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한강하구 토론회2009/07/27 279
7.27 한강하구항행을 막아온 유엔사에 대해 법적대응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회에서 발제한 글입니다.
장소 기독교회관2층
시간 2009.7.27 2시
한강하구와 유엔군사령부
사진가 이시우
정전협정의 군사적 성격
한강하구문제의 법적 판단기준은 정전협정이다. 정전협정에 의하면 정전협정은 순수한 군사적 협정일 뿐이다. 정전협정에 의한 관할권은 군사적 성격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한강하구문제를 풀기위한 중요한 전제이다. 정전협정은 본래 군사협정이지만 다른나라의 경우 군사적성격 뿐아니라 정치적성격까지 포함되어 체결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것은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의 과정과 협정문안에 대한 최종협상의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전협정이 시작과 협상과정, 최종협정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정전협정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전회담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유엔군이나 중공군이나 더 이상 승리의 확신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던 전투때문이었다. 미국과 유엔은 처음부터 정전을 상정하지 않았다. 유엔에서 한국문제가 상정된 이래 그 목표는 통일이었지, 정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50년 7월7일 통합군사령부창설에 대한 유엔안보리결의시에도 통합군사령관에게 정전협정체결권을 특별히 수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합군사령부가 38선까지만 공산침략을 격퇴하기로 한 1950.6.25과 6.27안보리결의를 어기고, 38선을 넘어가면서 중공군의 참전을 초래했다. 애초 유엔의 논의는 먼저 북한의 침공이 헌장 제39조의 ‘침략행위’인지에 대하여 이루어졌다.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의 제소’라는 의제로 소집된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의에서 미국은 북한이 ‘도발되지 않은 침략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결의 초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다른 회원국들은 이러한 결정을 하기에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의견이어서 미국은 어조를 낮추어 ‘평화의 파괴’를 언급한 수정안을 제출하였다. 안보리는 최종적으로 침략행위를 언급하지 않는 대신 ‘평화의 파괴’가 존재한다고 결정하였다. 유엔이 택한 개념은 침략전쟁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교전이 아니라, 평화의 파괴에 대한 평화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유엔이 또 하나의 교전단체가 된다면 유엔헌장의 정신은 다시 후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합군사령부가 38선을 넘는 순간 이러한 유엔의 대의는 사라졌다. 결국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한강이남으로 후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이번엔 거구로 중공군이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지 않고 한반도 통일을 희망하며 진격한 결과 유엔군이 처했던 것과 같은 처지에서 후퇴하게 되고 만다. 결국 애초의 38선 인근에서 전선이 고착되기에 이르게 된다. 유엔이 표방한 집단안보의 이상대신 현실에서 전개된 힘의 균형, 피의 균형이 정전의 여건을 마련한 것이다.
1951년 맥아더의 해임은 쌍방에 어떤 분기점을 마련해 주었다.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맥아더 해임을 다룬 상원 청문회에서 심도있게 설명한 바 있는 강경-온건양면책을 바탕으로 대략 전쟁 이전 국경선을 따라 정전한다는 밑그림이 그려졌다. 합참 특히 브래들리 장군은 중국군의 춘계공세를 격퇴하면서 목표를 적군 괴멸로 상향조정하지는 유혹이 있었으나 이를 거부했다. 6월초 밴플리트 장군은 최근 유엔지상군이 한국에서 전개한 추격단계가 종결되었다고 선언했고, 애치슨국무장관은 상원청문회의 증언을 통해 미국은 전투가 ‘재개 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을 만한 보장’이 있다면 38선 또는 38선 근처에서 휴전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소련측에서도 미약하지만 정전을 희망하는 듯한 반응이 감지되자 정책기획국원 존 데이비스는 조지케넌이 말리크와 대담하도록 주선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데이비스의 제안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애치슨은 베를린 문제에 대해 필립제섭이 말리크와 1949년에 효과적으로 대담할 수 있었던 것을 대통령에게 상기시키며,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고 케넌도 그 일에 착수하는데 동의했다.
서방측 외교관들과 보도진들은 소련신문이 51년 5월17일 미국 상원에서 발표된 전쟁중지결의문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주목했다. 프라우다는 19일 결의안 전문을 게재했고, 하루 뒤에는 다른 소련 신문들도 미국에도 어떤 그룹들은 전쟁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미국은 공공연히 한국에서 장기적인 목표는 통일이지만 시급한 군사적 목표는 좀더 온건하게 풀어야 한다면서 이 둘을 구분 지으려 했다.
소련은 천천히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말리크는 51년 5월 31일 롱아일랜드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케넌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유엔관리들은 말리크를 자신들이 매주 방송하는 “평화의 대가(The Price of Peace)”라는 라시오 프로그램에 초대하려 했다. 6월 둘째 주에 그는 마침내 그 제안에 동의했다. 6월 23일 토요일 저녁에 방송될 것으로 스케줄이 잡혔다. 말리크는 연설에서 소련의 기본정책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평화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지만 “한국에서 평화를 위한 노력은 서방측의 도발적 처사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군사충돌을 해결하는 ‘첫단계’는 교전국간의 전쟁중지와 38도선에서 서로 군대를 철수시킬 수 있는 휴전을 이루기 위한 논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말리크는 외국군의 철수나 타이완 문제 또는 중국의 유엔의석등 쌍방이 경쟁적으로 대립해 오던 정치적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말리크의 연설에 서방측은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오타와에 있던 피어슨과 파리에 있던 슈만 같은 외무장관들은 그 연설을 열렬히 환영했고, 또 노르웨이에서 휴가를 보내고 뉴욕으로 즉각 돌아온 트리그브 리 유엔사무총장도 그러했다.“그렇다면 분쟁을 종결짓기 위한 논의를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국무부는 온화하게 언급했다.
1951년 6월25일 북경정부의 견해를 표시한‘인민일보’의 사설은‘모든 외국군대가 한국으로부터 철수되고 한국인민으로 하여금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게 할 것을 조건’으로 J. Malik의 제안을 수락한다고 표시했다.
정치적요구를 조건으로 내세운 중공의 제안은 분명 소련과 차이가 있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미국에게 그것은 소련과 중공을 갈라놓을 수 있는 틈이 될 수도 있었다. 이제 공은 미국에게로 넘어갔다.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다음에 움직여야 하는 것은 자기네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뉴욕과 모스크바에 있는 외교관들에게 말리크가 한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6월 27일에 커크대사가 그 즈음 중단된 파리회담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만났다. 그로미코는 소련정부는 군사적인 문제에 한해서만 한국에서 교전국 사령부들이 협상하기를 바라며, 한국의 장래에 관한 광범위한 문제들은 휴전회담이 이루어진 후에 논의하자고 분명히 말했다. 소련 외상과의 미대사의 회담의 결과 상호군사령관간의 정화는 이루어 질 수 있으나 공산주의국가의 대표자와 총회의 위원회간에는 그것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런 결과는 5월 18일 총회의 결의(GA/500(V))에서 연유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북한과 중공에 대한 회담의 제안결정은 미국에 의해 취해졌으며 사후에 참전국과 협의했으나 총회의 지침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정화(cease fire)에 관한 미국의 권한범위는 T. Lie 사무총장에 의해 충분히 검토되었다. 6월 30일 신문에 보도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미국은 총회나 안보리에 추가적인 허가나 지침없이 정화나 휴전(cease fire or armistice)협정을 체 결할 권리를 갖는다.
2. 그 권리는 군사적 사항에 한정되며 정치적 분야의 협상은 안보리나 총회에 의한 장차의 결정이 요구 된다.
3. 어떤 정화나 휴전도 미국의 통합사령부에 권한을 부여한 안보리에 보고되어야 한다.
4. 한국에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15개국으로 구성되는 워싱턴의 16위원회(Committe of 16)는 미국과 마주보는 협의적인 지위를 가지며 유엔의 기관의 지위를 갖지 않는다.
위 내용에서 확인되는 것은 정화 또는 휴전협정의 당사자로 미국정부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는 점과 16개 유엔참전국위원회가 유엔기관이 아님을 인정함으로서 정전협상의 일방을 미국과 16개참전국으로 상정할 뿐, 유엔으로 상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된다는 것은 교전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전쟁개념자체를 부인한 토대위에 출범한 유엔과 유엔헌장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정전협정은 전쟁에 대한 전통국제법의 적용을 받으므로 부전不戰조약의 성과위에 성립된 유엔헌장의 정신과도 충돌한다 하겠다.
이러한 의견교환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은 아직도 어떻게 협상을 시작할 것이냐는 문제를 풀어나가야 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교전군사령관들에게 한국에서 만날 것을 제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혹시 미국이 휴전을 요청한다는 인상을 주어서, 소련이 이를 선전목적으로 이용하거나 미국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대안으로서는 트루먼이 미국과 유엔의 휴전에 대한 태도를 밝힌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서 이일을 명료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첫째, 일련의 공식적 교류를 필요로 하는데다가 그것이 평화를 가져다줄지도 의문이며, 둘째는 미국이 선전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휴전을 모색하는 소련의 진지한 노력을 방해한다는 비난을 미국의 우방들로부터 불러올 수도 있었다.
워싱턴은 첫 번째 방법을 택했다. 그리하여 리지웨이 장군에게 6월 29일 공산군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방송으로 메시지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한편으로는 유엔군측의 나약함이 드러나지 않게 또 한편으로는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씌어진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당신들이 한국에서의 교전상태와 모든 군사활동을 중지하기 하기 위한 휴전(armistice)을 논의하기 위해, 또한 이러한 휴전이 유지될 것을 보장하는 논의를 하기위해 회담을 열자고 제안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회담이 바람직하다는 당신들의 회신을 들으면 나의 대표자를 임명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또한 그때 그가 당신들의 대리인을 만날 수 있는 날짜를 제안할 것입니다. 나는 그 회담이 원산항에 있는 유틀란디아(덴마크병원선) 위에서 개최될 것을 제의합니다.
정책결정자들은 리지웨이 장군에게 전달할 휴전조건에 대한 지시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이 조건들은 미국이 유엔에서 전쟁을 중단시키려는 집단에게 잠정적인 조건들을 건네준 적이 있었던 1950년 12월 중순부터 시작해 수개월 동안 심사숙고되었다. 5월말에 국무부는 그것의 마지막 초안을 영국에 보내주었고, 그 다음달에는 런던과 미 국방부가 상의하며 함께 정비했다. 6월 31일 합참은 도쿄에 미국의 입장을 전했다. 메시지의 마지막은 협상에 대해 “군사적 문제들로만 확실히 제한하며”, 한국의 항구적인 해결책, 타이완의 운명, 유엔에서 중국대표의 참여 같은 문제에 대한 언급은 금했다. 회담을 진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군인들에게 맡겨졌다. 이는 헤이그 육전법규등 전쟁법의 규정에 의할 때 당연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협정과 조약은 국가간에 체결되는 법적문서이지만 정전협정만은 군사령관이 전쟁의 중지를 위하여 일시적으로 체결하는 협정이다. 군사령관에게 조약체결권이 부여되는 것은 국내법의 규정이나 국제기구의 기본법이 아니라 직접 국제법에 의하여 부여된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 대만문제, 중공정부의 유엔 진출등 정치와 영토문제등이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전개된 한국전쟁의 성격상, 정전협정을 순수한 군사적 성격으로 분리해내는 것이 오히려 어려워 보였다.
워싱턴은 리지웨이장군이 국무부정치보좌관 윌리엄 시볼드(William Sebald)를 일본 점령지에, 무초대사를 한국에 있는 유엔군사령부 베이스캠프에 발령하고자 하는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그렇게 하면 정치적, 군사적 두가지 사안을 구분하려는 정책에 차질이 생길까 봐 우려해서였다.
이처럼 미국도, 소련도, 유엔 사무총장도 정전협정이 순수한 군사적협정임을 거듭 확인하며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포로교환문제에서 순수 군사적 성격은 왜곡되고, 이념충돌, 문명충돌적 요소가 부각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체결된 정전협정의 전문에서는 처음처럼 순수 군사적 성격을 힘주어 확인하고 있다.
정전협정 전문에는 ‘이 조약과 규정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며’라고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전협정 5조 62항에도‘쌍방의 정치수준에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당한 협정중의 규정에 의하여 명확히 교체될 때까지 계속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여 재차 정전협정의 군사적 성질을 확인하고 있다.
한국정전협정 이전에 미국과 소련이 직접 관여했던 다른나라와의 휴전협정을 비교해 보면 한국정전협정과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태리휴전협정(1943.9.3)은 그 제목에서 ‘당사국을 위하여’라는 위임관계는 물론 당사국자체가 명시되지 않은 점에서 한국정전협정의 제목과 유사하나 그 내용에서 이태리정부가 연합국 군정의 통제를 받는다고 하여 내용상으로 항복조약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서명란에는 당사자로서의 정부대표와 서명자인 군사령관이 각각 구별되어 명기되어 있다. 불가리아휴전협정(1944.10.28)은 당사자와 서명자를 명확히 구별하여 명기하고 있으며, 헝가리휴전협정(1945.1.20)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휴전협정과 달리 한국정전협정의 정식제목은‘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군사휴전(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서명란에도 각 정부를 ‘위하여’나 ‘대신하여’ 같은 당사자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고, 오로지 쌍방군사령관인 김일성, 팽덕희, 클라크(M.W.Clark)가 미리 서명하고, 남일과 해리슨이 참석자로 서명한 서명자만이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클라크장군의 협정서명에 대해 유엔사령관이 정전협정을 체결할 권한은 16개참전국과의 관계에서는 유엔과 이들 참전국간에 특별협정의 체결이나 개별적 위임에 의한 것이라거나 1950년 7월7일의 안보리결의에 의거한 것으로 보고,유엔을 위해서, 사무총장의 대리인으로서 서명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일부견해는 의심스럽다.
클라크장군의 정전협정 서명은 유엔이나 유엔사무총장의 대리인으로서가 아니라 군사령관이라는 직접기관으로서 행한 것으로 이해됨이 마땅하며,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다른 나라의 휴전협정과 달리 한국정전협정은 오로지 군인사이의, 군사적성격에 국한된 협정이란 것이 협정문의 내용과 형식자체에 명시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정전협정과 대한민국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이승만대통령이 맥아더에게 보낸 작전지휘권이양공한에 의해 한국은 정전협정을 체결할 권한까지 작전지휘권속에 포함하여 이양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전협정 체결의 마지막 순간에 한국은 정전협정 체결 반대의사를 명확히 표시함으로써 작전지휘권중 정전협정체결권에 대해서는 부정하였다. 이러한 부정이 유엔사와 한국정부사이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불문하고 휴전회담 중 대한민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로 포함되지 않는다는 양측대표의 확인이 있었다. 또한 유엔사령관의 서명에는 대한민국을 위한다는 어떠한 언명도 없었고, 대한민국이 정전협정을 반대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이 정전협정의 서명자나 당사자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정전협정은 적대쌍방이 정치적 목적을 앞세워 시작된 전쟁에서 피의 균형에 이르러서야 쌍방 모두 순수 군사적성격을 거듭 확인하며 협상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우려곡절 특히,혈맹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주제인 북진통일을 다시 꺼내든 이승만정부를 제외시키면서까지 군사적협정이란 틀을 고수했다는 점과 최종협정문에서 이같은 출발과 과정의 취지가 문안으로 고착되었다는 점에서 군사적 성격의 협정으로 결과 되어졌다.
정전협정시 한강하구문제 합의 과정
정전협정 당시 북은 군사분계선을 육지 뿐 아니라 바다에도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유엔사는 처음부터 육지에만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자는 안으로 나왔다. 한강하구에 대해서는 협상 이전부터 리지웨이 유엔사령관과 미합참 사이에 이견이 존재했다. 리지웨이 유엔사령관은 지휘관의 견지에서 휴전기간 중 그의 주력부대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가 으뜸가는 문제였다. 그는 밴플리트의 조언을 받고 합동전략기획단 기획참모들의 자문을 받아 51년 6월 20일에 휴전기간 중 그의 부대가 위치할 방어선에 관한 판단서를 합참으로 제출했다. 그는 캔사스-와이오밍 선을 주 저항선으로 선택했다.
캔사스선은 51년 4월 10일경 유엔군이 진출한 전선으로 한강하구-임진강-38선이북 부근 중부지역-양양에 이르는 선이었다. 캔사스선은 38선 남쪽이었던 옹진과 연안반도가 점령지역에서 떨어져 나감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정전협상시에 38선 북쪽에 계획된 강원도 지역의 대한민국 영토 추가에 대한 보상으로 이 두 반도를 북한에 양보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리지웨이는 비무장지대의 중심선이 캔사스-와이오밍 선의 서쪽 끝지점인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지점에서 북서쪽으로 약 15마일 지점에 있는 한강하구와 예성강의 합수점까지로 변경되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리지웨이는 합참이 자신의 수정건의를 받아들여 비무장지대의 위치를 변경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결국 한강하구는‘이상적인 조건’보다 현실적인 전투능력을 기준으로 정전협상에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의제를 관철시키려던 합참의 지시로 분계선 설정에서 제외된다.
1951년 10월 정전위에서 북은 옹진반도를 포기할테니 철원을 내주고 군사분계선을 38선으로 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이제 오히려 미국 측은 옹진반도 방위의 어려움을 들어 거부한다. 이 지역은 반공유격대와 미 정보부대 산하 켈로부대 등이 담당하고 있었다. 1951년 11월부터 김일성 인민군 총사령관은 반공유격부대의 서해안 기습작전을 방지하기 위해 다섯 차례에 걸쳐 인민군 1개 군단과 2개 사단에 ‘도서해방 전투명령’을 내려 경계했다. 북으로서는 유엔군의 해군력에 의한 실질적인 해안봉쇄에 대응할 필요와, 반공유격대 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군사분계선 확정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1951년 11월 27일에 잠정군사분계선을 북이 주장하던 38선이 아닌 접촉선(Contact Line)으로 하는데 합의하였다. 1951년 12월 11일 미국정부는 훈령을 통해 분계선 북방에 있는 섬들에서 유엔군 철수방침을 시달하고, 1952년 2월 3일 휴전감시문제참모장교회의에서 서해5도의 유엔군 관리를 승인함으로써 해상분계선은 설정하지 않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952년 1월 27일 1차 참모장교회의에서 유엔군 측은 그간의 합의사항 등을 총정리 한 초안 중에 ‘한강하구의 민간항행 개방’에 대한 안을 포함하여 제출하고, 1952년 2월 7일 쌍방은 한강하구 공동감시에 합의하게 된다. 개성문제나, 비행장건설 문제 등에 비하면 한강하구문제는 별 논쟁 없이 합의에 이른 것이다. 회담장 밖에서 한강하구 공동관리를 반대한 것은 남측 정부였다. 당시 한국정부의 공보처장은 한강하구 공동관리를 유엔군 측의 양보로 보고 이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며 강경하게 반응했다. 군사분계선 확정은 주로 육지에 대해서 논쟁되었고 결국 육지에만 설정되었다. 한강하구와 서해에 대해서는 군사분계선이 합의되지 않은 것이다. 군사분계선 지도에는 육지부에만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표시되어 한강하구에는 합의된 군사분계선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이를 구체화한 것은 1953년 10월 3일 군정위 제22차 본회의 ‘한강하구에서의 민용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이란 제목의 정전협정 후속합의서 4조에서였다. 이로써 “한강하구를 쌍방 민간선박에 개방한다”는 언명이 곧 쌍방이 합의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한강하구 조항과 국제하천조약의 비교
2개국 이상의 경계를 구성하거나 또는 2개국 이상을 관류하는 하천을 국제하천이라고 하며, 이러한 하천에 대하여는 조약과 관습에 의해서 모든 국가의 자유항행을 인정하고 있다. 남과 북이 서로를 공식국가로 인정한다면 한강하구는 2개국 이상의 경계를 구성하는 국제하천에 해당한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국제하천일지라도 특별한 조약이 없는 한 강연안국은 자국영토를 흐르는 하천에 대해서 외국선박의 출입을 금지하거나 자국재량에 의한 조건을 붙여 통과를 용인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혁명이후에는 프랑스혁명정부가 1792년의 법령에 의해 뮤즈(Meuse)강과 쉘데(Schelde)강을 강안국가 전부에 개방한 것이 국제하천에 자유항행을 인정하는 시초가 되어 1815년의 비인회의 최종의정서, 1856년의 파리조약, 1868년의 만하임조약, 1921년의 국제하천조약, 1922년의 다뉴브강 규정등을 거쳐 국제하천의 개방원칙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21년의 국제하천조약(1922년10월 발효)이다.
국제하천조약이란 1921년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국제연맹 주재하에 40개국 대표가 회동하여 채택한 것을 말하는데 그 정식명칭은 ‘국제관계를 가지는 가항수로의 제도에 관한 조약 및 규정(Convention and Statute on the Regime of Navigable Waterways of International Concern)’이다.
가항수로(Navigable Waterways)라는 것은 바다로 드나들기 위한 강이 수개국의 경계를 이루거나 수개국을 관류하는 수로로서 그중에 항행이 가능한 모든 부분과, 항행가능한 그 밖의 경계수로. 관류수로 중 해양과 연결되는 부분을 말한다. 자연적 가항이라 함은 어느 수로가 통상적인 상업적 항행에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자연적 상태에서 항행사용이 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수로중에는 수로의 불비를 보수하기 위해 개착된 방계운하도 포함하나, 가항수로의 지류는 별개의 수로로 간주한다. 또한 자연, 인공수로 또는 그 일부분이 국내조례나 국가간의 동의에 의해서 국제관계를 가진 가항수로에 관한 일반조약제도에 따를 것이 명백히 선언된 수로도 이 규정상의 가항수로가 된다.
국제하천조약 3조는 가항수로에서 조약국의 국기를 단 선박에 대해 항행의 자유(Free Exercise of Navigation)를 용인한다고 하였으며, 4조는 항행시 차별없는 평등한 대우의 보장을 선언하고 있다. 이같은 원칙은 한국정전협정 1조 5항에 적용된 규정과 일맥상통한다. 이 조항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국제하천에서 차별과 제한없는 자유항행의 원칙을 수립하는데 성공했음을 상징하는 핵심조항이다. 국제하천에서 자유항행원칙에 대한 대표적 사례로 윔블든호 사건이 있다.
윔블든호(The S.S. Wimbledon)사례는 독일의 국내수로였다가 베르사이유조약(제380조)에 의해 독일과 평화적 관계에 있는 모든 국가의 상선과 군함을 위해 전적으로 평등하게 개방하기로 된 키일(Kiel) 운하의 자유항행에 관한 것이었다. 프랑스회사가 고용중이던 영국선박 윔블든호가 살로니카로부터 단찌히의 폴란드해군기지로 보내는 무기를 적재하고 키일운하에 당도하자, 독일이 전시금수품의 수송방지에 관한 중립의무의 이행을 이유로 운하항행을 거절하였다. 윔블든호는 부득이 항로를 변경 덴마크해협으로 회항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이로인해 13일에 걸친 금전적 손해를 입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이 공동원고로서 상설국제사법법원에 제소(1923.1.16)하였다. 법원은 판결(1923.8.17)에서 키일운하가 독일과 평화관계에 있는 모든 국가의 상선과 군함에 대해 평시.전시에 항상 개방되어야 하고, 특히 상선의 경우 교전국에의 전시금수품수송도 허용되므로 중립국으로서의 권리의무의 원용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수에즈운하와 파나마운하에 관한 규칙이나 선례에 의하면 대규모의 국제가항수로의 경우는 교전국군함 또는 전시금수품을 수송하는 교전국과 중립국의 상선항행은 연안국 중립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하여 국제운하의 법적 지위의 일면을 분명히 하였다. 또 이 판결은 스스로 체결한 조약상의 의무에 의한 주권제한은 주권의 무시나 포기가 아니고 그 행사로 해석된다고 하였다. 법원은 판결에서 원고주장을 인정하고 독일이 지불해야할 배상액을 결정하였다.
강의 관리권(Administration)과 관련하여 국제하천조약 제12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관세관련조약이나 경찰조치, 위생예방책등의 특별협정과 관련된 반대조항이 없을 때는 국제하천의 관리권은 하천에 위치한 강안국가들에 의해 행사된다.’ 위 조약에서는 아직 관할권등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았고 관리권만이 등장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할권개념이 자유항행원칙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관리권의 행사와 항행규칙의 채택등은 자유항행을 촉진시킨다는 목적에 귀속됨을 명시하고 있다.
‘강안국가들은 항행과 그 행정을 감시하는 규정을 선포할 권한과 의무를 가지며, 이들 규정은 자유항행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항행위반에 대한 확인, 예방, 처벌등을 다루는 절차규정은 가능한 신속하게 해결되도록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약국들은 가항수로에 대한 관리권(Administration of the Navigable Waterway)과 항행규칙(Navigation Regulation)을 채택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것임을 인정한다.’
이밖에도 국제하천이 국경하천(Boundary River)일 경우에는 탈베그(Thalweg)의 원칙에 따라 주요항로, 수도의 중앙선(Principal Channel)을 취하거나 수로의 중앙선(Median Line)을 그어 국경선을 재정할 것이 19세기 이후의 조약들에서 결정되었다. 한강하구는 군사분계선도 그어지지 않았지만 강의 중앙경계선도 확정하지 않았다. 선의 경계를 확정하지 않는 것은 장단점이 있으나 분쟁가능성을 남겨둔다는 의미에서는 부정적이다. 정전협정체결 당시 한강하구 양안에서 상대적으로 군사적 우세를 가지고 있는 측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항이란 점에서는 국제하천조약보다 후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분계선이 설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군사적관할권의 범위가 설정되지 않은 것이며 이는 군사적관할권이 대폭 양보되거나 포기되었음을 의미한다.
자유항행의 철학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는 그로티우스(Hugo Grotius:1583-1645)는 1609년 출간한 ‘자유해론(Mare Liberum)에서 포르투갈이 1493년 교황 알렉산더6세의 칙령을 내세워 인도양의 독점을 주장하는데 대해 철저한 자연법이론에 입각하여 이를 부인한다. 해양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만인에게 속하는 것이므로 교황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해양을 소유할 수 없으며 스스로 소유하지 않은 해양을 타인에게 증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교황의 권한은 오로지 정신적 영역의 지배에 국한되며, 해양의 사용권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세속적 문제이므로 이러한 세속의 문제에 대해 교황은 하등의 관할권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황이 칙령을 발포한 의도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분쟁을 중재하는 것이었으며 타국의 권리를 침해할 의도를 전혀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티우스의 자유항행사상을 인용하여 한강하구에 적용한다면, 교황의 권한이 정신적 영역에 국한되듯 유엔사령관의 권한은 군사적 영역에만 국한되며 민간항행의 자유를 막을 하등의 관할권도 갖지 못한다. 교황의 칙령이 분쟁의 중재에 있었듯이 정전협정은 전투의 중지와 정전의 관리에 있을 뿐 민간인의 권리를 침해할 의도를 갖지 않는 것이다.
1923년 제네바규약에 의하면 민간선박은 연안국 국내수역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연안국은 질서유지, 보건상의 이유 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국선박의 출입을 금지할 수 없다. 부득이 항구를 폐쇄하는 경우에는 사전에 공표하여야 한다. 민간선박은 국내수역에 체류하는 동안 군함과는 달리 면제특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민간선박은 연안국의 관할권에 종속된다. 이 경우에는 영토관할권이 국기관할권보다 우선한다. 다만 이에 관하여는 프랑스 관행이 통용된다. 프랑스 관행이란 미국과 프랑스 간의 법적 관할권 분쟁사건인 Newton과 Sally 사건에서 프랑스의 Conseil d’Etat 가 내린 의견이다. 즉 선박 승무원의 책임을 구분하여 승무원들 간에 발생한 선박 범죄에는 영토국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승무원이 육지에서 범죄를 하거나, 선박내부범죄라도 승객을 손상시켰거나 승객이 가담한 경우, 선장이 개입을 요청한 경우에는 영토국이 개입한다.
정전협정은 이러한 법적문제에 대한 관할권을 다루지 않으며 한강하구에서의 항행 시 발생하는 법적문제에 대해 유엔사가 법적관할권을 행사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다뉴브강의 사례
한강하구는 정전협정 쌍방 민간선박이 공동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국제하천으로서의 성격을 일부 지니고 있다. 정전협정 당시 한강하구의 모델이 된 것으로 판단되는 유럽 국제하천의 유일한 관심사는 ‘항행’이었다. 1948년 소련이 주도한 베오그라드조약은 다뉴브강의 공동관할권을 합의한 역사적인 문건으로 독일부터 흑해에 이르는 다뉴브강 연안국가들의 자유항행을 합의했다. 공동관할권이란 배타성을 생명으로 하는 관할권의 공동소유로 관할권의 양보나 포기를 전제한다.
다뉴브강의 관리문제는 19세기 중엽부터 종종 국제문제화 되었다. 크림전쟁 뒤인 1856년에 2개의 관리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유럽 다뉴브위원회(European Danube Commission; EDC)로 영국·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러시아연방·독일·루마니아·터키 등 8개국으로 구성됐다. 그 관리 범위와 목적은 선박을 항해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기술적인 것이었으나 본질은 발칸에서의 서유럽 제국 또는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교두보로서의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또 하나는 다뉴브강 연안의 나라들을 회원으로 하는 위원회로서, 다뉴브강 전체를 관리 범위로 하는 것이었는데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들은 국제적 간섭을 바라지 않았으므로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이 위원회는 해산되었고, 그 대신 1921년 4월의 ‘다뉴브헌장’에 의해 새로운 국제다뉴브위원회(International Danube Commission; IDC)가 설치되었다. IDC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 및 독일의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양주의 각 대표로 구성되었고 소련과 터키는 제외되었다. 그 관할 범위는 전수역에 이르고 있으나 하구 부분에 관해서는 EDC(베르사유조약에 의한 임시조치로서 영국·프랑스·이탈리아·루마니아의 4개국만이 그 회원국으로 되어 있다)에 관리를 위임케 했다. 그러나 강 연안의 여러 나라들이 주권을 주장함으로써 결국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1938년 해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추축국樞軸國과의 강화교섭 때에 미국,영국,프랑스 등이 발칸에서의 기회균등을 요구하며, 다뉴브강 연안에 있지 않은 국가도 포함하는 ‘다뉴브헌장’에 따르는 국제관리기관의 부활을 제창했다. 이에 대해 베사라비아를 획득하여 새로이 연안국이 된 소련은 1948년 유고의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영·미·프와 함께 ‘다뉴브헌장’을 지지했지만 연안 여러 나라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8월 2일에 소련은 다뉴브 여러 나라들에게 새로운 위원회를 제안, 결국 ‘다뉴브헌장’은 파기되고 소련을 간사국으로 하고 갈라츠에 본부를 둔 ‘다뉴브위원회’가 탄생했다. 1953년의 갈라츠회의에서 유고슬라비아로 간사국을 교체하고 부다페스트로 본부를 옮겼다. 다뉴브강은 총 2500km의 하천계로 이강을 이용하는 화물운송은 하류 270km지점에서 징수하는 안내요금을 제외하고는 무료이다. 수문을 포함한 강 유지비용은 강기슭에 인접한 주들이 부담한다.
한편 2006년까지 14차례의 다뉴브컨벤션이 진행되는 동안 다뉴브강은 항행문제 뿐 아니라 환경, 관광, 문화교류 등 수많은 주제를 다루게 되었고 저마다의 위원회가 생겨나고 있다. 이처럼 최근에는 국제하천의 공동이용문제는 ‘항행’에서 관개, 동력, 홍수방지, 공업용수, 폐기물처리 등으로 그 관심사가 다양하고 종합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더욱이 세계적인 물의 양과 질의 저하는 인접국가 간의 분쟁을 유발하는 예민한 주제이다. 한강하구는 50년 동안, 보호되었다기보다는 방치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단 두 번의 항행이 있었을 뿐이며, 매년 홍수에 지뢰가 유실되는 경로이자, 서울과 일산 김포의 쓰레기가 일시에 쏟아져 나오는 거대한 하수구이며, 위생정책에서 헌혈을 받지 않는 말라리아 발생지역이다. 한강하구를 정전협정이 정한 ‘항행’의 틀만으로 관리하기엔 너무나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주제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있어 근본문제는 관할권(Jurisdiction)이다. 다뉴브강의 항행문제를 해결한 베오그라드조약의 핵심은 강연안국들 대표들로 구성된 ‘다뉴브강위원회의 관할권(The jurisdiction of the Danube Commission)’이다. 베오그라드조약 8조는 베오그라드회의 규정 이행의 감독, 회의의 제안을 토대로 항해의 이해관계 안에서 요구되는 중요작업의 일반계획, 다뉴브유역 국가들의 현재 계획, 특별 하천 관리권, 예산수립, 강의 조사에 대한 통제규정, 다뉴브의 수상기상 서비스, 수문학회보의 발간, 다뉴브에 대한 장단기 수문학적 예보, 항해용 지도와 해도, 항해감독 관련 작업 등의 공표, 예산의 승인과 징수 등 위원회에 부여된 관할권의 내용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항행관할권’이란 주제 하나만으로도 위의 경우처럼 다양한 기능과 사업을 필요로 한다. 이중 특별하천관리권은 다뉴브강의 저지대에 속하는 슐리나 수로(Sulina Channel) 하구지역에 대해 관리 성원국 간의 협정을 통해 관리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다뉴브위원회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로 치면 한강위원회가 관할권을 행사하고 한강하구위원회가 관리권을 행사하는 식이다. 한강에 대한 주권의 표현인 관할권은 남측 정부에 있고, 한강하구에는 인민군과 유엔사의 관리권만이 있는 것이다. 남측 비무장지대지역이 남측의 주권이 적용되는 관할지역이라고 가정하면, 유엔사는 출입자체를 불허하는 사전허가제를 통해 관할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어 관할권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마치 미대사관이 대한민국의 영토임에 분명하지만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한강하구에는 유엔사령관과 인민군사령관이 그 출입을 허가할 수 있는 권한이 배제되어 있기에 남북 정부가 공동으로 관할권을 행사하는데 유엔사라는 장애와 조우할 일이 훨씬 적다. 베오그라드조약은 관할권과 관리권의 상하관계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한강하구의 다양한 주제와 이해관계를 민족이 주체적으로 풀기 위해 근본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관할권인 것이다. 정전협정의 요구로 보나 국제하천의 과거 사례와 미래의 전망으로 보나 한강하구 관할권문제는 가장 우선순위의 해결과제이며, 모든 행사와 장단기 계획은 한강하구 민족관할권을 수립하기 위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배치하고 이바지시킬 필요가 있다.
한강하구 항행의 시도
정전협정 5항과 이에 따른 후속합의서인 한강하구에서의 민용 선박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1953.10.3. 군정위 제22차 회의 비준)에 기초하여 2005년 7월 27일 ‘한강하구 평화의 배띄우기’가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최 측은 유엔사 군정위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 행사를 유엔사와 협의하지 않고 진행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주최 측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강하구의 민간선박 항해는 유엔사의 허가 사안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 때문에 유엔사와 만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는 행사이므로 안전 문제상 협조를 받기위해 만날 의향은 있다”. 유엔사 측은 내부 상의 후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아침, 유엔사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 행사를 ‘협조’할 의향이 있다. 만나고 싶다”. ‘허가’와 ‘협조’의 차이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주최 측은 유엔사를 만나주기로 했고, 용산기지를 방문했다. 유엔군 사령부에서 만난 군정위 수석대표 캐빈매든 대령은 정전협정 1조 5항을 언급하며 “한강하구의 민간선박 항해는 가능하며 이 행사는 ‘훌륭한’(Wonderful) 계획이다”라고 주최 측을 추켜세웠다. 주최 측은 유엔사로부터 주최측이 알고 있고 의도하는 바대로 한강하구의 항행을 법적으로 확인한 것으로 결론 내렸고 다음날 곧장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다음은 주최 측이 배포한 보도자료이다.
한강하구 수역에서는 누구의 어떤 허가도 받음이 없이 배가 항해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정전협정상 유엔사는 우리의 항행에 대한 허가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05한강하구에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 준비위원회는 이 행사를 위해 유엔사에게 얻으려는 것은 ‘협조’이지 ‘허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유엔사의 협조를 구하려는 것은, 다만 이 행사에 참가하는 국민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안전하게 참여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이런 입장을 가지고 우리는 7월 8일 오후 3시, 유엔사령부를 방문하여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 비서장인 Madden 대령 등을 만났으며, 정전협정규정상 실현 가능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의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이번 행사에 대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다는 입장을 청취하였고, 국방부와 관련된 행정적 절차를 거쳐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도자료가 나간 직후 다시 매든(Madden) 대령은 직접 전화를 걸어와서 거세게 항의했다. 그는 “한강하구에 대한 관리권이 없다는 주장은 유엔사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시도이다. 정전협정 5항에 따른 후속합의서 민간선박항행규칙 9항에 ‘적대 쌍방 사령관은 자기측의 선박 등록에 적용할 규칙을 규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허가권이다. 정전협정에 대한 해석은 오직 유엔사만이 할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임의로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방부, 통일부 등에 행정적 절차를 요청하기로 한 것은 약속대로 계속 진행하겠다고 답했다. 주최 측은 “정전협정의 해석은 당사자인 유엔사도 하겠지만 여러 해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대응했다. 하지만 유엔사가 국방부 통일부 등에 행정절차를 요청하기로 한 약속에 비중을 두어 일단 그들이 ‘협조’하기로 한 것으로 해석하고 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2005년 11월 서울시가 마포나루의 거북선을 한강하구를 통과해 통영으로 보내는 행사를 하면서 서울시는 “한강하구는 비무장지대이며, 이곳을 항해하기 위해서는 유엔사령관의 허가가 필요한 것”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했고 언론은 사실관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보도했다. 정전협정상 한강하구가 비무장지대가 아님은 명확하며 언론이 검증 없이 보도한 왜곡기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보건대 유엔사는 한강하구 민간선박의 항해에 대해 통항규칙 9항의‘선박등록절차 규정권한’을 선박항해에 대한 ‘허가권’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나아가 비무장지대와 마찬가지의 ‘관리권’이 행사되는 지역임을 서울시를 통해 확인하려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서해의 북방한계선에 대해 그것이 정전협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선임에도 군사분계선으로 오랫동안 인정하다보니 실효적으로 고착되었다고 하는 유엔사와 국방부의 억지논리가 재연될 가능성을 낳게 한다.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 대한 유엔사령관의 관리권에는 비무장지대의 출입, 통과, 민사업무 등을 포괄한다. 이는 약간의 다른 절차를 통해 공중에 대해서도 행사되고 있다. 그러나 한강하구에 민간인이 출입하는 문제는 유엔사령관이 가진 권한에서 제외되어 있다. 유엔사령관의 권한에 대해서는 “항해하려는 선박의 등록절차를 정할 수 있다”라고만 되어 있을 뿐이다. 선박의 항해를 허가한다는 말이 어디에도 없다. 항해에 대한 허가는 정전협정 5항에 의해 이미 쌍방이 합의한 사항으로 재론의 여지가 없으며, 항행규칙은 이 합의사항에 대한 후속합의서로서 단지 실행규칙을 정하고 있을 뿐이다. 협정상 유엔사는 한강하구의 민간선박 항행에 대한 허가권이 없다. 때문에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를 유엔사의 허가를 얻으면 하고, 얻지 못하면 못한다고 하는 것은 전제 자체가 잘못된 출발이다. 만에 하나 어느 일방이 민간인의 항행을 무력으로 막을 수는 있겠지만 이는 정전협정과 1907년 육전의 법규관례에 관한 헤이그조약 41조의 위반이 된다. 통일부는 물론 국방부조차도 정전협정상 민간선박 항행은 아무런 법적 장애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국방부가 제기한 유일한 문제는 ‘안전’문제였다. 국방부의 답변은 “한강하구의 항행과 관련된 안전조사가 이루어지고 안전대책만 마련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전에 대한 조사와 대책을 군이 세운 뒤에”라는 조건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한강하구에는 민용선박만이 출입가능하며 군용선박은 무장선박으로서 비무장화규정 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전에 대한 조사도 민간인만이 할 수 있고, 대책도 민간인만이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군이 민간의 한강하구에 대한 안전조사와 대책수립을 돕는 것은 가능하나 결코 그 주체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이 평화의 배가 한강하구에 진입하는 것을 군병력까지 동원해 막은 것은 무리한 대응이란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주최 측은 물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제했을 뿐이었다. 당시 주최 측은 ‘우리의 다짐’이란 성명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준비위원회는 국방부의 이러한 안전상의 우려를 받아들여, 삼보해운 소속의 500톤(승선인원 300명) 선박으로는 “어로한계선 북방 800m” 지점까지만 운항하기로 하고, 한강하구 진입은 35톤급(승선인원 24명)의 작은 선박으로 바꾸어 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이 ‘작은 배’로 창후리를 출발하여 ‘한강하구선’을 살짝 넘었다 돌아오는 지극히 상징적인 ‘한강하구평화의배띄우기’를 하기로 했다. 준비위원회는 정전협정 부속합의서가 요구하는 선박등록을 위해 7월 22일 유엔사령부에 ‘작은 선박’의 한강하구 운항요청서를 작성하여 통보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국방부에 알리고, 이 ‘작은 선박’의 한강하구 운항에 대해 신속히 검토하여 줄 것과 그 결과를 7월 25일 월요일 오전까지 통보해 줄 것을 요구했다. 7월 25일 오전 11시 준비위원회는 국방부로부터 “‘7.27 한강하구평화의배띄우기 행사 협조요청 및 국방부에 대한 질의서’ 관련 회신”이라는 제목의 답신을 접수하였다. 이 답신에서 국방부는, “한강하구 내에서의 선박운행은 향후 남북 당국 간 및 유엔사-북한군 간 합의 하에 한강하구 수저水底에 대한 정밀조사와 연구를 통해 안전한 수로가 확보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늘 ‘2005 한강하구평화의배띄우기’에서 우리는 국방부의 동의 없는 한강하구 진입을 삼갔다. 그래서 창후리에서 ‘작은 배’를 띄워 한강하구 수역으로 진입하려던 우리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가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의 항해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한강하구 내에서의 선박운행은 향후 남북 당국 간 및 유엔사-북한군 간 합의 하에 한강하구 수저水底에 대한 정밀조사와 연구를 통해 안전한 수로가 확보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두 달 뒤에 서울시가 추진한 거북선 통과 행사는 성사되었다. 군사정전위편람에 의하면 2006년 11월 7일과 11일 사이 서울시가 경남 통영시와 협의하여 한강에 정박, 전시 중이던 거북선을 한강하구를 통해 한산대첩 전적지로 이동시킬 당시 수로조사선 2척과 인원 10명(조사선원 5명, 군정위 3명, 해병대2사단 2명)을 투입하여 수로조사를 실시한 후 거북선 1척과 수로조사선 2척 인원 22명(예인선에 5명, 군정위 11명, 거북선원 4명, 해병대2사단 2명)을 투입하여 한강하구수역을 경유하여 염하수로로 항행한 사례이다. 유엔사군정위는 선박등록 및 등록증을 북측에 통보했으며, 수로조사 및 거북선 이동일정 관련 대북통지문을 발송하였다. 서울시가 이 행사를 성사시키며 언론을 통해 발표한 “한강하구는 비무장지대이며, 유엔사의 허가권이 필요한 곳이다”라는 보도자료는 왜 평화의 배띄우기를 불허하고 거북선 통과를 허용했는지에 대한 의혹을 살만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뒤 한강하구배띄우기준비위원회가 두해에 걸쳐 계속 한강하구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를 추진했지만 한강하구 출입을 불허했다. 그들은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2005년의 두 가지 행사를 거치면서 더욱 심증이 굳어지는 것이 있다.‘허가권’은 한강하구의 근본문제라는 것이다.‘허가권’은 이름을 달리한 관할권(jurisdiction)이다. 그러나 정전협정부속합의서(한강하구통항규칙)에서 쌍방이 합의한 단어는 오직 ‘관리(Administration)’일 뿐이다. 관할이란 말은 정전협정의 한글본, 영어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정전협정 5항에 대한 해석
50년이 넘은 협정문이 변화된 현실을 담을 그릇일 리 만무하다. 정전협정이 폐기되기 전까지 정전협정을 둘러싼 전쟁은 해석의 전쟁이 될 것이다. 물론 해석은 문구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운동과 여론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되어 갈 것이다. 유엔사 군정위대표 캐빈매든 대령은 “정전협정에 대한 해석은 유엔사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해석의 전선을 그은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이 바로 해석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음을 시인한 것이기도 하다.
조약이나 협정에 대한 해석은 협정의 정확한 이행을 위하여 정확한 의미를 밝혀내는 법률행위이다. 조약의 해석 형식에는 원문해석, 국내해석, 해석성명, 국제해석, 비공식해석 등이 있다. 해석에서 가장 큰 법적 효과를 갖는 해석은 본문자체에 대한 해석인 원문해석이다. 국내해석은 체약국의 국가기관들이 하는 해석으로 해석의 효과는 해석하는 나라나 당사자에게만 속한다. 유엔사가 나름대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유엔사에만 효력이 있는 것이다. 해석 성명은 국내해석과 유사한 것으로 체약국이 조약의 서명, 채택 비준, 가입시에 일방적으로 하는 법률행위이다. 국제해석은 해석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생길 때 국제기구에 의뢰하거나 해석을 위한 국제위원회를 조직하여 진행하는 해석이다. 비공식 해석은 전문가들이 개별로 진행하는 해석이다. 비공식 해석은 체약당사자들에게 의무를 부과하지 못한다. 물론 필자의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본문의 해석은 문법과 역사, 논리와 체계, 판례 등을 종합하여 이루어질 때 보다 정확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정전협정은 어떤 면에서 헌법보다 우선하여 반백년 동안 우리의 운명을 규정하여 왔음에도 정전협정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우리는 그다지 성실하지 못했으며, 그러면서도 평화협정에 대해서는 논의가 앞질러 나가 있었다. 정교한 평화협정문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정전협정에 대한 해석은 더 절실한 것임을 느낀다. 다음의 해석은 물론 필자 개인의 생각일 뿐이다. 유엔사도 합의하는 게 있고, 개인적으로만 확신하는 것도 있으며, 의문만을 던지는 것도 있다. 어쨌든 정전협정은 계속 해석되어야 한다. 정전협정1조 5항에는 한강하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5. 漢江 河口의 水域으로서 그 한쪽 江岸이 일방의 통제 하에 있고 그 다른 한쪽 江岸이 다른 일방의 통제 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民用선박의 航行에 이를 개방한다. 첨부한 지도에 표시한 부분의 한강河口의 航行규칙은 군사정전위원회가 이를 규정한다. 각방 民用선박이 航行함에 있어서 자기측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륙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는다. 5. The waters of the Han River Estuary shall be open to civil shipping of both sides wherever one bank is controlled by one side and the other bank is controlled by the other side. The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shall prescribe rules for the shipping in that part of the Han River Estuary indicated on the attached map. Civil shipping of each side shall have unrestricted access to the land under the military control of that side.
(1) 강안 강안(Bank)은 강기슭으로 영어에서 복수로 쓰일 때는 양쪽 강기슭(the ~s of the Thames 템스 강변의 땅)을 뜻하고, 평상시 물이 흘러가는 하도의 측면을 의미한다. 강안은 곧 육지이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는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특히 만(灣 bay)이나 강어귀(Estuary)에서는 경계선이 모호하며 영해기준선을 설정하기 위하여 기준이 필요하다. 지도작성학의 입장에서 보면 강어귀는 만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물리적 생태적 기타 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강어귀는 만과 구별된다. 이를 강으로 취급하는 견해는 강의 흐름을 강조하고, 만으로 취급하는 견해는 강둑이 끝나는 데서 강은 끝난다고 한다. 즉 병행하는 강둑이 강의 특징이며 짠물 단물은 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반대의견에 의하면 큰 강은 만을 형성하지 않고도 입구가 넓어지는 것이 보통이며 강어귀를 규명하는데 지형보다는 물의 흐름이 중요하다. 1958년 제네바회의에서 이 문제를 끝까지 논의하였으나 결말을 짓지 못했다. 즉 1958년 영해 및 접속수역에 관한 제네바협약 13조에 의하면 단물이 그 흐름의 모양을 계속 유지하면서 바다에 닿는 경우에는 그 양쪽 둑의 간조선을 연결하는 직선을 그어 영해기준선으로 삼지만, 강둑이 강어귀에 이르는 경우에는 당초 초안에는 만으로 취급한다고 하였으나 삭제하여 문제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 1982년 해양법 협약 9조도 제네바협약 13조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한국전쟁 전까지 조강이라 불리던 이곳이 정전협정에서는 한강하구로 규정되었고, 한강하구는 육지가 일방과 다른 일방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수역을 말한다. 강이 통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지가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강 위에 위치한 두 개의 섬인 유도와 역섬, 그리고 암초, 바위 등은 인민군과 유엔사 어디에도 통제되는 곳이 아니다.
정전협정상으로 합의된 한강하구는 비무장지대가 끝나는 장단의 사천강 하류와 문산 곡릉천으로부터 강화 끝섬 말도까지로 되어 있다.
(2) 일방
여기서 일방은 북측 정부가 아닌 인민군을, 타방은 남측 정부나 국군이나 미국 정부가 아닌 유엔사를 의미한다. 협정의 법적 주체는 일차적으로 협정을 합의한 서명자들일 뿐이다. 1907년 헤이그 육전조약에 의하면 휴전에는 전체휴전(General Armistice)과 부분휴전(Partial Armistice)이 있는데 전체휴전은 교전국가가 주체가 되고, 부분휴전은 교전군대가 주체가 된다. 전체휴전의 권한은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므로 국가의 원수 및 군의 총지휘관에 의하여 체결된다. 부분휴전은 전체휴전의 준비단계나 전투범위를 제한하기 위하여 행하여지며 부분휴전의 권한은 군의 총지휘관 또는 그의 위임자 또는 독립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군대의 지휘관에게 있다. 휴전조약은 대부분 국내법상의 비준절차를 거쳐야 한다. 정전협정 서문에는 ‘서명자’들이 “정전조건과 규정의 제약과 통제를 받는데 각자 공동호상동의한다”고 하였으며, 협정 17조에서도 정전협정을 준수하고 집행하는 책임은 본 협정에 ‘조인한 자’와 그의 후임사령관에 속한다고 하였다. 즉 군인이 서명자인 점을 분명히 했다. 일반조약은 당사국 정부의 ‘위임을 받아’ 누가 서명한다는 문구를 반드시 삽입한다. 그러나 정전협정에는 그러한 문구가 실려 있지 않다. 정전협정은, 한글본에서는 영어의 ‘truce’에 해당하는 ‘정전’으로 명기했고, 영어본에서는 ‘휴전’에 해당하는 ‘armistice’로 명기하여 협정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법적으로 ‘정전’(truce)은 교전국 군대 간 합의에 의한 국지적, 일시적 전투행위의 정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정전은 전투행위의 일반적 종결을 위한 정치적 목적이 없이 중대장 이상의 단위부대 지휘관에 의해서도 체결될 수 있으며, 국내법상 비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정전은 순전히 ‘군사적’ 성질을 가진다.
정전협상 시작 전 유엔사무총장은 쌍방의 전선사령관들이 정치적 쟁점을 제외하고 정전문제에 국한시켜 협상할 것을 제안하였고, 소련의 그로미코 외무차관 또한 순수히 쌍방사령관 사이의 군사문제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있을 뿐 ‘정치적 또한 영토적 문제’는 논의에서 제외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미국무성과 합참에는 임시군사협정인 정전협정이 한국의 경우에는 장기화 될 것이라는 확신이 만연되어 있었다. 합참은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휴전은 우리가 오랫동안 유지하게 될 유일한 협정이 될지도 모르며 실제로 얼마동안 우리는 정치적 해결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감정이 특히 국무성에서 대두되고 있다.” 또한 합참은 리지웨이 사령관에게도 “휴전은 만일 성공한다면 상당히 오랫동안 한국에서‘지배적인 협정’이 될 것 같다. 때문에 일시적인 군사보장 이상의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전협상 과정은 협정당사자나 군사적 측면에서 가져올 효력의 범위에서 보면 휴전협정의 성격을 띠었다. 즉 전쟁 당사국의 최고 사령관이 서명하였고, 정치적 목적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법의 비준절차를 거치지도 않았고, 제네바 정치회담 개최를 규정하여 휴전협정이 실질적으로 한반도의 평화 수립을 위한 성격의 평화협정으로 발전하도록 하려는 초기의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하였다. 따라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당시 협정문의 영문에는 ‘Armistice’라 하여 휴전협정임을 명문화하였으나 역사적 성격이나 지위는 정전협정을 넘지 못하였다. 주한 유엔군사령관 특별고문이었던 이문항 선생조차도 정전협정은 한반도 평화를 영구 보장해주는 문서가 아니라 전쟁 당사국 사령관끼리 단지 ‘발포중지(cease fire)’를 합의한 문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 했다. 협상과정과 협정문구와 협정의 실제적용 과정을 종합해 보건대 ‘일방’은 국가가 아닌 군사령관으로 봄이 타당하다.
(3)통제
1조 5항에서 정전협정문안으로서는 최초로 ‘통제’란 단어가 등장한다. ‘통제’의 의미는 정전협정서문에 “조건과 규정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밝힌 점이나, 5항의 다음 문장에서 ‘군사통제(military control)’ 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군사통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군사통제’란 국가의 주권이나 관할권을 관철시키기 위해 특정대상에게 군사적 수단을 통한 관리와 억제를 행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Control’은 통제의 의미와 더불어 관리, 관할, 지배란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정전협정문서에는 단 한군데서도 ‘관할(Jurisdic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오로지 ‘군사통제(Military Control)’라는 단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군사통제는 영어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외세의 군대에 의한 한나라의 통제, 즉 점령”이라고 되어 있다. 단어의 의미만으로 본다면 군사통제 하에 있다는 말은 점령상태이다. 군사통제를 관할권으로 볼 것인가? 관리권으로 볼 것인가?
첫째, ‘군사통제’를 ‘관할’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같은 해석은 남북기본합의서에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1992년 8월에 있었던 남북군사분과위원회 회의에서 ‘남북기본합의서’의 제2장 남북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를 작성하기 위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불가침경계선 및 구역의 준수’의 안건을 취급할 때 지상불가침경계선에 대해 남측은 “남과 북의 지상불가침경계선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협정 제1조 2항에 규정된 군사분계선으로 한다”라는 초안을 제시하고 북측은 “지상불가침경계선과 구역은 현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라고 제시해서 별다른 이견 없이 합의했다. 여기에서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이란 ‘상대방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코리아의 구역’을 말한다고 유엔사특별고문을 지낸 이문항 씨는 해석한다. 또한 그는 말하길, “정전협정 14,15,16항은 상대방의 영토, 영해, 영공을 존중하고 침입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휴전협상 중에 유엔사 측이 Korea를 북이 주장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호칭할 것을 거부하고, 북측이 Korea를 대한민국으로 호칭하는 것을 거부해서 장기간 논의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남한과 북한을 상대방의 ‘군사통제(관할) 하에 있는 지역’으로 표현하기로 타협을 본 것이다”라고 했다. 이같은 ‘관할론’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군사통제는 군사점령을 전제한다. 1945년 해방시 미,소점령 직후 미소군정이 실시된 것과 비교한다면 정전 이후는 군정 없는 정전상태란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미군의 점령에 대한 야전교범에 따른다면 지역적 점령이 아닌 작전적 점령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작전적 점령이 전투에 의한 일시적 점령상태를 말한다면 지역적 점령은 전술적으로 치안유지 등이 확보된 상태에서 행정기능까지 수행하는 점령상태를 말한다.
1975년 유엔총회에서의 유엔사해체결의와 1978년 연합사창설과 유엔사작전통제권의 연합사로의 재위임 등과 더불어 작전적 점령의 강도가 현저히 약화되었지만 정전협정에 의한 유엔사의 남한지역에 대한 점령상태는 본질에 있어서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어쨌든 북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정전협정에선 사용되지 않은 ‘관할’이란 단어를 ‘군사통제’를 대신하여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관할’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국제해양법에서도 ‘주권적 권리’, ‘배타적 권리’, ‘관할권’등의 표현이 한 대상에 대해 조항마다 달리 사용되고 있는데 이들 용어 간의 차이가 명백하진 않다. 북의 ‘국제법사전’에는 영토, 영해, 영공 등 영역에 대한 ‘관할권’은 이들 영역에 대한 법적제도를 제정하고 그를 위반하는 온갖 행위들에 대해 엄격히 처벌할 수 있는 권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전에는 관할을 “권한을 가지고 지배함, 또는 그 권한이 미치는 범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권한은 권리와 유사하지만, 권리가 자신을 위하여 가지는 법률상의 이익인 점에 대하여 권한은 타인에 대하여 법률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일정한 지위 또는 자격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권한의 범위는 당사자의 의사로써 정하여지기도 하지만 법률관계의 명확성과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 범위를 법률로써 정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관할을 법적제도의 문제로 보는 것은 북과 마찬가지이다. 정전협정은 영문, 한국문, 중문으로 작성된 협정문본이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고 합의했으므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할 때, 합의처리 할 수밖에 없고, 합의처리하도록 하였을 때 합의가 어려운 조건에서 심판관이 필요하나 정전협정자체는 그런 구조를 결여하고 있다. 즉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정전협정의 관리와 운영은 이같은 한계 앞에서 역사적으로 번번이 좌절해야 했다.
한편 개인의 권한과 달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기관의 권한을 보통 관할이라고 하며, 관계 법률에 의하여 그 사항적事項的, 지역적地域的, 대인적對人的, 형식적形式的 한계가 엄격하게 정해진다. 권한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행위만이 적법하게 그 효력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권리, 의무가 타인에게 귀속될 수 있게 된다. 법률적관할권은 국가정책과 관리계획의 기반이 된다. 때문에 관할권의 성격과 내용이 중요하다.
군사분계선 통과나 비무장지대 출입허가는 쌍방으로 구성된 군사정전위원회에 그 권한이 있으나 군정위에서 협의하거나 집행하기 위해선 우선 각 총사령관의 승인을 얻은 뒤에나 가능하므로, 결국 비무장지대 출입과 군사분계선 통과에 대한 1차 허가권은 총사령관이 행사하는 셈이다. 이는 정전협정 17조에서 ‘정전협정의 집행책임자’로서 사령관을 규정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교전쌍방의 총사령관에 의한 비무장지대 관할권은 이 지역으로의 출입권에 대한 것으로 정전유지와 충돌방지를 위해서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평화교류와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부정적일 수 있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결국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허가나 사전승인제도는 관할권의 가장 배타적인 통제에 해당된다.
관할권의 성격과 내용에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기준은 배타성이다. 배타성의 적용 정도에 따라 통제의 범위나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해양에서의 통항제도와 관련하여 비교한다면, 허가승인제도는 사전통고제도(Prior-notice of passage)보다 훨씬 강력하고 배타적이며, 사전통고제는 통과통항제도(Transit Passage)나 무해통항(Innocent Passage)제도보다 배타성이 강하다.
비무장지대에 대한 사전승인제도는 미군정기 38선에 대한 통과제도 보다도 더 배타적이다. 이는 관할권이라기보다는 거의 영토주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영토주권은 영토 안의 모든 사람과 물건에 대한 지배권으로 북의 국제법사전에서는 영토주권을 자기 영토를 완전히 지배하고 관할할 권리로 정의하고 있다. 즉 지배권과 관할권의 결합인 것이다.
즉 쌍방사령관은 비무장지대라는 영역에 대해 출입자체를 배제하는 배타적 관할권을 통해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북의 경우는 총사령관과 주권정부가 일치하지만 남의 경우는 유엔사령관이 한국주권정부의 지휘와는 별개로, 미국정부의 지휘를 받으므로 한국정부의 국가관할권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유엔사령관의 배타적관할권 행사는 한국정부의 영토주권, 영토관할권과 충돌할 수 있고, 실제 수차례 위기를 넘기며 충돌해 왔다. 비무장지대가 갖는 긍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남측의 경우는 주권자와 군사통제권자가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조차지 보다 더 심각한 통치권의 침해를 초래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영토의 일부를 빌려준 나라와 빌려 받은 나라 사이에는 두 나라 간의 일정한 합의가 전제되어 있지만 비무장지대 남측 구역은 한국정부와 유엔사 사이에 어떤 합의도 없이 정전협정에 의해 유엔사의 일방적이고 배타적인 관할권이 행사되고 있다. 합의된 조차기간에 의해서가 아닌 언제 끝날지 모를 정전협정의 종료시점에 의해서만 유엔사의 관할권이 포기되고, 그 시점에서야 비무장지대의 영토문제에 대한 새로운 협상이 가능하고, 그 협상을 통해서만이 관할권 이양이나 위임이 가능해진다. 한국정부와 유엔사 쌍방이 아닌, 유엔사 일방에 의해 이 지역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은 점령지와 유사한 것이다. 이같은 성격은 정전협정문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정전협정 10조에는‘비무장지대 내 군사분계선 이남에 있어서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유엔군총사령관이 책임진다’라고 되어 있다. ‘민사행정’은 1943년판 미 육해군 야전교범 27-3(FM27-3)에 의하면
민정은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것이며, 국가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며, 국제법 아래에서 점령군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어 민사행정이 점령을 전제한 군정의 하위개념임을 확인하고 있다. 따라서 비무장지대에 대한 유엔사의 점령+군정체계로서의 성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1950년 10월 유엔군에 의한 북한지역 점령당시 미국과 한국 사이에 38선 북측지역이 점령지구냐, 수복지구냐 하는 논쟁과 충돌이 있었지만 정작 38선 이남지역을 유엔군이 점령지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주의와 관심이 돌려지지 않았다.
1954년 38선 이북과 비무장지대 사이에 위치한 지역에 대한 유엔사의 한국정부로의 행정통제권이양시 유엔사령관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보자.
공산지배로부터 자유로와진 이 지역의 시민대중에게 한국의 관리아래(under the administration of the ROK) 민간정부의 혜택을 누리도록하기 위하여… 유엔사는 지금 유엔사의 군사점령아래(under military occupation by the UNC) 있는 38선 북쪽지역을 한국의 행정통제(administrative control)아래로 이양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
위 서한에서 유엔사령관은 이 지역이 유엔사의 군사점령지 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을 한국정부 관리 하에 있도록 행정통제권을 이양한다고 함으로써, 관할권이 아닌 관리권만을 언급하고 있다. 관할권이 아닌 행정통제권만이 이양된 것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스스로 ‘점령군이면서 주권정부이면서, 자치정부로서의 3중 기능’을 수행했다고 규정했다. 미군정기와 달리 정전 이후는 이미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어 주권정부와 자치정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유엔사가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점령군으로서의 기능 뿐이었다. 배타적 권한을 가지는 주권정부의 수립과 통치차원에서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즉 주권과 관할권의 주체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정부의 주권과 유엔사의 관할권 사이의 관계는 전쟁기간 동안 두 번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야 말았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과 1953년 휴전반대, 반공포로석방으로 격화된 미국의 이승만에 대한 불안감은 이승만 제거계획인 에버레디계획(Plan Ever ready)으로 작성되었고, 상황에 따라 이승만을 제거하고 군사정부까지 수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지역이 유엔사령관의 관할과 군사통제 하에 있다는 사실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실제에 있어서는 남측 주권정부의 국가관할권이 일개 외국군사령관의 관할과 통제의 하위개념이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은 정전 이후 4.19, 5.16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관할권에 대한 초월적이고 배타적인 주장과 해석은 일반적인 관례에서 벗어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관할권의 가장 예민한 충돌사례를 통해 정립된 국제해양법의 경우를 보면 “일반적으로 관할권 주장은 전시나 비상시에 자국의 영해를 통과하는 외국선박의 무해통항을 규제하기 위한 예방조치로서 설정된 것들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1952년 9월 27일 도쿄의 유엔사령부에서 한국주변에 선포했다가 정전과 함께 폐기한 ‘클라크라인’은 대략 100마일 정도의 폭으로 확정된 것으로서 “한국의 연안을 보호하고,.. 적의 간첩과 밀수입자들의 한국연안에의 접근을 막기 위해 고안된 분명한 전시조치”였다. 그러나 북과 중국을 제외하면 해상방어관할권에 대한 지금까지의 제 선언은 평화시에 필요한 보호행동을 취할 목적으로 채택된 정책이다. 비무장지대에 대해 유엔사가 관할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유엔사가 현 정전상태를 평화시가 아닌 전시나 비상시로 보는 것임을 증명한다. 정전협정 서문에는 “쌍방사령관이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의 통제”를 받기로 합의하였음을 명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군사관할권에 속하는 작전권, 교전권, 점령권, 군정권 등이 제외된 것이며, 정전유지를 위한 질서와 치안유지 등의 제한적 내용과 목적만을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전협정이 정한 민사업무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참고할 기준은 1945년 점령계획을 수립하던 3성조정위기록이다. 3성조정위의 육군성 요원들은 현지사령관들이 민정업무지역에서의 정치적 책임에 대해 주의 깊은 충고를 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5년 5월 극동분과위 초기 회합에서 스트롱(George V. Strong)소장은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국무성 정책이 군사령관의 판단에 따라 수행할 수 없는 것이라면 초기의 그의 행동은 적어도 군사작전에 필요한 정도까지만 민정을 구성하고 법과 질서의 유지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사령관은 장기적인 정치적의미를 갖는 일들을 회피하도록 지시받아야 한다.
따라서 전시, 위기시를 전제한 배타적 관할권인 허가권, 승인권의 행사는 정전협정 서문에서 천명한 정신과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군사통제를 관할권이 아닌 관리권(Administration)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군사정전협정의 성격을 국제적 국경과 국제항로의 통행권등과 관련된 영토협정으로 보거나 완충지대를 사이에 두고 서로 관할영역을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의 정전협상은 협상개시 전 소련이나 미국 모두 영토나 정치문제를 제외한 순수한 군사적 사안만을 협의하기로 했고, 그것은 정전협정 서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협정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인 성질에 속하는 것”으로 천명되었다. 따라서 정전협정이 영토협정이란 주장은 한반도의 정전협정에 적용하기는 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통제가 국가의 입법, 사법, 행정관할권 중 행정의 군사분야에 위임된 집행권한이며 그나마 일부권한인 점을 고려한다면‘통제’란 법적관할권의 범주이기 보다는 관리(Administration) 또는 관리권의 범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그렇지 않다면 유엔사령관은 미군정기 일제총독과 같은 무제한의 입법권을 행사했던 군정사령관과 다른 점이 없게 된다.
1951년 11월 27일 정전회담에서 유엔군 측이 제시한 원칙 중 마지막항에 의하면 “군사지휘관은 비무장지대 중 자신들의 부분을 휴전협정 조항에 맞게 ‘관리’한다”고 진술한 점에서 비무장지대에 대한 군 지휘관의 권한의 실제 내용은 관할권이 아닌 관리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점령지에서의 군사관할권행사는 군사정부의 법원을 통해 시행된다. 따라서 유엔사가 이 지역을 점령했다 해도 군사정부가 수립되고 군사정부법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군사통제’는 주권정부의 통제아래에 있는 인민군 측과는 달리, 한국정부의 통제아래 있지 않은 유엔군 측에 대해서는‘관리’의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엔사의 군사통제를‘관리’로 이해한다면 2000년 11월 17일과 2002년 9월 12일 경의선과 동해선지구의 남북관리구역에 대한 유엔사와 인민군 간의 합의서에서 유엔사가 이 구역에 대한 관리권을 한국군에게 넘기는 것으로 합의한 것은 이 구역에 대한 실질적인 모든 권한을 넘긴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2002년 유엔사는 남북지뢰상호검증단 교환을 가로막으면서 군사분계선 통과는 유엔사의 허가사항 임을 주장했다. 유엔사의 논리는 한국군에게 관리권은 넘겼으나 관할권은 여전히 유엔사에 있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부나 군사정부법원이 존재하지 않는 점, 정전체제 아래서 전시 군사관할권에 해당하는 사전출입허가제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비무장지대에 대한 유엔사의 관할권 주장이 점령+군정체제 임을 반증하는 것이란 점에서, 이는 유엔사 스스로도 부담을 안게 될 무리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보기를 들어, 민간인이 유엔사의 허가를 받지 않고 비무장지대에 들어가거나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전시국제법에 의하면 민간인의 정전위반은 처벌할 수 없다. 정전협정 13항 (ㅁ)목에 정전위반자에 대해 사령관은 적절하게 처벌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나 그 대상은 민간인이 아닌 자신의 지휘아래 있는 인원 즉 군인이다. 군인이 군법에 따라 민간인을 처벌하는 것은 계엄령상태나 전시상태이며 노골적인 점령정책이 집행되는 군정상태일 것이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탈출죄나 군사시설보호법, 자연환경보전법등 국내법을 무리하게 적용하는 경우가 아니면 정전협정을 위반한 민간인을 처벌할 법적근거가 정전협정에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강하구에 대해서는 육지의 비무장지대에서와 같은 허가권이 아예 포기되었다. 한강하구 자유항행 건은 정전협정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민에게 선물을 준 것처럼 생색을 냈을 정도였다. 1952년 2월 리지웨이 사령관은 정전협상 반대여론을 의식하여 한강하구는 양측의 선박운항에 개방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음을 공표했다.
정전협정의 규정이나 규정을 실행하기 위한 규칙 어디에도 한강하구 민간선박 항행에 대한 허가권 언급이 없음에도 유엔사나 인민군이 군사관할권을 주장할 수 있을 경우는 정전협정이 파기되고, 전쟁으로 돌입하여 ‘적대행위와 무장행동’에 대응한 작전, 교전, 점령, 군정 등 모든 군사관할권이 부활될 때이다. 거꾸로 말하면 한강하구에 대한 배타적 관할권 행사인 허가권 주장 운운은 전시군사통제 상태로의 복귀와 ‘점령+군정체제’의 부활이라는 오해와 논쟁의 소재가 될 가능성이 크다.
(4) 협정문은 일방이 통제하고 ‘있었던’이 아니라 ‘있는’으로 현재형이다. 북측지역이 현재 인민군의 군사통제 하에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남측이 현재에도 유엔사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가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유엔사는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면서 작전통제권을 모두 위임(Reference)했다.‘위임(Reference)’은‘이양(transfer)’과 다르다. ‘권한의 위임’은 권한 귀속주체의 변경을 초래하나 이를 취소할 수 있는 지휘·감독권을 주체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반면에 ‘권한의 이양’은 권한 자체가 확정적으로 이전되는 것으로 이양주체의 지휘·감독관계까지도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엔사에서 연합사로의 한국군작전통제권 이동에 대해 ‘위임’과 ‘이양’을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1950년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이양’했고, 1978년 유엔사는 한미연합사에 ‘작전통제권’을 ‘위임’했다. 1994년에는 정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위임했다. 정전시작통권위임으로 정전협정체제하에서 한국군은 남측지역을 ‘군사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비무장지대 및 한강하구에 대해서는 인원, 장비, 선박의 출입통제 등 정전업무에 관련된 부대활동의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4년 위기조치 절차를 익히는 래피드썬더 연습시 럭 사령관의 이의제기로 정전시위기관리권이 이 위임사항에서 제외됨으로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정전협정 17조에 명시된 사령관의 집행책임도 한국군은 행사할 수 없었다. 이것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가 논의 되는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석연치 않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특전사는 연합사에 부여된 한국군 부대목록을 일방적으로 해제하고 이동한 것인데, 이를 합리화할 수 있는 논거가 바로‘위임’이다. 한편 작전통제권이 연합사에 이양된 것이라면 한미연합사는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정전협정의 일방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미연합사 창설 공문은 연합사령관이 유엔사령관직을 겸임하는 동안이란 조건이 전제되어 있고, 유엔사의 한국군작전통제권을 한미연합사에 ‘위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유엔사가 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행사를 취소시키고 환수할 수 있는 지휘, 감독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연합사가 해체되더라도 유엔사의 한국군작전통제권은 언제든지 큰 장애 없이 복원될 수 있는 것이다. 정전협정 5조 61항은“본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 및 증보는 반드시 적대쌍방 사령관들의 상호협의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미연합사에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을 위임한 것은 정전협정의 상대방인 인민군이나 중공군과 전혀 합의 없이 이루어진 일이다. 78년 연합사는 남측지역의 작전통제권을 위임 받았으므로 법적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실질적으로는 남측지역을 통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언제든 유엔사에 의해 취소될 수 있으므로,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유엔사에 있는 셈이다. 궁극적으로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은 소멸되지 않았다. 그리고 1950년 6월 유엔안보리 결의에 의한 ‘개전권’과 10월 유엔총회 결의에 의한 ‘북측지역의 점령통치권’은 남측 정부나 미국정부와는 무관한 권한이므로 여전히 존속된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주일미군 후방기지 사용권과 자위대 동원권도 한국군에게는 위임 불가능한 권한이다.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서도 유엔사령관 자격으로 미군은 물론 한국군과 주일미군 자위대에 대해서도 작전통제 하에 둘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또한 연합사 해체와 더불어 유엔사는 작전통제 할 부대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은 사령부처럼 보이지만 한국군과 관계없이 군사분계선 남측 비무장지대를 군사통제하는 주체의 지위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강안의 군사통제 문제와는 별개로 한강하구 수역 내에 군사나 행정 등 어떤 성격의 중간선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강의 통제권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5) 쌍방의 민간선박의 항해에 한강하구를 개방한다
쌍방 민간선박의 항해에 한강하구를 개방한다는 이 조항이 바로 핵심이다. 정전협정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50년 간 한강하구는 비무장지대로 인식되어 왔고, 유엔사가 관리하는 수역으로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정전협정 1조 5항과 이에 따라 항행규칙을 다룬 후속합의서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듯이 한강하구는 군사분계선도 없고 비무장지대도 아니며 인민군과 유엔군 어느 일방이 관할하거나 관리하는 것과는 무관한 민간공용수역일 뿐이다. 군용선박이나 정부선박이 아닌 민간선박에게만 그 사용이 합의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강하구는 민간에게 부여된 분단의 해방구와도 같은 곳이다. 이는 정전협정 서명자인 쌍방사령관이 합의한 것이고 이에 따른 자세한 항행규칙은 쌍방의 공동기구인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정하도록 했다. 이 조항에 의해 육지의 남측 비무장지대의 출입과 군사분계선의 통과에 유엔사령관의 허가가 필요한 반면 한강하구의 항행에는 유엔사령관의 허가가 필요 없음을 규정하고 있다. 단어의 개념을 신중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쌍방’은 교전자인 유엔군을 일방으로 하고 인민군, 중공군을 다른 일방으로 한다. 전시국제법에서 교전자는 국가와 그 국가의 군대 중 군대를 의미한다. 교전자가 아닌 중립국은 교전쌍방에 대해 중립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 한강하구 항행규칙에서는 중립국 선박의 항행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교전쌍방 선박이라 함은 남북의 선박 뿐 아니라 유엔군 측 16개 참전군과 중공군 측을 포함하여 총18개국 민간선박이 쌍방선박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유엔사는 이들 참전국의 선박항행을 유도함으로써 유엔사를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질 수도 있다. 한편 이들 참전국의 민간단체들이 유엔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상징적 항행을 한다면 그것은 유라시아와 세계 차원의 민간평화운동이 연대, 연합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민간선박’이다. 민간선박은 어선만이 아니라 여객선, 탐사선, 상업선, 바지선, 채굴선, 구조선, 유조선 등 군용이거나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는 민간선박을 제외한, 모든 선박이 된다. 김포와 강화 간, 강화와 교동 간 한강하구 인접수역에 설정되어 있는 어로한계선은 100톤 미만의 어선에 대해서만 규칙의 적용대상으로 하고 있다. 어선만 아니면 다른 용도의 배들은 모두 해수부 선박안전규칙에서 정한 어로한계선을 통과하는데 있어서 일단 법적문제는 없는 것이다. 이는 해수부와 국방부 등 정부에도 교차확인한 사항이다. 때문에 현재의 규칙아래서 100톤 미만의 어선을 제외한 모든 민용선박은 한강하구 항행에 아무런 장애도 없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항해(shipping)’이다. Shipping은 50년 전엔 쓰였지만 지금은 거의 폐기된 단어로 현재 협정문 등에 일반적으로 쓰이는 법률용어는 Navigation이다. 정전협정에는 민간선박의 항행에 대해서만 개방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후속합의서 4항에서는 민간인으로 그 대상을 다시 확인해주고 있다.
“정전협정 중 군사분계선을 확정함에 관한 규정과 제9항, 제10항 및 제13항목에서 사민이 비무장지대에 들어가는 것을 제한하는 각항 규정을 제외하고 비무장지대에 적용되는 모든 규정은 모두 한강하구 수역에도 적용한다.”
비무장지대 출입에 있어 적용되는 모든 규정 중 민간인을 제한하는 규정을 제외한다고 했다. 위에서 사민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다. 선박항행과 관련된 선원만이 아닌 민간인 일반을 지칭한다. 교동주민들의 관습으로 정착되어온 조개잡이나 통발 등 선박항행 이외에도 민간인의 출입은 가능해왔고 앞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군 사령관에게 부여된 관리권이 입법, 사법, 행정관할권을 갖는 것으로 해석되진 않기 때문에 법률을 정하고, 법적제재 조치를 가할 수는 없다. 공물 관리권에 의거 판단하면 비무장지대 관리권의 위반자에 대한 최고의 제재수단은 비무장지대 출입으로부터의 배제이다. 그러나 한강하구는 민간인의 출입이 개방되어 있음으로 해서 출입배제라는 효과적인 제재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민간의 권한을 그냥 행사하면 되는 것이다.
(6) 항행규칙은 군사정전위가 이를 규정한다 항행규칙은 사령관의 한강하구 관리권을 실행하기 위한 내부 규칙이다. 규칙에 대한 법적이해를 정리하고 가자. 행정규칙은 행정권 행사에 대한 내부적 규율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외부적 사항을 규율하는 법규명령과 구별된다. 이러한 행정규칙은 민간인이나, 국민에 대해서는 직접 효력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법규로서의 성질을 가지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행정규칙은 제정에서 특별히 법률의 근거가 필요하지는 않으며 행정권에 내재하는 권능(지휘감독권·재량권)에 의거하여 제정할 수 있다고 본다. 법률제정권한은 입법관할권에 속하지만 규칙의 제정은 행정권한 내에서 이루어지는 내부의 조치로서 입법관할권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행정에서 훈령·통첩·고시 등의 행정규칙은 실제에 있어 법률 이상으로 국민생활이나 행정조직 내부에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음이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순전히 행정조직 내부에만 적용되는 행정규칙은 종래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법규성이 부인되지만, 국민의 자유와 재산권에 영향을 미치는 행정규칙의 경우는 그 법규성이 인정되어 법치행정의 적용을 받는다. 50년 전 군정위가 현대적 행정규칙을 적용하여 입법관할권을 행사했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군정위의 지위와 활동은 사령관의 비무장지대 관리권의 범위 내에 있고 민간인에게 법률적 강제를 행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긴 힘들다. 군정위 항행규칙이 민간인들에게 법적 강제를 규율하거나 집행되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이는 군정위가 사령관의 관리권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관할권을 행사한 것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유엔사의 한강하구 항행과 관련 허가권 논쟁을 일으킨 것은 한강하구 민간선박 항행규칙의 9항이다. 그 내용은‘적대 쌍방 사령관은 자기 측의 선박 등록에 적용할 규칙을 규정한다.’이다. 비무장지대에서의 허가는 통행의 권리를 근거짓는 수권행위라고 할 수 있다면, 한강하구에서의 등록절차는 항행의 권리를 수권하는 행위가 아니라 권리의 존부를 확인하는 절차적 요건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즉 항행의 권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등록에 따라 실행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유엔사는 신청자들이 일정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통항을 허용하여야 하며,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일종의 기속(羈束)행위인 것이다. 한강하구에서의 유엔사의 ‘허가권’은 비무장지대에서의 ‘특정한 허가’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 행정법학의 구분을 원용하면, 비무장지대의 출입은 허가 사항이고, 한강하구의 항행은 확인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의 경우로 비유하자면, 비무장지대의 출입 허가가 건축 허가에 해당한다면, 한강하구의 등록절차는 건축물의 준공검사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한강하구가 휴전에 관한 국제법의 적용지역이라고 하여도, 민용선박의 항행이 (육상의 비무장지대와 같이) 일반적으로 금지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휴전협정에서의 수에즈 운하의 무해통항을 방해할 수 없다는 유엔의 유권해석에서 처럼 정전에 대한 국제법 일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전협정에서 한강하구를 민간에게 개방하는 규정을 두었기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한강하구에서의 민간 항행은 일반적으로 허용된 것이며, 다만, 이후의 적대행위를 초래할 위험성을 감안하여 그 허용성이 제한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대행위와 위험성이 명백하지 않은 경우라면 그것은 의무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
적대행위와 군사적 충돌과 무관한 이상, 한강하구의 민간 이용에 대한 유엔사의 등록절차는 결코 고권적(高權的) 명령행위가 아니라, 다만 민간의 평화적 이용권을 확인하는 협력적 확인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엔사의 등록절차는 ‘금지를 해제하는’ 허가가 아니라, 단지 자유의 행사를 인정하고 그것이 휴전체제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해 주는 절차라고 할 것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거나 유엔사가 해체되기 전에 한강하구에서의 유엔사의 관할권을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 관할권을 마치 전시(戰時)의 통치권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비무장지대의 경우와 같이 고권적(高權的)사전허가권과 같이 생각하는 것 또한 착각이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군사정전위나 공동감시소조는 민사행정경찰등을 통해 정전관리업무를 실행한다. 한강하구 항행규칙 10항 ㄴ목에는 ‘군사정전위원회, 공동감시소조 및 민사행정경찰의 조사와 수색에 복종한다.’고 정하고 있다.
국제하천조약과 비교하면 국제하천조약이 관세, 수색, 검역(CIQ)업무에 위반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유항행을 보장하는데 비해 정전협정은 3가지 업무중 수색, 즉 경찰조치에 대해서만 집행,감독을 수행한다. 그러나 조사와 수색은 정전을 위협하고 적대행위를 초래할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 제한적으로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민간경찰의 업무처럼 사법처리를 전제한 수사가 된다면 군정위가 사법적관할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우리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 반대로 칙을 위반하고 복종하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면 현장에서 통제를 가할 수는 있겠지만 규정위반에 대해 처벌할 권한은 없다. 그것은 주권정부인 대한민국의 사법관할권이 작용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유엔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같은 사실을 군정위가 보고하고 논의하는 것뿐이다. 유엔사특별고문이었던 이문항의 증언대로 군정위는 양측의 주장이 충돌할 때 이를 심판할 제3의 심판관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군정위에 심판, 즉 사법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정전협정의 범위를 넘어선 주권행위이거나 통치행위가 될 것이다.
항행 규칙은 1953년 10월에 정전협정의 부속합의서로 합의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항행규칙의 제정 주체가 유엔사나 인민군 일방이 아닌 양측의 합의에 의해서만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군사정전위원회라는 것이다. 협정의 조항(Terms)은 사령관이 제정주체이지만 항행규칙(Rules)의 제정주체는 군정위이다. 군정위가 정한 규칙과 그 해석, 적용은 유엔사 일방이나 인민군 일방의 자의석 해석이 아닌 공통의 해석과 합의에 기초한다는 사실도 간과되어선 안 된다.
(7) 자기측의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다 상대방 육지로부터 100m 안으로 진입할 수 없도록 한 군정위 항행규칙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 육지를 연결하는 종적 항행, 즉 도선은 미군의 군사지도에 나타난 도선로를 통해 1970년대까지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나 지도에서 도선로가 사라진 그 이후로는 규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강하구의 횡적항행은 어떤 제한도 가할 수 없다. 해양법에서는 통과통항이나 무해통항을 규정하고 있고, 한강하구의 성격을 국제하천으로 보면서 무해통항권 등을 대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통항제도는 영해에 해당하는 것이며 내수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국제법에서 내수와 영해의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영해는 내수에 비하여 더 한층 주권의 제한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외국선박에 대한 관할권의 적용규칙이 상이하며 또한 무해통항권은 내수의 경우에는 특별한 경우(해양법 8조 2항)를 제외하고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내수에 머물고 있는 외국선박에 대한 재판관할권에 있어서 연안국과 기국旗國 간의 경합관계가 특히 문제된다. 한강하구의 쌍방선박을 남북선박이 아닌 유엔참전국과 중국선박으로 본다면 국내법으로는 외국선박이 될 것이고, 정전협정 상으로는 제3국 선박이 아닌 것으로 될 것이다. 전시에는 일반법의 적용이 중지되고 전시법이 적용되므로 정전상태인 우리로서는 정전협정이 일반국제법보다 우선 적용된다. 그러나 정전협정이 이토록 오래 지속될 것을 예상한 나라는 없을 것이고, 중국이나 16개 참전국에게 국제법이 아닌 정전협정을 적용한다는 것은 과연 타당한지, 또 실질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다. 오래전부터 국가의 내수에 대한 배타적 권리는 영토에 대한 것과 같다는 생각과 선박은 ‘부동하는 국가영역’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비난이 가해져왔지만, 한편 선적에 관한 법은 선박의 국적에 따르는 것이고, 기국이 자국선박에 대한 책임과 관할권을 가지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선박의 특수한 성격은 아직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내수인 한강하구에 선박이 항행하는 문제는 위의 소박한 규정만으로는 도저히 관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또한 해양법 18조 2항에 의하면 “통항은 계속적이고 신속하여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서 고의적인 정선停船이나 어로활동, 탐사, 조사 등을 금지하고 있다. 한강하구에 부여된 권리는 통과항행 만이 아니라 어로활동 등 광범위한 어업, 탐사 등을 포괄하는 항행으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해나 국제하천의 통항제도와는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사임시협정이란 한계에 의해 정전협정은 항행에 수반되는 제반문제를 충분히 다루고 있지 못하다. 그나마 항행규칙이 후속합의서로 합의되었지만 그 역시 소박한 수준을 면키 어렵다. 베오그라드조약은 이미 1948년에 항행관련 제반사항을 종합하는 관할권을 다뉴브강위원회에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정전협정상 한강하구 조항은 매우 소박한 수준의 규정이었고, 미국은 정전의 장기화를 예상하거나 의도했지만 50년 이상 장기화될 것에 대한 준비까지는 부족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50년 간 실제로 선박의 자유항행이 이루어져 왔다면 이 조항만으로는 도저히 항행관련 관할권의 문제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1968년 이후 자기 측의 강안에 철책을 설치하여 배를 대는 것 자체를 제한함으로서 정전협정의 평화체제로의 발전은커녕 후퇴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항행규칙에는 선박의 출발항과 목적항을 기재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강하구수역에 배를 댈 수 있는 정박지는 물론 단 하나의 기항지조차 없는 실정이다. 정전 직후에는 김포 조강포, 강화 월곶 등이 포구로서 이용되었음을 지역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철책 설치와 함께 항구는 폐쇄되었다. 이는 처음부터 의도되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1968년 정전체제 최대 위기의 해를 거치면서 고착화된 결과이다. 체제가 협정을 압도했던 것이다.
유엔사에 대한 법적대응
위의 근거들에 의해 한강하구에서의 민간선박항행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군은 어디하나 불법의 요소가 없음에도 4년 동안 7.27한강하구평화의 배띄우기 위원회가 적법하고, 도의적이며, 정중하게 협조를 요청한 한강하구 진입자체를 무단으로 막아왔고, 정전협정의 준수하고 관리할 의무를 지닌 유엔사 역시 허가권을 내세우는 등의 논리로 한강하구항행을 금지시켜 왔다. 그 결과 위원회는 항상 막대한 손해를 입어야 했고, 그 결과 올해에는 행사자체를 시도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에 위원회는 국방부와 유엔사에 대해 법적대응을 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한국정부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신청하는 조치가 가능함을 2008년 유정복의원실 주최 토론회에서 설창일 변호사가 주장하였다. 그럼 유엔사에 대해서는 어떤 법적 대응이 가능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유엔사에 대한 법적 대응에는 두가지가 검토될 수 있다. 하나는 국재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미국정부에 고소하는 것이다.
첫째, 국제사법재판소는 국가만이 재판의 당사자가 될 수 있으며, 국제조직은 당사자가 될 수 없고 개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가와 국제조직간의 분쟁이나 개인과 국가,국제조직간 분쟁은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범위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국제연합의 총회나 안전보장이사회 또는 기타의 기관은 법적 문제에 관해 재판소의 권고적 의견의 제시를 요청할 수 있다.
또한 이 권고적 의견의 효력을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약정하는 특별협정을 국가와 국제 조직간에 체결 할 수 있다. 개인의 분쟁을 국가가 대신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은 가능하다. 위원회측의 문제제기를 대한민국이 위임받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이 방법이 현재 가능한 방법인지는 의심된다.
둘째, 미국법원에 고소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가지 정도가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공소소멸시효와 관할권문제이다. 우리나라 민법에 정한 공소소멸시효는 사건을 인지한지로부터 3년 사건이 발생한지로부터 10년이다. 미국도 이와 유사하다면 공소소멸시효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은 관할권이다. 즉 유엔사의 위법행위가 미국법원의 관할사항인가이다. 이는 유엔사령관을 지휘통제하는 것이 유엔사무총장이나 유엔군사참모위원회가 아닌 미 합참의장이란 점, 1994년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이 유엔사는 유엔의 어떠한 기구도 아니라고 확언을 한 점등이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엔사가 유엔기관인지 아니면 미국정부 관할하에 있는 기구인지 역사전개와 법적구조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군사참모위원회와 유엔군사령부
유엔헌장은 집단안보조치를 위해 유엔군사참모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정하고 있다. 유엔헌장은 집단안보의 지휘명령이나 운영체계에 대해 오직 일반 원칙과 절차만 언급할 뿐 구체적 규정은 없다. 이에 대해 헌장은 특별협정을 통해 조직운영에 관한 구체적 안이 마련되는 것을 상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군대의 숫자와 종류 그들의 준비상태, 그리고 일반적인 위치, 제공될 시설과 원조의 성격’(43조 2항),’국가 공군력의 준비정도와 연합국제작전계획’(45조)이 세부적으로 협의되게 되어 있다. 또한 지휘문제는 추후 해결해도 군사참모위가 전략적 지도에 대한 책임(47조 3항)을 지도록 되어 있었다.
이처럼 유엔 산하 군대의 구성과 성격은 안보리의 명령에 따라 동원될 수 있는 국제상비군이나 국가별 대기군을 상정한 것이었다. 군사참모위의 구체적 운용을 위해 안보리는 1946년 그 첫 조치로 이 위원회로 하여금 유엔 헌장 43조에 의거, 군사협정에 관한 문제를 검토, 보고하도록 요청한 바 있었고, 또한 1946년 12월 유엔총회가 안보리의 군사적 수단 확보의 가속화를 권고하면서 군사참모위로 하여금 1947년 4월 30일 이전에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했다.
군사참모위는 41개 조항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중 25개 조항은 군사참모위 구성국 간에 무난히 합의되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16개 조항은 합의에 실패했다. 즉 군대 규모와 구성, 기지의 제공, 평시의 주둔지, 철수시기 등을 두고 미국과 소련 간에 크게 대립되었기 때문이다. 딘 러스크는 그의 자서전에서 군사참모위원회의 실패에 미국의 책임이 컸음을 인정하고 있다.
유엔초기시절에 우리는 유엔헌장을 앞세워 진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기를 원했다. 우리는 다른국가 정부들과 우리국무성, 육군성과 함께 유엔안보군의 규모와 성격, 그 군대배치시의 절차등에 관해 자주 토의를 가졌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서 권투연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리와 소련은 의견을 같이 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미국이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리 미국은 2차대전으로 인해 단지 지상군만 충분히 보유하고 있던 소련보다 훨씬 강한 해군력과 공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우리들 특히 합참에서는 안보군에 있어 미국은 주로 공군력과 해군력에 주력하여 기여할 것을 원했고, 반면 소련이 지상군을 더 많이 담당해줄 것을 원했다. 그들은 총에는 총, 사람에는 사람, 비행기에는 비행기, 배에는 배등 모든 부문에 걸쳐 대등한 입장을 주장했다. 합의는 무산되었다. 소련은 우리가 너무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그런 점이 있었다. 이등국으로 취급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그들로서는 유엔안보군의 성격이 내포하는 열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대신 유엔은 캐나다, 스웨덴, 아일랜드, 나이지리아와 같은 중간규모의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군대쪽으로 추진하였는데 이 국가들은 강대국으로서의 지위가 없고 세계가 이 국가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어느 누구도 이 국가들이 영토확장의 야망을 품고 있으리라 비난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의 연합군 구성과 지휘문제를 다룬 야전교범에 의하면‘미국이 다른 나라의 군사적 지휘를 받는 일은 없다’고 명시하여 타국 군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 지휘.통제권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미군에게 있어서 유엔의 지휘를 받는 군대의 구성과 지휘관계의 수립은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또 미래에도 군사교리가 바뀌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유엔의 지휘명령에 관한 체계는 유엔헌장이 상정한 제도적 장치를 구현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므로 유엔 집단안보체제는 헌장에 규정된 군대나 표준화된 지휘,명령 조직에 대한 구체적 규정을 갖지 못한 채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무기력했던 유엔을 한국전에 끌어드림으로써 유엔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엔군사참모위를 정비하고 강화하는 대신 미국은 유엔헌장 어디에도 없던 사령부 창설을 주도하면서 유엔의 대의를 실천한다는 명분과 유엔을 미국의 이익에 따라 이용한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유엔헌장의 변형이란 측면에서 보면 참전결의보다 유엔사창설 결의가 더 극적이고 노골적이었다.
1950년 7월 7일 유엔사(통합사)창설 결의 역시 소련이 불참 중이었으므로 미국의 역할이 지배적이었고, 이에 대해서도 비판에 직면했다. 군사력과 그 밖의 원조를 미국 통제 하에 있는 통합사령부에 제공하게 했던 것은 유엔의 권위에 대한 지나친 잠식이라는 것이다.
테시스(Thesis)는 유엔헌장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될 수 없는 상황, 즉 유엔사령관이 미국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이런 상황은 미국이 한편으로는 유엔헌장의 대의 하에 전쟁수행을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행동의 자유가 제한받는 것을 꺼리는 모순적인 태도’로 나타났다.
1947년 군사참모위 합의 실패 후 소련이 공석중인 안보리를 이용한 미국 주도의 전광석화 같은 군사조치로서의 유엔사 창설은‘집단안보’의 핵심이 될 유엔 군사무력기구 구성의 실패의 심각성을 더 극단으로 몰고 간 사례가 되었으며, 이 심각성의 후과는 이후 유엔헌장 106조에 의한 임시적 군사조치의 합의도 기대할 수 없게 하였다는데 있다.
유엔사의 미군화
유엔군사참모위원회의 실패를 공식화하게 될 새로운 유엔의 사령부를 구성해야 할 과제 앞에서 미국정부와 유엔과 주한군사지휘부 간 3자 관계에서는 전쟁의 정치목표 수립, 전략지침, 의사소통 또는 통신계통문제 등 전쟁 수행의 기본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미군에게나 유엔에게나 부분적인 해답을 줄 경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험의 결여-군사참모위 합의 실패 후의-는 새로운 창안이 될 가능성보다는 1947년까지의 군사참모위 논쟁에서 소련의 주장을 제거한 미국 주도의 제안이 될 가능성이 뚜렷해졌고 결국 그렇게 진행되었다. 안보리는 유엔군에 대한 정책결정을 할 수 있는 군사적 자문을 얻기 위해 헌장47조에 표시되어 있는 “군사참모위원회”를 이용할 수 없었다. 동 위원회에는 소련대표 I.A.Skliarov 소장이 있게 되므로 안보리는 군사적 상황과 계획을 광범위하게 논의 할 것을 기대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체하는 기관을 필요로 했다. D. G. Acheson 국무장관은 소련대표의 출석 때문에 안보리에서도 만주지역에까지 적을 계속 추적할 것인지의 정책문제를 논의 할 수 없다고 언명했다. 소련과 함께 한국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지휘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이미 그 가능성이 부정된 상태였고 ‘집단안보’의 합의정신은 ‘세력균형’의 패권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는 40년 뒤 두 번째로 안보리 결의에 의해 걸프전 참전이 결정되었을 때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유엔사(통합사)창설 초안은 국무부로부터 먼저 제기되었다. 1950년 7월 4일 합참은 국무부로부터 결의안 초안을 접수했는데 이는 국제군대의 창설지침을 담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에서 싸우는 모든 군대는 통합군사령부에 두되, 미국이 지명하는 한 장교가 지휘한다. 이 사령부가 유엔기를 사용하는 것을 인가하되 그 휘하에 작전하는 회원국의 군대도 유엔기의 사용이 인가된다. 미국에게는 그 사령부에 의해 취해진 작전에 관한 ‘주기적인 보고서’를 유엔 안보리로 제출하도록 요청한다. 이 보고서는 유엔 안보리 특별위원회로 제출된다. 이 특별위원회는 유엔 회원국으로부터 원조 제의를 접수하여 통합군사령부로 통보하며 6월 25일과 27일 결의를 지원하기 위해 유엔회원국이 취한 조치에 관해 안보리에 통지한다는 것이다.
트리그브 리(Trygve Lie)유엔사무총장은 자서전에서 그가 작성한 안은 안보리가 제의한 특별위원회에 보다 뚜렷한 역할을 부여하게 될 것이란 점에서 미국무부 안과 차이가 있었다고 했다. 이 특별위원회는 한국전 수행을 감독할 목적으로 제안되었으나 리 사무총장은 미국이 이를 거절했다고 했다.
이 특별위원회는 국무부 초안이 합참에 전달되었을 때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그들은(합참) 그 조항을 완전 삭제하길 희망했으나 그것을 포함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만약 설치한다면 그것의 기능을 국무부 초안에 열거한 사항에 국한시키고 그것이 한국에 주둔하는 군대에 대한 작전통제를 하려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합참은 안보리 특별위원회가 곧 군사참모위라고 인식할 만큼 민감하게 반발했고 미군 교범의‘지휘의 통일’원칙이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더군다나 정상적인 지휘 절차와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위원회와 통합군사령부 간의 통신 회선은 미국 정부를 통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맥아더 장군과 안보리 간의 의사전달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하여 지휘, 통제, 통신의 일관된 통일을 강력히 고수했다. 결국 통합군사령부설치 안에서 리사무총장의 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합참은 심지어 참전국에 의한 유엔기의 사용이 전투에서의 혼란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사령부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유엔 대표인 오스틴 대사는 합참의 견해가 유엔기 법(法)과 모순되는 것으로 다른 나라가 원할 경우엔 유엔기의 사용권리를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의안이 통과되었을 때 결국은 오직 통합군사령부만이 유엔기를 사용하도록 인가하였다. 통합군사령부 창설 결의안은 이 군대가 유엔 안보리가 제시한 정치적 목표 이외에는 어떤 전략적 지도나 지휘명령을 받을 수 없는 체계임을 증명했다. 유엔 통합사령부 창설 결의문에서 군사작전에 있어서의 지휘계통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었던 것은 사실상 유엔 결의문이 미국의 의도대로 작전지휘권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향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휘 및 행정기구를 편성함에 있어서 미국의 지도자들은 합참이 전적으로 지지한 두 개의 기본 방침을 따랐다.
첫 번째 방침은 한국전 참전을 본질적으로 협조와 노력, 즉 집단적인 유엔의 저항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 원칙은 1950년 6월 29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행한 트루먼의 연설, 즉 한국을 원조하는 군사력은 ‘유엔의 진정한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 방침은, 작전통제는 레이크 석세스(유엔 본부)나 도쿄가 아니라 워싱턴에 그 중심이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휘통일의 원칙 면에서 유엔은 가장 일반적이며 전반적인 지침의 범위를 넘는 어떤 통제를 못하게 해야 하며 동시에 정치적 고려에서 기본적인 결심은 극동의 전구사령관보다 더 광범한 시야를 가진 어떤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이었다. 합참이 유엔사와 직접 의사소통을 갖게 될 안보리 소속의 특별위원회 설치를 반대한 것은 유엔이 전략과 전술에 관계하지 못하도록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군사작전의 수행은 미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콜린스), 합참의장, 국방장관을 거쳐 미국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 아래 이루어졌다.
1950년 7월7일 안보리결의안(S/1588)을 지지함에 있어서 영국대표는 한국에서의 조치가 헌장 제42조에 의해 취해진 조치가 아니기 때문에 안보리는 유엔군사령관을 임명할 수 없으나 임명을 권고할 수는 있다고 지적했다. 권고는 유엔헌장에서 결의나 요청보다 훨씬 구속력이 약했다. 어쨌든 미국대표 오스틴은 7월7일의 결의에서 미국은 동결의에 포함된 책임을 수락했다고 선언했다.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장군을 대한민국에 대한 불의의 무력공격을 격퇴하는데 있어서“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원조에 따라 유엔가맹국이 미국의 통합사령권하에 설치한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유엔기는 7월14일 동경에서 미육군참모총장 L. 콜린스장군에 의해 맥아더장군에게 이양되었다.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장군에게 참가국의 기와 같이 유엔기를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한국은 유엔의 가맹국이 아니므로 7월7일 결의에 직접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5일 맥아더장군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했다. 7월 25일 미국은 유엔군사령부의 설립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통합사령부의 명칭을 “유엔군사령부”로 채택한 것이다. 이는 통합군사령부의 명칭만을 혼란스럽게 한 것이 아니라 통합군사령부의 실체까지도 혼란스럽게 만든 일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호박을 시장에 팔기위해 상품으로 만들면서 그 명칭을 수박이라고 하여 대박이 터지자 나중에는 호박의 본래 명칭을 수박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격이었다. 이런 이유로 베일리는 그의 책에서 오직 ‘통합군사령부’라는 명칭만을 사용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후에도 미극동사령관, 주일연합군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계속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통합사령부는 실질적으로 동경주재 미 극동사령부였다. 이는 미군장교만으로 구성되었으며 뒤에 영국참모부장(British Commonwealth Deputy Chief of Staff)과 연결되었다.
군사지휘계통은 통합군사령부에서 미육군 참모총장(United States Army Chief of Staff), 미국방장관(United States Secretary of Defence), 미대통령으로 연결 수립되었고 15개 참전국의 군대도 통합군사령관의 작전통제하에 있었다.
유엔사의 보고절차 문제
유엔과 미국, 주한군사지휘부 사이의 지휘관계가 구체적이고 집중적으로 고민된 것은 7월 7일 안보리 결의에 따라 맥아더가 제출하게 되어 있는 보고서의 준비와 전달 절차에 대한 규정이었다. 국방장관 존슨은 합참에 이 보고서의 준비와 전달 절차에 대한 건의를 제출하도록 했다. 그 절차 문제를 검토한 합참의 합동전략조사위원회(JSSC)는 유엔사 창설 결의문에 중요한 지휘상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유엔 안보리가 맥아더 장군으로 이어지는 어떤 지휘계통을 결코 설치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유엔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도록 승인하지도 않았다고 강조했다. 7월 7일자 안보리 결의는 통합군 사령부를 미국책임 하에 설치하도록 언급하였으며 보고는 유엔통합군 사령관이 아니라 미국정부가 하는 것으로 명시하였다.
보고절차는 합동전략조사위원회의 이러한 고려사항을 반영하여 합참의 감독 하에 준비되어야 하고 국방성을 경유하여 국무성으로 제출되어 안보리로 전해져야만 된다고 했다. 합참은 보고서가 최초에 맥아더 장군에 의해 기안되고, 검토를 위하여 합참에 보내져야 한다고 명시하도록 수정함과 아울러 이 제안된 보고절차에 서명했다. 존슨과 애치슨 두 장관도 이 계획을 승인했다.
7월 25일 안보리에 보고서를 제출한 이후로는 보고서는 합참이 규정한 절차를 따랐다. 즉 최초에 통합군 사령부에서 기안되어 합참으로 전달되며, 합참은 이를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에게 조회하였다. 콜린스는 각군, 국무성, 맥아더 장군과 협의를 하고, 필요한 수정을 가한 후, 그것을 다시 그의 동료들 즉 합참회의에 회부하였다. 그 다음 국방장관, 국무장관을 거쳐 유엔 안보리에 계속 제출되었다.
합동전략조사위원회(JSSC)의 지적 중 유엔안보리 결의안이 맥아더 장군으로 이어지는 지휘계통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진술은 결의안 초안을 작성하고 그 통과를 주도한 미국의 의도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7월 7일 결의에는 미국에게 유엔군사령부가 취한 조치를 안보리에 보고할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에 의거 2주간 보고가 맥아더 사령관에 의해 작성되어 워싱턴에서 검토 된 뒤에 안보리의 미국대표가 이를 안보리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위 보고는 이미 발생한 과거의 사건에 관한 사실상의 진술이었으며 유엔군사령부의 군사적 계획을 사전에 보고하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16개 참전국가의 대표로 구성되는 16위원회(Committee of Sixteen)가 워싱턴에서 주마다 열렸으며 그것은 단순한 참전국가의 대표위원회이며 유엔의 어떤 기관이 대체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미국이 유엔 통합군사령부의 보고절차를 고민하게 된 직접적 배경은 미국이 이미 취한 불법시비가 생길 조치에 대해 통합군사령부의 보고절차가 합리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7월 7일 통합군사령부 창설 결의에서 이 사령부가 안보리에 낸 첫 번째 보고서가 그것이다. 이 보고서에 추진력을 부여한 것은 국무성이었다. 이는 1950년 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하고 3일 후 모든 선박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를 한 북에 대한 해상봉쇄가 계기가 되었다. 6월 25일과 27일 안보리 결의가 이 조치에 충분한 조치가 되는지 전혀 확실치 않다고 미국정부는 생각하고 있었다.
해상봉쇄는 헌장 42조의 군사조치에 대한 구체적 인용이 결의안에 포함되어 있을 때 가능한데 비해 25일, 27일 결의는 조치(Action)의 결정(Decision)이나 요청(Request)이 아닌 가장 낮은 수준의 단지 권고(Recommend)였다. 미국은 의구심과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대통령 성명의 진의가 안보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기를 희망했거나, 최소한 합리화시켜 놓을 장치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7월 7일 안보리 결의에 의해 요청된 최초의 통합군사령부 보고서는 봉쇄에 관한 미국의 일방적인 조치를 유엔에 전달하고 인정받기에 적절한 수단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안보리 회원국에게 그 봉쇄조치에 대해 반대할 기회를 부여하고 만약 그들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봉쇄의 적법성을 묵시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무성은 해상봉쇄가 적법하다고 믿고 있었다. 헌장 51조는 안보리의 조치가 결정되기 전이라도 개별적ㆍ집단적 자위행동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자위권 발동보다 유엔 집단안보의 대의로서 자신들의 행동이 설명되길 바랐다. 문제는 6월 25일, 27일, 7월 7일까지의 안보리 결의에도 불구하고 헌장 42조와 43조에 의한 군사력 사용에 관하여 어떠한 구속력 있는 결정도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7월 3일 봉쇄조치는 한참을 앞서 나간 것이었다. 6월 27일 안보리 결의 직전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선에 해군과 공군을 투입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미 전투가 개시된 것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950년 7월 13일에 국무성 히커슨 차관보는 국무성에서 작전참모부와 비공식 협의 하에 작성한 미국의 봉쇄조치에 대한 보고서 초안을 국방성으로 송부하였다. 그것은 4개항 6개 문장으로 구성된 간단한 것으로서 그 요지는 유엔군은 이미 작전 중에 있다는 것만 언급하는 것이었다.
해군은 적의 부대와 보급품의 해상이동을 차단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봉쇄’라는 단어의 사용은 의도적으로 피하였다. 국무성은‘통합군사령부가 이미 작전 중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미군의 한국전 개입을 유엔 안보리 조치 이전의 집단자위권 발동으로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국무성 초안대로 유엔군으로서의 미군의 활동을 합리화하려 한다면 이는 유엔헌장의 명백한 위반이라는 논쟁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더불어 7월 7일 통합군사령부 창설 결의도 유엔헌장이 규정한 제도와 절차로부터 벗어난 변형이라고 볼 수 있으며, 헌장의 해석자, 유엔질서주조자, 행위자(Actor)로서의 미국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한 정당화되기는 힘든 조치들이었다.
유엔사의 지원절차 문제
보고절차에서의 유엔 집단안보체제 요소의 결핍과 왜곡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는 참전국들의 지원을 받는 절차에서 다시 시도되었다. 50년 7월 14일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는 미국 관리들과 협의를 거친 후 안보리 결의에 지지를 표시한 53개국 정부에 포괄적 호소를 하였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미국대사 오스틴과 협의하여 작성되었는데 통합군사령부에 대한 지원 제의를 사무총장에게 통보하도록 하였다.
지원의 제의는 사무총장에게 통보되어야 한다. 군사지원의 경우 일반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에게 통보하되 구체적인 준비는 그 정부와 통합군사령부 간의 협정에 위임한다.
리 사무총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 호소의 주목적은 이미 그가 받은 비공식적 제의를 다른 절차를 수립할 만큼 그렇게 많은 지원을 요청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무성, 국방성, 합참 사이에는 원조제의 절차를 둘러싸고 복잡한 논의가 오갔다. 국무성이 마련한 지침초안 중에는 유엔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원조제의 처리과정에서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었다.
국무성 초안에 따르면 유엔 회원국은 원조제의를 사무총장에게 전하며 그는 유엔본부에 위치한 미국대표단을 경유하여 ‘통합군사령부’로 보낸다. 통신도 같은 계통을 따른다. 그러나 군사보안을 위하여 모든 제의는 일반적 성격이어야 하며 구체적인 것은 미국과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간의 결정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합참은 이 절차에 동의하며 “통합군사령부”라는 용어는 문장에서 제거하는 수정안을 제의했다. 그들은 워싱턴에서 모든 제의를 적절하게 평가하고 맥아더 장군과 유엔 간에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제의가 미국 정부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무총장에게 일반적 제의를 하는 것으로 유엔 집단안보 틀의 명분을 살리는 것엔 무난하게 동의가 되었으나 통합군사령부가 유엔기관으로 혼동되는 것에 대한 합참의 반대는 아예 통합군사령부 명칭의 제거를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무총장의 제안문에서 ‘구체적 준비는 (참전국) 정부와 통합군사령부 간의 협정에 위임’한다고 표현하여 특별협정의 주체가 정부 대 유엔기관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판단케 한다. 유엔헌장 43조에 의하면 군사력 구성에 대한 특별협정은‘안보리와 회원국 간 또는 안보리 회권국 집단 간에 체결’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합참은 이를 지휘통일 원칙을 해칠 오해와 혼란 요소로 파악했다. 미국정부를 유엔의 대행기관으로 보는 해석이 무리한 해석이라면 이들 협정은 헌장상의 특별협정이 아닌 일반적 국가 간의 협정일 뿐이었다. 유엔 집단안보의 대의를 이용하는 형식과 내용 사이의 모순과 불화는 계속되고 있던 것이다
한편 전투부대를 파견할 것을 제안한 몇몇 국가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했다. 터키, 그리스,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필리핀은 모두 미국의 방위지원을 원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마주친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군대의 공격은 터키와 그리스의 염려를 증폭시켰는데 이들 국가들은 불가리아와 그리고 그리스의 경우에는 알바니아와도, 국경에서 비슷한 군대와 마주하고 있었다. 터키는 특별히 나토에 가입시켜 줄 것을 주장했고, 그리스도 별다르지 않았다. 미국은 발칸에서의 위협 특히 국내문제가 불안한 그리스에 대한 위협을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동맹국들은 국무부에서 원조부담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새로운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유엔의 이상인 집단안보를 실현하기 위한 대의만을 위해 참전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즉 미국이 없었다면 15개 참전국으로 이루어진 통합군사령부의 구성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유엔사는 유엔의 기관인가
미국은 유엔의 집단안보라는 대의를 내세우면서도 그 실현수단인 군사기구에 대해선 지휘계통을 수립하지 않았고 사령관이 유엔의 이름은 사용하지만 유엔과 접촉을 못하도록 철저히 단절시켜 놓았다. 통합군사령부는 전략지도를 책임질 군사참모위원회의 위상을 가지지 아니함은 물론, 헌장 29조에 의해 설치할 수 있는 안보리의 보조기관으로서의 역할과 기능도 찾아볼 수 없다. 미국정부 자체가 안보리와 관계하는 이 같은 구조와 형태에 가장 적합한 규정은 헌장 25조‘회원국은 안보리의 결정을 수락하고 이행 한다’는 조항이 가장 근접해 보인다. 그리하여 합참의‘미국정부가 유엔의 대행기관’이라는 다음과 같은 평가는 객관성이 의심된다.
‘합참은 유엔사가 미국정부에 대해 책임을 지고 미국정부는 유엔의 대행기관으로서 맥아더 장군과 안보리 간의 중계역을 수행하는 원칙을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유엔헌장에는‘대행기관’이란 말은 없다. 대행기관을 헌장상의 보조기관으로 이해한다면 총회나 안보리 지침에 따라 구성되는 기구, 예를 들면 평화유지군 등은 총회 임무를 위임받은 유엔 사무총장의 관리ㆍ감독 아래 있던지, 보조기관이 아니라면 회원국의 자격으로 안보리 결정을 이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던지 해야 할 것이다. 헌장 제7조는 유엔의 기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유엔의 주요기관으로서 총회. 안보리.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 국제사법재판소 및 사무국을 설치한다.
2.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보조기관은 본 헌장에 의거하여 설치할 수 있다.
1항은 열거하고 있으나 2항은 열거하고 있지 않으며 또 그 정의규정도 헌장상에 없다. 그러나 22조와 29조에는 총회와 안보리는“그 임무수행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보조기관을 둘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보조기관의 구조에 대해서는 7조 2항, 22조 및 29조의 규정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총회나 안보리는 어떤 구조의 보조기관도 설립할 수 있다. 보조기관으로 분과기관(Collegiate Organs)을 설치하거나 한 개인을 임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자는 총회의 구성원으로 조직하거나 안보리의 대표로 구성하거나 기타 어떤 방식으로도 구성할 수 있으며, 그 명칭도 위촉회(Commission), 위원회(Committee), 단(Group)등 어떤 것으로도 명명될 수 있다. 제1항에 규정된 군사참모위원회도 보조기관이나 이는 헌장에 의해 직접 설치되며 헌장상의 기관이나 또는 가맹국의 행위로 설립될 수 없다. 따라서 동위원회는 7조 2항의 보조기관으로 볼 수 없다.
유엔안보리의 구속력이 있는 권한행사는 오직 유엔기 사용의 허가(Authorize)에 해당할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권고(Recommend)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이라고 하지만, 원래 유엔이 예정한 유엔군은 아니라고 할 것이며, 이에 관하여 큰 이견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Goodrich는“7월7일의 안보리결의는 유엔가맹국에 의한 조치를 위해 법적구성(Legal Framework)을 완성한 것이다.”고 하면서 “미국은 유엔의 대리인으로서 행위하기 때문에 유엔군사령관이 그의 지휘책임을 수행하는 조치는 모든 가맹국에 대해 합법적인 것으로 된다.”고 논술하여 미국은‘유엔의 대리인’이며 유엔사령부는 ‘유엔의 기관’으로 보고 있다. Bowett도 유엔사령부를 총회 또는 안보리의 보조기관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Skubiszewki 유엔사령부는 유엔의 기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Baxter도 유엔사령부의 유엔기관성을 부인한다. 정태욱에 따르면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은 비록 유엔의 지지를 받았지만, 유엔의 보조기관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유엔의 지지를 받는 참전국들의 연합군에 불과한 것이다. 김선표는 “유엔사는 비록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설립되기는 하였으나, 유엔헌장 제29조에 따라 안보리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 기관으로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즉 유엔사는 유엔의 평화유지활동과는 달리 유엔의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지도 않으며, 1950년 이후 지금까지 동 기구가 유엔 연감에 유엔의 보조기관으로서 등재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안보리 등 유엔기관이 유엔사를 유엔의 보조기관으로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점들이 그 이유이다.”라고 했다.
미국정부가 유엔사를 유엔의 대행기관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실제와는 많은 모순을 갖는 것이었다. 맥아더장군 자신도 이 모순에 찬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와 유엔의 관계는 대체로 형식적이었다. 나의 사령부와 내가 수행해 온 모든 것에 관한 전적인 통제는 나의 육군참모총장과 그 참모총장이 통제하는 나의 통신계통으로부터 나왔다. 내가 유엔에 보내기 위해 정상적으로 작성한 보고서까지도 국무성, 국방성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만 했다. 어쨌든 나는 유엔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1994년 유엔사무총장이 주유엔북한대사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주한유엔군사령부는 유엔안보리의 산하기관이 아니며, 어떠한 유엔기구도 주한유엔군사령부의 해체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그 원문은 셀리그 해리슨에 의하여도 확인되는데, 당시 부트로스-갈리 유엔사무총장은 1950년 7월 7일 결의에 대하여 “병력과 기타 지원을 한국에 제공하는 모든 회원국은 그러한 병력과 기타 지원을 미국 주도의 통합군 사령부가 이용할 수 있도록 권고하는 데 안보리의 역할을 제한했다. 이에 따라 안보리는 안보리의 통제를 받는 보조기구로서 통합사령부를 설립하지 못하고 미국 주도의 사령부 설립을 권고한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통합사령부의 해체는 유엔의 어떠한 기구의 책임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유엔사가 유엔안보리의 산하기구라는 소수설이 있으나 안보리의 산하기구가 아니라는 것이 다수설을 차지한다. 유엔사는 유엔의 기관이 아니라 다국적군이며, 유엔자신이 유엔사를 유엔기관으로 보지 않고 있다.
필자는 위에서 부족하나마 한강하구항행에서 유엔사가 주장해온 허가권 주장은 부당하다는 것과 평화의배띄우기위원회의 정당한 권리의 행사를 침해당한 대응으로서 유엔사를 미국법원에 고소하고자 할 때 유엔사가 유엔의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므로서 법적근거에 입각한 대응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로써 유엔사가 미국의 관할권 하에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 자동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유엔사의 역사와 현재의 구조, 기능에 대한 더욱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