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진술 – 5 고통의 바다 6 간절함 2008/01/10 832

고통의 바다
고통은 소외를 발견할 수 있는 통로이자 계기입니다. 아픈 부분만을 볼 것이 아니라 아픔을
통해 아픔을 소통시키고 있지도 못한 숨어있는 구조전체를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방에
서 아픈부위가 아닌 다른 부위에 침을 놓는 것은 이같은 원리의 치료방법일 것입니다. 아픈
곳에만 집중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전체구조를 간과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대신 절망에 낙관대신 비관에 집착하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점에 이르러 왜 인류의 스승들은 ‘고통’만이 아닌 ‘고통의 바다’를 언급했는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세상살이에는 세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지주의 방법, 장사꾼의 방법, 뱃사람의 방법입니다.
지주는 땅에 울타리를 치고 토지의 이름으로 나아가서는 영토의 이름으로 경계를 확정하는데 골몰합니다. 그는 그 울타리안에서 군림합니다. 비가오지 않으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합니다. 굿은 비를 내리게 하는데 아무런 물리적 도움이 안되지만 비가 안오는 것이 계기가 되어 불만을 품는 공동체안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유용합니다. 그는 울타리 밖의 세상에 대해 배타적이며, 강요든, 억지든, 설득이든 울타리안에서만 소통이 되면 그만입니다. 가장 공고한 관성과 제도를 선호합니다.

장사꾼은 울타리를 거부합니다. 자기와 뜻이 맞지 않아도 어떻게든 상대방과 소통하여 물건
을 파는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심지어 사기를 칠 때조차도 상대방과의 합의와 소통이 필요합니다. 장사꾼은 소통과 교환을 법이나 폭력으로 막지 않는 시장이 있으면 됩니다. 또 그런시장이 막히거나 없을 땐 만들어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뱃사람은 아무런 경계도 없는 곳에서 자연의 거대하고 불안하며 끝없이 변화하는 구조에 민
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장사꾼은 소통되는 곳만 찾으면 되지만 뱃사람은 소통되지 않는 숨겨진 구조까지 대비하지 않으면 방심하는 순간 목숨을 잃습니다. 고통의 땅이나 고통의 시장이 아닌 고통의 바다를 응시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통은 이미 소통되고 치유되고 있는 것이지만, 소통조차 되고 있지 않은 숨어있는 고통, 관성의 이름으로 스스로 외면하고 있는 고통의 구조 전체를 통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땅위에선 우공이산과 필사즉생의 신념과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그러
나 바다에선 내가 상대방의 배를 끌어당기는 만큼 나 또한 끌려가게 됩니다. 작용만이 아니
라 반작용까지 생각해야하는 공간인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사수론자는 신념과 힘만 갖추고 있으면 불순분자를 타도하고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울타리 안에서는 맞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작용과 반작용이 모두 존재해온 바다와 같은 역사에선 전혀 맞지 않는 생각이었습니다. 재판중에 진술했듯 헌법3조 영토조항-수복지구론-반국가단체론-국가보안법으로 이어지는 안보이데올로기체계는 1953년 혈맹인 미국이 국부인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에버레디계획을 세우게 했던 근본이유였습니다. 공산군의 위협이 아닌 미국의 위협은 영토조항-국가보안법체계가 존재하는 한 지속적으로 유지됩니다. 5029작전계획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것은 다시 확인 되었습니다. 1952년의 미국의 이승만제거계획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헌정질서를 파탄시킨데 대한 응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보이데올로기체제가 자유와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와 전체주의로 변했을 때 미국은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이승만을 제거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 대응과 이틀 뒤인 1월23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에 대한 미국의 과도한 반응으로 한미간의 갈등이 깊어졌을 때 미국조차 한국이 작전통제권환수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지만 결국 박정희가 미국특사와의 면담에서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간 것은 이승만제거계획에 깊이 관여한 당사자로서 얻은 학습효과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이 맘먹으면 얼마든지 유엔사를 통해 대통령제거계획에 돌입 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이 독재정권을 인정해주었으면서도 국가보안법등을 통한 인권침해문제를 지속적으로 문제삼을 것이란 점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내차원에서는 그토록 서슬퍼런 안보이데올로기체계가 국제차원에선 얼마나 상반되게 정권과 국가위기를 불러올 위협적 소재인지를 최고권력자들은 오히려 실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불은 나무에서 나왔지만 결국 나무를 태운다’는 직지심경의 문구는 국가보안법을 말단으로하는 안보이데올로기체계의 내심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비유일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을 바다와 같이 전체구조에서 놓고 보면 작용뿐아니라 반작용이 얼마나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저는 보수, 우익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인 박정희의
어록을 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주체사상에서 쓰는 것으로 알려진 용어와 개념이 여과 없이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몇 개의 보기를 듭니다.

“모든 일은 모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루어지고, 그결과 역시 사람에게로 귀결된다. 무
슨일이거나 사람의 머리와 사람의 손으로 출발되어 흥하는 것도 망하는 것도 결국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행동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다.”
(혁명과업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 박정희대통령선집3:운명을 넘어, 신범식, 지문각, 1969, p102)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관계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다루는 관계입니다. 인간인 피지도자로
하여금 지도자에게 기꺼이 따르게 하는 가장 긴요한 요소는 지도자의 인간성 그것입니다…
솔선수범, 희생의 정신, 그리고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협조할 줄 알아야 하며, 아울러
성품이 고상하고 덕망이 뛰어나고, 언행이 일치하고 국가와 국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충성
해야만 합니다.” (혁명과업완수를 위한 지도자의 길, p58)

“민족이란 별것이 아니오, 하나의 커다란 가족…집안…인 것이다…혁명정부와 국민이 흉 허물없는 한 덩어리, 한 몸이 되어서 저마다 맡은 일을 다해 나가는 민족 단결이야말로 혁명과업을 보람있게 이룩하는데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혁명과업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p77-78)

“이렇다할만한 힘이 없는 우리민족에게는 무엇보다도 우리끼리 우리자신의 힘과 열성을 합
해서 (자력)갱생의 길을 향하여 다 같은 뜻으로 뭉쳐야 한다.”
(혁명과업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p82)

위 글들은 1969년 지문각에서 출간된 박정희대통령선집3에 나온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입니다. 가장 철저히 북한을 이기려고 한 지도자가 사용한 단어들만 보면 국가보안법상 찬양, 고무혐의를 받기 충분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말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법위에 선 절대권력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이 전체주의와 독재의 미소에 유혹되어 형평을 잃고 스스로 모순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국가보안법은 북을 상대로 한 법이지만 북을 위협하기는커녕 북을 더욱 기세등등하게 했고
정작 수많은 무고한 국민과 인재들만을 처형하거나 구속시키고 소외시켰습니다. 피해자가 북한이 아니라 언제나 남한의 국민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보이데올로기체계의 하위구조인 지뢰가 북한의 인민군이나 간첩에게 피해를 주는 대신 남한의 서민들만을 피해자로 만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국가안보의 암적존재라고 칭하는 주사파를 키운 것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역설
을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는 감옥에 있는 구속자들만이 아니라 국가
보안법을 사수하고 강화하며 구속자들을 감옥에 보낸 가해자, 집행자들임을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의 바다에선 작용과 반작용이 함께 적용된다는 사실, 그리하여 국가보안법을
더욱 강력하게 적용하고 유지시킬수록 한국의 자유주의체제는 위기에 빠진다는 역설을 이해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의 바다에서 예술과 미학의 기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의 봉합이 아닌 통찰을 통해 세계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었던 변방은 곧 중심이 되곤 했습니다. 중세유럽질서의 변방에 있었던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써 토마스아퀴나스의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를 열었으며, 3세기동안 이탈리아어를 유럽문명의 중심언어가 되게 하였습니다. 중세를 지탱해온 방대한 논리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술로 상상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인도불교의 최변방에 있었던 신라에서 의상과 원효는 신라를 불교사상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되게 하였고 궁예는 고대에서 중세로 나아갈 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역전의 단초를 마련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는 미학적 도상이었습니다. 유교중화의 변방이었던 조선에서 송강 정철과 겸재정선은 율곡이이를 발전시켜 새로운 성리학의 세계를 미학으로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단테처럼 한글을 아시아의 중심언어로 하는데까지 이르진 못했지만 조선내부의 중심언어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 데는 분명 기여한 바가 컸습니다. 이들이 변방에서 중심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가로막을 중심의 질서가 느슨한 변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라시아, 세계 냉전체제의 시발이자 최후의 변방인 한국은 중심보다 더 강한 냉전의 질서가 남아 있어 상상력조차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고통의 바다를 보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안의 퇴락한 샤먼의 주술이며 율법입니다. 이러한 주술이 필요한 사람들이 우리사회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샤먼의 주술에 의존하는 순간 바다에 뜬 배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으며 더우기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소통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바다위에선 작용이 반작용이 되고마는 역설을 통찰해야 합니다.

간절함
여의도를 출발하여 삼보일배명상을 하며 서강대교를 건너던 첫날 조각도처럼 날라와서 체온
을 깍아내는듯한 강바람을 만나야 했습니다. 한강이 얼마나 험악하고 거친 곳인가를 이전에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은 차를 타고 건넜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 거칠고 험한 것을 알게 된 것은 한강이 변한 것이 아니라 제가 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느려지고 낮춰지니 세상의 숨어있던 구조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그 세찬 북서풍의 와중에도 기적처럼 온화한 바람결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절한 자만이 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은 막막함입니다. 그 막막함 앞에서의 절박함입니다. 답 없는 질문이며 문 없는 출구입니다. 그리하여 시인 문익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역사를 산다는 것은 벽을 문으로 알고 걷어차는 일이다.’

아무도 벽에서 문을 보지 못할 때 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간절한 사람입니다. 그 간절함으로 역사에 제 몸을 던진 사람만이 작고 여리고 숨죽여 흐르는 숨어있는 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반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지루한 반복과 좌절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안의 결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고통의 바다를 통찰하고 결을 발견하며, 생존할 수 있는 자는, 그리하여 간절한 자입니다.
가래침도 껌자국도 담배공초도 조용히 머릴 대고 가까이 하면 다 제나름대로의 결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관성을 벗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눈으로 보니 오물일 뿐입니다. 그것이 곧 차별심입니다. 국보법사수론자도 고요히 다가가 경청하면 그 나름의 결이 있으니 경청할 일입니다. 서로가 담벼락을 마주한 듯 막막할지라도 간절하게 다가가고 또 다가가면 결국 우리는 모두 국가보안법의 피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성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절함은 드러난 아픔을 치유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아픔의 구조까지 통찰하기 위해 아픔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고통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아픔을 치유할 뿐아니라 아픔자체를 긍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과 고행은 몸 전체에 고통을 주지만 아픔은 몸을 절박하게 하고 조절하게 하며 제 스스로 미세한 결조차 발견하게 합니다.
예술가를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한 것은 저돌적인 시대의 선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감한 자
이기 때문입니다. 그 민감함으로 새로운 결을 만들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자가 민감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