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심 모두진술 일부 2008/04/25 604

항소심 1차재판, 재판정의 사정으로 모두진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리 준비했던 항소심 모두진술입니다.

2심 모두진술
이시우

검사의 항소이유서에서 그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겐 그 성실함이 빗나간 편견과 오해의 바벨탑처럼 무겁게 다가오기만 합니다. 왜 한 인간의 성실함은 다른이에게 부담이 될까? 성실함은 사악한 자의 것일 때 위험한 것입니다. 기록할 만한 세균무기를 만들어낸 731부대 이시이중장의 성실함은 인류를 파멸에 이르게 할 위협이듯 그 성실함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좌우를 갈라 서로를 사악한 존재로, 사악한 존재의 성실함을 공포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분명 가치관이 다른 상대방의 속내를 폭로하여 공격하기 위한 전술임을 숨기고 있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가치에 대한 시비는 중요한 것이지만 시비를 가리기 위해 시도하는 선험적 기준에 의한 이분법은 공격하는 사람을 해방에 이르게 하기 보다는 더욱 구속하고 결박하는 역설에 빠지게 만듭니다. 물에 비춰 보기 전에 물자체를 볼 필요는 그래서 있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보는 방법에도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검사의 항소이유서를 정성스럽게 읽어보며 나 자신도 이런 일종의 도착증세를 나타낸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검사의 의중을 폭로하고 나의 가치관에 비추어 검사측 항소에 변론하기를 유보하고 검사나 또는 나 스스로도 가지고 있을지 모를 편집증이나 도착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우리의 사고방식에 숨어있는 함정을 성찰 하고자 합니다.

끌어안음
사람은 가슴을 열어 세상의 아픈 것과 그늘진 것을 끌어안음으로서 새로운 결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간절함과 간절함의 표현인 성실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끌어안는 대상이 실재가 아닌, 실재를 나타내는 기호일 때 는 어떠할까? 예를 들어 국가는 내가 전국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기도 전에, 전국의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보기도 전에, 심지어는 태어나자마자 출생신고가 되는 순간부터 나에게 던져지듯 짐 지워진 개념입니다. 그것은 내가 끌어안아야 할 가장 큰 기호중의 하나입니다. 불교에 해박하여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에 주석을 달았던 김시습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領取鉤頭意 莫認定盤星 갈고리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금의 표식을 인정하지 말라

눈금은 무게를 나타내는 기호에 지나지 않으므로 무게와 혼동하지 말고, 무게를 알려거든 무게를 다는 갈고리의 입장에 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고리의 세계보다 눈금의 세계에 더 많이 속해있습니다. 갈고리로 비유되는 실재세계와 눈금으로 비유되는 상징과 기호의 세계를 끌어안는 방식에 대해 고찰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국가보안법에서의 국가
내가 국민이라고 말할 때 나 이시우는 국민 이시우로 정확히 착오없이 전화할 수 있는가?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군인과 한국전쟁기의 국민방위군은 국가의 국민으로서 부름을 받았지만, 국가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줍니다.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여긴 주체가 국민임을 자부하며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충성이요 애국이라면, 국가로부터 배신당한 주체가 국민이기를 포기하고 국가에 대해 폭발적으로 저항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반란입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건에서 보듯이 가장 충성스런 국민에게 조차 국가는 무책임하고 황당한 폭력을 가하는 데서 국가의 이성과 합리성을 의심하게 합니다. 이런 사건에서는 국가가 법과 질서의 체계이기보다 폭력의 체계라는 정의가 설득력을 얻습니다. 애국과 반란의 극적인 반전에서, 자신 스스로가 국민이라는 주체의식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데에서, 나란 주체와 국가란 주체가 얼마나 불화의 관계에 있을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게 됩니다.

4가지의 관계
사람은 관계 맺을 때 4가지 태도를 갖습니다. 추종하기, 배려하기, 눈치보기, 무시하기가 그것입니다. 추종하기는 내가 나를 버리고 상대방과 동일시할 때 생깁니다. 눈치보기는 나를 버리지도 상대의 주체를 인정하지도 못하는 긴장속에서 생깁니다. 배려하기는 나의 주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도 인정하며 협력을 통해 주체를 실현하려 할 때 생깁니다. 무시하기는 나의 주체만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그러나 이중에서 추종과 무시는 결국 비주체화로 귀결 된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추종은 동일시하려는 자아의식이 너무 강해 주체를 포기한 일방적 의존이란 점에서 그렇고, 무시는 자신의 주체를 실현할 대상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아의식이란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는 추종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또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체를 포기한 추종은 과거에는 신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고, 근대에는 이념 때문에, 현대에는 돈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합니다. 라깡(Jacques Lacan)에 의하면 주체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 할 때 결핍이 발생하고 그 결핍은 결코 채워질 수 없으며, 채워진 것처럼 착오를 일으킴으로서만 동일시가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기호의 세계에서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은 국가의 고유한 본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국가가 아닌 것과 차이를 만들므로서 가능해집니다. 사랑은 사탕과 다르기 때문에 사랑인 것입니다. 자유의 반대를 찾기는 쉬워도 자유의 본성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의미를 담은 말은 이런 주체에게 표현수단을 빌려줍니다. 구별 없는 혼돈에서 벗어나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표시함으로써 주체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체는 기호에 자신을 동일시 할 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즉 기호가 주체를 대신하면서 주체는 그 기호들의 관계 안에서만 자신의 동일성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지젝(Slavoj Zizek)에 의하면 대립물을 찾지 못하면 주체는 기호와 동일시하는데 실패합니다.

눈치는 주체화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긍정성과 언제든지 비주체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기회주의라는 부정성이 혼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루는 배가 나온 상사한테 ‘그것도 인격’이라고 말해서 ‘그래도 자네 밖에 없어’하고 칭찬을 들었는데, 다음날엔 ‘아니 자네 날 놀리는 건가?’ 하고 핀잔을 듣습니다. 눈치가 없어서 나의 주체가 무시당하든 눈치껏 해서 나의 주체를 인정받든 그 차이는 크지만 눈치 보는 상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일종의 도약입니다. 눈치보기는 나의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 주체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도약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상태는 오직 배려하기 밖에 없습니다. 배려하기는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 나의 주체를 발견하고, 확대 실현하기 위해 대상과 연대하게 합니다. 나의 발전이 곧 대상의 발전인 상태. 사랑은 그래서 주체의 발견과 성장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기호의 세계가 아닌 실재의 세계에서 배려하기란 예를들면 사소한 약속도 철저히 지키는 모습에서 표현됩니다. 사소한 약속이든 중요한 약속이든 어떤 경우에도 약속은 주체의 실현과정이며, 주체가 실현되는 만큼 주체는 성장 합니다. 약속시간 5분, 10분 늦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은 상대방의 주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결여 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상대방의 시간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지요. 상대방의 주체에 대한 무시는 결국 자신의 주체에 대한 무시로 결과 됩니다. 약속은 서로간의 주체성을 실현, 확장하고자 하는 협력의 행위입니다. 상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나의 주체가 실현될 수 있다는데 약속이란 행위의 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의 주체를 무시하는가 존중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주체가 무시되기도 하고 존중되기도 합니다. 약속을 어기는 행위는 자신이든, 상대든 주체성을 퇴보시키고 병들게 하는 위험한 행위입니다. 이처럼 주체의 발전은 사회적 관계의 조건에서만 가능합니다.

배려하기는 예를들면 자신의 아픔까지도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하고 풀줄아는데 있습니다. 얼마전 병원에서 갓 태어난 딸을 선천적인 병 때문에 한달도 안되서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누가 들어도 좋은 일이 아니어서 두 부부만 가슴아프고 말자는 생각으로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조용히 화장해서 강에 뿌렸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새로 태어난 딸은 아프다더니 어떠냐, 예쁘냐, 이름은 어떻게 지었냐하고 자꾸 물어와서 사실을 말했답니다. 이미 자신은 다 마음 정리가 끝나서 웃으며 얘기 했는데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어떻게 위로를 해야할지 몰라서 만날때마다 난처해하고 어떻게 만나야할 지를 몰라서 만나는 것조차 피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주변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짐이 생긴 것입니다. 같이 울어줘야 할 순간에 자신은 울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지요. 그 친구는 결국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도 같이 나누어야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남의 아픔을 끌어안을 뿐아니라 자신의 아픔조차도 상대방이 끌어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이것이 배려하기의 관계입니다. 비극은 주체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선입견을 벗고, 사람을 믿고 비극미로 승화 시키려는 자세, 사랑과 배려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전제 되어있습니다. 믿음은 배려의 조건이지만 주체간의 동일시가 아니라 오히려 주체간의 관계에 빈틈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각자의 결핍을 상대를 통해서 채우려고 합니다. 내게 없는 반쪽을 찾는 시도들이 성공할 수 있을까? 라깡은 성관계를 맺는 주체들이 서로를 통해서 자기의 결핍을 완전하게 채울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익숙한 양희은의 노래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사람 곁에 또 한사람 둘이 서로 마주보며 웃네.’ 이 노래의 미덕은 서로가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상대방에 의존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결핍을 채우고자 관심과 애정을 조작하고 의무를 강요할 때, 이를테면 부부이기 때문에 부부의 의무를 다하라고만 강요할 때 부부관계는 분열됩니다. 스스로 선택한 부부관계조차 이렇습니다. 국민이기 때문에 국민의 의무를 다하라고 할 때,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분열합니다. 국민과 국가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주어진 상태란 점에서 더 불화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성하고 성찰하며 조절할 기회와 능력이 없을 때 동일시의 요구는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주체는 폭발적으로 저항하거나 거부합니다. 주체간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는 결핍을 상징조작과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통해 착각하도록 할 때 추종하기의 관계가 되며, 서로의 결핍을 인정하고 성찰하고자 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다가설 때 배려하기의 관계가 됩니다. 주체란 믿음이 전제된 배려와 사랑입니다. 사랑이 전제 되었을 때 눈치와 무시는 배려가 되고 추종은 존경이 됩니다. 사랑은 그래서 나를 개조하고 세상을 개조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개조하는 유일한 혁명입니다. 나는 국가를 추종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사랑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4.3항쟁과 국가보안법
국가는 나의 보호자일 때도 있지만 파괴자 일때도 있다는 점에서 나와 국가사이의 불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최근 오끼나와와 제주도에서 이같은 불화를 실감했습니다. 오끼나와미군정과 제주미군정기에 일어났던 오끼나와인에 대한 집단학살과 제주4.3항쟁기의 집단학살과정을 통해 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한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깊은 충격과 사색의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제주시청 마당에선 젊은사람의 귀엔 한없이 지루하게 들릴 무당의 굿소리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람불면 흩어지고 비가 오면 씻겨가니 어디한곳 머물곳이 없다고 혼들은 무당의 입을 빌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 굿판에서 모두 고개를 돌린 그 순간에서야 나는 정작 혼백의 결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아침마다 오르던 숙소 옆 도두봉의 동백꽃에 맺혀있던 이슬이 생각났습니다. 그랬습니다. 바람에도 빗물에도 흩어지고 씻기고야마는 혼백이 꽃잎에 숨어 있다가 남몰래 흘리는 눈물, 그것이 제가 본 동백꽃의 이슬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48년, 지금으로부터 60년전입니다. 4.3항쟁이 있었고, 대한민국의 건국이 있었으며, 헌법과, 국가보안법의 제정이 있었던 해입니다. 국가보안법의 모체가 되는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 최초로 발의된 것은 여순사건 이전인 그 해 9월 20일이었습니다. 결국 제주 4.3이 국가보안법탄생의 태반이었던 것입니다. 4.3항쟁에서 제가 가장 주목해 본 것은 1948년 4월 28일이었습니다. 좌익의 무장대 대장인 김달삼金達三과 토벌대 대장인 김익렬金益烈중령이 평화회담을 한 날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한자리에 마주하게 되었고 마침내 무고한 학살을 중지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사흘도 지나지 않은 5월 1일, 이승만이 비호하는 서북청년단이 오라리마을을 방화하면서 평화합의는 단번에 파기됩니다. 미군정이 토벌과 회유의 이중정책을 포기하고 오직 무자비한 토벌로 선회한 것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뒤의 일이었습니다. 모든 평화협정과 약속은 체제가 보장되지 않으면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는 것을 그렇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미군정이 조선민 대다수의 지지를 포기하고 극소수인 이승만과 손잡은 것은 미국의 정책과 미군정의 전략이 수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미군정은 적극적으로 토벌과 학살의 전면에 나섭니다. 학살자가 급증한 시점이 유격대의 저항이 증가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양측간의 교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 이후였고, 미군에 의한 지원으로 서북청년단과 경찰등의 물리력이 증강된 시점이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희생은 저항의 강도가 아니라 국가 폭력의 강도와 비례했던 것입니다.

왜 국가의 폭력은 합리적이고 합법적이지 않고 그와 정반대였을까? 반공청년단들에게 국가주의가 수렴되는 과정과 반공청년단들에 의해 국가주의가 발산되는 과정을 고민해 봅니다.
주체는 동일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호들의 도움을 받는데 이 기호라는 매개 수단 때문에 정작 자기 주체성을 잃어야 한다는 역설이 생깁니다.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동일시 하고자 했던 기호는 국가였다는 데서 그들의 비극은 국가적인 것이었습니다. 한편 이런 기호들 안에서 주체가 소외되는 것은 주체가 말(기호)의 세계에 들어온 이상 피할 수 없습니다. 주체는 처음부터 자기중심을 잃고 자기 통제를 벗어난 구조의 한 부분이 됩니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틈이 어떻게 메꾸어지는가에 대해 다음의 증언은 국가건설기 전형성을 갖는다.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 4.3 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지시했다. 이승만을 총재로 모시고 있는 대한청년단은 이승만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김계순은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 온 한 처녀가 하귀 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결국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한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들 한 번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 먹고 난리가 났어요. 또한 그 일로 몹시 앓았습니다. 사촌언니는 그때 찔렀다면서 그 후 막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는 겁니다.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들 나처럼 앓았다고 하더군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이 같은 일은 4.3항쟁 진압초기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국가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없이 동일시하기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른 개인들은 더욱 더 강력하게 국가와 자신을 동화시키거나 국가와 불화하게 되거나 침묵합니다.

결국 국가와의 동일시과정에서 생기는 틈과 불화를 해소하지 않으면 국가는 개인을 국민으로 만드는 데 실패하게 됩니다. 지젝의 지적처럼 대립물을 찾지 못하면 주체는 기호와 동일시하는데 실패합니다. 내가 곧 국가라는 일체감을 가지려는 서북청년단에게 국가에 대한 대립물, 즉 국가 아닌 것은 빨갱이였습니다. ‘상징적’ 관계는 차이를 통해서 만납니다. 인민은 국민과 다르고, 국민은 민중과 다릅니다. 그래서 인민은 국민과 비교되어 설명되고, 국민은 민중과 비교되어 설명됩니다. 저마다 결핍을 안고 있고, 자기의 결핍을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고 합니다.
이승만이 서북청년단 총회에서 사상이 투철한 여러분이 필요하다는 연설과 서북청년단의 북에서의 피해의식은 국가주의에 내재된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서청단원으로 1948년 12월 19일 동료 250명과 함께 제주에 도착, 경찰의 길을 걸었던 박형요는 이 대통령이 서청 총회에 직접 참석, 모병을 역설하는 바람에 제주도에까지 오게 됐다고 증언합니다.

난 이북에서 전기 재료상을 하고 있다가 김일성이 싫어서 1948년 5월 월남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서청 문화부 일원으로 활동했지요. 1948년 12월 10일로 기억합니다. 명동에 있던 서울시 공관에서 서북청년단 총회가 열렸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했어요. 그는 그 자리에서 “제주도 4·3사태와 여수·순천 반란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습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단을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날 서청 금호동 분회 총회가 열렸는데, 분회장인 임승현씨가 “여수·순천·제주사태로 대통령 각하께서 서청원을 파견하라는 지시가 있으니 모두 지원하자”고 제안, 거기에 응하게 된 것이지요.”

그는 앞으로의 불길한 미래를 알지 못한 채 국가의 혜택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데 쉽게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12월 19일 동료 250명과 함께 제주에 도착했는데 글깨나 아는 25명은 경찰이 됐고, 나머지 225명은 군인이 됐지요.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 하나를 앞세워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대원들을 대거 투입한 것입니다.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집권욕만 생각한 것이지요. 이 대통령의 허락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 대통령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 학살의 총책임자는 이승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청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극도의 증오감과 복수심을 안은 채 제주도에 들어왔습니다. 상세한 사연과 내막은 어떻든 간에, 서청 소속의 많은 청년들은 모든 것을 잃고 고향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였고, 계기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다이너마이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미군정, 이승만 등 집권세력은 “사상이 건전하고 철저한 여러분이 나서야 합니다”고 ‘점잖게’ 독려하고 한껏 추켜세우면서 ‘제주도진압’의 최선봉에 세웠던 것입니다. 서청대원들에게 하루아침에 경찰복과 군복을 입힌 것은 그들에게 빨갱이 사냥의 권한을 부여해주었고, 또한 그것은 서청원들에게 확실하게 빨갱이 사냥을 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여러 감정 가운데 원숙하게 다루기 가장 어려운 것이 적개심과 증오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북청년회원들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공유하고 있었던 이런 감정은 빨갱이 논리를 통해서 표현되고 애국심에 의해 포장될 때 엄청난 상승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학살 현장에서 나타나는 서청과 경찰의 행동은 애국심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공적인 규율 속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보다는 재산 갈취나 개인적 복수가 학살의 동기가 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유희적 측면까지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빨갱이라는 말이 무서운 것은 빨갱이라는 말의 실체가 모호해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국가가 무소불위의 폭력을 위임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행정부를 권능조차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청은 1948년 11월 9일 물자보급 문제에 불만을 품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을 연행, 서청 사무실에서 고문하다 살해했습니다.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 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다버려 끝내 절명케 합니다. 제주도 행정의 2인자까지도 보급품 지급에 협조 안합니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것입니다. 서청은 이번에도 자신들의 죄상을 덮는 주무기로 무조건 상대를 공산주의자로 몰았습니다.

빨갱이라는 대립물이 국가에 대한 일체화와 동일시에 존재하던 틈을 메꾸어주고, 폭력의 합법성을 부여해주는 것처럼 착각하게 해주었다면, 어느순간부터 폭력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화하게 됩니다.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빨갱이 척결을 위해서 합법성의 기준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광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왕인 것은 오로지 타인들이 그에게 신하의 관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왕이 왕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신하인 듯이 상상합니다. 빨갱이가 국가의 대립물이기 때문에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진압 당한 사람은 빨갱이가 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는 간첩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에 걸린 것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에 걸렸기 때문에 간첩이라는 상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재향군인회가 1심재판부에 낸 탄원서에서 저의 기소내용 중에 간첩죄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이시우 간첩사건, 간첩행위라고 규정하는 심리구조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국가보안법에 연루되는 순간 판결과 관계없이 사회에서 간첩으로 매도당하는 것을 누가 책임져야 할까요?

서청의 이런 불법적인 살인행위에 대해서 당시 절대적인 장악력이 있던 미군 정보기관이나 9연대 수사기관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경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경찰관이었던 김호겸(金浩謙, 서귀포경찰서장 역임)의 증언에 의하면, 토벌진영에서는 살인에 가담한 서청단원을 처벌하지 않고 그들을 군에 입대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사회 현실에 대해서 ‘가짜 표상’을 지니게 합니다. 예를 들어 개인들이 화폐를 사용할 때 그것이 사회관계를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에 어떤 마술적인 힘도 없음을 매우 잘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사회적 행위를 할 때 화폐가 ‘마치’ 부 자체를 직접 구현하는 것’처럼’ 행위 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실제 행위에서 물신주의자처럼 행동합니다. 개인들은 자신들이 착각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위합니다. 이같은 물신物神fetish은 도착倒錯perversion의 일종입니다.

계엄법도 없는데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령이 지역의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잠시 동안 감내해야 할 규제가 아니라 무차별 토벌로 가는 초토화작전의 도구로 인식된 것도 폭력이 물신화 된 정황을 보여줍니다.

가까이 있는 적 만들기
서북청년단이 빨갱이를 자신이 동일시하고자 하는 국가의 대립물로 상상하면서 국가와의 동일시에서 발생하는 틈과 결핍을 채울 수 있었듯이 국민전체에게 똑같은 투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법의 선포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반유태주의자들이 유태인의 형상을 만들어 간 과정의 마지막은 유태인이 사회의 대립물일뿐아니라 바로 적이라는 것을 상상하도록 한데 있었습니다.
우선 유태인은 경제적으로 폭리를 취하는 자, 정치적으로 음모가, 종교적으로 타락한 반 기독교도, 성적으로 무고한 소녀들을 유혹하는 자 등등. 한마디로 유태인의 형상이 사회적 적대의 암호, 뒤틀린 대표물이 되도록 조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왜곡만으로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치 않습니다. 열광적인 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유태인’이 환상의 틀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행복을 훔쳐간다.”고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완전한 사회’의 비전을 내세웁니다. 예를들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선 완전한 체제를 건설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세운 전망이 사실상 실현되지 않으면 이런 불가능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그것은 어떤 방해자 때문이라고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승만이 지목한 방해자는 빨갱이였습니다. 49년 4월 9일에는 이승만이 직접 제주도를 방문했습니다. 이승만은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우리는 공산당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라 우선 나라를 세우고 확실히 기반을 닦은 후에 주의 주장을 하자는 것입니다. 먼저 제주도를 완전한 평화로 만든 후 다시 전라도로 가면서 숙청하며 38선을 분쇄하고 북한으로 진군하여 낙원의 정부를 세웁시다.

이승만이 말한 국가는 공산당도 주의주장을 할 수 있는 나라, 낙원의 정부입니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제주의 빨갱이와 여순의 빨갱이등 우리 곁의 적을 숙청하고 3.8선 너머의 빨갱이를 분쇄하자고 합니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환상이 은폐하려는 국가의 결핍은 국가 안에 실재로 있는 사회적 적대입니다. 친일파, 토지개혁, 통일된 정부의 수립등 해방 후 제기된 굵직한 건국의제들을 둘러싼 실재의 적대관계를 빨갱이로 압축된 대립물을 통해 은폐하고자 한 것입니다. 친일파와 공산주의에 대한 원한, 미군등의 요소가 공고한 동맹으로 결합되는 과정을 4.3은 그대로 보여줍니다. 토벌대의 지휘부 상당수는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일본 형사 출신으로서 식민지 지배 기간 동안 경험한 야만적 토벌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그 밑에서 학살에 가담한 서청 또한 빨갱이 인식 속에서 잔혹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한편 조덕송이 묘사한 서청의 모습은 미군과의 동맹의식의 정서적 근거를 짐작하게 합니다.

지금 제주에는 육로로부터 파견된 경찰외에 사설단체까지도 임시경관으로 투입되어 있습니다. 말없이 움직기고 있는 그들 장정! 그것은 틀림없는 전사의 모습입니다. 미군모자에 미군복 미군화에 미군총 비가오면 그위에 미군 우장을 쓴다. 멀리서 보면 키가작은 미군부대가 전진하고 있는것 같다.

국가보안법은 구체적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상과 국민의 행복을훔쳐가려는 가까이 있는 적을 상상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란 상징과 기호를 사람들이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국민으로 상상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사회에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대립물을 제치고 단연 적대 1호로 북한의 형상을 압축하며, 가까이 있는 적으로서 간첩을 상상하도록 만드는데 집착합니다.

48년 9월의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은 내란행위 처벌에 중점이 주어졌던 것으로서 나중에 여순사건 직후 제정작업이 가속화되는 과정에서는 내란행위 그 자체보다는 내란유사의 목적을 가진 결사․집단의 구성과 가입을 처벌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어 갔습니다. 이것은 내란행위는 그 당시까지 적용되고 있던 구형법 상의 내란죄에 의해서도 처벌이 가능하다는 점과 여순사건 이후 구체적인 입법행위로 표출되지 않는 남로당 외곽조직 이외의 합법적 형태의 좌익결사의 존재 그 자체를 말살시킬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은 국가보안법으로 수정된 채 1948년 11월 9일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초안에 대해 많은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 검찰총장까지도 법률적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국가보안법 폐기 논쟁이 제기되었으나, 폐기동의안은 37대 69로 부결되고 맙니다. 나아가 가장 문제가 되었던 제1조 삭제를 주장하는 수정동의안마저 부결되고 맙니다. 마침내 국가보안법은 일부조항의 자구수정만이 이루어진 채 같은 해 11월 20일 접수되고, 12월 1일 법률 제10호로 정식 공포되어 시행됩니다.

전체주의자도 상징적 허구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음을 잘 압니다. 전체주의자는 실제로 체제가 타락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적 권위에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just because’를 보탭니다. ‘바로 임금님이 벌거벗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뭉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헌법3조 영토조항에서 북을 남의 영토이며, 수복해야할 지구로 보며, 수복지구에 존재하는 정권은 괴뢰정권이거나 반란단체, 반국가단체이며 그래서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는 이데올로기구조는 실제로 결정적인 시기마다 국가의 안보를 지키기는 커녕 위협을 가했음을 역사는 잘 알고 있습니다. 52년과 53년 유엔사와 미국은 정전협정을 반대하고 북의 수복지구를 되찾기 위해 계속 북진해야 한다는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레디 계획을 수립했고, 쿠데타를 통해 군사정부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헌법3조 영토조항으로부터 국가보안법으로 이어지는 안보이데올로기를 이승만이 전면에 내세운 때문이었다. 이같은 문제는 지금까지도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잠복해 있습니다. 72년 수립된 북의 사회주의 헌법9조에서 북의 영토를 북한지역으로만 한정하여 남한의 영토를 인정한 변화를 보인데 비해, 미국은 헌법3조를 부정하고 있어 헌법차원에서 본다면 오히려 북한보다 미국이 헌법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방해자임에도 미국에 대해서는 어떤 경계도 취하지 않는 모순을 보입니다. 그러나 맹목적 국가주의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넘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미동맹으로 뭉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불법으로 민간인학살을 자행한 서북청년단이 스스로 한일을 잘 알기에 오히려 더 폭력의 물신주의자가 되어 뭉치듯 국가내부를 향해선 폭력을 행사할 대립물의 형상을 재확인하고 압축해갑니다.
국가보안법은 국가주의라는 상징세계에서 국가에 실재 존재하는 사회적 적대를 은폐함으로서 결핍을 메꾸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동원은 가능하나 오히려 국가의 위기를 초래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가 처해있는 국가주의의 환상을 직시하며, 그 환상이 은폐하고 있는 진정한 위기에 대해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국가보안법의 틀에서 이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나 오히려 이 재판이 우리의 현실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도록 힘써주시기를 재판부에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