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미학 2009/10/09 297
2009년 10월8일 조계종민족공동체추진본부가 주최한 ‘금강산관광 어떻게 볼것인가?’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다른 작업을 하던중이라 발제문을 쓰는 것은 부담스러웠지만 항상 제 마음속에 생각해오고 있던 화두여서 이번 참에 시론이라도 써보자해서 일주일 작업했습니다. 금강산미학은 오래전부터 말로는 해왔지만 글로 쓰기는 처음입니다. 촉박하게 쓴 글이라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원고지185매 분량인데 용두사미입니다. 시간에 쫒겨 뒤로 갈수록 허술해졌습니다. 그래도 이 분야를 고민하시는 분들과 같이 연구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내놓습니다.
금강산 미학
들어가는 글
6.15선언에서 남북의 두 지도자는 금강산여행에 합의 했다. 한반도에 수많은 산이 있는데 왜 굳이 금강산이이었을까? 너무 당연해서 질문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생각되는 질문일 만큼 금강산이 ‘민족의 명산’이란 암묵적 합의는 남북에 공통된 것이다. 금강산이 민족의 명산이 된 데에는 사람과의 관계인 역사적 자취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산과 달리 금강산은 금강산미학이라 할 수 있는 관념이 신념을 형성하고 있기에 민족의 명산이 될 수 있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금강산미학을 새롭게 발전시켜 우리시대 통일미학의 한 기준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왔으나 다른 글쓰기 순위에 밀려 몇 년뒤에나 가능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 토론문을 제안받았다. 다른 글을 쓰고 있는 중이라 극구 피하려 했으나 시론적인 성격의 글이나마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금강산여행이 우리 통일의 과정에 끼치는 역할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미학은 근대에 발생한 학문이므로 고대와 중세에 지금과 같은 미학적사유가 분리 독립되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근대이전의 문화가 그렇듯이 종교,철학,과학,미학등이 미분화한 채로 혼융되어 나타나는 것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금강산을 주목한 신라불교와 조선유교사상문화를 미학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이 시도한 방법이다. 이러한 분석은 앞으로 새로운 금강산 미학을 만들기 위한 교훈과 원리를 얻기 위함이다.
금강산은 역사적으로 크게 두 번 미학적 세례를 받았다. 금강산이란 이름이 붙여진 신라시대와 조선중기노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조선풍건설운동시기이다. 이 두 시기에 금강산미학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중국의 침략과 긴장이라는 외부적 요인과 이에 대항하여 국내의 사상과 문화를 새롭게 건설하고 결집시키려는 내부적 요인이 작용했다. 그나마 독자적인 사상문화를 건설할 역량이 성숙되었기에 이것은 가능했다. 두시기 모두 금강산은 그 시대의 요구에 답하여 새로운 미학적 기준을 세우는 소재가 되었다. 소통에 성공했으며, 이를 통해 금강산은 민족의 명산이란 합의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강산 미학의 발생, 발전과정과 그 시대적 역할을 살펴보고 다가온 통일시대에 금강산미학을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기 위한 시론정도로라도 참고가 된다면 글 값을 하는 셈이다.
신라시대 금강산미학의 출현
배경
진평, 선덕왕대에 고구려 백제 양국의 신라침공은 극에 달하였다. 진평왕대에 대고구려전투가 5회, 대 백제 전투가 10회, 선덕왕대에는 대 고구려 전투가 2회, 대 백제전이 3회 정도 나 있었다. 이즈음 신라의 대당외교는 자구책에 불과하였고, 결국 통일대업을 성취하지만, 통일 후 당나라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통일국토 수호와 완성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라인의 새로운 신앙 및 가치관이 필요한 때였다.
신라불국토설
이러한 시대적 요구 앞에 등장 한 인물 중에 우선 자장(慈藏)의 ‘신라불국토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 조를 보면 자장은 중국 오대산에서 법을 받은 뒤 문수진신으로부터 신라왕이 천축 찰리종(刹利種)으로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여타 동이족과는 다른 인연이 신라에 있음을 들었다. 이른바 신라불국토설이다. 진골귀족으로서 재상의 물망에까지 오른 그는 국가의 장래에 대한 호국(護國)의 문제도 고민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호국사상은 신라불국토설로 집약되었으며 특히 황룡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가 태화지변을 경유하다가 신인(神人)에게 적국들에 둘러싸인 신라의 사정을 털어놓으니 신인은 “여자가 왕인 신라는 위엄이 없으니 신인의 장자인 호법용이 사는 황룡사에다 9층탑을 세우면 구한(九韓)이 내공(來貢)하리라” 하였다. 이것은 곧 자장이 세운 삼국통일의 염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자장은 신라불국토설의 제창자이자 완성자로 볼 수 있다. 또한 왕법과 불법을 일치시킨 이론의 완성자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일생동안 신라불국토설을 믿었고 이 종교적 신념은 곧 신라인의 긍지로서 계속 존속하였다. 그러나 신라불국토설은 당시 불교공동문명권으로부터 인정받은 논리가 아니라 신라에서만 소통되는 논리였다. 삼국유사 이외에 중국이나 인도등 어떤 문헌에도 이를 인정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국내용 의제에 머물 수밖에 없는 주술적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자장이 받았다는 문수보살의 가르침 중에는 “(신라는) 산천이 험준하여 사람들의 성품이 거칠고 어그러져 사견(邪見)을 많이 믿기 때문에 간혹 천신이 화를 내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장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종교인으로서의 자장은 신라인의 사견을 어떻게 불교화시키느냐 하는 호법(護法)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이는 계율의 생활화 문제로 나타났다. 조정에서는 불교가 신라에 들어온 이래 규범이 부족하여 숙청할 법이 없음을 건의하므로 선덕여왕은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명하였다. 이는 국가의 규율을 바로 잡으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반월설계(半月說戒), 즉 스님들이 회합하여 지난 15일간의 행위를 자기반성하며 죄가 있으면 참회 고백하고 겨울과 봄으로 스님들을 모아 시험을 쳐서 지계(持戒)와 범계(犯戒)를 알게 하며, 순사(巡使)를 보내어 각 절들을 두루 점검하여 승려의 과실을 깨우쳐주며, 경상(經像)을 엄격히 꾸미는 것을 법으로 삼았다. 그것은 마치 공자가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오자 악(樂)이 바로잡혀 아(雅). 송(頌)이 제대로 되었던 것과 같다고 하였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백제에서도 성왕으로 대표되는 계학이 성하였다. 법왕이 살생을 금하고, 가축을 방생하고, 수렵도구를 불사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백제의 불교계율이 실생활과 조화되지 못하고 급기야 불교가 일상을 위축시켰던 형식주의적 계율관으로서 신라와는 대조를 이룬다. 어쨌든 이같은 계율의 생활화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일반사회의 도덕률과 미적기준을 세웠다는 데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결과만을 문제 삼으며 선악에 관계없이 그 신성만을 유지하던 것이 신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금기의 배후에 있는 동기를 문제 삼으며 미신들 속에서 종교의 새로운 성격을, 즉 생에 대한 윤리 및 도덕적 해석을 새롭게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의 전체생활은 정의를 위한 부단한 투쟁으로서 신화세계의 정서적인 면이 이성적인 면으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공포와 위험, 거기서부터 나오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생활이 적극적인 종교적 감정으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계율 확립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자장이 신라에 끼친 정치적인 의의 뿐 아니라 신라인의 윤리.도덕상의 변화를 가져온 의의에 대해서는 인색하지 않은 평가가 이루어지나 계율의 생활화가 동반한 미학적 의의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은 편이다.
유가의 예와 불가의 계는 같은 성격의 것으로, 그 사회적 기능은 상하존비의 통치체계를 비호하는데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 문화형식의 표현은 사람의 감성행위. 동작. 언어. 정감에 대해 규범과 질서를 준수하게 하는 것으로 C. Geertz가 말한 자바 원시민족의 호흡통제와 같은 것이다. 계란 구체적 사실을 설명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설명하면 오히려 계의 중요성이 상실되므로 공통적이고 대표적인 상징을 취한다. 또한 계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하고, 단정적인 금기로 행동을 통제한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율이 사람의 신체활동과 외적환경을 주재하고 규범화하고 제약하는 동시에 사람의 내재심리(정감,이해,상상,사고)에 대해 거대한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자장사상의 두 축인 호국과 호법은 신라불국토설과 계율의 생활화로 통일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화엄사상
화엄은 한문문명권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다. 그 근거가 되는 화엄경은 용수(龍樹:나가르주나)가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경전이다. 그런데 일부분인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는 것만 산스크리트본으로 남아있으며 나가르주나가 주해를 했다. 화엄경 전편은 나가르주나 사후 250년에서 350년 사이에 코오탄(于闐;신강성중심의 西夷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에서 편찬되었다고 추정된다.
팔만대장경중 가장 최고위 수준의 경전이라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크게 두 번 번역되었는데 첫 번째로 남조 송 무제 영초(永初)2년(421)에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359~429)에 의해서 60권으로 번역되고, 두 번째로 당 중종 16년 성력(聖曆)2년(699)에 실차난다(實叉難陀, 652~710년)에 의해서 80권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불타발타라번역의 60권을 본 ‘대방광불화엄경’을 ‘구역화엄경(舊譯華嚴經)’ 혹은 ‘구화엄경’이라하고 실차난다 번역의 80권 본을 ‘신역화엄경(新譯華嚴經)’혹은 ‘신화엄경’이라 부른다. 그런데 당나라가 수나라의 천하통일을 계승하여 중국대륙 전체를 통치하는 대제국으로 발돋움하면서 화엄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의지하는 바의 경전 즉 중심경전)으로 하는 화엄종을 주도이념으로 삼으려 하니 화엄경이 일반지식층들 사이에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결론짓자면 인도에서 이미 화엄경을 구성하고 있는 십지경이나 입법계품등이 유포되어 있긴 했으나 이 경들을 모아 편찬한 대 화엄경은 아직 없었는데 중앙아시아 코오탄에서 비로소 현존하는 화엄경이 편찬되었다. 신지앙위구르 자치구는 티엔산남로 서역남도의 세 길이 통하는 곳이었다. 코오탄은 티엔산남로의 도시로 한때는 대단한 불교도시였다. 서북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 전해진 화엄경의 여러 단편이 여기서 모아져 편찬되었고 그것이 서역을 통해 츠앙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에 전래되고 그 후 지엔캉(建康;지금의 남경)에서 중국어로 번역된 것이다.
401년은 불경대번역사업을 맡게 될 구마라습이 츠앙안(長安)에 오는 때이다. 그가 묘법연화경을 번역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제일 공을 들인 분야는 역시 용수(나가르주나)의 불교이다. 공(空)을 설하는 용수의 불교, 그 가운데서도 경으로는 금강반야경, 논으로는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대지도론(大智度論)을 직접 번역했다. 구마라습의 번역을 통해 비로소 ‘공’의 철학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인이 공의 철학을 이해할 바탕은 이미 동진시대에 중국사상계를 풍미하고 있던 노장의 무(無)사상이 미리 마련해 두고 있었다. 아무튼 무와 공을 동치시켜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면서 당시 당나라의 불교는 공[般若]사상, 반야학의 융성을 자랑하던 시기였다. 특히 남쪽의 동진에서 지둔(支遁)이라는 학자가 나타나 반야학을 집대성시켰다.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화엄사상을 체계화하고 화엄종을 일으킨 사람은 중국의 지엄(智儼; 602~668)이다. 신라의 승려 의상(義湘;625~702)은 중국에 가서 바로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스승의 교학에 동참했으며, 지엄의 후계자인 법장(法藏;643~712)보다는 선배이다. 화엄종의 대성자로 법장을 꼽는다. 화엄 1조 두순의 화엄교학은 ‘반야계화엄’ 2조 지엄은 ‘유식계화엄’으로 파악하고 나면 3조 법장의 임무가 분명해 지는데 유식계화엄과 반야계화엄의 통합이 법장의 사상사적 과제였던 것이다. 법장은 반야계화엄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구마라습이 번역한 용수의 십이문론에 나름대로 주석을 달아 ‘십이문론종치의’를 지었다. 지엄,의상,법장이 함께 정립한 화엄철학은 산스크리트문명권에서 받아들인 불교사상을 한문문명권에서 재창조한 성과 가운데 특히 뛰어나 중국, 한국, 일본에서 크게 숭상되고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중세전기 나가르주나가 산스크리트를 철학의 언어로 가다듬은 데 상응하는 업적이 동시대의 한문문명권에는 없었다. 그런데 산스크리트문명권의 전례를 한문으로 옮기면서 한문특유의 어법을 활용해서 두 문명권의 장기를 합치는 과업을 화엄학자들이 앞장서서 수행해 열세를 만회 할 수 있었다. 지엄과 법장은 화엄경 주석, 철학적 논의를 체계화한 논문, 의문을 풀어주는 문답등 다양한 방식으로 길게 썼다. 그렇게 하는 동안 체계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내용이 너무 번다해졌다. 지엄과 법장은 그런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 길게 말한 것을 요긴한 대목은 찾아 간추리려고 거듭 노력했으나 요약본을 본 다음에는 다시 상세본을 보아야하니 번거로움이 더해질 따름이었다. 그런 형편을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적극적이고 획기적인 대책을 의상이 맡았다. 산문을 버리고 시를 써서 한마디에 수많은 말을 압축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시는 산문저술의 요약본이 아니고 독자적인 창조물이므로 시를 읽고 나서 다시 산문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엄과 법장이 주석,논문,문답등의 산문을 사용한 것은 동아시아의 전통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상은 나가르주나처럼 철학시를 썼다. 화엄일승법계도가 그것이다.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로 광대한 화엄경을 겨우 210자로 압축하여 이것을 행도하면서 읊는 실천행으로 전환시켰다. 화엄경의 실천을 목표로 했다는 점이 신라화엄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의상은 법계도를 통해 논리를 도형으로 시를 수학으로 구현하는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이로서 화엄경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외우며, 뜻을 새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교학의 대상이었던 화엄이 미학적 대상이 된 것이다.
자장등을 평하면서 ‘신라인의 불교를 논함에 있어 그 주체가 되는 신라인과 신라사회를 간과하고 중국불교의 종파를 지나치게 의식할 때 신라불교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말은 충분히 일리 있으나 그것은 한편으로 불교공동문명권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중국에는 본시 우주적 시야에서 사람을 보는 장자의 철학이 있었다. 장자의 제물론은 만물일체의 사상을 펼치고 있다. 장자 제물론의 사상과 인도적 사유의 전형인 화엄경의 사상이 훌륭히 결합하여 맺은 결실이 중국 화엄종이다. 국제도시 츠앙안과 서역과의 문화교류가 극히 성했던 당대에 화엄종은 코스모폴리탄을 지향한 사상이었다. 자장의 오대산신앙이 당시 불교공동문명권에서 일정한 합의에 기초했다는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불국토론은 신라에서만 통하는 주술적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는 불교공동문명의 성과를 집약했을 뿐아니라 미학적 접근을 통해 전혀 새롭게 재창조했다. 신라는 불교사상의 독자에서 저자의 위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불교공동문명을 받치는 기둥으로 뚜렷이 설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기독사상의 방대한 논리를 단테가 예술적 형식을 빌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전혀 새롭게 전개함으로써 르네상스의 길을 연 것과 비견될 만하다.
의상은 국왕의 명을 받들어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그 가운데 최초이고 가장 중요했던 일이 화엄십찰의 건립이었다. 십찰이 섰던 장소는 모두 적의 침입루트였다. 거점으로 쓰일 곳을 확보하면서 그대로 군사시설로 전용시킬 수 있게 가람을 세운 것이다. 모두 국토방위를 위한 초석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 중기의 불교는 국가차원에서 볼 때 호국의 염원과 계행戒行의 정착이라는 이대조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중기의 사상적 과제는 자장대에 거의 일단락되고 그 이후의 승려들은 불교사상적으로 세간과 출세간의 분별을 넘어서는 단계에 들어선다.
일본 학자중에는 신라불교의 특징으로 국가성과 주술성을 들고 이것은 반도조선의 특이한 운명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경향은 신라만의 특수한 경우이기 보다는 종교자체가 사회의 상부구조로서 갖는 보편적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예는 중국에서도 발견된다. 당나라 현장의 법상종은 당의 태종, 고종시대에 비호를 받은 학문이었다. 이데올로기라느니 어용학문이라느니 하는 평을 들었다. 측천무후 시대에 이르러 그때까지 당왕조가 보호했던 법상종을 넘어서는 학문이 요청되었다. 의상대사를 종형으로 부르던 법장이 그 기대에 부응해서 나타났다. 법장은 할아버지가 강거국(康居國) 사마르칸드 출신이라서 중앙아시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피를 받고 츠앙안(長安)에서 살고 있었던 까닭에 법장은 중국뿐이니라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무후는 장안의 이름 높은 고승 법장을 궁중에 불러 화엄경을 강의하게 했다. 현존하는 팔십화엄경의 서문 ‘대방광불화엄경서’는 무후가 쓴 것이다. 법장은 금으로 뒤덮인 사자에 비겨 화엄의 십현문(十玄門)을 해명하는 ‘금사자상’을 측천무후를 위해 지었다. 무후가 루어양(洛陽)에 대불을 만들고자 한 것도 국가권력의 품으로 불교를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였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불교는 지배자의 권위를 확립하고 민중을 주술로 묶어 놓고자 할 때 큰 사원이나 대불상을 건립했다. 또한 역대왕조 가운데 북위(北魏)는 가장 적극적으로 불교를 정치지배도구로 이용했다. 윈깡(雲崗), 롱먼(龍門)에 석굴 사원을 지었는데 윈깡의 다섯부처는 당시 북위 황제의 얼굴을 본떠 만든 것이었다. 황제가 곧 여래임을 과시했으며 지상의 최고권력자인 황제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불교를 이용했던 것이다.
화엄경의 사상은 밀교와 결합하기 쉽게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요.금시대에 이미 화엄과 밀교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결합했다. 산시성(山西省) 따통시(大同市)에 있는 상하화엄사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데 요대인 11세기에 건립되었다. 화엄과 밀교와 북방 샤머니즘이 혼연히 융합한 결과 화려하고 장엄한 불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신라의 화엄사상 역시 실천행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그런 과정에서 밀교와 긴밀히 교섭했음이 관찰된다. 그러나 불교공동문명권에서 화엄종이 가장 오래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 한반도였던 것을 보면 밀교가 그 자리를 쉽게 교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화엄종내에서 밀교를 재해석하며 끌어안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밀교사상
7세기 시작된 밀교신앙의 만다라는 불법과 수행과 감성의 일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미학적 의의가 크다. 밀교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大日如來)을 중심으로 한 태장계와 금강계의 수행법을 닦아 익히면 이 육신 자체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누구나 입으로 진언(眞言)을 염송하고 손으로 결인(結印)을 하며 마음으로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신(身), 구(口), 의(意)의 삼밀만다라를 행하면 중생의 삼밀과 부처님의 삼밀이 서로 감응일치하여 현생에서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에 “또한 제불의 비밀스런 곳은 신밀(身密)․ 구밀(口密)․ 의밀(意密)이다”라는 교설이 이미 있었으나, 불교의 경전중에서 삼밀의 활동상을 만다라화하고 그것을 불신으로 간주한 것은 ‘대일경(大日經)’이 성립된 이후의 일이다. 중국에서 선무외삼장과 일행이 대일경(大日經)을 번역한 것이 725년이었고, 불공(不空)이 금강정경(金剛頂經)을 번역한 것이 753년이었다.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의 밀교사상을 잡밀(雜密)이라하고 그 이후의 것을 순밀(純密)이라 한다. 인도밀교의 두 형태 중 중국에 먼저 전래된 것은 잡밀계통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잡밀이 수용되었다. 7세기 초에 신라에 전래되었으며 8세기에는 순밀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신라밀교는 이론이나 교학적인 발전보다는 실천수행면에 치중되었다.
밀교수행법인 삼밀만다라행이란 삼밀체득을 위한 수행법이자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편수법이다. 그것은 법신의 본체인 일체지지로부터 유출된 우주적 만다라를 수법(修法)체계에 필요한 크기로 응축하고, 상징화하여 수법에 활용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수행자가 지닌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규범에 따라서 도식화한 의궤만다라를 건립하고, 그것을 통하여 무한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만다라이고, 그것을 수행자가 수법에 활용했을 때 만다라행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만다라는 본질적 만다라가 의궤화 된 것을 가리키며, 수행자가 자신의 한계적 상황인 신체와 음성과 사고를 통하여 부처와 일체화시켜갈 때 삼밀만다라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의궤만다라는 우주와 불법을 상징화한 것이자 수행의 도구라는 점에서 단순히 현실의 재현이나 표현일 뿐아니라 현실의 생활 자체로 환원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 모형이론의 원리에 정확히 부합한다. 마치 작전지도는 현실의 모형이지만 그 자체는 현실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어 정물화처럼 감상되는 것이 아니라 이용되는 것이다. 만다라 또한 현대적 미학의 원리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신라밀교는 독자적인 발전보다는 정토신앙, 화엄신앙, 천태종, 선종등과 밀접히 관계하며 발전하였다. 특히 신인비법(神印秘法), 사리탑신앙, 오대산신앙, 소재활동(消災活動)등을 통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풍수사상
중국의 풍수이론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서였다. 하나는 삼국시대 초기 고구려를 통한 유입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통일 전후시대에 신라나 백제의 해안 쪽으로 흘러들어온 것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중국의 풍수이론은 동진(東晋)의 곽박(郭璞)이 저술한 ‘장서(葬書)’ 20권으로부터 확립되었다. 북쪽으로부터 유입된 풍수론은 방위법(方位法)으로 흔히 알려진 종묘법으로 추정된다. 이는 복건지방에서 시작되었고 그 기원은 멀리 소급되지만 송조(宋朝)의 왕급(王伋)에 이르러서 널리 퍼진 풍수법이다. 이 이론은 행성 즉 오행과 괘를 강조한다. 또 하나 남으로부터 유입된 풍수론은 흔히 형세법(形勢法)이라 일컬어지는 강서법(江西法)인데 이것은 지형과 지세를 강조하며 그에 의해서 위치를 결정짓는 식이다.
북방 유입풍수를 방위법 즉 좌향을 중시하는 풍수론으로 추정하는 까닭은 이 이론이 주로 고구려 백제 등지의 고분에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등의 사신도를 증거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며, 남방유입풍수를 강서법 즉 산수의 형세와 지모를 강조하는 풍수지리였을 것이라 추단하는 것은 이것이 나말여초에 국역과 도읍의 지리적 입지를 판단하는데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도선(827~898)국사의 풍수방법론은 그의 시대나 출생, 그가 남긴 업적으로 보아 강서법을 한국의 자생적 풍수사고에 접목시킨 결과로 추정되는데 강서법의 전래는 도선의 시대에 처음 된 것은 아니고 신라통일 이전인 진평왕대에서 진덕왕대에 이르는 사이에 들어왔다고 보여진다.
첫째의 이유는 당의 건국이 진평왕대이고 그 뒤부터 신라에는 당의 문물이 크게 들어오게 되었으며 또 노자가 당실(唐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설과 또한 풍수설이 당대(唐代)에 가장 성행했었다는 사실등을 꼽을 수 있다.
둘째로 신라의 왕릉 중 그 위치가 가장 확실한 것이 제29대 태종무열왕릉인데 이 릉이 풍수론상 길지에 해당하는 곳이며 특히 오늘날 김유신묘로 지칭하고 있는 장소는 풍수상 가장 좋은 혈형국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근거는 경주 초월산(初月山)에 있는 숭덕사 비문에 풍수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선의 풍수론은 한국풍수의 초기였던 만큼 방위에 치중하는 풍수처럼 정교하고도 사변적인 이기설에 도치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도선의 풍수사상에 대해 지금까지 음양오행이나 도참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도선의 풍수사상적 연원과 근저는 밀교에 있었다. 따라서 도선의 풍수사상을 오대산 산천만다라의 영향이란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오대산만다라
오대산은 정토사상, 화엄사상, 밀교사상등이 미적원리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대산신앙의 시작은 자장이다. 자장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꿈에 한 스님으로부터 산스크리트어 게문을 받는다. 그 승은 ‘비록 만교를 배울지라도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했으며 이어서 신라 명주땅에도 문수가 상주하는 오대산이 있으니 가보라고 하였다. 자장은 그 승이 문수진신임을 태화지(太和池)의 용(龍)으로부터 전해 듣는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설정한 오대산신앙과 행적을 보면 그가 중국오대산에서 보낸 기간이 그의 불교신앙을 평생 좌우했음을 알 수 있다. 자장이 화엄의 영지인 오대산에 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거기서 득도한 것은 몇마디의 진언이었다. 자장을 이은 보천(寶川) 효명(孝明)등 후대들에 의하면 화엄신앙과 밀교적 진언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고, 이들이 자장이 감득한 진언을 화엄교리로 이해할 소지는 다분히 있다.
또한 불국정토론과 밀교의 교섭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불국사를 들 수 있다. 신라 화엄불교의 상징적 구조물 중에 불국사가 있다. 불국사는 이름 그대로 불국토에 세워진 사찰이다. 최치원은 일찍이 화엄불국사아미타불화상찬에서 ‘동해 동산에 아름다운 절이 있으니 명호가 화엄불국이다.(東海東山有佳寺 華嚴佛國爲名號)’라고 읊고 있다. 신라가 화엄 불국토라는 사실이 최치원의 시대에는 보편적인 인식이었음 알 수 있다. 이같은 불국토론의 대표적 유적인 불국사가 밀교와 교섭한 증거로써, 불국사 역시 오대산과 유사한 오방불 사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574년(진흥왕 35) 중창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모셨다고 했다. 그것이 오늘날 비로자나를 모신 비로전과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안양문, 극락문, 극락전이라는 건축물로 남아 있다. 또 고금창기에는 관음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1969-73년 문공부 발굴조사와 복원공사로 극락전 무설전과 함께 관음전이 복원된 바 있다. 그리고 고금창기에는 지장전이 있었다 하니 바로 오대산 화엄만다라와 같은 구조가 된다. 정확한 방향은 아니지만 중앙의 비로, 동 관음, 남 지장, 서 미타, 북 석가의 구도이다. 나아가 비로전을 가운데 두고 회랑을 둘렀으니 양계 만다라, 특히 금강계만다라의 구획이라는 형식적 요건을 갖춘 것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5방에 5불을 배치하고 다섯가지 색을 배대하여 5원의 복전을 둔 것은 모두가 순연한 밀교수행법의 하나요, 신라 특유의 만다라 체계인 것이다. 오방불의 배치법은 밀교나 밀교이외의 전통적 만다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것이다. 오대산과 불국사에 공통으로 영향을 준 신라인의 보편적인 공감대가 정토사상과 화엄밀교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오대산, 불국사와 마찬가지로 금강산에서도 우리는 비로자나를 중심으로 동 관음, 남 지장, 서 미타, 북 석가의 오불에 의한 만다라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밀교의 특징은 교리적 측면에서의 발전보다는 실천이 강조된 점에 있고 실천에서도 밀교 본래의 출세간적인 즉신성불의 목적보다는 병을 고치고 전쟁을 막는 등의 세간적인 목적달성을 위하여 신앙되었던 점이다. 오대산 신앙은 적멸보궁의 기도처인 중대 진여원에 문수부동의 니상을 모시고 황지에 그려진 비로자나불의 36화형으로 집결된다. 그리고 화엄경 전독과 문수예참을 행할 수 있는 화엄사를 결성하고 있으므로 740년경 보천이 오대산 사상을 체계화할 때 당시의 가장 이상적인 사상으로 생각되었을 화엄의 문수신앙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토속신이 와서 보천에게 수계까지 받았다는 기록은 민속신앙이 밀교에 포섭되는 한 실례이기도 하다.
화엄의 문수신앙은 그 자체가 밀교화 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 이미 중국에서의 이러한 밀교화는 진행되고 있었다. 720년경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진언종의 6조 불공금강(不空金剛;Amoghavajra 705-774)이 제자인 함광과 함께 오대산 신앙을 펼치고 있었다. 746년 다시 그가 중국에 오자 현종이 귀의하고 관정(灌頂), 즉 정수리에 물을 부으며 계를 받았다. 그런 만큼 화엄밀교화에 있어서 불공금강은 막강한 영향력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신라에서는 명효, 의림 등 밀교승이 당나라의 밀교사조를 직수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740년경 오대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보천의 화엄문수신앙이 밀교화 할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화엄과 마찬가지로 태장계, 금강계 밀교 역시 중국과의 접촉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계 밀교는 이미 불교공동문명권의 큰 기둥으로 성숙한 신라의 화엄과 화엄선, 그리고 화엄밀교를 밀치고 충분한 영역을 확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오대산에 자장이 처음 초암을 지을 때인 636년이나 보천 효명이 진여원을 창건할 무렵인 성덕왕 4년 705년에 오대산에서 양계 밀교사상이 자리잡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금.태 밀교경전의 결집 자체가 자장과 보천 후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밀교의 중요경전이 결집된 것은 650-7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 본격적으로 밀교가 조직화된 것은 대일경, 금강정경이 번역된(725~753년) 이후의 일이라고 본다. 그렇게 보면 오대산 만다라와 금강계 만다라의 유사점은 수직영향관계라기보다는 대등관계일 수 있다. 그것은 문수사상의 화엄밀교적 성격에서 추론될 수 있다.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文殊師利法寶藏陀羅尼經)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파가범婆伽梵 부처가 정거천궁에 있을 때 세존이 금강밀적 보살에게 말하였다. “내가 멸도한 후 섬부주의 동북방에 나라가 있어 대진나大辰那라 이름한다. 그 국토 중에 산이 있는데 오정五頂이라 부른다. 문수사리동자가 유행거주遊行居住하면서 제중생을 위해 설법중이다.
비로자나불의 자내증으로서의 공덕법신인 문수사리보살이 변화법신으로 나타난 것이 문수동자이다. 문수동자는 화엄과 밀교를 관통하여 청정만다라, 가람만다라, 산천만다라 사상체계의 뼈대를 형성한 오대산 문수신앙의 주역이었다. 또한 그 만다라 사상의 핵심을 신앙화하고 천년 불교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 신라의 화엄밀교였던 것이다.
신라시대 금강산미학의 탄생
화엄종 초조(初祖)인 지엄(智儼,600~668년)화상으로부터 화엄종지(華嚴宗旨)를 가장 먼저 전수받고 신라로 귀국하여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된 의상(義湘,625~702년)대사는 통일된 신라왕국을 화엄종지로 다스려나가도록 유도한다. 이미 신라사회는 신라불국토론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의상은 불교공동문명권의 사상적 지도자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것이 여타 대승들과 의상이 다른 조건이었다. 화엄십찰을 세우는 과정에서도 의상은 당시 신라사회의 공통여론인 불국토론을 수용하고 또한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서 열거한 보살 중 문수보살의 현재 주거처가 강원도 강릉부근의 오대산이라는 것은 이미 주장되고 있었다. 다른 보살들의 주거처를 찾아내어 불교공동문명권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의상의 과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의상대사는 통일신라왕국이 바로 화엄불국토라는 사실을 현실로 확인시키기 위해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얘기한 관세음보살의 현재 주거처인 보달락가(補怛洛迦,Potalaka)산을 강원도 양양해변에서 찾아내어 671년 그곳에 낙산사를 짓는다.
금강산은 법기보살의 주거처로 인정되어 명명된 것인데 그것이 언제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금강산이라는 산 이름이 처음 경전에 등장하는 것이 ‘신역화엄경’ 권45, 제보살주처품이다. 신화엄경의 제보살주처품에는 동북방 청량산 다음에 해중 금강산을 열거하고 거기에 법기보살이 거처하며 1,200명의 권속을 거느리고 지금도 반야에 관한 설법을 한다고 하였다.
이 ‘신역화엄경’의 번역이 끝난 것이 의상대사가 돌아가기 3년전 일임을 감안한다면 의상대사 이전에는 이런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당시 신역화엄경은 의상의 제자 연배의 후진인 실차난다가 번역하고 있었고, 법장은 실차난다가 ‘신역화엄경’을 번역할 때 53세의 화엄종주라는 존엄한 지위에 있었음에도 이를 한문으로 옮겨 쓰는 일을 5년 내내 자신이 직접 맡아 끝마친 겸허하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법장은 의상을 종형으로 깎듯이 대우하였는데 자신의 저술을 완성하기 전에 의상에게 편지를 보내 교정을 부탁할 정도였다. 편지를 읽으면 법장이 의상에게 표한 경의의 심도를 가늠할 수 있다. 37세 혹은 38세 때 법장은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이라는 불교개론을 썼다. 그것을 의상에게 보내며 동봉한 편지에서 ‘형제자께서 신라에 돌아가 계시니 글로 아룁니다. 책을 하나 짓긴 했지만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함께 부치니 읽어보시고 일일이 고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신라 유학승인 승전(勝詮)이 츠앙안에 있었는데 법장은 승전이 귀국할 때 편지와 책을 의상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의상은 편지와 책을 고맙게 받았노라고 회신을 보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의상대사가 봉래산을 금강산으로 확정하는데 법장의 동의를 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법장의 화엄종통을 이은 청량(淸凉)국사 징관(澄觀,738~839년)은 당 덕종 정원(貞元)3년(787)에 지은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疎)’권47에서 금강산에 이런 주석을 달고 있다.
동해의 동쪽 가까이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금강이라고 한다. 비록 전체가 금은 아니지만 위아래 사방 둘레 내지 산간에 흐르는 물속에 모두 금이 있으므로 멀리서 바라보고는 곧 전체가 금이라고 말한다. 또 해동인(海東人;우리나라 사람)이 예로부터 전하기를 이 산에서 가끔 성인(聖人)이 출현한다고 한다.
그러니 늦어도 징관이 ‘화엄경소’를 짓던 8세기 후반경에는 중국인들조차 화엄경에 나오는 금강산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해동인이 전한 성인출현설은 이미 금강산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민간설화와 도교설화등을 통해 상상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전한 주체는 의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금강산이 법기보살의 현재 주거처라는 사실을 확정짓는 것도 의상대사가 아니었을까 추론해 볼 수 있다. 오대산과 낙산은 인도와 중국에도 있지만 금강산은 신라에만 있었으며 오대산과 낙산이 법장이나 징관등 화엄지도자들의 충분한 동의를 얻었는지 불분명한데 비해 금강산은 불교공동문명권의 확실한 인정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다른 산들과는 의미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법기보살에 대한 신앙은 8세기 전반 의상의 제자인 표훈(表訓)등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표훈은 법기보살이 상주하고 있다는 법기봉을 뒤로 하고 표훈사를 창건하였는데 그 본당을 반야보전(般若寶殿)이라 하였다. 반야보전이라 한 것은 법기보살이 항상 반야의 법문을 설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기보살신앙은 표훈사 뒤쪽 5리쯤에 있는 정양사에서도 발견된다. 또 금강산 법기봉 밑에는 합장하고 고개 숙인 모습의 자연석이 있다. 이것을 상제보살(常啼菩薩)이라 한다. 화엄경에는 법기보살을 쫓아 7일 밤낮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반야의 법문을 듣는다는 보살이다. 또 이 법기봉을 마주하는 곳에 혈망봉이 있고 그 상부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어 하늘을 마주 대하는 듯한 형상의 바위가 있다. 이를 여래의 대법안장(大法眼藏)이라 부르는데 법기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이 법안을 따로이 갖추고서 광명을 나타내어 인연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묘한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고려 태조도 정양사터에 올라와 방광대(放光臺)에 출현하여 빛을 발하는 담무갈(曇無竭)보살을 직접 뵙고 감격하여 정양사를 지어 바쳤다 한다. 이렇게 역대 왕공귀족들과 신앙심 깊은 많은 단월(檀越)들이 갖가지 인연으로 금강산에 절을 짓게 되니 소위 팔만구 암자가 금강산에 있었다는 속설까지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뿐아니라 일만이천봉 각 봉우리와 골짜기마다 화엄경에 등장하는 각종 명칭을 이끌어 이름을 부여하니 금강산은 그 자체가 그대로 화엄불국세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법기보살에 대한 신앙은 금강산이라는 지역적인 영역이 있었기 때문에 금강산 밖으로 전파되지 못하고 보편적인 신앙으로 정착되는 데는 실패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실패와 미학의 성공을 볼 수 있다. 자장의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보고 의상이 낙산에서 관세음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신비체험은 신비주의적 요소를 걷어내고 보면 현실적 감성생활에서 도로 일관하고[貫道], 도를 싣거나[載道], 도를 깨달을[悟道]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가나 도가의 도와 상당히 일치 한다고 볼 수 있다. 거꾸로 자장이 신라의 오대산에서 죽은 개를 칡 망태기에 짊어진 노인모습을 한 문수보살을 몰라본 것이나, 물을 청한 원효가 개짐 빨던 물을 준 비루한 여인의 모습을 한 관음보살을 몰라본 것 등은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배움을 청하라는 보살계의 가르침을 연상시킨다. 아무리 고승대덕이라 해도 아집과 편견을 버리지 못하면 한순간 미혹에 쌓인 범부와 다를 것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겸허한 마음자세와 태도등 감성적인 규범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칸트는 미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상태를 ‘무사심성’이란 말로 표현한 바 있다. 불가와 유가와 도가의 ‘공(空)’, ‘도(道)’, ‘무(無)’, 등의 개념이 실제생활이나 행동의 미적영역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장과 원효의 설화는 오대산이나 낙산이나 금강산을 대할 때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하는 미적기준을 시사해준다는 점에서 미적교육의 의미가 있다. 만다라가 수행자의 한계를 배려하여 적절한 크기와 적절한 형식을 택하듯이 모든 우주가 불법에 차있는 것이겠지만 그중에서도 한 두가지의 전형을 세워 수행의 기준으로 삼게하고 그것을 통해 일상생활 곳곳에 진리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금강산은 그 자체로 미학적 의미를 부여 받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금강산에 법기보살이 상주하고 있음을 설한 화엄경의 이야기는 신라인에게는 큰 영광이요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자부심은 주체의 내재적 감성이 이타불이의 심성으로 고양될 수 있는 토양이다. 금강산을 직접 체험하면서 감성적 자극을 통해 수행심을 고양하고 그러한 분위기가 사회적 관계의 자율적인 생활화로 나아가게 한다는데 금강산미학의 생활미적 의의가 있을 것이다. 특히 화엄밀교의 교의에 입각한 금강산미학의 실천과 발전은 당나라와 대적하던 신라불국토라는 울타리를 넘어 불교공동문명권으로 시야를 넓히는 숭고한 감정의 고양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새겨볼 수 있다.
조선시대 금강산미학의 발전
조선왕조가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천명하면서 단발령에서 대화엄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머리를 자른다던 감정의 고양과 불교공동문명권의 유일한 법기도량으로서의 금강산의 위상은 크게 쇠퇴하게 된다. 김창협의 시 ‘마하연’에서는 절집에 중이 없고, 윤증의 시 ‘유점사 중 희연에게(贈楡岾僧熙演)’에서는 “그나마 있는 중들은 세상인연 끊으려는 이내심정 모르고 은근히 벼슬자리 얻어 오기 바란다”며 속세화된 불교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고 있다. 오히려 율곡의 시 ‘중이 시를 써달라기에(有僧求詩次退溪韻)’에서 “한줄기 샘물 달기도 하여라 내 일찍 알았노라 그것이 부처의 마음인줄을 금강산 변함없어 샘물도 무궁하여라”하며 화엄불법의 금강을 인정해주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조선의 금강산은 화엄불국의 장엄을 찾아볼 수 없고 한반도 5대산악의 하나로 국가의 제사를 받는 대접에 그칠 뿐이었다. 5대중심 산악이란 동금강, 서묘향, 남지리, 북백두, 중삼각산이다. 성종12년(1481) 이루어지는 동국여지승람 권47, 회양 산천 금강산조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금강산은 1금강 2개골(皆骨) 3열반(涅槃) 4풍악(楓嶽) 5지달(枳怛)이라 이름하는데 무릇 일만이천봉의 바위산이 뼈대를 세우며 동쪽 푸른 바다로 이어지고 있다. 삼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바라보면 그림 같은데 내외산에 108사(寺)의 절이 있고 그 중의 명찰은 표훈(表訓), 정양(正陽), 장안(長安), 마하연(摩訶衍), 보덕굴(普德窟), 유점사(楡岾寺)이다.
이제 금강산에서 불국토의 잔해라도 볼 수 있는 것은 이름뿐이었다. 그래서 지봉 이수광(李睟光,1560~1628년)은 ‘지봉유설(芝峯類說)’권2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풍악을 세속에서는 개골이라 부르는데 승려들은 금강이니 열반이니 지달이라고 부른다.
배경
두 번째 금강산 미학을 일으킨 사대부지식인들중 특히 서인-노론세력에게 금강산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던 것은 두가지 정도의 이유때문이었다. 첫째는 서인의 영수이자 조선성리학의 종주로 추앙되던 율곡이 금강산여행을 통해 주자성리학과 다른 율곡학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인식 때문이었고, 둘째는 병자호란이후 반청의식으로부터 비롯된 소중화의식의 반영으로 조선식문화를 건설하려는 노론세력내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강산은 이미 노론세력이 아니어도 여유있는 사대부라면 일생에 꼭 한번 가봐야 할 곳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금강산 처처마다에서 리학의 학습에 지친 사대부들이 심학수련을 위해 내재적 심성을 환기하는 신비체험을 할 수 있다는 기대와, 무엇보다 신라금강산미학의 등장이래 이미 수많은 절과 암자가 존재하여 숙식이 가능했고, 절마다의 스님들이 있어 길안내, 짐꾼등 편의제공이 가능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문화측면에서 보았을 때 불교 특히 밀교식 문화등에 대해 거부감이 강했던 유림들이 금강산등 산수여행에 열중했던 것은 조선유학의 심학(心學)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쟁점으로 한 논리적 전통은 율곡이이 대에서 정리되었다고 보고 율곡학파를 일으킨 김장생은 예학의 종장이란 명칭에 걸맞게 예학에 집중하였다. 결국 예송논쟁도 예학논쟁이었으며 그것은 윤리도덕의 문제이기보다 미학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유학사상
송명이학(宋明理學)의 원인 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오직 공자와 맹자만을 유학의 정통으로 여기는데 사실은 순자가 없었다면 유학은 이미 끝이 났을 것이다. “순자가 없었다면 한유(漢儒)도 없고, 한유가 없었다면 중국의 문화가 어떤 형태가 되었을지 매우 상상하기 어렵다” 맹자와 순자는 유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두 축이다. 맹자가 선험적 도덕적으로 사람의 감성을 주재(主宰)하고 관주(貫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인성(人性:사회적 이성)이 선하다’고 한 반면, 순자는 곧 현실적 질서규범으로써 사람의 감성을 개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인성(생물적 자연감성)은 악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렇듯 방향은 달랐지만 개체의 감성을 어떻게 사회적 이성에 집적시킬 것인가 하는 인학(仁學)의 공통명제에 있어서는 그 길을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다. 맹자와는 달리 순자는 내재자연에 대한 교육의 형성과 인격의 건립은 결코 목적자체가 아니고, 내안으로의 자연의 인간화는 외재적 사업에 공을 세우기 위한 것, 즉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治國平天下)’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순자의 특징은 사람은 주체적 외재성취, 즉 사람의 모든 세계에 대한 내외자연을 포괄하는 전면적인 정복을 강조하는데 있다. 이러한 정복은 단지 멀리 도덕상. 정신상의 것일 수만은 없고 나아가 반드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또한 곧 순자의 ‘천명을 제어하여 그것을 이용한다.(制天命而用之)’는 사상인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들은 모두 아름다움을 다하여 우리의 쓰임에 이바지하지 않음이 없으니, 위로는 어진 이와 선량한 이들을 장식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길러 편안하게 한다. 이를 일러 큰 다스림이라고 한다.’
이것은 신과는 다른 인류주체성의 현실개조역량에 대한 맹자의 개괄이며 찬양이다. 이런 역량은 도덕주체 혹은 내재 의지구조의 건립에서 표현된 것이 아니고 내재. 외재 자연의 현실 정복과 개조에서 표현된다. 일찍이 이같이 강건하고 힘있게 인간군체가 주체적인 물질능동역량임에 대하여 확인을 수립했다는 것은, 세계철학사에서조차 매우 보기드문 사상인 것이다. 맹자가 수립한 인간주체적 내재 인격과 함께 빛나는, 순자의 이러한 외향적 개척성의 철학적 광휘는 전국시대 이래 진한의 세계정복을 주제특색으로 하는 위대한 예술을 직접 반사하고 비추고 있다. 이론상 ‘사람은 천지와 더불어 함께 한다.(人與天地參)’는 유학의 세계관은 주역(周易)의 건립에서 직접 열리기 시작했다. <주역>은 순자의 계승이며 발전이다. 그 특색은 순자의 그러한 외향개척적 물질성을 띤 실천활동의 강건한 본색을 보존하고 확대시켰으며, 동시에 ‘천명을 제어하여 그것을 이용하고’,‘하늘과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명제를 버리고 천인합일(天人合一)적 심리정감의 궤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회귀는 오히려 원래 명제를 극도로 확대시키고 풍부하게 했는데 주역은 계통적으로 천(天)에 인류 정감적 성질을 부여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그것이 강조하는 바 ‘사람이 천지와 더불어 함께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순자의 그러한 자연정복적 항쟁행태가 아니라 자연 순응적 동구(同構)형태를 취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맹자와 같이 개체인격과 내재심성의 도덕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순자와 같이 광활한 인류물질활동과 역사 및 자연환경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의 ‘천’은 여전히 외재자연이지만, 비유하고 의인화하여 도덕적 품덕과 정감적 내용을 구유하고 있다. 이러한 품격과 정감은 단지 색조일 뿐이고, 결코 진정한 인격과 의지는 아니다. 그것은 실질상 심미적, 예술적인 것이고, 종교신학적 혹은 과학인식적인 것은 아니다. 주역에서 ‘하늘의 운행은 건실하여 군자는 이로써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 않고 힘쓴다.(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 천지의 덕을 생이라 한다.(天地之大德曰生)
‘날로 새로워짐을 성덕이라 하고 낳고 낳음을 역이라 한다(日新之謂盛德 生生之謂易)’는 것들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주역에서는 인격신의 사람에 대한 주재와 지배가 없고 반대로 그것이 강조하는 것은 사람은 반드시 떨치고 일어나 강해지려하고 부단히 나아가야만 비로소 천지자연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지자연은 밤낮으로 운행하고 변화하며 더욱 새로워지므로 사람은 반드시 그와 같은 동태구조를 취해야만 비로소 모든 자연과 우주와 동일함에 도달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천지와 더불어 함께한다’는 것, 즉 인간의 심신. 사회군체와 천지자연과의 동일함이며, 또한 천인합일이다. 이러한 동일함 혹은 합일은 정태적 존재가 아니라 동태적 진행, 즉 ‘날로 새로워짐을 성덕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유가의 인학은 사람의 내재자연(情.感.欲)의 도야형성을 강조하는데서 부터 사람과 자연 혹은 우주의 동태.동구(同構)까지를 추구했는데, 이는 원시유학을 정상에 올려놓은 것이다. 우주자연의 감성세계는 부성(負性)의 것(많은 종교에서와 같이)도 아니고, 또 중성中性적인 것(근대과학에서)도 아닌, 긍정적 의의와 정면(正面)적 가치를 갖추고 있으며, 아울러 일종의 감성적인 색조와 성질을 갖고 있다. 이것은 공자,맹자,순자가 긍정한 감성존재와 감성생명을 생성하고 중시하는 기본 관점으로 일종의 세계관의 승화이다.
이제 중국의 유학은 오랜 불교시대의 성과를 수렴하며 신유학으로 발전해 있었고 조선에 전래된 유교는 심학적경향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었다.
무이구곡가
주자는 도(道)와 문(文)을 대립시키고 도가 근본이고 문은 지엽이라고 했다. 정작 주희자신은 수많은 시를 지었음에도 그러했다. 그러던 중 주희는 무이구곡을 거슬러 올라가며 지은 시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발표하고 이것은 신라불교에 비해 이렇다 할 문화를 보이지 못하던 조선유교가 따라야할 문화적 전범이 되었다.
주자의 생활과 학문을 본받고자 승경(勝景)을 찾아 구곡림원(九曲林園)을 만들고 주자의 무이정사(武夷精舍)와 같은 각종 정사(精舍)를 구곡안에 구축하여 은둔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나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차운(次韻)하여 각자의 구곡에 대한 구곡가와 각자의 정사에 대한 정사잡영을 읊었다. 그리고 구곡기를 짓고 그 구곡도를 그려 완상하며 대개 구곡도기(九曲圖記)를 썼던 것이다. 조선조의 성리학자들은 무이산의 구곡을 성지나 성소로 여겼고 무이도가는 문학의 전범으로 생각하여 ‘문학에 도를 싣는다(文以載道)’는 문학관도 확립시켜 나갔던 것이다.
차운 구곡시는 수적인 면에서 볼 때 구곡시를 압도한다. 성리학이 난숙기를 맞은 조선조 중기이후, 성리학자들은 대개 한 번쯤 무이도가의 차운시를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곡시의 두 계보는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이라는 대립되는 철학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형성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퇴계를 비롯한 영남학파의 시는 무이도가를 도덕적 관점으로 해석하여 재도시(載道詩)로 보아 사물관조를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관물구도(觀物求道)의 시라 할 수 있고, 기호학파의 시는 고봉기대승을 중심으로 구곡도가를 사물을 봄으로써 흥이 일어나는(因物起興) 서경시로 보아 사물에의 감흥을 통하여 마음의 성정을 양성하고자 하는 감흥존양(感興存養)의 시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무이도가의 차운시를 많이 남긴 영남학파의 구곡시들은 보다 관념적이라 할 수 있으며 실경을 소재로 하거나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한역시와 화시(和詩)를 많이 남긴 기호학파의 구곡시는 보다 서정적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무이도가는 대체로 훌륭한 시로 대접받아 왔으나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숭앙받지는 못했었다.
기대승은 논어 ‘선진편(先進篇)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쏘이고, 읊조리면서 돌아온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는 글귀를 인용하여 산수시를 통해서 나타난 산수의 즐거움은 도학의 교훈을 직접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도학에서 지향하는 심성을 깨끗이 하는 효과를 지닌다고 했다. 목적의식이나 도덕판단을 떠나 산수속에서 노닐면서 산수와 일체를 이루는 흥취가 무엇보다도 소중함을 산수시를 통해서 보여주어야 했다. 산수시는 경치를 그리면서 흥취를 나타내고 흥취를 나타내면서 이치를 찾아야 한다. 경치를 그리지 않고 흥취를 나타내지도 않으면서 이치를 찾을 수는 없다. 주자의 전례와는 관계없이 자기 스스로 자기 고장의 경치를 자기말로 그려야 그럴 수 있었다. 주희의 무이산 대신 전라도 담양의 절경에서 호남가단을 이끈 송순과 정철이 이일을 해냈다. 하서 김인후는 시가 도학을 탐구하는 절차를 나타내야 한다(入道次第)고 생각하였으나 송순이 앞장서서 한시를 버리고 국문시가를 택하고 절구나 율시와는 전혀 다른 가사를 지었다. 면앙정가가 그것이다. 그 뒤를 이어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었다. 주희가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구별하여 도심은 언제나 바르기만 하지만 인심이 그릇되어 세상이 혼탁하다 했는데 성산별곡에서는 ‘인심은 낮 같아서 볼수록 새롭다’고 했다. 정철이 인심을 긍정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정철은 주자학을 기본이념으로 받드는데 순응하여 진출했지만 스스로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 기일원론으로 나아갔다. 이이의 단계까지 전개된 이기이원론에서 벗어나 화담 서경덕의 기일원론과 상통하는 견해를 보이면서 녹문 임성주이후의 기일원론에서 수행할 과업을 예고했다. 천지만물과 합치되는 선한 마음의 근거인 본연지성을 찾는 것이 사대부시조의 공통된 지향일 때 정철의 노래에서는 기질지성을 긍정했다.
주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문문명권의 중세후기 사상을 더욱 생동하게 전개하는 것은 민족어문학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단테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기독교문명의 변방에서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씀으로서 그런 일을 했던 것과 같다. 이는 중세후기 유라시아에서 나타난 보편적 흐름이었다. 정철은 정여립모반사건 처리과정에서 호남가단과 같이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친구인 율곡이 이기이원론인 주자성리학을 이기일원론으로 심화 발전시키면서 이이에게 경도되었다. 담양을 떠나 금강산을 새로이 주목하면서 쓴 관동별곡에서 정철은 이기일원론에서 기일원론적 경향으로의 발전을 보인다.
조선시대의 금강산미학
서인세력이 금강산을 특히 주목하게 된 것은 율곡 이이(李珥,1536~1584년)때문이었다. 그가 금강산에 머물던 시기의 사상적 성숙과 그의 금강산 시들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금강산 구룡연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며(楓岳登九井看日出)’라는 율곡 시의 초반부를 보자.
아득한 봉우리들 흰눈이고 몇천길인가
구름 밖 오솔길을 사람들이 톺아오르네
지팡이를 끌고서 높은 뫼에 올라서니
두눈 앞에 조선땅이 안겨오는 듯싶어라
峨嵯雪峰幾千仞 鳥道人行白雲外
靑藜戞上犖角中 兩眼漸覺東丘溢
금강산 연봉들을 바라보던 주인공이 구름을 뚫고 직접 올라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조선 땅이 달려들듯 안겨오는 느낌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전한다. 실제 한방향으로 운동하는 신체가 갑자기 멈춰 섰을 때 반작용에 의해 마치 정지해 있는 산천이 다가오는 듯한 착각은 일종의 신비한 체험을 제공한다. 내가 다가가지 않고 산천이 다가오는 듯한 일시적인 착각속에서 유가적 숭고의 이상인 호연지기가 느껴짐은 당연한 것이다. 율곡의 시는 단순히 도학의 도식적 설명이 아닌 현실체험에서의 흥취와 그것을 통해 단번에 국토애로의 비약을 보여준다.
실제 율곡의 시는 서인세력의 문인들의 어떤 금강산 시보다 뛰어난 경지를 보여준다. 이어 정철은 국문으로 관동별곡을 창작하고 정철의 관동별곡은 사대부들을 더욱 더 금강산으로 끌어들인다. 오도일(1645-1703)의 ‘만폭동’이란 시를 보자.
관동별곡 듣고나니 티끌세상 서글퍼라
우뢰듣고 눈빛보니 모두가 선경일세…
지나온 모든 경치 꿈속의 황홀경인듯
이몸이 그 누구의 속임수에 든듯하여라
一曲關東愴後塵 聞雷見雪境皆眞…
經過勝處渾如夢 酷被平原老守欺
이후로 율곡계의 조선성리학자들은 금강산이 산과 바다의 빼어난 경치를 한데 아우른 천하제일 명승이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시와 문장 그리고 그림으로 사생해 내는데 주력하게 된다. 그래서 율곡학파가 주도하고 퇴계학파가 동조하여 일으킨 혁명인 인조반정(1623년)에 29세의 최연소자로 참여하였던 창강(滄江) 조속(趙涑,1595~1668년)은 반정 성공 후 일체 벼슬을 사양하고 동자하나와 나귀 한 마리에 지필묵을 챙겨 가지고 명산대천을 두루 찾아다니며 시화로 진경을 사생하던 중 금강산을 집중 사생하기 시작했다 한다. 창강이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년)의 금강산 진경그림의 선구를 이루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진경문화를 이끌어가던 율곡학파들은 중원을 차지한 여진족 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의 강화산성 남문분사사건의 처절한 경험공유는 뼈에 사무친 반청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반청의식은 유교공동문명권의 중심을 중원을 차지한 세력이 아닌 변방인 조선이 되어야 함을 자처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조선이 세계문화의 중심인 중화 그 자체라는 조선중화주의의 출현이다. 이에따라 모든 문화의 기준을 우리에게 두려하였다. 그 결과 금강산은 음양이 이상적으로 조화된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땅으로 높이 평가되어 물성(物性;사물의 성질)을 따지는 성리학자는 반드시 순례해야 할 곳으로 인식되어 갔다. 겸재의 화법은 음양조화를 우주만물 생성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조선성리학의 이념에 일치할 뿐아니라 암산과 토산이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우리 산천의 특징을 정확히 묘사하는데 가장 적합한 새로운 기법이었다. 또한 겸재의 해악전신첩에 그려진 금강산여행길은 포천, 철원을 지나 창도, 단발령, 장안사로 이어지는 노정에 병자호란 전투의 격전지 김화의 화강백전을 그리고 있다. 이는 노론세력의 반청의식을 반영한 풍경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민중들의 저항이 서려있는 통천의 옹천을 그린 것 또한 반청의식보다는 덜 했지만 반일의식을 상기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조선중화주의는 신라불국토설과 마찬가지로 유교공동문명권의 공인을 거치지 않은 조선만의 주술적사상이었다. 실제 1651년과 1658년 두차례나 청나라가 흑룡강으로 진출한 러시아군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군의 출병을 요청했을 때, 청나라 북벌을 위해 준비했던 조선북벌군은 청나라를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며 나선정벌에 임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만일 노론의 지도자들이 유라시아정세를 통찰하며 정말로 청나라를 정벌하고자 했다면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도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론세력은 그 같은 안목을 지니고 있지 못했고 오히려 청나라에 봉사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미 조선은 유라시아의 지정학체계속으로 빠르게 편입되어 가고 있었고 유라시아대륙의 중세후기는 서로의 영역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요동치는 중에 있었다. 미학의 내용을 구성하는 사상과 정치, 전략의 내용이 어떠한가가 미적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통일시대 세번째 금강산 만들고자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일시대 금강산미학을 위하여
시대적 배경
금강산은 50년간의 분단체제 속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6.15선언에 의해 금강산여행이 시작되었고 현재 남북의 가장 많은 사람이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대상이다. 현재 통일시대의 수준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통일을 즐기는 시대’이다라고 할 수 있다.
논어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구절이 있다. 아는 것은 객관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요. 좋아하는 것은 가치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며, 즐기는 것은 이 모든 것의 체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통일운동의 단계를 이에 대입해보면 ‘아는’ 단계는 북한바로알기운동에 대입되고 대학교에 북한학과가 생긴 것에도 대입된다. ‘좋아하는’ 단계는 집회 시위가 끊이지 않던 통일운동에 대입되고 대학에 통일학과가 생긴 것에 대입된다. ‘즐기는’ 단계는 6.15이후 가능해진 금강산, 개성여행등에 대입되고 만약 대학에 새로운 학과가 생겨야 한다면 통일미학과가 생기는 것으로 대입될 것이다. ‘즐기는’ 문제는 과학적 인식문제가 아닌 미학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지금의 통일시대는 즉자적 금강산여행이나 유람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 번째 금강산미학을 만들어 내야할 때이다.
금강산 미학의 조건
분단극복
신라 조선 금강산미학의 공통조건중의 하나는 국가가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위기에 처해 있는 시기였다는 점이다. 당나라의 침략, 청나라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계기가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금은 한국전쟁과 정전체제란 역사적 계기가 배경이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금강산을 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비무장지대를 금강산미학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정선이 해악전신첩에 그린 금강산가는 노정 중 포천의 화적연, 철원의 삼부연등이 모두 군사지대에 묶여 있고, 김화의 화강백전과 충렬사등이 민통선안에 아직도 있으며, 반청의식의 상징이었던 전골총은 비무장지대 안에 누워있다. 화엄만다라식 명명으로 볼 수 있는 오성산과 수태사동구의 장면도 남북모두 볼 수 없는 곳에 있다. 1930년대 정선의 금강산여행길을 따라 건설된 금강산관광철도와 금강산 철길을 복원하는 것은 여행길이 분단의 장벽을 뚫는 것이 될 것이다. 미학적 실천이 곧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순자의 ‘천명을 제어하여 그것을 이용한다.(制天命而用之)’는 사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공동문명권 의제설정
당나라와 대적하여 싸우던 신라가 어랑캐에서 불교공동문명권의 성원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불국토설이 아니라 오히려 금강산미학이었다. 신라불국토설이 신라만을 범위로 했다면 금강산은 멀리 인도까지 화엄불교공동문명권의 의제가 될 수 있었다. 조선중화주의가 조선만을 범위로 했다면 정철의 관동별곡과 겸재의 금강산전도는 유교공동문명권의 사상미학적 의제가 될 수 있었다. 대북적대주의나 대북우월주의는 남한만을 범위로 한다. 6.15선언은 한반도를 범위로 한다. 그러나 2008년 광복절논란에서 확인된 반공주의는 유라시아의제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반공이란 유라시아 의제를 넘어설 수 있는 의제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의제설정능력은 허황된 구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착실한 실력을 쌓아감으로써 갖추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경의선, 동해선 철도는 유라시아체계가 될 수 있고 동해선과 함께하면 금강산도 유라시아의제를 준비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통일사상미학의 성립
신라와 조선 모두 새로운 사상의 성립 없이 미학이 만들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사상이론은 미학성립의 필수조건이었다. 주체사상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닌 새로운 통일이념이 필요한 것이다. 통일의 철학은 한반도적 특수성에서 출발하면서도 유라시아문명권의 보편사상으로서 소통될 수 있을 때 새로운 사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세 번째 금강산미학은 통일시대 금강산미학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사상과 이론 실천이 총체화될 때 가능한 것이지만 그러나 현실은 이미 앞질러 갔다. 사람들은 금강산을 여행하며 이미 즐기고 있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