핑 방송과 그저께 들은 친구들의 이야기 같은 것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죠.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고 심지어는 합리화시켜 버리는 것이 바로 관성입니다.
관성은 자기 스스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 의지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도 폭력과 억압 같은 것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저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묘한 관성의 시스템은 우리 스스로 그것을 합의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폭력, 억압, 구속과 같은 것과 싸울 때는, 옛날처럼 화염병을 들고 각목을 들고 심지어 총칼을 들고서라도 싸워 낼 수 있죠. 그런데 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총칼을 휘둘러도 베어지지도 않고 쓰러지지도 않아요.
관성과 싸울 수 있는 무기는 바로 반성이고 성찰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할 때만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과’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 사과가 떠올라야겠죠? 당연한 말이죠. 그런데‘사과’라는 단어를 듣고 배나 바나나가 떠올랐다면, 그 사람의 정신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겠죠. 쉽게 말하면 미쳤다고 할 수도 있고 고상하게 말하면 정신분열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럼 이번에는 비무장지대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비무장지대라는 말은 어떤 뜻이에요? ‘무장돼 있지 않은 곳’이란 말이죠? 그런데 비무장지대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철조망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살벌한 온갖 무기가 설치돼 있는 곳이죠? 중무장돼 있는 곳이 떠오르죠. 비무장지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 머릿속에 정반대의 의미인 ‘중무장지대’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도 우리는 이것에 대해 60년 동안 한번도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비무장지대는 관성화 돼 있는 곳인 거죠. 우리가 비무장지대를 없애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적장치를 만드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있는, 60년 동안 뿌리 내려 있는 관성을 스스로 성찰하지 않고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비무장지대나 민통선 같은 단어들을 떠올려 보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분단 체제 속에 익숙해져서 살아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남을 욕하기 전에, 스스로 아무 의심도 갖지 않으면서 살아온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단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비무장지대와 정전협정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에 대해 얘기할 때 주로 언급되는 것이 환경 생태 문제, 또 문화 교류 문제 등입니다. 하지만 비무장지대를 생각할 때 가장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비무장지대가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죠?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니라 ‘정전’되면서, 즉 정전협정이 발효되면서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졌습니다. 비무장지대나 민통선에 대해 알려면 정전협정에 대해 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나머지 문제도 알아야 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 시초가 이것이니까 이걸 먼저 알아야 그 다음 설명이 가능하겠지요.
여러분 헌법을 한 번씩은 봤죠? 헌법 제1조가 뭐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들이 헌법을 외우고 있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2008년 촛불 시위를 통해서 일반 국민들이 이걸 알게 된 것은 참 큰 공부였어요. 그런데 지난 60년 동안 헌법보다 위에서 움직였던 것이 정전협정입니다. 헌법 밑에 있어야 하는 법률인데 실제로는 헌법을 위에서 억눌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집에 가시면 꼭 한번 인터넷 검색창에 “정전협정 원문”이라고 쳐 봐요. 정전협정이 얼마나 심각한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얼마나 심각한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정전협정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정전협정문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구가 바로 이것입니다. “군사분계선 이남에 대해서는 유엔사령관의 군사통제 아래 둔다.” 정전협정문에 몇 번 반복해서 나오는데, 아마 가장 많이 나오는 문구일 겁니다. 군사분계선 이남이라고 하면 남한 전체가 해당되죠? 마라도까지. 유엔사령관은 누굽니까? 유엔사령관 어디 있죠? 미국에 있나요 유엔에 있나요? 아닙니다. 용산에 있습니다. 용산미군기지에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사령관입니다. 참고로 주한미군사령관은 취임과 동시에 세 개의 직책을 겸합니다.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 겸 유엔사령관이 되는 것입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주한미군을 통솔하고, 한미연합사령관은 한국군과 미군을 통제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한미연합사령부에 실질적으로는 미군이 거의 통합돼 있지 않고 대부분 한국군이기 때문에 한국군의 기밀을 관리하고 작전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미연합사령관이 합니다. 그리고 유엔사령관의 지위까지 갖고 있죠. 미군이 전 세계에 나가 있지만 한국처럼 세 개 지위를 동시에 허락한 나라는 없습니다. 한국만 이렇게 많은 역할을 주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유엔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이 군사분계선 이남에 대해서 군사통제권을 가집니다. 군사통제권을 가진다는 것이 중요한데요. 군사통제란 말을 군사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군사통제란 점령’이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유엔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의 점령 아래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죠. 이것은 저의 일방적인 해석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유엔군 사령부 스스로가 확인한 사실입니다. 두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첫 번째는 1954년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38선을 가운데 놓고 밀리고 밀면서 싸웠는데 그때 가장 논쟁이 된 것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는 문제였습니다. 원래 1950년 6월 25일과 27일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결의는 38선 이남으로 내려온 공산군을 격퇴한다는 것까지만 이었습니다. 유엔안보리 결의에 의해 38선 이북으로 격퇴를 하면 효력이 끝나는 거였는데 이미 10월 1일 미군의 작전통제를 받는 한국군이 38선 이북까지 넘어가 버렸죠. 맥아더가 명령한 미군도 곧 넘어가고. 그래서 그 문제를 어떻게든 유엔에서 수습해야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10월 7일에 유엔에서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라는 결의가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런 결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당시 결의내용은 만약에 38선 이북이 점령됐다면 누가 통치할 거냐 하는 통치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3조는 뭡니까?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 한반도 전체가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돼 있습니다. 이에따라 북한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정부는 괴뢰 정부일 뿐이고, 국가가 아니라 반란 단체일 뿐이라는 겁니다. 다른 나라 법에는 영토 조항이 없는데 한국 헌법에만 특이하게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에 의거해서 38선 이북도 당연히 대한민국 영토이니까 자기가 북한 지역을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준비를 다 해 놨습니다.
하지만 우리 헌법3조는 유엔에서나 심지어 혈맹인 미국조차 인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결국 50년 10월 7일 유엔총회결의는 실제로 38선 이북을 점령한 유엔군사령관이 통치한다고 결정합니다. 그런데 정전이 되면서 문제가 생긴 겁니다. 정전되고 나서 38선을 중심으로 했을 때 군사 분계선이 동쪽 강원도 쪽은 올라갔고 서쪽 경기도쪽은 내려갔죠. 군사분계선 이남은 남한의 주권지역인데 38선 이북은 유엔군 사령관이 통치하기로 돼 있는 것이 문제가 된 거죠.
이승만과 유엔군사이의 논쟁 끝에 최종적으로 유엔사가 이승만에 통보한 문건에 이렇게 나옵니다. “경기도 연천부터 철원, 양양까지 38선 이북이자 군사분계선 이남인 지역은 유엔군사령관의 “군사점령(military occupation)” 아래에 있는 지역으로서”라고 돼 있습니다. 정전협정의 군사통제란 단어가 군사점령이란 사실을 유엔군사령부가 스스로 확인한 거죠.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행정권만을 한국 정부에 이양한다” 라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주권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이 모두 있어야 완전히 행사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행정권만 이양한다고 한 겁니다. 실제로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그때 선거를 못했습니다. 지금은 물론 다 선거에 참여하죠. 하지만 암묵적으로 인정한 상태일 뿐 주권을 넘겨받는 공식적 과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부 담당자한테 물어봤습니다. “오늘날 유엔사령관이 정전협정에 따라서 이 지역의 통제권을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을 때 대비할 대책이 있느냐”고 묻자, 금시초문이라고 하더군요. 심각한 일이죠.
한번만 이런일이 있었다면 문서상의 착오로 넘어갈 수도 있을텐데 또한번 유엔사가 ‘군사통제’란 ‘군사점령’이란 사실을 확인합니다. 1962년입니다. 비무장지대 안에는 두 개의 민간인마을이 있습니다. 북한의 기정동마을과, 남한의 대성동 마을입니다. 1959년에 주민이 입주한 마을입니다. 한 3년 동안 살다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요. 비무장지대는 유엔사령관의 허락 없이는 못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주권을 행사하고 싶어도 못 들어가니까 못하죠. 위 공문에는 이 지역 역시 유엔사령관의 ‘군사 점령’ 아래에 있는 곳으로서 행정권만 한국 정부에 양도한다고 돼 있습니다. 만약 이 마을에서 범죄가 발생한다고 해도 수사도 못하고 기소도 못해요. 실제로 판문점 유엔사경비대에 근무하던 김훈중위 사건을 보면, 한국경찰이 수사하려고 했지만 유엔사령부가 관할하는 곳이기 때문에 못 들어갔어요. 이것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자 들어가게 해 줬는데 이미 시신이 훼손돼서 수사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정전협정입니다.

작전통제권
우리가 정전협정에 대해 알아 가면서 더불어 한미연합사령부(연합사)와 유엔사령부(유엔사)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작전통제권 문제도 정전협정이 안고 있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넘겨 버리면서 시작된 문제인데요, 전시작전통제권을 2012년까지 환수하는 것으로 노무현 정부 때 얘기가 됐는데, 현 정부 들어서 환수시기를 연기하려는 움직임이 굉장히 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자는 논의가 시작될 때 제가 청와대 관계자를 만나서 “선 연합사 해체, 후 유엔사 해체”로 가면 안 되고 “선 유엔사 해체, 후 연합사 해체”로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드렸는데 아쉽게도 연합사 해체를 통해 환수하게 돼 버렸어요.
작전통제권이 우리한테 없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상상이 되나요?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알게 하는 일이 한국전쟁 때 두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1952년 발췌개헌 사건 때 이승만을 제거하려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이 작전통제권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작전명까지 만들어졌어요. “에버레디(ever ready)”라고, “항상 준비한다“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지시에 반기를 들고 독재를 일삼는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미국은 계속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이 이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습니다.
1953년, 정전협정을 맺기 전에 이승만은 국제적으로 정전협정 반대를 표명했습니다. 미국입장에서는 3년 동안 싸운 끝에 가까스로 정전협정을 맺기 직전까지 갔는데 이승만 때문에 다 물거품이 되고 다시 전쟁을 하게 생긴 거죠. 이때는 정말 심각한 수준까지 에버레디 작전이 검토되었습니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고 군사정부를 세운다는 계획까지 마련되었습니다. 에버레디 작전에 동원됐던 인물이 바로 박정희였습니다. 박정희가 나중에 진짜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성공하잖아요. 그것도 미군이 군사 통제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공하잖아요. 그것은 에버레디작전을 경험하면서 미군작전통제하의 구조에 대해 학습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이승만을 제거하고 군사 정부를 세운다는 계획으로 작전이 시행됐는데 막판에 운 좋게 이승만이 부활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잊혀진 얘깁니다만,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2010년 대한민국의 주권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절감하게 하는 사안입니다.
제가 “선 유엔사 해체”를 주장했던 까닭은 이렇습니다. 연합사를 창설한 게 1978년입니다. 왜 창설했냐면 1975년 유엔 총회에서 유엔사를 해체를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미국이 한국군을 손에 쥘 수가 없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만든 것이 연합사입니다. 이때 유엔사령관은 한미연합사령관한테 한국의 작전통제권을 위임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위임’이란 말이 중요한데, ‘이양’이란 말은 무언가를 주고받으면서 그것에 대한 권리가 완전히 이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위임’이라고 하는 것은 소유권은 가지고 있고 사용권만을 임시로 빌려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유엔사가 갖고 있던 작전통제권을 연합사가 넘겨받은 상황인데, 갑자기 유엔사령관이 위임했던 작전권을 다시 돌려받겠다고 하면 그냥 줘야 되는 상태입니다. 또 한미연합사령관은 유엔사령관을 겸직할 때에만 유효합니다. 그러니까 유엔사령관의 직책이 없으면 한미연합사령관이라는 직책은 자동으로 소멸하는 거죠. 사실 유엔사가 해체되면 연합사는 자동으로 해체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거꾸로 하는 바람에 분란의 여지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전쟁 주권을 가진다는 게 전시작전통제권환수 문제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전시작전통제권은 전시가 됐을 때에만 행사할 수 있는 작전통제권입니다. 하지만 전쟁은 대개 ‘평시’에서 ‘위기시’를 거쳐서 ‘전시’로 심화됩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위기시에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위기시작전통제권은 정전협정에 의해 아직까지 유엔사령관 겸 연합사령관에게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위기에 대해서 주권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유엔사령관한테 있는 겁니다.
위기시에는 현장에 있는 지휘관의 결정에 따라서 전투에 개입할지 안 할지가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벌써 싸우고 있는데 뒤늦게 대통령이 전투를 중지하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합니다. 위기 때 작전권을 발휘할 수 있을 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져오게 되는 것인데, 정전협정에 따라 이것도 유엔사령관이 가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무장지대에는 군사 문제, 토지 문제, 환경 파괴 문제 등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만 이 가운데 핵심적인 문제는 유엔사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가 풀려야 환경적인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10년 전부터 비무장지대를 환경지대로 만들자는 주장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하지만 하나도 된 게 없잖아요? 되기는커녕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문제를 풀기 위해서도 유엔사 문제를 풀어야만 합니다. 사진을 좀 보면서 이야기를 해봅시다.

정전협정의 틈 한강하구
(비무장지대를 볼 수 있는 슬라이드를 쭉 보시겠습니다. 군사 분계선입니다. 개성이 보이는 곳입니다. 뒤쪽에 보이는 산이 개성의 송악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판문점의 초소 모습.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에 나온 곳이죠?)

앞서 정전협정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정전협정을 잘 짚어보면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틈이 발견됩니다. 정전협정 1조 5항은 한강하구에 관련된 조항인데요. 정전협정에 따르면 세 개의 관리 구역이 있습니다. 육지, 강, 바다입니다. 사회과부도 책을 보면 한반도 허리에 빨간색으로 점선이 그어져 있죠? 이게 동쪽으로는 강원도 고성에서 끝나는데 서쪽으로는 어디서 끝나는지 기억나세요? 백령도 앞에서 끝납니다. 이 선을 보통 휴전선으로 알고 있죠. 서해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어나는 남북 사이의 충돌도 다 잘못된 이 지도 때문에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군사분계선, 그리고 그 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2킬로미터의 폭으로 형성돼 있는 비무장지대는 육지에만 있지 강과 바다에는 없습니다. 서울에서 자유로를 타고 가다 보면 통일전망대를 좀 더 지나서 산꼭대기에 배모양의 건물이 있는 유원지가 있습니다. 그 건너편 임진강하구 둑이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끝나는 지점입니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서 강화도까지 흘러갑니다. 육지의 비무장지대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유엔사령관의 허락을 받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한강하구부터 서해까지는 군사분계선이 없기 때문에 비무장지대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허가가 필요 없습니다. 정전협정 1조 5항에 한강 하구는 민간 선박 항해가 가능하다고 돼 있습니다.
제가 2000년쯤에 이런 사실을 알고 처음에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법적으로도 그게 맞는 거예요. 그래서 2000년 6월 25일에 여의도에서 뗏목을 띄워 가지고 한강을 타고 서해까지 가는 행사를 진행해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의 태도는 뜻밖이었습니다. 유엔사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거였죠.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모두 권한이 없다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2005년에 같은 행사를 다시 하게 됐습니다. 2000년의 경험으로 한국 정부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한국 정부 말고 유엔사령관을 바로 만나려고 했어요. 정전협정이 맺어진 7월 27일을 기념해서 하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유엔사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7월 7일에 전화가 걸려 왔어요. 유엔사담당자가 하는 말이 “당신들 이 행사를 독단적으로 할거냐, 유엔사와 함께 할거냐”라고 물어 보길래 “지금 당신 앞에 정전협정문 있으면 펼쳐서 1조5항을 읽어보라. 한강하구항행은 유엔사의 허가 없이 할 수 있다고 돼 있다”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책장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그러더니 “정말 그러네요?” 하는 거예요. 유엔사 직원조차도 한강하구에 대한 문제를 한 번도 주목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러고는 쌍방간에 침묵이 흘렀죠. 서로 수습이 안 되는 거죠.
한참 그러다가 우리쪽에서 먼저 말했죠. “허가를 받기 위해서 유엔사와 만날 이유는 전혀없다. 그러나 한강하구는 50년동안 남북이 대치해 온 곳이고 안전 문제도 있으니 유엔사의 ‘협조’를 받기 위해 사령관을 만날 용의는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유엔사측은 ‘허가가 아닌 협조를 받기 위해 만날 용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 상의 한 뒤 다시 연락주겠다.’고 하면서 끊었습니다. 대개는 미군기지와의 통화가 이렇게 끊기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새벽 7시에 연락이 왔고 ‘협조할 의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엔사로 찾아가서 사령관 바로 아래 유엔사 서열2위인 군사정전위수석대표 케빈매든대령을 만났습니다. 대령은 정전협정 1조5항을 우리에게 읽어주면서 “한강하구에서는 민간 선박 항해가 가능할 뿐아니라 너희들의 계획은 원더풀한 계획이다.”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빨리 얘기하고 나와서 그 사실을 보도자료로 배포했습니다. 정부에서도 확인하지 않았던 것을 민간에서 확인한 겁니다. 그때 행사 내용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었던 영상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서해가 되는 강은 조강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한강 하구입니다. 한반도의 모든 물길이 모여 어울리는 곳. 생태의 보고. 문명의 정점. 자연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명의 강. 전쟁 후 강화에서 서울에 이르는 강 양쪽에 철책이 쳐져서 ‘정치적 호수’가 됐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 한강 하구는 잊혀져 버린 듯합니다.)

비무장지대나 정전협정 문제는 아주 큰 문제죠. 천안호 사건 전까지 북한과 미국사이의 평화협정 체결분위기가 정점에 있었고 천안호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 흐름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평화협정이 미국과 북한 사이에 체결되는데 남한이 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비무장지대를 평화협정에 따라 평화지대로 만든다고 하면 누군가 그곳을 관리해야 할 것 아닙니까? 현실적으로 남북한이 하게 될 텐데, 만약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남한과 북한이 직접 이야기하지 못하고 미국에 물어보고의존하는 상황이 되면 복잡한 문제가 생기죠.
반대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될 경우에도 역시나 문제가 됩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가급적 북미 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지 않도록 분위기를 깨는 걸로 방향을 잡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를 비판만 하는 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죠. 10년 뒤 역사가 여러분한테 묻겠죠. “이명박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너희들은 뭐 하고 있었냐?” “우리는 열심히 비판만 했습니다” 하면 답이 될까요? 이것은 우리의 문제입니다.
대통령의 문제를 떠나서 한국이 평화협정이라는 틀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노무현 대통령 때 체결한 10 ․ 4선언 속에 있습니다. 평화 협정을 체결할 때 세 나라나 네 나라가 함께 참여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것만 성실하게 이행되면 이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건데, 지금 10 ․ 4선언은 휴지통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유라시아적 의제설정능력
평화협정 체제에 들어간다는 것은 남북 교류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고도의 정치적, 외교적 전략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북한은 핵이라는 카드를 던지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전 세계에 150개 정도 나라가 있다고 보면, 미국은 북한을 외교 순위로 볼 때 몇 위로 볼까요? 북한이라는 나라로만 볼 때는 한 140위 아래쪽이 되지 않을까요? 미국 사람이 볼 때 북한은 자기들이 싫어하는 공산주의 국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미국 사람들이 아주 싫어하는 스타일이잖아요. 그래서 외교적으로 관심가질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북핵 문제가 터지니까 단번에 1위가 됐죠. 누가 세계적 차원의 의제를 틀어쥐는가에 따라 순위가 바뀌는 겁니다.
의제설정능력이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일제한테서 해방됐을 때 민족 지도자들이 많았잖아요. 그 지도자들 가운데 의제설정능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을 뽑으라면 여러분을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김구,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이승만 다섯 명 정도를 생각해보죠. 저의 사견임을 전제로 해서 말씀드리면 저도 참 좋아하지 않는 인물입니다만 이승만이 가장 위력한 의제설정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한테는 반공이라고 하는 의제가 있었습니다. 반공이라고 하는 의제는 한반도적 의제인가요 아닌가요.? 한반도를 넘어서는 유라시아적 의제였습니다. 우리는 민주화라는 의제도 겪어 봤지만 그것은 남한만의 의제입니다. 통일이란 의제도 한반도차원의 의제입니다. 반공이라는 의제가 갖는 범위를 우리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승만과 반공이라는 의제는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강력합니다. 반공이라는 것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것을 능가할 만한 의제는 아직까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항할 수 있는 의제가 유일하게 있습니다. ‘친일파’문제이지요. 하지만 반공을 넘어서기는 어렵습니다.
김정일의 북핵이라는 의제는 한반도적 의제 인가요 아닌가요? 한반도를 넘어서는 의제이죠. 유라시아적 차원의 의제입니다. 그것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북한’이란 의제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던 미국이 ‘북핵’이라는 의제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죠. 미국은 ‘북핵 문제’만을 해결하고 싶은 거고 북한은 북핵 문제를 통해 ‘북한 문제’까지 해결하고 싶은 거죠. 이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각 아니겠습니까? 북핵 문제만 떼어 놓고 생각하느냐, 북한 문제까지 가져가느냐, 그 사이에서 북미 사이에 긴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북핵이라는 유라시아적 의제를 통해 북한과 미국이라는 양 당사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평화협정의 장까지 오게 됐는데, 그럼 남한은 어떤 의제를 던져야 할까요? 어떤 의제를 던져야 유라시아적 의제로 부각을 시킬 수 있을까요? 무엇을 가지고 평화협정의 장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남북 교류 같은 것들은 전략적으로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북미 간의 관계를 뛰어넘을 만큼의 힘을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볼 때는 가장 쉽고 빠르게 활용할 수 있는 게 ‘유엔군사령부해체’입니다. 유엔 총회에서 새로운 결의를 만들어서 하는 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지만 이미 통과된 안을 시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죠. 1975년에 유엔사 해체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때 통과된 결의를 이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민간에서도 캠페인을 통해서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정부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어차피 유엔사가 해체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미리 선수를 쳐서 유엔사문제를 의제로 던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정도 유라시아적 의제설정능력을 보일 때 평화협정 당사자로 당당히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최소한 남.북.미 세 나라가 같이 평화 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거죠. ‘유엔사 해체’가 어차피 막판에 우리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질 사안이라면 미리 주동적으로 ‘유엔사해체이행요구결의’를 당겨서 쓰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갖도록 정부를 설득해야겠지요. 문제는 그런 의제를 민간이 주도해서 남쪽 정부에 제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비무장지대는 우리한 큰 상처를 안겨 주기도 했지만 더불어 큰 가능성도 안고 있습니다. 남들이 가기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주제이지만 확 끌어안고 살펴보면 그곳에 평화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비무장지대에 대한 관심은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성찰을 통해 새로운 큰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씨앗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