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지역 지뢰실태보고서 2009/01/23 229

해안면 지역특징

해안면의 역사
해안면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펀치볼 개척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랑캐를 무찔러 정의의 피를 뿌린 이 고장 쑥대 우거진 옛터전에 단기 4289년 4월 헐벗고 굶주린 전재 농민 160세대가 삶의 보금자리를 찾어 도라왔으나 한섶다. 염천 폭우에도 몸둘곳 조차 없어 신음하매 이에 제 6사단 전장병은 슬기로운 뜻에 뭉쳐 그들에게 주택 80동과 학교1동 공공시설 4동을 이룩하여 자유와 행복의 마을을 마련하다. -단기 4289년 8월15일 대한 육군 제 6사단장 이백우-

그러나 입주민들에게 입주 후의 생활은 그렇게 평탄치 않았다. 우선 개척비문에서 보여지듯 전쟁으로 국민들의 생활이 궁핍해지고 농민들은 땅이 없어 굶주리는 상황이 벌어지자 국방부등 4개 부처는 귀농선 북방지역에 입주정책을 추진했다. 전방지역에 들어가 농사짓기를 희망해 전국에서 신청한 사람들은 관할부대와 경찰이 엄격하게 심사해 선발했다. 무엇보다 과거 인공치하에 있던 특수지역이었기 때문에 사상이 건전해야 했으며 유사시 호미대신 무기를 들어야 했기 때문에 노인들은 제외시켰다. 이에따라 1956년 4월 6사단 장병들이 160세대를 군부대 트럭으로 싣고 와 허허벌판에 내려놓게 됐다. 첫해에 미군들이 전쟁중 버렸던 수저와 군용그릇을 식기를 사용하며 황무지에 벼를 심었으나 도저히 수확할 수 없을 정도로 흉작이었다. 3년째 되던 해 주민들이 더 이상 살기 힘들다며 모두 고향으로 되돌아갈 태세를 보이자 인근군부대에서 보리와 쌀을 섞은 양곡을 한 트럭 실어다 주었다. 부대장은 고향에서 먹고 살 것이 없어 전방지역까지 올라왔는데 참고 1년만 농사를 더 지어보라고 권유했다. 점차 화전농사를 통해 고구마와 감자, 콩등 밭작물은 수확량이 높아져 초가지붕을 양철로 개량할 수 있을 정도의 기반이 됐다. 정부는 1968년 김신조침투사건을 계기로 전방지역의 정규병력으로는 방어가 힘들다고 판단해 휴전선 마을을 요새화하고 정예화하기로 했다. 이와함께 자기마을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전략적 목적에서 재건촌을 조성해 1970년 100가구를 더 선발해 입주시켰다.
입주민들에게는 북한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적 가시지역인 만큼 문화주택이나 재건주택으로 불리는 집 1채와 농지 5천평을 제공했다. 1번부터 100번까지 제비뽑기를 실시해 배정했는데 뽑힌 번호에 해당하는 집과 땅이 배당됐다. 정부는 100가구를 입주시키면서 해안면 만대리 일대를 불도저로 밀어 5천평씩 100개 구획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입주 희망자들이 사전답사과정에서 지나치게 통제를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30가구나 포기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입주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인근주민 30가구를 데려와 겨우 100가구를 채웠는데 입주식 날에도 4가구가 포기할 정도로 정착할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5천평씩 나누어 준 토지도 야산구릉 지대를 밀었기 때문에 일반 작물은 재배할 수 없어 척박한 땅에서도 자라는 콩을 심으면서 대두단지로 불리게 됐다. 그러나 몇 년동안 콩을 심었지만 봄에 콩 한통을 심으면 가을에 씨앗까지 사라지는 형편없는 땅이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주위 산이 모두 지뢰밭인 줄 알면서도 특별히 지뢰표지판이 없는 곳을 찾아 산짐승을 잡기위해 또는 약초나 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급기야 입주민들이 농사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며 집단행동에 나서자 입주정책을 추진했던 공무원들이 문책을 당할까봐 걱정해 막걸리를 사주며 만류하고 나섰다. 해안면 만대리 지역은 1972년부터 전략촌 단장사업까지 실시됐다. 오늘날 ‘블란서 바콩식’ 주택으로 불리는 대북선전용 주택 50채를 긴급하게 다시 지은 것도 이때였다. 주민들은 2년 전에 지어준 문화주택도 괜챦다며 입주를 거부했으나 “하루밤만 자보고 판단하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곤히 잠든 사이 군인들이 문화주택을 모두 철거해 버리면서 그대로 바콩식 주택을 떠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4월초까지 눈이 녹지 않는 이 추운지역에 지은 집들이 대북 선전용이어서 모두 북쪽을 바라보도록 건축됐다. 연료인 땔감이 문화주택보다 많이 들었을 것은 자명했다. 땔감을 구하러 산야를 헤매다가 지뢰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입주민들이 무엇보다 고통을 겪은 것은 출입문제였다. 해가지면 다음날 일출 때까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민통선 밖으로 외출 할 수 없었다. 마을내에서도 통금이 실시됐는데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에 담요와 이불을 뒤집어 씌우는 등화관제조치를 취해야 했다. 마을 주변 군부대 초소에서는 밤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지 감시했고 주민들이 통행금지와 등화관제 조치를 철저히 이행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밤마다 수색중대 군인들이 순찰을 돌았다. 간혹 이웃집을 다녀오다 순찰중인 군인들에게 발각되면 붙잡혀 문책을 당하고 기합을 받았다. 이유는 38선 이북 주민들은 북한 공산당과 관련됐을 소지가 있고 6.25전쟁 이전까지 공산당치하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사상이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불빛에 민감했던 것은 주민들이 밤에 불빛을 통해 북한 간첩과 신호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가령 등화관제를 하더라도 며느리가 아기를 출산할 경우 불을 피워야하고 미역국을 끓여주기 위해 부엌을 자주 드나들 수 밖에 없는데도 수색중대에 끌려가 “간첩과 무슨 연락을 주고 받았느냐”는 문책을 당해야 했다. 밤새도록 정황을 설명해도 “불빛이 새어나가 좌표가 발각되는 것과 산모가 죽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라는 호통과 함께 기합을 주었다. 추운 겨울에 1킬로미터나 되는 마을 비포장도로를 따라 드럼통을 굴리고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이었으니 그 고통은 말할 수가 없었다. 무더운 여름에는 드럼통 굴리기가 기합으로 신통치 않자 군부대 재래식 변소청소를 시켰다. 5갈론 통 여러개에 똥물을 채워 군부대 주변 야산에 호박, 오이에 거름을 주는 기합이었다. 당시만 해도 부식이 변변치 않아 오늘날의 북한처럼 막사 주변에 채소를 재배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뢰사고가 났다고 어디에 신고하거나 소송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오히려 군사시설보호법을 어겼다고 영창에 끌려 갈까봐 동네사람들도 쉬쉬했다.
이처럼 어려운 형편에서 개간한 땅은 1997년 정부가 ‘주인없는 땅을 정리한다는 이른바 무주 부동산 정리 사업을 위해 ’귀농선 북방지역에 관한 임시 조치법‘이라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개척민들이 일궈놓은 2천 768필지 6천 254제곱미터를 재정경제부로 517필지 962제곱미터를 농림부로 귀속시키는 국유화를 단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비무장지대를 찾아서 p167-172 이해용 눈빛 2003. 7.27)
정착해서 살면 내땅이 된다는 희망만으로 지뢰밭을 일구어서 마련한 땅을 국방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하루아침에 일고 만 것이다. 한편 양구 해안면에는 월남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실험용으로 고엽제가 뿌려졌다. 슈퍼를 운영하는 전 군의원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방 철책으로 그저 한 20~30미터 될까 그 약을 뿌리고서는 나무고 풀이고 아무것도 안나서 황토 흙만 드러난 띠가 생기게 됐던 거야”
대구 비산2동에 사는 강모씨(54)는 “강원 양구군의 육군 모부대 화기소대 분대장으로 근무하던 지난 68년 7월께 미군사고문관의 지시에 따라 노란약물을 철모에 받아 이틀간에 걸쳐 맨손으로 살포작업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제대후 현재까지 등과 허벅지 등에 붉은 반점과 가려움증이 자주 발생, 고통을 겪고 있으며 3명의 딸도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호소했다.(경향신문 1999-11-19)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된 해안면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모토냐며 분노심을 표시했다.

해안면 개요
1956. 4. 25 : 정부입주계획에 의거 1차(160가구, 965명) 입주
1972. 4. 25 : 100가구, 472명 2차 입주
2001. : 1,566명
면적 : 61.50㎢

지도 : http://maps.naver.com/?x=41231900&y=63160710&title=강원도%20양구군%20해안면

관할부대 : 21사단 백두산부대, 12사단 을지부대

지뢰지대면적: 만대리 15.000평
현3리 30.000평
만대리 물골 40.000평
월산리 40.000평 (오유리 오대식씨 목측기준)

지뢰매설역사: 1951.6.3~9.20 미해병 제 1사단
1953.5.13~ 7.27 미 제 45사단
1991년 제4땅굴 발견 직후 현3리 지역 매설

해안면에서 발견된 지뢰
M14 : 플라스틱 지뢰
M16A1 : 미군용은 쇠가 재질이며 상대적으로 얇음/한국군용은 주철이며 두꺼움.
미상지뢰: 종이컵높이에 폭은 약간 넓은 모양, 땅굴지역에서 발견, 처음 보는 신형 자끼지뢰: 구형은 크고 신형은 작음. 구형은 물골지역서 발견(50,60년대 추정)
신형은 월산리 지역서 발견 80년대
직접연결형은 폭파지뢰/ 바닥에 원판이 붙은 형은 조명지뢰
도시락지뢰:각면(3면)에 뇌관
크레모아 :
부비트랩 : 지름40cm 정도의 원판모양으로 두께는 5cm. 어디를 밟아도 터지는 지뢰 – 부비트랩으로 추정. 대전차지뢰로 착오하도록 한 듯,

해안면의 지질및 기후 특성
중생대 기반암을 뚫고 관입된 화강암이 오랫동안 차별 침식된 결과 생겨난 것이 해안면 분지이다. 즉 중앙부에 위치한 화강암이 주위의 편마암보다 빨리 침식되기 때문이다. (http://contents.edu-i.org/gongmo/1999/688/m3_2.htm 2006,8,10검색) 이같은 침식지형의 특성상 해안면의 지질은 소위 마사토라 불리는 화강암침식토로서 진흙이나 찰흙등 점도를 가진 토질을 함유하고 있지 못한 이유로 인하여 호우시 토사 유실율이 다른 지역의 지질에 비해 훨씬 높다. 때문에 산비탈에 개간된 농경지가 한순간의 호우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런 과정에서 점도 낮은 마사토에 매설된 지뢰의 유실은 예정된 것이다. 토사유실의 심각성은 소양강댐의 흙탕물화로 나타나고 있다.

소양호상류가 장마비와 함께 홍천 내면과 인제 서화 양구 해안지역 등 고랭지 농경지에서 대량으로 유입된 흙탕물로 햇빛 투과를 막아 수생식물의 번식및 생존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소양호 상류는 매년 장마철만 되면 상류지역에서 흙탕물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있어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실정이다. 양구의 경우 환경부에서 소양호 상류 지역인 해안면 농경지에 대한 흙탕물 저감시설을 위해 1억6,400만원의 사업비를 배정받아 법면보호망과 토종풀씨 등 농경지 유실방지사업을 펼치고 있으나 예산이 부족해 농경지 유실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상태이다. 또 고랭지 채소밭에 뿌려진 잔류농약성분까지 섞여 유입돼 호수생태계파괴까지 우려되고 있다. (강원일보 2004.07.15)

한편 이들 토사와 함께 유실된 지뢰로 한재영씨를 비롯한 관광객이 다리를 잃는등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대마리지역특징
대마리역사
대마리는 정부에서 국방력 강화와 식량증산의 목적에 부합하는 모델인 이스라엘의 기부스 농장을 견학 후 반공정신이 투철한 재향군인 150가구를 1967년 2월 가입주시키므로써 대마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당시 가입주 상태에서 밭을 개간하던 박경서, 유철훈씨 등 50여명에 가까운 지뢰사고자가 발생했다. 1968.8.30 집이 지어지고 경운기 15대를 지원받아 정식으로 입주하게 되었다.
대마리는 옛 철원의 곡창지대로 전쟁 전에는 북한에 속하였으며 평지로써 기름진 땅이었으나 25년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관계로 거목이 있었고 휴전선 근방에서 해마다 산불을 놓아 동식물들도 살수 없는 땅이었다. 또 이곳은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으로 양측이 수 없이 많은 지뢰를 매설한 곳이어서 사실상 지뢰로 뒤덮인 땅이었으나 대마리의 초기 개척 주민들과 군부대 장병과 함께 지뢰를 제거하고 거목을 제거하면서 이룩한 땅이다. 대마리의 초기 주민들은 천막생활을 하면서 국수덜냉이(국수를 물에 불린 것)를 먹어가면서 작업하였고 150명이 15개조(각조 10명)로 나누어서 공동으로 지뢰밭 개간과 농사를 지었으며 1968년 8월 30일 입주 후에도 약 3년간은 공동 농사를 지었으며 3년 후 부터 개인 분배를 시작하여서 입주 후 8년까지 완전 분배를 하였으며 그 후 각 가정이 자체적으로 농사를 지었다.
(http://dmz.invil.org/colonist/remem/contents.jsp 2006.8.9검색)
대마리는 매년 8월30일 입주 기념행사를 하면서 체육대회와 함께 지뢰사망자 위령제를 함께 지내고 있다. 이 행사는 약 30년 전인 1968년부터 진행돼 왔으며, 지역구 국회의원과 군사단장등도 참석한다.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은 약 900여명에 이르며 대부분 대인지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여왔다. 이 마을에서 이때까지 지뢰사고로 피해를 본 사람은 총 40-50 명에 달하는데 이들 대부분 사망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생존자는 6명에 불과하다. 군에서 중령으로 예편한 후 이 마을 노인회장을 지내고 있는 모씨는 62년 쿠바사태로 비상이 걸렸을 당시 지뢰 수만 발을 직접 매설한 경험이 있는 사람인데 아직도 지뢰피해자가 발생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한편 대마리는 정부가 새로 개간한 땅의 분양을 약속하면서 특별히 향군회원들을 모집하여 입주시킨 마을이다. 그러나 입주자들이 지뢰밭을 개간하자 땅의 원소유주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나타났었고 이런 상황을 정부가 외면하는 바람에 마을 입주자 대부분이 땅을 원 소유주로부터 되사거나 아직까지 소작을 부치며 어렵게 살고 있다.(대인지뢰 p57 이시우.한국교회여성연합회)

대마리개요
1968: 150가구 입주
2006: 235가구

재학생현황
초등학생수 : 55명 중학교생수 : 30명 고등학생수 : 30명

대마리인구
연 령 10대이하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이상 계
인 구 181 76 118 93 89 161 718
(http://dmz.invil.org/colonist/future/contents.jsp 2006.8.9검색)

철원 대마리 지도

http://www.gocheorwon.net/left/left_03.htm

관할부대 : 6사단 청성부대, http://www.gocheorwon.net/cheorwon_8/h_1.htm
3사단 백골부대

http://www.gocheorwon.net/zboard/zboard.php?id=anbd&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5

지뢰매설지역: 대마1리, 2리 전지역(인근지역 율리리, 야월산)
지뢰매설역사:1951년 10월 미 제 3사단, 미 제 9사단 백마고지전투
1952년 10월 미 제 2사단
1962년 쿠바사태직후

대마리에서 발견된 지뢰
M14 : 플라스틱 지뢰
M16A1 : 미군용은 쇠가 재질이며 상대적으로 얇음/ 한국군용은 주철이 재질이며 두꺼움
미상지뢰: 직사각형모양에 덮개 같은 것을 덮은 모양

대마리 기후특성
철원강수량은 1321.3mm로 이남 연평균 강수량 1140mm 보다 훨씬 많은 다우지역중 하나이다. 이는 지형과 밀접한 관계가 잇는 것으로 양자강과 중국대륙에서 이동해오는 저기압이 태백산맥과 광주산맥의 지형적 영향을 받아 발생되는 지형성강우에 기인되는 것이다. 강수는 타지역과 같이 하계에 집중되며 6,7,8월의 3개월 사이에는 철원이 62.3%로 이것은 다른 지방의 하계집중도 50~60%에 비하면 매우 높은 편이다.(전용목, 한탄강 연안의 지형발달에 대한 연구 p8 1980) 이 같은 강우특성은 어떤 통제나 관리 대책도 없는 미확인지뢰지대등의 지뢰가 집중호우에 의해 유실될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한다.

대마리 지질특성
화산지대인 철원은 지질조건에 의한 지형특성으로 현무암에는 주상절리가 발달하고 격렬한 하각침식작용에 의하여 하식절벽을 형성하거나 작은 규모의 협곡을 이룬다. 때문에 이들 하천은 하폭이 좁고 대체로 유속이 매우 빠르다. (전용목,한탄강 연안의 지형발달에 대한 연구 p16, 1980) 이같은 상황은 가벼운 플라스틱 지뢰의 유실범위가 넓어 질 수 밖에 없는 조건을 형성한다. 한편 운천-철원-평강 지역에서는 넓은 산간분지의 평단면상이 발달하였다. 이는 암석분포의 차이에 기인한 차별침식에 의한 것이다. 즉 운천-철원-평강지역에는 풍화와 침식에 대한 저항성이 약한 대보화강암이 분포되어 있는데 기인한 것이다.(전용목, 한탄강 연안의 지형발달에 대한 연구, p18~19, 1980) 대보화강암을 주로하는 침식지형은 점토질이나 찰흙의 결핍으로 강우시 땅속에 묻혀 있는 지뢰의 유실율이 증가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갖는다. 화산지형인 현무암 기반위에 깊지 않은 토양층이 덮인 지질 특성을 가지고 있어 2m정도만 파고 내려가면 철원사투리로 널개라는 현무암 지반이 나올 정도이다. 이는 강우시 비를 머금을 수 있는 토양층이 얇음으로 해서 토사의 유실이 심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