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항소심 최후진술 2008/11/18 276
항소심 최후진술
이시우
인사
그동안 방대한 기록을 검토하시며 재판을 진행해주시느라 애쓰신 재판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공안부에서 형사부로 부서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을 진행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셨던 검사님께도 수고의 인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고 아무 곳에도 기댈 데 없는 처지였던 저를 위해, 그리고 법이 꿈꾸는 진정한 사회의 정의를 위해 무리한 일정가운데서도 헌신적으로 무료변론을 해주신 민변의 변호사님들과 김다섭변호사님께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얼굴도 모르는 저를 위해 해외에서 놀라운 연대의 힘을 발휘해주신 국제사면위원회Amnesty관계자 여러분들과 97년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예에 빛나는 국제대인지뢰금지캠페인ICBL의 헌신적인 노력에 연대와 신뢰의 인사를 드립니다. 일본에서의 서명활동을 넘어 이 재판의 방청을 위해 몇 번이나 왕래해주신 기무라선생님과 오가타선생을 비롯한 스톤워크그룹과 국제열화우라늄탄반대캠페인ICBUW에 따뜻한 우정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한국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신 수많은 원로선생님들과 선후배님들과 어려운 집안살림을 이어가면서도 굽힘없는 신뢰를 보여준 아내와 아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1심판결 이후
사람에겐 버릴 수 없는 것이 두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꿈과 그리움입니다. 그러나 둘 중 어느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리움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꿈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고, 설명할 수 있는 만큼 꿈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리움은 경험된 꿈이며 설명될 수 없는 결핍입니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복원 가능하기에 버릴 수 있지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은 미련을 남기고 집착이 되어 그리움이 됩니다.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려 할수록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결핍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 때문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만큼 우리는 역사의 결핍을 그리워하고 앓아본 적이 있는가 돌아볼 일입니다.
1심무죄 판결은 외람되나 저로서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더 진행되어야할 재판의 절차가 남아있었지만 말입니다. 무엇보다 다행으로 여긴 것은 강화도 동네로 돌아가서 저의 일로 놀래야 했던 사람들의 가슴들을 쓸어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인지뢰피해자분들을 안심시켜드릴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일로 그만 대인지뢰피해자보상을 위한 특별법의 추진이 중단되었습니다. 피해자분들 중에는 아내가 찾아갔을 때 오해를 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대개는 덜컥 겁을 먹는 분위기가 역력했다고 했습니다. 괜히 국가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으려다 감옥갈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셨던 건 아닌지 걱정이었습니다. 남은여생에서의 억울한 삶을 위로 받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내려놓진 않으실까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죄판결소식을 제일먼저 알린 것도 대인지뢰피해자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행한 심정에도 불구하고 서너 번 제 앞을 지나간 사건은 이 모든 것을 좌절케 했습니다.
1심판결이후인 3월 저는 시청앞에서 열린 여성대회 행사에서 사진전시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두분의 노인이 사진전현수막을 보고 놀란 듯 말했습니다. “어 이시우네” “이시우가 누군데” “왜 있쟎아 간첩질 한 빨갱이” 그분들은 전시부스에 서있는 저와 시선이 마주치고 머쓱한 듯 서둘러 사라지셨습니다. 성급히 사라지시는 그분들을 보며 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에게 빨갱이로 통하고 있을 것이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1심때 들었던 ‘간첩이시우’란 말과 또 달리 빨갱이란 말은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법원에서의 판결이 사회에서의 판단을 수정시키진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인가는 강화읍내를 걷다가 재향군인회관에 늘어뜨려져 있는 플랭카드를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색이바랜 이 플랭카드의 한줄은 지워져 있어 읽을 수 없었고 나머지 한줄에는 ‘국가보안법 사수하여 대한민국 지켜내자’ 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네가 구속되고 나서 붙은 플랭카드”라고 일러줬습니다.
이런 경험은 비단 우익단체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전쟁시기 강화에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추모비를 세우는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단체활동을 멀리하는 저도 이일만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싶어 참석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대표를 뽑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누군가 저를 추천했습니다. 그러나 저도 고사했고 결국 제가 선출되진 않았습니다. 보수진보를 망라해서 추진되어야 할 일에 저의 이미지는 안 맞는다는 판단을 모두는 어렵지 않게 동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속전만 해도 저는 국정원직원과 함께 강화도내 교장,교감선생님들에게 안보교육을 했었고, 끝난뒤에는 서로 연락처를 달라고 하실만큼 나름대로 여운도 드렸던 것 같지만 국가보안법사건 이후 저에겐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가 생겼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1심의 무죄판결도 이 지역사회에서는 아무런 효력도 관심도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처음 국가보안법으로 제가 구속되었다는 사실에 모든 사회적 기억은 멈추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지역사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엔사나 국방부에서 저의 취재신청만은 계속 불허되고 있습니다. 한국노총에서 판문점여행을 하며 안내를 해달라고 해서 수락했더니 한참 뒤에 국정원으로부터 저만 판문점견학신청이 불허됐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습니다. 왜 불허하는지에 대해 어떤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없이 노총회원들만 견학을 하고 나와야 했습니다. 또 한번은 김포시 국회의원인 유정복의원실에서 지역현안인 한강하구에 대한 공청회를 하는데 제가 초청연사로 참가하는 것에 대해 재향군인회가 운영하는 인터넷 신문에서는 ‘주최는 보수 참가자는 진보’ 란 제목으로 국가보안법 혐의자가 참가한다며 공청회에 부담을 주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국가기관과 보수단체와 언론등에서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압박은 저로서도 힘겨운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법원의 판결과 무관하게 여론의 판결이 존재하는 영역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존재라고 했을 때 사회적 관계를 제약당하는 것은 감옥에서 격리생활을 하는 것만이 아니란 것을 실감합니다. 저는 구속전과 비교했을 때 심각한 기피대상인물로 낙인찍혀 있습니다. 저는 비로소 빨갱이란 낙인이 저에게 찍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에겐 민주화세력도 아닌, 진보도 아닌, 좌익도 아닌, ‘빨갱이’란 굴레가 씌워진 것입니다. 1심판결에서 판사님은 국가보안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하셨지만 그 판결이 사회에 풀어놓아졌을 때 국가보안법이 법대로만 엄격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베니스의 상인에게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살을 베라는 주문과 같은 것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검사님은 이런 것을 의도했을까요, 아니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을까요, 법을 압도하는 체제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니면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까요? 어쨌든 저의 처지는 법의 판결과 무관할 수 있는 무서운 현실 앞에 내던져진 셈입니다.
빨갱이
저는 그 후 어느날인가 멍해 있다가 문득 ‘빨갱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를 일컫는 말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공산주의자인가 자문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문은 별 의미가 없어보였습니다. 저의 느낌에 빨갱이는 그렇게 한정된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4.3당시 제주도민들이 빨갱이란 말을 쓰지 말아줄 것을 공식결의하기까지 했다는 기사가 눈을 끌었습니다.
통탄의 제주도는 드디어 사태의 수습 움지김을 보이고 있다. 관은 관, 민은 민대로 상극적입장에서 반복하든 이곳 제주도에서는 탄압정책을 벗어나 귀순하는 도민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한편 반역의 낙인과도 같이 사용하든 [빨갱이]라는 말은 일체 쓰지 않기로 결정하여 실시 중에 있다. 즉 지난 1일에 개최된 도내 군읍면장 합동회의 석상에서 각 읍면장은 무고한 도민의 감정을 저해하는 [빨갱이]라는 말을 각관청에서부터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겟다고 건의한 것을 임지사는 즉석에서 채택 실시키로 하여 관하에서 말하였다 한다.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빨갱이’란 말에 시달렸으면 단어하나 때문에 회의를 열어 쓰지 말자고 결의하기에 이르렀던 것일까요. 빨갱이란 말이 곧 ‘반역의 낙인’과 같았다는 말에서 빨갱이에 담긴 ‘공산당’보다 더 강력한 적대개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까지 한데에는 빨갱이란 이름만 붙이면 어떤 학살과 만행도 가능했던 서북청년단과 군,경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를 정신병리학적으로 분석한 한 의사의 글은 저의 고민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그동안 죽어야할 자, 더 나아가 죽여야 할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므로 그에게는 어떤 만행도 가능하다. 차마 짐승에게도 할 수 없는 짓이 허용된다. 그러기에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 시키는 일도 가능했던 것이다. 문둥이는 나병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빨갱이는 실체조차 없는 말이다. 좌익사상을 가진자라는 뜻이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우리사회에서 그동안 쓰여 온 빨갱이의 어의는 그것과 크게 다르다. 한마디로 인간파괴와 동의어인 것이다. 그리고 빨갱이는 애당초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문둥이보다 훨씬 파괴적이다.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라는 협박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빨갱이를 만들어내고 탄압하는 길 이외에는.
특히 마지막 말, ‘빨갱이가 아닌 것을 증명해보라’는 말은 저에게도 유사한 경험이 있는 듯한 말이었습니다. 검사가 공소장에 쓴 ‘피고가 노민문연 활동을 하고도 이를 반성한 적이 없다’는 말 앞에 제가 막막했던 기억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저의 혐의에 대한 증거자료로 제출된 것이었습니다. 검사의 ‘불온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봐라’는 말과 서북청년단이 ‘빨갱이가 아닌 것을 증명해보라’는 말을 같은 맥락으로 인식하는 것은 제가 지나치게 과민 한 때문일까요?
제주의 많은 청년들은 나중에 귀신잡는 해병이 되어 빨갱이 소탕에 앞장섰다고 합니다. 또 4.3 당시에도 빨갱이의 누명을 쓰지 않거나 벗으려고 ‘빨갱이’를 고발하는 등 빨갱이사냥꾼들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 전향서를 쓰고 빨갱이들을 발본색원하는데 앞장서야 빨갱이임을 반성하고 그 티를 벗었다고 인정받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빨갱이를 둘러싼 우리 역사는 그조차 부질없는 짓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함정토벌이란 말을 만들어낸 제주 도평리 집단학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1949년 1월 3일 이른아침 허름한 갈중의를 입고 총을 든 무리가 제주읍 도평리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길에서 마주친 주민들에게 “동무, 동무”하며 악수를 청했고, 어떤이는 인공기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집안에 들이닥쳐 “왜 너희들은 산에 협조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면서 주민들을 학교운동장으로 집결시켰다. 그런데 인공기를 들고 갈중의를 입은 이 무리는 무장대가 아니라 인근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들로서 주민들에게 함정을 판 것이었다. 주민들 중 일부는 그 무리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양경하(22)는 “빨갱이면 맞서 싸우겠다”고 나섰다. 마을 유지인 김병해(58)는 외도지서 주임 김영철에게 욕을 하면서 “대한민국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해 주민 70명 가량이 총살당했다.
빨갱이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 말고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것은 유일한 투항이자 결백의 주장이었지만 경찰과 특공대는 빨갱이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사람은 빨갱이라는 논리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죽은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죽음으로서 빨갱이가 된 것입니다. 낡고 듣기 불편하고, 유치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던 ‘빨갱이’란 단어에서 1심무죄판결 뒤에 제가 겪어야 했던 설명할 수 없는 사태에 가려진 본질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말은 의미를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의미를 만드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빨갱이란 단어가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라는 의미를 넘어 자유주의자나 중도우파에게도 적용되어지는 것은 객관적 실체를 지시하는 단어로서 오류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누가 빨갱이다’라는 묵시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는 그의 실체와 관계없이 빨갱이가 되며 의미가 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의미를 지시하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행해지고 있다”는 한 철학자의 이론처럼 내가 ‘빨갱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빨갱이란 단어가 나를 통해 집행되고 있는 데서 오히려 인간의 소외를 발견합니다. 빨갱이란 말을 쓰는 화자는 이러한 소외현상을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빨갱이를 잡겠다고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역사에서 오히려 빨갱이를 만들어왔던 역설이 발생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입니다. 단어의 의미는 단어자체의 정의가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빨갱이란 단어가 법을 초월한 개념으로 만들어진 역사의 맥락을 저는 제주4.3에서 발견합니다. 물론 4.3의 경험이 국가와 국가보안법등 모든 문제에 대한 완전한 설명일수는 없지만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숙제가 그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빨갱이란 말 따위에 집착하는 것이 위신과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용기가 있다면 그것은 피해갈 수 없는 주제라는 사실이 제 생각입니다.
제주4.3과 빨갱이
반공청년단들에게 국가주의가 투사되는 과정과 반공청년단들에 의해 국가주의가 발산되는 과정을 보면 그 핵심에 빨갱이란 단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947년 4월경부터 서북청년단의 테러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테러에는 도끼·방망이는 물론 총기와 폭탄 등도 동원되었습니다. 부산에서는 정수복 검사와 박경영 사장을 빨갱이로 지목하여 암살했습니다. 이러한 서청의 반공테러로 인해 1949년 6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로 서청이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47년 3.1절 시위이후 유해진제주지사는 이미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고 그는 제주로 부임하면서 경호원으로 서청단원을 데리고 왔습니다.
서청 제주도 지부가 정식으로 발족된 1947년 11월 훨씬 이전부터 적지 않은 서청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민심을 자극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청단원 가운데는 태극기나 이승만대통령사진을 들고 다니며 강압적으로 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4·3이 일어난 후 성산포 등지에서는 이때 물건구매에 냉담했던 주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서청의 위세가 드세어지고 법에도 없는 경찰보조 기능이 부여되던 194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그들의 백색테러가 제주에서 노골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 아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고 설사 죽더라도 빨갱이로 몰면 그만이었습니다. 이러다 보면 잡혀간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가족들이 금품을 싸들고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금품을 노리고 억지로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빨갱이’는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법적인 폭력을 합리화하는 백지수표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1947년 11월의 미군 정보보고서는 서청의 의식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북청년단 제주도 단장이 지난 주 제주 CIC에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자신의 주장을 CIC에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8년 1월 남한 각 도의 공산주의자 활동에 대한 평가를 내리며 정 반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익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고 주로 청년단체나 관공서에서의 좌익 축출을 통해 섬을 장악하려 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적이 아니며 최근의 테러사태는 우익에 의해 선동된 것이다.
빨갱이란 용어를 쓰지 말 것을 요청한 제주도민들의 공포는 미군정에서 ‘빨갱이 공포’라는 용어로 인정할 만큼 이미 4.3이전부터 공공연한 것이었습니다. 제주도민들에게 정부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가 아니라 빨갱이를 잡기위한 폭력에 의한, 폭력을 위한, 폭력의 정부로 비추어졌습니다. 폭력이 주체이고 국민은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국민’으로 대접받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절박한 문제제기와 실낱같은 희망을 건 호소마저 간단없이 묵살되고, 학살되는 현실 앞에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설명할 무슨 단어를 찾아 낼 수 있었을까요? 설명될 수 없는 현실의 압도에 대해 인간이 갖는 감정은 공포입니다. 미군정이 보고한 ‘빨갱이 공포’란 단어에 합리적 이성으로서의 국가나 폭력의 합법성은 물론이고 민주주의절차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빨갱이란 단어가 지금까지도 4.3당시와 큰 차이 없이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와 폭은 분명히 달라졌지만 ‘빨갱이 공포’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빨갱이와 국가
주체는 동일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상징기호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 기호라는 매개 수단 때문에 정작 자기 주체성을 잃어야 한다는 역설이 생깁니다. 아이가 젖을 달라고 말할 때 아이가 원하는 것은 더 풍부한 것일 수 있지만 ‘젖’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자기의 요구를 일견 성취함과 동시에 자기의 나머지 요구를 포기하게 됩니다.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표현과 기호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해도 이같은 역설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충분한 설명과 소명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조건입니다. 개인이 합의하여 국가를 세우고 스스로 국민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국가가 있었고 국가에 종속된 국민으로서만 존재하기를 요구받아야 했던 우리에게 개인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개개인들이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국민이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틈이 어떻게 메꾸어지는가에 대해 다음의 사례는 충격을 줍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김계순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 온 한 처녀가 하귀 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습니다.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습니다.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결국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한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습니다. 경찰은 모두들 한 번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 먹고 난리가 났습니다. 또한 그 일로 몹시 앓았습니다.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들 나처럼 앓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국민의 형성과정이 이같은 폭력의 공포아래서, 폭력에 가담함으로서 이루어진 경우, 그것은 분명 범죄이며 죄의식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국가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것은 합법이고 국가의 이름으로 면죄되었습니다. 국가의 명령이지만 그것이 인간양심의 명령과 충돌할 때,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여 수정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개인이 설자리가 없을 때, 국가는 무조건 추종하고 동일시해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국가에 무조건 추종하고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비판과 조절의 공간이 없을 때 개인들은 더욱 더 강력하게 국가와 자신을 동화시키고 합리화 할 수 있는 수단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국가의 적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신성성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희생시켜야 하는 국가의 적은 모두 빨갱이로 간주되었습니다.
결국 국가와의 동일시과정에서 생기는 틈과 불화를 해소하지 않으면 국가는 개인을 국민으로 만드는 데 실패하게 됩니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지젝의 지적처럼 대립물을 찾지 못하면 주체는 상징기호와 동일시하는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내가 곧 국가라는 일체감을 가지려는 서북청년단에게 국가에 대한 대립물, 즉 국가 아닌 것은 빨갱이였습니다. 빨갱이란 적대의식에 기대어 세워진 애국주의는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기호와 상징 같은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통찰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없는 구조’가 주체를 규정하는 과정을 통찰하지 않고 그 구조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결핍을 안고 있고, 자기의 결핍을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도 각자의 결핍을 상대를 통해서 채우려고 합니다. 내게 없는 반쪽을 찾는 시도들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쟈크 라깡은 성관계를 맺는 주체들이 서로를 통해서 자기의 결핍을 완전하게 채울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익숙한 양희은의 노래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사람 곁에 또 한사람 둘이 서로 마주보며 웃네.’ 이 노래의 미덕은 서로가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상대방에 의존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결핍을 채우고자 관심과 애정을 조작하고 의무를 강요할 때, 이를테면 부부이기 때문에 부부의 의무를 다하라고만 강요할 때 부부관계는 분열됩니다. 스스로 선택한 부부관계조차 이렇습니다. 국민이기 때문에 국민의 의무를 다하라고 할 때,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분열합니다. 국민과 국가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주어진 상태란 점에서 더 불화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성하고 성찰하며 조절할 기회와 능력이 없을 때 추종과 동일시의 요구는 폭력으로 다가오며 다시 폭력으로 표출됩니다.
미군정, 이승만대통령 등 집권세력은 서청에게 “사상이 건전하고 철저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고 ‘점잖게’ 독려하고 한껏 추켜세우면서 ‘제주도진압’의 최선봉에 세웠습니다. 서청대원들에게 하루아침에 경찰복과 군복을 입힌 것은 그들에게 빨갱이 사냥의 합법성을 부여해주었고, 또한 그것은 서청원들에게 확실하게 빨갱이 사냥을 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는 무소불위의 폭력을 위임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것은 행정부의 권능조차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청은 1948년 11월 9일 물자보급 문제에 불만을 품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을 연행, 서청 사무실에서 고문하다 살해하기도 했다.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 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다버려 끝내 절명케 한다. 제주도 행정의 2인자까지도 보급품 지급에 협조 안한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것이다. 서청은 이번에도 자신들의 죄상을 덮는 주무기로 무조건 상대를 빨갱이로 몰았다.
빨갱이라는 대립물이 국가에 대한 추종과 동일시에 존재하던 틈을 메꾸어주고, 폭력의 합법성을 부여해주는 것처럼 착각하게 해주었다면, 어느순간부터 폭력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변하게 됩니다.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빨갱이 척결을 위해서 합법성의 기준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광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계엄법도 없는데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령이 지역의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잠시 동안 감내해야 할 규제가 아니라 무차별 토벌로 가는 초토화작전의 도구로 인식된 것도 폭력이 물신화 된 증거입니다.
한 사람이 왕인 것은 오로지 타인들이 그에게 신하의 관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왕이 왕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신하인 듯이 상상합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 것인데 대통령은 대통령이기에 국민은 대통령에게 굴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지고, 간첩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에 걸린 것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에 걸렸기 때문에 간첩이라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재향군인회가 1심재판부에 낸 탄원서에서 피고인의 기소내용 중에 간첩죄는 존재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시우 간첩사건’, ‘간첩행위’라고 규정하는 심리구조도 이와 같은 것으로 읽힙니다.
가까이 있는 적 만들기
서북청년단이 빨갱이를 국가의 대립물로 상상하면서 국가와의 동일시에서 발생하는 결핍을 채울 수 있었듯이 국가보안법은 국민전체에게 똑같은 대립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국민전체를 향한 것이었으므로 묵시적인 합의대신 공식적인 법의 선포를 통했다는 것입니다. 반유태주의자들이 유태인의 형상을 만들어 간 과정의 마지막은 유태인이 사회의 대립물일 뿐아니라 바로 적이라는 것을 상상하도록 한데 있었습니다.
우선 유태인은 경제적으로 폭리를 취하는 자, 정치적으로 음모가, 종교적으로 타락한 반 기독교도, 성적으로 무고한 소녀들을 유혹하는 자 등등. 한마디로 유태인의 형상이 사회적 적대의 암호, 뒤틀린 대표물이 되도록 조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왜곡만으로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치 않았습니다. 열광적인 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유태인’이 환상의 틀 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행복을 훔쳐간다.”고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완전한 사회’의 비전을 내세웁니다. 예를들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선 완전한 체제를 건설하자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세운 전망이 실현되지 않으면 이런 불가능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어떤 방해자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이 지목한 방해자는 역시 빨갱이였습니다. 49년 4월 9일 이승만대통령은 직접 제주도를 방문하여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참석,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우리는 공산당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나라를 세우고 확실히 기반을 닦은 후에 주의 주장을 하자는 것입니다. 먼저 제주도를 완전한 평화로 만든 후 다시 전라도로 가면서 숙청하며 38선을 분쇄하고 북한으로 진군하여 낙원의 정부를 세웁시다.
이승만대통령이 말한 국가는 공산당도 주의주장을 할 수 있는 나라, 낙원의 정부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공산당도 국가의 적은 아닙니다. 국가수립을 방해하는 세력이 적입니다. 제주의 빨갱이와 여순의 빨갱이등 우리 곁의 적을 숙청하고 3.8선 너머의 빨갱이를 분쇄하자고 했습니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환상이 은폐하려는 국가의 결핍은 국가 안에 실재하는 사회적 적대입니다. 친일파, 토지개혁, 통일정부의 수립등 해방 후 제기된 굵직한 건국의제들을 둘러싼 실재의 적대관계를 빨갱이란 대립물을 통해 이승만대통령은 은폐하고자 한 것이며 이것은 완벽히 성공했습니다.
1948년 건국과 함께 의회에서 통과된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의 집행을 앞두고 이승만대통령과 친일세력은 친일파의 처벌을 극력 반대했습니다. 친일 극우단체들은 여러 곳에서 집회를 개최하여 법제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집회의 구호는 ‘친일세력처단 반대’가 아니라 ‘반공’이었습니다. ‘반공구국총궐기대회’란 집회 명칭에서 친일파가 구국과 반공이란 이름 뒤로 숨어 공세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일관된 반공논리의 기원입니다. 역사적 단죄의 대상이었던 친일파의 리더십이 유라시아냉전체제를 예리하게 파악하여 만들어 낸 ‘반공론’이야말로 그들이 집단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회생하는데 있어서 전가의 보도가 되었으며, 유라시아냉전체제를 한반도화 하는데 완벽히 성공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9년 이승만대통령과 우익의 소위 6월공세는 반민특위 습격, 국회의원 대량체포, 김구의 암살로 이루어진 총공세였습니다. 건국의제였던 친일파 척결은 빨갱이 척결로 전환되었고 이는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빨갱이와 국가보안법
국가는 나의 보호자일 때도 있지만 파괴자 일 때도 있다는 점에서 나와 국가의 불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1948년, 지금으로부터 60년전입니다. 제주4.3이 있었고, 대한민국의 건국이 있었으며, 헌법과, 국가보안법의 제정이 있었던 해입니다. 국가보안법의 모체가 되는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 최초로 발의된 것은 여순사건 이전인 그 해 9월 20일이었습니다. 결국 제주 4.3이 국가보안법탄생의 모태였던 것입니다. 한편에서 가혹한 학살과 폭력이 행사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그로인해 안녕과 질서가 지켜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공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비추어졌습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그것이 제주만이 아니라 우리모두의 일상에 적용되도록 전국화 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국가보안법은 구체적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상과 국민의 행복을 훔쳐가려는 가까이 있는 적을 상상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란 상징과 기호를 사람들이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국민으로 상상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보입니다. 스스로의 자유의지와 이웃과의 토론이 아닌 외부로부터 주어진 조건과 압력으로 국민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은 불행하게도 근대의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사회에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대립물을 제치고 단연 적대 1호로 빨갱이의 형상을 압축하며, 빨갱이와, 숨어있는 빨갱이로서의 간첩을 우리 가까이에 있는 적으로 상상하도록 만드는데 집착합니다. 북한이란 적대의 설정은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북한이 적이 아니라 협력의 대상으로 변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무의미하다는 설명도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북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전체주의자도 상징적 허구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음을 잘 압니다. 또 전체주의자는 실제로 체제가 타락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적 권위에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just because’를 보탭니다. ‘바로 임금님이 벌거벗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뭉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헌법3조 영토조항에서 북을 남의 영토이며, 수복해야할 지구로 보며, 수복지구에 존재하는 정권은 괴뢰정권이거나 반란단체, 반국가단체이며 그래서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는 이데올로기구조는 실제로 결정적인 시기마다 국가의 안보를 지키기는 커녕 위협을 가했음을 역사는 잘 알고 있습니다. 52년과 53년 유엔사와 미국은 정전협정을 반대하고 북의 수복지구를 되찾기 위해 계속 북진해야 한다는 이승만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레디 계획을 수립했고 쿠데타를 통해 군사정부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헌법3조 영토조항으로부터 국가보안법으로 이어지는 안보이데올로기를 이승만대통령이 전면에 내세운 때문이었습니다. 이같은 문제는 지금까지도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잠복해 있습니다.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닌 ‘그렇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72년 수립된 북의 사회주의 헌법9조에서 북의 영토를 북한지역으로만 한정하여 남한의 영토를 인정한 변화를 보인데 비해, 미국은 우리 헌법3조를 부정하고 있어 헌법차원에서 본다면 오히려 북한보다 미국이 헌법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방해자임에도 미국에 대해서는 어떤 경계도 취하지 않는 모순을 보입니다. 그러나 맹목적 국가주의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넘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미동맹으로 뭉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편, 유엔사문제의 심각성을 가장 철저하게 연구한 것은 진보진영의 법학자가 아니라 보수진영의 법학자들이었습니다. 저의 유엔사공부의 출발은 거의 모두 그분들의 저술에 의존한 것입니다. 그들은 유엔사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뭉쳐있었습니다. 제가 그분들과 다른 견해를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북의 지령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뭉쳐있는 실상을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결사에 참여할 이해관계만 없다면 상식의 눈높이만으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이 벌거벗은 것은 언젠가 알려지게 되어 있고 그때 그것을 감춰왔던 사람들의 구조도 만일하에 드러날 것은 자명합니다.
불법으로 민간인학살을 자행한 서북청년단이 스스로 한일을 잘 알기에 오히려 더 폭력의 물신주의자가 되어 뭉치듯, 국가보안법은 국가내부를 향해 대립물과 적을 만들어내는데 혈안이 됩니다. 국가보안법이 끝없는 폐지주장에 시달리는 것은 그것이 형식에서 국회의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만들어졌다해도 이러한 현실의 맥락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폐지만이 아니라 이러한 사회의 맥락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동반되지 않으면 또다른 이름의 국가보안법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병리학자가 내린 다음의 결론은 의미 있습니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20세기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리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병리는 빨갱이를 통해 외화되어 왔다. 병리의 근원이 치유되지 않는 한 빨갱이소동이 사라진다한들 또 다른 단어의 빨갱이가 마련될 것이다.
인민 없는 국민, 국민 없는 국가
한국전쟁이후 인민이란 말은 용공을, 국민이란 말은 반공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인민과 국민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지게 된 시기는 1948년 8월로 보여집니다. 1948년 제헌의회 당시 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된 헌법초안은 일괄적으로 ‘인민’이란 용어가 사용됐습니다. 영어의 ‘피플’(people)을 ‘인민’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즉 헌법 제1장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로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국회 속기록’에 따르면, 윤치영은 국회 본회의 발언을 통해 “‘인민’ 이라는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어째서 그런 말을 쓰려느냐” 며 “그런 말을 쓰려는 사람의 사상이 의심스럽다” 고 공박했습니다.
이에 조봉암 의원이 ” ‘인민’ 은 미국.프랑스.소련 등 세계 많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단지 공산당이 쓰니까 기피하자는 것은 고루한 편견일 뿐” 이라며 즉각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제헌의원들은 ‘국민’ 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당시 헌법기초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유진오 박사의 비망록에 의하면 ” ‘국민’ 은 ‘국가의 구성원’ 이라는 뜻으로 국가우월주의 냄새가 풍기는 반면, ‘인민’ 은 ‘국가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 를 의미한다” 고 정의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단어 하나를 빼앗겼다” 며 아쉬워 했습니다.
‘인민’이란 말은 전체주의보다는 분명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민 없는 국민은 분명 전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주의라고 비난하는 북에서는 인민이란 단어를 쓰고 있으며 자유주의를 정체성으로 한다는 남에서는 국민이란 단어만을 쓰고 있습니다. 북에서 국민이란 단어는 반동사상의 지시어이며, 남에서 인민이란 단어는 친북사상의 지시어로로 굳어져 있습니다.
인민없는 국민은 국가의 뜻에 충실히 따를 때만 국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목적, 예를들면 빨갱이를 척결해야한다는 목적 앞에서 국민은 죽음조차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존재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웃과 가족의 죽음에 대해 항의하기는커녕 죽은 가족과 달리 나는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과 이웃을 버려야했습니다. 더 광폭한 폭력에 가담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폭력은 국가가 보장해 주었기에 국가의 적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담보였던 것입니다. 정의가 폭력 뒤로 숨었습니다.
제주에서 학살자가 급증한 시점이 유격대의 저항이 증가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양측간의 교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 이후였고, 미군에 의한 지원으로 서북청년단과 경찰등의 물리력이 증강된 시점이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희생은 저항의 강도가 아니라 국가폭력의 강도와 비례했던 것입니다. 베버의 표현대로 국가권력이 합법적 폭력이라면 왜 우리에게 있어서 국가의 폭력은 합리적이고 합법적이지 않고 그와 정반대였을까요? 이같은 현실이 반성되지 않을 때 그것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같은 원리는 저의 사건에서도 재연되었습니다. 4년 넘게 저의 전화와 이메일을 도청한 결과 공안경찰과 검찰이 이적성의 증거로 제출한 것은 단 한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습게도 저의 절친한 친구인 이준서와 금강산에 다녀온 후 농담으로 주고받은 “신년인사차 공화국에 다녀왔다”는 말이었습니다. 검사는 이 한마디로 저의 평소의 이적목적이 충분히 설명된다며 집요하게 증거로 제출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개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정부의 공권력과 공안기구의 사소한 편견이 결합되면 쉽게 국가보안법 사범을, 국가의 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케 됩니다. 관음증 환자는 목욕을 위해 옷을 벗는 장면을 성적흥분을 자극하는 장면으로 오해하고,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고 더 완벽하게 훔쳐 볼 수 있게 될수록 관음증에 더 깊이 빠져듭니다. 문제는 상대방의 행동이 아니라 관음증에 빠져드는 자신입니다. 저항의 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권력의 강도에 의해 희생이 증가한다는 원리는 국가 공안기구가 비대해지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란 생각입니다. 일년전 저는 국정원직원과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국정원직원은 맞은편에 있는 분으로부터 이런 항의성 질문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왜 안기부에서 간첩을 안잡아.” 그러자 제 옆에 있던 국정원직원은 “저희들도 열심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일심회를 잡아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공안기구가 있고 그것에 기대는 사람들의 요구와 추궁이 존재할 때 사건은 만들어집니다. 일심회가 간첩단이 아닌 것은 법원판결로 드러났습니다. 일심회를 적발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 것임이 증명되었음에도 아직 검사는 일심회를 간첩단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공권력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논리로 무리한 기획을 하게 됩니다. 근대 초 한 독일철학자의 말을 응용하면 “의사는 세상사람들이 환자인지 아닌지로만 보이고, 경찰은 세상사람들이 도둑인지 아닌지로만 보이며, 군인은 세상사람들이 적인지 아닌지로만 보인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앨빈토플러의 “우리는 전쟁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은 우리를 고민한다.”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군인은 적과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적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경찰청보안수사대가 스스로 조직의 존립근거를 확인시키기 위해 국가보안법사건을 만들어 낸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근대화가 진전될수록 폭력이 증가하고 지능화합니다. 예를들어 유태인 대량학살을 일으킨 나치즘의 폭력은 근대사의 일탈사태가 아니라 오히려 중심사건이며, 이후에 나타나는 인종말살이나 주민에 대한 국가폭력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바우만은 유태인 학살을 근대적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국가가 폭력의 수단을 독점하고 면밀한 계획하에 행정의 실천을 통해서 전통적인 사회로부터 벗어나면서 생겨난 독특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치시대를 상술하면서 프리체는 유태인 대량학살을 나치독일이란 파시즘국가의 정치적기술체계의 산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와 관련해서 보았을 때 제주 4.3에 연루된 국가폭력은 한국 근대화의 일부분으로서 자행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폭력에 의한 집단살상은 제2차대전 이후 등장하는 민족국가들의 형성과 체제유지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아르헨티나, 페루, 베네수엘라등 남미국가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대량살상 사건의 경우를 보면 국가에 의한 정치폭력은 근대적 국가체제의 형성과 존립에 본질적인 요소(constitutive element)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민없는 국민, 국민없는 국가뒤에 남는 것은 폭력이며, 폭력이 모두에게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을 때 우리는 폭력의 유혹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히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1심 최후진술에서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분단체제나 정전체제란 말로 설명되기보다 원한체제란 틀로 설명된다고 했습니다. 원수를 대신해서 자기아들을 죽이듯 적으로 설정한 인민군을 대신하여 국민을 탄압하는 역설을 논리적인 구조틀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한체제에서 주체가 원한을 갚기 위한 행위는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주체가 빠져있고 원한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빨갱이를 둘러싼 체제의 중심에 인민도 국민도 국가도 없이 폭력을 위한 폭력만이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주인없는 구조입니다. 빨갱이공포가 만들어 낸 원한체제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위기를 가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체제의 문제는 진짜 위기의 신호를 보내야 할 때 국가를 양치기소년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주인없는 구조, 자유없는 관성
창작의 자유와 알권리에 대해 검사는 ‘한계 없는 관용은 관용자체를 파괴하고, 한계 없는 자유는 자유 자체를 파괴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통제된 관용은 이미 관용이 아니며, 통제된 자유도 이미 자유가 아닙니다. 지배와 독선에 대한 반성에서 관용이 가능하며, 통제로부터의 해방이 자유입니다. 민주주의가 절차에 집착할 때 그것은 체제유지를 위한 질서일 뿐이며, 그로부터의 극복을 기획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자유에 기초할 때 민주주의는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관용없는 체제는 체제자체를 파괴할 수 있고,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국가주의는 자유주의 자체를 파괴할 것입니다. 관용은 설명될 수 없는 소통의 결핍에 대해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자유를 불편해하고, 자유를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며, 민주주의를 자유를 통제하기 위한 절차로만 보는 한 그것은 전체주의일 뿐입니다. 오늘날 전체주의자들이 제모습을 숨기고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에 대한 최대의 기만행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는 전체주의자요’라고 외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나는 파시스트요’ 라고 외치는 것이 솔직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열린사회의 적은 전체주의입니다.
비무장지대사진작업을 하게 된 동기는 비무장지대란 말뜻이 ‘무장하지 않은 지대’란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우리는 비무장지대란 말을 들으면 철책선과 군인과 온갖 중화기가 배치된 중무장상태를 떠올립니다. 사과란 단어를 들으면 사과가 떠올라야합니다. 만약 사과라는 단어를 듣고 배나 귤이 떠오른다면 그는 정신분열증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비무장이란 단어를 듣고 중무장상태를 떠올리면서 우리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50년간 집단적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회의로부터 이 작업은 시작되었습니다. 자유의 반대는 보통 구속이라고 생각하지만 프랑스철학자 베르그송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속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라 나의 자유의지까지 어쩌진 못합니다. 그리하여 자유의지는 저항을 통해 구속을 깹니다. 그러나 관성은 외부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거나 합리화된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저항하거나 극복할 생각조차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성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구속입니다.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는 투쟁을 할 수 있지만 관성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총도 칼도 아무런 무기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로지 반성과 성찰만이 관성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비무장지대사진작업은 저 스스로와 우리모두가 포로로 사로잡혀있는 관성에 대해 성찰하는 작업이며, 나무를 나무로, 짐승을 짐승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위한 작업입니다. 저의 사색과 성찰이 잘못된 결론에 이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틀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될 것을 예상하여, 틀릴것을 짐작하여 사색과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고 통제된다면 그 자체가 바로 구속이며 관성입니다. 역사상 예술창작은 체제와 논리등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전인미답의 길을 정서와 상상력으로 개척해온 행위입니다. 보에티우스의 기도가 고대에서 중세로의 길을 열었고, 단테의 신곡이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리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에서 르네상스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던 것처럼 미학적 사유와 예술창작행위는 체제가 도달한 위기를 예감하고 그것을 극복할 길을 제시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체제의 논리와, 한계 지워진 질서로 창작의 자유를 제한 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이런 탈출구를 찾을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검사가 주장하는 통제된 관용, 통제된 자유의 사회는 자유와 관용의 공기가 사라진 죽은 시인의 사회입니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섬세함과 민감함이란 계속되는 반복을 전제합니다. 반복을 통해 섬세해지고 섬세함을 통해 공고한 결이 만들어집니다. ‘결을 만들려거든 섬세해져라. 섬세해지려거든 반복하라.’ 이것이 저의 좌우명중의 하나입니다. 검사는 간혹 자신이 예술창작의 자유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처음에 문제 삼았던 ‘고려산 미군통신시설의 노을’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진들이 문제라고 말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려산 통신시설의 노을이 수많은 반복 없이 우연히 단번에 태어난 것으로 생각하시지는 않겠지요. 노동자의 숙련성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도 자신이 창조하는 형상에 대해 끊임없는 숙련과 반복을 거듭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진중에서 새롭게 해석되어 습작에서 작품으로 재창조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진장르의 특징입니다. 최근의 사진중에는 창작과정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기록하여 작품화하는 조류와 경향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창작과정을 창작자체로 보는 관점이 설득력을 얻어가기 때문입니다. 검사님의 말대로 창작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습작도 창작과정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가져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
저는 1심에서 저의 미학관이 ‘어둠’과 ‘가슴’과 ‘결’로 설명된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제 여기에 ‘눈물’의 미학을 더하고자 합니다.
올해 4.3항쟁 위령제가 벌어지는 제주시청 마당에선 젊은사람의 귀엔 한없이 지루하게 들릴 무당의 굿소리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람불면 흩어지고 비가 오면 씻겨가니 어디한곳 머물곳이 없다”고 혼들은 무당의 입을 빌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 굿판에서 모두 고개를 돌린 그 순간에서야 저는 정작 혼백의 결이 느껴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숙소 옆 도두봉을 오르던 길에 동백꽃 한송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돌연 꽃잎 깊숙한 곳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왠일인지 제머리 속엔 한참동안 이슬이란 단어가 생각나지 않고 눈물이란 단어만이 맴돌았습니다. 그랬습니다. 바람에도 빗물에도 흩어지고 씻기고야마는 혼백이 꽃잎에 숨어 있다가 남몰래 흘리는 눈물, 그것이 제가 본 동백꽃의 이슬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겨울인가 저는 지하철 창가에 서서 눈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눈은 창문에 닿는 순간 물이 되었습니다. 눈물이었습니다. 차가운 세상이 따뜻한 온기를 만났을 때 흘러내리는 것이 눈물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차이와 차별과 불평등한 세상은 제가슴을 열어 끌어안지 않고서는 소통되고, 평등해질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을 가슴 열어 끌어안고자 할 때 주체는 물을 흘립니다. 손가슴이 낯선 삽자루를 끌어안았을 때 손에선 물집이 잡히고 터져 물이 흐릅니다. 발가슴이 대지를 끌어안으며 나아갈 때 발에서는 역시 물집이 터져 흐릅니다.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지켜보며 끌어안는 눈가슴에선 눈물이 흐릅니다. 칼과 총마저 끌어안고자 가슴을 여는 순간엔 핏물이 흐릅니다. 저는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 세상의 중심도 아픈 곳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아픔을 피하지 않고 끌어안고자 하는 평화의 가슴들엔 언제나 눈물 마를 날이 없습니다. 눈물은 아픔보다 더한 소외와 같이, 설명되지 않으나 간절한 마음으로 소통하고자 할 때 흘러내립니다. 국가의 폭력 앞에 그 조차 부등켜 안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절규하며 흩뿌린 눈물은 죽지 않고 살기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제가 4.3피해자나 대인지뢰피해자나 민간인학살피해자분이나 참전용사들에게 다가가 처음 말을 걸었을 때 “그걸 워떡케 말로 다 혀” 하며 하나 같이 그 아픔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설명할 언어가 막힌 지점에서 사람은 눈물을 흘립니다.
꿈과 현실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결핍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은 기다림입니다. 나의 언어나 지시가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잠시 유보하거나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 기다림속에서 내가 변합니다. 그러면 변화된 나로 인해 상대방이 변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사이엔 서로 부족한 것이 있었던 것뿐입니다. 상대방이 지닌 현재의 결핍을 채근하며 몰아붙일 때 그것은 악이 됩니다. 악은 그래서 상대방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국가건설 과정에서 흘려진 수많은 눈물을 흠쳐주는 일을 국가가 해야 할 때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위기를 상정합니다. 그리고 사실은 위기의식을 만들어 냅니다.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절차를 국가가 마련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모든 일상을 위기로 만들어 강요하면 그 사회는 비정상적인사회가 됩니다. 국가보안법은 일상을 위기로 유지하도록 요구하는 법입니다. 국가의 권리가 인간의 권리를 압도할 때 자유가 파괴됩니다. 국가의 위기가 인간의 위기로 강요될 때 일상이 파괴됩니다. 민주주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절차로 전락하고 자유의 공기는 사라집니다.
오늘날 포유류가 거대한 몸집을 갖게 된 것은 공기중의 산소가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먹이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공기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질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유의 공기가 우리를 거대하게 할 것입니다.
판결
‘월인천답月印千畓’이란 농사 전 물을 댄 논마다 달빛이 가득한 풍경을 이르는 말입니다. 교교한 것은 달이 아니라 달빛입니다. 달이 존재의 개념이라면 달빛은 관계의 개념입니다. 월인이 그러하듯 사회적 낙인 역시 존재의 개념이 아닌 관계의 개념입니다. 빨갱이란 낙인은 그것이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만들어 낸 관계의 허상이란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법의 판결도 블랙홀처럼 흡수해 버리는 설명하기 힘든 체제입니다.
판단이란 사람이 관계 맺는 행위의 한 매듭입니다. 순간순간의 판단에 의해 우리가 맺는 관계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판단에는 이로운 판단이 있고, 지혜로운 판단이 있으며, 현명한 판단이 있습니다. 1심에서 말했던 지주와 상인과 선원의 비유에 의하면, 이로운 판단은 이해관계에 매인 지주의 판단이며, 지혜로운 판단은 이해관계를 절충할 줄 아는 상인의 판단이며, 현명한 판단은 거대한 구조의 움직임을 통찰해야만 하는 선원의 판단입니다. 법이 이로움을 쫒으면 사회도 이로움만을 쫒습니다. 법이 지혜로워지면 사회도 지혜로워 집니다. 법이 현명해지면 사회도 현명해 집니다. 법적 판단은 사회구조에서 가장 권위있는 판단입니다.
법으로도 구제되기 힘든, 힘겨운 사회의 구조에서 그나마 유일한 희망은 법 안에서의 현명한 판단입니다. 아픔과 소외속에 눈물 마를 날 없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역사를 끌어안고 스스로 눈물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은 그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이 되어줄 순 없을까요?
법은 그들이 기대어 울 어깨가 되어줄 순 없을까요?
판사님의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