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진술 – 1 인사 2 소외 2008/01/10 1118

이시우 최후진술문

인사
한 선생님께서는 다른 판사가 입정할 때는 일부러 일어나지 않는데 유일하게 한양석판사님이 들어오실 때는 일어나서 예를 갖춘다고 하셨습니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컸던 분이 그럴 정도로 누가 봐도 공정한 재판을 진행해 주셨습니다. 변호사님에게나 검사님에게나 피고인인 저에게나 증인들에게까지도 치우침 없는 공평한 배려로 경청으로 재판을 이끌어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방대한 분량의 수사기록이란 말을 번번이 되뇌이실 정도로 과중한 재판준비를 해오시느라 수고하신 검사님께 또한 수고의 인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법에도 양심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시고, 예의 변호사나 법조인이라면 가질 권위주의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인권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념으로, 성심과 성의를 다해 무료 변론을 해주신 이정희변호사님을 비롯한 민변변호사님과 대인지뢰피해자들에 대한 애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배려로 혼신을 다해주신 김다섭 변호사님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정중히 드립니다. 문정현신부님을 비롯 거의 빠지지 않고 재판에 참석해주시며 무언의 기둥이 되어주시고 역사를 엄숙히 기억할 사관이 되어 주신 방청객여러분들께도 성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보수단체의 어르신들이 열심히 참석해주시다가 저의 보석출소이후에는 단한명도 참석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분들은 복도에서 돈을 받고 동원된다 어쩐다 소리가 들렸지만 설령 돈을 받고 오셨어도 나름의 경험과 신념에 기초하여 이 자리를 하나의 역사의 장으로 생각하고 오셨던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신념을 돈으로 동원한 사람들이 잘못일 것입니다. 여러 어르신들과 서서히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익혀가며 대화하고 경청할 기회를 갖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소외
겨울의 언땅과 찬바람은 그저 피해다녀야 할 대상이었지만 저는 오랜동안 집을 나와 길 위에 서고서야 겨울의 언땅을, 허공의 찬바람을, 그들의 고독했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빛과 볕만을 추구하는 사람의 관심과 무관하게 그늘진 땅 찬바람이 존재하듯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버려진 채 제 스스로 버티며 살아남고 있는가 다시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길위에서 삼보일배 명상을 하는 중에 무엇인가 번쩍이는게 있어 눈떠보니 라이터쪼가리였습니다. 문득 그것은 쓸모 없어져서 버려진 것인가? 아니면 버려져서 쓸모 없어진 것인가? 를 생각해봅니다. 한번 버려진 것이 본래의 것과 재결합하여 제구실을 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현실에서의 진정한 몰락과 실패는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파괴보다는 관용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러나 파괴보다 더 가혹한 것은 버려지는 것입니다. 버리는 자는 고의로 버릴 수도 있고 실수로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쓸모없어서 버려질수도 있지만 버려졌기 때문에 쓸모없어진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 무엇인가를 고의로나 실수로나 버린 적이 없는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사회에서 국가보안법사범이 된다는 것은 버려짐을 의미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국가보안법으로 갇혀있는 이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많은 분들이 있는 한편, 당사자가 체포, 구속되고 언론으로, 입소문으로 알려지는 순간 세상의 대부분은 우리를 외면했습니다. 차가운 감옥방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 외면과 고립입니다. 술먹을 때는 형제를 자처하는 사람이 천명이나 되었는데 급한일을 당하고 나니 함께하는 벗이 단한명 없더라는 명심보감의 첫 문구가 감옥에 갇히는 순간 느끼게 되는 우리들의 공통된 심정입니다.
국가보안법을 코웃음치며 아직도 그런법이 남아 있었는가 하고 화답하던 이들에게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공포였습니다. 출소 후 재판을 위해 증인과 증거자료를 부탁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가 무관심이 아니라 사실은 두려움임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부탁한 것조차 부담스러워 할 때 저는 더이상 부탁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증거자료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저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1년전 일심회조작사건이 터지자 저 또한 그들에게서 점쟎게 눈을 돌렸습니다. 시골에 산다는 것은 그런 편리함을 제공합니다. NK조선에 실린 선군정치선전화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최화섭,김맹규선생님을 잡아넣었을 때는 아직도 이런 짓을 하는 공안기관의 한심한 작태에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상대할 가치를 못느껴 역시 외면했습니다. 만약 그때 그분들이 저와 연관이 있어서 증거자료를 부탁해왔다면 저는 흔쾌히 응할 수 있었을까? 저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무관심이란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의 위장된 표현입니다. 연이어 터지는 국가보안법사건들에 무심한 사이 얼마지나지 않아 뜻밖에도 그 다음 순서는 저였습니다.

강화도로 이사하여 사람들과 정붙이고 살아온 지 여러 해가 되었고 국정원직원과도 식사를 하는 사이가 될 정도였지만 이번 사건으로 저는 간단히 간첩이시우가 되었습니다. 어떤분들에게 국가보안법구속은 곧 간첩으로 쉽게 단순화되었습니다. 설령 무죄 판결이 난다해도 이미 한번 간첩은 영원한 간첩으로 낙인찍히고 말 무서운 구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복잡한 과정을 설명할 기회가 인생에 과연 얼마나 될지 그런 순간이 찾아올 수나 있을지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국가보안법의 이빨이 빠진지 오래여도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란 것을 제 자신과 우리의 태도는 입증해 주었습니다. 일심회조작사건과 저의 사건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저는 결론 내렸습니다. 그들이 감옥에 있어야 한다면 저 또한 감옥에 있어야 하며 제가 석방되어 있다면 그들 또한 석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옥보다 더한 것이 출소 후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하나 무관심과 외면이 확인될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어야할 사람들이 함께 있지 않다고 생각될 때 고립을 실감합니다. 고립과 그에 따르는 외로움은 공동체에 대한 갈망 때문인 것입니다. 출소 후 먼지 쌓인 작업실을 청소하다 오래된 화집하나를 꺼내들게 되었습니다. 그 화집 속의 그림하나가 바로 저의 그런 처지를 착잡할 정도로 정확히 담고 있었습니다.

그림: 일리야레핀의 아무도기다리지 않았다.

1884년부터 5년에 걸쳐 개작을 거듭한 일리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이제 막 유형지에서 돌아온 한 젊은 혁명가를 가족들이 놀란 눈으로 맞이하는 장면의 그림입니다.
혁명가와 마주한 검은 옷의 어머니인 듯한 여인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그의 손을 잡을 듯 하지만 엉거주춤한 자세로서 보이지 않는 얼굴 표정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방금까지 앉아 있었을 오래된 비로드천 쇼파의 질감은 낡은 전통과 안정감을 상징합니다. 책상에서 공부를 하다가 몸을 틀어 그를 본 남자아이에겐 기쁨으로 위장했으나 두려움과 불길함을 결국 숨기지 못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막내로 보이는 하얀 옷의 어린 소녀는 기억을 되살려 눈 앞의 ‘낯선 이’를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듯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그 불안함은 책상밑으로 모아진 발끝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피아노 앞의 여성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당황스러움으로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의 충돌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들보다 먼저 그를 보았고, 거실문을 열어 아직 문고리에서 손을 내리는 것조차 잊고 있는 문간의 여인은 이제 그를 정면이 아닌 뒷면에서 볼 수 있다는 심리적인 거리 때문에 기쁜 척 해야 할 의무적인 표정대신 가장 여실히 그가 몰고올 불길한 예감을 직감하고 있는 먹먹한 표정으로 목석처럼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긴장된 순간을 초래한 주인공인 혁명가는 기쁨과 반가움,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인 감당하기 힘든 가족들의 시선을 받으며 반가움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지만 그들의 시선에 섞인 두려움을 이내 직감하고 더이상은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균형을 잡지 못한 모습이, 영영 그렇게 멈춰 버렸을 것 같이 서 있습니다. 그의 모자를 든 한손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러하듯 가슴 근처로 가 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어 내려뜨린 채 몸에 붙이고 있는 다른 한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의 교착된 감정 상태를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과 내딛은 한발은 반가운 감정을 동력으로 하고 있지만 손의 표정과 내딛지 못하고 있는 한발은 가족들의 시선에서 확인한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을 불행과 불길함의 화신으로 만든 가장 잔인한 장치는 햇빛입니다. 모든 가족들의 얼굴과 마루바닥과 심지어 벽지에까지 은은하게 깃들어 있는 안정과 행복, 질서와 조화의 빛은 17세기 네덜란드화가인 페르메르가 이룩한 전통의 완벽한 소화입니다. 그러나 그는 페르메르를 넘어 빛과 어둠의 사상적 의미를 정확히 간파하는 경지를 보여줍니다. 페르메르가 추구했던 이성의 빛이 주인공에게만은 역광의 그늘과 극한 긴장으로 내몰아 세우는 어둠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 모든 불안과 긴장의 근원이 안이 아닌 밖으로 부터 연유한 것임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10여년전 원작을 마주했을 때 맘대로 울지도 못하게하고 맘대로 감동하도록 허용하지도 않던 그 비극미가 출소 후 작업실의 화집을 정리하며 다시 밀려와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130년 전 그림의 장면이 제가 출소 후에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 것은 왜일까요? 아직도 국가보안법이란 멍에를 안고 귀가해야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은 우리의 시대와 130년 전의 시대가 근본에서 바뀌지 않은 그 무엇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계몽과 혁명을 거쳐 보지고 못했고, 식민잔재를 청산하지도 못했으며, 진정한 해방을 경험해보지도 못했으며, 전쟁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평화의 가치에 대해서도 사색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활기찬 성장과 그에 따르는 배려를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외양은 선진국과 비슷해졌지만 내면에서 그같은 파란과 역정의 과정이 생략되었을 때 앞으로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누군가는 이 그림 앞에서 자기의 상황과 동일시하는 이가 생겨날 지도 모릅니다.

재판이 끝나기 전이나,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공안기관은 이미 충분히 성공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을 안보의 이름으로 사회에서 배제시키고, 또 그 배제와 소외를 사회가 수용하도록 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질은 다른사람에게 옮겨야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학질을 옮기 전까지 사람들은 학질을 피하지만 막상 옮은 다음에는 다른사람에게 옮기려 드는 것처럼 무서워서 피하든 귀챦아서 피하든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국가보안법의 전파자가 되고 전파되는 것의 방관자가 됩니다. 시민사회 역시 이에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모두진술에서 우리몸의 중심은 아픈곳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출소후 저의 생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픔보다 더 가혹한 것은 소외입니다. 아픔은 그래도 소통되는 상태이며 이미 치유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소외는 아픔이면서도 아픔으로 표현되지도, 인식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란 점에서 가장 가혹한 고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