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사령부의 문제 2008/04/30 571

민변20주년 기념 서적 ‘사회개혁입법과제’ 평화통일부분에 들어갈 원고입니다.

유엔군사령부의 문제

사진가 이시우
목차
1. 한국전쟁시 유엔참전 결의의 문제
2. 유엔사(통합사령부)창설 결의의 문제
1) 유엔사의 미군화
2) 유엔사의 보고절차 문제
3) 유엔사의 지원절차 문제
3. 유엔총회 북진결의의 문제
1) 군부가 주도한 북진
2) 끝나지 않은 문제 – 북진결의
4. 정전협정 문제
1) 비무장지대 문제
(1) 비무장지대의‘점령’적 성격
(2) 법을 압도하는 군사체제
2) 한강하구 문제
5. 작전통제권 문제
1) 유엔사 작통권
2) 작통권 환수와 유엔사 ‘위기관리권’
3) 위기절차는 전쟁절차의 상위개념
6. 유엔사문제의 전망

1. 한국전쟁시 유엔참전 결의의 문제

유엔사문제의 기원은 미국이 유엔안보리를 통해 한국상황에의 개입을 적극화한 1950년 6월25일과 27일 결의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결의는 보통 한국전쟁 참전결의라고 간주되나 한국에서의 충돌이 전쟁이었는지, 또한 유엔안보리의 결의가 참전결의라고 볼 수 있는지 기본적인 질문조차 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의상 이 용어를 우선 사용한다. 미국의 유엔정책이 이상주의에 바탕한 일관된 정책이었다면 한국사태에 대한 개입은 오히려 의외의 결정으로 받아 들여졌다.

‘한국에 대해서도 국무성은 재차 개입을 주장했고, 합참은 수세의 역할을 연출했다.’

‘국제사회’를 바라보는 세 가지의 전통, 즉 홉스적 현실주의(Hobbsean), 그로티우스적 합리주의(Grotian), 칸트적 혁명주의(Kantian) 중 유엔은 홉스적 ‘세력균형’과 칸트적 ‘세계정부’론 대신 그로티우스적 ‘집단안보’에 기초하여 힘이 아닌 국가간 합의에 의해 평화의 파괴가 압도적 다수의 영향력으로 대응한다는 이상주의에 기초해 있다.
유엔 질서의 주조자이자 주도자로 등장한 미국에 의해 유엔은 최초의 유엔 집단조치로서의 한국전 참전을 전광석화와 같이 결의했다. 그러나 한국전에서의 유엔‘집단안보’의 발동은 강대국이며 상임이사국인 소련의 강력한 반대로 정치적 의미에서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

유엔은‘집단안보’에 기초하되 2차대전 연합국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의 지위와 거부권을 현실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창설될 수 있었다. 거부권으로 집약되는 강대국지위의 인정이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로 부각되었다. 한국전 참전 결의는 연합국의 협력을 가정했던 유엔 창설 직후부터 갈등 조짐을 보여온 미.소의 대립을 되돌릴 수 없는 파탄으로 몰아붙인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 참전 결의는 40년 동안 유엔 안보리를 기능마비 상태로 만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유엔안보리의 첫 번째 논의는 먼저 북한의 침공이 헌장 제39조의 ‘침략행위’인지에 대하여 이루어졌다.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의 제소’라는 의제로 소집된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의에서 미국은 북한이 ‘도발되지 않은 침략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결의 초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다른 회원국들은 이러한 결정을 하기에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의견이어서 미국은 어조를 낮추어 ‘평화의 파괴’를 언급한 수정안을 제출하였다. 안보리는 최종적으로 ‘침략행위’를 언급하는 대신 ‘평화의 파괴’가 존재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내란이라고 주장하는 캘젠(Hans Kelsen)은 ‘평화의 파괴’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전에 대해서는 ‘평화의 위협’이 적절한 표현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절차상의 문제도 지적되었다. 유엔헌장 제32조에 따르면

‘안전보장이사회의 이사국이 아닌 유엔회원국 또는 유엔회원국이 아닌 어떠한 국가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심의중인 분쟁의 당사자인 경우에는 이 분쟁에 관한 토의에 투표권 없이 참가하도록 초청된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이 아닌 국가의 참가에 공정하다고 인정되는 조건을 정한다.’

당사자인 북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대만문제로 소련이 안보리에 불참하고 있던 기회를 틈타 기습적으로 결의안을 처리했다. 당사자인 북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초청되지도 않았다. 이는 유엔총회 제28차회의 결의와 대비해 보면 더욱 명백하다. 1973년 10월1일 유엔총회 제28차 회의에서는 조선문제를 토의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를 무조건 초청할 것을 결정하였다.’

한편 소련이 제기한 절차상의 문제는 유엔 설립의 근본문제와도 닿아 있어 심각한 논쟁을 일으켰다. 중국의 안보리 대표권 문제로 1950년 1월부터 7월까지 안보리 참석을 거부하며 불참하고 있던 소련은 안보리의 한국전 참전 결의가 무효임을 주장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소련의 참여 없이 채택된 결의는 헌장 27조 3항의 위반임.
② 대만(Taiwan)은 합법적 중국 정부로서의 대표성이 없음.
③ 한국전쟁은 국가 간 분쟁이 아닌 내전(Civil War)임.

①항에 대한 소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기권(abstention)은 거부권 행사가 아니라는 것이 안보리의 관행이었고, 둘째, 다른 국가들이 안보리 회의의 자발적인 불참은 기권에 해당된다는 미국의 주장에 따랐기 때문이다. 미국은 유엔설립의 대전제인 강대국의 거부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기권과 거부권을 분리시키는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소련의 거부권 행사의 의도야 어떻든 1950년 8월 이후 소련이 안보리에 복귀함으로써 ‘세력균형’을 포기하고 유엔의 ‘집단안보’틀 내로 들어왔다는 점과 그 직후부터 안보리의 기능이 마비되었다는 점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극단을 오갔다. 미국은 일관된 ‘집단안보’ 정책을 관철시켰다는 평가와, 헌장이 명시한 질서와 정신을 왜곡 변형함으로써 패권적인‘세력균형’정책을 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형식적 합의 절차로만 본다면 미국의 의도가 관철되었지만 장기적으로 유엔은 집단안보 틀이 마비될 수밖에 없는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②항에 대해 소련은 1950년 6월 25일 채택된 안보리의 결의에 앞서 중화민국대표의 참가 속에 채택된 모든 결정을 인정하지 않으며 구속되지 않겠다고 하여 이 결의의 합법성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였다. 대만정부의 대표성 문제는 결국 소련의 입장이 수용되었다.

③항의 내전론은 1950년 6월 25일 안보리결의(S/1501)에서도 전쟁이 아닌 내란으로 명시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이 결의에서 북을 북한(The North Korea) 또는 북한 당국(The authorities of North Korea)이라고 표현한 반면 남은 대한민국(The Republic of the Korea)이라고 표기함으로써 남을 합법정부로 인정한 반면 북은 독립된 국가로 인정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4가지 선전 임무를 제시하면서 남한(South Korea)이 아닌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란 단어를 항상 사용할 것을 요구하여 특별한 주의(caution)를 지시했다. 이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근거가 된 유엔 총회 결의에 대한 유엔 총회 스스로의 해석,‘대한민국은 유엔 감시 하에 선거가 치러진 지역에 한해서 유일한 합법정부이다’라는, 즉 남측 지역에서만 유일합법정부라는 해석과도 모순되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1950년 8월3일 소련대표는 다시 출석한 안보리 제482차 회의에서 한국의 투쟁은 내란이며 이에 대한 유엔의 개입은 위법이라고 역설하였다.

“…한국분쟁은 국내적 분쟁이다. 남북미국이 그들의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내란으로 투쟁할 때에 남북미국간에 침략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남북한간에도 침략에 관한규칙이 적용될 수 없다.”

소련은 이어서 한국의 상황은 두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므로 국내분쟁(internal conflict)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미국과 유엔의 개입은 유엔헌장 제2조 4항의 국내문제불간섭 원칙위반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반 국제법상 내란은 국제법의 지배 밖에 있는 국내문제(Domestic affairs)이며 이에 대한 개입은 위법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승인된다. 이와 관련 토마스(A.V.W.Thomas)와 테마스(A.J.Thama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란은 국제법의 지배 밖에 있는 국내문제라는 것은 일반 국제법에 의해 확립된 법칙이다.”

1950년 유엔총회에서도 그리스 사태에 대하여 위와 같은 원칙을 확인하는 결의를 채택한바 있다.

“유엔총회는 …어떤 국가가 위협이나 무력의 행사로 타국의 정부의 변경을 목적으로 타국의 대내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금지한다.”

한편 헌장 제2조 7항은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본질상 어떤 국가의 국내 관할권 안에 있는 사항에 간섭할 권한을 국제연합에 부여하지 아니하며, 또는 그러한 사항을 이 헌장에 의한 해결에 맡기도록 회원국에 요구하지 아니한다. 다만, 이 원칙은 제7장에 의한 강제조치의 적용을 해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이 단서 조항에 의하여 유엔군의 파병을 ‘강제조치’로 본다면 국내문제불간섭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남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소련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과 유엔군의 지원은 국제법상 불법한 개입이 되게 되지만 거꾸로 북한의 국가성을 부인하는 입장에서는 적법정부에 대한 합법한 지원이라고 보게 되어 이는 남북의 국가승인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련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참전국들은 한국전쟁을 국내문제불간섭 원칙의 맥락이 아닌 무력행사에 관한 국제법에 따라 정당화하였다는 점이다. 소련의 주장은 헌장 제2조 4항이 내전 자체를 불법한 것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나 2조 7항의 단서로 제7장의 강제조치의 적용을 해하지 않는다는 유엔 집단안보의 적용은 국내문제 불간섭 원칙에 우선한다는 논리로 무시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유엔안보리의 관련결의가 구속력을 갖는 ‘결정’(decision)이 아닌 ‘권고’(recommendation)임에 따라 헌장상 강제조치에 해당하는지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강제조치(enforcement action)로 볼 것인지 아니면 개별 회원국간의 조정(coordination)행동으로 볼 것인지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결의안에 표현된 권고(recommend)는 요청(Request)보다 훨씬 약한 표현이다. 그리고 통합군사령부에 제공하는 군대와 원조의 내용은 전적으로 회원국들에게 일임되어 있다. 게다가 한국은 유엔 가맹국이 아니었으므로 7월7일 결의에 권고적 또는 법적 구속력을 받지 않았다. 안보리의 결의의 효력은 유엔헌장 제25조의 규정에 의해 가맹국에 대해서만 법적 구속력이 있다. 제25조의 안보리의 결정(decision)은 모든 결의(resolution)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헌장 규정에 의한 ‘결정’에 한한다고 해석된다.
한국은 유엔가맹국이 아니므로 이 결의는 명백히 가맹국 또는 미국에 권고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결의가 한국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다른 견해도 있다. 유엔헌장은 회원국뿐아니라 비회원국에게도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한 헌장상의 원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따라서 유엔의 회원국이 아닌 국가의 평화에 대한 위협이나 파괴행위에 대해 예방 또는 강제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이에 근거하여 1950년 6월 유엔안보리는 소련대표의 불참 속에 북한으로부터의 무력공격 격퇴와 국제평화 회복을 위해 남한에 대한 회원국의 원조제공을 권고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회원국의 경우 이 조항의 문언에 따라 모든 국가(any state)에 대해 이러한 의무를 지지만 비회원국은 같은 조항의 보호를 받을 뿐 구속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유엔측 참전국들의 행동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에 응한 것임은 분명하다. 이와 동시에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도 인정된다. 이러한 결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미군의 파병은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국제법상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요건에 대하여는 논란의 소지가 있으나 미국의 참전은 형식법리상 이에 해당한다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집단적 자위권행사와 유엔안보리결의에 의한 강제조치는 다른 것이다. 이와 관련 걸프전 당시 미국이 보인 태도는 한국전 당시와는 모순된다. 미국은 걸프전에서의 군사행동이 한국전쟁의 그것과 정반대로 유엔차원의 행동이 아닌 자위권적 조치, 즉 임의행동임을 주장했다.

‘유럽의 국제법교수와 실무자들은 탈냉전적 상황에서 안보리상임이사국들의 입장이 일치된 가운데 이루어진 대 이라크 군사행동을 냉전시기 사문화되었던 제7장의 규정에 따른 군사적 강제조치의 최초의 적용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대다수의 미국교수들은 유엔헌장 제43조의 특별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제42조의 군사조치가 법적으로 발동이 불가능하므로 대 이라크 군사행동을 제42조의 군사조치로 해석하는 것은 모순이며 또한 문제의 군사행동이 유엔의 여하한 통제도 받지 않고 이루어졌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이는 유엔의 행위 즉 강제조치라고 볼 수 없으며 문제의 군사행동의 법적 정당화는 이를 헌장51조에 의한 집단적 자위권행사로 볼 때에 가능함을 역설한다.’

걸프전에서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군사행동이 안보리의 군사적 강제조치로 해석되기 위해서는 안보리의 군사적 제재 권한에 대한 유일한 법적 근거인 유엔헌장 제42조가 적용되어야 한다. 이처럼 미국의 한국내란개입은 개별국가의 집단적 자위권행사로 파악되는 것은 법리적 타당성을 갖추나 집단안보틀인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의한 강제조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유엔사공보관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유엔사는 1950년 참전결의가 아직도 유효하므로 새로운 안보리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같은 입장은 다시 검토되어야 할 논쟁주제임이 분명하다. 같은 이유로 그 후속조치로 이어진 소위 유엔사 창설결의 또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2. 유엔사(통합사령부) 창설 결의의 문제

유엔사란 명칭은 통합군사령부를 미국이 왜곡하여 표현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역시 편의상 유엔사란 명칭을 병행 사용한다. 유엔의 한국전 참전결의가 있었다고 하기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처럼 통합군사령부(유엔사) 창설 결의 역시 유엔 집단안보체계를 변형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유엔의 기초자들은 유엔의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자의 응징을 염두에 두고 안보리 산하에 군사참모위원회라는 기구를 두었다. 헌장 7장 43조에 의하면 안보리는 무력수단을 제공키로 한 국가와 협정을 맺어 구체적 사항을 협의하도록 했고 구체적인 군사 전략적 사항은 군사 참모위원회의 도움에 기초하여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구체 조항은 46조, 47조에 규정되어 있는데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강대국 간에 합의에 이르지 못해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군사참모위의 구체적 운용을 위해 안보리는 1946년 그 첫 조치로 이 위원회로 하여금 유엔 헌장 43조에 의거, 군사협정에 관한 문제를 검토, 보고하도록 부탁한 바 있었고, 또한 1946년 12월 유엔총회가 안보리의 군사적 수단 확보의 가속화를 권고하면서 군사참모위로 하여금 1947년 4월 30일 이전에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했다. 군사참모위는 41개 조항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중 25개 조항은 군사참모위 구성국 간에 무난히 합의되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16개 조항은 합의에 실패했다. 즉 군대 규모와 구성, 기지의 제공, 평시의 주둔지, 철수시기 등을 두고 미국과 소련 간에 크게 대립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엔의 지휘명령에 관한 체계는 유엔이 상정한 제도적 장치를 구현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므로 유엔 집단안보체제는 헌장에 규정된 군대나 표준화된 지휘명령조직에 대한 구체적 규정을 갖지 못한 채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한편 미국의 연합군 구성과 지휘문제를 다룬 야전교범에 의하면‘미국이 다른 나라의 군사적 지휘를 받는 일은 없다’고 명시하여 타국 군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 지휘.통제권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미군에게 있어서 유엔의 지휘를 받는 군대의 구성과 지휘관계의 수립은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또 미래에도 군사교리가 바뀌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엔헌장은 집단안보의 지휘명령이나 운영체계에 대해 오직 일반 원칙과 절차만 언급할 뿐 구체적 규정은 없다.
이에 대해 헌장은 특별협정을 통해 조직운영에 관한 구체적 안이 마련되는 것을 상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군대의 숫자와 종류 그들의 준비상태, 그리고 일반적인 위치, 제공될 시설과 원조의 성격’(43조 2항),‘국가 공군력의 준비정도와 연합국제작전계획’(45조)이 세부적으로 협의되게 되어 있다. 또한 지휘문제는 추후 해결해도 군사참모위가 전략적 지도에 대한 책임(47조 3항)을 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엔 산하 군대의 구성과 성격은 안보리의 명령에 따라 동원될 수 있는 국제상비군이나 국가별 대기군을 상정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무기력했던 유엔을 미국이 한국전에 끌어드림으로써 유엔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엔 군사참모위를 정비하고 강화하는 대신 미국은 유엔헌장 어디에도 없던 사령부 창설을 주도하면서 유엔의 대의를 실천한다는 명분과 유엔을 미국의 이익에 따라 이용한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유엔헌장의 변형이란 측면에서 보면 참전결의보다 유엔사창설 결의가 더 극적이고 노골적이었다.
1950년 7월 7일 유엔사(통합사)창설 결의 역시 소련이 불참 중이었으므로 미국의 역할이 지배적이었고, 이에 대해서도 비판에 직면했다. 군사력과 그 밖의 원조를 미국 통제 하에 있는 통합사령부에 제공하게 했던 것은 유엔의 권위에 대한 지나친 잠식이라는 것이다.
유엔안보리의 구속력이 있는 권한행사는 오직 유엔기 사용의 허가(authorize)에 해당할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권고(recommend)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이라고 하지만, 원래 유엔이 예정한 유엔군은 아니라고 할 것이며, 이에 관하여 큰 이견은 없다고 생각된다. 김선표는 “유엔사는 비록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설립되기는 하였으나, 유엔헌장 제29조에 따라 안보리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 기관으로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즉 유엔사는 유엔의 평화유지활동과는 달리 유엔의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지도 않으며, 1950년 이후 지금까지 동 기구가 유엔 연감에 유엔의 보조기관으로서 등재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안보리 등 유엔기관이 유엔사를 유엔의 보조기관으로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점들이 그 이유이다.”라고 했다.
1994년 유엔사무총장이 주유엔북한대사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주한유엔군사령부는 유엔안보리의 산하기관이 아니며, 어떠한 유엔기구도 주한유엔군사령부의 해체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그 원문은 셀리그 해리슨에 의하여도 확인되는데, 당시 부트로스-갈리 유엔사무총장은 1950년 7월 7일 결의에 대하여 “병력과 기타 지원을 한국에 제공하는 모든 회원국은 그러한 병력과 기타 지원을 미국 주도의 통합군 사령부가 이용할 수 있도록 권고하는 데 안보리의 역할을 제한했다. 이에 따라 안보리는 안보리의 통제를 받는 보조기구로서 통합사령부를 설립하지 못하고 미국 주도의 사령부 설립을 권고한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통합사령부의 해체는 유엔의 어떠한 기구의 책임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이다.”
테시스(Thesis)는 유엔헌장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될 수 없는 상황, 즉 유엔사령관이 미국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이런 상황은 미국이 한편으로는 유엔헌장의 대의 하에 전쟁수행을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행동의 자유가 제한받는 것을 꺼리는 모순적인 태도로 나타났다.
1947년 군사참모위 합의 실패 후 소련이 공석중인 안보리를 이용한 미국 주도의 전광석화 같은 조치로서의 유엔사 창설은‘집단안보’의 핵심이 될 유엔군사기구 구성의 실패의 심각성을 더 극단으로 몰고 간 사례가 되었으며, 이 심각성의 후과는 이후 유엔헌장 106조에 의한 임시적 군사조치의 합의도 기대할 수 없게 하였다는데 있다.

1) 유엔사의 미군화

유엔 군사참모위원회의 실패를 공식화하게 될 새로운 유엔의 사령부를 구성해야 할 과제 앞에서 미국정부와 유엔과 주한군사지휘부 간 3자 관계에서는 전쟁의 정치목표 수립, 전략지침, 의사소통 또는 통신계통문제 등 전쟁 수행의 기본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미군에게나 유엔에게나 부분적인 해답을 줄 경험 밖에 없었다. 군사참모위 합의 실패 후, 이러한 경험의 결여는 새로운 창안이 될 가능성보다는 1947년까지의 군사참모위 논쟁에서 소련의 주장을 제거한 미국 주도의 제안이 될 가능성이 뚜렷해졌고 결국 그렇게 진행되었다. 소련과 함께 한국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지휘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이미 그 가능성이 부정된 상태였고‘집단안보’의 합의정신은‘세력균형’의 패권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는 40년 뒤 두 번째로 안보리 결의에 의해 걸프전 개입이 결정되었을 때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미국은 한국에서와는 반대로 유엔군이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회피하며, 미국 주도의 다국적 군사령부로 표현하여 미국의 지휘성과와 주도권을 강조했다. 형태는 정반대가 되었지만 주도권의 유지의도는 변함이 없었다.
유엔사창설을 주도한 미국내의 움직임을 보면 왜 유엔사가 미군화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유엔사(통합사) 창설 초안은 국무부로부터 먼저 제기되었다. 1950년 7월 4일 합참은 국무부로부터 결의안 초안을 접수했는데 이는 국제군대의 창설지침을 담고 있었다. 그 내용은 한국에서 싸우는 모든 군대는 통합군사령부에 두되, 미국이 지명하는 한 장교가 지휘한다. 이 사령부가 유엔기를 사용하는 것을 인가하되 그 휘하에 작전하는 회원국의 군대도 유엔기의 사용이 인가된다. 미국에게는 그 사령부에 의해 취해진 작전에 관한 ‘주기적인 보고서’를 유엔 안보리로 제출하도록 요청한다.
이 보고서는 유엔 안보리 특별위원회로 제출된다. 이 특별위원회는 유엔 회원국으로부터 원조 제의를 접수하여 통합군사령부로 통보하며 6월 25일과 27일 결의를 지원하기 위해 유엔회원국이 취한 조치에 관해 안보리에 통지한다는 것이다. 트리그브 리(Trygve Lie) 유엔 사무총장도 독자적인 안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서는 안보리가 제의한 특별위원회에 보다 뚜렷한 역할을 부여하게 될 것이란 점에서 국무부 안과 차이가 났다. 이 특별위원회는 한국전 수행을 감독할 목적으로 제안되었으나 리 사무총장은 미국이 이를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특별위원회는 국무부 초안이 합참에 전달되었을 때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그들(합참)은 그 조항을 완전 삭제하길 희망했으나 그것을 포함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만약 설치한다면 그것의 기능을 국무부 초안에 열거한 사항에 국한시키고 그것이 한국에 주둔하는 군대에 대한 작전통제를 하려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합참은 안보리 특별위원회가 곧 군사참모위라고 인식할 만큼 민감하게 반발했고 미군 교범의‘지휘의 통일’원칙이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정상적인 지휘 절차와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위원회와 통합군사령부 간의 통신 회선은 미국 정부를 통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맥아더 장군과 안보리 간의 의사전달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하여 지휘, 통제, 통신의 일관된 통일을 강력히 고수했다.

합참은 심지어 참전국에 의한 유엔기의 사용이 전투에서의 혼란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사령부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유엔 대표인 오스틴 대사는 합참의 견해가 유엔기 법(法)과 모순되는 것으로 다른 나라가 원할 경우엔 유엔기의 사용권리를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의안이 통과되었을 때 결국은 오직 통합군사령부만이 유엔기를 사용하도록 인가하였다. 통합군사령부 창설 결의안은 이 군대가 유엔 안보리가 제시한 정치적 목표 이외에는 어떤 전략적 지도나 지휘명령을 받을 수 없는 체계임을 증명했다. 유엔 통합사령부 창설 결의문에서 군사작전에 있어서의 지휘계통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었던 것은 사실상 유엔 결의문이 미국의 의도대로 작전지휘권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향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휘 및 행정기구를 편성함에 있어서 미국의 지도자들은 합참이 전적으로 지지한 두 개의 기본 방침을 따랐다.
첫 번째 방침은 한국전 참전을 본질적으로 협조와 노력, 즉 집단적인 유엔의 저항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 원칙은 1950년 6월 29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행한 트루먼의 연설, 즉 한국을 원조하는 군사력은 ‘유엔의 진정한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 방침은, 작전통제는 레이크 석세스(유엔 본부)나 도쿄가 아니라 워싱턴에 그 중심이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휘통일의 원칙 면에서 유엔은 가장 일반적이며 전반적인 지침의 범위를 넘는 어떤 통제를 못하게 해야 하며 동시에 정치적 고려에서 기본적인 결심은 극동의 전구사령관보다 더 광범한 시야를 가진 어떤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이었다. 합참이 유엔사와 직접 의사소통을 갖게 될 안보리 소속의 특별위원회 설치를 반대한 것은 유엔이 전략과 전술에 관계하지 못하도록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군사작전의 수행은 미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콜린스), 합참의장, 국방장관을 거쳐 미국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 아래 이루어졌다. 결국 이런 일련의 과정은 유엔사는 곧 미군사령부인 것처럼 비춰지게 만들었다.

2) 유엔사의 보고절차 문제

유엔과 미국, 주한군사지휘부 사이의 지휘관계가 구체적이고 집중적으로 고민된 것은 7월 7일 안보리 결의에 따라 맥아더가 제출하게 되어 있는 보고서의 준비와 전달 절차에 대한 규정이었다. 국방장관 존슨은 합참에 이 보고서의 준비와 전달 절차에 대한 건의를 제출하도록 했다. 그 절차 문제를 검토한 합참의 합동전략조사위원회(JSSC)는 유엔사 창설 결의문에 중요한 지휘상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유엔 안보리가 맥아더 장군으로 이어지는 어떤 지휘계통을 결코 설치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유엔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도록 승인하지도 않았다고 강조했다. 7월 7일자 안보리 결의는 통합군 사령부를 미국책임 하에 설치하도록 언급하였으며 보고는 유엔통합군 사령관이 아니라 미국정부가 하는 것으로 명시하였다.
보고절차는 합동전략조사위원회의 이러한 고려사항을 반영하여 합참의 감독 하에 준비되어야 하고 국방성을 경유하여 국무성으로 제출되어 안보리로 전해져야만 된다고 했다. 합참은 보고서가 최초에 맥아더 장군에 의해 기안되고, 검토를 위하여 합참에 보내져야 한다고 명시하도록 수정함과 아울러 이 제안된 보고절차에 서명했다. 존슨과 애치슨 두 장관도 이 계획을 승인했다.
7월 25일 안보리에 보고서를 제출한 이후로, 보고서는 합참이 규정한 절차를 따랐다. 즉 최초에 통합군 사령부에서 기안되어 합참으로 전달되며, 합참은 이를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에게 조회하였다. 콜린스는 각군, 국무성, 맥아더 장군과 협의를 하고, 필요한 수정을 가한 후, 그것을 다시 그의 동료들 즉 합참회의에 회부하였다. 그 다음 국방장관, 국무장관을 거쳐 유엔 안보리에 계속 제출되었다. 합동전략조사위원회(JSSC)의 지적 중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맥아더 장군으로 이어지는 지휘계통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진술은 결의안 초안을 작성하고 그 통과를 주도한 미국의 의도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미국이 유엔통합군사령부의 보고절차를 고민하게 된 직접적 배경은 미국이 이미 취한 불법시비가 생길 조치에 대해 통합군사령부의 보고절차가 합리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7월 7일 통합군사령부 창설 결의에서 이 사령부가 안보리에 낸 첫 번째 보고서가 그것이다. 이 보고서에 추진력을 부여한 것은 국무성이었다. 이는 1950년 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하고 3일 후 모든 선박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를 한 북에 대한 해상봉쇄가 계기가 되었다. 6월 25일과 27일 안보리 결의가 이 조치에 충분한 조치가 되는지 전혀 확실치 않다고 미국정부는 생각하고 있었다. 해상봉쇄는 헌장 42조의 군사조치에 대한 구체적 인용이 결의안에 포함되어 있을 때 가능한데 비해 25일, 27일 결의는 조치(Action)의 결정이 아닌 단지 권고(recommend)였다. 미국은 의구심과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대통령 성명의 진의가 안보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기를 희망했거나, 최소한 합리화시켜 놓을 장치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 7월 7일 안보리 결의에 의해 요청된 최초의 통합군사령부 보고서는 봉쇄에 관한 미국의 일방적인 조치를 유엔에 전달하고 인정받기에 적절한 수단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안보리 회원국에게 그 봉쇄조치에 대해 반대할 기회를 부여하고 만약 그들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봉쇄의 적법성을 묵시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무성은 해상봉쇄가 적법하다고 믿고 있었다. 헌장 51조는 안보리의 조치가 결정되기 전이라도 개별적ㆍ집단적 자위행동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자위권 발동보다 유엔 집단안보의 대의로서 자신들의 행동이 설명되길 바랐다. 문제는 6월 25일, 27일, 7월 7일까지의 안보리 결의에도 불구하고 헌장 42조와 43조에 의한 군사력 사용에 관하여 어떠한 구속력 있는 결정도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7월 3일 봉쇄조치는 한참을 앞서 나간 것이었다. 6월 27일 안보리 결의 직전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선에 해군과 공군을 투입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미 전투가 개시된 것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950년 7월 13일에 국무성 히커슨 차관보는 국무성에서 작전참모부와 비공식 협의 하에 작성한 미국의 봉쇄조치에 대한 보고서 초안을 국방성으로 송부하였다.
그것은 4개항 6개 문장으로 구성된 간단한 것으로서 그 요지는 유엔군은 이미 작전 중에 있다는 것만 언급하는 것이었다. 해군은 적의 부대와 보급품의 해상이동을 차단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봉쇄’라는 단어의 사용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국무성은 ‘통합군사령부가 이미 작전 중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미군의 한국전 개입을 유엔 안보리 조치 이전의 집단자위권 발동으로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국무성 초안대로 유엔군으로서의 미군의 활동을 합리화하려 한다면 이는 유엔헌장의 명백한 위반이라는 논쟁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더불어 7월 7일 통합군사령부 창설 결의도 유엔헌장이 규정한 제도와 절차로부터 벗어난 변형이라고 볼 수 있으며, 헌장의 해석자, 유엔질서주조자, 행위자(Actor)로서의 미국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한 정당화되기는 힘든 조치들이었다.
미국은 유엔의 집단안보라는 대의를 내세우면서도 그 실현수단인 군사기구에 대해선 지휘계통을 수립하지 않았고 사령관이 유엔의 이름은 사용하지만 유엔과 접촉을 못하도록 철저히 단절시켜 놓았다. 통합군사령부는 전략지도를 책임질 군사참모위원회의 위상을 가지지 아니함은 물론, 헌장 29조에 의해 설치할 수 있는 안보리의 보조기관으로서의 역할과 기능도 찾아볼 수 없다. 미국정부 자체가 안보리와 관계하는 이 같은 구조와 형태에 가장 적합한 규정은 헌장 25조 ‘회원국은 안보리의 결정을 수락하고 이행 한다’는 조항이 가장 근접해 보인다. 그리하여 합참의 ‘미국정부가 유엔의 대행기관’이라는 다음과 같은 평가는 객관성이 의심된다.

‘합참은 유엔사가 미국정부에 대해 책임을 지고 미국정부는 유엔의 대행기관으로서 맥아더 장군과 안보리 간의 중계역을 수행하는 원칙을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유엔헌장에‘대행기관’이란 말은 없다. 대행기관을 헌장상의 보조기관으로 이해한다면 총회나 안보리 지침에 따라 구성되는 기구, 예를 들면 평화유지군 등은 총회 임무를 위임받은 유엔 사무총장의 관리ㆍ감독 아래 있던지, 보조기관이 아니라면 회원국의 자격으로 안보리 결정을 이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던지 해야 할 것이다. 유엔통합군사령부도 아닌 미국정부가 유엔의 대행기관이란 해석은 실제와는 많은 모순을 갖는 것이었다. 맥아더 장군 자신도 이 모순에 찬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와 유엔의 관계는 대체로 형식적이었다. 나의 사령부와 내가 수행해 온 모든 것에 관한 전적인 통제는 나의 육군참모총장과 그 참모총장이 통제하는 나의 통신계통으로부터 나왔다. 내가 유엔에 보내기 위해 정상적으로 작성한 보고서까지도 국무성, 국방성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만 했다. 어쨌든 나는 유엔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3) 유엔사의 지원절차 문제

보고절차에서의 유엔 집단안보체제 요소의 결핍과 왜곡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는 참전국들의 지원을 받는 절차에서 다시 시도되었다. 50년 7월 14일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는 미국 관리들과 협의를 거친 후 안보리 결의에 지지를 표시한 53개국 정부에 포괄적 호소를 하였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미국대사 오스틴과 협의하여 작성되었는데 통합군사령부에 대한 지원 제의를 사무총장에게 통보하도록 하였다.

‘지원의 제의는 사무총장에게 통보되어야 한다. 군사지원의 경우 일반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에게 통보하되 구체적인 준비는 그 정부와 통합군사령부 간의 협정에 위임한다.’

리 사무총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 호소의 주목적은 이미 그가 받은 비공식적 제의를 다른 절차를 수립할 만큼 그렇게 많은 지원을 요청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무성, 국방성, 합참 사이에는 원조제의 절차를 둘러싸고 복잡한 논의가 오갔다. 국무성이 마련한 지침초안 중에는 유엔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원조제의 처리과정에서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었다. 국무성 초안에 따르면 유엔 회원국은 원조제의를 사무총장에게 전하며 그는 유엔본부에 위치한 미국대표단을 경유하여‘통합군사령부’로 보낸다. 통신도 같은 계통을 따른다. 그러나 군사보안을 위하여 모든 제의는 일반적 성격이어야 하며 구체적인 것은 미국과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간의 결정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합참은 이 절차에 동의하며“통합군사령부”라는 용어를 문장에서 제거하는 수정안을 제의했다. 그들은 워싱턴에서 모든 제의를 적절하게 평가하고 맥아더 장군과 유엔 간에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제의가 미국 정부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무총장에게 일반적 제의를 하는 것으로 유엔 집단안보 틀의 명분을 살리는 것엔 무난하게 동의가 되었으나 통합군사령부가 유엔기관으로 혼동되는 것에 대한 합참의 반대는 아예 통합군사령부 명칭의 제거를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무총장의 제안문에서‘구체적 준비는 (참전국) 정부와 통합군사령부 간의 협정에 위임’한다고 표현하여 특별협정의 주체가 정부 대 유엔기관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판단케 한다. 유엔헌장 43조에 의하면 군사력 구성에 대한 특별협정은‘안보리와 회원국 간 또는 안보리 회원국 집단 간에 체결’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합참은 이를 지휘통일 원칙을 해칠 오해와 혼란 요소로 파악한 것이다. 미국정부를 유엔의 대행기관으로 보는 해석이 무리한 해석이라면 이들 협정은 헌장상의 특별협정이 아닌 일반적 국가 간의 협정일 뿐이었다. 유엔 집단안보의 대의를 이용하는 형식과 내용 사이의 모순과 불화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으므로 유엔사를 유엔군사령부답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미국정부는 유엔의 집단안보수행을 과장하기 위하여 통합군사령부를 유엔군사령부로 명칭변경하여 사용하는데는 부분적으로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명칭논란을 통제할 수 있는 적대적 상징으로서 ‘공산군’을 만드는데 몰입하였다. 유엔사라는 기표는 그 자체의 구조나 속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대적상징의 조작을 통해 유지된 측면이 강하다. 한마디로 미국은 유엔사가 유엔의 군대다운 요소나 구조를 갖추는데 공들이지 않았으며, 결국 유엔사가 과연 유엔의 군대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의 진원지가 되는 것을 스스로 자처한 셈이다.

3. 유엔의 북진결의는 있었는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후 유엔통합군이 38선에 접근하게 됨에 따라 전쟁의 목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가령 영국은 유엔개입의 목적은 침략의 격퇴(repel)이지 한반도의 통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일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위해서는 새로운 유엔 결의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기존의 6월 27일 유엔 결의문에 이미 38선 이북에서의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새로운 결의문 채택은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6월 29일 국무장관.국방장관으로부터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된 메시지에 의하면 “북한지역으로의 작전확대가 필요하다면 또 필요할 때는… 순수한 군사목표에 대해 북한지역으로의 작전을 인가한다”고 지시함으로써 미국은 6월 27일 안보리 결의의‘격퇴’목표를 넘어서는 결의로 해석될 혼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군사적 수단에 의해 통일을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유엔군을 억제해두고 협상을 통해 통일을 추구해야 하는가? 유엔은 이 두개의 대안에 대해 결코 명백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에 대해 누가 이것을 결정하는가가 하나의 문제로 등장했다. 미국은 유엔이 결정해야 하는 것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미국은 유엔 총회의 효율성을 제고할 여러조치를 제안하면서 애치슨 국무장관이 ‘평화를 위한 단결’이라고 알려진 연설을 하게 했다. 그는 한국의 재건을 감독하기 위해 ‘유엔 복구단’(UN recovery force)의 설치를 주장한 외에 한국에 관해서는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았다. 애치슨의 제안은 11월 3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되었다.
한국에서의 군사작전에 대한 정치적 지침을 제공하기 위한 결의안이 9월30일 유엔 총회에 상정되었다. 한국문제는 유엔총회의 제1위원회에서 토의되었다. 제1위원회에는 한국전과 관련 2개의 결의안이 제출되었는데 소련이 중심이 되어 제출한 5개국안과 미국대표가 그 작업을 도왔지만 호주 등이 제출한 8개국 안이 그것이었다.

5개국안은 ①교전상태의 중지②외국군대의 철수 ③국회를 설립하기 위해 한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선거의 실시 ④선거 시 남북한 동수의 대표로 구성되는 위원회의 설치. ⑤한국복구를 위한 사업추진 ⑥한국의 유엔가입을 언급하였다.

8개국안은 ①Korea 전 지역을 통해 안정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적절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
②통일.독립 그리고 민주적정부의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 등 헌정적 조치의 실행③경제복구 조치들을 실행하기 위해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의 설치를 주요 내용으로 했다.

총회는 토의에 1주일을 보냈다. 유엔의 공산측 국가들은 비신스키 안드레이 의장의 주도하에 움직였다. 그는 만약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유엔군은 침략자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논리는 인도 평화철학자 네루의 지지를 받았다. 소련,인도,유고슬라비아 대표들은 그것이 침략의 격퇴라는 최초의 제한된 목표를 초과하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도전적으로 반발했다. 이 기간중 중공은 인도대사 파니카를 통해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경고하는 최후통첩을 미국에 전달했다. 9월 25일 파니카 인도대사는 총참모장 대리 녜룽전 (Nieh Yen-Jung)으로부터 중국은 “팔장만 끼고 앉아 미국이 그들의 국경선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파니카는 주은래(Chou En-Lai)수상의 관저로 부름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주은래는 그에게 미군 부대가 38선을 넘으면 중공이 개입할 것이다(그러나 만일 한국군 부대만 단독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통보했다. 파니카는 즉각 인도정부에 보고했고 다음날 영국을 통해 주은래 수상의 경고가 워싱턴에 도착했다. 국무성은 그것을 마샬 국방장관에게 전달했으며, 육군성은 맥아더 장군에게 통고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주은래 성명이 선전의도일수도, 혹은 유엔총회에 계류되어 있는 Korea 관련 결의안의 가결을 방해하려는 허장성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불안하여 CIA에 소련과 중국의 의도를 신중하게 평가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Korea에서 중공의 전면적 개입은 계속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기지의 모든 요소를 고려할 때 소련이 세계전쟁을 결정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행동이 1950년에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미행정부는 명백히 이 결론을 받아들였다. 유엔총회에서 8개국안은 약간의 수정을 거쳤고 1950년 10월 7일 표결에서 47:5 (기권7표)로 가결되었다. 한편 유엔사무총장 리는 미국의 결의안 작성과정에서 협의를 받은 적도 없으며, 그 자신의 계획을 작성하고 있었다. 안보리에 이어 총회에서도 사무총장의 역할이나 주도성은 발휘될 수 없었다. 어쨌든 10월 7일 최종결의안의 요점은 총회가 권고한 다음 문장에 포함되어 있었다.

(a)Korea 전국에 걸쳐 안정상태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
(b)Korea 의 통일, 독립,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유엔 후원 하의 선거 실시를 포함한 모든 합헌적 조치를 취할 것.
(c) 남북의 모든 파벌과 주민대표를 평화의 회복, 선거의 실시, 그리고 통일정부를 수립함에 있어 유엔의 기구와 협조하도록 초청할 것,
(d)유엔군은 상기 (a)와 (b)항에 명시된 목적달성에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Korea 의 어느 곳에도 잔류해서는 안됨.

이 결의는 38선 돌파를 간접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는 헌장 제2조 4항 위반이라는 견해도 표명되었다. 또한 항공기를 추적(hot pursuit)하여 만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미국은 참전 6개국의 부정적 회답을 받아들인 바 있다.
10월 7일 결의안은 많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답하지 않고 미해결로 두었다. 무슨 ‘적절한 조치(All constituent acts)’를 할 것인가? 북이 계속 도전하면 이 결의안의‘목적달성을 위해’북으로 들어가 강제로 준수하도록 유엔군에게 인가할 것인가?
이 같은 모호함은 10월 7일 결의를 다시 확인하는 10월 12일 유엔총회 임시위원회 (the Interim committee)에서도 이어졌다. 북진에 대한 언급은 빠진 채 점령문제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을 번역,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유엔군에 의해 점령된 영토에 대한 행정(12 OCT, 1950)
한국에 대한 임시위원회는
1. 1950년 10월 7일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의 규정 하에 한국에 대한 임시위원회에서 동 결의문에 포함된 결의에 따라 유엔 통합군사령부와 협의, 조언하도록 요청할 것을 고려하며
2. Korea 의 주권국가에 통일,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유엔아래 총선거 실시를 포함한 모든 소요활동을 취할 것을 결정한 유엔 총회의 권고를 고려하며,
3.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에 의해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감시, 협의할 수 있었던 Korea 의 다른 부분에 대한 합법적이며 효과적인 지배권을 가졌다고 유엔에 의해 인정된 정부는 없음을 상기하며,
4. 적대행위가 발생했을 당시 대한민국정부의 효과적 통제아래 있다고 유엔에 의해 인정된 적이 없었으며, 또한 현재 유엔군대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그 Korea 지역의 정부와 민간행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유엔Korea통일부흥위원단이 이 지역의 행정을 고려하게 될 때까지는 통합군사령부가 임시로 책임질 것을 조언하며,
5. 주한 통합군사령부하의 몇 개 유엔회원국 군대의 장교와 통합군사령부가 본 결의에 의거하여 민간행정을 위해 설치된 모든 기관과 협력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하며,
6. 통합군사령부에 Korea위원단이 도착할 때까지 이 결의에 취해진 조치를 임시위원회에 계속 알릴 것을 요청한다.

위 임시위원회 결의는 점령통치에 대한 정치적 결의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했으나 군사적 목표에 대한 언급은 표현되지 않았고, 결국 이들 총회 결의의 용어상 모호함은 틀림없이 의도적이었다. 애치슨 1951년 6월 맥아더 청문회 기간 중 이 결의안의 배경이 된 과정과 의도를 발표했다. 그의 연설은 당시로부터 가장 가까운 설명이었다.

“맥아더의 임무는 남한에 잔류한 북한군의 일부를 포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과 같이 북한군을 추격하여 포위하는 것이었다. (…) 우리의 희망은 이 전쟁을 일으킨 그 군대를 포위하거나 항복을 받는 것이 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유엔 후원 하에 전국을 통일하도록 되어 있는 10월7일자 총회 결의를 수행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애치슨의 진술에는 10월 7일자 총회 결의에 유엔군의 북한 진격이 포함된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1년 전 그가 했던 진술과 상충되는 것으로 보였다. 예를 들면 그는 “38선 월경에 대한 어떠한 인위적 금지조차도 부과되어서는 안된다”며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하등의 정치적 효력이 없다”고 진술했었다.
그러나 일본과 독일에 대해서처럼 완전항복을 통해 실현할지,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통해 실현할지는 단언한 적이 없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당연히 북진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보는데 의심이 없었다. 그러나, 애치슨의 진술은 ‘포위와 항복’을 받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총회결의를 수행할 것이란 논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좀더 분명하게 밝혀진다. 애치슨은 그의 회고록에서 그 결의안의 의도에 대해 보다 명료하고 간결하게 설명을 했다.

“북한에는 유엔의 노력을 좌절시킬 어떤 적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군 단독으로 지형이 험한 북한지역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수립하려고 시도하더라도 소련이나 중공군이 개입하지 못할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믿었으며… 만일 한국군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다면 목(표)지역을 지나는 거점으로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설명은 주은래의 최후통첩처럼 유엔군이나 미군이 아닌 한국군만을 이북지역에 단독 북진시키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9월 29일 마샬 국방장관이 맥아더 장군에게 “원수 혼자만이 알아두라”면서 “귀관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데 있어 전술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아무런 제지도 받은 바 없다는 점을 양지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북진 허용 전문을 보냄으로써 북진은 미국의 전면적 동의하에 실제로 시행되게 되었다는 박명림의 견해가 북진 허용 여부에 대한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나, 맥아더 청문회 기간 중 자세히 설명된 마샬 국방장관 진술에 따르면 10월7일 결의안은 (어느 정도 간접적인 방법으로) 38선 북쪽으로의 군사작전을 인가하였으나, 그 작전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며, 통일은 ‘군사적 목표’로서 보다는 ‘정치적 목표’로서 천명하였다는 것이었다.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은 누가 결정하는가에 대해 미국 스스로 유엔이 결정한다고 표명했듯이, 마샬 국방장관이 9월 29일 맥아더에게 내린 훈령보다 10월 7일 유엔총회 결의가 더 우선함은 자명하다. 그리고 10월 7일 총회결의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두 수장의 진술은 유엔군 또는 미군의 북진 결의가 포함되지 않은 정치적 목표로서의 의미만 갖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군대는 이미 38선을 넘어선 뒤였고 미국정부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해임된 맥아더만큼 미국정부의 책임도 만만치는 않았던 것이다.
만일 리지웨이처럼 통합군사령관이 행정부의 결정과 지시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장교였다면 모든 일이 잘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치슨 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때 맥아더 장군은 10월 7일 결의 내용 중 양면성을 지닌 부분에 대하여 총회에서 그것을 제정한 대부분의 국가는 수용할 수 없다고 해석하였다.”
맥아더는 10월 7일 총회결의안을 그에게 한국 통일의 과업을 부여한 것으로 풀이하였다. 맥아더청문회에서 그는 “나의 임무는 북한 전역을 소탕하고, 통일하며, 자유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자신감과 사명감에 가득 찬 맥아더 장군의 이 발언은 분명’군사적 목표’가 아닌 ‘정치적 목표’였다.
무력공격에 대응하여 자위권을 행사하는 경우라고 하여도 이 권리를 아무런 제한도 없이 확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엔헌장 2조4항의 무력행사금지의 원칙은 무력행사의 개시시점에서만이 아니라 무력행사가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에 대해서도 타당하며 무력행사 중의 행위라도 필요의 원칙과 비례의 원칙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38선 이북과 한반도 전역을 군사적인 방법으로 통일하려한 것은 적법한 자위권의 행사범위를 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1) 미국군부가 주도한 북진

통합군사령부로부터 합참에 이르기까지 미군 지휘계통은 이미 6월 25일과 27일 유엔결의를 북진까지 포함한 것으로 해석하고 필요한 준비를 해왔다. 인천상륙작전 직후에는 합참은 맥아더와 제한된 범위에서 한국의 장래문제에 대해 토의했다. 7월 중순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장군이 맥아더를 방문했을 때 맥아더는 “나는 북한군을 격퇴하려는 것이 아니라 격멸하고자 한다”, “나는 북한 전역의 점령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작전후 문제는 한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8월 콜린스 장군이 셔먼 제독과 함께 다시 맥아더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분명히 장차 한국의 점령문제를 토의했으며 그 범위나 폭을 좁혀야 한다는데 합의하였다. 8월 중순 오스틴 유엔대사는 안보리 연설에서 한국 통일의 목표를 명확히 발표했다. 그러나, 각군 장관들은 장래에 대한 고위당국의 공식적 지침이 하달된 것은 없으며, 군사작전계획에 38선 북쪽 지역작전에 관계되는 지침이 결여되어 있어 장애를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지침은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의해 문제의 NSC81(각서 81호)로 작성되어 9월 1일 회람되었다. NSC81의 기안자는 6월과 7월의 안보리 결의가 38선 북쪽 지역에서의 군사작전을 실시할 법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NSC81에서는 ’38선 이북 지역에서의 작전을 위한 계획은 작성되어야 하지만 유엔과의 협의 후 오직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수행되어야 한다’, ‘통합군사령관은 인민군 붕괴시 북한을 점령할 목적으로 주요부대들이 38선 북쪽 지역으로 작전을 계속하기 전 새로운 지침을 요청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합참은 NSC81을 접수했을 때 전체를 아예 재작성해야 한다고 문제제기 했다. 왜냐하면 “전선을 38선에서 안정시키려는 구도” 때문에 “비현실적”이라는 것이었다. 9월 7일 NSC에서 합참은 NSC81에 대한 견해를 제시했고 그 수정안인 NSC81/1은 9월 11일 대통령에 의해 승인되었다. 애치슨의 소망대로 유엔군의 38선 돌파에 앞서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내용은 분명해졌고 북한에 대한 정치적 처리는 NSC81/1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NSC81과 NSC81/1에서 북의 정치문제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맥아더와 합참은 북한 통일문제 등에 대해 다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군사정세와 군 지휘자들에 따라 정책지침의 문구가 달리 해석되고 군사가 정치를 주도할 가능성과 민군갈등으로 발전하는 상황이 더 잦아지기 시작했다. 국무성은 합참의 보고를 접하고 맥아더가 이승만 정부를 재수립하려는 의도에 불안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국무성의 소관사항으로서 이미 외국 정부들과 토의 중에 있는 문제를 현지사령관이 손을 댄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참은 맥아더에게 그 계획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도록 요청했다.
맥아더는 즉각 정치적 문제로 위험을 무릅쓰게 될 어떤 욕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맥아더의 응답에도 불구하고 국무성 관리들은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맥아더 청문회에서 맥아더 자신에 의해 확인된 증언은 자신의 임무를 정치적 영역까지로 이해하고 있었다. 9월16일 존슨 국방장관은 합참으로 하여금 맥아더에게 NSC81/1의 준수를 위한 세부지침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합동전략조사위원회는 NSC81/1에 기초하여 지침을 작성하였으며 이는 9월25일 합참에 의해 잠정승인되어 국방장관에게 제출되었고 추가조항과 함께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후 9월27일 합참에 의해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이후에 북진여부로 논쟁이 된 이 9.27 작전지침의 중요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 지침은 한국에서 당신에 의해 취해질 장차의 군사작전에 관한 자세한 지시를 제공하기 위하여 발송한다. (…) 당신의 군사적 목표는 북한군의 격멸에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당신은 38선 북쪽에서 상륙 및 공중작전 또는 지상작전을 포함한 군사작전을 실시하도록 인가되었다. (…) 북한 지역을 점령하는 문제와 그 성격은 만일 그러한 상황이 일어난다면 그 때의 환경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며 극동군사령관은 38선 북쪽에서 군사작전에 관계되는 계획은 물론 점령계획을 승인받기 위하여 합참으로 제출한다. (…) 마지막 문장은 국무성의 요망대로 북한의 정치적 장래 문제에 관계하지 않도록 그에게 경각심을 고취하였다.

대통령의 승인까지 받은 이 지침은 38선 이북에 대한 군사작전을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침은 군사작전을 지시했지만 사실상의 정치적 결정이었다. “북한군 격멸”이라는 목표 설정은 이전까지 유엔군이 전쟁의 목표로 내세웠던 “침략의 격퇴”를 위해서는 침략군을 격멸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졌지만, 이것은 북진작전을 고려하면서 그와 같이 발전된 해석을 한 것이며 본래 ‘침략의 격퇴’가 의미했던 것은 침략 이전의 회복, 즉 38선 수복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전황의 추이에 의해 중공과 소련을 자극하지 않는 제한전원칙은 전쟁목표의 수정을 요구하는 흐름을 만들어갔다. 그 핵심에 맥아더 사령관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후에 맥아더는 유엔군이 즉각 북진작전을 수행하지 못한 것은 38선 때문이 아니고 보급문제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9.27 지침으로부터 10일 뒤에 채택된 10.7 유엔총회 결의는 9.27 지침처럼 북진문제에 대해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10.7 결의가 채택되자마자 10월 9일 전면적인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 8군이 서부에서 최종적인 북진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국군3사단은 이미 동해안 지역에서 10월 1일 38선을 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국군은 38선 돌파를 감행한 것이다.
또한 10월 2일 맥아더는 10군단에 북진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10월 2일 북진작전이 10월 9일까지 지연된 것은 맥아더의 증언처럼 38선에 대한 유엔결정 때문이 아니라 보급문제와 관련된 맥아더의 오판과 실책 때문이었다. 북진은 유엔의 결정에 의한다는 정책은 10월 7일 결의의 해석과 관계없이 이미 무시된 것이다.
한편 10월 2일 중국의 모택동은 당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전쟁 개입을 결정한다. 유엔군의 평양 점령시 이미 중공군도 압록강을 넘었다. 주은래의 최후통첩이 실행된 것이다. 승리에 도취된 맥아더의 과도한 진격을 미국정부에서는 불안하게 지켜보면서도 적극적으로 막지는 못했다. 중공군의 남진이 38선을 넘었다가 다시 38선 이북으로 후퇴하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미국은 전쟁의 목표에 대한 재해석을 하였다. 그 결과“공격을 중지하고, 침략을 종식시키며, 평화회복과 침략의 재발 방지”라는 애치슨의 견해로 바뀌어 가게 된 것이다.
이미 확전은 참전국들의 불안을 낳았고 50년 12월 4일 영미 정상은 회담을 갖고, 협상을 통한 종전에 합의했으며 동시에 아시아 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한 1951년 2월 1일 총회 결의를 채택시켰다. 이에 따라 1950년 11월 3일 채택된 애치슨의 ‘평화 단결 결의’에 의해 구성된 집단조치위원회의 임시위원회 즉 추가조치위원회(Additional measures committee)가 결성되었다. 소련 대표는 헌장 24조 (안보리의 1차 책임)와 11조 2항(안보리 회부)을 볼 때 총회는 북경 정부에 대해 집단적 조치의 적용을 권고할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소련은 아예 이 조치에 대한 논의에 참석치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미국 주도권에 소련의 거부권은 이번에도 좌절당했다. 변화의 가능성은 추가조치위원회와 같이 구성된 중재위원회(Good office committee)로부터 발생했다. 51년 2월 1일 총회 결의 6조, 7조에 규정된 중재위원회는 휴전 노력을 병행했다. 당시 총회 의장이었던 엔테잠(Entezam)이 결의 7조에 의해 중재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중재위 노력에 중공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미국은 추가조치위원회를 통한 대 중공 경제제재 조치를 시사했다. 51년 2월 16일 추가조치위원회가 열렸을 때 브라질 등 6개국은 미국의 입장을 추종했지만 영국 등 6개국은 중국에 대한 새로운 권고의 연기를 주장했다.
미국은 휴전협상이 결렬될 때마다 이미 설치된 집단조치위원회와 추가 조치위원회 등의 가동을 통해 대 중국제재를 위협했다. 그러나 제 3세계 국가들 특히 인도와 같은 나라들이 중간에서 다소 독립적으로 협상이 계속되도록 많은 역할을 했다. 이는 미국이 이제 안보리뿐만이 아니라 총회에서도 그 의사대로 협상과정을 좌우할 수 없음을 의미했으며, 유엔에서 점점 제3세계 국가들의 발언권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51년 2월 6일 합참은 국무부와 한국문제해결의 가능한 코스를 협의했다. 그러나 이 연석회의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합참은 국무부가 한국문제에 대한 ‘정치적 목표’를 세워야 거기에 맞춰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국무부는 군사상황의 전개를 좀 더 두고 본 뒤에야 ‘정치적 목표’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민우위라는 전통에 따라 국무부가 우선 정치적 목표 설정에 나서고 목표가 설정될 때까지 기존의 군사정책 즉 공격적 방어를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국무부는 즉시 한국 참전 국가들에게 5개 코스를 중심으로 협의했다. 이에 대부분은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에 반대할 뿐 아니라,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일 미군이 단독으로 북진하는 경우 한국전쟁에서 철수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에 애치슨은 결국 전쟁 전 원상회복(Status quo ante bellum)이라는 선에서 한국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방침을 굳히고 51년 2월 23일 마샬 국방장관에게 유엔군의 진격이 38선에서 정지하도록 새로운 명령을 내릴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도록 요청했다.
51년 2월 23일 애치슨 장관은 대통령을 위해 작성한 38선 문제의 토의에 관한 각서 초안에서 50년 10월 7일 유엔총회결의의 모호했던 부분을 명확히 했다. 즉 한국에서 유엔의 정치적 목표는 ‘통일, 독립, 민주대한민국을 수립하는 것’임을 재확인하였지만 군사목표는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그 지역의 안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여 힘에 의한 통일을 분명하게 반대하였으며, 한국의 작전을 지원하고 있는 대부분의 유엔회원국은 전쟁목표(최종적인 정치목표와는 별개의 것)로서의 통일을 반대할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마샬은 애치슨의 요청안을 합참과 육해공군 장관에게 회부했다. 합참은 애치슨 안에 반대했다. 합참, 맥아더, 리지웨이는 모두 유엔군의 북진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공산군의 재침준비기간에 이용될 뿐이라고 강력 주장했다. 이들 군부의 견해는 50년 10월 7일 총회 결의가 북진을 결정한 것이고 유엔의 정치적 목표가 바뀌지 않는 한 정치적 이유로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이 금지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엔과 미국정부는 이와 정반대의 해석으로 결론을 내렸다.
애치슨 각서 초안은 합참의 반대가 반영되어 대통령에게 보내지진 않았다. 그러나 국무성은 몇 가지 수정을 거쳐 2개월 후 최종안인 NSC48/5를 작성하였다. 애치슨이 지칭한 것처럼 합참과 국무성이 도달한‘아주 간단하고 분명한 결론’은 “무력에 의한 한국통일에 관해 어떤 시도가 있어서는 안된다. 군사와 정치목표는 구분되어야 한다. 38선을 넘는데 적용될 전구사령관의 권리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인정한다. 맥아더가 주장한 예상되는 확전-중국본토작전-은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평화협상의 시작을 희망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통합군사령부가 휴전을 기꺼이 고려하고 있다는 공개적 성명을 발표하기로 결심했다. 국무성이 성명초안을 작성하고 51년 3월 19일 합참과 국무장관, 국방장관이 토의하고 타국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해 회람되었다. 맥아더에게도 곧 성명이 있을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1951년 3월 24일 맥아더는 아무런 통고도 없이 이에 관한 자신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미국정부의 계획에 커다란 손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발표는 결국 맥아더를 해임시켜야 한다고 트루먼 대통령으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한 사건이 되었다. 4월 11일 맥아더의 전격적인 해임과 더불어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이 유엔통합군사령관에 부임함에 따라 미국정부는 전쟁을 제한하려는 뜻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지휘관을 얻게 되었다. 51년 4월 22일 50년 9.27 작전 지침의 모호함과 그간의 혼란을 극복한 보다 완전한 지시가 8군 벤플리트 장군에게 하달되었다. 8군에게 부여된 임무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점령하고 있는 대한민국 영토에 대한 침략을 격퇴하는 것이다.” “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8군은 38선 북쪽에서 군사작전(지상작전은 물론 상륙 및 공수작전을 포함하여)을 실시하도록 인가된다.”

4월 5일자 극동군 사령관의 메시지에 포함된 작전개념에 의하면 38선 북쪽에서 인가된 군사작전은 “총진격”이 아니며 제한적 전술작전(게릴라 작전, 상륙및 공정작전 포함)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하기 힘들었던 전쟁의 신화이자 영웅이었던 맥아더에 이끌려, 불안해하면서도 단호하게 제지하지 못하고 북진문제에 대해 모호성의 정책을 유지해온 미국정부는 맥아더의 해임을 기점으로 완전하고 명백한 입장의 전환을 확인했다. 이는 그때까지의 미국정부의 오류에 대한 뼈아픈 시인이기도 했다. 이로써 50년의 NSC81/1 각서와 9.27 작전지침, 10월 7일 총회결의가 38선 이북으로의 총진격에 대한 어떠한 지시도 담고 있지 않았음을 최종 확인시켰다. 미국정부내의 노선정리는 유엔에서 재확인됨으로써 그 국제법적 근거가 다시 수립되었다.
1951년 6월 1일 유엔 사무총장 리는 공산군이 38선 이북으로‘격퇴(repel)’된 이상 그 부근에서 휴전이 서명되어 평화와 안정이 회복된다면 유엔의 목표는 달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애치슨도 미 상원에서 코리아의 통일이‘전쟁의 목표’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다음날 38선 부근에서의 휴전은‘코리아에서의 군사적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재확인했다. 며칠 뒤 유엔 사무총장 리는‘코리아에 있어서 휴전성취에 관한 구상’을 유엔 회원국에게 배부했다. 여기서 그는 쌍방의 전선 사령관들이 정치적 쟁점을 제외하고 휴전 문제에 국한시켜 협상할 것을 제의했다.

2) 끝나지 않은 문제 – 북진결의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의가 본격화된 2006년 7월, 9월 버웰 벨 유엔사령관은 전시작통권 반환에 앞서 작통권 반환 뒤 한국정부의 전쟁목표와 전쟁의 최종상태에 대한 한국정부의 답변을 요구했다. 미국은 한국정부의 전쟁목표를 묻기 전에 1950년과 51년에 걸쳐 진행된 유엔사의 북진권한의 종말에 대해 확인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51년 6월 27일 안보리 결의로부터 10월 7일 총회결의의 정치적 목표와 전쟁목표의 모호성으로부터 초래된 혼란을 극복하고 ‘침략에 대한 격퇴’가 유엔사에게 역사가 확인한 명확한 전쟁목표였다는 점은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국제법적 근거로서 특별히 부정된 바가 없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전협정의 기본전제 역시 ‘침략에 대한 격퇴’를 넘어선 전쟁목표를 부정한 토대위에 세워진 것임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027-98작전계획 이전까지는 대체로 위와 같은 전제를 법적으로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작계의 주체가 미8군사에서 유엔사/ 연합사로 바뀌고 98년 이후의 북 점령계획까지 상정한 5027, 5029 등의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이같은 변화는 유엔 결의의 역사적 근거로부터 벗어나 맥아더식 오류를 반복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볼 일이다. 유엔사의 북진임무는 합법적으로 부여된 적이 있었는지 역사 앞에서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4. 정전협정 문제

1) 비무장지대 문제

전시작전통제권(작통권) 환수와 관련된 벨 사령관의‘유엔사 강화론’의 제기 배경중의 하나가 비무장지대 문제였다. 연합사가 해체될 경우 비무장지대를 지키고 있는 한국군에 대한 즉시적인 접근 권한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유엔사의 존재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란 점에서 비무장지대의 법적 성격에 대한 검토는 중요한 것이다. 군사분계선은 군사‘점령’경계선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유엔 안보리 결의는 ‘공산침략 격퇴’까지가 목표였지만 1950년 10월 유엔 총회 결의는 ‘북측 지역 점령’이 목표로 조정되었고 유엔사는 북 점령지역에 대한 점령정책을 실시했다. 중국군의 참전과 38선 부근에서 끝없이 뺏고 빼앗기는 고지점령 전투의 결과로서 현재의 군사분계선이 합의되었다. 38선과 군사분계선의 가장 큰 차이는 주권정부의 존재 여부였다. 미ㆍ소는 38선을 경계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마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점령정책을 실시했으며 그 실행수단은 군정(military government)이었다.
점령은 어떤 국제법적 근거도 없었고 더구나 주권의 이양 등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38선은 ‘점령경계선’이 되었고 미군정은 3년간 주권보유자로서, 점령군으로서, 자치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미군정의 법률전문가 어니스트 프랑켈(Ernst Frankel)은 1948년 초 미군정이 주권정부, 군사점령자(군정), 자치정부의 3중 정부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주장했다.
2차대전의 목적이 식민지 정복이나 영토 합병이 아니었으므로 미국이 일시적 군정을 실시한다 해도 주권을 무시하고 주권을 임의로 양도할 수는 없었다. 군사점령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불법선이었던 것이다.
한편 정전협정에 의한 군사분계선은 남과 북에 정부가 존재하는 상태였기에 해방 직후의 38선과는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전쟁 목표가‘점령’으로 전환된 상태에서의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군사점령경계선’으로서의 성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남측의 경우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유엔 총회가 인정한 영토는 38선 이남지역이었다. 1950년 10월 유엔 총회 결의에 의해, 점령에 의한 38선 이북과 군사분계선 사이의 지역인 고성, 인제 등의 법적 성격에 문제가 생겼다. 1950년 10월 유엔군에 의한 북한지역 점령당시 미국과 한국 사이에 38선 북측지역이 점령지구냐, 수복지구냐 하는 논쟁과 충돌이 있었지만 정작 38선 이남지역을 유엔군이 점령지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주의와 관심이 돌려지지 않았다. 1954년 38선 이북과 비무장지대 사이에 위치한 지역에 대한 유엔사의 한국정부로의 행정통제권이양시 유엔사령관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보자.

공산지배로부터 자유로와진 이 지역의 시민대중에게 한국의 관리아래(under the administration of the ROK) 민간정부의 혜택을 누리도록하기 위하여… 유엔사는 지금 유엔사의 군사점령아래(under military occupation by the UNC) 있는 38선 북쪽지역을 한국의 행정통제(administrative control)아래로 이양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

위 서한에서 유엔사령관은 이 지역이 유엔사의 군사점령지 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전쟁이 멈춘지 1년이 지난 뒤에도 점령지에서의 미군정, 유엔사군정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전협정에 의하면 군사분계선 이남의 전 지역은 유엔사령관의 군사통제아래 있다
또한 남측비무장지대는 정전협정에 의해 유엔사령관 관할지역으로 대한민국 주권정부의 주권행사가 제약받는 지역이다. 비무장지대 북측 지역은 주권정부와 군사통제권자가 동일함으로 문제시 되지 않는 것이 비무장지대 남측에선 문제가 되는 것이다.

(1) 비무장지대의‘점령’적 성격

정전협정에 의하면 유엔사령관은 군사분계선 남측 비무장지대에 대한 민사업무(civil affairs)와 민정(Civil Government)에 대한 권한을 지닌다. 민사업무와 민정은 같은 일에 대한 다른 개념 구분으로 업무의 성격에 따라 민사업무와 군사업무(military affairs), 민사행정(Civil Administration)으로 나눈다면 통치주체에 따라서는 민정과 군정으로 나눈다.
군정과 민사업무의 범위는 그 경계가 애매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민사업무가 추구하는 목표는 군정을 통해 통제된다는 점이다. 북 점령시 군정은 유엔사가 담당하고, 민정 혹은 민사업무는 한국정부가 맡는 것으로 한미간에 합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민정은 군정을 통해 통제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1950년 10월 유엔 총회 결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한편, 1943년 12월 22일 간행된‘미 육해군 야전교범 27-3(FM27-3)’은 민정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민정은)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것이며, 국가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며, 국제법 아래에서 점령군의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다.”“위의 세 가지 목적 가운데 첫 번째 고려해야 할 점은 성공적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군사적 필요는 군정의 운영보다 기본적으로 우선하는 원칙이다.’

야전교범 27-3에서 주목되는 문장은 점령군으로서의 의무 완수가 민정의 목적이라는 점이다. 이 교범에 따른다면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 대한 유엔사의 민정권은‘점령’의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남측 비무장지대 내 유일한 민간인 마을인‘대성동’의 경우 한국군이 민사업무를 대행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권한은 유엔사에 있다. 비무장지대의 민간인 출입과 관련한 민사업무 역시 마찬가지이며 민정, 민사업무, 민정경찰 등의 개념은 군정의 하부개념이며 군정은 점령정책의 기본수단이다.
1943년 12월 22일판‘미 육해군 합동교범(FM27-5)’인 「군정과 민사업무」에 의하면, 민정조직의 두 가지 일반적인 유형을 ‘작전형(operational)’과 ‘지역형(territorial)’으로 분류했다. 이를 기준으로 할 때, 대성동은 지역형으로, 나머지 남측 비무장지대는 작전형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로 해방 후 인천에 첫발을 내디딘 미군은 향후 몇 달 동안 충분한 전면 경계를 해야 한다는 예상에 따라 군정부대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전투부대들이 군정업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남한 점령 초기에는 ‘전투형 점령(the combat of occupation)’ 방식을 적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24군단이 진주하고 나서야 지역형 점령으로 전환했다.
2000년 11월17일 유엔사와 인민군 간에 합의된 ‘비무장지대내 경의선,동해선지구 남북관리구역’에서 정전협정상의 ‘관리권’이 한국군에게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 유엔사가 ‘관할권(Jurisdiction)’을 주장하며 경의선, 동해선 지구의 남북 출입에 개입하고 있는 것도 민사업무의 일환이지만 ‘점령+군정’ 체제를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
위 야전교범들을 기준으로 본다면 민정은 군정을 전제로, 군정은 점령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해방 후 군정기의 전면적 점령정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분적이고 협소한 것이지만 그 본질만은 그대로 잔존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또한 민정이 군사작전 지원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원칙과 유엔사/연합사 작전계획, 개념계획들의 현실적 존재를 연관시켜 본다면 남측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군사분계선 이남 전지역에 대한 유엔사의 점령적 성격규정은 작통권 환수과정과 정전체제 해체과정을 준비하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2) 법을 압도하는 군사체제

역사를 거슬러 군사분계선의 원형인 38선 체제를 먼저 회고해보자. 38선의 법적 효력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종료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ㆍ소의 분할 점령과, 점령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군정의 의도에 의해 38선은 법적 근거와 무관하게 양측의 점령 경계선이 되었다. 점령정책과 군정체제가 법률을 압도했던 것이다. 당시 38선에 대한 자유왕래 문제와 관련하여 15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은 다음과 규정하였다.

“모든 사람은 특정 허가와 세부적 규제를 받는다”

특정 허가와 세부 규제를 받는 것이 어떻게 자유왕래일 수 있는가. 이는 식민지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며 38선이 불법이듯, 민족의 자유왕래에 대한 어떤 허가나 규제도 불법이었다. 그러나 1946년 여름 전국으로 퍼진 콜레라를 이유로 미군정은 아예 통행을 봉쇄했다. 그리고 콜레라가 자취를 감춘 뒤에도 봉쇄는 풀리지 않았다. 봉쇄는 명백한 전쟁행위가 되나 최근의 개념계획 5029에서 이같은 봉쇄개념이 다시 부활했다. 1947년 미군정은 38선 이북과의 교역을 국내 상업으로 인정한다고 했다. 겉으로 남북의 자유왕래와 교역을 막을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정명령 127호는 북에 대한 미곡수출금지령을 포함하고 있어 북을 적대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다시한번 우리는 점령정책과 군정체제가 법을 압도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사회관계의 구조적 변화가 법적 관계를 통해 규정되지 않고 정치군사적 힘의 관계를 통해 규정된다는 것은 해방 후 지금까지도 본질적으로 변치 않는 진실이다.
불법적 38선 체제는 정전체제로 합법화되었지만 정전협정에는 점령과 군정의 기억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38선 체제의‘자유왕래’는 정전체제에서 허가권자와 규제사항이 구체적으로 합법화되었으나 1968년에 이르러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전체에 인공의 철책선을 설치함으로써 유엔사령관의 비무장지대 출입 허가권은 출입금지, 통행금지권으로 현실화되었다.
법으로서의 정전협정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점령+군정’의 잔존체제에 의해 38선 체제와 같이 쉽게 불법화되었다. 이는 북측 지역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나 남측 지역은 주권정부와 군사통제권자의 불일치로 인해 더 심하게 표출되었을 뿐이다.
법적 관계의 변화로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이행은 중요한 계기임에 분명하나 ‘점령+군정’체제로서의 정전체제의 변화 없이는 불행한 역사의 기억이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정전협정 폐기와 함께 자동으로 유엔사가 해체되고 정전체제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히 소극적인 생각으로 보인다. 정전체제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소함으로써 법적 관계의 변화가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변화가 되도록 주도할 필요가 있다. 연합사 해체 과정이 곧 유엔사 해체가 되지는 않지만 작통권 환수 과정에서 유엔사 강화론을 차단하며 비무장지대에 잔존하는‘점령+군정’체제의 잔재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관철될 때, 작통권 환수와 2.13합의에 따른 평화체제 마련의 불연속성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2) 한강하구 문제

정전협정 1조 5항에서 정전협정문안으로서는 최초로‘통제’란 단어가 등장한다.‘통제’의 의미는 정전협정서문에‘조건과 규정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 이라고 밝힌 점이나, 5항의 다음 문장에서 ‘군사통제(military control)’ 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군사통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군사통제’란 국가의 주권이나 관할권을 관철시키기 위해 특정대상에게 군사적 수단을 통한 관리와 억제를 행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Control’은 통제의 의미와 더불어 관리,관할,지배란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정전협정문서에는 단 한군데서도‘관할(Jurisdic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오로지 ‘군사통제(Military Control)’라는 단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군사통제에 대한 영어사전의 정의 중에는‘외세의 군대에 의한 한나라의 통제, 즉 점령.’이란 내용이 있다. 단어의 의미만으로 본다면 군사통제하에 있다는 말은 점령상태에 있다는 의미로도 읽혀진다. 군사통제를 관할권으로 볼 것인가? 관리권으로 볼 것인가?
첫째, ‘군사통제’를 ‘관할‘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같은 해석은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1992년 8월에 있었던 남북군사분과위원회회의에서 ’남북기본합의서‘의 제2장 남북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를 작성하기 위해 논의 하는 과정에서 불가침경계선 및 구역의 준수’의 안건을 취급할 때 지상불가침경계선에 대해 남측은 “남과 북의 지상불가침경계선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협정 제1조 2항에 규정된 군사분계선으로 한다”라는 초안을 제시하고 북측은 “지상불가침경계선과 구역은 현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라고 제시해서 별다른 이견없이 합의했다. 여기에서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이란 ‘상대방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코리아의 구역을 말한다고 유엔사특별고문을 지낸 이문항씨는 해석한다. 또한 그는 말하길, “정전협정 14,15,16항은 상대방의 영토, 영해, 영공을 존중하고 침입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휴전협상 중에 유엔사측이 Korea를 북이 주장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호칭할 것을 거부하고, 북측이 Korea를 대한민국으로 호칭하는 것을 거부해서 장기간 논의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남한과 북한을 상대방의‘군사통제(관할)하에 있는 지역’으로 표현하기로 타협을 본 것이다.”라고 했다.
군사통제는 군사적점령을 전제한다. 1945년 해방시 미,소점령 직후 미소군정이 실시된 것과 비교한다면 정전이후는 군정없는 정전상태란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미군의 점령에 대한 야전교범에 따른다면 지역적 점령이 아닌 작전적 점령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작전적 점령은 전투에 의한 일시적 점령상태를 말한다면 지역적 점령은 전술적으로 치안유지등이 확보된 상태에서 행정기능까지 수행하는 점령상태를 말한다.
1975년 유엔총회에서의 유엔사해체결의와 1978년 연합사창설과 유엔사작전통제권의 연합사로의 위임등과 더불어 작전적 점령의 강도가 현저히 약화되었지만 정전협정에 의한 남한지역의 유엔사에 의한 점령상태는 본질에 있어서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어쨌든 북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정전협정에선 사용되지 않은‘관할’이란 단어를‘군사통제’를 대신하여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관할’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국제해양법에서도 ‘주권적권리’,‘배타적권리’,‘관할권’등의 표현이 한 대상에 대해 조항마다 달리 사용되고 있는데 이들 용어간의 차이가 명백하진 않다. 북의 ‘국제법사전’에는 영토,영해,영공등 영역에 대한 ‘관할권’은 이들 영역에 대한 법적제도를 제정하고 그를 위반하는 온갖 행위들에 대해 엄격히 처벌할 수 있는 권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전에는 관할을‘권한을 가지고 지배함, 또는 그 권한이 미치는 범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권한은 권리와 유사하지만, 권리가 자신을 위하여 가지는 법률상의 이익인 점에 대하여 권한은 타인을 위하여 법률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일정한 지위 또는 자격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권한의 범위는 당사자의 의사로써 정하여지기도 하지만 법률관계의 명확성과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 범위를 법률로써 정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관할을 법적제도의 문제로 보는 것은 북과 마찬가지이다. 정전협정은 영문, 한국문, 중문으로 작성된 협정문본이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고 합의했으므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할 때, 합의처리 할 수 밖에 없고, 합의처리 하도록 하였을 때 합의가 어려운 조건에서 심판관이 필요하나 정전협정자체는 그런 구조를 결여하고 있다. 정전협정의 관리와 운영은 이같은 한계앞에서 번번이 좌절해야 했다.
한편 개인의 권한과 달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기관의 권한을 보통 관할이라고 하며, 관계 법률에 의하여 그 사항적事項的, 지역적地域的, 대인적對人的, 형식적形式的 한계가 엄격하게 정해진다. 권한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행위만이 적법하게 그 효력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권리, 의무가 타인에게 귀속될 수 있게 된다. 법률적관할권은 국가정책과 관리계획의 기반이 된다. 한편 관할권의 성격과 내용이 중요하다.
군사분계선통과나 비무장지대출입허가는 쌍방으로 구성된 군사정전위원회에 그 권한이 있으나 군정위에서 협의하거나 집행하기 위해선 우선 각 총사령관의 승인을 얻은 뒤에나 가능하므로, 결국 비무장지대 출입과 군사분계선 통과에 대한 1차 허가권은 총사령관이 행사하는 셈이다. 이는 정전협정 17조에서‘정전협정의 집행책임자’로서 사령관을 규정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교전쌍방의 총사령관에 의한 비무장지대 관할권은 이 지역으로의 출입권에 대한 것으로 정전유지와 충돌방지를 위해서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평화교류와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부정적일 수 있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결국 분단을 고착화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허가나 사전승인제도는 관할권의 가장 배타적인 통제에 해당된다.
관할권의 성격과 내용에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기준은 배타성이다. 배타성의 적용정도에 따라 통제의 범위나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해양에서의 통항제도와 관련하여 비교한다면, 허가승인제도는 사전통고제도(Prior-notice of passage)보다 훨씬 강력하고 배타적이며, 사전통고제는 통과통항제도(Transit Passage)나 무해통항(Innocent Passage)제도보다 배타성이 강하다.
이는 관할권이라기보다는 거의 영토주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영토주권은 영토 안의 모든 사람과 물건에 대한 지배권으로 북의 국제법사전에서는 영토주권을 자기 영토를 완전히 지배하고 관할할 권리로 정의하고 있다. 즉 지배권과 관할권의 결합인 것이다.
즉 쌍방사령관은 비무장지대라는 영역에 대해 출입자체를 배제하는 배타적 관할권을 통해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북의 경우는 총사령관과 주권정부가 일치하지만 남의 경우는 유엔사령관이 한국주권정부의 지휘와는 별개로, 미국정부의 지휘를 받으므로 한국정부의 국가관할권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런이유로 유엔사령관의 배타적관리권 행사는 한국정부의 영토주권, 영토관할권과 충돌할 수 있고, 실제로 수차례 위기를 넘기며 충돌해 왔다. 비무장지대가 교전양국의 배타적 주권의 행사를 포기하고 양보하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남측의 경우는 주권자와 군사통제권자가 일치하지 않으므로서 조차지보다 더 심각한 통치권의 침해를 초래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영토의 일부를 빌려준 나라와 빌려 받은 나라사이에는 두 나라간의 일정한 합의가 전제되어 있지만 비무장지대 남측구역은 한국정부와 유엔사 사이에 어떤 합의도 없이 정전협정에 의해 유엔사의 일방적이고 배타적인 관할권이 행사되고 있다. 합의된 조차기간에 의해서가 아닌 언제 끝날지 모를 정전협정의 종료시점에 의해서만 유엔사의 관할권이 포기되고, 그 시점에서야 비무장지대의 영토문제에 대한 새로운 협상을 통해서만이 관할권이양이나 위임이 가능해진다. 한국정부와 유엔사 쌍방이 아닌, 유엔사 일방에 의해 이 지역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은 점령지와 유사한 것이다.
유엔사의 군사점령은 한국의 주권찬탈을 의미하진 않지만 통치권에 대해서는 일정한 훼손과 침해를 동반하지 않을 순 없다. 미군정이 점령군이면서 주권정부, 자치정부의 3중기능을 행사했던 것과 다른 점은 정전이후는 이미 대한민국정부수립으로 주권과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자 유엔사는 점령군으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배타적권한을 가지는 주권정부의 수립과 통치차원에서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주권과 관할권의 주체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주권과 통치권의 불일치가 유엔사와 한국정부 사이에선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주권정부와 유엔사의 관계는 전쟁기간동안 두 번의 계기를 통해 이같은 역전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야 말았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과 1953년 휴전반대, 반공포로석방으로 격화된 미국의 이승만에 대한 불안감이 이승만제거계획인 에버레디계획(Plan Ever ready)으로 작성되었고, 상황에 따라 이승만을 제거하고 군사정부까지 수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지역이 유엔사령관의 관할과 군사통제하에 있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실제에 있어서는 남측 주권정부의 국가관할권이 일개 군사령관의 관할과 통제의 하위개념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일은 정전이후 4.19, 5.16에서도 다시한번 확인되었다. 관할권에 대한 초월적이고 배타적인 주장과 해석은 일반적인 관례에서 벗어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관할권의 가장 예민한 충돌사례를 통해 정립된 국제해양법의 경우를 보면 ‘일반적으로 관할권 주장은 전시나 비상시에 자국의 영해를 통과하는 외국선박의 무해통항을 규제하기 위한 예방조치로서 설정된 것들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캐나다를 제외하고 미국과 미주21개국은 파나마선언(Declaration of Panama)을 채택하던 1939년 300마일의 방위수역을 주장했다. 그 이래로 300마일 방위수역은 1947년 9월 2일 리우에서 서명된 미주상호원조조약(Inter-American Treaty of Reciprocal Assistance)으로 항구화되었으며 동시에 북극과 남극에 이르는 타원형 울타리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어떠한 미주국가에 대한 무력공격이 있을 경우 단지 효과적인 상호원조를 제공할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고 함으로서 방위수역이 전시에만 적용되는 개념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1952년 9월27일 도쿄의 유엔사령부에서 한국주변에 선포했다가 정전과 함께 폐기한 ‘클라크라인’은 대략 100마일정도의 폭으로 확정된 것으로서 ‘한국의 연안을 보호하고,…적의 간첩과 밀수입자들의 한국연안에의 접근을 막기위해 고안된 분명한 전시조치’였던 것이다. 북과 중국을 제외하면 해상방어관할권에 대한 지금까지의 제 선언은 평화시에 필요한 보호행동을 취할 목적으로 채택된 방책이다. 정전협정 서문에는‘쌍방사령관이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의 통제’를 받기로 합의하였음을 명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군사관할권에 속하는 작전권, 교전권, 점령권, 군정권등이 제외된 것이며, 정전유지를 위한 질서와 치안유지등의 제한적 내용과 목적을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전시, 위기시를 전제한 배타적 관할권인 허가권, 승인권의 행사는 정전협정 서문에서 천명한 정신과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군사통제를 관할권이 아닌 관리권(Administration)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군사정전협정의 성격을 국제적 국경과 국제항로의 통행권등과 관련된 영토협정으로 보거나 완충지대를 사이에 두고 서로 관할영역을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의 정전협상은 협상개시 전 소련이나 미국 모두 영토나 정치문제를 제외한 순수한 군사적 사안만을 협의하기로 했고, 그것은 정전협정 서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협정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인 성질에 속하는 것’으로 천명되었다. 따라서 정전협정이 영토협정이란 주장은 한반도의 정전협정에 적용하기는 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통제가 국가의 입법, 사법, 행정관할권중 행정의 군사분야에 위임된 집행권한이며 그나마 일부권한인 점을 고려한다면 ‘통제’란 법적관할권의 범주이기 보다는 관리(Administration) 또는 관리권의 범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그렇지 않다면 유엔사령관은 미군정기 일제총독과 같은 무제한의 입법권을 행사했던 군정장관과 다른 점이 없게 된다. 1951년 11월 27일 정전회담에서 유엔군측이 제시한 원칙중 마지막항에 의하면 ‘군사지휘관은 비무장지대중 자신들의 부분을 휴전협정 조항에 맞게 ‘관리’한다’고 하였다.
점령지에서의 군사관할권행사는 군사정부의 법원을 통해 시행된다.. 유엔사가 이 지역을 점령했다 해도 군사정부가 수립되고 군사정부법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군사통제’는 최소한 유엔군측의 입장에서는‘관리’의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한강하구에 대해서는 육지의 비무장지대에서와 같은 허가권이 아예 포기되었다. 한강하구 자유항행건은 정전협정과정에서 미국이 한국민에게 선물을 준 것처럼 생색을 내려했을 정도였다. 1952년 2월 리지웨이사령관은 정전협상 반대여론을 의식하여 한강하구는 양측의 선박운항에 개방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음을 공표했다.
정전협정의 규정이나 규정을 실행하기 위한 규칙 어디에도 한강하구 민간선박 항행에 대한 허가권언급이 없음에도 유엔사나 인민군이 군사관할권을 주장할 수 있을 경우는 정전협정이 파기되고, 전쟁으로 돌입하여 ‘적대행위와 무장행동’에 대응한 작전, 교전, 점령, 군정등 모든 군사관할권이 부활될 때이다. 거꾸로 말하면 한강하구에 대한 배타적 관할권 행사인 유엔사의 허가권 주장 운운은 전시군사통제상태로의 복귀와 ‘점령+군정체체’의 부활이라는 오해와 논쟁의 소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유엔사가 이런 오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2000년 11월 17일과 2002년 9월12일 합의된 ‘남북관리구역에 대한 인민군과 유엔사간 합의서’에 나온 관리권이 실제로 유엔사가 행사해온 권한이며, 이는 합의서와 함께 한국군에게로 환수된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5. 작전통제권 문제
1) 유엔사 작통권
북측 지역이 현재 인민군의 군사통제하에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남측이 현재에도 유엔사의 군사통제하에 있는가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유엔사는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면서 작전통제권을 모두 위임(Reference)했다. ‘위임(Reference)’은 ‘이양(transfer)’과 다르다.‘권한의 위임’은 권한 귀속주체의 변경을 초래하나 이를 취소할 수 있는 지휘·감독권을 주체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반면에 ‘권한의 이양’은 권한 자체가 확정적으로 이전되는 것으로 이양주체의 지휘·감독관계까지도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엔사에서 연합사로의 작전권의 이동에 대해 ‘위임’과 ‘이양’을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1950년 이승만대통령은 맥아더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이양’했고, 1978년 유엔사는 한미연합사에 ‘작전통제권’을 ‘위임’했다.
이어 1994년에는 정전시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위임했다. 정전시작통권위임으로 정전협정체제하에서 한국군이 남측지역을 ‘군사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국군은 비무장지대및 한강하구에 대해서 인원, 장비, 선박의 출입통제등 정전업무에 관련된 부대활동의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4년 래피드썬더 연습 당시 럭 사령관의 이의제기로 정전시위기관리권이 이 위임에서 제외됨으로서 정전시작전통제권환수는 왜곡되고 말았다. 또한 정전협정 17조에 명시된 사령관의 집행책임도 한국군은 행사할 수 없었다. 이것은 전시작통권 환수가 논의 되는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석연치 않다.1980년 광주항쟁 당시 특전사가 연합사에 ‘위임’된 작통권을 일방적으로 해제하고 이동한 것으로 미국이 설명하는 논거가 바로 ‘위임’이다. 만일 작통권이 연합사에 이양된 것이라면 한미연합사는 정전협정의 서명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정전협정의 일방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 된다. 78년 한미연합사창설 공문은 유엔사의 작통권을 한미연합사에 ‘위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유엔사가 연합사의 작통권 행사를 취소시킬 수 있는 지휘, 감독권을 가지고 있다. 결국 유엔사의 작통권은 언제든지 큰 장애 없이 복원될 수 있는 것이다. 정전협정 5조 61항은‘본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 및 증보는 반드시 적대쌍방 사령관들의 상호협의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미연합사에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을 위임한 것은 정전협정의 상대방인 인민군이나 중공군과 전혀 합의 없이 이루어진 일이다. 78년 연합사는 남측지역의 작전통제권을 위임 받았으므로 법적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실질적으로는 남측지역을 통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언제든 유엔사에 의해 취소될 수 있으므로 명목상,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유엔사에 있는 셈이다. 궁극적으로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은 소멸되지 않았다. 그리고 1950년 6월 유엔안보리 결의에 의한 ‘개전권’과 10월 유엔총회 결의에 의한 ‘북측지역의 점령통치권’은 남측정부나 미국정부와는 무관한 권한이므로 여전히 존속된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주일미군 후방기지사용권과 자위대동원권도 한국군과는 무관하며 위임 불가능한 권한이다.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서도 유엔사령관 자격으로는 미군은 물론 남측지역과 일본에 대해서도 군사통제하에 둘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또한 연합사해체와 더불어 유엔사는 작전통제할 부대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은 사령부처럼 보이지만 한국군과 관계없이 군사분계선 남측 비무장지대를 군사통제하는 주체의 지위도 유지되고 있다.

2) 작통권 환수와 유엔사 ‘위기관리권’

2006년 벨 사령관은 작통권 환수에 대비한 유엔사강화론을 펼치면서 한국군에 대한 ‘위기관리권’을 주장했다. 위기에서 전쟁으로의 이행에 지휘의 통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국군에 대한 접근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벨 사령관은 유엔사겸 연합사겸 주한미군사령관이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직책이 있다. ‘위기조치관리관’이다. 유엔사ㆍ연합사령관이 겸직하고 있는 위기조치관리관이란 직책은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은 무척 낯선 직책이다. 이는 1994년 래피드썬더 연습당시 게리 럭 연합사령관 본인에 의해 확인됨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위기절차를 다룬 미국 합참문서에도 지역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이 위기발생시 교전수칙에 의한 즉각 대응조치를 취하고, 워싱턴 국가군사지휘본부에 상황에 대한 평가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 평가는 위기절차 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초기의 전문적 평가이기 때문에 총사령관의 임무가 막중하다는 점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유엔사ㆍ연합사령관이 위기관리관이란 직책까지 겸직하고 있음이 알려짐으로서 위기조치절차관리에 대한 사령관의 역할은 고유한 것임이 거듭 확인된 셈이다. 럭 사령관은 정전시(평시) 작전통제권 환수 준비과정에서 자신이 위기조치관리관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연합위임권한(CODA:Combined Delegation Authority) 목록에 정전위기관리권을 추가시키도록 지시했다.
1994년 정전시작통권 환수의 연합위임권에 대한 실무작업을 해왔던 미군과 한국군의 작전담당 참모들도 위기관리권은 전혀 예상치 못한 개념이었던 듯하다. 연합사령관이 직접 나서서 한국 합참의장에게 공문을 보내고, 실무진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연합사령관의 지시를 반영하기로 합의하였고, 결국 정전시작통권 환수 서명 직전에 정전위기관리권이 연합사령관의 연합위임권한의 첫 번째 항목으로 추가되었다.
1995년 위기관리에 대한 시행세칙이 합의됐지만 현재와 같은 한미연합위기관리체계가 구체화 된 것은 1998년, 작전계획5027-98과 개념계획5029를 만든 존 틸럴리 사령관 당시이다. 이때 개념계획5029가 북의 붕괴를 가정한 위기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위기관리체계가 새롭게 보강된 배경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한국군도 1998년판 국방백서에서야 비로소 이전에 한번도 목차에 등장한 적이 없던 ‘위기관리체계’란 항목이 새로이 추가되었다.
1994년도엔 비공개된 문제제기였으나, 2006년엔 공개리에 유엔사령관이 위기관리권을 언급했다. 두 번의 경우 모두 사령관이 직접 나서서 위기관리권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위기관리권은 왜 이리도 중요한 것일까?

3) 위기절차는 전쟁절차의 상위개념

지휘체계는 구조이다. 위기관리권이나 작통권은 기능이다. 기능은 하나의 구조가 다른 구조에 미치는 역할과 능력이다. 때문에 기능은 구조보다 체계의 특성을 더욱 본질적으로 표현한다. 고래는 구조상 쥐에 가까운 포유류지만 기능은 물고기와 더 가깝다. 고래의 특성은 구조보다 기능에서 더 잘 표현된다.
또한 몇 개의 체계에 관계하는 기능보다 몇 백 개의 체계에 관계하는 기능이, 낮은 수준의 체계보다 높은 수준의 체계에 관계하는 기능이 체계의 특성을 잘 표현한다.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생물과 원숭이 같은 고등생물의 기능이 다른 것과 같다. 또한 같은 사람이라도 단순한 관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과 고도의 체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역할과 기능이 서로 다른 것과 같다. 단순한 기능은 부분적인 속성만을 나타내지만 포괄적인 기능은 본질적인 속성과 더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전쟁은 지휘구조가 군사영역과 관계하는 기능이다. 위기는 지휘구조가 정치, 군사, 경제, 보건 등 국가운영의 본질적인 영역들 전체와 관계하는 기능이다. 하나의 체계가 가진 기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단순한 관계에서의 기능보다는 넓고, 고도한 체계와 관계하는 기능에 우선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쟁절차라고 이해될 수 있는‘숙고된 절차’에서는 위기조치를 지역총사령관이 결정하지만, 위기절차에서는 위기조치를 대통령이 직접 결정한다. 이것은 전쟁절차와 위기절차의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한편 나토협의지휘통제국(NC3A:NATO Consultation, Command and Control Agency)에서는 위기관리영역에서의 기준에 따라 일하는 것을 중요목표로 삼는데, 협의는 정치적인 것으로 지휘ㆍ통제는 군사적인 것으로 성격을 구분한다. 즉 정치적 협의와 군사적 지휘ㆍ통제를 양대 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위기관리의 정치-군사 통합적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한미연합위기관리구조에 의하면 연합사령관이 데프콘3을 먼저 선포하고, 나중에 한국군의 승인을 받아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구조상으로는 한국군과의 협의 절차를 그런대로 공평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능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매우 불평등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이 데프콘 상향을 결정한 시점이면 이미 미국 대통령까지 위기회의체계에 들어와 초기조치를 실행한 상태이고, 절차대로라면 전군에 경계명령이 발효되어 경계태세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한국군은 바로 그 시점에서 합참의장에게 통고되고, 합참의장이 대통령에게 그때서야 보고하게 된다. 이미 미군에 총 경계태세가 내려진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이를 거절 하는 일이 용이할까? 구조의 관점과 기능의 관점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파악케 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구조보다 기능에 의해 상황이 주도된다는 것이다.
기능은 또한 구조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 시간의 관계인 역사에 의해서도 규정받는다. 역사는 구조가 발생하고 발전해온 과정이다. 변화하는 구조간의 관계에 따라 기능 역시 변화된다. 따라서 구조만으로 현재 존재하는 체계의 본질을 규정하려는 것은 형식논리가 되기 쉽다.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 온 구조간의 관계와 역할을 중심으로 파악할 때만 체계의 본질에 더 접근할 가능성을 갖는다. 과거 전쟁절차와 위기절차,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 Authority)과 위기관리권(Crisis Management Authority)이 실제 어떻게 운용되고, 적용되어 왔는지를 아는 것은 현재 지휘체계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의 99%가 위기절차로 시작되었다. 전쟁선포를 법적 기준으로 한다면 걸프전만이 전쟁절차를 따랐다. 1973년 대통령의 전쟁권을 합법화시켜주는 동시에, 의회에 의한 통제를 목적으로 제정된 ‘전쟁권 결의(War Powers Resolution)’의 초점도 전쟁절차가 아닌 위기절차이다. 전쟁절차는 의회가 전쟁선포를 하도록 미국헌법이 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전쟁권은 의회에 의해 제약된다. 그러나 위기절차는 대통령이 임의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60일에서 많게는 90일까지 연장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 의회에 보고의무가 가장 잘 지켜졌다고 하는 1975년 마야구에즈호 위기조차 협의가 아닌 통고로 그쳐 전쟁권 결의를 위반했으며, 그 뒤에 이어진 파나마, 이란, 아이티, 엘살바도르위기 등은 어느 것 하나 ‘전쟁권 결의’를 위반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작통권 행사와 위기관리권 행사가 절묘하게 발휘된 예는 이승만 제거작전으로 알려진 에버레디계획(Plan Everready)이었다. 이를 시발로 한국역사의 고비마다 위기관리권의 위력적인 사례들이 등장했다. 미국은 위기조치절차를 통해 작전권을 부여한 당사자인 군통수권자마저 제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개념상으로는 작전지휘권보다 하위개념일 뿐인 작전통제권에 주권마저 좌지우지된다는 인상을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에버레디계획의 학습효과는 국방부에서 한미간에 작통권이 공평하게 행사되고 있다고 도표를 그려서 설명해줘도 믿지 않을 만큼 무의식화 되었다. 그러한 관념은 일반인이 쉽게 설명을 못할 뿐이지, 정확한 것이다. 하찮다는 작통권이 어떻게 지휘권보다 강하고 주권까지 흔들 수 있는지를 미군의 위기관리권은 보여주었다. 한국에선 ‘위기관리’란 말이 근자에나 회자되는 낯선 용어이지만 미국은 우리가 ‘한국전쟁(Korea War)’이라고 부르던 당시에도 ‘코리아위기(Korea Crisis)’란 용어를 문서마다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한국전 관련 회의문서의 중요한 대책들에는 ‘위기조치절차(Course of Action)’란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은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을 언제든지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방적으로 작통권을 행사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미국은 위기조치절차를 통해 그 같은 의도를 여지없이 좌절시켰고, 만약 그같은 조치가 실패할 때는 유엔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승만을 제거하고, 군정을 실시한다는 계획들을 준비했다.
1980년 광주항쟁을 통해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이 널리 화두가 되었다. 작통권을 통해 미국정책의 속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작통권과 미국의 정책 사이를 넘나들며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형성해온 또 하나의 창인 위기관리권을 발견하게 된다. 위기절차야말로 미국의 장단기정책과 목표가 순식간에 폭로되는 분출구 역할을 했다. 평상시엔 단비로만 내리다가 한순간에 게릴라성 홍수가 되는 빗물처럼 위기는 그 속에 내재된 본성을 미리 파악하고 있어야 만이 대응이 가능하다. 이러한 미국의 위기관리권 행사에 의해 한국의 작통권에 대한 인식은 다른 나라에 없는 매우 독특한 것이 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지휘관계를 다룬 미국합참의 교범에서까지 언급하고 있다.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 특히 작전통제는, 다국적 작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동맹 가운데에서조차 혼동의 원인이 된다. 비록 정치적 고려사항이 민감하지만, 명백한 지점은 정치적 구조가 끝나고 군사적 구조가 시작되는 곳에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국적 군사령관은 정치지도자와 군사구조 사이에서 완충기로서 역할하는 전투사령관이나 합동군사령관에게 보고해야 한다. 이것은 합동임무군사령관으로서 지정된 미군사령관이 정치-군사적 완충기이자, 합동지상구성군사령관으로서 군사작전을 통제하는 임무군사령관이란 것을 의미한다. 전투사령관은 특별한 관계를 결정한다.
한국에서의 작통권 논쟁을 염두에 둔 듯한 이 문장은 ‘작전통제’의 의미가 정치판단이나 결정이 아닌, 군사의 관점에서만 찾아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견 명확한 정의이다. 그러나 왜 작전지휘권도 아닌 작전통제권이 한국에서는 수많은 정치적 오해에 둘러싸이게 되었을까?
그것은 실제 4.19, 5.18 등 한국 정치의 한복판에 미군의 작전통제를 받은 한국군인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정들은 예외 없이 전쟁절차가 아닌 위기절차에 의한 것이었다. 정치-군사적 완충기로서의 역할은 위기관리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작전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은 전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전쟁은 정치, 경제, 외교적 고려가 끝난 상태에서 작전이 실행되지만, 위기는 정치, 경제, 외교적 고려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작전이 실행된다.
결론을 말하면 미군에 있어 전쟁보다 넓고 고도한 기능은 위기이다. 전쟁은 위기를 포함하지 못하지만 위기는 전쟁을 포함한다. 솔직히 필자 역시 ‘위기’란 단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푸에블로위기와 마야구에즈위기, 판문점 미루나무위기 등을 연구하고 나서야 ‘위기’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필자의 ‘전쟁과 위기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전쟁⊃위기), 이거나 (전쟁≒위기)였다. 즉 위기는 전쟁에 포함된 것이거나 위기와 전쟁은 별 차이가 없는 비슷한 것이라는 것이다. 위기가 전쟁에 포함된 하위개념이란 생각은 위기는 평시, 전쟁은 전시라는 도식을 받아들인 때문이었다. 위기와 전쟁이 비슷한 것이란 생각은 미국이 위기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켜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위기관리의 역사와 구조, 기능을 연구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위기가 상위 개념이고 위기에 전쟁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즉 (전쟁⊂위기)이다.
1994년 위기관리권이 처음으로 유엔사ㆍ연합사령관의 입을 통해 공식 언급된 이래 전략지시2호에 의해 정전시작통권 환수합의서에 한국이 서명함으로서 이를 공식화시켜주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위기관리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작전지휘권을 이양할 때조차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이 작통권을 통해 위기관리권을 행사해 왔을 뿐이다.
위기절차와 작통권이 행사되는 절차가 때로 중복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작통권이 정치-군사영역을 다루는 위기관리권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군사영역에서 위기관리권의 범위와 한계를 명확하게 제한한다 해도 위기 자체의 성격상 그것은 무의미하다. 위기는 본질적으로 정치-군사영역에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위기를 다루는 주체와 작통권을 행사하는 주체가 같을 때 즉 한 주권국가의 한 통수권자에 의해 행사될 때는 그나마 융통성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국익을 서로 달리하는 두 개의 주권국가가 위기관리권을 공유한다는 것은 예측가능하지 않고,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기 상황아래에서는 힘이 있는 국가의 패권에 경도되는 것을 의미한다. 국력이 비슷하면 마찰을 일으키다가 위기에 신속히 대처할 수 없을 것이고, 국력이 차이나면 강대국의 결정을 신속히 따라가게 할 것이다.
이는 향후 작통권 환수 전뿐 아니라 후에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위기절차를 시작할지 말지가 이미 국익을 어떻게 보는가에 의해 달라진다. 또한 위기절차에 돌입해서도 위기대응 방법론 역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작통권 환수의 대원칙은 국가위기에 대해 우리 국익의 관점에서 우리의 방법론으로 대응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천명에 다름 아니다. 효율성이나 기술적 우위 등을 내세워 적당히 물타기 되는 것을 좌시해선 안 될 것이다. 연합사해체 이전이라도 연합사령관에게 부여된 정전위기관리권을 조기 환수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전시작통권 환수과정에서 유엔사령관이 들고 나온 위기관리권에 대한 주장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조용히 진압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작통권 환수 뒤에 구상하고 있는 군사협조본부 등에서도 위기관리권만은 흐지부지 섞여 들어가게 해선 안 될 것이다.1994년 정전시작통권 환수 때와 같이 유엔사에게 한국군에 대한 위기관리권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 순간 작통권 환수는 도루묵이 된다.

6. 유엔사문제의 전망

유엔사해체가 진보적구호가 아니라 상식적 구호임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엔사해체에 대한 시도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어느편도 잃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만큼 유엔사문제가 좌파나 친북파의 구호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보수세력, 나아가 호전세력조차도 유엔사의 북에 대한 점령통치권에 대해서는 반대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1950년 10월7일의 유엔결의안에 의거해 북 점령시 유엔군이 점령과 통치의 주체임을 주장했다. 즉, “한국의 역할은 인정하나 총선실시 전에 주권이 확대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면서 북한점령계획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평화적으로든, 무력으로든, 북의 붕괴든 남북이 통일되었을 때 유엔군사령부는 국제법적으로 북쪽 지역에 대한 통치주체가 된다.
대한민국헌법 3조는 ‘大韓民國의 領土는 韓半島와 그 附屬島嶼로 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모순을 담고 있어 그 문제점이 심각히 제기 될 수 있으나 유엔사의 존재는 이 조항마저도 성립할 수 없도록 하는 법적 요건을 가지고 있다. 만일 통일헌법에 의해 ‘통일한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영토조항에 변화가 오게 되면 남측정부의 주권 포기와 북의 점령통치를 전제하고 있는 유엔사야말로 가장 큰 반국가단체가 될 것이다. 북의 점령을 상정하고 있는 남측의 호전세력조차도 북 점령후 유엔사가 군정주체가 된다는 것 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된다.
두 번째 이유는, 유엔사는 어떤 절차도 필요없이 당장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 대통령이 전쟁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기회는 이미 구조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사령관이 행사한다. 형식적으로는 군통수권자인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합의하여 한미연합사 사령관에게 지시를 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는 1978년 유엔사해체에 대비하여 창설된 한미연합사창설 공문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문에 의하면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사령관직을 겸임함으로써만 그 효력을 발생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현재 한미연합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과 주한미군사령관은 동일인물이다. 국제법학회의 김명기교수에 의하면 여전히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유효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한미연합사체계가 아닌 유엔사체계만으로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전작권환수논의과정에서 2007년 6월까지 한미군사당국은 유엔사와 연합사관계를 정리하기로 했으나 아직까지도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1994년 6월 14일 한반도 전쟁위기 때 한국의 대통령과 전혀 상의가 없는 상태에서도 북에 대한 3가지 침공 시나리오는 작성되었고, 그중 하나에 클린턴 대통령이 최종결정 사인을 하고 있었으며, 일각에서는 이미 오끼나와 해병대 병력이 부산에 도착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사체계로 전쟁을 일으켜도 아무런 법적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번 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이 가장 곤혹스러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유엔안보리의 결의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엔사는 한반도에서는 안보리결의 때문에 고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27일 안보리의 참전결의가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이라크 보다 훨씬 전쟁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엔안보리 참전결의는 지금도 논쟁이 가시지 않는 주제이며 유엔사의 결론은 일방적 해석에만 기초하고 있다. 이토록 중요한 군사주권조차도 차단시키는 유엔사에 대해 상식이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문제를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된다.
필자는 20004년 한국에서의 유엔사해체에 대한 걷기명상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일본의 많은 평화운동가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수염이 허옇게 자란 원로들이 많았다. 오랫동안 평화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웬만한 주제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조선문제, 즉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문제나 해저탄광등에서 사망한 강제징용조선인들의 숨겨진 역사를 헌신적으로 발굴하고 추모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의외로 그분들은 유엔사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바가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주한유엔사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놀라움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놀라움을 표시한 첫 번째 사실은 주한유엔사의 7개 후방기지가 일본의 중요 미군기지라는 사실이었다. 7개기지에는 도쿄와 그 주변의 요코다공군사령부기지, 요코스카해군사령부기지, 캠프자마 그리고 사세보의 미해군기지, 오끼나와의 후템마미해병대사령부기지, 카데나공군기지, 화이트비치해병대기지로 가장 중요한 주일미군 시설들이 포함된다. 이것은 1951년 9월 당시 수상이었던 요시다 시게루와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사이에 체결된 ‘유엔군지원에 관한 교환공문’ 일명 요시다-애치슨 교환공문이라는 것에 의해 규정되었다. 애치슨-요시다 교환공문을 통해 한국내 유엔행동에 참여하는 군대에 대해 시설 및 역무를 제공키로 합의한데 기초하여 이들 기지를 유엔사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 기지는 ‘일미안보조약’에 묶여 작전출동시 사전협의가 필요한 여타 주일미군기지와 달리 사실상 자유사용이 보장되어 있다. 일반적인 주일미군기지에는 일장기와 성조기만이 게양되지만 이들 7개 기지에는 유엔기가 게양되기 위해 마련된 세 번째의 깃대가 있고, 여기에 푸른색 유엔기가 게양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들 세 개의 깃발이 게양되어 있는 사진들을 평화운동가들에게 제시하자 혹시나 했던 의혹은 온전히 해소가 되었다.
그들이 놀란 두번째 사실은 일본 자위대가 유사법제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유엔사통제 아래 한국전쟁에 자동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 역시 요시다 애치슨교환공문에 의해 규정된다. 일본은 유엔군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시설 뿐아니라 역무까지도 제공하도록 되어 있고 현재 7개기지에는 일본 자위대가 거의 예외없이 상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군의 요청에 언제든지 응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원산상륙작전에 일본의 소해부대를 파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유사법제가 논쟁 될 당시 일본국회 공청회에 참석한 관방장관은 한 자민당의원이 요시다-애치슨공문은 아직 유효한가라고 질문하자 “여전히 유효하다”고 대답함으로써 유사법제와는 관계없이 자위대가 유엔사에 의해 작전통제됨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활동가들에게 희망을 준 사실도 있었다. 유엔사가 해체되면 유엔사에 편제된 7개 후방기지는 90일 이내에 철수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954년 2월 19일, 미국과 일본은 ‘유엔군 지위협정’을 체결하여“유엔군의 합동회의를 통하여 일본정부의 동의를 얻어 미·일안보조약을 근거로 미국은 일본의 시설 및 구역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유엔사에 대한 기지제공의무는 유엔군철수 90일 이내에 종료하도록 되어있어 유엔사가 해체되면 유엔군의 일본내 기지 사용권도 소멸된다. 75년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유엔사해체가 결의된 이후 미국으로서는 일본내 기지사용권의 문제를 심각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언젠가는 닥칠 유엔사해체에 대비하여 일본과 함께 유사법제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유사법제 이전에 유엔사가 해체되었더라면 일본의 주일미군기지반환운동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이 그들에게 다시 아쉬움을 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도 유엔사해체는 일본 평화운동에 큰 의미를 던진다. 평화헌법9조의 사수를 최고의 목표로 싸우고 있는 현재 일본 평화운동의 상황에서 유엔사는 이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일간 평화운동이 그간 국경을 전제로 한 연대운동이었다면, 유엔사문제는 국경 없는 연합운동으로의 발전을 요구하고 있다. 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엔사의제는 커지면 커질수록 한국의 민간뿐아니라 군과 정부, 더 나아가 일본의 평화세력까지 공통의 이해관계를 자각하고 그를 통해 단합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겨놓고 싸울 수 있는 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