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7 한강하구군사사2-병인신미양요시기 2007/01/12 2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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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하구 군사사 2-병인,신미양요시기
조선시대 한강하구 군사사
조선시대의 군사사는 임진란을 정점으로 그 전과 후가 구별된다. 조선전기의 국방체제는 고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다. 임진란 중에 도입된 척계광의 기효신서는 세조의 ‘진법’을 중심으로 성립된 조선초의 군사이론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양대양요가 발생하기까지 조선군사체계의 골간이 되었다. 한강하구가 유라시아 체계와 충돌했던 병인, 신미양대양요의 고찰에 앞서, 조선으로서는 전인미답의 상대였던 서양의 군사체계와 조선의 그것을 비교해봄으로서 서양에겐 예고된 충돌이었고 조선으로선 뜻하지 않은 침략이었던 두 사건을 통해 한강하구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군사가 어떻게 유라시아체계에 대응했는지를 살펴보자. 특히 이들 사건에서 한강하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1885년 영국의 거문도점령은 공식적인 ‘점령’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앞선 양대양요보다 훨씬 노골적인 침략이었고, 영국과 러시아제국간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연장선에서 2차 격돌을 예고하며 세계대전으로 발전될 소지마저 가지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조선의 군사적 대응은 전무했다. 거문도는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조일양국의 해상통로는 물론 러시아의 태평양진출의 요충지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었으며, 영국으로서는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공격지로서 더 없이 중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거문도는 당시 유라시아 양대 제국 해군력의 지정학적 충돌점이었던 셈이다. 조선은 이에 대한 판단이 전무했다. 조선의 유라시아지정학의 지식이 미치는 범위는 한강하구였던 것이다.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임란이후 변화된 청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법에 의한 조선 군사체계의 결정적 시험대였으며, 근대서구 군사체계와 충돌하게될 200년을 규정한 사건이었다. 양대양요이전에 병자호란을 살펴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조실록은 병자호란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도(강화)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허세로 떠벌린다고 여겼으나 제로諸路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유수 장신에게 통솔하도록 명하였다. 충청수사 강진흔이 배를 먼저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연미정을 지켰다. 장신은 광성진에서 배를 정비하였는데 장비를 미처 모두 싣지 못했다.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이 제영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 수십척에 실은 뒤 갑곶진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 강진흔, 김경징, 이민구등이 모두 멀리서 보고 도망쳤다… 중군 황선신은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 적이 성 밖의 높은 언덕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봉림대군이 용사를 모집하여 추격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한 채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얼마 뒤에 대병이 성을 포위하였다.(인조15년(1637) 1월 22일 임술)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들은 남한산성의 인조는 더 이상의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을 결심하게 되었다. 결국 강화도 전투는 조선의 항복을 재촉한 결정적인 전투였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도 고려의 몽골침략 때와 마찬가지로 강화는 최고의 보장처로 인식되었다. 태종실록에 경기수군도절제사 최용화가 강화 교동의 땅을 모두 군에게 속하도록 청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강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고려의 그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강화, 교동은 나라의 문호가 되므로 해구(왜구)가 기전(경기도)을 엿보면 반드시 이곳을 경유합니다. 그러므로 전함을 머물러 두어서 불의의 변을 방비하는 것은 진실로 적절한 계획입니다. 그러나 풍해도(황해도) 충청도의 연해 지방에 왜적이 불의에 나와서 갑자기 침입하면, 즉시 배가 나가서 뒤쫓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본래 군사의 양식이 없어서 반드시 군인들로 하여금 아주, 연안, 수원, 광주에서 급료를 받게 합니다. 이리하여 비록 그러한 일을 당할지라도 지연하여 기회를 잃는 것은 진실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또 전조에서는 불의의 사변을 만나면 온 나라가 강화에 입보하였었으니, 어찌 식량의 저축이 없이 그러하였겠습니까? 청컨대 두 고을의 전지 가운데 문선왕의 위전과 아록전 공수전을 제외하고 각품의 과전 2천3백70결과 여러 창고의 속전 7백20결을 육지로 옮겨서 지급하고, 이들 전지를 모조리 군자전에 붙여서 해마다 그 세입을 거두어 산성에 저장하여 불의의 변에 대비하소서” 임금이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니 모두 옳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집 473면 태종09/01/29임신 조선시대수군1 p129재인용)
병자호란 직전에도 인조는 강화부사에게 이르기를 “강도지역이야말로 국가의 의지처이니, 뒷날 난이 발생하면 반드시 그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경은 인화에 힘쓰고, 군졸을 잘 돌보도록 하라. 그리고 곡식도 저축하도록 노력하라”(인조실록 인조3년 2월14일 계사)고 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해도입보 전략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대사간 윤황이 상소하기를 “우리나라는 사방이 수천리로서 토지가 넓고 인민이 많기가 저 오랑캐에 비해 곱절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단지 강도만을 보장처로 여겨 궁궐을 수축하고 창고를 채워 피란할 계획만 하고 있으니 임시만 편안하게 지내려는 계책은 세웠다고 하겠으나, 팔도의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인조실록 인조14년 2월10일 을유) 이에 임금이 마땅히 계책을 시행토록 하였으나 윤황의 주장이 실제 실행된 흔적을 발견키는 어렵다. 고려로부터의 산성입보, 해도입보 전략은 큰 변화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군편제를 우선 살펴보자.
한강하구 즉 경기지역을 담당하던 지방군은 육군인 속오군과 수군인 기선군이 있었다. 속오군은 강화 진무영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수군은 경기수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권148) 경기조에는 강화의 수군 규모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좌도 수군 첨절제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은 남양부 서쪽 화지량(花之梁)에 있고,<중대선(中大船) 3척과 쾌선(快船) 10척, 무군선(無軍船) 13척을 거느리고 강화를 수어하는데, 장번수군(長番水軍:장기상근자)이 69명이요, 각관의 좌·우령(左右領) 선군(船軍)이 총 1597명이다. 대개 배 1척에 각기 땔나무와 물을 실어 나르는 삼판소선(三板小船)이 있으며, 그 무군선은 만일 경급한 일이 있으면 영선군(領船軍)을 모두 징발하여 태우는 것이니, 뒤의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우도 수군 첨절제사영은 교동현 서쪽 응암량(鷹岩梁)에 있고, 쾌선 9척과 맹선 3척과 왜별선(倭別船) 1척을 거느리고 교동을 수어하는데, 장번수군이 295명이요, 각관의 좌·우령 선군이 1018명이다. 정포만호(井浦萬戶)는 강화부 서쪽에 있다. 쾌선 11척, 무군선 10척이요, 강화 장번수군이 246명이며, 각관 좌·우령 선군이 924명이다.(세종실록지리지/권148.경기조)
쾌선은 왜구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개발된 것으로 속력을 내기 위해 무게를 줄인 소선으로 중대선보다 효율적인 배이다. 맹선은 전선戰船이긴 하나 임진왜란 때 전선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결국 어로용(漁撈用) 선박으로 전용되었다. 왜별선은 왜관의 왜인들을 감시하던 배로 전선의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세종 당시 전선으로 이용 가능한 선박은 결국 33척 정도가 있었던 셈이며, 강화주둔 선군의 총수는 약 3.5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조에서도 해도입보의 중요성이 그토록 강조됐음에도 불구하고 1627년 정묘호란 당시 경기와 충청도의 전선은 20척이며, 화포는 부족하지 않았으나 연습이 잘되어 있는지는 자신하지 못해 주사대장이 검열하겠다는 기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실전배치에는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병자호란시 충청수사 강진흔이 전투 당일 지휘한 배는 단 7척이었다. 그것도 강진흔은 경기수사가 아닌 충청수사였다.
수도경비 목적의 예비대 성격으로 충청수영과 경기수영을 합쳐 판옥선 및 거북선은 10척 가량이 있었으나 갑곶전투엔 참가하지 않았다. 강화수군의 전과는 정포만호 정연이 적선 1척을 격침시킨 정도였고, 휘하의 배도 많아야 4척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대와 비교하여 군비가 오히려 후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광성진에 강화유수 장신이 지휘하던 경기수영소속 전선이 일부 있었지만 갑곶에서 집중포화를 받으면서도 버티는 충청수군을 돕는 대신 도망가고 말았다. 문신이긴 하나 장신과 김경징은 전시지도자로서의 책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았고, 결국 패전의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이었다. 충청수군은 청군의 해안포대 앞에서 하루를 버티며 싸웠으나, 탄약이 떨어져서 결국 충청수영본영으로 후퇴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괴멸당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조선초 수군의 상황을 알아보자. 수군은 원전元典에 따라 위로하는 방법의 근간을 삼았으나 이는 실제에선 지켜지지 않았고 수군으로서 가장 중요하다할 선상훈련을 미룬 채 온갖 잡역에 동원되고 있었다. 다음 기사를 보자.
의정부에서 판중추원사 이순몽의 상언으로 인하여 아뢰었다. “선군이란 물위에 그 목숨을 붙이고는 국가의 번리藩籬의 구실을 하고 있고, 그 임무가 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을 아끼고 위로하는 방법이 원전元典에 실려 있되, 지극히 엄밀한 바 있습니다. 근래 승평한 날이 계속되고 연해에 불우의 변이 없으므로 해서 선군이 일이 없다 이르고, 무릇 역사役事만 있게 되면 매양 이 선군을 사역하여 잠시도 휴식을 취할 때가 없으니, 선상에서의 방어하는 방법을 어느 겨를에 연습하며, 혹시 급변이라도 있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실로 무사할 때 위급한 경우를 잊지 않으며, 앞날을 염려하여 환난에 대비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비옵건대 이제부터 경기 각 포구는 지정한 진상용 물선과, 각 관아에 납부하는 물건을 제외하고는 기타 경외의 대소 공역에 일체 선군을 사역하지 말 것이며, 각 고을에서 성벽을 축성한다거나 목장의 목책을 수즙하는 등의 일도, 모두 농한기에 평민을 사역시키고, 매년 장빙藏氷하는데도 또한 선군을 사역시키지 말고 병조로 하여금 경기, 강원, 충청등 상도 각고을의 연호군을 적당히 이에 배정하여 사역시키며, 경기의 부역도 이를 적당히 헤아려 타도로 옮기고 그 선군은 모두 장대하고 용맹있는 정군으로 입역하게 하고는 선상에서 적을 방어하는 방법을 매일 연습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20/08/09신유 원전 4집159면, 조선시대 수군1 p423-424 재인용)
이같은 상황에서도 강화수군의 질은 가장 높은 것이어서 다른 도의 기준이 되고 있었다.
평안도 도절제사가 치계하였다…본 도의 수영 병졸들은 배질하는 것을 익히지 아니하고 병선을 항상 육지에 두고 단지 매달 그믐때와 보름때에 배를 띄울 뿐이오니, 만일 왜변이 있더라도 소용없는 것이 될 뿐입니다. 이제부터는 본도 세곳의 수영을 경기좌우도의 예에 의하여 강화의 교동에 소속된 천호, 만호중에서 배질하는 데에 익숙한 자 6인을 뽑아서 영선으로 임명하고, 그 병선이 정박할 수 있는 곳과 여러 섬의 수로의 굽고 곧은 것을 살피게 하여 선군을 항상 연습하게 하소서(세종21/03/19 정묘 원전 4집 197면 조선시대수군1 p431 재인용)
이뿐 아니라 강화 수군은 그 역할의 중함 때문에 급료도 많이 지불 되면서 이러저러한 군사적 중임을 수행해야 했다. 경기의 구황미를 조운할 때에 강화의 교동 선군중 물에 익은 자를 뽑아서 매 10척에 한명을 정하여 진무라고 이름하고 배를 지휘하여 오게 하였는데 그것은 이들이 풍수의 변화를 잘 알 뿐아니라, 뱃사람의 꾀를 잘알기 때문에 배가 상하게 하는 일이 없고, 그들이 간사한 꾀를 부릴 수가 없어서 단 한말, 한되의 쌀도 유실되지 않게 하였다거나, 육군 10인이 수군 1명을 당해내지 못한다거나, 다른 도의 수군은 한달에 한번씩 돌아가며 근무하는데 비해 강화수군은 합번하여 운영하자는 주장이 나온다거나 하는 것은 강화수군의 지위를 가늠케 하는 기록들이다.
이제 육군에 대해 알아보자
염하를 넘어 파죽지세로 강화성까지 밀려온 청군은 먼저 화포로 집중사격을 가한 후 운제와 당차등 공성무기를 동원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조선군도 총포와 화살로 대항하여 오후 내내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청군의 포격에 성벽이 무너지고 문루가 파손되었다. 북문 방어망이 먼저 붕괴되어 돌파구가 형성되었고 이어서 동·서·남문의 수비도 무너지자 청군이 일제히 성내에 돌입하였다. 남한산성과 갑곶에 등장한 청군의 홍이포는 서구의 포를 도입하여 만든 것이었고 조선으로서는 처음 보는 무기였다. 향후 서구와의 싸움이 공성포격전이 될 것을 예감할 수 있는 전투였으나 조선은 홍이포를 모방하는데 그쳤을 뿐, 그 운용과 수성책을 고민해 보지 못했다. 조선에서 포는 육군보다 수군에 더 익숙한 무기였다.
실록의 병자호란 기사에 의하면 육군인 중군의 황선신이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고 적고 있다. 각 영의 군영의 체제는 특이해서 최고직인 대장이나 사(使)는 무장이기보다는 비변사당상(총융청)·병조판서(훈련도감)·유수(수어청)등이 겸임하는 행정직인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영(營)마다 전문 무장인 중군을 별도로 둔다. 그러니 황선신은 유수 장신의 지휘를 받는 것이다. 중군은 지방군인 속오군을 이른다. 경기도의 속오군은 모두 총융청(북한산성중심의 수도방어), 수어청(남한상성중심의 수도방어)과 강화의 진무영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또 속오군은 수는 적지만 경기수사가 겸하고 있는 3도 통어영과 영종첨사가 겸하는 방어영등에 편성되어 있었다. 이는 다른 수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한국의군제사 p153 김홍편저 학연문화사)
속오군은 임란이후 생긴 체계이다. 조선초에는 진군이 있었다. 태조는 1397년 각도에서 요새가 될 수 있는 곳에 진을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이는 특히 남방해안지역의 방어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진의 설치로 국방군으로서의 지방군이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고 조선조 지방군인 진군의 성립을 가져왔다.
중종이후 진관체계는 제승방략制勝方略체계로 대체되어갔다. 이는 응급상황에서의 분군법으로 각 진관의 독자성을 살려 스스로 싸우고 지키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체계와 달리 유사시에는 각읍 수령에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서 공동대처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경우 후방지역에는 군사가 없어 1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막을 방도가 없는 일종의 총력 방어체계인 셈이다. 방어지에서의 지휘권은 도원수, 순번사, 방어사, 조방장등 중앙으로부터 임시로 파견되는 경장과 그 도의 병사 수사가 제각기 가지고 있었으며, 수령은 인솔의 책임밖에 없었다. 이런 제승방략은 남방에 일어났던 중종때의 삼포왜란에서 시도하여 명종10년 을묘왜변이후 시행되었다. 중앙경장의 파견과 비전투원까지 동원하는 거국적인 군사체계였으나 임진왜란시 이일의 패배등으로 보아 이것도 제구실을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진관체계의 자전자수의 전술에서 제승방략 전술로의 이행은 소규모의 국지전에서는 막을 수 있었으나 대규모의 전면전에서는 거의 구실을 다하지 못했으며, 그리하여 전란중에 유성룡이 진관체계의 복구를 주장하였고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지방군사조직의 재정비로 속오군이 설치되었던 것이다.(한국의군제사 p119 김홍편저 학연문화사)
속오군제는 명군의 내원으로 알려진 명장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타나 있는 부대편성방법으로 향리단속을 근저로 하여 방위의무를 양반층과 공사층에게까지 확대하고 거주지 중심으로 군사를 편성 훈련함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다. 속오군은 가장 시급한 포수 살수의 양성에서부터 성립되기 시작했다. 당시 들어온 명군은 절강성등 남측지방의 왜구를 방어하던 남방비왜법인 절강병법에 의해 조직되고 포수,살수,사수의 삼수기예를 구비했으며 속오편제가 적용된 군대로서 선조26년 정월 평양탈환전을 통해 그 진가를 평가 받고 있었다. 체제는 진관체제이지만 군사지휘권과 조련권은 아직도 중앙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선조 28년(1598)10월 유성룡이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의 도체찰사가 되면서 이 지방의 속오군 조직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속오군의 훈련은 아무런 국가적 보수가 없었고 속오군 자신이 양식과 말을 부담했다. 따라서 속오군은 지휘자의 위계질서의 혼란과 훈련에 대한 무보수로 임시성을 극복하지 못했고 양민은 보장도 없이 혼자서 두가지의 역을 짊어지게 되었다. 임란 후 지방군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면서 속오군의 연습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고 더욱이 조정이 속오군의 다소로써 수령을 상벌했기 때문에 수령들이 수채우기에 급급하여 노약잔질자가 속오군의 대부분이었다. (한국의군제사 p151 김홍편저 학연문화사)
결국 병자호란 때 속오군은 지방 방비를 하지 못하고 청군이 10여일 만에 서울에 입성하는 허점을 드러냈다.
척계광의 기효신서
조선전기에는 세조가 편찬한 ‘병장설兵將設’과 성종대의 ‘진법陣法’에 따른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간행만 성종대에 된 것일 뿐 원저자는 역시 세조였다. 병장설이 병법에 대한 원칙을 실었다면, 진법은 군사훈련과 작전의 실제를 담고 있었다. 영조대에 이르러 이들을 종합하여 ‘병장도설兵將圖設’을 복간하였으나 당시 척계광의 기효신서법을 전용하고 있었으므로 군제및 군사조련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세조의 ‘진법’체계가 임란 후에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체계로 완전히 장악된 상태였다. 따라서 척계광의 병법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왜란과정에서 척계광의 절강병법을 받아들인 조선군은 삼수병(포수 살수 사수)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후 호란과정에서 삼수병제의 문제점을 인식한 이후에는 마찬가지로, 척계광이 계주총병으로 재직하며 몽골족과 싸우는 과정에서 도출된 “연병실기”의 체제를 활용하고자 시도한다. 임란이후 기효신서의 군대 조련방법을 요약하여 만든 병학지남은 정조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교정이 이루어지고 17세기 이후 연병의 기본 지침서가 된다. 더불어 각 병영에서 간행된 많은 이본이 존재하는데 그중에는 강화도에서 간행된 책도 있어 강화의 군대 역시 기효신서와 병학지남의 훈련체계를 따랐을 것은 자명하다. 그 뒤 이상정이 편찬한 병학지남연의는 병학지남에 대한 해설을 시도하면서 중국의 고전 뿐아니라 어린 나뭇꾼들의 말까지 인용하여 철저함를 기했다. 물론 “연병실기”의 거기영제도는 실제 실현되지 못했고 오히려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과 기병의 강화를 추구하긴 했지만, 군사체계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척계광이 조선후기 군사체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척계광의 기효신서, 연병실기는 극히 제한된 상황의 전투사례에 기인한 것이다. 기효신서는 절강에서 왜구집단을 대상으로 교전을 벌인 것인데, 그 형태는 우월한 화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이를 근접시 방호하는 수단으로 소집단 무예를 활용하는 것이며, 연병실기는 북방의 유목민족을 대상으로 하여 전차를 활용하여 화기를 기병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정조는 ‘병학통兵學通’을 간행케 하는데 그 발문에 ‘영조의 속병장도설이 체이며 정이며 경이라면 병학통은 체용지설이요, 기정지비요, 경위기밀’이라 하여 이책이 병장도설과 속병장도설을 집대성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1776년 군영의 진치는 훈련, 남한산성의 훈련, 통영수군의 훈련에 병학통을 준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보아 이 책은 간행직후부터 군사훈련교범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90년 정조의 명에 의해 이덕무등이 간행한 ‘무예도보통지’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모원의 소전을 다루었으며 전투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전훈련서로서 이에 의해 조선의 무예는 24반무예로 최종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무예는 실전전투에서는 실용되지 못하였고 다만 군사훈련이나 무과시험과목으로만 활용되었다.
서양의 군사
개개인의 무예와 소집단 단병접전을 발전시키는 조선후기의 군사체계는 이미 유럽 근대 전쟁사에서 점차 소멸되어가는 과정을 거친 과도기적 전례와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또한 화포와 수총의 도입과 활용이 유럽에 비해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화약취급을 군사기밀로부터 서서히 해제해가면서 다양한 실험과 전술운용에 적용한 유럽에 뒤처지게 되었다.
또한 공성포에 노출되는 성벽면에 돌출부를 많이 두어 노출부를 줄여간 유럽의 축성체계에 비해 실학자들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수원화성조차도 성벽의 높이만을 고려하여 오히려 공성포격을 받을 수 있는 면적만을 넓힌 결과가 되어 서유럽군사체계로 이전해 가기 전의 폴란드나 러시아의 과도기 축성체계와 유사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의 군사체계는 18세기 들어서의 상대적으로 확연한 우위에 서기 시작한 유럽군사체계가 아닌 16-17세기의 유럽 군사체계에 비교해도 확연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척계광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온 조선 군사체계는 병인, 신미 양대양요에서 처절하게 그 한계를 노출시킬 수 밖에 없었다.
절강의 왜구나 계주의 몽골기병 모두 당시 척계광이 대규모 정규군을 그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으며, 적이 화기로 무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월한 화력을 제한된 적에게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추구한다. 기효신서는 척계광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기병에게 취약하며 대규모 정규군에게 통용된다고 하기 어렵고, 연병실기는 야포를 지닌 적에게 취약하다. 조선의 축성체계 역시 공성포로 인한 위협에 심각하게 직면한 경험이 없이 양대양요를 맞게 된 것이다.
전략, 전술이나 훈련도 중요하지만 전쟁력의 성패는 병참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는 병참문제를 알아보자. 조선후기 1일 성인남성의 최소식사량을 1되로 잡았을 때,(정약용의 민보의에서는 평시에 1일 1되, 전투시에 3되를 제시) 최소 414g에서, 최대 477g의 쌀을 소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를 훈련도감의 편제상 1개 대, 즉 10명의 1대에 1명의 복마卜馬군이 편제된 구조에 따라 적용될 경우에, 1필의 짐말 즉, 복마가 지게되는 60kg의 무게를 비교하면 편제상 어느정도의 병참이 가능한지 추정이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 복마가 소비하는 콩을 고려해야 한다. 콩의 경우, 대두로 추정되는데, 1리터당 0.75kg정도의 무게를 가진다. 현대 말 한필의 1일사료 섭취량은 9kg으로 이중 농후사료인 곡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50%로, 4.5kg의 곡류를 1일에 섭취해야한다. 또한 훈련도감의 말 보유자에 대한 추가 봉급은 쌀이 1말, 콩이 9말이다. 이중 콩이 사료용인 걸로 추정할 경우, 최소한 대두기준으로 46kg에서 53kg을 1달 동안 섭취하고 최소로 잡았을 때 1일 콩류의 섭취량은 1.53kg이다. 이것으로 계산할 경우, 포수든 사수든 1개 부대를 구성하는 10인과 복마군 1인, 즉 11인의 식량인 약 4.5kg과 말사료용 콩 1.53kg을 합한 약 6kg정도가 1일 필요한 곡류라고 할 수 있다. 말이 기준량 60kg을 실을 경우, 보급량은 10일을 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만기요람 군정편에 따르면 훈련도감에는 470필의 전마와 334필의 복마가 있었다. 병력은 5801명의 병력이 편제되어 있었다. 복마 334필은 규정상 20톤 정도를 수송할 수 있다. 훈련도감 전체의 식량소비량을 추산하면 먼저 1일 소비되는 말사료용 대두가 1224kg, 일일 2끼, 중간체격의 남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 2401kg이 소비된다. 총 소비되는 곡류는 1일 3625kg으로 이 경우 훈련도감이 행군을 개시한 6일째에 식량 및 마초가 모두 소모된다.
여기에 복마는 추가로 여분의 화약과 탄환을 비롯하여 만약 화포를 지참한다면 더 힘들어지며, 개개인의 병력은 번갈아가며 거마창(적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 날카로운 창을 여러 개 묶어 세워놓은 것)이나 녹각목(나무줄기를 사슴뿔처럼 뾰족하게 다듬어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을 지참할 의무가 있었다. 즉 조선군 최정예군인 훈련도감 병력의 평시 작전 가능일수는 10일 이하일 가능성이 높다.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history2&mode=read&num=12444&page=0&ftype=6&fval=&backdepth=3 2006.7.9일 검색)
이는 단지 군량문제에 집중되어 있으나, 조선군의 병참능력상의 문제는 화약이나 탄환, 화살과 같은 소모품에서도 가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군의 병참사정은 병자호란과정에서도 드러난다. 1637년 화강백전(화강은 김화의 옛이름이고 백전은 잣나무 숲으로 지금의 김화북쪽 비무장지대지역)전투에서 류림은 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하루내내 격전을 벌였고 해가 지자 탄환 및 화살의 부족으로 야음을 틈타 적을 기만하고 후퇴했다. 단 하루만의 교전으로 인해 화기위주의 조선군이 교전을 지속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는 전라병사 김준용의 전라도 근왕병 선봉군 2000명은 1월 4일에 광교산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군량등 군수물자를 비축했다. 전투는 1월 5일부터 6일까지 청군의 지속적인 공세를 조선군이 격퇴해내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6일 밤 김준룡은 식량과 화살의 부족으로 인하여 후퇴해야 했다. 3일만에 2000명의 선봉군이 보유하고 비축했던 군량 및 물자가 소모되어 전투가 중단되었던 것이다.
현종 6년(1665년) 5월 8일, 통제사 정부현에게 강화도로 불랑기등 무기를 보내게 한 기록에 따르면 불랑기 50문을 보낼 것을 지시한 기사가 있다. 유럽에서는 15세기 초반에 이미 근대적인 포가가 등장한 상황이었다. 부르고뉴군은 1430년대에 이미 Serpentine포를 사용했는데, 50mm에서 150mm수준의 구경과 7피트(213cm)정도의 포신길이에 양륜을 가진 근대식 포가에 설치되었다. (Nicholas Michael, G A Embleton, OSPREY “Armies of Medieval Burgundy 1364-1477 재인용)
1430년대에 그려진 현재 루브르에 소장된 후스파 군대의 전투도에는 양륜의 근대식 포가에 설치된 화포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15세기 초의 포가의 등장을 통해서 유럽은 대구경 화포에 기동성을 부여할 수 있었고, 공성전에서 확연한 위력을 드러내는 16세기 초 이전에 이미 야전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대구경화기의 야전투입이 가능해졌다.
조선의 경우, 근대식 포가는 독립기념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는 1869년에 운현궁에서 제작된 대포, 중포, 소포의 포가다. 훈국신조기계도설에는 신헌이 고종 5년 1868년에 제작한 불랑기 동거가 수록되어 있는데 아래쪽에는 4개의 통나무바퀴가 달린 직사각형의 나무판위에 활차를 고정시키고 그 위에 불랑기를 싣는다. 그리고 이 책에는 이어서 쇠 위에는 좌우로 수시로 돌 수 있도록 조작해서 적군으로 하여금 회피할 수 없게 한다면 과거에 비해 어찌 신무기가 아니겠는가?(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학예지 제10집. 2003 p254)라고 자문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와 비슷한 장치가 제작되었는데, 여전히 근대식 포가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실패작으로 평가된다. 근대식 포가나 수레가 없다면 야포의 야전활용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친다. 1450년 4월 15일 프랑스 Formigny평야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직면하여 프랑스는 대포를 중심으로 한 기병전술로 영국군의 무적을 자랑케 한 장궁-보병전술을 무력화 시켰고, 프랑스군은 이 성공을 스페인군을 상대로 다시 이룩한다. 신분상 귀족들만이 될 수 있는 기병장교가 될 수 없었던 포병장교, 나폴레옹은 포격술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고 더욱 개선된 포격술을 창안하게 된다. 그의 방법에 의하면 일정한 보병부대를 목표로 하여 집중적인 포사격을 계속하다가 그 보병부대가 약세에 물리면 대검을 가진 아군 보병들은 적 보병의 가장 취약점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풍부한 탄약과 더욱 신속한 기동력 때문에 이러한 전투과정을 반복할 수 있었으며 충격효과를 노려 이미 배치해두었던 기마병이 이때에 기습출동하여 패배 후 철수하는 적을 대혼란에 빠뜨려버린다. 이 방법이 전통적으로 나폴레옹이 사용해 승리를 거두었던 방법이다. 100년 전에는 이 방법을 적용하기 힘들었으나 100년 후에는 아직도 이 방법이 전쟁터에서 기본전술로 되어 있었다.(전문직업군p100-101,존히키트,한원)
이같은 개선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산업혁명이 있었고, 금속생산의 획기적 증가의 결과로 포를 점점 많이 사용하게 되었으며, 사격의 정확도와 사격속도가 증가했기 때문 이었다. 프랑스는 처음으로 수학을 군사목적에 응용하기에 이르렀다. 대포의 무게를 줄이게 된 것도 개선된 설계 때문이었다. 그 결과 포병의 기동성도 향상되었던 것이다.
순조때까지, 훈련도감과 같은 중앙정예군에도 기본적인 병참체계가 구축되지 못하고, 수레도 무시 되었으며, 말위주의 병참체계가 유지되었다는 점은, 화기중심의 보병을 핵심으로 한 조선군의 군사체계가 단순히 전술운용상의 문제를 넘어선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민보사상
관군의 한계는 여기저기서 지적되고 있었다. 조선후기 관군만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되자 선각자를 중심으로 민보사상이 등장한다. 병조판서 당시 이이가 상소로 올린 국방책에 우선 주목해 보자.
양병은 양민이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양민을 하지 않고서 양병을 하였다는 것은 옛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나라 부차의 군대가 천하에 무적이었지만 결국 나라가 망한 것은 양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조발하려해도 조발할 군대가 없고 먹이려 해도 먹일 곡식이 없으니 아무리 슬기로운 자라 할지라도 어찌 재료가 없음을 핑계 삼지 않겠습니까? 이는 모든 색군사의 임무가 괴롭고 수월함이 고르지 않아 수월한 자는 그런대로 견디지만 괴로운 자는 도망갈 수 밖에 없는데 일단 도망을 가면 일족이 책임을 지게 되어 연쇄적으로 호가 번져가서 심한 경우엔 마을 전체가 몽땅 비는 사례까지 있게 되는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선조16/02/15/무술 원전21집385면 조선시대수군3-1 p199 재인용)
조선조의 전통적인 군사제도 운용원칙은 양인개병 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정네는 누구나 그 신분에 따라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양인이상, 모두 군역을 져야했다. 이 군역은 정남은 정병으로서 실역을 서거나 보충역으로서 실역복무에 소요되는 제반경비를 부담하거나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한국의군제사p102-103김홍편저 학연문화사)
그러나 역을 피해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고 같은 군역이라도 쉬운 역을 찾아 헤매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국가로서는 국방체제를 갖추기 위해 군액의 절대수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도망하지 못한 장정에게 이중삼중의 인징, 족징, 동징등의 부담을 지우는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같은 군역체계의 모순은 마침내 군역을 타인에게 대립代立시켜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이른바 대립현상의 성행을 가져왔다. 이런 대립의 폐단은 한사람이 몇사람을 대신하여 번상하고 담당관리와 협작하게 되니 국가가 가지고 있는 문서에는 군액이 확보되어 있었으나 실지로 모두 허액이었으며 근무자의 실질적인 수를 파악치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결국 대립을 공인하게 되었다. 이는 국가의 힘으로도 대립의 추세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방군수포放軍收布가 성행했는데 이는 각 지휘관들이 복무를 해야 하는 군인을 귀가 시키고 그 대가로 포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당초에는 일반 양정으로 하여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는 편리한 것이었으나 점차 군지휘관들의 사리추구를 위하여 강요되는 불법행위로 바뀌었다. 지방군중 방군수포의 현상이 맨처음 발생한 것은 수군이었다. 그만큼 수군의 역이 고통스러웠을 뿐아니라 세습적인 요소가 많았고, 연해의 각포는 행정구역과 관계없이 근처 연해민이 아닌 자로 충당하는 등의 모순으로 사실상 진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같은 군역제도의 붕괴는 국가가 군사들에 대한 경제적인 기반을 책임지지 않았으며, 또 군사지휘관의 녹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한국의군제사p106김홍편저학연문화사)
북벌과 군비확충에 집착했던 효종때부터 속오군에게도 수미, 수포법이 적용되어 점차 보편화되어 갔다. 그러므로 속오군의 편성체계는 사실상 마비되고 훈련이 몇 년동안 실시되지 않아 속오군은 유명무실의 상태에 빠져 제구실을 다하지 못했다. 속오군의 훈련을 받고 싶지 않으면 살, 포를 내면 되었고 이것을 내지 못하는 자들이 속오군이 되었다.
230여년간 외침을 받지 않은 조선은 군사문제에 대한 관심이 외침에 대비한 국가방위보다는 잠재적인 반란위협으로부터의 정치권력의 방위라고 하는 대내적인 정치목표에 두고 있었다. 이에따라 중앙군을 육성하고 지방군인 속오군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후기 쇠퇴한 속오군의 상태를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지금의 소위 속오란 것은 사노와 천민들을 구차하게 그 숫자만을 채운 것이며 어린아이와 늙은이들을 섞어 대오를 편성한 것이다. 전립은 깨진 오이와 같이 울퉁불퉁하고 전복은 등나무 덩굴이 얽힌 듯 난잡하며, 백년이나 묵은 옛 칼은 칼날없이 자루만 있고, 3대를 내려온 총은 화약을 넣어도 소리가 나질 않는다. 더구나 대오의 숫자는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까닭에 그 명부엔 사람과 귀신의 이름이 서로 섞여 있다. 이런 상태는 입법의 당초부터 그렇게 쇠퇴한 것이지 지금에 와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목민심서 병전육조 2조 군사훈련)
이는 속오군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으로 근본부터 잘못되었다는 평가이다. 그리고 그는 민보의民堡議에서 전혀 다른 국방대안을 내놓는다. 즉, 전국의 촌락을 요새화하고, 민간의 자발적이고도 엄격한 규율에 의하여 향촌사수방어의 전시 공동체를 구성하여 무수한 방어거점을 만들고, 적의 침공시에는 유격전과 청야전술로 대응한다는 것이었다.
홍경래의 농민전쟁에 대한 소문과 왜국의 침입이 있으리라는 유언비어가 남해안지방에 퍼지자 많은 백성들이 피난을 가는 사태가 일어났다. 정약용은 이러한 사태를 보고서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관군체계 대신 근대국가 초기에 나타나는 민병대 개념의 민간 자위체제를 구상했다. 그 모델은 중국 송나라 때의 궁전사弓箭社로 활 등 병기를 민가에 비치해 놓고 도적이나 외적의 침입시 주민들이 스스로 발동하여 방어하는 민간방위조직이었다. 선수후전(先守後戰)의 전법과 민간이 주도하는 민간자위의 전력구상책이 핵심적 이론이다. 민보는 군사적 거점일 뿐아니라 생활의 터전이 된다. 그는 민보의 위치선정을 위해 적합한 산세와 부적합한 지형들을 조목별로 제시하고, 축성법에 대한 지침사항을 조선의 풍토에 알맞게 정리했는데 이는 수원화성의 축성법을 통해 보여준 일관되는 논리이다. 이어서 민보에서의 각종 방어도구 수단을 소개하고, 사용법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으며, 민보방위의 조직과 내규, 규율까지 손에 잡히듯 세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민보의에 나타난 민보방위론은 19세기 이후 재야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어초문답漁樵問答, 민보집설 民堡輯說, 민보신편民堡新編등의 논저로 이어졌다. 조선에서의 민보사상의 대두는 근대를 예감하는 것임에 분명했으나 신분의 차등이 존재하는 기존 향촌질서의 개혁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그의 사상은 이른바 국민군 같은 군대조직을 지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군사3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p114 정하명,이충진 1981.12)
또한 유럽에서와 같이 국민군의 실현에 필요한 물질적 기초가 아직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 17세기엔 거의 없었던 현상인 일반국민을 군사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열의가 생기게 된 것은 여러 종류의 물질적 발전과 진보된 행정기술과 2세기 전에 비해 5배가량 늘어난 야전병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도 관계가 있다. 상파뉴의 시민군이 1792년 9월20일 독일의 발미(Valmy)에서 부룬스위크 백작의 고도로 훈련된 프러시아군대를 패배시켰을 때 현장에 있었던 괴테는 그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여기서부터 세계역사상 또하나의 새로운 기원이 시작되며, 이 획기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여러분들도 그 현장에서 지켜본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전문직업군 p101 존히키트, 한원 1989 )
전쟁터에서 대형군사작전을 하기 위한 기술적 요건들은 18세기말의 유럽에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 병인양요로 넘어가자.
병인양요
프랑스혁명은 국내에선 민주주의를 선사했지만 다른나라에 대해선 제국주의전쟁을 선사했다. 프랑스군대는 유럽 최강의 군대였다. 그러나 전쟁터엔 불확실성의 안개가 항상 존재하는 법이다. 막대한 병력과 숙련된 전쟁기술을 보유한 군대라 해도 전혀 뜻하지 않은 상대에게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병인양요는 프랑스군대가 목표했던 전략도 성취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전투에서도 패배함으로서 조선에게 패전한 전쟁이 되었다. 정약용시대보다 더욱 열악해진 조선의 군사력은 군량미조차 마련하기 힘든 상황에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양헌수 장군부대는 당대 최강의 프랑스군대와 일전을 벌여야 하는 압박 속에 있었다. 양헌수가 직접 쓴 하거집荷居集에 전하는 병인일기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1866년 9월 29일(양력 11월6일)
대군이 장차 이르면 불가불 저녁밥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민가라고는 다만 23잔호 밖에 안되어서 한되의 쌀도 빌릴 수 없었다. 밤에 이만규 이중윤을 대진으로 보내어 오늘밤에 바다를 건너지 못한 영유를 자세히 아뢰게 하고 뿐만아니라 양식이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했다.
조선의 군사력은 오히려 후기로 갈수록 더 열악해져 가고 있었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 기본 적인 병참조차해결이 안되는 열악한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병참과 무기 군대만으로 전쟁이 치러지진 않는다. 지휘자의 지략과 용기 군인들의 결단등 수치로 표현될 수 없는 비대칭적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헌수에겐 정족산성의 발견이 그것이었다. 다음 일기가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28일(11월5일)
나는 혼자 병졸 한사람과 노비2명을 데리고 도보로 속칭 손돌무덤가에 달려가서 공수供水하고 서서 말하기를 ‘과연 손씨의 영혼이 있다면 충분이 만고에 뻗칠 터이니 비옵건데 이곳을 지나는 적선을 전복시키기를 마치 문수산성에서 안개를 피워 군사를 보호한 것처럼 하소서’(음력 10월20일경에 부는 손돌풍전설이 있음) 또 스스로 마음속으로 맹서하기를 ‘혹 왕령을 짚어서 이 몸을 강화 일보지一步地에 바치게 한다면 죽어도 아무런 유감이 없겠습니다.’ 미친 듯 중얼거리면서 무덤 옆에 홀연히 앉아 있다가 바다 건너쪽을 주목해보니 강화 쪽에 홀연히 한 작은 산성이 우뚝 나타나 보였는데 반공중에 솟아올라 그 기색이 온화하고 길하며 다정하기가 마치 평생토록 친한 벗이 만나서 기쁘게 웃는 듯 하고 손을 저어 서로 부르는 듯하기에 즉시 뛰어 건너가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병졸에게 물어보니 그것이 정족산성임을 알게 되었다.
정족산성이란 요새를 발견하게 된 경위가 주관적이고 신비적으로 표현된 것처럼 볼 수 있으나 전장이란 구체적 상황에서 절박한 지휘자의 눈에 만 들어오는 빛은 예술가의 영감과도 같은 것이다. 김포와 강화의 지방군으로서 정족산성을 모르는 이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강화가 처음인 양헌수였지만 그에게만 유독 특별히 다가온 것이다. 이는 손자병법의 ‘치인’의 탁월한 적용이다. ‘당태종이위공문대’에서 이정은 고대병법의 수많은 구절중에서 아무리 중요한 것도 ‘치인이불치우인致人而不致于人(상대를 다스려야지 상대에게 끌려 다녀선 안된다)’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치인의 결과로 얻어지는 주도적 지위는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반드시 주체의 노력을 거쳐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싸우기 전에 ‘먼저 싸움터를 잡고 적을 기다리는 것이 제일 중요한 하나인데 이러한 적지에 대한 생생한 직감은 지식, 정보, 가치의 고도의 통일이다. 계속되는 일기를 보자.
포를 매설한 곳으로 돌아와 이이에게 산성을 가리켜 보여주었더니 두사람이 말하길 어제 이미 보았다고 한다. 내가 말하기를 “이야말로 조사趙奢의 북산北山이 될 만 하도다. 만약 량도(군량보급)가 끊어지지 않고 포수 500명이 바다를 몰래 건너가 잠입하여 점거한다면 적은 우리 손바닥 안에 있을 것이다”….“정족산으로 함께 들어감이 어떻겠는가” 두사람이 쾌히 승낙하면서 “좋습니다. 이를 말씀입니까 저들은 심도를 생방으로 삼고 있으며 심도 사민 수만명이 성의 이남에 모두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고기가 말라 들어가는 물에서 입을 오물거리는 것 같으니 영감께서 뜻을 굳혀 들어가 점거한다면 수만명의 생령이 이를 쫒아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감히 좌지우지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러한 뜻(작전계획)을 중군에 상세히 아뢰니 중군이 크게 기뻐했다.
조사의 북산에 대한 비유는 정족산성 전투의 성격이 서양군사철학과 동양군사철학의 충돌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북산에 대한 고사는 이러하다. 전국시대 진은 한을 치고나서 변경의 알여閼與에 진군하여 조나라를 위협하였다. 혜문왕은 장군 염파와 악승에게 알여를 구출할 수 있겠는가 묻자 모두 길이 멀고 험난하여 구출키 어렵다고 답했다. 왕이 조세를 맡아보는 조사를 불러 물었다. 그러자 조사가 답하길 “알여는 길이 멀고 험난하고 좁은 곳입니다. 비유한다면 두 마리의 쥐가 한 구멍 속에서 싸우는 것과 같아서 장수가 용감한 편이 이깁니다. 혜문왕은 조사를 장수로 삼아 알여를 구출케 하였다. 조사는 한단을 떠나 30리쯤 진군했을 때 군대를 모아놓고 명령했다. “지금부터 군사에 대하여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할 것이다.” 마침 그때 진나라 군이 무안 서쪽에 진을 치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니 그 소리에 지붕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척후병이 돌아와 조사에게 보고하였다. “지금 진나라는 무안에 집결해 있습니다. 알여 보다 무안을 구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조사는 그렇게 말하는 척후병을 그 자리에서 군령대로 참형에 처했다. 그뒤부터 아무도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조사는 누벽을 더욱 견고히 하고 한발짝도 나가지 않은 채 28일 동안 머물러 있었다. 마침 그때 진나라 간첩이 조나라 진영에 들어왔다가 잡혔다. 조사는 그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간첩은 진군에 돌아가 그대로 보고했다. “흐응 국도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누벽을 쌓고 앉아 있다니 조나라 장군은 바보 아닌가?” 그는 조사가 조세관리출신이란 사실을 알고 더욱 얕잡아보았다. 조사는 부장 허력에게 방책을 구했다. “여기서는 북산의 정상을 먼저 차지하는 군대가 이깁니다. 틀림없이 진나라군대도 도착 즉시 북산 정상에 오를 것입니다.” 조사의 군대는 군사 1만을 이끌고 북산 정상에 올라 이틀 낮과 하루밤을 기다리니 드디어 진나라군이 북산을 향해 진격해 들어왔다. 북산 정상의 궁수와 1만 군사는 무방비상태로 허겁지겁 산정상을 향해 오르는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진군은 올려다보며 공격을 가할 수 밖에 없어 불리했고, 조사의 군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공격하니 유리했다. 과연 주사의 군대는 진군을 대파했다.
치인의 방법은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해서 결정해야한다. 치인법은 正과 奇가 반복되어 변화무쌍하다고 했다. 이는 결정론적 사고방식이나 관성 대신 혼돈상태인 현장의 변증법적 적용을 의미한다. 때문에 관건은 장수가 때와 장소 적의 상황에 따라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느냐에 있다. 프랑스군대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기회포착적인 나폴레옹의 전투방법의 주도권을 여기서는 오히려 조선군에게 내어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 있어도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군사이다. 양헌수가 오합지졸인 군사들의 결심을 강제하는 과정을 보자.
10월 1일(11월7일)
나는 해가 진 뒤부터 군사를 점호하고 배에 오르게 하니 거개가 퇴보상태였다. 대개 300년 동안이나 전쟁을 모르고 살아 왔으므로 경군도 군율을 알지 못하고 있거늘 하물며 이러한 군대는 말할 것 없다. 지방포수는 오합지졸이라 도무지 깃발과 북으로 군대를 지휘함의 절제와 유진무퇴의 의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터에 갑자기 사지에 들어감에 있어서 위령威令을 함부로 실시할 수도 없었다. 나는 칼을 배어들고 독전하기를 “너희들은 배타기가 겁나는가 비겁한 병졸은 비록 십만이 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도다. 겁이 나면 모두들 가거라. 내 장차 홀로 건너가겠다.”고 말하니 그제서야 사졸들은 차차 승선하기 시작했다.
배수진이다. 원래 배수진(背水陣)은 중국 한(漢)제국 건설의 일등공신인 한신(韓信)이 구사했던 작전이다. 한나라 2년 그는 조나라 하북성 정형의 전투에서 이것으로 승리를 거뒀다.“죽을 곳에 빠뜨린 뒤라야 비로소 살게 할 수 있고, 망할 곳에 둔 뒤라야 비로소 멸망하지 않을 수 있다” 조나라 왕을 사로잡은 다음 한신이 장수들에게 한 말이다(사기 회음후 열전). 그러나 배수진은 함부로 치면 안된다. 역시 모든 조건이 맞아야 한다. 배수진이 실패한 사례는 조선 선조때 신립(申砬) 장군의 경우다.1592년(선조 25년) 그는 임진왜란 조령전투에서 부장 김여물이 고개에다 진을 치자고 했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고개에서 부딪치면 대단히 위험한데다 우리 군사가 아무런 훈련이 돼 있지 않은 만큼 사지(死地)에 갖다 놓기 전에는 용기를 내지 않을 것”이라며 배수의 진을 쳐야 한다고 우겼다. 그래서 달천(達川)을 뒤에 두고 진세를 펼쳤으나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의 대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참패했다.
양헌수 부대의 경우엔 이것이 통했다. 정족산성 계획은 운현궁에서도 저지하고자 했다. 군대가 승선할 때 운현궁에서 일의 조짐이 매우 묘하니 속히 회군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헌수 답하기를 “군대가 이미 승선했으니 중지시킬 수 없다. 만약 다시 회군한다면 이로부터 앞으로는 다시 용병할 수 없다.” 고 했다.
3일(11월9일)
진시(오전8~9시)쯤에 적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성에 올라 바라보니 적장 한명이 말을 타고 오는데 적병의 수는 수백명이나 되어보였다.(로즈제독은 정족산성에 농성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올리비에 대령에게 160명의 분견대를 인솔하고 정족산성을 공략하라고 명했다.) 적병은 동남 두문으로 나누어 들어왔다. 아마도 아군이 있는 줄 모르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적이 입구로 들어오자마자 적 3명이 동남문 사이에 있는 산기슭으로 올라와서 성벽을 기어올라 오려했다. 동문포수 이완포가 먼저 포를 쏘아 적 한명을 죽였다. 포성이 한방 울림에 동남에서 일제히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악을 진동했다. 동문에서 죽은 적이 2명 남문에서 죽은 자가 4명 이었다. 적은 갑자기 포성을 듣고 마땅히 경동할 줄 알았는데 조금도 물러날 뜻을 보이지 않았다. 동료가 죽은 것을 보자 왼손으로 그 시체를 이끌고 가면서 오른손으로 총을 쏘아대니 그들의 절제의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우리가 쏜 총알은 불과 백여보 밖에 안나가는데 적의 총 사정거리는 500보에 이르렀다.
분명 프랑스 군대는 조선군과 비교할 수 없이 잘 훈련된 군대였으나 조선군의 매복기습전 앞에서는 고전해야 했고 양헌수 군대 역시 시간이 갈수록 전세가 불안해져 갔다.
오후 2시경 아군이 말하기를 탄약이 모두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말을 듣고 군이 모두 실색했으며 나 또한 칼을 던지고 앉으니 정신이 혼몽해졌다. 모두가 어쩔줄 모르고 허둥지둥 하고 있을 때 적도 총쏘기를 중지하고 퇴주했던 것이다.
병참의 열악함이 여실히 들어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만일 프랑스군이 조금만 더 응전을 했어도 병인양요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참으로 절묘한 승리였다. 양헌수는 이를 지키고 싸우는 ‘어융방략’의 승리였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그 정수는 상대방의 허점을 예리하게 파고든 기습전이었고, 조선군이 강했기보다 프랑스군이 그 순간 약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추상의 군사력과 잠재역량이 아닌 현실의 승리와 패배만 허용되는 전쟁터의 논리로 볼 때 그것은 분명 승리였다. 전쟁의 승리는 정치목표의 성취에 의해 결정된다. 다음날 프랑스군의 전격적인 강화 철수는 조선군에게 전투의 승리와 전쟁의 승리를 모두 안겨준 결과가 되었다. 양헌수의 지극한 정성과 승리의 예감이라는 지휘자만의 독특한 능력과 이를 따르는 군사들의 자발적 결의, 민중들의 절박한 지원이 최강 프랑스군의 틈새를 벌리고 파열구를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조정과 민중들에겐 조선이 얼마든지 외세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만심이 모두 유포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오판은 신미양요에서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신미양요
신미양요는 미국이 남북전쟁을 끝낸 뒤 얼마 안되어 일어난 조선가 미국간의 1차 전쟁이었다. 병인양요를 승리로, 신미양요를 패배로 구분하는 상식에 더해져 남북전쟁은 미국군대를 세계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간혹 통용되나 남북전쟁이후 미국의 군사력은 오히려 더욱 후퇴했으며 다른 열강에 비하면 대체로 후진상태를 면치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군이 처한 사회적 고립상태를 거꾸로 군의 기본을 세우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정치적 암흑기이면서 군사적 황금기였던 시기에 미군사에서 가장 기록할 만한 전쟁의 하나가 신미양요였다. 병인양요 후 조선은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필사즉생의 각오로 싸웠지만 병인양요에서 작용한 ‘전쟁터의 안개’는 조선의 편이 아니었다. 초지진 야영지에 대한 이렴의 기습작전은 양헌수의 그것과 비견되나 미해병대는 기습에 대비한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상륙기세를 막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서구 근대군사의 최대 화두는 전문직업군 건설이었다. 미군의 전문직업화 속도는 부진했으며, 사실 영국보다도 훨씬 더 늦었다. 미국 헌법기초자들은 군의 전문직업화에 반대했다. 심지어 이 기초자들 중에서 한사람은 ‘나는 군의 전문직업이란 것을 아는바가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헌법 자체도 상당히 개방적인 특성을 띄고 있어서, 이 헌법에 비추어보면 군에서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혐오감을 일으킬 정도였다. 워싱턴은 그의 고별인사에서 부언하기를 ”국가는 정의감에 바탕을 둔 우리들의 이익여하에 따라 평화나 전쟁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밀턴의 보수주의적 연방제가 실패하자 미국에서 군의 전문직업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그대신 헌팅턴이 말하는 군사기술주의(military technicism) 비슷한 것이 발달했다. 각 장교는 민간인도 가지고 있는 어떤 전문특기분야에 정통하도록 요망되었으나, 동료 장교들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군사적 전문특기분야는 한정되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제퍼슨의 시민군 개념이 팽배해 있었으며, 이 시민군 제도하에서 정규군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남북전쟁때까지 군사직업과 관계되는 제반 제도들이 거의 발달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1802년 제퍼슨이 설립하여 미국의 기술교육 발전에 영향을 끼쳤던 미국육사(West Point)에서도 인문학은 거의 가르치지 않았으며 군사과학도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헌팅턴은 ”미국육사는 장군보다도 철도역장들을 더 많이 배출했다“ 라고 꼬집을 정도였다.
그 후 있었던 자유개방적인 잭슨시대에 와서는 군사문제에 대해 상당히 무관심했으며, 시민들은 어떠한 효율적인 정규군도 또한 능률적인 시민군의 필요성도 인식하지 못했다. 군대에서의 진급은 선임순에 의해서만 되었다. 육군에선 남북전쟁 때까지 퇴역제도가 없었다. 육군장교들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복무했다. 해군에서는 계급도 세가지 종류뿐이었으며 따라서 평생 진급은 두 번 밖에 없는 셈이었다. 남북전쟁 이전에는 이렇다 할 만큼 중요한 직업군인기관이 미합중국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군인과 국가, S.P.헌팅턴 p203 병학사)
미국의 남북전쟁은 전쟁발달사에 있어선 상당히 중요한 의의가 있으나 미군의 전문직업화 면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전문직업군 측면을 유일하게 지지했던 층은 남부 지역에서였는데, 남북전쟁 당시엔 남부에서 조차도 전문직업군 제도를 환영하지 않았다. 산업평화주의 사조는 ‘국제자유무역은 결국 전쟁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생각케 했으며, 카네기는 “오늘날의 무역은 국기에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최저가격이라고 하는 조류에 따르는 것이다. 무역에 애국심은 불필요하다” 고 말했다. 산업평화주의의 우세는 군사적인 것에 대해 모든 미국인이 공통적으로 철저하고 용서없는 적의를 가진 1865년 이후의 민군관계의 지배적인 성격을 형성했다. 많은 주에서 군인에 대해서는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의회의 군사정책은 산업평화주의 철학을 정확하게 반영하여 육군의 예산비용은 언제나 낮게 책정 되었으며, 남북전쟁시의 10억불을 초과하는 최고액으로부터 신미양요 당시인 1871년에는 3천5백만불까지 삭감되었다. 1880년에는 2천9백만불로 다시 내려갔다.
한 장교의 표현을 빌면 군인은 승려처럼 작은 격리된 요새에서 고독하게 지내고 있었다. 국민 대다수는 전쟁을 증오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군대는 이제 일단의 개척지 경찰 역할의 지위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척지 경찰로서의 군인들은 상당히 맹활약을 했음은 사실이지만 (남북전쟁 당시부터 19세기 말까지 인디안과의 교전회수는 953회나 되었다.), 전문직업집단으로서의 미국군대의 위치는 철저히 고립되고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군의 고립화가 전문직업군으로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군의 정치적 영향력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암흑시대였지만 직업군인제도에 있어서는 황금시대였다. 군은 민간사회와 격리되어 군대자체 내부를 충실하게 했으며 이와같은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셔먼, 업튼, 루스 같은 군개혁가들의 영향이 컸다. 이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은 남북전쟁 때부터 명성을 떨친 셔먼장군이었다. 이들 개혁가들은 대부분 그들의 이론들을 외국, 특히 독일에서 모색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군조직, 전략 및 훈련에 관하여 업튼 장군은 1875 셔먼장군과 벨크넵장관에게 보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프러시아의 군사제도가 일색이었다. 1860년부터 제 1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의 독자적인 전문직업군 윤리가 형성되었으며, 미군장교는 자신을 이제 더 이상 누구나 할 수 있는 싸움만 하는 직업의 일원으로 보지 않았으며, 배운 사람으로 취급은 못 받아도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며 평생토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직업의 일원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전문직업군 p133-135)
미국 군개혁가들에게 최대의 주목 대상은 독일이었다. 셔먼은 독일의 군사조직 체계가 ‘아주 완벽하다’고 찬탄했다. 1873년 클라우제빗츠의 전쟁론이 최초로 영역 되었으며 독일의 방법을 의심없이 배워야 할 모델로 받아드리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해군은 처음엔 영국에 주목하고 있었고 부친으로부터 프랑스숭배의 영향을 의심없이 받은 알프레드 마한은 죠미니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얼마안가 마한도 클라우제빗츠에 의해 많은 감명을 받았다. 셔먼은 전쟁에 대한 직업군인적 접근방식의 의의를 실제로 표현함으로써 루스 제독에게 해군개혁에 생애를 바치도록 고취했다. 1865년 1월 당시 해군소령이었던 루스는 사반나에 있는 셔먼에 대하여 남 캐롤라이나로의 북진을 위하여 해군과 육군의 합동작전을 실시할 계획을 상신했다. 셔먼의 기술에 의하면 그의 작전계획은 후일 마한이 계몽이라고 부르게 된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는 군사전문직업제도의 의의에 관한 민첩한 통찰이 포함되어 있었다. 루스 자신의 말에 의하면 “군사제도에 대한 셔먼의 명확한 설명을 듣고 나서 눈의 침침한 것이 걷힌 것 같이 생각된다. 잘 고찰해보면 군사작전의 기초가 되는 어떤 기본적 원리가 존재할 것, 작전이 육상에서 또는 해상 어디에서 이루어지든 간에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원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군인과 국가 p249 S.P.헌팅턴 병학사) 이 같은 통찰력이 루스에게 해군성을 재편성하고 해군에 직업군인의 장을 두도록 했다.
신미양요의 작전계획은 미군사 발전의 황금기에 있어서 루스제독의 해군육군 합동 작전계획의 전통을 이어받는 작전계획이었으며, 그같은 흐름에 한 획을 그은 것임이 분명하다. 1966년 미해병대 사령관 월러스 그린(W.M.Greene)은 1차 조미전쟁의 상륙부대 지휘관으로 참전한 틸톤(Tilton) 대위의 편지를 간행하면서 해병대 역사에서 1차 조미전쟁을 가장 의의 있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일찌기 육해양면상륙작전에서 해병대가 발휘한 능숙한 솜씨와, 이 작전에서 항상 효과를 보였던 긴밀한 협조심을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해군사편찬위원회가 본서를 간행하였는바 이러한 편찬사업은 시의에 적절한 것 같다”
고 하였다. 미군의 작전계획에서 1차 조미전쟁의 최후 격전지로 삼은 것은 광성보였다. 조선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광성보에서 최후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군의 작전계획은 치밀하게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해안에서의 함포사격, 지상에서의 야포사격, 포병과 보병 전술의 일치등 서로 다른 군종사이의 협력은 통신과 지휘가 발달한 현대전에서도 실현되기 힘든 뛰어난 제병 합동 전투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었다. 미군이 100년도 지난 소규모 전투를 베트남전쟁시기에 재조명하게 된 이유는 베트남전후 클라우제비츠의 원칙으로 복귀하게 되는 과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1860년대는 미국이 대외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기이면서 경제적 제국주의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시기이다. 군국주의를 거부하던 산업평화주의 사조는 그것이 제국주의의 모습을 갖추어 가면서 군사력을 적극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1861년부터 1869년까지 국무장관 자리에 있었던 윌리암 시워드(Wiliam H, Seward)는 역대국무장관 중에 가장 제국주의적 색채가 강한 팽창주의자였다. 그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북미대륙에서의 강력한 신제국을 건설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그는 미국이 태평양방면과 아시아대륙에로의 팽창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열강과의 협조정책과 함께 강력한 해군력을 배경으로 한 포함외교를 수단으로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1820년대부터 아시아 태평양 방면으로 진출하는데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20년에 아메리카태평양함대를 창설하여 1835년 ‘동인도 및 차이나 함대’로 개편 발족하였고, 남북전쟁 직후에는 아시아 함대로 개편 발족하여 포함외교를 전개하였다. 1832년 수마트라 상륙작전, 1854년 페리제독의 일본원정, 1856년 미청전쟁등이 그것이다. 물론 포함외교의 대상이 오직 비서방의 나라였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조선은 미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조선인에게는 러시아인이나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이나 모두 동일한 양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양이들은 하나같이 천주교도로 생각했고 천주교도는 조상을 모르는 야만인으로 그들과의 접촉은 오로지 조선의 미풍양속을 해칠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선은 1866년 대동강에서 소각시킨 제너랄셔먼호도 미국배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1880년 5월 슈펠트Shufeldt 제독의 요청으로 콘도近藤영사가 동래부사를 방문했을 때도 부사 심동신은 콘도의 설명으로 미리견美利堅과 미국이 같은 나라임을 알았다. 조선인의 이같은 태도는 ‘서프라이즈Suprise’호 사건과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에 대해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서프라이즈호처럼 난파선과 그 선원에 대하여는 인도주의적 후대를 아끼지 않은 반면 제너럴셔먼호처럼 의도적 침략이라고 생각됐을 때는 자위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남북전쟁등으로 인한 미국사정상 18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대 극동정책은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그 후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뒤이은 로즈제독의 강화도 원정 및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다시 조선개국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개항에 관한 국무장관 시워드의 관심은 그의 조카인 상해총영사 시워드G.F.Seward의 보고에 의해 더욱 촉진 되었다. 영사 시워드는 오페르트 도굴에 자본주로서 참여했던 미국인 젠킨스Jenkins가 조선이 구미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의사가 있다.’고 한 허위보고를 그대로 믿고 국무장관에게 보고하였기 때문이다. 팽창주의자였던 시워드국무장관에게 조선 개항은 그의 극동에로의 통상확대정책과도 부합되었다. 따라서 국무장관 시워드는 영사의 보고를 받은 지 2개월 후인 6월27일 조선파견외교특사로 조선에 가서 조선과의 ‘통상및 손해배상청구협정’을 체결하도록 권한을 시워드 총영사에게 부여하였다. 시워드총영사는 목적달성을 위해 무력시위를 주장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무력행사까지도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군장관 기드온 월러스Gideon Welles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시워드가 Rowan 제독과의 협조를 위하여 월러스 해군장관에게 협조를 구했을 때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미국정부의 조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건이다’ 라는 반대 의견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무력행사를 수반한 조선 개국의 시도는 시워드의 뒤를 이어 1869년 4월 등장한 휘시Fish국무장관에 의해 실현되었다. 휘시는 모험을 싫어하는 보수파 인사로 분류되었지만 국무장관이 되자 그랜트Grant대통령의 팽창주의 정책에 동조 협력하여 대외정책에 있어서 모험적인 제국주의 노선을 취하였다. 그는 특히 태평양 진출을 통한 경제적 제국주의를 추진하였고 그 역시 포함외교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는 대조선 개국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1870년 2월 28일 시워드총영사를 소환하여 국무차관 데이비스Davis와 신임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Rogers제독과 협의토록 했다. 이때 시워드는 조선과 협상할 권능을 로저스제독에게 위임할 것을 제의 하였으나 휘시 국무장관은 로저스제독 대신 주청미국공사 로우Low에게 협상전권을 위임하기로 결정하였다. 휘시가 무관인 로저스 대신 외교관인 로우에게 전군을 위임한 것은 조선개국의 주도권을 해군성 대신 자신의 국무성에서 장악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민간정치권의 군에 대한 무시와 불신을 반영한 처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휘시장관은 무력시위 및 무력행사를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그가 4월20일 로우에게 보낸 훈령중 ‘불명예로운 일만 피할 수 있고, 청국의 우호적 협력을 얻을 수 있다면 무력충돌은 피하라’ 고 한말은 불명예로운 일이 일어나고 청국의 협조를 얻지 못할 때는 무력을 행사해도 좋다는 반어적 표현일 수 밖에 없었다.
신미양요의 준비 단계에서 벌어진 이같은 정책은 프랑스의 병인양요 준비과정과 확연히 구별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민군관계의 문제이다. 프랑스는 군사령관에게 모든 원정의 권한을 위임함으로서 민간정부가 원정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인 반면, 미국은 군을 불신하는 민간정부의 태도와 입장이 정확하게 반영되었다. 민군관계의 정립이야말로 남북전쟁에서 전시지도자 링컨이 보여준 리더십의 최대 성과였다. 그는 장군들의 독자성을 충분히 보장해 주면서 개인 정보원을 통해 내용상의 통제를 철저히 실현하고자 했다. 나폴레옹 이래 군사지휘의 전설이 된 ‘방향성 있는 망원경’을 문민통제의 수단으로 실현한 것이다. 로우공사는 드루서기관을 상륙작전에 참가시켜 상륙작전의 지휘관인 블레이크를 통제하도록 했다. 그의 훈령을 보면 이같은 점이 뚜렷이 드러난다.
조선 당국이 특사를 파견할 기미를 보이거나, 상륙작전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 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블레이크 중령을 종용하여 모든 적대적 행동을 즉각 중지 하도록 할 것.(병인,신미양요사.p218 1989 서인한 재인용)
블레이크에게는 작전의 재량권을 주고 드루에게는 작전을 통제하도록 한 이중조치는 야전에 파견된 ‘방향성 있는 망원경’을 잘못 사용한 경우로 오히려 야전에서 적전 분열을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는 방침이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어찌됐든 1차 조미전쟁은 민간정부에겐 군에 대한 문민통제의 전통을 충족시켜줬고, 군내부에선 전문직업군이 탄생하는 여명기에 합동전투의 성공사례라는 목표를 충족시켜준 것이다. 사실 당시 미군의 상황은 고립, 소외란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해군예산만 보더라도 1890년까지 통상 2천만불이었고, 해군 및 해병대 병력은 1만 1천명이었다. 자금부족에 따라 군이 새로운 기술이나 병기를 실험하고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 하였다. 예를들면 외국의 열강들이 강선포로 대치한 후에도 오랫동안 미국의 육,해군은 여전히 활강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육군이 1개 대대 이상의 병력을 움직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 해군은 함선의 설계나 의장면에서 다른 열강에 뒤떨어져 있었다. 해군은 증기력 추진으로 함선 발달의 우위에 있었으면서도 남북전쟁 후에는 다시 범선으로 되돌아갔으며, 예산절약의 필요에 의해서 해군장교가 함선에 엔진을 사용하는 일은 범죄라고 간주되는 형편이었다. 1880년까지의 미국 해군은 함대로서 일제히 활동할 수가 없는 구식의 잡동사니 배를 모아놓은 것이었다.(군인과 국가 p241 S.P.헌팅턴 병학사) 신미양요 당시에도 증기선은 두척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범선이었다. 틸톤이 해군장관 앞으로 보낸 조선원정보고문에는 구리탄약통의 상당수가 불발인 것을 발견하고 이의 점검과 시정을 제의하는 내용이 있다.
“나는 탄두가 총포공이에 맞아 움푹 들어간 자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탄이 불발된 탄약통 다수를 전장터에서 목격하고, 나는 함대내에 보관되어 있는 종이 상자로 포장되어 있는 탄약통, 특히 ‘1869년 프랑크포드병기고( Frankford arsenal,1869)’ 마크가 찍힌 탄약통을 믿는다면 극히 위험하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탄약통중 적어도 25퍼센트가 쓸모없게 되었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나는 이들 탄약통을 철저히 점검해서 완전무결한 탄약통과 노폐화된 탄약통을 구별해 줄 것을 삼가 제의하는 바이다” (동방학지31.p217.틸톤의 강화참전수기.1982)
1870년 8월31일 바젤레(Bazeilies)에서 있었던 프랑스와 프러시아의 전투에서 샤스포식 소총은 마분지탄약통을 사용하였으나 이는 종이탄약통을 사용한 거의 마지막 전투로 머지않아 구리로 된 탄약통으로 대치된다. 틸톤의 보고는 미국이 다른 열강에 비해 아직 진보된 탄약통으로 전면 교체되지 않은 상태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착실하게 전쟁을 준비했음은 강화도상륙작전계획서에서 잘 드러난다. 작약도에 정박해 있던 미국함정 베니시아호에서 최종 작성된 작전계획서에는 조선요새지에 대한 보복원정을 단행함이 작전의 목적임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보복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병력을 편제 배열한다면 상륙작전에 유리할 것이므로 전 장병에게 참고로 알린다.’ 라고 하여 지시나 명령이 아닌 참고사항으로 권유하는 문체는 특이하다. 이같은 지휘형식은 야전부대에게 최대한의 자율성을 부여해 주는 효과를 가질 것은 분명하다. 이어 상륙순서를 정해주고 마지막에 정리하기를 ‘상륙순서를 정함은 사전에 혼란을 예방하기 위함이며 만약 조류로 인해 상륙계획이 어긋날 경우에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상륙용 보우트는 미리 계획한 상륙 순서에 근사하게끔 상륙작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여 처음과 일관된 느슨하지만 야전지휘관에게 재량권을 부여하는 지휘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6월 9일에도 로저스 제독은 상륙작전의 총지휘를 맡은 블레이크 중령에게 6가지의 구체적 행동지침을 하달하는데 그 마지막 조항은 다음과 같다.
6. 이번 원정의 목표가 조선과의 조약체결에 있는 만큼 이와 관련된 긴급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에 따른 지휘관의 재량권을 충분히 보장할 것이다.
(서인한 병인,신미양요사. p218 1989 재인용)
링컨은 남북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그랜트 장군과 그의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T. 셔먼 장군에게 상당한 수준의 작전상 재량권을 허락했다. 하지만 이는 링컨이 전쟁초기에 마련한 전략에 기초를 두고서 두 장군이 자신들의 전쟁계획을 마련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링컨은 그랜트를 미합중국 육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 전 몇 년 동안 그랜트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작업을 벌인 후에 최종 결정을 내렸다. (최고사령부 p47 엘리엇 코언 가산출판사)
셔먼으로부터 시작된 미군개혁의 첫 전과인 1차 조미전쟁에서 작전계획과 지휘는 남북전쟁에서의 링컨처럼 작전과 전투에 재량권을 부여하는 지휘방식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전계획에서 부여된 느슨한 지휘와 야전에서의 재량권 부여는 원정에 앞서 나가사키에서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완료한 후 1871년 5월16일 조선 원정의 길에 올랐던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결과 강화전투에서 미측은 3명의 전사자와 5명의 중상자를 낸데 비해 조선측은 전사자 350명, 포로20명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조선을 개국시키려던 당초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 것이다. 그들이 신봉하던 클라우제비치의 기준으로 봐도 그것은 실패가 분명했다.
조선군은 병인양요를 겪은 뒤라 최고의 수비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재연 중군이 임명 즉시 부임하여 광성보 안을 둘러보니 각 돈대에 화포를 빽빽이 배치해 놓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했다. 총2000여명의 병사를 3개의 돈대에 배치하고 각종 대포 143문 총동원하여 재배치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조선의 대포는 미군의 대포와 만났을 때 일순간 무용지물로 변하고 말았다. 미군 대포의 위력을 용호한록龍湖閒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포 한방 쏘면 성벽이 무너지고 돌이 갈라지는 위력을 가졌다’. 조선은 서양의 공성무기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돈대는 돌을 쌓고 그 사이를 회반죽으로 메꾼 것으로 수원화성에 도입된 벽돌은 치성에만 적용되었다. 이는 병자호란 때 홍이포 한방에 남한산성의 성벽이 허물어지면서 성곽이 붕괴되는 것을 경험했던 상태 그대로였다. 또한 대포의 적중률을 회피할 수 있도록 경사각과 요철을 많이 둔 당시 서양의 축성법과 달리 산봉우리에 주로 원형으로 만들어진 돈대들은 어느 방향에서도 포격의 정면이 되는 약점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서구의 공성전과 비교하여 200년 정도 뒤진 조선의 돈대가 수륙양면의 집중포화로부터 버틸 수 있는 역량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의 삼수군은 그 정예병이라 해도 영,정조이후 병학통과 무예도보통지등으로 집대성된 근접개인방어전술 위주의 훈련만을 받아왔기에 남은 저항수단은 매복,기습과 같은 근접전뿐이었다. 어재연중군은 친교에게 경영병을 이끌고 광성보 뒤 요지에 매복해서 적의 침공을 저지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미상륙군 부대는 대모산에서 돌격준비를 완료하고 마침내 물밀듯 광성보로 육박, 성첩및 상하 돈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말았다. 매복한 조선수비병은 조총으로 대항했으나, 미군의 야포와 소총 그리고 함포 사격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성곽의 지세가 협착하여 최후에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필사즉생의 결의가 근접전과 상응하여 작으나마 전투의 성과로 나타난 것은 비로소 이때였다. 중군 어재연은 천총 김현경과 더불어 피를 마셔 맹세하기를 죽을때까지 싸우되, 결단코 후퇴하지 말 것을 결의 하였다. 어떤 졸병 한명이 도망가려 하매 김현경이 그자의 등을 치면서 제지하자 군졸이 울면서 “사도가 우리를 다 죽게 합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어재연은 초연한 자세로 “죽을 때가 되면 진실로 죽을 뿐이다. 너희들이 행오를 짠지 몇 해가 되었는데 어찌 오늘 죽음이 있을 줄을 모르고 있었느냐” 라고 대갈일성으로 호령하니 감히 도망가는 군졸이 없었다. 미상륙군은 6백여명인데 조선의 경군과 지방군은 모두 합쳐 300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정예병은 그 반도 못되었다. 어재연은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땅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守萬死不 一生之地) 그러나 이제 남은 군인들은 광성보로 몰려든 미군에 대항하여 칼과 창으로, 돌멩이와 진흙을 집어던지다가 이마저 안되면 맨주먹으로까지 난전을 벌였다. 어재연은 칼을 손에 잡고 번개같이 적을 무찌르며 대포알 10여개를 좌우 손에 쥐고 적군에 던지니 미군은 쓰러지곤 하였다. 드디어 적군은 어재연을 완전 포위해서 칼로 난도질하니 그는 이로서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350명의 병사들 역시 장렬한 최후를 맞았으며, 살아남은 일부 장병들은 미군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거나, 부상당한 몸을 바다에 던져 목숨을 끊어 버렸다. 어재연과 최후의 순간을 같이 한 병사들의 투혼은 길이 살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결사항전만을 한 것은 아니었고 도망간 자도 이미 많았으며, 민간인들이 참여하여 국가의 위기를 관민일체로 대처했다는 것 또한 과장된 면이 있다. 어재연의 동생 어재순이 민간인 출신으로 참전한 것은 사실이나 민간인으로서의 참전에 대해 어재연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던 점, 어재연이 중군 부임 즉시 제반사무를 처리하고 순시한 기록이 있으나 어디에도 민간인이 참전 했다는 기록은 없고, 호랑이포수가 삼수군의 포수가 아닌 민간포수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민간인의 참전이 이 전투의 방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장렬한 최후는 마치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의 자결과 같은 심리적 효과를 일으켰고, 때마침 미군이 철수하면서 조선은 이 전쟁을 비극적이지만 최종엔 승리로 결론 내렸다. 이같은 평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사료의 취사선택에서도 나타난다.
광성보에서 보여준 조선군의 투혼은 미군측에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킴벌리 중령 휘하의 부관을 참전했던 실레이(W.S Schley)소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기 한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병인,신미양요사 p230.서인한.1989)
1차 조미전쟁의 결과를 둘러싼 상반된 평가는 전투자체보다 치열한 심리전의 양상을 나타냈다. 어느모로 보아도 미군의 압도적인 승리였으나 조선이 이를 단순한 양요로 취급한 이유는 미군함대의 철수가 곧 패배라는 관념을 형성한데 기인한다. 조선은 한결같이 흉적창궐凶賊猖獗, 양추도량洋醜跳粱, 미병둔거美兵遁去등의 어구로 표현함으로써 패전의 비중을 과소평가하고, 이것이 중국에까지 보고되어 아시아함대가 조선에서 패퇴했다는 소문이 퍼져 양이에 대한 중국인의 배외감정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뉴욕 타임지는 실제 전승을 거두었지만 조선원정의 실패소식이 중국인에게 잘못 전해져서 미국의 국가적 위신이 실추될까 염려되어 차제에 조선원정을 다시 결행함으로써 아시아함대의 위력을 과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우리는 로저스 제독이 이 작전을 재개해서 최초 조선원정을 개시 했을 때의 목적수행을 관철할 수 있도록 본국으로부터 충분한 증원군 병력을 그에게 파견해주기를 희망한다. 현재 이 상태로 어물쩡 넘긴다면 조선원정을 아니한 것만 못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인은 중국인의 그릇된 평가를 받아 침몰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조선 원정의 재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으며,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던 미국의 포함외교의 일대 실패였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2차원정을 단행하지 않은 이유는 병력이나 자금부족 같은 열악한 병참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한반도가 미국의 외교정책 우선순위에서 비중이 낮았기 때문이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이 서구와의 군사적 충돌을 통해 유라시아의 지정학질서에 대응한 과정은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알아온 세계관이 부정되고, 1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라시아의 지정학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의 자존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강하구는 이 광폭한 질서의 중심축선을 흐르고 있었고, 지금도 근본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1966년 신미양요에 참전한 틸톤대위의 편지를 간행하면서 당시 해병대 사령관이 지적하고 있는 바는 이 모든 상황을 압축하고 있는 전율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1871년 한국 인천 북방 12마일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강화도에 미국 수. 해병이 성공적으로 상륙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는 미국 해병 제 1분대가 인천 상륙작전을 수행한 해로부터 꼭 79년전의 일이다. 인천상륙작전시 육해공 합동작전을 벌였을 때 해병대가 여러번 봉착했던 상륙의 곤경과 똑같이 1871년에도 이와 똑같은 상륙의 역경을 무릅쓰고 해병대는 전술작전에서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동방학지31 1982 김원모 틸톤의 강화도참전수기 p188)
틸톤의 편지가 간행된 뒤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 주한미군은 한반도에서의 작전계획인 5027을 발표했다. 작계5027의 핵심은 130여년전 강화도원정을 위한 작전계획과 동일한 상륙작전이다. 130년 전 조미전쟁의 군사공학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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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될 자료
*강화통제영학당
조선말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하자 고종이 1876년 개항과 더불어 해양강국을 지양하는 군함건조와 구입을 추진하였으나 인재부족, 재정궁핍 또한 청나라 및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에 기인하여 그 실효를 거두지 못 하고 있을 때 우선적으로 해군 인재를 양성하고자 1893년 강화도 갑곳리에 우리나라 최초로 통제영학당(해군사관학교) 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8월 청·일전쟁의 발발로 존폐의 지경에 처했다가 1896년 5월 Callwell대위 일행이 영국으로 귀국하면서 폐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건물은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으며 영국인 교관들이 거주했던 한옥이 남아있다.
2006.12.14추가
비변사등록 숙종 4년(1678) 11월 4일
3곳 별단 강도(江都)에 돈대(墩臺)를 설치하는 절목
“강도(江都)는 곧 우리나라의 한 보장(保障)으로서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점이 있으나 해변이 산만(散漫)하여 험준한 요새로서 믿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여조(麗朝)에서 도읍을 옮길 때에 연변에 성을 쌓은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난날 고(故)상신(相臣) 이완(李浣)의 유소(遺疏)에도 섬에 특별히 성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을묘년 봄에 대신과 중신(重臣)들이 나가 살펴보고 주황(周隍)을 둘러 쌓음은 힘이 비록 미치지 못하나, 작은 돈대(墩臺)를 계속 설치하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탑전에서 아뢴 바 있습니다. 신 김석주(金錫胄) 등이 지난번 명을 받들고 나가 지형을 살펴보니 본도의 주위는 거의 3백리에 달하고, 중간에 큰 들이 있는데 수십 리 또는 십여 리 되는 들이 3∼4곳에 있었습니다. 만약 평원(平原)을 따라 쌓으면 기름 진 전토가 모두 그 가운데에 들어가게 되니 적을 막기도 전에 백성들의 원망이 먼저 일어나겠고, 산등성이에 쌓는다면 정족산(鼎足山)의 옛 성에서도 이미 시끄러운 비방을 견딜 수가 없었으니 더욱 다시 그 잘못을 본 떠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완의 3성(城)에 대한 말은 결코 채용할 수 없습니다. 해변을 따라 성을 쌓고 바다로 못을 삼는 일은 비록 장엄하고 견고할 것 같은데 갯벌 가운데 비록 견고한 곳은 더러 있으나 진흙에는 곧 무릎까지 빠지고 심한 경우는 목[項]에까지 빠지는 곳도 있어 터를 다지고 돌을 쌓으면 반드시 먼저 무너지게 되니 전조(前朝)에서 다만 흙만을 쌓은 것도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방비(防備)를 굳건히 하는 방법은 많은 돈대(墩臺)를 설치하고 많은 화기(火器)를 배치하여 지키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 합니다. 조정에서 일이 많아 아직도 지연시키고 있으나 서울 가까운 곳의 지형이 이곳보다 나은 곳이 있다면 굳이 많은 인원을 동원하고 재물을 소비해가며 흉년에 역사(役事)를 일으킬 것은 없으나 지형적인 이점이 가장 편리하며 시사(時事)도 믿기 어려우니 이 때에 미쳐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변란에 대비하는 것은 참으로 그만 둘 수 없는 일입니다. 응당 시행할 일들을 우선 마련하였습니다.”
후록(後錄)
돈대 : 돈대의 수를 49개소로 정하고 돈대의 제도는 산이 있는 곳은 산을 따라 성첩(城堞)을 만들며, 평지에 성을 쌓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높이를 3장(丈)으로 하고, 그 두께의 밑넓이는 3장 5척으로 하며, 면(面)의 넓이를 2장 5척으로 한다. 성가퀴[垜]는 높이 6척, 두께 3척, 길이 9척으로 하고 전면에 포혈(砲穴) 2, 좌우에 포혈 각 1로 하고, 주위를 4면 10칸(間) 기준으로 하되 그 지형에 따라 방형(方形) 또는 원형, 일직선 또는 ㄷ 자형으로 하며 파수병이 많아야 할 긴요한 지역의 경우는 성의 제도를 알맞게 크게 한다.
성돈체석(城墩體石) : 남쪽은 마니산(摩尼山), 서쪽은 별립산(別立山)의 두 산 및 이웃 여러 섬에 모두 돌이 있으며, 매음도(煤音島)에는 또 넓은 박석(磚石)이 있어 사용할만하다.
부석 철물(浮石鐵物) : 훈국·어영·수어·정초의 4 군문에서 각각 신철(薪鐵) 1만근을 가져왔으며 해서에는 향곡(餉穀)을 떼어 지급하고 3만근을 본도로 하여금 구하여 보내게 한다.
돌을 운반하는 배 : 크고 작은 성석(城石)은 수상(水上) 운송이 육상 운송보다 많을 것이므로 배를 많이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70척을 마련하되 충청수영(忠淸水營)에서 30척, 전라 좌·우수영에서 각 20척을 만들어 내년 정월 그믐께까지 강도(江都)에 도착하게 하고, 돌의 육상 수송은 본부(本府)에 새로이 제조한 병거(兵車) 70여량(輛)이 있고 또 진강목장(鎭江牧場)에 소 60∼70두가 있으니 사용할 만하다.
석회(石灰) : 해서의 연백(延白)·평산(平山)·강음(江陰) 등 연강(沿江) 4읍에 석회가 가장 많으니 따로 차사원을 정하여 2만석에 한정하여 벽란도(碧灡渡)에서 굽도록 하되, 이상은 강도에 가까운 곳이므로 강도의 각 진포(鎭浦) 소속 선척으로 역소(役所)까지 수송하게 하는 것이 편리하다.
기계잡물(器械雜物) : 배에 실은 돌을 뭍으로 올릴 때에 벌에 빠질 우려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잡목을 엮어 길을 만들어야 비로소 끌어 옮기는 데에 편리하다. 장산곶(長山串)에서 잡목 8천조(條)를 소강첨사(所江僉使)로 하여금 베어서 수송하도록 하고 기계도 이 나무를 사용한다.
다고목(多苦木) : 3천개를 소강첨사로 하여금 베어서 수송하게 한다.
원다고(圖多苦) : 2백개를 양호 수영(雨湖水營)으로 하여금 선재(船材)의 끝동부리로 만들어 보내게 한다.
동거 백량(童車百輛)과 녹로(轆轤 : 고패) 50기(機) : 모두 양호에 배정하고, 설마(雪馬 : 썰매)는 경강(京江)에서 재목을 구하여 보낸다.
돌 놓을 때의 소나무메 : 경산(京山)의 옹종목을 가져다 사용한다.
생칡 : 가을에 채취한 것이 좋으며 8백동(同)을 호서에 배정한다.
공석(空石) : 가장 많이 필요하니 호조·진휼청·경기 각 읍에서 수 만장을 가져다 사용한다.
회를 갤 때에는 판조(板槽)를 사용하고 철물(鐵物)을 두드려 만들 때에는 노탄(爐炭)을 사용한다.
물을 운반할 때에는 담통(擔桶) 및 소통(小桶)을 사용하고 저수(儲水)할 때에는 대옹(大甕)을 사용한다.
석수(石手) : 서울 및 여러 도에서 4백 명 한도에서 사역시킨다.
역부(役夫) : 굶주린 백성을 사역시킬 수 없고 허약한 병사를 사역시킬 수는 없다. 혹자는 말하기를 ‘왜관(倭館)을 건조하여 지급할 때에도 한 도의 병민(兵民)의 힘을 빌었으니 지금 보장(保障)을 보수하는 때를 맞이하여 비록 백성의 힘을 빌리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다’라고 하니 이 말이 진정 옳다. 그러나 농사가 흉년이요 또 농사철을 맞이하였으니 이 점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각 도의 승군(僧軍) 8천명을 40일 범위에서 사역한다.
역량(役糧) : 8천석을 창고에 쌓아 둔 삼남의 대동(大同) 비축과 양서의 관향(管餉)에서 2천석 씩 가져오면 역시 8천의 수자에 충분할 것이다.
역선(役饍) : 간장·젓갈·해채(海菜)·황각(黃角) 등의 물건을 삼남 수영(水營)에 배정한다.
취기(炊器) 식정(食鼎) 및 동과(銅鍋) : 각 군문 및 남한·강도에 있는 것을 가져다 사용한다.
목표(木瓢) : 강원도에 배정한다.
“강도가 주필(駐蹕)하는 곳으로 된다면 3도의 주사(舟師)는 마땅히 모두 근왕(勤王)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 비단 남쪽 수천리가 일시에 비는 것이 걱정일 뿐 아니라 먼 바다의 누선(樓船)이 제 때에 모두 도착하기가 어렵습니다. 강도는 물살이 거세고 포구(浦口)는 얕고 좁아 큰 배를 움직이기에 어려운 형편입니다. 이는 정묘·병자 두 난리에 이미 겪은 분명한 경험입니다. 전국이 임시 안정을 유지하는 때를 맞이하여 주사로 방어할 대비가 없다면 이는 또 매우 허술한 일입니다. 삼남 전선(戰船)의 원 수자는 1백 24척이고, 각각 병선(兵船)·방패선(防牌船)이 있는데 이것도 11척에 달합니다. 합하여 계산하면 병선의 수는 1백 35척이고, 병선마다 각각 포수 10명, 사수 10명을 정하고, 활과 살·약환(藥丸)도 힘에 따라 선상에 배치하도록 하며, 방패선 머리에는 각각 5호 불랑기(佛狼機)를 1좌(座)씩 걸고 또 양미(糧米) 1백석을 싣도록 하여 명령이 내려져 출동하면 배는 가볍고 격군(格軍)은 건장하여 비록 바람이 사나운 걱정은 있으나 오히려 노(櫓)를 빨리 저어 모두 도착할 수 있습니다. 1백석의 쌀은 곧 12인의 1년 식량입니다. 3천을 유지할 수 있는 군졸을 이끌고 싸우고, 또 지키며, 북으로 정숙(貞淑)한 바다를 차단하고, 서남으로 여러 섬의 포구를 통제하면 나라를 보위(保衛)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점을 일일이 말할 수 없습니다. 쌀을 운반할 일이 있는 경우 1백 선척이 한 번 나가면 1만석을 옮길 수 있으니 이 또한 크나큰 편익(便益)입니다. 미리 통신(統臣 : 통제사) 및 삼남의 감사·수사에게 분부하여 전선이 있는 진포(鎭浦)·군읍(郡邑)에 모두 각각 쌀 2백석씩 비축하게 하고 매년 1백석은 환곡으로 방출하며 1백석은 창고에 두어 불시에 배에 실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배에 태울 군병은 건장한 자로 가리되 사수·포수를 구분하고 신상(身上) 특징을 장부에 기록하여 비변사로 올려 보낼 것이며 비국에는 낭청을 특파하여 점열·시사(試射)하여 특별히 우대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양남의 경우는 각각 그 우후(虞侯)가 거느리고, 호서는 가까이 인접하고 있으므로 아침에 출동하여 저녁에 도착할 수 있으니 수사도 직접 거느리고 난(難)에 달려올 수 있습니다. 신 유혁연(柳赫然)이 일찍이 효묘조(孝廟朝)에 이를 탑전에서 아뢰어 상지(上旨)를 얻은 바 있었으나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북로오위복설사목(北路五衛復設事目)
“육진(六鎭)은 우리의 극북(極北)에 위치하여 저들과 다만 일의대수(一衣帶水 : 좁게 흐르는 한줄기 강물)만을 사이하고 있습니다. 조종조 때 매양 번호(藩湖)가 침입하는 근심이 있어 조금 들어오는 경우 사람과 가축을 몰아가거나 약탈해 가고 많이 들어오는 때에는 성보(城堡)를 포위하고 공격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이에 오위(五衛)의 제도를 시행하여 여섯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각자 위장(衛將)이 되게 하여 그 지역을 지키되 여섯 고을의 관아가 있는 곳에 각자 성호(城壕)를 구축하게 하여 그 백성들을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변방의 사정이 내륙의 경우와 달라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관에서는 그 백성을 보호할 수 없고 백성들은 그 부모·처자를 보호할 수 없어 아득히 먼 공허한 지역을 마침내는 우리 소유로 삼기 어려운 때문입니다. 평상시에는 한 지역 백성들을 모두 몰아 성 안으로 철수해 들어가 집을 지어 안정시키고, 농사철에는 역시 오위의 법에 의하여 서로 이끌고 들로 나아가 경작하며, 비록 갑자기 위급한 일을 당하더라도 곧 이로써 방어합니다. 이는 곧 소식(蘇軾)이 말한 바 하삭(河朔 : 황하이북) 변방의 여러 고을 인호(人戶)는 활을 멘 채 호미질 하고 칼을 찬 채 나무하며 안장 얹은 말을 기구로 사용하기를 항상 도둑이 침입한 것 같이 하였으며 친척이 모이고 분묘(墳墓)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싸움에 나서려 하니 적이 매우 두려워하였다’라고 한 경우입니다. 농사를 지어 수확한 뒤에는 도로 성안으로 들어가 보위하니, 우리의 경우는 울타리가 견고하여 자연 방어하고 지키는 것이 안전하고, 적은 침입하였으나 소득이 없고 또 먹을 것도 없어 며칠이 못되어 곧 돌아가니 마치 미친개가 날뛰며 사람을 해치려 할 때에 사람이 먼저 울타리 안으로 몸을 날려 사립문을 닫으면 개는 자연 달아나는 경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지난날 육진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왜란(倭亂)이 있은 뒤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속오(束伍)의 법을 처음 시행하면서 여러 도의 군병을 조련하였으나 역시 육진의 사정은 다른 도와 다름을 알고 유독 오위의 제도를 변경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김여수(金汝水)가 북도병사가 되어 영장(營將)의 설치를 요청하니, 육진(六鎭) 및 각 진보의 군병과 무과 출신들은 모두 속오(束伍)로 편입되어 영장에게 소속되고 부사(府使)·첨사(僉使)·만호(萬戶)들은 그 거느리는 군병을 잃고 외로운 손님과 같이 되었으므로 육진의 형세가 갑자기 흩어지고 떨어져 나가 허약해졌으므로, 그 백성들은 쓸쓸히 모두 보호받을 수 없음을 걱정하니 또 어찌 단련하고 절제(節制)하여 필승의 병사가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현재 변경의 근심이 두만강(豆滿江) 이북에만 국한된다면 병사가 전군을 통솔하고 한 번 싸울 수는 있으나 만약 군병을 징발하여 원정(遠征)할 경우에는 곧 이는 육진 모두를 포기하는 것이니 변경 방비를 위한 계획이 아닙니다. 수년 전 조정에서 이 점을 우려하여 수성(輸城)의 역졸(驛卒) 1천 3백여 명을 데려다가 찰방 양우한(楊遇漢)으로 하여금 마음 써 조련하게 하였고 병영(兵營)의 표·패·이·노(標牌吏奴) 등속이 수천에 이르니 다시 유비연(柳斐然)으로 하여금 추려 대오를 편성하게 하였는데 이를 합하여 계산해서 겨우 3부(部) 6사(司)의 모양을 갖출 수 있습니다. 육진 군병으로서 과거 속오(束伍)에 소속된 자가 몇 명이며 현재의 역졸·영속(營屬)으로서 육진의 속오(束伍)를 대신할 자가 충분한 지 또는 부족한 지 또 몇 명인 지도 알 수 없습니다. 토노(土奴)란 호칭과 고공(雇工)의 설치는 아마도 과거 취락(聚落)의 유제(遺制)요, 또한 새로이 귀화한 사람을 어루만지는 두터운 뜻이었던 듯 하나 지금에 와서 감축하여 찢어발기면 이는 가혹한 일로서 원한이 생기기 쉽습니다. 만약 병사가 하나의 병영(兵營)을 신설할 인원이 부족한 경우에는 여기에서 선발하여 보충하고, 노약자나 사망자가 있는 경우에도 여기에서 선발하여 보충하도록 한다면 이렇게 하는 경우 비록 사나운 기질일지라도 반드시 감히 화를 내지 못할 것이며 그 가운데 건장한 자는 또 국가의 쓰임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반드시 육진의 옛 제도를 모두 회복시켜서 그 군병들로 하여금 각각 그 성을 지키게 하면 토지와 인민이 서로 의지하고 보호받게 될 것입니다. 시의(時宜)에 차이가 있고 적(敵)의 대소가 있으니 병가(兵家)가 싸움에 임하였을 때에 어찌 적에 따라 변화된 방도가 없겠습니까? 전위(前衛)가 적을 맞이하면 좌우 두 위(衛)가 군병을 출동시켜 지원할 것이요, 좌위(左衛)가 적을 맞이한 경우 앞뒤 두 위가 역시 군을 동원하여 지원하고, 중위(中衛)가 적을 맞이한 때에는 앞뒤 4위가 모두 지원할 것입니다. 후위(後衛)·우위(右衛)의 경우에 있어서도 모두 그러할 것이니 곧 상산(常山) 땅 솔연(率然)註 1) 이라는 뱀의 형세가 될 것입니다. 병사(兵使)는 하나의 병영을 통솔하고 기회를 보아가며 움직이되 본영(本營)에 있기도 하고 행영(行營)에 나가 있기도 하며 지원할 만 하면 지원하고, 공격할 만 하면 공격하며, 병력을 모아 다같이 나가야 할 경우에는 또 육진(六鎭)의 병력을 각각 동원하면 한 팔의 힘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니 비록 속오(束伍)의 제도를 폐지한다 하더라도 이는 아마도 변경을 보호하며 적을 제압하는 중요 수단에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첨사·만호의 진보(鎭堡)는 본래 모두 험한 산과 고개로 가려져 있는 곳에 자리 잡으며 거느린 군사는 많아야 수십 명, 적은 경우 7∼8명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다급한 보고를 알리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행할 수 있으나 작전(作戰)하여 적을 막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옛 제도에 의하여 그 지방 성으로 철수해 들어가거나 토졸을 거느리고 절도사(節度使)의 휘하에 나아가 예속되어 능력을 발휘하고 병사도 반드시 각진 방수(防戍)의 완급을 헤아려 요새에 머무르게 하거나 혹은 군전(軍前)에 달려가게 하여 그 부분으로 소속한 의무를 밝히는 것이 옳습니다. 대체로 귀문(鬼門)·마천(摩天)·마운(摩雲) 등 험준한 곳은 비단 우리나라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비록 중국의 효산(崤山)과 육반산(六盤山)에 비한다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험한 곳에 사람이 늘 살지 않다가 갑자기 육진 군졸을 모두 몰아서 지키게 하면 군량이 공급되지 못할 것이요, 관방(關防)이 설치되지 않았으니 이는 더욱 걱정스런 일입니다. 북로의 육진 외에 명천(明川)은 북으로 귀문에 닿고 길주(吉州)는 남으로 마천과 접하고 있으며 거산역(居山驛)이 남북 양도 사이에 가로 놓여 있고 찰방(察訪)이 주재하는 곳이 또 마운령의 아래입니다. 길주는 가장 웅장한 고을이라고 일컬어져 다른 읍에 비하여 인구와 물자가 배나 됩니다. 나아가면 바로 명천과 같이 귀문을 거머쥐고, 물러가면 단천(端川)을 이끌고 마천을 협력하여 지킬 수 있으니 사정을 참작하고 기회를 살펴서 나아가든 물러가든 해야 합니다. 거산의 경우는 또 무관으로서 병사(兵事)에 익숙한 자를 선발하여 그 찰방으로 삼고, 역졸 가운데 정예한 자를 추려서 단속, 훈련시키기를 수성(輸城)의 경우와 같이 하여 마운을 보호하도록 할 것이며, 남영(南營)의 우후는 일이 있으면 고개 밑으로 달려 나가 그를 지원하고 또 겸하여 감독하게 할 것이니 이와 같이 연결 배치하는 것이 시기와 형편에 맞을 듯 합니다. 일찍이 북로의 일을 잘 아는 자의 말을 들으면 ‘일로(一路)는 경성(鏡城)의 보화보(寶化堡)에서 곧장 삼삼파(森森坡)로 향하여 귀문 북쪽으로 돌아 나오고, 일로는 경성의 어랑촌(漁浪村)에서 곧장 명천의 초가(草街)로 향하여 귀문의 남쪽으로 돌아 나오면 길은 평탄하고 또 빠르다’고 하였습니다. 이도 또한 관방(關防)을 지키는 자가 알아야 할 바입니다. 먼 곳의 일을 일일이 멀리에서 헤아릴 수는 없으니 본도 병사로 하여금 특별히 그 장단점을 헤아려 곧 보고하게 할 것이나 병사가 다만 공문상의 문자만을 참고하여 아마도 조정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평안도 계원장(繼援將) 폐지사목
“옛 제도에 강계(江界)의 만포(滿浦)를 좌계원장으로 삼아 영변(寧邊)의 철옹(鐵甕)으로 들어가 지원하도록 하고, 창성(昌誠)의 창주(昌洲)를 우계원장으로 삼아 곽산(郭山)의 능한(凌漢)으로 들어가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연강 아래, 위 수백 리 땅은 모두가 적들이 노려보며 치달리는 곳으로서 아침 저녁으로 건널 수 있는 곳입니다. 비록 병력을 증강하더라도 오히려 방어하기가 어려운데 지금 이를 버려두고 단약한 군졸을 이끌고 험준한 곳을 거쳐 깊숙이 5∼6일 노정(路程)에 들어가서 두 성을 지원한다는 것은 올바른 계획이 아닙니다. 만포(滿浦)는 건주(建州)·벽동(碧潼)·창주 사이에 인접하였고 애양(靉陽)·관전(寬奠)과 마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창성 이하는 우리 변경의 영세(嶺勢)가 점점 낮아지고 강의 흐름도 완만합니다. 그러므로 무오년에 우리 병사가 북쪽으로 들어가고, 정묘·병자에 적병이 남쪽으로 진출할 때에 모두 이 길을 택하였습니다. 삭주(朔州)는 당나라 장수 곡승은(曲承恩)이 과거 주둔하였던 곳이고, 귀성(龜城)은 고려 때 박서(朴犀)가 지키던 곳이니 이 모두가 백번 전투를 겪은 요해지(要害地)로서 많은 군사를 주둔시켜야 할 곳입니다. 지금 이 두 진(鎭)의 계원장이란 호칭을 모두 폐지하고, 만포를 강변좌영장(江邊左營將)으로 삼아 강계의 속오(束伍) 3초(哨 : 1초는 약 1백명)를 덜어주어 그 병력을 증강하고 위원(渭原)·이산(理山) 두 고을 및 고산리(高山里) 이하 모든 진보(鎭堡)로서 위원 경계 이상에 있는 것은 모두 소속하게 하여 강의 상류를 방비하고 창성부사를 강변우영장으로 삼아 벽동·삭주 두 고을 및 창주 이하의 여러 진보로서 벽동 경계 이하에 있는 것을 모두 소속하게 하여 강 하류를 방비하도록 할 것입니다. 만포의 성 수비는 고산리에서 그 진병(鎭兵)으로 지원하여 지키고, 창성의 성 수비는 창주에서 그 진병으로 지원하여 지키되, 다른 진에 위급한 일이 있는 경우 각각 그 영장이 역시 그 군병을 이끌고 가서 지원하여야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고산리는 강계와 위원 사이에 있어 지형이 만포보다 못하지 않으며 요해지로 훨씬 나은데 포기하여 지키지 않고 철수하여 다른 진으로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토졸은 비록 적으나 성안에 어찌 남녀노약이 없을 것인가? 벌등포(伐登浦)는 또 고산리에 속한 보(堡)이니 두보가 협력하는 경우 2∼3백의 성 지킬 사람을 얻을 수 있어 자체 보위(保衛)할 수 있다’ 하니 이 말에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본도 감·병사로 하여금 상의하고 또 강변 수령 및 일을 잘 해결하는 자에게 물어서, 조정에 자세히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강계부성(江界府城)은 강변(江邊)에서의 거리가 1백여 리로서 비록 지나치게 먼 듯 하나 실은 상토(上土)와 만포 등 여러 길이 모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적이 무창(茂昌)·여연(閭延) 등 폐사군(廢四郡)을 거쳐 상토·마전령(麻田嶺)을 넘어 산길을 따라 오는 경우, 종포(從浦)·이동(梨洞) 등 보를 지나 강계까지는 불과 30리요, 적이 평륙(平陸)을 따라 오는 경우, 욋괴(夞怪)·건자포(乾者浦) 등 보를 지나 독로강(禿魯江)을 따라 올라와서 산 옆으로 잔교(棧橋)를 이용하여 오면 강계까지 겨우 33리가 된다. 그 고을의 군병 및 소속 4보(마마해(馬馬海)·추파(楸坡)·종포(從浦)·이동(梨洞))의 토졸을 직접 거느리고 그 충돌태세를 막지 않을 수 없으며, 귀성의 경우에 있어서는 또 순변사가 주차(駐箚)하는 곳에 해당하니 두 영장이 모두 그 통제를 받는 것이 옳습니다. 귀성이 만약 순변사를 겸임하지 않은 경우는 여러 수령들과 같이 우영(右營)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1. 압록강(鴨綠江) 이남, 청천장(淸川江) 이북의 각 고을에는 모두 산성이 있다. 의주(義州)의 백마(白馬), 용천(龍川)의 용골(龍骨), 철산(鐵山)의 운암(雲暗), 선천(宣川)의 검산(劍山), 곽산(郭山)·정주(定州)의 능한(凌漢), 가산(嘉山)의 효성(曉城)은 모두 요해지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굳게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용골은 비록 좋으나 또 본부의 읍성(邑城)에 샘이 있는 것만 못하고, 또 대중을 수용할 수는 있으나 다만 그 길 옆이므로 수축하기가 어려운데 만약 때에 임하여 수축하여 백성과 같이 들어가 지키면 더욱 편의하다. 곽산이 영장으로 된 것이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용천·철산의 군병을 모두 철수하여 내군(內郡)에 전속시킴은 바로 북로의 육진(六鎭)을 포기하고 영장을 설치한 경우와 동일한 규모이니, 이는 매우 잘못된 계획이다. 백마(白馬)는 저들과 가까운데 무너진 성벽(城壁)을 지금 수리하기가 어렵고, 용골·운암·검산의 경우는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그 군병을 직접 거느리고 그 성을 보호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능한성(凌漢城)은 그다지 크지 않으나 정주·곽산 두 읍을 거쳐 들어오는 곳으로서 주인은 낮고 객은 높아 문득 말썽이 생기게 된다. 정묘·병자의 앞뒤 실패는 모두 똑같은 경우에서 빚어진 일이니 지금 만약 정주를 그 성주(城主)로 정하고 곽산이 지원하여 지키도록 하면 일은 순조롭고 싸움은 가라앉을 것이며 보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곽산에 굳이 절충(折衝)으로 차출하여 파견한 것은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영장이기 때문이었으나, 지금 이미 폐지하였으니 품계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옳다. 효성은 지형이 관방(關防)을 설치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나 지금 새로이 축조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그 고을 군병으로 하여금 험준한 곳을 나누어 지키게 하면 남쪽으로는 안주(安州)의 척후(斥候)가 될 것이요, 북쪽으로는 정주의 당보(搪報)註 2) 가 될 것이니 이도 매우 타당하다. 박천(博川)은 대정강(大定江)의 상류를 지키거나 가산과 더불어 효성을 지원하여 지키고, 태천(泰川)에는 역시 옛 성이 있으니 이름을 농우(壠右)라 한다. 산은 높고 성은 견고하며 또 창성으로 가는 지름길로서 곧장 철옹(鐵甕)에 도달하는 곳이니 그 백성을 모두 데리고 들어가 지키면 역시 스스로 보호할 수 있다. 비록 그렇더라도 직로의 여러 읍 가운데 한 사람의 통제가 없을 수 없다. 선천 방어사의 권한은 능히 다른 진(鎭)을 지휘할 수 있고, 또 병사(兵使)와 순변사(巡邊使)의 통제에 응할 수 있으나, 오직 의주의 정세가 여러 읍의 경우와 다르니 독자적으로 하나의 진(鎭)으로 자립(自立)하여야 한다.
1. 지난해 선사포(宣沙浦) 첨사가 가도(椵島)로 옮겨 들어간 것은 본래 바닷길을 방비하기 위한 것으로 의주·용천·철산 등 3 고을에서 모두 성으로 들어가지 못한 노약자들이 또한 들어가 보위할 수 있으며, 선천·정주·곽산의 남은 백성은 그 거리의 가까움에 따라 신미도(身彌島)에 들어가는 것이 편의하니 비록 전쟁이 잇따르는 일이 있더라도 두 섬의 경우 능히 갈고 심어 자활할 수 있을 것이다.
1. 지난번 새로이 설치한 안의보(安義堡)에 있어서는 곧 귀성의 길을 막기 위한 것이요, 막령(幕嶺)은 곧 삭주의 길을 막기 위한 것이며 시채(恃寨)는 당알령(當遏嶺)을 지켜 창성의 큰길을 막기 위한 것이다. 차령(車嶺)·우현(牛峴) 두 진은 운산(雲山)·이산(理山) 일대를 연이어 장악하고 있어, 지세(地勢)는 험하고 모집한 군병도 정예하다. 다만 신광(神光)이 위치한 곳이 약간 치우쳐 있으나 향곡(餉穀)이 1만석이 넘고 둔병(屯兵)도 1천이 가까우니 여러 진 가운데 제 1이라 일컬을 만 하다. 사변을 당하는 경우 험준하고 좁은 입구 한 곳만 지키게 할 뿐 아니라 또 병력을 지원에 동원시켜 우현(牛峴)·시채(恃寨) 등 여러 진을 성원할 수도 있다. 우구리(牛仇里)에 만호(萬戶)를 다시 설치한 것은 이익형(李益亨)이 말한 것이요, 임토(林土)에 다시 별장을 차출한 것은 이충립(李忠立)이 말한 것이다. 지형을 참고하고 중론을 참작하면 이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1. 강변의 봉수(烽燧)는 만포에서 시작하여 강을 따라 내려와 의주에 이르고 다시 바다를 거슬러 올라가 서울에 도달한다. 그런데 한 갈래는 욋괴(夞怪)·상토(上土)·등공(登公)·구비(仇非)·이동(梨洞)을 거쳐 강계에 도달하여 그친다. 이는 강계로 하여금 강변에 위급한 일이 있음을 알게 하여 만포에 지원하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 신광(神光)·우현 등 여러 진을 새로이 설치하였는데 내륙에 위치해 있고 또 열(列)지어 있는 봉우리에 서로 통보하는 일이 없으므로, 비록 위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미처 수습하여 싸움에 대비하지 못할 걱정이 있으니 이를 제 때에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감·병사로 하여금 좋은 계책에 따라 상의하여 변통하도록 할 것이다.
1. 지난번 이간(李旰)의 서장(書狀)을 본즉 비국에서 서북의 병무(兵務)에 관하여 분부한 사실로 인하여 곧 우후 윤하(尹河)를 강변으로 들여보냈다. 강변의 읍보(邑堡) 가운데 보유한 군기(軍器)는 모두 병자·정축 이전에 조치한 것으로서 실로 사용할 수 없으며, 근래 2∼3 변쉬(邊倅)가 새로이 갖추어 놓은 기계가 있다. 강계부사 박진한(朴振翰)이 준비한 조총은 3백 자루에 달하고 창성부사 노전(盧銓)이 50자루, 아이첨사(阿耳僉使) 정시응(鄭時凝)과 시채첨사(恃寨僉使) 이시즙(李時楫)도 모두 30∼40자루에 달하나 이 물건이 과연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후가 순회, 점검할 때에 총은 많고 군병은 적은 경우에는 반드시 정예를 더 선발하여 그 총의 숫자와 같게 할 것이며, 만약 군병은 많고 총은 적은 경우에는 반드시 정밀한 총을 더 준비하여 그 군병의 수와 같게 해야 한다. 또 긴요한 지역에 군병과 총이 모두 적은 때에는 적당히 그 수를 증가시키되 원래 재력이 미치지 못하거나 사람이 적은 경우에는 억지로 구하여 채우기가 어려운 일이니 이러한 뜻을 우선 이간(李旴)에게 통보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1. 관서의 병영(兵營)은 옛날에 영변(寧邊)에 있었는데 뒤에 안주(安州)로 옮겼다. 대체로 이는 본주(本州)가 큰길의 요충에 위치하여 험준한 곳을 등지고 강을 앞에 하여 가장 지형적인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일로(一路) 대수(大帥)의 통제지역이 되었는데 들어가 보위(保衛)하는 일이 있는 경우, 더욱 지원하여 지킬 군병이 없을 수 없다. 마땅히 병사(兵使)로 하여금 미리 안배하여 약속하도록 할 것이며, 자모(慈母)·황룡(黃龍)·보산(保山) 등 여러 성에 있어서도 미리 안배하여 지켜야 할 고을을 정할 것이니 본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상의하여 보고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
1) 솔연(率然) : 뱀의 이름임. 머리를 치면 꼬리가 응하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응하며 복부(腹部)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응하므로 이를 진범(陣法)에 비긴 것임.
2) 당보(搪報) : 적의 동정을 살피는 병사. 곧 당보수(搪報手)가 높은 곳에 을라서 적의 동정, 형편을 살펴서 알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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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291권 25년 6월 16일 (계유) 004 / 농사철 백성들의 노고를 줄이려 헌릉의 수리를 가을로 연기하게 하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헌릉(獻陵) 정자각(丁字閣)의 수리(修理)에 들어가는 석회(石灰) 1백 40석(碩)을 개성부(開城府) 풍덕 군민(豐德郡民)으로 하여금 구워 내게 하였는데, 신 등의 생각으로는 능침(陵寢)의 수즙(修葺)이 부득이(不得已)한 것이기는 하나, 장마철이 장차 닥치면 공역이 쉽게 진행되지 못할 것이고, 농사철에 백성을 역사(役使)시킴도 또한 작은 일이 아니니,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그것을 대신(大臣)과 예조(禮曹)에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윤필상(尹弼商)·노사신(盧思愼)·윤호(尹壕)·유지(柳輊)는 의논하기를,
“능침(陵寢)의 수즙(修葺)은 부득이한 것이나, 농사철에 백성을 역사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선 추성(秋成)을 기다리소서.”
하고, 한치형(韓致亨)·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능침의 수즙은 부득이한 일이나 농사철에 백성을 사역시키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청컨대 당령 선군(當領船軍)27753) 으로 하여금 구워내게 하소서.”
하고, 윤효손(尹孝孫)·성현(成俔)·송영(宋瑛)·이숙감(李淑瑊)은 의논하기를,
“정자각(丁字閣)의 비가 새는 곳은 급히 수리(修理)함이 마땅하나, 석회(石灰)는 가을을 기다려서 구워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윤필상(尹弼商) 등의 의논을 따랐다.
【원전】 12 집 546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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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37권 17년 1월 12일 (병오) 003 / 장용청 설치 연혁
앞서 임인년5484) 에 명하여 무예 출신(武藝出身)과 무예 별감으로 장교를 지낸 사람 30명을 가려서【숙묘(肅廟) 을축년에 무예 별감 30명을 훈련 도감의 국출신(局出身)의 3개 번(番)에 번갈아 임명한 제도를 따른 것이다.】 번을 나누어 명정전(明政殿) 남쪽 회랑에 입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을사년5485) 에 장용위라 호칭하고 20명을 늘리니 이것이 장용영이 설치된 시초이다. 이때부터 해마다 인원을 늘려 왔는데, 척씨(戚氏)5486) 의 남군(南軍)5487) 제도를 본받아 5사(司)에 각기 5초(哨)를 두는 것으로 규례를 삼고 3초는 초마다 1백 15명으로 하였다.【정규 군인 90명, 기총(旗摠) 3명, 대장(隊長) 9명, 서자적(書字的) 1명, 패두(牌頭) 1명, 고수(鼓手) 1명, 인기수(認旗手) 1명, 화병(火兵) 9명이다.】 정미년5488) 에 처음으로 27명을 두기 시작해서 무신년에 88명을 증원하여 좌초(左哨)를 만들었고, 신해년에 우초(右哨)를 늘렸으며, 계축년에 중초(中哨)를 늘렸다.
5초는 서울에 있었으니 초마다 1백 23명이었다.【정규 군인·기총·대장은 위와 같고, 복마군(卜馬軍) 9명이 많았다.】 정미년에 전초(前哨)를 처음으로 두고 무신년에 중초와 후초를 늘렸으며 계축년에 좌초와 우초를 늘렸다. 5초는 수원에 있었는데, 기유년에 5초를 처음으로 창설하였는바 전초는 진위(振威)에 있고, 좌초는 양성(陽城)에 있고, 중초는 용인(龍仁)에 있고, 우초와 후초는 광주(廣州)에 있다.
2초는 무신년에 창설했는데, 우초는 고양(高陽)에 있고 후초는 파주(坡州)에 있으며, 3초는 을묘년에 증설했는데, 전초는 안산(安山)에 있고 좌초는 과천(果川)에 있고 중초는 시흥(始興)에 있다. 3초는 무신년에 창설했는데, 전초는 지평(砥平)에 있고 좌초는 양근(楊根)과 가평(加平)에 나뉘어 있고 중초는 양주(楊州)에 있다. 우초와 후초는 을묘년에 증설했는데, 우초는 양주에 후초는 장단(長湍)에 있다.【초마다 정규 군인 90명, 기총 5명, 대장 9명, 서기(書記) 1명, 능마아(能麿兒) 1명, 고수 1명, 인기수 1명, 사후(伺候) 2명, 부엌일하는 사람 1명, 화병 9명, 복마군 9명이다.】 96명은 임인년에 훈국 기예군(訓局技藝軍) 15명이 이속된 것을 비롯하여 을사년에 15명을 증원하고, 무신년에 17명을 증원하고, 기유년에 5명을 증원하고, 경술년에 9명을 증원하고, 신해년에 5명을 증원하고, 임자년에 9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21명을 증원한 것이다.【원군(元軍)이 85명, 서자적 1명, 패두 1명, 복마군 5명, 회자수(劊子手) 4명이다.】
92명은 임인년에 훈국 기예군 15명이 이속된 것을 비롯하여 을사년에 15명을 증원하고, 무신년에 13명을 증원하고, 기유년에 5명을 증원하고, 경술년에 9명을 증원하고, 신해년에 5명을 증원하고, 임자년에 9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21명을 증원한 것이다.【원군 이하는 위와 같고 회자수가 없다.】
95명은 정미년에 25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5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원군은 88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1백 명은 정미년에 28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3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원군은 93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65명은 무신년에 16명으로 창설하여 신해년에 7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2명을 증원한 것이다.【원군 51명, 서자적 1명, 패두 1명, 복마군 2명, 원역(員役) 10명이다.】
45명·50명·57명이 있다.【등롱군(燈籠軍) 이하의 세 종류 군대로서 모두 정미·무신년부터 차례로 늘린 것이다.】
별장은 표하군이 40명, 사(司)는 표하군이 30명, 선기장(善騎將)은 표하군이 18명이고, 초관(哨官)·지구관(知彀官)·교련관(敎鍊官)·통장(統長)·장용위의 패두는 모두 사후군(伺候軍)을 두었다. 공장(工匠)의 아병(牙兵)이 29명, 수송을 맡은 복마군이 40명이다.
5초는 6백 5명이고 표하군은 1백 64명이다. 배봉진(拜峰鎭)【기유년에 설치하였다.】은 아병 2초, 표하군 23명, 향취수(鄕吹手) 30명이고, 고성진(古城鎭)은【임자년에 이속되었다.】 아병 2초, 표하군 58명이고, 노량진(鷺梁鎭)【계축년에 이속되었다.】은 좌우 아병 1백 21명, 표하군 23명, 향취수 30명이다.
그리하여 기병과 보병이 총 5천 1백 52명인데, 여기에 도제조【1원.】는 계축년에 처음 두어 대신 중에서 당시 호위 대장을 겸임한 사람을 예겸시키고, 호위청을 장용영에 통합하였다. 향색 제조(餉色提調)【1원.】는 호조나 선혜청의 시임 당상관이나 일찍이 역임한 사람을 갖추어 의망한다. 사(使)【1원.】는 일찍이 장수를 지낸 사람에게 제수한다. 계묘년에 처음으로 둔 병방(兵房)은 장수의 직임이나 포도 대장을 지낸 사람을 일찍이 임명하여 병방이라 이른 것이니, 그것은 정원의 병방 승지가 오위(五衛)의 습조(習操)와 점고를 관장하는 예를 본뜬 것이다. 계축년에 사(使)【문서에서는 대장(大將)이라 칭했다.】로 호칭을 바꾸고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낸 사람을 제수하였다.【으레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했다.】 종사관(從事官)【1원.】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음관(蔭官)으로 임명하였다. 선기 별장(善騎別將)【2원.】은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아장(亞將)으로 임명하였다. 습진(習陣) 때나 중일 시사회(中日試射會) 때의 행 중군(行中軍)·행 파총(行把摠)【5원.】은 무신년에 처음으로 두어 기유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2품 절도사에서부터 방어사까지의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선기장(善騎將)【3원.】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신해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상 3품관으로 임명하였다.
초관(哨官)【25원.】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무신년·기유년·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하 3품관 이하로 임명하였다.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15원.】는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장수 집안의 자손이나 지벌이 두드러지거나 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가려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지구관(知彀官) 21원, 무예 통장(武藝統將) 2원, 【무예 별감을 거느려 숙위에 대비한다.】 별부료(別付料) 2원, 【 글을 알고 계산에 밝은 자로 삼아서 본 장용영의 회계를 맡게 한다.】 교련관(敎鍊官) 20원은 본 장용영에 출사하는 것을 면제한다. 패장(牌將) 8원【전각의 계단 아래서 일을 맡는다.】, 약방(藥房) 1원, 침의(鍼醫) 1원, 화원(畵院) 1원, 사자관(寫字官) 1원, 별무사(別武士) 36인, 부료 무사(府料武士) 16인,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3인, 대령 서리(待令書吏) 3인, 조보 서리(朝報書吏) 1인, 서원(書員) 7인, 고직(庫直) 13명, 대청직(大廳直) 1명, 도방자(都房子) 4명, 궁시인(弓矢人) 2명, 도변수(都邊首) 2명, 사령(使令) 41명, 구종(驅從) 14명, 우장직(雨裝直) 2명, 다모(茶母) 2명, 의막 군사(依幕軍士) 2명, 제약군(劑藥軍) 1명, 문서직(文書直) 12명, 방자(房子) 15명, 소방자(小房子) 22명, 군사(軍士) 5명, 사환군(使喚軍) 30명, 역인(役人) 15명, 복직(卜直) 5명, 사고직(私庫直) 4명, 기영 겸감색(畿營兼監色) 4명, 향군 구관 감색(鄕軍句管監色) 26명이었다.【각 고을의 향무사(鄕武士) 13명, 읍리(邑吏) 13명이다.】
상이 또 군대가 있으면 군량이 있어야 하므로 매번 하나의 영(營)을 둘 때마다 백성들이 그 해를 받아, 훈국을 설치하면서는 3년 동안의 세금으로 2필의 포(布)가 생기었고,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을 설치하면서는 보미(保米)와 보포(保布)가 6도에 편만해졌는데, 지금 다시 각영이 하던 대로 한다면 원대한 도모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과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주가미(甲胄價米)와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 등까지를 혹은 바로잡아 떼주기도 하고 혹은 모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이런 종류들을 미루어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며, 혹은 상정(詳定)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값을 주고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창고의 곡식이 총 43만 1천 6백 91석이었는데, 이를 관서·해서·호서·호남·영남·관동에 나누어 두었고, 3진(鎭)의 곡식은 총 9천 9백 48석이었는데, 매년 한 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쌀은 2만 5천 8백 90석이고, 대두는 4천 6백 90석이고, 돈은 7만 8천 8백 95냥이고, 무명은 3백 67동 19필이고, 삼베는 26동 25필이었다.
수원부를 이미 외영(外營)으로 삼고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가져다 한 사람에게 한 필씩을 준 다음 훈국의 말 지급 규정에 비추어 해마다 모자라는 수를 채웠는데, 그 수가 매년 30, 40필을 내리지 않았다.【화성의 군제는 끝내 오위의 제도를 본떠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윤하(允下)되었다.】 이것이 내영과 외영의 시말이다.
기유년에 현륭원을 옮기고서 옛 원(園)터는 바로 28년 동안 궁검(弓劍)을 모셨던 자리이므로 차마 황폐해지게 버려둘 수 없다 하여 파주(坡州)의 옛 장릉(長陵)5489) 예에 따라 위전(位田)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해주고,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배봉진이라 칭하여 장용영에 소속시켜서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으로 삼고 아병(牙兵) 2초를 두었다.
노량(鷺梁)은 현륭원 행행의 초입로에 주필하는 곳이므로, 옛날 금위영에 소속되었던 별장을 장용영에 이속시키고 군제를 배봉진과 같이 하여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삼았다. 관서의 고성진(古城鎭)은 관방의 중요 지역임에도 피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총융청의 덕지둔(德池屯)의 예에 따라 장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삼아서 네 개 고을의 둔전을 관장하게 하고, 5초의 군교(軍校)를 정하여 별중사 파총(別中司把摠)이라 호칭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박천 군수(博川郡守)를 겸파총(兼把摠)으로 삼아 장용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진(三鎭)의 시말이다. 그리고 12년인 무신년에 상이 경기도의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양근(楊根) 등 네 고을의 수어청 둔전 아병 15초에서 매 초마다 25명씩을 떼내서 초를 만들어 몰잇군을 대신하게 하고, 양주와 고양(高陽)에 2초를 설치하고 아울러 둔전을 병사가 있는 고을에 설치하였다. 축령산(祝靈山)과 용문산(龍門山) 두 산을 사냥하는 장소로 삼아 그 산을 봉산(封山)5490) 으로 정하고 팻말을 세웠는데, 그것은 군사를 농사에 붙여 두는 뜻에서이다.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績城)도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세 고을의 경내는 둔전을 설치하기에 합당하지 않아 거기서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었다. 을묘년에 수어청이 진영을 두면서 마병(馬兵)은 짐의 양에 비추어서 2천 4백여 명을 줄였으나 속오군은 따지지 않았고 마병 2백 명은 그 대신의 아병으로 대신하고 표하군 8백 명은 일이 헐후한 곳으로 정해서 각 군문에 급대(給代)하였다. 그리고 6초의 군사를 광주(廣州)·안산·용인·시흥·과천 다섯 고을에 그대로 두고 돈 2만 민(緡)을 내주어 그들 군사가 있는 곳에 따라 둔전을 벌여 두도록 했는데, 이것은 향군(鄕軍)의 시말이다.
장용위(壯勇衛)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딴 것이고, 삼부(三部)를 설치하지 않고 오사(五司)를 설치하여 서울과 시골에 나누어 둔 것은 〈중국〉 남방의 군제를 본뜬 것이며, 장용위를 혹은 군사들 속에서 뽑고 혹은 취재(取才)하기도 하고 혹은 출신자로 하기도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본뜬 것이고, 정원 밖에 무반 집안의 자제를 뽑은 것은 장수 재목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선기대(善騎隊)를 혹은 말타는 재간을 가진 자를 뽑고 혹은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본뜬 것이고,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은 훈국에서 본뜬 것이나 7도(道)에 두루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도의 근기(近畿)를 중히 여겨서이며,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으로 일컫게 한 것은 어영을 본뜬 것이고,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을 본뜬 것이며, 중군을 두지 않고 별장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광묘(光廟)5491) 때의 좌상(左廂)·우상(右廂)과 숙묘(肅廟) 때의 정초청(精抄廳)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로되 천총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옛 제도를 본뜬 것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병학통(兵學通)》을 사용하고 기예 시험에 《무예보(武藝譜)》를 사용한 것은 영묘(英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유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며, 내사와 외사가 차는 부신(符信)과 밀부(密符)는 통용하면서 병부(兵符)만은 특별히 호부(虎符)를 쓰는 것은 잔뜩 성을 내어 으르렁거리는 범에서 뜻을 취함과 동시에 국초(國初)의 일을 이어받자는 데서 온 것이다.【병방을 설치한 초기에 하교하기를, “명소(命召)하는 제도는 특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부신(符信)만이 있었다. 그래서 장신(將臣)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도 부신(符信)이 없는 데에 대하여 예전부터 경륜 있는 인사들의 의심스럽게 여기는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은 이를 참작해서 호부(虎符) 1개와 전령패(傳令牌) 1개를 만들어 지급해야겠다.” 하였다.】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원전】 46 집 372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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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38권 17년 10월 21일 (신사) 002 / 비변사가 아뢴 장용 외영의 군제에 관한 절목
비변사가 장용 외영(壯勇外營)의 군제(軍制)에 관한 절목(節目)을 아뢰었다.
【보군(步軍)을 바로잡는 데 대한 절목. 1. 본부(本府)가 방영(防營)일 때는 보군의 정원 총수가 26초(哨)였는데 정원수가 많아서 구차스럽게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본부가 장용영의 외영으로 승격되어 부 전체의 군사를 모두 묶어서 편성하였으니 군제를 반드시 정밀하고 알차게 하기를 힘쓰며 군량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조달이 된 뒤라야 군호(軍戶)와 군보(軍保)가 서로 도와서 병력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26초 가운데서 근본이 확실하고 체력이 건장한 양정(良丁)으로 13초를 뽑아 부대를 편성하고, 13초는 보군(保軍)으로 강등하여 쌀을 거두어 군사를 기르게 하고 정군(正軍)의 자리가 비게 되면 차례대로 승급시켜 채우되 경영(京營)의 대년군(待年軍)의 예와 똑같이 한다. 그러나 다만 지금은 양정을 확보하기가 극히 어려워서 보군을 양정으로 채우면 7초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나머지 6초는 부득이 사천(私賤)으로 우선 숫자를 메우되 이는 3년을 기한하여 양정으로 바꾸어서 13초의 수를 맞추게 한다. 1. 13초를 이미 3사(司)의 편제로 정하였으니 좌사·중사·우사로 그 사의 이름을 정하고 전사와 후사는 각각 5초를, 중사는 좌초·중초·우초의 3초로 마련한다. 1. 군수품을 실어나르는 복마군(卜馬軍)은 애당초 기병과 보군에 분배하지 않고 각 초에서 혼동하여 사역을 시키므로 자못 일정한 규정이 없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보군 13초의 매 초마다 7필의 말을 마련하여 소속시킨다. 1. 장령(將領) 중 천총(千摠)의 직임은 별로 긴요하지 않기에 내영(內營)에서도 설치하지 않았으니 외영도 내영의 예에 따라 설치하지 않는다. 3사(司)의 파총(把摠)은 경내에서 경력이 있는 당상 무관으로 차출하고, 각초(各哨)의 초관(哨官)은 일곱 자리는 수문장(守門將)·부장(部將)으로 추천받은 자를 임명하고 여섯 자리는 편제를 정하되 선전관·수문장·부장으로 추천받은 사람 중에서 전직 조관(朝官)으로 참상(參上)·참하(參下)와 출신(出身)을 통틀어 차출한다. 추천받은 출신을 이미 별군관(別軍官)으로 편성하였으니 초관을 분배하여 추천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또 별군관은 군총(軍摠)과는 달리 겸임에 구애받지 않는다. 1. 본부는 원래 외도감(外都監)이기 때문에 군사들 복색도 훈련 도감의 예를 모방하여 전건(戰巾)과 홑동달이[單挾袖], 사방 색깔에 맞춘 더그레[號衣]를 갖추어 간편하고 비용을 줄이는 방도로 하고, 서울 군영의 예에 따라 스스로 마련하게 한다. 군기인 조총(鳥銃)·환도(環刀)·남날개[南飛箇]·화승(火繩)·화약·탄환 등의 물품은 본부의 군기소(軍器所)에 있는 것을 나누어주며, 역시 내영(內營)의 단총수(單銃手)에 대한 규정에 따라 기대장(旗隊長)과 사수(射手)의 활과 화살도 자체 마련하지 말도록 한다. 1. 보군(保軍)의 신역(身役)은 양인(良人)이면 쌀 6두나 돈 2냥씩을, 종이면 쌀 3두나 돈 1냥씩을 외영(外營)에서 편리한 대로 받아들인다. 1. 해마다 원(園)에 거둥할 때에는 몇개의 사(司)와 몇개의 초(哨)가 고을 경계에 모여 대기하였다가 어가(御駕)를 맞이하여 따르며, 읍과 원소(園所)의 역참에서 빙 둘러서서 호위하는 등의 절차는 유수(留守)가 그 날짜 전에 분부를 받아 거행하도록 한다. 보군의 유방(留防)에 대한 절목. 1. 이미 외영을 설치하였고 또 군제를 정하였으니 이제 이 보군도 내영의 향군(鄕軍)들과 함께 번갈아 번을 서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설치한 초기 단계라서 갑자기 의논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해마다 동짓달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우선 행궁(行宮) 방어에 임하게 하여 번갈아 번을 서는 폭으로 치고 또 유방할 때는 날마다 무예를 연마하여 성취함이 있도록 한다. 1. 13초의 군사를 5번(番)으로 나누어 편성하고 번드는 차례는 15일로 기한을 정한다. 동짓달 16일부터 전사(前司)를 시작으로 첫 차례는 3개 초가 하고 둘째 차례는 2개 초가 번을 서며, 다른 사(司)도 이런 식으로 교대한다. 중사는 3개 초로 되어 있으므로 두 차례로 나눌 필요가 없고 사 전체가 번을 선다. 1. 번을 들 때는 해당 사의 파총과 각 초의 초관이 군사를 통솔한다. 군영을 아직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번드는 장소는 편의에 따라 이동할 것이다. 파총은 평상시 장령(將領)이 입직(入直)하던 곳에서 입직하고 초관은 각각 자신의 군사들이 번을 든 곳에 배치되어 입직하면서 통솔하도록 한다. 지구관 1명과 기패관(旗牌官) 2명은 반드시 사리에 밝은 사람에게 맡겨 함께 지휘 감독하게 한다. 1. 자체 훈련은 날마다 실시하되 첫 날과 마지막 날은 훈련장에서 하는 규정과 똑같이 연습하고 중간 날에는 18가지 무예를 《무예도보(武藝圖譜)》에 의거하여 가르치고 시험을 보인다. 번을 든 지 제 11일이 되는 날에는 활쏘기와 화포쏘기의 시험을 보이고 약간의 시상을 실시한다. 1. 자체 훈련할 때나 무예를 시험할 때 교사(敎士)가 없을 수 없으므로 번드는 초는 각초마다 진법 교사(陣法敎士) 1명과 기예 교사(技藝敎士) 1명을 선정하여 전일하게 가르치도록 한다. 1. 번이 교체할 때마다 상번(上番)하는 군사와 하번(下番)하는 군사는 같은 사의 편제를 이뤄야 되므로 반드시 새 번과 묵은 번이 합동 훈련을 하여 사의 단위로 하는 훈련법을 알도록 한다. 중사(中司) 3개 초는 단독으로 번을 서므로 하번하기 하루 전 합동 훈련 조례에 따라 전체적인 훈련을 실시한다. 1. 양인 군보 8백 40명이 각각 쌀 6말, 천인 군보 7백 20명이 각각 쌀 3말을 내는데 쌀을 맡아 거두는 사람 몫을 제하고도 실제 거두는 쌀이 4백 68섬이고, 자기 집에 있는 군관 1백 47명과 금군의 군포를 무는 군관 1백 2명이 각각 쌀 6말을 내는데 쌀을 맡아 거두는 사람 몫을 제하고도 실제 거두는 쌀이 97섬 3말이어서 쌀이 도합 5백 65섬 2말이다. 이 중에서 번든 군사에게 각종 급료로 지급하는 쌀과 잡비로 쓰는 쌀 3백 73섬 11말을 제하고 나면 남는 쌀이 1백 91섬 7말이 된다. 이것은 본부(本府)에 저장해두고 필요한 데 쓰도록 한다. 친군위(親軍衛)의 유방에 관한 절목. 1. 군제의 정원을 줄여서 골라 뽑은 것은 정예한 군사를 편성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기예를 연습하는 일이 가장 요긴한 업무이다. 좌열과 우열로 번을 나누고 외영(外營)에 주둔 근무하면서 한편으로는 행궁(行宮)을 호위하고 한편으로는 날마다 기예를 익혀야 된다. 보병의 근무기간이 동짓달·섣달·정월 이 석달이므로 기병과 보병이 동시에 번을 서는 것은 서로 불편한 점이 있을 듯하다. 반드시 봄·가을 농한기에 열을 나누어 번을 정하되 2월에는 좌열이 3개 번으로 나누어 매번이 10일간씩 34명이 교대하여 근무하고, 10월에는 우열이 좌열의 예와 같이 근무한다. 그리고 번을 들 때는 전진 후퇴의 동작을 겸해 익혀서 기필코 기예를 익힌 효과가 있도록 한다. 1. 부대가 편성된 날짜가 얼마 안 되어 마상 기예(馬上技藝)의 기초를 전혀 알지 못하는데 이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매 열(列)의 장교 가운데서 각종 기예에 익숙한 사람을 교관으로 정하여 가르치고 완전히 익히도록 한다. 1. 이번에 줄인 마보(馬保) 4백 44명 중에 쌀을 맡아 거두는 사람 8명을 제하면 실제 거두는 쌀이 1백 74섬 6말이고, 물자 수송 군사를 줄인 1백 명 중에 쌀을 맡아 거두는 사람 2명을 제하면 실제 거두는 쌀이 39섬 3말이며, 전에 마보를 줄인 2백 4명 중에 쌀을 맡아 거두는 사람 4명을 제하면 실제 거두는 쌀이 80섬이므로 이를 도합하면 2백 93섬 9말이 된다. 장령들 급료로 지급할 쌀과 콩 34섬 12말과, 친군위가 유방할 때 급료로 지급할 쌀과 말먹이 76섬 8말과, 기수(旗手)·원역(員役)의 갖가지 급료로 지급할 80섬 9말을 제하면 남아 있는 쌀은 1백 1섬 10말이 되는데, 이는 외영에 저장해두고 각종 필요한 비용에 대비한다. 친군위의 도시(都試)에 관한 절목. 1. 본부의 마병은 도시가 있고 관무재(觀武才)가 있어서 권장하는 방도가 원래 잘 서있지만 지금 군제를 개편하는 때를 당하여 격려하고 성취시키는 방도를 더욱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봄·가을 두 차례 보이는 도시는 송도와 강화도에서 실시하는 예에 따라 시행하며 규정도 송도의 예를 따른다. 철전(鐵箭)은 1백 보 밖에서 3시(矢)를, 유엽전(柳葉箭)은 1순(巡)에 5시를, 편전(片箭)은 1순에 3시를, 기추(騎蒭)는 한 차례에 5시를, 편추(鞭蒭)는 한 차례에 여섯 번 명중시키며, 조총(鳥銃)은 1순에 3방을 명중시키면 합격자로 한다. 1. 좌열과 우열에서 장원을 차지한 사람과 유엽전·편전·기추에서 전부 맞힌 사람은 신역(身役)과 성명 그리고 기예에서 얻은 점수를 기록하여 계문(啓聞)한다. 좌열의 친군위로서 첫번째 차례에 장원하였거나 전부 맞힌 사람은 가선(嘉善)이면 위장(衛將)에 제수하고, 절충(折衝)과 추천을 받지 못한 출신[無薦出身]이면 모두 가자(加資)하며, 장교로서 전함(前啣)이 한량(閑良)이면 곧장 전시(殿試)에 응시한다. 두번째 차례에 장원하였거나 전부 맞힌 사람은 가선이건 당상이건 논할 것 없이 변장(邊將)에 제수한다. 우열의 친군위 한량으로서 장원하였거나 전부 맞힌 사람은 좌열의 예에 따라 곧장 전시에 응시하되 모두 순서대로 구별하고 기록해서 계문하고 해조의 품처(稟處)를 기다린다. 1. 좌열 가운데서 2등이나 3등을 한 사람은 창감(倉監)이나 고감(庫監)으로 차서에 따라 임명하고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임무는 그대로 가진다. 우열 가운데서 2등을 한 사람은 곧장 회시(會試)에 응시하고 3등을 한 사람은 본부가 보관하고 있는 쌀로 시상하며 그 일체를 계본을 작성하여 아뢴다. 1. 장원한 사람으로 위장(衛將)에 제수된 자는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에 딸린 기사(騎士)의 예에 따라 전직을 그대로 겸임하게 하며, 곧장 전시에 응시한 사람은 발표를 기다려 별군관(別軍官)으로 전직시켜서 벼슬길을 터준다. 1. 도시의 시관(試官)은 유수(留守)가 주관하고 중군(中軍)과 종사관(從事官)이 참시(參試)하는데, 복장은 융복(戎服)을 입고 거행한다. 유수영(留守營)의 별군관에 관한 절목. 1. 별효사(別驍士)를 창설했을 때 그 선발을 신중하게 하고 그 명칭을 좋게 했던 것은 경내의 무사들이 모두 격려되고 고무되는 효과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출입이 무상하여 대오(隊伍)가 빌 정도로 되었고 한갓 도시와 관무재를 보일 때 서울과 지방 한량들이 요행수로 과거나 차지하려고 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생각하면 군사 행정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지금 군제를 개편하는 이때 당연히 폐단을 바로잡고 실효있는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추천을 받아 뽑힌 한량들이 모두 친군위의 우열에 소속되었기에 무과에 급제한 많은 무사들이 홍패(紅牌)를 안고서 억울하다는 한탄을 할 것이다. 별효사(別驍士)의 명칭을 별군관(別軍官)으로 고치고 그 곳에 원래 살던 사람으로서 무과에 급제한 자 중 사대부 출신으로 선전관 추천을 받은 사람과 중인(中人)·서출(庶出)로 부장(部將)이나 수문장(守門將) 추천을 받은 사람 및 장용군(壯勇軍) 출신을 통틀어 임명 보충하되 말을 바치고 소속에 들게 한다. 그러나 2백 명 정원은 너무 많으므로 그 절반을 줄이고 1백 명으로 좌열과 우열을 편성하여 유수영(留守營)에 직속시켜 뒤를 차단하는 임무를 맡게 한다. 1. 경내의 무과에 급제한 사람으로 이미 군관에 소속되어 있으면 특별히 권장 발탁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초사(初仕) 한 자리는 좌열이나 우열에 떼어주고 5월과 동짓달에 도시를 실시하여 매 기간에 장원한 각 한 사람을 합격한 화살 수에 따라 기록하고 계문(啓聞)하여 매 도목 정사 때 수용의 자료가 되게 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침체해 있는 인사를 진작시키고 한편으로는 무예를 강습시켜, 경내 무사들이 출세하는 길이 이 길이 아니고는 없게 하여 앞날의 기피하는 습관을 막는다. 1. 무과 출신이 적어서 정원을 채우지 못하면 우선 자리를 남겨두고, 혹 출신한 사람이 많고 자리는 적어 정원이 넘치면 다시 품지(稟旨)하여 제도를 정한다. 1. 우열 친군위는 한량들이 과거를 차지하는 길이 되고 좌열과 우열의 별군관은 출신들이 벼슬에 나가는 계단이 되고 있다. 선전관 추천이건 부장·수문장 추천이건 논할 것 없이 무과에 급제하고 나서 추천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면 유수영에서 취재(取才)한 다음 소속시키는데, 이미 유수영 취재를 거쳤으면 병조의 장귀천(將鬼薦) 취재에 이중으로 응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유수영에서 시취(試取)한 뒤에 그에 관한 기록을 작성하여 병조에 보내고 그것을 근거 자료로 삼게 하는데, 역시 금군(禁軍)의 예에 따라 반드시 6개월 기한을 마친 뒤에 도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여 비로소 벼슬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출신 가운데서 만일 금군으로서 어가(御駕)를 수행하여 이미 6개월을 마친 사람은 달수에 구애받지 않는다. 1. 본영에 소속시키는 시취 규정은 출신자를 장귀천하는 규정에 따라 육냥전(六兩箭)을 90보 거리에서 3발을 쏘아 맞히고, 유엽전(柳葉箭)을 1순에 5발을 쏘아 2발을 명중시키고, 편전(片箭)을 1순에 3발을 쏴서 1발을 명중시키며, 기추는 한 차례에 5발을 쏴서 1발을 명중시키며, 병서(兵書)는 조통(粗通) 이상을 하여 도합 5기(技)에서 3기에 합격한 자를 뽑는다. 출신자로써 추천을 거치지 않고 취재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이 규정을 준용하고 이미 취재를 거친 사람은 2기에 합격한 것으로 간주한다. 1. 이미 군관으로 명칭을 고쳐 대열을 만들었고 또 마군(馬軍)의 편제에도 들지 않았으므로 별도로 장령(將領)을 둘 필요는 없고 서울에 있는 군영의 별장(別將)이 권무 병방(權務兵房)을 겸임하는 예에 따라 친군위의 별장이 병방 직무를 겸임하게 한다. 그리고 장무 군관(掌務軍官)은 풍채가 좋고 힘이 있고 근면하고 재간이 있어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하되 좌열과 우열에 각각 두 사람씩을 정하여 병방과 함께 전담하여 일을 처리하게 한다. 새로 소속시킬 때의 취재는 유수가 반드시 직접 실시하여 체모를 높이고, 합격한 무리들은 유수가 명령을 전달하고 임명한 다음 도안(都案)을 작성하여 한 통은 내영(內營)에 올려보내고 한 통은 유수영에 비치한다. 1. 사회(射會) 규정은, 유엽전은 5순, 기추는 3차(次), 편곤(鞭棍)은 1차, 그리고 별기(別技) 가운데서 1기를 1차 보는 것으로 한다. 그러나 여름의 6·7월 두 달과 겨울의 동지·섣달 두 달은 말 위에서 하는 기예는 제외한다. 1. 도시 규정은 별효사(別驍士)를 시취할 때처럼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실려 있는 대로, 철전(鐵箭)은 1백 보 거리에서 3시를, 유엽전은 1순에 5시를, 편전은 1순에 3시를, 기추는 한 차례에 5시를, 편추는 한 차례를 실시하여 시취한다. 1. 도시를 보이는 날짜는 기간 전에 날을 잡아 계문(啓聞)하며, 시관은 유수를 주시관으로 하고 중군과 종사관을 참시관으로 하며 융복을 입고 시행한다. 1. 원(園) 행차 때 어가가 머무는 일, 어가를 맞고 기다리는 일은 유수가 임시해서 분부를 받들어 거행한다.】
상이 내영 외영의 모든 절목을 모두 인쇄하여 각 군영과 다섯 곳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간수하고 제신들에게도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원전】 46 집 417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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