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5 한강하구 항행의 역사2007/01/10 1992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123
한강하구 항행의 역사
자료그림1 조선에 최초로 증기선을 도입한 독일이 인천-용산 항행을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1901년 독일인이 만든 한강항행지도. 사구와 뻘을 피해가야 하는 복잡한 수로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인천개발연구원자료-
뱃사람과 장사꾼의 방법
바다는 사막이다. 그 막막함으로 보자면 오아시스도 없는 철저한 사막이다. 아무 것도 의지할 데 없는 바다 위에서 뱃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수많은 별들 속에서 서서히 움직이는 자연의 결을 찾아내는 것이다. 뱃사람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구조를 응시한다. 지배할 수도, 대화할 수도 없는 바다에서 뱃사람에겐 어떤 도식이나 이론도 무용하며 목숨을 건 실천만이 앎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장사꾼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을 상대로 유혹하고 설득한다. 장사꾼에게는 손님의 합의 없이는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 심지어 사기조차도 합의를 요한다. 장사꾼은 낯선 상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밖에는 그를 구속할 수 없는 장소에 서있다. 장사꾼에겐 참된 가치나 공동체의 동질성을 전제하는 것 따위는 가능하지 않다. 그는 언제나 공동체의 외부를 향해서만 존재하며 낯선 세계의 언어로 대화하는 법을 찾는 것이 그의 숙명이다.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강문화는 뱃사람과 장사꾼의 사고방식이 일궈낸 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세 봉건왕조의 필요에 의해 개발된 조운로로서의 한강은 봉건왕조의 약화과정과 맛물리며 민간 중심의 시장을 형성해갔고, 시장의 발달은 소유관계의 변화를 모색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조선왕조는 개국 이래 도성에 서울 거주민과 관부의 수요품을 대기 위해 도성에 시전을 조성했다. 시전상인은 이때 중앙정부와 관계를 맺으며 특권 상인이 되었는데, 일정한 시역市役을 부담하고 대가로 독점적 상업 활동을 허가받았다.
17세기 후반 시전상인의 매점과 폭리에 도시민, 민간수공업자 등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점차 사상私商이 증가하게 되어 상권을 넓혀갔다. 결국 1724년 난전속공亂廛屬公 원칙이 폐지된 이후 난전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다가 1791년 신해통공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독점권을 배제하고 30년 이내에 신설된 시전이 혁파됨으로써 사상도고私商都賈사이의 대립으로 전환했다. 민간상인들은 한강 연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조선 초기부터 세곡운송에 종사하면서 치부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고, 한강변의 나루터에서 도강업에 종사하거나 소상인에서 출발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점차 자본을 모아 대형선박을 여러 척 소유할 만큼의 경제적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니 교통로로서의 한강이 민간상인과 시장의 배후조건 이었던 셈이다. 서울이 대규모 소비도시로 발달하여 쌀의 수요가 증가하고, 미곡운송을 이들이 거의 담당하니 도성민의 생계가 이들 손에 달려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아담 스미스의 이론에 따르면 봉건제하에서 상업과 도시의 발달은 자본주의 출현의 맹아이다. 마르크스는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소유관계가 바뀌지 않으면 자본주의로 전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상업과 도시의 발달은 봉건세계를 거대하게 통합했지만, 자본주의의 도래를 가져올 만큼 소유관계를 바꾸는데까지 나아가진 못했다. 그리고 봉건왕조의 무능과 식민지, 그리고 뒤이은 전쟁으로 인해 한강하구의 시계는 중세에서 멈춰버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시골처녀에게 탈현대의 옷을 입혀야 하듯, 다른나라처럼 근대의 강으로서 존재해 본 적이 없는 한강에 현대와 탈현대의 고뇌를 구현해야 하는 참으로 난감한 과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막막한 주제앞에 서니 뱃사람들이 막막한 바다 앞에 서있는 심정이 연상된다. 그 모양은 바뀌어도 한강에 서려 있는 뱃사람과 장사꾼의 낯선 타자를 대하는 사고방식은 예측하기 힘든 미래를 뚫고 나가는데 참고는 될 듯하다. 우선 그 역사를 짚어보자.
시선뱃노래
강화 외포리와 황청리를 떠난 배가 밤바다를 거쳐 능청능청 한강어귀로 들어서며 명랑한 달빛아래 강옆의 산들을 울리며 들려주던 노래소리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시선뱃노래다.
어기야 디여차 어이기야 / 빨리 저어라 어야디야 / 손길맞춰 빨리저어 저배보다 먼저가세
화장火匠애야 밥지어라 / 배고파서 노 못 짓겠다 / 마포장을 어른보구 / 마누라두 자식들두 봐야겠다 / 먹는 것은 사자밥이요 / 자는 곳은 칠성판이라 / 이놈의 바람은 왜 안부느냐
바람이 불어야 노를 안짓지 / 에이야 에이허 손바닥이 다부르텄네 / 어떤사람 팔자좋아 고대광실 좋은 집에 / 비단이불을 피어놓구 / 창포밭에 금잉어놀듯 / 굼실굼실 잘도 노는데 /
내신세는 어이하여 / 칠성판을 떼메고 다니나 / 일락서산 해는 떨어지구 / 월출동녁에 달이 솟는다 / 선돌목(강화 광성보앞 손돌목)을 지냈으니 / 조강포(김포조강리)에서 한숨쉬세 / 서산에 지는 해는 지구싶어 지는가
한강하구의 수운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료중 하나가 시선뱃노래이다. 시선배는 ‘땔나무, 시[柴]’자를 쓴 것으로 봐서 ‘땔나무[柴]’를 실어 나르던 배였을 텐데 시선뱃노래에 땔나무와 관련된 내용이 남아 있진 않다. 어쨌든 한강하구의 뱃길은 생각처럼 낭만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남의 배보다 빨리 노를 저어야 하는 것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루 두 번 있는 썰물 때를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나의 조건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자연의 결을 이해하고 목숨을 건 실천을 하는 것 말고 뱃사람이 살아남을 길은 없는 것이다. 밀물때는 시속 6km정도의 속도로 물이 흐르기에 돛조차 펼 필요없이 항행한다. 그러나 밀물과 썰물의 중간 때에는 바람만이 배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쌍돛배는 바다배고 외돛배는 강배다. 강이야 바람 방향이 그런대로 일정하여 돛 하나로도 해결되지만 바다는 사방에서 바람이 들이치니 쌍돛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쌍돛배가 바다에서 강으로 넘나드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던 곳이 한강이다. 서울은 강변도시라기 보다 항구도시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한강은 600년 조선의 조운의 전설을 가능케 한 자연의 은총이었다.
바람을 받으며 젖는 노야 달빛처럼 명랑하겠지만 바람 한 점 없는 항해란 오로지 노꾼의 팔뚝심으로만 좌우되는 고단한 여정이다. 그러나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고단한 항로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풍랑의 위협, 왜구의 위협 앞에서는 이름을 내밀 형편이 못된다. 고려, 조선의 조운사는 왜구와의 대소전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왜구의 노략질은 조정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고 가장 대규모의 왜구침략이 임진란이다. 그러나 임란 대패이후 왜구는 거짓말처럼 조선의 바다에서 사라진다. 시선뱃노래의 풍경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왜구의 위협에 대한 묘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임란이후 조선 중후기의 풍경에서 이 노래가 불려진 것이기 때문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작은배에 밥 짓는 화장아이가 지어주는 밥이란 초상집 사자밥에, 밀물때를 기다려 밤낮 구분없이 피로에 지쳐 쓰러지는 침소란 날바닥이니, 칠성판이 따로 없이 삶과 죽음을 오락가락 하는 생활 자체였다. 죽음조차 익숙해진 삶의 고단함이 이 노랫가사에 절절히 배어 있다.
강화와 김포를 나누는 염하강 광성보 앞의 손돌목은 안면도와 서울염창동과 함께 조선시대 조운의 3대 험로중의 하나이다. 밀물때나 썰물때나 물살이 빠르고, 염하강 한가운데 암초가 박혀 있어 여차하면 난파하기 일쑤였다. 물때를 잘 맞추어 조심조심 지나니 염하강과 조강(지금의 한강하구)이 만나는 연미정이나 유도에서 다음 물때까지 쉬어가거나 조금 더 위쪽에 있는 용강포나 조강포에서 머물러가야 한다. 그래서 정묘호란의 정전회담장이었던 연미정에는 난전이 서고 배들이 즐비했다. 그래도 조강포의 위세에는 미치지 못하였던 모양이니 한강하구의 옛이름이 조강리의 이름을 딴 ‘조강’이었던 것만 봐도 어림짐작이 간다. 조강리는 조강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시선배의 여정을 따라 마포로 올라가 보자.
님을 두고 떠나는 나는 가구싶어 가나 / 달은 밝구 명랑한데 / 집생각이 절로난다 / 강비탈에 젊은 과부 뱃소리에 잠 못든다 / 저 달 뜨자 배 띄우니 우리 배 출발 잘 되누나
바다 우에 저 갈매기 안개 속에 길을 잃고 까욱까욱 울어댄다 / 저 달 지면 물참(밀물때)된다 달 지기 전에 빨리 저어 향교참(행주성부근)을 대어보세 / 염창목(염창동)을 올라서니 선유봉(선유도)이 비치누나 / 선유봉을 지나치니 장유들(밤섬) 술집에 불만켰네 / 어서 빨리 노를 저어 행조참(행주성)에 물소리세 / 마포에다 배를 대고 고사술을 올려주면 한 잔 두 잔 먹어보세 / 어서 빨리 조기 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리운 처자 만나보세
김포 애기봉은 병자호란 당시 기생의 사랑과 연관된 전설이 있는 곳인데 남한강 뗏목꾼들의 여정 곳곳에도 기생들의 설화가 없는 곳이 없었으니 조강 최대의 포구였던 조강리는 말할 것이 없을 터이다. 목숨을 건 거친 운명의 뱃사람들에게 젊은 과부며 기생은 위안과 희망의 대상이었으리라. 밤에 달이 뜰 때 물때가 맞으면 영락없이 밤에 배가 떠야 한다. 조수의 차란 달의 공전과 연관된 것이니 자연적인 감조구간인 한강하구의 항행이야 조수의 운명과 같이 하는 것이다.
자료그림2 파일명: 포구도
설명: 나루터풍경 -이두호의 객주중에서
참은 가다가 잠시 쉬거나 밥을 먹는 곳으로 향교참과 행조참은 행주산성 부근에 있었다. 염창목은 염창동 수로를 이른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이 안면도와 손돌목의 험로를 통과하고도 안심할 수 없었다. 마지막 고비인 염창수로 때문이었는데 이곳은 물살이 빨라서가 아니라 수초가 많고 물길이 얕아서 문제였다. 선유도는 원래 선유봉으로 육지와 연결된 산이었다. 그것이 한강종합개발 계획에 의해 육지와 분리되어 선유도가 된 것이다. 마포에 부리는 짐은 주로 조기였다. 조선초 밥상에 단백질을 제공하던 자반으로서 제 1어류는 청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를 조기에게 내준다. 조기는 정권을 장악한 서인정권의 무반인 임경업장군과 반청의식이 연관되면서 서해안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는다. 한강수운의 실질적인 제1물목은 쌀이었음에도 조기배야말로 바다라는 삶의 터전과 서울을 연결시키는 가장 그럴듯한 상징이 된 것이다. 상업의 중심에는 물목이 있고 상인과 시장이 더해져 교역이 성사되니 한강수운사에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들 상품이다.
물목
한강 수운의 중심물목은 곡물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임산물이었다. 고려도읍이 개경으로 확정됨에 따라 남한강 중류의 목재 수요가 높아졌으며, 조선초기의 한양천도는 한강유역 임야개발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태조때 이미 강원도 심산의 벌목이 시작되어 태종때부터 궁궐과 관아건축용 자재가 한양으로 수송되기 시작했다. 연산군대에는 재목이 고갈되어 대동강변의 목재를 벌채하기 시작했고 조정에서는 때때로 금산을 단행하여 삼림 보호정책을 펴기도 했으나 임란중 파괴된 도성의 복구 사업 때문에 한강 상류의 벌목이 불가피하였다. 오지의 벌목장에서 강변까지 임도를 열고 인력과 축력으로 강변까지 옮겨진 나무는 하천을 이용하여 벌류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한강 상류의 원시림이 크게 훼손되었으나 선조들의 벌목 방법이 표송(標松.씨소나무)을 보호하며 간벌하는 원칙에 따랐기 때문에 일제까지도 이 지역의 임업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무는 용도에 따라 재목과 땔나무등으로 구분되는데 재목은 주로 소나무로 건축재나 관을 짜거나 배를 만드는데 쓰였다. 재목은 대부분 상류지방 산이며 정선, 영월, 단양, 청풍등지에 집결되었다. 배를 만들기 위해 영월 영춘 목계 이포등에서 이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뗏목으로 엮어 서울로 수송되었다. 뗏목운행은 4월부터 11월까지 계속되는데 영월 상류쪽은 급류가 많아 숙련된 벌부들조차 사고를 많이 당했다. 시목은 와요瓦窯에 쓰였으나 차츰 강변나무가 남벌로 사라지자 상류의 시목에 의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요의 나무 소비는 엄청난 것이었고 숲을 파괴하는 주요인 중의 하나였다. 강화에는 사기리와 연리 독정리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데 사기리는 도자기요, 연리와 독정리는 옹기요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시선배에 실린 상류의 땔감들은 주로 이곳들에 운반되었을 것이다. 상류의 시목은 민간인 시선배가 아닌 수군이 운영하는 수참선에 의해 운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수참에 명하여 와요의 시목을 수송하는 것을 정지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상류에서 나무를 베어서 수참으로 하여금 운반하여 와요에 바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918년 한양에 이입된 상류지방의 임산물은 37.8%인데 그중 땔나무가 17.1% 할목割木이 16.3% 잡목이 4.4%였다. 땔나무의 순위가 1위인데다 할목이나 잡목도 그냥 땔나무로 통칭되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한양사람들의 연료와 재목의 공급지였던 뚝섬에는 40호의 시탄객주柴炭客主가 있었으며, 시탄 즉 땔나무와 숯등 땔감의 공급은 양근, 여주일대의 강변 주민들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갈수록 강변나무가 고갈되어 한강상류의 공급량이 증가하였다. 소나무와 달리 박달나무와 참나무는 물에 가라앉기 때문에 상류지방에서 뗏목으로 엮지 않고 배로 운반하였다. 참나무는 숯을 굽기 위해 양근일대에 공급되었고, 목공예품과 수레바퀴 제작용으로 쓰이는 박달나무는 영춘에서 부분적으로 가공된 후 서울로 수송되었다. 따라서 시선배는 마포에는 하류지방의 물목을 내리고 잠실까지 올라와 땔나무를 싣고 갔을 것으로 판단된다.
자료그림3 파일명:조선소금산지.jpg
설명: 조선시대를 거쳐 소금산지는 약간의 변화가 있으나 대체로 그림과 같다.
시선뱃노래에는 조기가 주요물목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조기보다 더 중요한 물목은 소금이었다. 소금은 원래 국가가 관리하는 전매품이었다. 소금을 만드는 주체는 수군이었고 조선정부는 생산과 유통을 주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실록에는 개인적인 제염과 판매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질 않는다. 수군이 제조한 소금은 주로 구황을 위한 자본이 되고 있었다. 소금을 만드는 노역은 해안지역 수군에게 고역이 되었기에, 조정에서는 연안 백성의 생활안정을 위해 어염과 관련된 노역을 줄이고 생산에 대한 세를 줄이는 등의 배려를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염은 해안가 백성과 수군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었고, 조정에서 자주 논의되는 주제중의 하나였다.
“처음에 의염경차관(義鹽敬差官)이 민간에서 굽는 염분鹽盆을 모두 회수하고 또 염호의 자손까지 찾아내어 관에서 스스로 소금을 구어서 팔고, 심한 사람은 백성들의 사매를 금지하고 관에서 그 이익을 독점하여 위에 귀여움을 받으려고 하니 이에 민간에서 소금이 귀하여졌다.”(조선왕조실록4집656면세종28년2월23일신유.조선시대수군1 p509-510재인용.신서원) 소금 품귀 현상은 김치에서 소금을 대신하여 고춧가루를 쓰기 시작함으로서 김치 맛에 본질적인 변화를 초래한 역사적 계기가 될 만큼 생필품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갖는 것이었다. 세종은 처음에 ‘각도의 의염은 지금 실농하였으므로 선군이 소금 굽는 것을 정지하게 하라고 전지를 내렸으나 호조에서“각도의 창고가 텅비었으므로 흉년을 구제하는 계책은 소금의 이익보다 시급한 것이 없는데, 지금 모두 그만두게 하니 매우 옳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즉시 전지를 회수하고 다시 선군으로 하여금 전과 같이 소금을 굽게 하였다.’(위의 책 p510) 그러나 조선 정부의 헌신적인 관리에도 불구하고 소금과 염전은 점점 민간소유로 바뀌어갔으며 소금이야말로 마포, 용산, 서강등 ‘아랫강 여각상인’들의 전략상품이 되었으며 특히 마포는 소금과 새우젖 교역을 통해 1910년까지 전국 제일의 하항으로서의 명성을 유지했다. 택리지에 ‘원주는 동해의 어염이 모여든다’고 한 것으로 봐서 한강상류지역은 동해안소금이 공급되기도 한 것 같으나 조선후기에는 한양의 상인들이 편리한 수로를 이용하여 단양 상류의 영춘, 영월까지 서해안의 소금을 공급하였으며 하항에 하역된 소금은 횡성, 평창등 영서산지의 시장으로 수송되었다. 낙동강 상류의 봉화, 예천, 상주에도 한강소금이 공급되었으며 보은, 청안 일대에서는 금강소금과 시장쟁탈이 있었다.
고로들의 제보에 따르면 6인 가족을 기준으로 1가구당 연간 소금의 소비량은 약 70kg정도였다. 그리고 농우가 있는 집은 소에게 먹이는 된장제조용으로 약 30kg의 소금이 필요했다. 1907년 당시 남한강유역의 호수만 10만호였으므로 위의 자료는 총소금소비량을 7,000t으로, 다섯가구당 농우한마리를 보유했다고 하면 7,600t으로 증가된다. 소금수송선은 주로 대선을 사용했으나 지류에서는 중소선을 이용하였다. 1만톤의 소금을 운반하려면 대선만 400척 이상이 필요하였으므로 남한강유역에서 소금이 차지한 비중을 짐작할만하다.(국토와 민족생활사 p165-6. 최영준 한길사)
남한강 유역의 소금가격은 개항을 전후하여 가격변동이 심하였다. 1886년 인천청국조계의 상인들이 산동지방의 천일염을 수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소금은 경기만의 전오염煎熬鹽에 비하여 질은 떨어지나 값이 쌌기 때문에 남한강 유역의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 초까지 소금과 콩의 교환비율은 1:2였으나 호염수입 직후인 1890년대에는 1:1로 바뀌었다.(정신문화연구원[국역한국지]1985 p567-577)
관염인 인천의 주안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의 생산고는 1921년 10.982.846근에서 1923년15.929.800근으로 2년 사이 5백만근 정도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現時の朝鮮 p230 內藤倫政識.朝鮮事業及經濟社.1925) 주안을 비롯한 경기만 도처에 천일염전이 개발된 1920년대에는 소금과 콩의 교환비율이 2:1로 역전되었다. 특히 충북선, 안성선, 수여선등이 부설되고 신작로가 개수된 후 내륙의 주민들은 강변의 갯벌장까지 장거리 여행을 하지 않고도 값싼 소금을 구입할 수 있게 되어 남한강의 소금 값이 더욱 하락하였으며, 1948년 소금배의 통행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자료그림4 파일명: 나룻배-이두호.jpg
설명: 나룻배에 실리던 물목과 그 풍경을 볼 수 있다.-이두호의 객주중에서
육운의 발전과 한강수운의 쇠퇴
조운을 육운으로 할 것인가 수운으로 할 것인가는 조선조 내내 조정에서의 끊이지 않는 논쟁거리였다. 육운론자는 왜구와 풍랑으로 인한 인명의 상실등 민심을 흉흉케하는 극단적인 피해를 감당키 어렵다는 것이었고, 수운론자는 육운의 고역이 수운을 훨씬 능가하고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을 이유로 들었다. 한편 조선초만해도 수운로로서 한강하구 뱃길은 상류보다는 양호한 편이었던 것 같다.
경기감사 유사눌이 수운의 편리함을 임금앞에 논하면서 “우리의 국도國都는 그 위치가 큰 바다에 가까이 있으며 한강이 그 남쪽으로 흐르고 벽락이 그 서쪽에 있어서 소통되도록 파내는 공역을 들이지 아니하여도 조운의 이익이 또한 자연히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 2집 573면.세종6년1월11일(무자),조선시대수군1p290재인용)
이에 비해 한강상류의 강바닥 상황은 수운에 열악하여 강바닥 파내는 공역이 대단하였음을 실록은 전하고 있다.
‘경기감사의 관문에 의하여 계하기를 “이제 경상도 녹전祿轉을 조운하는 때를 당하여, 가뭄으로 인해 강물이 얕아져서 배들이 여울을 만나게 되면 통행하지 못하니 청컨대 영흥, 음죽, 이천, 천령, 지평, 양근, 관주등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각기 물가에 사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여울을 파서 배가 통행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의 책 p284)
임진란이후 왜구의 침략이 사라지자 수운은 조선 제일의 운송으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렀고(…) 강과 바다에 다니는 큰배, 작은배는 천으로 만으로 헤아린다. 곡식, 생선, 소금, 재목, 시탄 등속을 다 배로 운반한다. 나라에는 수레가 없고, 암소를 흘레붙이고 말을 타서 달리는 풍속이 없다. 일용백물의 운반을 배 아니면 메어나르는 두 방법뿐이다. 배의 쓰임이 이처럼 전적이고 긴요하였다.
(조선후기 서울 상업발달사연구 p117 고동환. 지식산업사 1998)
개화기에는 근대증기선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한 직후였던 박규수는 이 사건을 근대증기선을 개발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박제경의 근세조선정람近世朝鮮政鑑에는, 이 때 박규수가 제너랄셔만호의 잔해 부품을 대동강에서 건져내어 서울 한강으로 보내고, 대원군은 이것을 받아서 김기두金箕斗라는 기술자를 시켜 해국도지海國圖志에 의거하여, 서양 증기선의 원리를 본떠서 철선을 제조하고 목탄으로 증기기관을 작동시켜 기계바퀴를 돌리는 군선軍船을 새로이 제조 실험한 사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고종실록에 이 무렵(1866~7) 전함을 새로 건조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실제로 이러한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교차 확인된다. 해국도지의 방조전선의倣造戰船議에는 서양식전함의 제조의 필요와 방법이 논의되어 있고, 같은 책의 화륜선도설火輪船圖說에는 왓트(James Watt)의 증기기관의 도해와 증기선의 제조 방법이 설명되어 있었다. 근대기선을 제조할 수 있는 정보는 확보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제작하여 실용화에 성공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1883년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f,P.G.von)의 건의에 의해 주무관청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영국 청나라 미국 독일등의 선박을 배선하는 형태의 근대적 기선을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1884년에는 조운을 원활히 하기 위해 운송국運送局을 설치하고 창룡호(536톤),현익호(709톤),해룡호(1,027톤) 등 증기선 3척을 독일에서 구입하였다.
(http://cafe.naver.com/hansacheong.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
1886년에는 전운국轉運局에서 자가선 및 용선을 운항하여 해운정책에 일대 전환을 꾀하였다. 1892년부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기선 소유의 해운기업인 이운사利運社를 설립하여 자기운송형태에서 타인운송형태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일본의 배상금지급요청으로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에 위탁운영하게 함으로써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소멸하였다. 러일전쟁이후에는 일본에 의해 모든 경제권이 박탈당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관영해운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민영해운의 경우에도 1882년 일반인에 대한 양식선박의 구입이 허가되어 1886년 대흥상사가 인천과 용산사이에서 기선을 이용한 영업을 시작했다. 시탄을 실어나르던 시선배 대신 시탄을 이용한 증기선이 등장하며 시선배의 명성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자료사진5: 파일명 100년전 제물포.jpg
설명: 1904년 호주사진가 조지로스가 찍은 제물포의 풍경이다. 바다에 뜬 배들 중에 증기선이 보인다. -1904 Korea throuth Australian eyes, 조지로스, 교보문고-
인천은 청일전쟁 이전까지 경기,충청,황해,평안도 등 국내외에서 물화가 모여들었다. 경강상인들은 전국에서 모인 인천의 물화를 기선으로 경성까지 실어날랐다. 1888년부터는 일본상인들이 조선선박을 이용해 상업활동에 뛰어들었다. 1889년 10월부터는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정부의 허가를 받고 외국형 범선으로 인천과 마포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용산-인천간 증기선의 배삯은 상등은 2원 하등은 70전이었다. 1894년 무렵 조선인의 선박소유권은 관영해운과 마찬가지로 대개 일본인 수중으로 넘어갔다. 인천과 용산사이에 기선을 이용한 화물운수도 일본인 운송업자에 의해 거의 독점되었다.(매혹의질주 근대의횡단 p206.박천홍.산처럼 2004) 1900년 대한협동우선회사등이 설립되고 주요항만에 소규모 해운기업이 창설되었으나, 일본의 직간접적인 방해공작과 자금의 영세성및 외채부담능력결여 등의 이유로 곧 소멸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4권 p556)
엎친데 덮친격으로 1900년 7월 경인철도가 완전히 개통됨으로써 기선에 의한 조운업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철도개통 초기에는 철도수송의 영향이 미미했다. 선박운임과 철도운임이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급한 화물이나 침수가 우려되는 화물이외에는 여전히 배편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일본 상인이 철도회사와 교섭해 철도운임을 인하하면서 사태는 달라졌다. 안전성과 신속성 저렴성까지 덧붙여지면서 한강수운업은 급격히 위축되어 갔다. 1911년 무렵에는 인천의 추전상회(秋田商會) 소속의 소기선이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것 외에는 일본 범선이나 조선 목선이 왕래하는데 불과했다.
철도는 서울시장의 집중력을 강화했다. 종래 인천이나 부산상인의 손을 거쳐 수입되던 화물이 점차 서울 상인들의 직거래로 전환해갔다. 경산도의 미곡, 목면, 삼베, 비단등은 철도에 실려 서울시장에 유입되었다. 배편으로 인천을 통해 들어오던 모시도 대전-군산철도가 놓이면서 기차편으로 올라왔다. 원산 명태는 원래 보부상들이 이고 지며 서울로 날랐는데 경부철도가 개통된 이후 부산으로 부려졌다가 다시 철도편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운반되었다.(서울 상업사 p378-381 이태진외 태학사 2000)
자료그림6 파일명: 1920인천지도
설명: 화도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920년 당시 경인선을 중심으로 한 인천시의 지도이다.
경인선이 한강수운을 대체함에 따라 인천은 서울의 위성도시로 성격이 변해갔다. 인천의 지형도 변형을 겪었다. 인천역, 소펄역 일대의 저습지가 매축되었고, 철도공사에 따라 응봉산과 우각현이 절단되었다. 철도가 인천시의 중앙부를 관통함에 따라 시가지가 철도노선을 경계로 북부와 남부로 격리 되었다. 이에 따라 각종 도시기능이 집중된 남부는 더욱 발전한 반면 북부는 개발에서 소외된 지역으로 오랫동안 남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한동안 한강수운은 유지됐지만 주인을 빼앗긴 강은 스스로 근대의 강으로 발전해갈 수 없었을 뿐아니라 결국 사멸하고 만다. 1948년 한강 수운은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조선후기까지 한강수운의 제일위를 차지하던 선박수송은 두가지 방향에서 위협받았고 결국 소멸했다. 하나는 뱃길을 가로막는 사구 퇴적물의 증가이고, 둘은 일제의 침략적 교통정책이었다. 뱃길을 위협하는 뻘과 사구의 발달은 자연적 제약으로 조선조 내 이루어진 삼림 남벌의 결과였다. 삼림의 황폐화는 강으로의 토사 유출을 초래하고 이들 토사는 강위에 퇴적되어 뱃길을 갈수록 위협해 갔다. 조선조정내에서 심심챦게 등장했던 용산운하, 경인운하 논의등은 자연수로로서의 한강의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고뇌의 단편을 보여주나 어느 것도 실행되진 않았다. 수운의 발달은 대체로 뗏목과 같은 부선에서 범선으로, 범선에서 동력선으로 발달 과정을 거치나, 근대적인 증기선도 한강의 누적된 토사로 인하여 좌절될 수 밖에 없었다.
일제에 의한 근대교통수단의 도입은 한반도의 근대화의 신호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한강을 비롯한 전통적인 수송로의 기능을 말살하고 철도 신작로등 자신들이 만든 교통로로 교통질서를 재편하고 식민지정책을 관철시키며, 새로운 상권을 강화하려는 제국주의 침략의 신호였다는 점에서 불행한 역사의 양면을 담고 있다. 한강 수운의 쇠퇴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고로들은 충북선등 철도가 남한강변까지 이르기 전에는 수운이 전혀 위축되지 않았으며, 수송화물은 양적, 질적으로 오히려 개항 전보다 우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20년대 말까지 한강유역 상권은 일인들이 거의 침투하지 못한 우리나라 상인들의 아성이었으나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가 이를 묵과할리 없었다. 일제의 남한강 상권 잠식은 철도부설과 신작로개수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1904년에 개통된 경부선의 시발점과 종점은 한-낙동수로의 경로와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경유지가 다르기 때문에 남한강 수운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않았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경부선 개통 후 한-낙동수로 좌측 강안의 배후지가 잠식당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더구나 경부선을 주축으로 한-낙동수로 방향으로 분기하는 경북선(1924), 충북선(1921)등 동서횡단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내륙수로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1904년 5월31일 일본 원로회의와 각의는 ‘대한방침 및 대한시설강령’을 작성한다. 한국침략의 대강을 제시한 문서였다. 여기서 철도관련 항목은 다음과 같다.
‘교통기관을 장악할 것-교통 및 통신기관의 중요한 부분을 우리 쪽이 장악하는 것은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의 여러 점에서 매우 긴요한 것으로서 그중 교통기관인 철도사업은 한국 경영의 골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라 실행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매혹의질주 근대의횡단 p83-4.박천홍.산처럼 2004)
철도운영 초창기인 1908년도까지 조선철도는 밑지는 장사였다. 투자액에 비해 수익은 보잘것이 없었다. 하지만 1910년까지는 33만8.380원에 이르는 순이익을 올렸고 1911년에는 63만 3.950원으로 급격하게 늘었다.(위의책 p85-6) 일제가 이런 초기부담을 감수했던 것은 군사철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철도의 군사적 성격은 철도부설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일본은 경부선 경의선을 부설하면서 약 2천만 평에 이르는 선로용지와 정거장 부지등을 무상 또는 시가의 10분의 1에서 21분의1에 이르는 가격으로 점령해 버렸다. 또한 약 1억 5천만명에 이르는 철도 노동자를 동원했다. 이런 약탈에 힘입어 일본은 1마일당 6만2천여원의 건설비로 320마일의 철도망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철도의 1마일당 평균 건설비가 16만원이었던 점에 비춰볼 때 거의 공짜로 철도를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제침략과 한국철도.p300정재정.서울대출판부1999.위책p87재인용)
당시 아이들 사이에선 양귀는 화륜선 타고 오고, 왜귀는 철차타고 몰려든다는 동요가 나돌았을 정도다.(도시공간생활세계p70주98.김왕배.한울.2000.위책p90재인용)
동아일보 1926년 11월 20일자는 농촌빈민들의 철도를 통한 북방이주 소식을 보도하고 있다. ‘요사이 경기도 가평, 양평 양군을 중심으로 그 인근 각촌에서는 빈한 농민들이 하루에도 수백명씩 왕십리, 청량리, 창동, 의정부등 경원선 정거장에서 북행열차에 몸을 실어(…) 지난 16, 17 18일 3일간 왕십리, 청량리 두 정거장에서 떠난 사람의 수효만 하더라도 젖먹이 어린이는 제하고도 실로 500여명에 달한다더라.’ (위책 p92-93)
철도가 각 지역의 장시나 중심지역을 통과함에 따라 내륙상권은 파괴되고 재편성되었다. 대구는 경부선의 등장과 함께 부산상권에 포섭되어졌다. 충청북도의 경우 기존의 상품유통 중심지는 한강수운을 이용한 충주였지만 경부선이 조치원을 통과함에 따라 이 지역의 중심상권은 충주에서 청주로 옮아갔다. 청주는 다시 서울, 부산 상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양에서 충주, 대구, 동래, 부산포에 이르는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한강유역과 경상도 지방 사이의 교역과 문화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나, 일제 36년간 경부선과 신작로의 개수등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수송의 발달은 시장균형 가격의 하락을 초래하고 균형거래량은 증가시키면서 소비자들이 누리는 잉여는 늘어나게 한다. 미국의 경우 1815년에서 1860년 사이 수송비용의 감소를 생산성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계산해 보면 도로의 경우 2배, 철도의 경우 5배, 강을 이용한 증기선의 경우 10 내지 12배 정도 향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한국경제 2006.5.08) 우리 힘에 의한 한강수운의 근대화가 달성되었다면 철도보다도 더 큰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왔을 것이다.
한반도 수운의 중심은 한강이었기에 나머지 강들의 쇠퇴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금강을 보자. 강경은 조선시대 수운이 발달한 대표적인 포구시장으로 18세기 무렵 대시장으로 성장했다. 강경은 군산, 공주와는 수륙으로 전주, 대전과는 육로로 결합되어 있었다. 강경은 대구 평양과 함께 조선후기 3대 시장으로 꼽힐 만큼 번성했다. 강경은 개항이전부터 수입상품이 범람했다. 당시 강경은 일본과 청국의 밀무역 상인들이 출몰하는 밀무역의 중심지였다. 경부선 개통 전까지 군산항 수입재화의 80%가 강경시장을 거쳐 판매되었다. 그러나 경부선과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금강수운은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강경은 얼마동안은 기존 시장세력을 유지했다. 금강수운과 철도에서 군산항과 더욱 밀접하게 결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부선이 금강 뱃길의 종점인 부강을 지나면서 군산과 강경을 경유해 부강으로 공급되던 수산물과 일용잡화는 부산과 인천을 경유해 철도편으로 수송되었다. 1912년 강경-이리-군산선의 개통으로 금강수운은 더욱 크게 위축되었고 대신 철도도시 대전과 항구도시 군산이 발달했다. 일본은 강경을 군산에 직결해 쌀을 비롯한 각종화물을 자국영토로 나르려 했다. 또한 1905년까지 금강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청국상인들의 밀무역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결국 금강상권도 일제에 의해 쇠락하고 만다. 조선의 중세수운은 그렇게 근대의 제국주의에 의해 막을 내린 것이다.
한강하구의 미래
한강수운은 1948년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제 어디에서도 전성기 한강수운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1953년의 정전협정에서는 의외로 한강하구를 민간에게 개방했지만 정전협정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민들의 의식과 문화속에 명맥을 잇고 있는 몇몇 문화유산 속에 한강수운이 만들어낸 한강문화는 남아있는 것 같다. 넉살좋은 강화여자라 불릴 정도의 강한 생활력, 상업적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실용주의,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문화적 유대감, 역사의 중심에 있다는 자부심등 타자와 주체의 관계에서 비롯된 한강사람들의 본성은 뱃사람과 장사꾼을 축으로 한 한강하구수운이 만들어낸 한강문화의 성취일 것이다.
한강수운은 이미 전쟁 전에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조선조 내내 한강수로를 관리한 수군을 유지할 능력이 점차 감소되어갔고, 봉건국가의 경영능력 쇠퇴는 자연환경을 조절할 능력의 상실로 이어졌다. 몰락해가는 봉건제의 한계가 여실히 한강관리에도 반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강수운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있었지만 제국주의열강의 이해관계와 일제의 침략적인 수운정책에 이해 결국 몇 년 만에 좌절되고 만다. 일제의 침략적 교통정책의 최고수위는 철도였다. 다른 근대국가에서 수송비용의 혁명적 절감을 가져온 분야는 철도보다 수운이었으나 일제는 군사적 성격의 철도를 통해 수운을 고사시켰고 육운중심의 교통체계가 고착화되었다. 1948년 한반도의 수운이 종말을 고하던 때에 유럽에서는 다뉴브강등의 국제하천화를 통한 수운의 일대부흥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근대화의 결과 유럽의 강들은 환경재앙에 가까운 오염의 홍역을 치루어야했지만 그같은 과정의 반성을 통해 강은 항행 위주에서 생태와 개발, 수질과 수량문제, 문화교류와 관광등 수많은 탈현대적 의제를 찾아내게 되었다. 유럽의 강들에 근대와 현대 그리고 탈현대의 반성과 성취가 녹아있는 반면 한강하구는 봉건의 마지막시대에서 시간을 멈춘 채 이들 수많은 의제를 조절해야할 과제 앞에 던져져 있다. 한강하구의 부활은 항행의 복원만으로 성취될 수 없음은 당연하게 보인다. 또한 뱃길중단은 정전이후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봉건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초래된 결과이다. 따라서 분단극복의 상징으로서의 한강하구를 다루는 의제로서 한강하구항행만을 다루는 것은 역사의 인과관계로 볼 때나 현재의 시대적 높이로 볼 때나 적합하지 않다고 하겠다. 한강하구문제는 근대에서 탈현대에 이르는 모든 의제를 녹여내야 할 용광로이며, 민족의 통일과 유라시아의평화 실현을 위한 우선순위와 함께 고민되어야 할 체계의 문제이다.
2006.9.19 추가
강화는 수로를 통하여 지방의 물자를 서울로 대량 수송하는 수로유통경제의 중심지였다. 또한 인천이 개항하면서 경기지역 주요 살 생산지인 강화는 미곡상인들이 미곡을 수매하여 개항장 미곡무역상에게 전매하기에 가장 용이한 지역으로 부상되였다. 따라서 개항 후 강화지역의 지주들은 미곡무역을 적절히 이용하였으며, 미곡상인들도 농촌에서 미곡을 수매하여 이를 무역상에 전매함으로써 부를 모으고 이를 다시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대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강화지역의 농업생산이나 지주경영은 국내외의 유통경제의 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강화사 상 p667 강화의 농촌사회와 지주제 김도형)
개항장에는 일반적으로 한국의 미곡과 일본의 면제품을 교환하는 무역체제인 미면교환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수출된 쌀은 주로 면제품및 잡화품의 주요생산지인 오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공업지대의 하층노동자, 도시잡업층의 주식용으로 수요되었다. 특히 일제는 대량의 미곡반출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896년 인천미두취인소를 설립하여 외지에서의 투기적 유통을 확대하고 있었다.(김도형<갑오이후 인천에서의 미곡유통구조 인천미두취인소 설립을 중심으로 擇窩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이에따라 한말, 일제하 지주제 변동문제와 관련하여 강화김씨가 강화홍씨가의 지주경영에 대해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또한 강화는 비록도서지역이었지만 토지가 광활하여 경지면적으로 자작한다면 그 소출만으로도 이 지역 농민들이 3년을 호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동아일보 1926.8.20. 순회탐방 강화지방대관1)
http://kdaq.empas.com/qna/4103818?l=e
갑곶진은 옛부터 강화의 관문 구실을하여 왔으며 동서 해안은 감탕으로 가람이 육지에 오를 수 없어 겨우 이곳을 적용하여 왔는데 세월따라 선착장을 만들어 화물을 수송하는데 편리하게 되었다. 갑곶이 나루를 옛날에는 갑화관이라고도 하였는데 본도와 김포군 월곶면 사이에서 가장 근거리에 있고 건너기 쉬운 포구이며 지금의 강화역사관 동남방 50m지점에 선착장이 있어 이가 옛 부두로서 이곳에 삼신상회가 있었고 맞은쪽에 선원면 주재소가 있었으며1930년에는 군내 자동차가 3대 인력자가 18대 하차 15대 하우차 4대로 수송하여왔고 삼신상회 기선은 갑겆진에서 인천선, 연안선 해주 거래포선이 있어 여객과 화물을 운송하여 왔다. 그리하여 해방과 동시 1945년을 기점으로 목조 발동선으로 도선하여 서울, 인천방면 여객과 화물을 수송하였고 1955년에 이르러 엔뽀드로 대형 차량인 여객이나 화물을 하차하지 않은 상태에서 운항하다가 1970년 강화대교 가설이래 선박이용은 당절되고 강화읍을 기점으로 직행버스, 시외버스가 서울, 인천, 수원 방향으로 5¡15분 간격으로 발차하여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탈바꿈 되었다. 더욱이 1997년 강화 제2대교가 준공되고 아울러 강화 제2대교가 준공되고 아울러 강화 서울간 강화인천간 4차선 도로의 확장개통으로 인지의 발달과 더불어날로 번영되고 있다.
—————————————————————————-
정조 37권 17년 1월 11일 (을사) 002 / 주교사가 주교 절목을 올리다
——————————————————————————–
주교사(舟橋司)가 주교 절목(舟橋節目)을 올렸다.
【절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봄 가을로 능원(陵園)을 배알할 적에 나루를 건너야 할 때를 만나면 선창에서 물을 건너는 데에 쓰이는 크고 작은 선박의 숫자가 4, 5백 척에 달하므로, 서울과 지방에서 배를 찾아 구하다 보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뱃사람들이 받는 폐단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현륭원(顯隆園)을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해마다 한번씩의 행행에 나루를 통해 건너야 했으므로, 이에 성상께서 뱃사람의 폐단을 깊이 진념하시어 특별히 배다리[舟橋]의 제도를 만듦으로써 배를 찾아 다니는 일은 영원히 혁파하고 단지 경강(京江)의 큰 배들만을 가져다가 연결시켜 교량을 만들어 놓으니, 폐단은 사라지고 일은 간단해졌으며, 공력이 줄고 비용도 적어져서, 실로 이것이 강을 쉽게 건널 수 있는 도구인지라 이에 영구한 법으로 삼는 바이다. 1. 배다리의 배치는 당연히 물길이 좋은 곳을 가려서 해야 한다. 동호(東湖)로부터 그 하류로 강폭이 좁고 양쪽 언덕은 높으며 여울진 곳과 멀어서 물의 흐름이 완만한 곳으로는 노량(露梁)이 제일이다. 또 연(輦)의 거둥 길도 평탄하고 곧아 우회됨이 없으므로, 물길은 노량 나루로 정한다. 선릉(宣陵)·정릉(靖陵)·장릉(章陵)·현륭원에 행행할 때와 온천에 행행할 때에도 모두 이 길을 이용하고, 헌릉(獻陵)·영릉(英陵)·영릉(寧陵)을 행행할 때에는 광진(廣津)에 옮겨 설치한다. 1. 선창의 배설은 으레 큰 배를 강가에 대놓고 언덕의 좌·우측에 긴 나무를 늘어 세우고서, 그 안에는 모래와 흙으로 채워 배의 높이와 수평을 이루게 한다. 그 일에 드는 비용은 극히 많이 소요되었으나 행사를 치르고 나면 헐어버리고 매년 이를 다시 설치해야 하니, 그 비용을 지탱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마침내 돌로 그것을 대신 쌓기로 하고 강가의 잡석을 모아 고기 비늘 모양처럼 가지런히 맞물려 높게 쌓아 올리고 석회로 그 빈 틈들을 메꾸면 그것이 완고하고 튼튼하여 한번 쌓아서 영구히 쓸 수 있게 되겠기에 이렇게 하기로 결정한다. 1. 교량에 쓰일 선척에 대해서는 남북으로 선창의 거리가 1백 90발[把]이므로 여기에는 큰 배가 의당 36척이 소요될 것이니, 경강의 개인 배와 훈국(訓局)의 배를 택일하여 쓰기로 한다. 1. 경강의 큰 선박이 지금 현재 도합 80척이니 교량에 소요될 새로 만든 완고한 배 36척 이외의 배들은 모두 배다리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세워서 배다리를 끈으로 잡아매거나 호위하는 구실에 쓰이도록 한다. 1. 배다리의 제도는, 배치하여 연결시킬 즈음에 먼저 여러 배 가운데서 몸체가 가장 크고 뱃전이 가장 높은 것을 골라 강 한복판에 정박시켜서 중심의 표적을 삼게 한다. 그리고 이어 크고 작고 높고 나직한 것들을 차례로 왼쪽과 오른쪽에 줄지어 연결시켜 선창에 닿게 함으로써, 다리의 모양새를 가운데는 높고 양쪽은 낮은 것이 궁륭교(穹隆橋)의 모양이 되게 한다. 1. 늘어세워 묶는 방법은, 배를 먼저 상류를 향해 닿을 내리게 하고 가룡목(駕龍木)은 양쪽의 끝이 서로 닿지 않도록 어긋나게 배치하여 서로 끼어들게 해서 바로 이 배와 저 배의 뱃전 판자가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틈새가 나지 않도록 한다. 그런 다음에 남쪽과 북쪽 선창의 항선(項船)을 먼저 큰 밧줄로 배의 이물과 고물을 나누어 묶어서 언덕 위의 못에 잡아매고, 다음에 종보와 버팀목을 묶고 다음에 가로로 판자를 깔고 다음에 난간과 조교(吊橋)와 홍살문을 설치한다. 1. 배들을 늘어세운 뒤에, 이전에는 돛대를 배 위에 가로로 놓고 각 배들을 묶었는데, 돛대 기둥이 밑둥은 크고 끝쪽은 가늘어서 가로로 놓고 묶기에 불편하였다. 그리고 또 크고 긴 것을 가로로 여러 배에 뻗혀 잇게 함으로써 배 한 척에서 탈이 발생하면 묶은 줄을 풀기가 또한 어려웠다. 그러니 별도로 장산곶(長山串)에서 길이 35자 가로 세로의 넓이 1자 되는 소나무를 구해다가, 배마다 각기 다섯 주(株)씩을 배에 깔아놓은 판자의 길이를 헤아려 분배해서 세로로 묶되, 두 쪽 끝이 뱃전을 걸쳐 밖으로 나가게 한다. 그리고 두 배의 종보 머리는 서로 마주 잇닿게 하고 말목을 맞세워 박은 다음 칡 밧줄로 야무지게 묶는다. 그리고 또 버팀목을 배 위에다 세워 배가 흔들리는 걱정이 없게 한다. 1. 이전에는 배 위에다 발[芭子]을 깔고서 모래와 흙을 채우고 그 위에 잔디를 깖으로써, 설치하고 철거할 때에 일이 많을 뿐만 아니라 만일에 비라도 만나게 되면 언제나 매우 질척거려서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었다. 양호(兩湖)에 나누어 맡긴 장송판(長松板)으로 너비는 한 자, 두께는 세 치, 길이는 어가(御駕)의 길 너비 4발[把]의 폭에 한정된 것을 고기 비늘처럼 나란히 종보 위에 가로로 깔고, 두 판자가 맞닿는 곳에는 드러나지 않게 못을 박아 서로 맞물리게 한다. 또 아래쪽에는 견마철(牽馬鐵)로 두 판자가 맞닿는 곳에 걸쳐 박고, 또 판자의 양쪽 끝에는 보이지 않게 구멍을 뚫어 삼 밧줄을 꿰어서 왼쪽과 오른쪽의 종보에 묶어 움직이거나 노는 폐단이 없게 한다. 1. 깔판의 좌우 양쪽에는 먼저 중방목을 설치하고 다음으로 짧은 기둥을 매양 한 칸에 한 개씩 늘어 세우고, 벽련목(劈鍊木)을 가지고 가로로 열십자 모양의 난간을 만들어 두 기둥 사이에 연이어 박아넣되, 먼저 기둥 한쪽에 서로 맞보게 변석(邊錫)을 뚫어서 난간이 서로 맞붙고 드나들게 하는 뒷받침으로 삼는다. 1. 노량 나루는 바로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곳이라서 밀물이 많으면 수위(水位)가 3, 4자가 높아지고 적어도 두어 자는 높아져 배다리가 물에 떠받치어 선창보다 높아지고, 조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위아래로 층이 갈라져 길의 형태를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비록 선창을 더 쌓고자 하여도 밀물과 썰물의 출입으로 인하여 수위가 갑자기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므로, 때에 따라 일을 하고 중지하고 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대략 조교(吊橋)의 제도를 본떠 널다리를 만들되, 세로로는 종보를 배치하고 가로로는 넓은 널빤지를 깔아 다리 모양처럼 똑같이 만든다. 그리고 널다리의 종보 머리를 항선(項船)의 종보 머리에 연접시키되, 요철(凹凸) 모양으로 깎아 서로 잇대서 비녀장 지르는 것을 마치 삼배목(三排目) 궤도와 같이 하여 자유자재로 구부러지고 펴지도록 한다. 그렇게 할 경우 조수가 밀려들어 다리가 높아지면 널다리의 한쪽 머리가 배를 따라 들려져서 한쪽은 약간 높고 한쪽은 낮아지는 형세가 되겠지만 경사가 가파르기까지는 않을 것이고, 조수가 밀려나가면 평평해져서 선창의 위가 판판하게 도로와 연결이 될 것이다. 1. 남쪽과 북쪽의 선창에 각기 한 개의 홍살문을 설치하여 배다리의 경계를 표시하고 가운데의 가장 높은 배에도 홍살문을 세워 강물의 복판임을 표시한다. 1. 배다리를 놓고 철수하는 일을 보아 지키고, 거둥이 있을 때 벌여서서 호위하는 일에 군졸이 없을 수 없다. 배 한 척의 격군(格軍)이 12명으로 도합 80척의 격군이 거의 1천 명에 가까우니, 이들로 군대를 조직하고 군사 명부를 작성하여 본 주교사에 비치한다. 그리하여 배다리를 놓고 철수할 때는 이들 격군을 돌아가며 부리고, 거둥 때는 주교사 소속의 배 한 척당 12명씩의 격군에게 전건(戰巾)을 씌우고 청·황·적·백·흑 빛깔의 더그레[號衣]를 입혀 좌우 난간 밖 뱃머리에 벌려 세우고, 협선(挾船)의 격군은 좌우 협선에 벌려 세워서 호위로 삼는다. 1. 이미 창설하여 군대의 대오를 지었으면 영솔하는 사람이 없을 수 없다. 배다리의 중심에서 남쪽은 전부(前部)로, 북쪽은 후부(後部)로 삼아 배 세 척으로 1개의 선단[䑸]을 구성해 전후 각기 다섯 개의 선단을 이루어서 오사(五司)의 제도를 대략 본뜨고, 나머지 배들은 중앙에 배속시킨다. 협총(協總) 한 사람을 두어 전후를 통솔하게 하되, 본 주교사의 도청(都廳)으로 겸임시키고, 전·후부에는 각기 영장(領將) 1명씩을 두되 주교사의 감관(監官) 두 사람으로 임명하며, 매 선단에는 각기 선단의 우두머리 1명씩을 두되 주교사의 영장 10명으로 임명해서 단속하고 통제하게 한다. 1. 군졸이 있은 다음에는 당연히 표시하는 깃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는 진영을 짜는 것과는 다름이 있으니, 굳이 큰 깃발을 쓸 필요가 없다. 의당 배와 물의 의미를 상징하게 해서 육군(陸軍)의 깃발 제도와 구별지어야 할 것이다. 중앙의 홍살문 양쪽에는 큰 두 개의 깃발을 세우되, 하나는 황색으로 하여 중심을 표시하고 하나는 흑색을 써서 수덕(水德)을 상징한다. 배마다 이물에는 각기 한 개의 깃발을 세우되, 청·황·적·백·흑의 빛깔로 5개 선단의 차례를 상징한다. 그리고 깃발의 띠는 중앙을 상징하고, 기각(旗脚)은 해당 부(部)를 상징하며, 깃발 앞면에는 아무 선단의 몇째 배라는 것을 써서 대오를 표시한다. 배마다의 고물에도 역시 각기의 깃발을 한 개씩 꽂되, 청·황·적·백·흑의 빛깔과 깃발의 띠와 기각은 이물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깃발의 앞면에는 새매나 물새를 그려 옛부터 내려오는 화선(畵船)의 제도를 상징한다. 배마다에는 또한 각기 바람을 살필 수 있는 깃발[相風旗] 한 개씩을 세워 바람을 점칠 수 있게 한다. 1. 대가가 물을 건너는 때에 있어서는 이미 장령(將領)과 군졸을 설치하였으니 총 감독할 대장이 없을 수 없으므로, 대가를 수종하는 이외에 군영에 남아 있거나 부대에 남아 있는 대장을 병조에서 삼망(三望)을 갖추어 들여서 낙점을 받는다. 그러나 만일 해당 군영의 대장이 거가를 따라갈 때에는 인원을 갖추어 의망(擬望)할 수 없으니,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의 수어사나 총융사를 임시로 계청(啓請)하여 합해서 의망해 들인다. 1. 배다리를 놓을 때나 평상시에 있어 선창의 석축(石築)과 창고에 쟁여놓은 목재들은 반드시 오로지 관장해서 살피는 사람이 있어야만 거의 소홀하게 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노량진(露梁鎭)을 본 주교사에 이속시키고 본 주교사가 별장을 차출하여 착실히 관장하게 해야 할 것이며, 해당 노량진의 진영에 있는 환곡과 돈은 한결같이 옛날 그대로 유치시켜 모든 것을 꾸려갈 수 있도록 한다. 1. 나룻길을 건널 때에는 으레 나룻머리에 어가가 머물 처소[大次]가 있어야 하나, 그것을 준비하려면 드는 비용이 적지 않으니 노량진의 진영 막사를 본 주교사의 관사로 정해서 행행하실 때에 어가의 처소로 삼는다. 1. 배다리에 드는 종보·깔판·난간 등속의 나무로 된 물품들은 반드시 거두어 보관하는 곳이 있어야만 썩거나 손상될 걱정이 없을 것이다. 노량 나루의 본 주교사 근방에 별도로 창고 70칸을 지어 각종의 나무로 된 물품들을 보관해 두도록 한다. 1. 어가의 처소를 지키고 수리하고 청소하고 군불을 지피는 등속의 일을 해당 노량진에서 주관해 거행하도록 하려면 자연 급료로 지급할 베[布]나 비용의 수요가 있어야 하니, 금위영(禁衛營)의 돈 1천 냥을 본 노량진에 대출해 주어 이식을 받아 비용의 수요로 삼게 한다. 1. 배다리를 놓거나 철거할 때에 각 선박의 격군(格軍)을 돌아가며 쓰기로 한다면 별로 재용이 많이 들어갈 것이 없겠지만 또한 어지간한 잡비는 들지 않을 수 없으니, 호남에 감해준 조세 운반 비용의 무명 6동(同) 26필을 본 주교사에 소속시키고, 호조가 그것을 받아 넘겨주어 비용의 수요로 삼게 한다. 그리고 쓰고 남은 것은 차츰 저축해 두어 불시의 비용에 쓰도록 한다. 1. 노량진 남쪽과 북쪽의 언덕 근처에 살면서 배를 만드는 장인들은 하나같이 본 주교사의 대장에 올려 잡역을 면제해 주고 다리를 놓을 때 부릴 수 있게 한다. 1. 배다리가 이미 정해진 뒤에 공조가 선창을 쌓는 일이 없으면 본조 소속의 각강(各江)의 관령(管領)들을 모두 본 주교사에 이속시켜 부린다. 1. 다리를 놓거나 다리를 철거할 때에는 당연히 감독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나, 각 군문의 장교(將校)들을 빌어 쓰게 되면 폐단만 있을 뿐 아니라, 배 위에서 일하는 것을 살피는 것이 또한 익숙한 뱃사람들만 못할 것이다. 그러니 배의 주인 가운데 근간하고 사리를 아는 사람으로 도감관(都監官) 1명, 감관(監官) 2명, 영장(領將) 10명을 가려 뽑아 배를 분담해 관리하고 격군을 통솔하여 착실하게 감독하도록 한다. 1. 대가가 나루를 건널 때에 다리 위에서 신호하는 깃발은 당연히 배 위에 꽂아둔 깃발을 사용하되, 깃발을 드는 사람은 좌우에 벌려 선 격군을 쓴다. 1. 깃발은 노량 나루의 본 주교사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임시해서 내다 쓴다. 그리고 수리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는 등의 일은 본 주교사가 거행한다. 상풍기(相風旗)와 격군이 쓰고 입는 전건(戰巾)·더그레[號衣]와 띠는, 처음에는 본 주교사가 만들어 지급해주고, 뒤에 수리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는 일에 대해서는 배의 주인들이 담당해서 거행하도록 한다. 1. 감관(監官)은 영장(領將) 중에서 권점(圈點)으로 차출하고 영장은 각배 주인들 중에서 근간하고 사리를 아는 자를 가려 그들로 하여금 공론에 따라 권점으로 차출하게 하되, 감관은 2년마다 바꾸기로 한다. 1. 깔판자·종보·난간·철물(鐵物) 등속은 착실히 살펴서 손상을 입히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면 10여 년은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개비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데에서 가져다 쓰고, 혹 많은 수효를 개비해야 할 때에는 종보는 장산곶(長山串)에서 가져다 쓰고, 깔판자는 삼남의 바람에 쓰러진 소나무를 가져다 쓰고, 철물 등속은 본 주교사에서 마련한다. 1. 경강(京江)의 개인 배를 다리 공사에 동원시켰으면 수고에 보답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다. 뱃사람의 일이란 오로지 양호(兩湖)의 세곡을 실어나르는 것이 위주인데, 근래 서울과 지방에서 토색질하는 폐단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익을 잃게 되었으니, 각항의 폐단을 특별히 금하여 없애도록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이를 준행하도록 한다. 1. 배를 부림에 있어 요긴하거나 헐후할 때가 있고 각 고을의 배삯에도 또한 후하고 박함이 있으니, 등급을 나누어 구별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감관과 영장은 그 자신은 이미 감독의 일을 맡았고 배도 또한 배다리에 편입되었으니, 노역이 가장 많은 그들을 1등으로, 배다리에 편입된 배를 2등으로, 좌우의 협선(挾船)을 3등으로 삼는다. 그리고 각 고을에는 그들 고을의 후하고 박함에 따라 세 등급으로 구분지어 공정하게 추첨하여 각 고을에서 등수 나눈 것을 버리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헤아려 대장을 준비하게 했다가 다음번 추첨 때에는 당상관이 직접 관장해서 거행하도록 한다. 훈국의 배들도 역시 다른 배들의 규례에 따라 추첨하여 예전과 같이 스스로 가리는 폐단이 없게 한다. 1. 배들이 곡식을 싣거나 행상을 하기 위해 수시로 멀리 출행함으로 인해서 갑자기 모으기에 어려움이 있다. 봄·가을로 능에 행행하는 데는 본시 정해진 달이 있으니, 기한에 맞추어 일제히 와 기다리게 하라는 뜻을 미리 각 배 주인들에게 거듭 단속시켜 감히 기일을 놓치는 일이 없게 한다. 그래서 만일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은 자가 있으면 배 주인을 엄히 징계하고 추첨에서 제외시킨다. 1. 주교사의 도제조는 삼공이 예겸(例兼)하고, 제조는 삼군문의 대장이 예겸한다. 그리고 주관 당상(主管堂上) 1원(員)은 비국에서 별도로 계하(啓下)를 받아서 준천사(濬川司)의 주관 당상까지 겸관(兼管)하게 하고, 도청(都廳) 1원은 삼군문의 천별장(千別將) 중에서 가려 계하를 받아서 역시 준천사의 도청까지 겸관하게 한다. 1. 다리를 놓을 때 사람들을 부리고 재용(財用)을 관장하는 일은 본 주교사의 주관 당상이 모두 관장해서 거행하고, 예겸 당상은 다리를 놓을 때 번갈아 오가면서 일을 감독한다. 1. 큰 밧줄로 배의 이물과 고물을 나누어 묶어서 언덕 위의 못에 매어두는 일은 위에서 논한 바가 있으나, 밧줄이 끝내 튼튼하지는 못하고 또 해를 지내다보면 썩어 상하게 되는 폐단이 없지 않다. 그러니 쇠줄 열 발[把]짜리와 다섯 발짜리 각각 네 개씩으로 남쪽과 북쪽 항선(項船)의 이물과 고물을 나누어 묶어서 언덕 위의 못에 걸어매어 고정시킨다. 1. 다리 위의 깃발에는 대군물(大軍物)의 제도와 소군물(小軍物)의 제도가 있는데, 대군물은 황색 대기(大旗)와 흑색 대기 각각 1개, 상풍기(相風旗) 72개, 종선기(䑸船旗) 36개, 골익기(鶻鷁旗) 36개이고, 소군물은 황색 대기와 흑색 대기, 상풍기·종선기는 수대로 늘어 세우고 골익기는 두지 않는다. 대군물과 소군물은 주사 진영으로부터 임시해서 지휘를 받는다. 그러나 다리 위의 군물이 만일 대군물로 명이 내리면 주사 대장의 해당 영의 군물도 대군물로 거행하고, 만일 소군물로 명이 내리면 해당 영의 군물도 소군물로 거행한다. 해당 영의 대군물은 주사영의 인기(認旗) 1개, 대·중·소의 오방기(五方旗) 각 5개, 문기(門旗) 10개, 각기(角旗) 8개, 청도기(淸道旗)·금고기(金鼓旗) 각 2개로 도합 38개이고 순령수(巡令手)·뇌자(牢子) 각 15쌍(雙), 취타수(吹打手) 33명, 당보수(塘報手)·별파진(別破陣)·난후아병(攔後牙兵) 각 20명이다. 그리고 소군물은 주사영의 인기 1개, 큰 오방기 5개, 각기 4개, 황문기(黃門旗)·청도기·금고기 각 2개로 도합 15개이고, 순령수·뇌자 각 10쌍, 취타수 19명, 당보수·별파진·난후아병이 각 10명이다. 1. 선창 머리에 혹시라도 모래가 쌓여 맨 머리에 있는 배와의 거리가 현격하여지면 그 형편에 따라 당연히 선창 앞쪽으로 물려 만들어야 한다. 전면에 먼저 몸체가 크고 길이가 40자 정도 되는 두 개의 방목(方木)에 다섯 개의 구멍을 나누어 뚫고 다섯 개의 기둥을 박되, 기둥 나무 양쪽 끝에는 각각 가로로 비녀장을 박아서 5층 사다리 모양처럼 되게 한다. 하방목(下方木)을 물 속에 3자쯤 한정하여 내리되, 기둥나무 사이사이 네 곳에 각기 8, 9자쯤 되는 작은 말목 두 개의 윗쪽에 구멍을 뚫어 하방목 좌·우에 꽂고 비녀장을 말목 위쪽 구멍에 가로질러서, 하방목이 떠서 이동하거나 솟아오르는 폐단을 막는다. 그리고 이어 모래를 빈 가마에 담아 방목의 상단 양쪽에 늘어 쌓아서 석축(石築) 밑쪽을 누르고 있게 한다. 뒤쪽에는 기둥나무를 곧게 세우고 이어 걸치는 종보를 얹고, 사면을 두 층으로 나누어 가로 세로로 중방목을 박아서 마치 집을 짓는 모양과 같게 한다. 버팀목과 종보와 깔 판자와 드러나지 않은 못과 견철(牽鐵)과 끈으로 얽는 것은 모두 배다리의 구조와 같게 한다. 그리고 다시 몸체가 큰 가름대의 가장 긴 것 두 개로 좌·우측 깔 판자의 양쪽 가장자리에 덧대어 물러나지 않게 한다.”】
【원전】 46 집 371 면
국사편찬위 홈페이지 2007.1.5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