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6 한강하구의 군사사 1 – 대몽전쟁시기 2007/01/1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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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하구의 군사사 1 – 대몽전쟁시기

군사는 항상 낯선자를 상대한다. 전쟁의 본질적인 속성중의 하나는 불확실성이다. 한강하구는 역사상 세번의 전혀 상상하지 못한 낯선 상대를 직면한다. 그것은 당시 한반도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유라시아체계라는 점에서 하나의 한계였다. 첫번째는 몽골침략이었고, 두번째는 양대양요이다. 세번째는 한국전쟁이다. 몽골은 역사상 최초로 유라시아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고려를 침공한다. 프랑스와 미국 역시 근대 제국주의 시대를 맞아 전세계의 시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조선을 침략한다. 한국전쟁은 동전의 양면처럼 내전과 국제전의 이중주를 보이며 결정적으로 유라시아에 드리운 마지막 냉전의 그늘로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조선은 너무나 익숙한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의 침략을 받는다. 이들 침략과 전쟁 중 임진란을 제외하면 모두 한강하구가 그 충돌의 정점이 되었다. 유라시아지정학의 나침반은 조선을 만날 때마다 한강하구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은 한반도 역사의 나침반이 유라시아 지정학의 영향을 받을 때마다 한강하구와 강화를 향하고 있음을 증명한 첫 번째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려와 조선으로 일관되게 이어지는 군사전략이 선전후수先戰後守가 아닌 선수후전先守後戰이었던 것과 무관치 않으며, 이에따른 지구전과 유격전에 기인한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은 양조에 걸쳐 산성입보山城入保, 해도입보海島入保 전략으로 표현되었다. 강화는 고려, 조선 양조에 걸쳐 개성과 서울의 기전 즉 경기지방이면서도 조운의 요충지였다. 결국 수도를 선택, 운영, 방위하는데 있어 고대 중국의 공간관인 천하사상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 한 강화는 국가의 목과 같은 인후지지로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었으며, 한반도의 역사의 상위체계가 유라시아의 역사와 일관된 하나의 역사단위인 이상 유라시아 문명의 교류와 충돌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이미 전제하고 있었다. 여기에 방어위주의 해도입보 전략은 전란시에 강화가 임시수도가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국방의 요충지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한강하구와 강화의 성격은 동양적 세계관과 이에 따른 방어적 군사전략사상이 유라시아의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유의미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강하구의 성격이 역사상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분야가 군사사 임은 말할 것도 없다. 참으로 방대한 군사사이지만 여기서는 몽골침략기와 임진,병자호란기 이후 양대양요기, 한국전쟁전후기를 중심으로 한강하구를 둘러싼 군사의 역사를 회고해 본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건설할 안보의 방향과 형태를 상상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대몽전쟁시기 한강하구의 군사

사진: 삼별초 유허비
사진글 : 삼별초 유허비. 누군가의 불꽃이 바닷바람에 거세게 요동칩니다. 비석의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불꽃의 흔들림인지 모를 일입니다. 항전이 수단이라면 평화는 목적입니다.

무신정권과 민중항쟁세력
몽골침략과 강화천도 이전에 이들 사건의 전 과정을 규정하고 있었던 요소 중에 두가지 사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12세기에 이르러 고려의 문신귀족정치가 축적된 내부모순으로 인하여 와해되고 무신정권이 수립된 것이고, 이와 더불어 더 큰 동요를 보인 농민, 노비등을 주축으로 한 민중항쟁이 그것이다. 몽골의 1차 침략에 대한 고려의 방어전에서 우리는 두가지 인상적인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귀주와 자주등 북계 여러지역에서의 성보를 중심으로 한 관민 일체의 용전분투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한가지는 소위 초적草賊으로 지칭된 민중항쟁세력의 적극적인 항몽전선에의 참여사실이 그것이다.

초적이라 불리는 이들 농민항쟁세력은 12세기 이래 광범위하게 전개된 민중항쟁의 주체가 되었던 세력이다. 그중에서도 명종 20년(1190)이후 신종6년(1203)에 걸쳐 동경(경주)과 운문산(청도)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에서 김사미, 효심, 김순, 금초, 이비등에 의해 강력하면서도 끈질기게 지속된 일련의 민중항쟁은 이들 농민에 의해 주도된 대표적 저항운동이었다. 당시 이들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것은, ‘명종 24년 남로병마사가 효심의 무리를 밀성에서 격파 7천여 급을 참획하였다(고려사20명종세가24년4월 무술)’ 거나, ‘신종 6년에는 기계현에서 패좌의 무리가 장군 방수정의 공격을 받고 1천여급이 참수되고 250여 인이 사로잡혔다’(고려사절요14 신종6년2월)는 기록들이다. 이로써 볼 때 이들 농민항쟁 집단은 무인정권에게 가장 위협적인 저항세력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야별초의 출현도 이와 무관치 않아서 “최우가 나라에 도적이 많음을 염려하여” 이를 설치하였고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나자 별초군을 나누어 파견” 하였다는 기사에서의 도적이란 당시 농민을 주축으로 한 민중항쟁집단을 표현한 것이다.

민중항쟁세력의 성격상 반정부적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음은 당연한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는 대신 정부군에 자진 협조하여 대몽항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종 18년 9월조에

마산馬山의 초적 괴수 2명이 스스로 항복, 최우에게 나아와 “우리들이 정병 5천으로써 몽골군의 격퇴를 돕고자 합니다” 하니 우가 크게 기뻐하며 상을 매우 후하게 내리고 융관戎冠과 금환자金環子를 만들어 착용하는 것을 허락하여 이를 위로하였다.(고려사 129 최이전)

고 하였다. 여기서 정병 5천이 주둔하고 있다는 마산은 종래 평북 구성군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북계의 변경지역 마산은 개경으로부터 너무 멀고 더욱이 초적괴 2인이 최우에게 와서 종군을 요청한 사건이 몽골군 침입 불과 십수일 후의 일이라는 점에서 상식에 어긋난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마산의 위치를 개경에서 가까운 경기지역에서 찾지 않으면 안되는데 고려사(병지2 역참)에 의하면 개경인근, 봉성현에 마산의 지명이 보인다. 뿐만아니라 대몽전 직전인 고종 13년 마산을 포함한 이들지역의 역민들을 임진과교별감에게 순시토록 한 교지에서 이 지역에 다수의 유이민이 발생하고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으며, 대동지지(권3 파주)에 백제시대 수축된 마산고성에 대한 표현이 나오는 바 초적세력이 이 성에 웅거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봉성현은 현재의 파주이며 현재 파주시 파평군 파평면에 마산리가 있어, 마산은 경기도 파주지역으로 봄이 마땅하다. (사총 30집 p32 1986.11 윤용혁) 최우는 마산초적의 내투사건에 고무되어 광주 관악산 초적의 주둔지에 사람을 파견 지도자 5인과 정예 50인에 후히 상을 내리고 3군중의 하나인 우군에 편입시킨다. 이들 민중항쟁군의 활약은 몽골군과 처음으로 접전한 동선역의 전투에서 빛을 발한다. 9월 하순 고려의 3군이 황주(황해도북단)의 동선역에 이르렀을 때 8천 몽골군의 돌연한 기습을 받아 상장군 이자성이 화살에 맞는 등 아군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마산 초적2인이 몽골병을 쏘아 넘어뜨림으로써 관군이 기세를 타고 적을 격퇴시켰다”는 것이다.(고려사103,이자성전) 이들 민중항쟁군은 그 성격상 매복과 기습 같은 유격전에 익숙하고 칼보다 활에 더 익숙함을 짐작케 한다. 민중항쟁세력에 대한 최우의 초무정책은 강화 천도 직전까지 지속된다. 강화 천도 3일전 “안남 판관 곽득성이 백악 등처를 초무하매 적괴20여 인이 내투하였다”(고려사 세가 고종19년 7월) 안남은 경기도 부평을, 백악은 장단 소재의 백악(백학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임진강과 한강변 민중항쟁세력의 수천에 이르는 대몽전 참여는 역사상 보기 드문 극적인 사건으로 어제까지의 적이 더 큰 적 앞에서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고 대동단결하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항쟁세력이 이러한 사건을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은 것이란 추측이 성립되지 않는 것은 강화 천도결정과 함께 보여준 그들의 과감한 결별에서 확인된다.

사진: 승천포
설명: 몽골의 유라시아제국과 고려의 전선이었던 승천포는 지금도 유라시아 지정학의 표현입니다. 철조망사이로 흐르는 바다가 유달리 푸른 것은 하늘이 푸른 때문입니다.

강화천도와 민중항쟁세력
고려의 무신집권자 최우가 몽골에 대한 항전을 이유로 개성의 도읍을 강화로 옮긴 것은 1232년 고종19년 7월의 일이다. 강화 천도는 려몽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이는 군사전략과 군제등 고려의 모든 군사역량이 강화를 중심으로 전개됨을 의미했다. 강화는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국의 군사를 총괄하는 중앙이 된 것이다. 강화의 군사전략은 고려정부의 군사전략이기도 했다. 강화천도의 여러 의미와 더불어 그것은 이미 고려정부가 선택한 군사전략의 결과였다.
천도론이 당정회의 격인 재추회의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232년 2월부터이다. 이것이 5월까지 결론을 맺지 못하고 계속 이어진 것은 반대론의 절대우세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가 지속되고 천도가 강행되다시피 한 것은 전적으로 최우의 독단적 결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화의를 주장했던 유승단은 말하길

“소小로써 대大를 섬김이 옳은 것인데 섬김을 禮로써하고 사귐을 信으로써 하면 저희가 무슨 명목으로 우리를 곤욕하리요. 성곽과 종사를 버리고 해도에 숨어 엎드려 구차히 세월을 보내면서 백성으로 하여금 정장은 다 사살 당하고 노약자는 포로로 끌려가게 함은 국가를 위하여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항전을 전제한 개경 고수론자인 삼별초의 김세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별초지유 김세충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최우에게 힐문하기를
“송경은 태조때부터 역대로 지켜 내려와 무려 200여년이 되었습니다. 성이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이 족하니, 마땅히 힘을 합하여 지켜 사직을 보위해야 할 것인데 이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에 도읍하겠다는 것입니까? 하였다. 최우가 수성책을 물으니 세충이 능히 답하지 못하였다.(고려사절요16)

삼별초도 몽골에 대항하는 전략을 내놓지 못함으로써 강화 천도는 단행되었다. 조정만이 아니라 전 백성에게 山城과 海島로 들어가도록 한 산성입보, 해도입보 전략은 고려가 취하고 있던 기본적 군사전략이기도 했다. 고려가 평소 평지의 읍성이 아닌 산성위주로 국방체계를 마련된 것도 결국 산성입보전략의 표현이었다. 유승단이 현실론자이고 김세충이 원칙론자이며, 최우가 국가적 위기 상황을 집권유지에 이용하고 있었을 뿐임은 분명하나 결국 강화천도라는 해도입보의 결론에 이르게 된 것도 전통적인 방어위주의 군사전략과 무관치 않다.
어쟀든 강화천도는 개경민에게는 생활기반의 갑작스런 붕괴를 의미했다 이규보의 경우도 천도과정에서 종이 도망해버리는 사건을 만난다.

서강을 건너자 벌써 종놈이 도망했으니
새서울로 옮기면 굶주릴 것을 걱정해서이리라
西江已渡僕逋亡 應恐新餒爾腸 (동국이상국후집 1. 奴逋)

이는 천도전후 민심의 동요를 나타내는 단편적인 사례이지만 결국 이러한 동요는 개경 성중에서의 민중항쟁이 발생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어사대 소속의 노비인 이통이 주도한 항쟁이다.

어사대 조례皁隸 이통이 경기지방의 초적과 성안의 노예를 불러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유수병마사를 쫒아내었다. 그리고 3군을 조직, 여러 절로 글을 보내 승도를 불러 모았으며 공사의 전곡錢穀을 약탈하였다. (고려사절요16 고종19년7월)

이 민중항쟁은 경기지방의 농민항쟁세력인 초적과 개경 성내의 노비들이 중심이 되고 이들 세력이 이통과 같은 서리층에 의해 조직화 되었으며 봉기 후에는 경기 인근의 승도들에게까지 그 세력을 확대시키게 된다. 승도들은 사원전에서 경작이나 잡역에 종사하는 이른바 수원승도隨院僧徒라는 점에서 몰락농민과 유사한 성격의 집단이었다. 자체의 힘으로 3군을 조직하고 승도들까지 그 세력을 확산시킨 점은 사전에 준비된 반란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는 천도 논의가 오가던 연초부터 대몽항전에 참여하던 민중항쟁세력의 내부에서 동요가 시작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결국 이들은 강화에서 급히 편성되어 파견된 정부군과 지금의 한강하구인 승천부에서 대회전을 벌이게 되었고 결과는 패배였다.

민중항쟁무장세력은 외세의 침략 앞에서는 봉건정권과도 단결한 반면 그들이 매국으로 돌아설 때는 과감히 저항했다. 대신 봉건권력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민중항쟁과 대몽항전이라는 복잡한 정세의 발전이 극적인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민중이 정권의 배신과 압제속에서도 애국주의를 표출한 장소는 대몽항전의 상징인 충주성이었다.
충주는 남한강의 요충지로 해로를 통한 조운로가 막혔을 때 경상도의 세곡을 집결시키는 장소로서 충주의 함락은 남한강 조운로의 마비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한강상류의 충주와 한강하구의 강화는 관방과 조운과 문화적 교섭의 지정학적 회랑지대를 이루고 있던 셈이다. 개경에서 이통의 란이 있은 다음달 충주에서는 노비들의 반란이 재발한다. “삼군병마사를 보내 충주의 노적奴賊을 토벌하였다(고려사절요고종19년8월)”고 한 것이 그것이다.

충주의 노비들은 전년 12월 몽골의 1차 침략 때 성안의 관리와 양반들이 모두 도주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말단직이지만 관인인 잡류와 함께 목숨을 걸고 몽골군에 대항, 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관리들은 관의 은그릇등의 분실책임을 이들에게 전가하며 위협하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드디어 봉기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몽골병이 물러가자 부사 우종주등이 주에 돌아와 관사의 은기를 점검하였더니 노군奴軍은 몽골군이 약탈해 간 것이라 하였다. 호장 광립등 5,6인이 노군의 괴수를 죽이려고 꾀하자 노군이 이를 미리 알고 서로 모의하기를 “몽골군이 오자 다 달아나 숨어버리고 성은 지키지도 않더니, 이제는 어찌 몽골군이 약탈하여 간 것까지 우리에게 죄를 돌려 죽이고자 하는가. 우리가 어찌하여 먼저 도모하지 않으랴” 하였다. 이에 화장 오는 자라하여 고동을 불어 그리로 모으고, 먼저 주모자의 집에 가서 불을 질렀는데 무릇 호강으로 평소에 원한 있는 자는 남기지 않고 찾아 죽였다.“(고려사 103 이자성전)

충주 관노들의 이러한 저항사태에 접한 정부는 곧 최우의 사제에서 진압군의 편성을 논의 하였으나 충주판관의 ‘견사위무’ 요청을 받아들여 안무별감을 현지에 파견, 난민을 회유케 된다.

안무별감 박문수는 충주로 돌아오고, 김공정은 충주에 머물러 평정되기를 기다리더니 노군도령 령사 지광수, 승 우본등과 서울에 올라왔다.(고려사 23 고종세가 19년 정월)

여기서 령사 지광수와 승 우본이 반란의 지도자였음은 분명하며, 충주관노들의 반란에 개경과 같이 인근의 승도들이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최우는 지광수를 교위로, 우본을 충주대원사주지로 임명 회유함으로써 1차 충주관노의 난은 매듭지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같은 해 강화천도 직후인 8월에 승 우본이 주도한 반란이 다시 일어난다. 2차 봉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고려정부의 강화천도 직후인 점으로 미루어 이를 저항의 명분으로 삼았을 가능성을 추측해 본다. 우본은 1차 봉기의 주역이었던 관노와 자신의 세력인 승도들을 규합 봉기한 것으로 보이나, 노비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데 실패, 내분을 야기하고 실패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1차봉기를 이끌었던 지광수가 교위에 임명되어 전출됨으로써 노비들을 통솔할 지도력에 이완이 생겼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1253년 본격적인 몽골군대의 5차 침략을 맞아 산성입보 전략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춘주성(춘천) 전투이후 몽골군은 기세를 몰아 거침없이 남진하며 여주를 거쳐 다시 충주에 이른다. 현재의 대림성으로 알려진 당시의 충주성은 계립령과 조령, 달천강으로 이어지는 수륙 교통로에 위치한 요충지이며, 장기전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식수량과 많은 군사, 군마, 가축, 식량 등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9월 초, 충주의 향리였던 최수가 협곡에 매복하고 있다가 몽골군을 격파하여 포로로 잡혀 있던 남녀 2백 명을 되찾아 왔다. 이러한 유격전의 승리는 선발대로 내려오는 몽골군을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그 지역 지방민에 의한 자발적인 항전의 결과였다. 그리고 뒤이어 충주성 방호별감 김윤후(金允侯)의 지휘를 받은 충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은 결국 몽골군의 남진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한다. 김윤후는 본래 중이었으나 고종19년 몽골군의 제2차 침입 때 경기도 용인 처인성에서 몽골군 총원수인 ‘살례탑’을 활로 쏘아 즉사케 하였고, 5차침입 당시는 충주산성의 방호별감으로 부임해 있었다.
야굴(也窟)이 이끄는 몽골군은 충주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야굴이 병을 얻어 몽골로 소환되고 그 뒤를 이어 아무칸과 당시 반역자인 홍복원이 주축이 되어 무려 70여일 동안 계속 충주성을 위협하였다. 몽골군은 화살과 바위를 수없이 쏟아부었고, 화공법을 비롯한 온갖 공성전攻城戰을 전개했지만 충주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고 버티었다.
70여일의 포위된 속에서 군량이 거의 떨어지고, 오랜 전투로 모두들 지치게 되자, 김윤후는 병사들을 격려하며 지난 날 노군奴軍과 잡류雜類들이 싸워 이긴 것을 상기 시키면서 “만일 능히 힘을 내어 싸워 이긴다면 귀하고 천한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 관작을 제수케 하리라(若能效力無貴賤 悉除官爵)” 하고 관노의 호적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 버리니 사람들은그의 진심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적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을 나누어 주니 관노들은 감격하여 죽을 힘을 내어 혈전을 벌였다. 이에 몽골군은 충주의 공략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충주 이남의 지역에 대한 공격도 포기하고 후퇴하게 되었다. 몽골군의 실패는 사령관 야굴(也窟)대신 아무칸과 홍복원이 남아 공격을 대신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전략 전술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즉생으로 항전한 민중들의 사상전이란 측면에서 충주전투는 조명 될 필요가 있다. 김윤후의 전시지도자로서의 지도력과 민중의 합세는 신분제도라는 한계를 단시간내에, 근본적으로, 구제도에 구애됨이 없이 극복했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이었다. 고려조정이 수세적인 군사전략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조국 전쟁에서 민중들의 혁명적 변화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항몽과정에서 민중들이 충분히 조국애와 역량을 보여줬음에도 국가의 역량으로 수용하는 대신 몽골과 연합하여 도리어 적을 삼은 것은 민중의 애국적 진출에 오히려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봉건왕조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민중들은 자신을 도탄에 빠뜨린 조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적과 항전하는 주동의 위치에 섰다면, 왕조는 그런 민중을 버리고 적과 연합하는 민중을 탄압하는 반동의 위치에 자신을 세우고 말았다. 연전연패를 기록해가던 쇠락한 관군에게 희망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자주적인 국방은 민중의 평화항전사상과 탁월한 지도력의 합세에 의해 담보 되고 있었다. 김윤후의 지도력은 민중을 믿고 기존의 모든 가치를 벗어던진 과감한 결단력에서 빛났다. 여전히 낯선 민중의 세계에 대해 열려 있는 탁월한 지도자의 사상과 신념이 민중을 심장을 움직이고, 왕을 위한 존왕적 애국주의에서 민중 스스로의 해방을 향한 민중적 애국주의로 전화되면서 무서운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전략으로서의 산성입보, 해도입보
이제 고려군의 전쟁술에 대해 알아보자.
대몽항쟁시기 한강하구 군사사는 적을 알려고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던 정보와 전략의 부재가 얼마나 비참한 전쟁의 장기화만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산성, 해도입보 전략은 이미 강력한 공성전攻城戰을 통해 유라시아를 제패하던 몽골군에게는 싸워 보기도 전에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불리한 전략이었다.
천도당시 조정은 조운을 통해 삼남지방의 미곡을 공급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전국토의 대부분이 몽골군에 유린되었으며 백성들에겐 농토와 가옥을 버리고 산성입보 하도록 지시를 했기에 전세의 수납은 여의치 않았다. 최씨정권은 해도입보의 장점을 살려 강화로 천도했으나 몽골 침략의 불안감을 해소 할 수 없어 강화 전 영역에 성곽을 쌓는 대규모 공사에 들어간다. 특히 석모도와 예성강 조운로의 중심인 망월리에 제일 먼저 장성을 수축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이어 강화의 내성과 외성이 축조 되었다.(국토와 민족생활사 p188 최영준 한길사)
고려의 국방은 국경지역에 진과 장성을 설치하고 이를 활용하는 전술을 발전시켰다. 성곽을 중심으로 펼치는 견벽고수堅壁固守의 방어 개념이다. 즉 적의 대부대와 전면전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성문을 굳게 닫고 대치하여 지구전을 펼침으로서 적의 예봉을 피하는 한편 군량수송이나 병력보충등의 어려움으로 적이 약화되기를 기다리는 전술이다. 이를 위해 병행되는 것이 청야전술淸野戰術이다. 청야는 백성과 재물을 모두 성안으로 들이고 그 나머지는 전부 불살라 버려서 적의 현지보급을 곤란하게 하는 전술이다. 한편 견벽고수 전술을 효과 있게 하기 위해, 틈을 보아 병력을 이끌고 나가 적을 기습 공격하는 인병출격引兵出擊전술을 배합한다.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활, 노(弩:여러 개의 화살, 돌을 잇달아 쏠 수 있는 큰 활), 돌대포등이 고안, 사용되었다. 인병출격을 위해서는 주로 말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인병출격과도 관련이 있는 기마전술은 주로 북방민족의 전술이었다. 기병을 중심으로 보병을 보조로 하는데, 기마전술을 중심으로 적의 좌우익의 포위를 시도하면서 상대의 중앙을 돌파할 경우에는 좌우익중 한쪽 방향의 돌파를 꾀하는 공격체제를 갖추었다. 이 전술을 운용한 대표적인 예가 윤관의 여진 정벌이다.

이러한 성곽중심의 방어전술은 성공하기도 했지만 실패하기도 했다. 성공한 첫 전투는 귀주성 전투이다. 1231년 몽골의 1차침입시 서북의 여러 지역민은 귀주(龜州)에서 도병마사 박서(朴犀)의 지휘를 받아 4회에 걸친 몽골군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 냈다. 이 싸움은 전투가 거의 3개월을 지속할 정도로 치열하였으며, 이후 여·몽전쟁의 대표적인 전투 사례로 들어지곤 하였다. 국경지대로서 특별방어지역으로 관리되어 온 진가가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몽골군은 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대포와 같은 각종 무기를 동원하였고, 성 밑으로 굴을 파들어 가려고 하거나 성을 불지르는 화공법火攻法을 시도 하였다.

인근 자주(慈州:順天郡)에서도 몽골군의 포위 공격에 맞서 성공적인 작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몽골군이 수도 개경을 포위하고 군사행동을 보다 남쪽으로 충주忠州까지 확대시키자 고려정부는 화의를 맺고 일단 몽골군을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3차 침입시 1236년의 죽주성 전투는 일찌기 귀주전투에서 대몽 전투의 경험을 가진 방호별감 송문주에 의해 지휘되었는데, 몽골침략이후 해안지역에 설치된 방호소의 방호별감과 방호사와 수군을 지휘하는 수로 방호사가 남방의 국방을 맡고 있었다. 그는 몽골군의 공성전에 적절히 응전함으로써 몽골군을 패주시켰다. 강화로 환도한 고려정부가 산성입보, 해도입보전술을 지시한 것은 이처럼 부분적으로 성과가 있었다.
고려에 대해서 치고 빠지는 전투가 반복되는 동안 몽골의 주전선은 고려가 아닌 유럽이었다. 고려의 성곽전투방어전술은 대포를 비롯, 심지어 생물학전까지 포함한 압도적인 성곽공격무기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효율적인 병참체계를 지닌 몽골군을 상대하기엔 중과부적이었다. 몽골이 고려에 대해 본격적인 태세로 전투에 임한 것은 몽골의 원수 차라다이가 직접 참전한 5차침략 부터로 볼 수 있다. 이때 몽골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춘주(춘천)성이였다. 춘주성을 공격한 것은 야굴(也窟)이 이끄는 주력부대였다. 몽골군은 춘주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서 목책을 두 겹으로 둘러쳤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는 깊이가 한 길이나 되는 참호까지 파서 이중 삼중의 포위망을 설치했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을 몰살시키기 위한 물샐 틈 없는 철저한 사전계획이었으며, 춘주성을 통해, 저항하는 경우 예외없이 모두 학살해 버리겠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공성전에는 몽골의 전쟁방식에서 항상 그랬듯이 포로로 잡은 현지인인 고려인들을 동원했다.
성안에는 전란을 피해 들어온 춘주백성들과 안찰사 박천기, 그리고 그 휘하의 속료들과 약간의 군사가 있을 뿐이었다. 1253년 9월 초순에 시작된 몽골군의 공성전은 보름 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몽골군이 포위를 풀지 않고 공격하면서 성안의 우물이 마르고 마실 물마저 고갈되어갔다. 성안 사람들은 소나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시면서 버티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는 버티기 어려워졌다. 최후의 수단으로 군민을 지휘하고 있던 안찰사 박천기가 성안의 곡식과 재물을 모두 불태우고 6백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한꺼번에 성에서 나와 돌진하면서 목책을 헐었다. 결사대는 목책을 부수고 포위망을 일단 뚫었으나 바깥의 참호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간신히 참호속에서 올라오는 순간, 몽골군이 집중 사격을 퍼부어 박천기 이하 6백 명의 고려 병사들은 모두 도륙당하고 말았다. 춘주성의 마지막 저항세력을 분쇄한 몽골군은 총공격을 감행해 투석기로 바위를 날려 성문을 부수고 성안으로 진입해 남아있던 사람들을 남김없이 살육했다. 1253년 9월 20일에 일어난 참극이었다.
이는 몽골이 중동과 유럽의 수많은 성곽전투에 적용한 공성전의 재현이었다.
백돈명은 몽골의 5차 침략이 개시되자 동주(강원도 철원)산성의 방호별감이 되어 부임했다. 그는 인근 군현의 백성들을 산성에 몰아넣고 출입을 엄금했다. 그때 마침 들판의 벼가 무르익어 추수가 한창 시작될 무렵이었지만 성 안에 갇힌 백성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지역 계엄 사령관인 방호별감의 명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고을 아전 하나가 백돈명에게, 적병이 오기 전에 교대로 성 밖으로 나가 추수하게 달라고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하지만 백돈명은 그 자리에서 아전을 처형하고 말았다. 귀중한 추수를 못하게 된 백성들의 원성은 소리없이 쌓여갔다. 이는 몽골군의 병참을 오히려 유리하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몽골의 모든 침입시기는 거의 일관되게 추수직전을 택하고 있었다. 군량을 현지보급 하기 위한 계산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백돈명은 정예병 6백 명을 선발하여 성 밖으로 나가 요격하도록 했지만 6백 명의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금화의 감무(임시 수령)한 명은 성이 함락될 것이라고 여겨 고을 아전들을 거느리고 벌써 도망쳐버렸다. 백돈명은 성 안의 군대를 지휘, 통솔할 수도 없게 되고 만 것이다. 그 후 몽골군은 성문을 부수고 쉽게 동주산성을 함락시켜 버렸다. 백돈명 이하 그 지역 관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몽골군에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부녀자와 아이들은 양산성에서처럼 포로가 되었다. 산성입보는 이처럼 민중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심각한 병참문제를 야기시킴으로써 원래의 취지인 장기전의 장점을 오히려 단점으로 만들어 버리는 수도 있었다. 이같은 전략은 조선조의 병자호란 이후까지도 상당기간 이어진다.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부터 대몽항쟁의 기조는 전면전을 통한 적극적인 정면승부가 아니라 몽골군만 철수하면 그들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겠다는 외교협상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몽골군이 철수하면 유야무야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는 소극적인 방어가 우선이었다. 그래서 중앙에서 명을 받고 부임한 방호별감은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고, 때로는 미리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거듭되는 관군의 무력함과 정권에 대한 실망은 항몽전의 말기로 갈수록 정부파견 관리와 관군에 대한 농민들의 불복저항사태와 빈번한 몽골군에의 투항으로 이어졌다. 국방의 목적인 백성들이 군사전략에 반대하고 결국 해도입보전략 자체가 붕괴되어 갔다. 다음은 그 증거들이다.

1. 고종 45년 5월 박주사람들이 병란을 피하여 위도葦島에 입보하고 있었는데 국가에서 도 령별장을 보내어 별초군을 이끌고 이를 진무케 했다. 박주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도령별 장과 지유, 감창등 군사를 모조리 죽이고 드디어 몽고로 달아났다.
2. 45년 9월 광복산성에 입보하였던 백성들이 방호별감 유방재를 죽이고 몽병에 항복하였 다.
3. 45년 12월 달포성 사람들이 방호별감 정기 등을 붙잡아 몽병에 투항하였다.
4. 46년 3월 북계의 애도艾島와 갈도葛島에 입보한 역인들이 경별초 7인을 죽이고 몽골에 투항했다.
5. 46년 7월 북계의 별초도령 낭장 이양저가 병사를 이끌고 초도椒島로 입보하려하는데 휘 하가 속여 말하기를 육지로 나가 사냥하자 하고 양저와 중앙군을 죽이고 배를 타고 도망 하였다.
6. 46년 7월 울진 현령 박순이 처와 노비와 가재를 싣고 울릉도로 입보하려는데 성 사람들 이 이를 알고 순이 성에 들어왔을 때 구류시키고, 뱃사람들이 그 실은 것을 가지고 도망 해버렸다.
7. 원종원년정월 석도席島와 가도椵島에 입보한 사람들이 반란을 꾀하므로 서북면병마사 이 교가 이를 치고 괴수 래동 등을 참하였다.

전쟁말기인 고종 45,6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이 사례들은 강도정부의 산성, 해도입보전략에 대한 저항사건으로 특히 대동강하구를 위아래로 하는 북계와 서해의 연안도서들에서 빈발 하였다.(사총 30집 p55 1986.11 윤용혁)

몽골은 6차침략에서 더 많은 피해를 입히며 해도마저 침략함으로서 강화조정을 일대 혼란에 빠뜨리며 압박했다. 산성입보, 해도입보 전략은 군사전략으로서 세계 최강의 공성전 능력을 갖춘 몽골군을 이길 수 있는 필승전략이 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항전의 주체가 되어야할 백성들에 대한 수탈로 오히려 백성들로부터의 저항에 부딪치고 말았다. 군사적 수세에 있더라도 성안의 민중들이 필사즉생의 자세로 단결하여 싸운 전투들이 성공한 반면, 대부분의 입보전략은 민중을 생활터전에서 분리시키는데다 장기전이 될수록 민중을 수탈까지 할 수 밖에 없는 봉건정부관리와 관군들의 한계로 인하여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규군체제 – 2군 6위와 지방군
강화 천도기 고려의 중앙군체계는 거의 무너져 있었다. 처음에는 정규군의 활동이 자못 활발한 듯 했으나 연패를 거듭했고, 1253년 몽골의 5차침입 무렵부터는 정규군의 활동이 거의 없어졌다. 대신 삼별초의 활동이 대몽항전 전기간 동안 활발했다. 삼별초는 대몽 항전기 가장 강력한 전투병력이었다. 삼별초와 병립하여 당시 2군6위의 조직이 아직 형식상 남아 있었고 최씨 정권의 순수한 사병집단인 도방의 병력도 존재하긴 하였으나 삼별초는 강도를 수비하는 방어의 책임을 맡았을 뿐 아니라 자주 섬을 나와 본토의 각지에서 몽골군과 대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정규군체계는 어떻게 붕괴상태에 이르게 되었을까? 우선은 그 군제를 알아보자.

고려전기의 중앙군은 2군6위로 편제되었다. 2군軍은 왕의 친위군단이었으며 6위衛는 주로 전투부대였다. 이 가운데서도 좌우, 신호, 홍위의 3위는 중앙군의 핵심이 되는 주력부대였다. 전쟁에 출동할 때는 중,전,후,좌,우의 5군이라는 특수편제가 이루어지는데 5군은 평상시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기간요원만 임명되어 있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3위소속의 군대를 편입시켜 전투편제를 이루고 출동했는데 이때에 전군을 지휘할 원수, 부원수등이 임명되어 사령부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6위중 금오위는 수도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부대이며, 천우위는 왕을 시종하는 의장대이고, 감문위는 도성문의 수위였다. 군위의 지휘관은 상장군이며 부지휘관은 대장군이었다. 군, 위 바로 밑의 단위부대는 영領이었다. 영은 군인 100명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그 지휘관은 장군이었다. 장군 밑의 중랑장 각 2명은 장군의 보좌관이었고, 중랑장 밑에는 낭장이 모든 영마다 각 5명씩 있었는데 이들은 200명으로 조직된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것 같다. 낭장 밑의 별장은 부지휘관 산원은 낭장과 별장의 보좌관인 듯하다.
오伍는 50명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장은 교위였다. 이들은 각 영에 20명씩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동일한 등급의 단위부대별로 방이라고 하는 회의기관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점이다. 상장군과 대장군의 합의기구인 중방과 장군들의 장군방, 낭장들의 낭장방, 교위들의 교위방이 그것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정중부와 같은 서인출신이나 이의민 같은 천민출신까지도 등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의민 등의 실각은 향후 천민등 민중항쟁세력의 명분으로 작용한다.
다음으로 지방군이다. 지방군의 중심은 주현군州縣軍이다. 주현군에는 지방호족들의 군사력을 중앙으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광군光軍이 있는데 정종2년(947년) 거란이 침입할 것이란 정보에 따라 편성된 최초의 전국적인 군사조직이다. 이들은 전투에서는 하는 일이 없었고 노역에 동원되었다. 광군과 함께 중앙에서 지방으로 배치되었던 진수군鎭守軍이 주현군의 또 하나의 축이었다. 주현군은 보승, 정용, 일품군으로 구성되며, 이들 중 중심은 보승保勝과 정용精勇이었다.
보승과 정용은 전투부대였고 일품은 노동부대였다. 보승과 정용은 자영농민들로 구성된 민병적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국경지대인 북계(평안도)와 동계(함경도)의 양계지방의 지방군은 주와 진을 중심으로 한 행정단위에 따라 주진군州鎭軍을 이루었다. 주진군의 핵심부대는 초군, 좌군, 우군과 보창군, 영색군이었다. 초군은 정예중의 정예부대였으며 초군과 좌우군에만 기병대와 노弩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주진군의 지휘계통은 도령-중랑장-낭장-별장-교위-대정으로 되어 있고 양계의 군사조직을 총괄한 것은 행정책임자인 주의 장관인 방어사와 진의 장관인 진장이었다. 이들은 다시 계의 장관인 병마사의 지휘를 받았으니 양계주진군의 총사령관은 병마사인 셈이다.(한국의 군제사. 김홍. 학연문화사. p66~70)

정규군의 붕괴-무신정권과 삼별초
이러한 정규군 조직이 붕괴된 것은 무신정권에 의해서였다. 최충헌이 권력을 잡기까지의 병권행사는 철저하게 국가 통수체계를 따랐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그다음으로 동생 최충수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그는 박진재등 가장 많은 무력을 거느린 집단을 동원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국왕의 병권을 이용하여 중앙군인 경군京軍을 동원하였다. 그것은 군사적인 면 뿐아니라 명분을 획득하는 효과를 가졌다. 최충헌이 광화문에서 수문장인 감문위 군사에게 사태의 급박함을 국왕에게 알리게 한 것도 국왕의 병권을 빌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국왕의 경군 소집령이 발동됨에 따라 먼저 무기고에서 병기를 금군에게 지급하였고, 이를 위임받은 최충헌이 발병권을 행사하여 제위의 장군들도 군사를 거느리고 다투어 왔던 것이다. 이 과정을 요약하면 즉 재상의 발명권(국왕의 명을 받아 발동함)–>거중총제(여기서는 최충헌)의 발병권 –>제위장군의 장병권(掌兵權)이 군통수체계에 따라 행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초기 최충헌은 통수체계를 벗어나지 않고 병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군사26호 p26 국방군사연구소 1993)
최충헌은 집권과 일인독재정치로의 구축과정에서 군사적 기반의 강화를 실감하였던 것 같다. 그는 사병세력을 보다 정예화 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사병세력의 정예화는 결국 경군의 약체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조의 기사들은 이 같은 정황을 소상히 전한다. 최충헌은 거란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방의 보고를 받고 ‘작은 일로 역마를 번거롭게 하고 조정을 놀라게 한다’고 하여 그 장수를 귀양하였다는 것이다. 최의 조치는 변방 장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결국에는 근무자세를 이완시켰다고 보여진다. 그결과 거란병이 침입하였는데도 경성을 방비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휘하에 정예화된 사병으로서 세력을 구축하는데 대부분의 일반군졸을 차출하여 썼기 때문이었다. 그 군졸은 다름아닌 경군에 속한 군졸이었다. 경군 가운데 특히 힘있고 용감한 군사들만 최충헌의 사병으로 차출되었다. 따라서 거란병의 침입을 방어하려 했을 때 힘있고 용감한 자는 충헌의 문객이었고, 관군은 파리하고 약해서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다. 또한 최충헌은 군사적 경험이 있는 경군 뿐 아니라 모병을 통해서도 군사력을 넓혀나갔다.
최충헌이 사병을 강화시키면서 경군을 축소시켜 나간 의도는 국왕에게 있는 발명권마저 자신에게 귀속시키려한 의도로 해석된다. 결국 최우대에 이르러서는 군 통수체계에 따른 병권행사방식도 완전히 붕괴된다. 그 결과 국가방위에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몽골이 침략한 고종 18년에는 집권자인 최이는 건재하였지만 수도 개경은 무방비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최이도 집권초기부터 경군의 병력 충원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최충헌 부자는 문객가운데 관군에 종군하기를 청한자가 있으면 즉시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병권을 독점하기 시작한 최우는 삼별초라는 公兵아닌 공병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야별초의 창설은 나라에 도둑이 많음을 걱정하여 용사를 모아 대비한 것을 명분으로 했지만 이들 도둑은 다름 아닌 민중항쟁세력이었다. 민중항쟁세력의 진압에 별초군이 등장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별초군은 민중항쟁세력과 군사에서의 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별초는 몽골침략을 만나면서 대몽전을 위한 병력으로 전환된다. 최우는 야별초를 공적인 성격을 띤 직업군으로 관리한다. 야별초에겐 봉록을 후하게 주었을 뿐아니라 사사로운 은혜까지 베풀어준다. 최우는 삼별초를 전문적인 급료병으로 편제시켜놓고 사적으로 이들을 이용하였다. 별초군은 최이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항몽을 수행하는 주력군으로 활용되었다. 1253년 8월 말, 전주(전북)의 반석역에서 이주가 지휘하는 별초군이 3백 명의 몽골군을 무찔렀다. 1254년부터 1259년까지 연이어지는 6차 침략시에도 전국 각처에서 항전이 전개되었다. 괴산에서는 강화도에서 파견된 야별초(夜別抄) 부대가, 그리고 제천에서는 충주에서 조직된 별초군(別抄軍)이 각각 몽골군을 기습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마저 버림으로써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정규군보다 더 정예부대였던 삼별초군은 자신들의 군사력에 근거하여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킨 것이다.

사진:1-19
설명:삼별초군이 진도로 출발한 외포리수로 건너 포구의 물살에 불빛이 흔들립니다.
삼별초-민중연합정권
1270년 원종이 몽골의 요구에 따라 개경으로 출륙환도하는 시점을 계기로 삼별초와 민중 대 몽골군과 관군의 전선이 형성되고 더 이상 전란에 피폐하여 싸울 여력이 없을 것 같던 민중들은 오히려 원종의 출륙환도를 굴욕과 배신으로 여기고 더욱 분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민중은 외세 뿐아니라 정부군과도 싸우게 되었다.
삼별초와 민중이 정부군에의 의존을 끊고 이에 대항하는 대오를 꾸리기까지에는 앞선 살펴 본 상상을 초월한 민중의 대몽항전 성과가 있었다. 30년 세월을 한결같이 몽골에 맞섰던 고려 조정이 항복을 결정한 것은 1259년이다. 그래도 개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십여 년을 더 견딘다. 그러나 1270년, 고려 원종은 개경 환도를 결정하고 삼별초의 해산을 명한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을 동사강목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정이 삼별초를 파하매 군정이 위구한데 장군 배중손이 노영희등을 타일러 군중의 마음이 이반한 것을 틈타 난을 일으키고 사람을 시켜 국중에 외치기를 “오랑캐 군사가 크게 이르러 백성을 죄다 죽이니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구정에 모여라” 하니 잠시 사이에 나라 사람이 크게 모였으나 혹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다투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물속에 빠지기도 하므로, 삼별초가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강을 돌며 크게 외치기를 “배에서 내려오지 않는 자는 모두 베겠다” 하니 이를 들은 사람은 다 두려워서 내렸으나 혹 배를 띄워 구경으로 향하는 자도 있으므로 적이 작은 배를 타고 쫒아가며 활을 쏘니 다를 감히 움직이지 못하매, 곧 금강고의 병기를 꺼내어 군졸에게 나누어 주고 성을 둘러 굳게 지키게 하였다. 중손, 영희는 삼별초를 거느리고서 승화후 온을 핍박하여 왕으로 삼고, 관부를 임시로 설치하여 대장군 유존혁, 상서좌승 이신손을 좌우승선으로 삼았다….강화를 지키던 군사가 많이 도망해 뭍으로 나가매 적이 지켜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곧 배를 모아 공사의 재화와 자녀를 다 싣고 남으로 내려가니 잇단 배가 무려 1천척이나 되었다.

삼별초군은 봉기의 취지에서 오랑캐만을 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반몽과 함께 반정부의 기치를 분명히 했음을 알 수 있다. 삼별초군은 빠른시간 내에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데 성공했고, 이는 사전 준비 없이는 가능치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강화를 버리고 새로운 입보처로 진도를 택한 것 역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반몽, 반정부적인 민중항쟁세력과의 연대를 고려한 전략적 선택으로 볼 수 있으며 이같은 판단은 대체로 유효했다. 1271년 1월 ‘밀성군(밀양) 사람 방보 계년 박평 박공 박경순 경기 등이 그 군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장차 진도에 응하려 하였다’(고려사27 세가27 원종 12년)는 것이 첫 번째 사건이다. 밀양을 비롯한 경상도 지방은 1190년 경주민중항쟁, 1193년 청도의 김사미, 울산의 효심, 1201진주노예의 항쟁 합천과 김해의 항쟁, 1202년 다시 밀양관노의 항쟁등 23년 동안 민중항쟁이 간고하게 지속되어온 지역이다. 따라서 과거의 적이었던 삼별초와 민중항쟁 세력들은 반몽, 반정부기치 아래 극적으로 결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위기는 수도 개경으로까지 번져 같은 해 1월 ‘관노 숭겸, 공덕등이 그 도당을 모아 다루가치(몽골총독)와 나라의 직위 있는 자를 죽이고 진도에 가서 투항할 것을 꾀한 사건’ 이 있었으며, 2월에는 대부도 사람들이 숭겸등이 봉기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몽골인 6명을 죽이고 같이 봉기한 일이 있었다. 3월에 고려사가 전하는 기사는 이러한 결과로 고려정부가 처한 곤경을 짐작케 한다.

요즈음 역적이 날로 더욱 만연하여 경상도 김주(김해)와 밀성(밀양)에 까지 이르러 침략하였으며, 또 남해, 창선, 거제, 합포, 진도 등지를 노략질하여 바닷가 부락은 거의 모두가 겁탈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무릇 징발하는 것은 부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경상 전라의 공부는 모두 육로 수송을 하지 못하고 반드시 수로로 하여야 하는데 지금 역적이 진도에 웅거하고 있으니 이곳은 곧 수로의 인후인지라 배가 지나가지 못하오니 그 군량미 우료종자는 비록 거두어 징발코자 하나 이를 길이 없습니다.(고려사27.세가27 원종12년)

남도지방 항쟁세력과의 연대는 위에서 보듯 삼남지방을 빠른 시간안에 삼별초군의 통제아래 놓이게 했고 이는 고려 정부의 제일 조운로인 진도수로를 장악하여 제해권을 행사함으로써 고려정부를 해상봉쇄 하는 데에 이른다. 그들의 항전은 진도에서 그리고 제주도에서 계속된다. 농민들에 대한 과중한 조세부담이 원인이 되어 궐기한 제주민중항쟁세력은 삼별초군과 결합하면서 반몽항전에 뛰어든다. 이처럼 삼별초군이 반몽항전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중항쟁세력이 있었다. 13세기 농민들의 대몽항전에서 보여준 활동상은 12세기 말 전국적인 농민항쟁의 활력과 그 맥락을 함께하는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인정권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봉건제도 모순의 심화, 몽골의 침략전쟁이란 상황에서 농민과 민중은 역사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고려의 군사사는 그들과 함께 할 때 강화 되었고 그들과 대척할 때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라시아와 민족
원종은 몽골을 둘러싼 유라시아 정세를 고려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였지만 그의 관심은 민족의 자존보다도 정권의 안정에 있었고 결국 이는 항쟁의 포기로 결과 되었다. 전쟁에 지친 백성을 위해 평화를 선사한다는 것이 투항의 명분이었으나 정작 백성은 정권이 투항하자 결전의 의지를 새로이 불태운다. 민중항쟁의 진압군이자 적이었던 삼별초와 민중세력이 다시 손을 잡고 대정부투쟁과 대몽항쟁을 지속해 나가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정권의 친위대에서 항전하는 백성의 편에 서게 되는 과정의 복잡한 사회심리학은 삼별초 지도부의 새로운 권력욕과 그로인한 권력투쟁으로 성격 지을 수도 있고, 원종이 원나라에 삼별초명부를 넘김으로써 몰살의 궁지에 몰린 친위세력이 처벌의 위기에서 일으킨 반란이자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그 복잡한 내면의 심리학이야 어떻든 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는 항쟁의 중심에 선 민중의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들은 몽골에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몽골을 중심으로 한 유라시아의 지정전략을 통찰할 지정전략가가 삼별초에는 없었던 것 같다. 주체의 항쟁력 뿐 아니라 남송과 일본, 나아가서는 유럽의 국가들과의 연대를 실현하고 전선을 칠 수 있는 능력까지 겸비하진 못했던 것이다. 제국을 건설하는 지배자들에게 가장 좋은 조건은 제국에 저항할 나라들이 제각각 흩어져 있어 대제국에 항거한들 쉽게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관리 하는 것이다. 삼별초도 결국 그러한 제국의 통치틀을 극복하지 못했다. 삼별초의 결의만으로 무너뜨리기에 몽골은 너무나 큰 제국이었다. 원종의 지정학적 지식과 삼별초의 항쟁이 결합되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지정전략과 항쟁의 주체가 결합된다고 해서 무조건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하기까지의 문화적 저력을 능가할 수 있는 새로운 저력이 만들어 질 때 최종적으로 몽골은 극복될 것 이었다. 그러나 지정전략도 새로운 문화적 대안과 질서도 항쟁하지 않으면서 만들어지진 않는다.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서만이 항쟁도 지정전략도 문화도 새롭게 창조되기 때문이다. 비록 역사적 한계 앞에서 실패 했다 해도 민중적 삼별초정권이 역사에서 빛나는 것은 바로 그 점에 있다.

고려정부의 출륙환도와 삼별초의 진도천도는 강화도와 한강하구를 공동화 시켰다. 1270년 8월 몽골군은 정규군도 삼별초도 떠나버린 강화성내에 진입하여 거의 모든 민가를 사정없이 불태우니 쌀도 곡식도 이런 저런 살림붙이도 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몽골군은 30년 대몽항쟁의 근거지를 그렇게 유린한 것이다.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던 집권세력과, 거족적 항쟁의 주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민중항쟁세력의 적전분열의 결과는 항몽의 수도 강화에 대한 몽골의 무혈입성과 저항 없는 살육이었다. 그로부터 몇주 후 고려사는 다음과 같은 장면의 기사를 적고 있다.

9월 무오일에 다루가치(총독)가 강화에 들어가 허실을 둘러 살펴보았다.
達魯花赤 入江華 巡審虛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