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민간인 연구자료 2006/01/08 1238

한국전쟁 이전의 강화도 좌우익에 대한 약사
1. 좌익에 대한 이해
1) 박길양(1894-1928)
(1)약력 관청리 출생 독립운동가
고려공산청년회 결성 가담(조선공산당산하, 1925,4,18)-조봉암 -박헌영으로 이어짐
옥중 순국 -1928년 1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2)홀동
*독립운동활동-유경근(한국전쟁시 군 보민회 회장)으로부터 독립공채증서(500원1매)등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임정에 전달하던 중 체포 징역 1년 6개월
*강화 중앙 청년회조직(좌익단체 1924년 월)
*전 조선민중운동자 강화지역 준비위원(1925,4,20)
*조선공산당하 고려공산청년회 창설 가담
*조익계열 청년운동단체-송암청년회, 마라청년회, 철산청년회, 화동청년회-를 통합하여 강화 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1925.11.22)
*체포-신의주사건에 의해 조선공산당원들의 일대 검거와 투옥
*순국- 서대문형무소

2)황우천
*하점면
*황주익(강화군인민위원장,모스크바 유학생)의 부친
*6.25시 월북
*강화여중 창설자
*강화 산업조합과 황우천 조합원수 1만명 창설자이자 이사장 리, 면단위 수직기를 역직기로 가내수공업을 공장으로 전환하여 녀직물과 인견사를 생산 금융조합자리 뒤쪽 1천평정도 되던 산업조합이 강화 경제를 실질적으로 좌우했던 것으로 추정
*아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원래 조익사상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는 한국전쟁시 분명 좌익의 입장에 서 있었음.
*강화 번영회
강화 지역유지 50명으로 구성(1931)
전기, 전등, 전화시설운동-1935년에 설치됨 중심인물-황우천 서봉준
서봉준은 박길양과 항상 같이 활동했던 인물임
*양민학살은 강화 양조장 세력이 산업 조합을 엎은 결과로 나타났고 교육계의 기득권과 관련 산업조합 소속 학교인 강화여중과 송해초교엔 빨갱이가 많았다고 소문을 내기도 했음.

3) 조봉암의 처 김이옥의 활동
김이옥은 강화 여자 청년 50명을 규합하여 강화 여자청년회 조직
여자들 지도 계몽, 토론회등을 통한 향토 여성운동 전개
조봉암 투옥과 그 이후 병을 얻음 1936년 병으로 사망

4) 무명회
박길양, 서봉준, 이상필, 최명식이 주동이 되어 1925년 결성 민족주의와 사회사상
***서봉준
서봉준은 박길양이 설립하거나 조동이 된 단체에 주요인물. 또한 서봉준은 황우천과 함게 강화 번영회에서 함께 활동함. 박길양도 그렇고 황우천의 아들 황주익도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거나 순국함.

2. 우익에 대한 이해
1) 대한 정의단
호국단 중위 조성실 경종오가 주동이 되어 실지회복대 창설
성공회 사무실들을 본부로 사용
이후 최중석을 대장으로 옹립하고 대한정의단 발족
이후 대한 정의단 해산하고 강화치안대(10월 3일)로 합류./ 대장 홍재승, 부대장 최중석
*** 강화 치안대가 좌익계 1200명의 명단을 강화경찰서로 인계 – 강화 보도연맹원 기준으로 작성된 것으로 판단됨

2)민주청년 반공돌격대
김추성(초대 강화경찰서장), 서중섭(헌병중사), 김부수, 김희대가 주동 결성
윤재근(국회의원의 후원)

3) 대한 지화결사대
대한청년단 부단장 송정헌등이 결성
이후 일민주의 청년회와 합류
4) 강화향토 방위특공대 조직

이상의 우익무장대의 뿌리를 보면 대한 청년단, 호국군, 경찰등이다. 이들은 전쟁전 경방단(소방소)과 서북청년회 또는 대한 청년단 소속이었다. 이들이 강화에 결집력을 갖게된 것은 ‘승기룡’ 사건때부터였다. 즉 강화 미군정관이 핑클 대위가 양사면 사무소에서 살을 공출하는것에 항의하던 승기룡씨를 총살 시켰다. 이것을 계기로 강화의 민심은 반미로 기울었다. 이를 염려한 우익은 서북청년회를 강화로 진입시켰고 이후 면단위로 서북청년회가 조직되었다.

한국전쟁 이건의 강화지역 학살 사례
1. 강화 군정과 핑클에 의한 양민 학살
피학살자 승기룡
사유-미군정관 핑클 대위가 양사면에서 미곡 수집 독려차 방문 면사무소에서 승기룔을 소지한 총으로 사살
강화 도민의 항의 – 우익에서는 좌익의 조종이라고 판단
우익의 대책- 이론무장,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을 강화에 파견- 면단위도 조직, 좌익 척결
2. 1947년 3월 좌익요원 총검거
강화-8.15예비검속
한천수(강하경찰서장)가 상부의 명령으로 주도
포고령 제 2호에 근거 대량검거
3. 우호근 순경 살해사건(좌익으로 오인)
양도지서 근무
학살자-우익 서북청년단 소속 구봉회등 청년2명

4. 고석주사건
고문치사사건
고석주와 부친 사망
사유- 1947(?)년경 선원면에서 농악을 하다가 경찰이 총으로 저지
이에 화가난 고석주(다혈질이었다고 함)가 경찰의 총을 빼앗아 부러뜨림
이에 그의 부친과 함게 체포되어 인천서 고문받고 귀가후 각각 1.2일후 사망
*강화에 좌익이 많았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좌익은 위축.

*보도연맹 사건
엄태섭(경찰서장)주고로 1949년 결성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날 (25일) 경찰과 우익은 보도연맹원들을 한 곳으로 소집할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인민군의 진입이 에상외로 빨랐다.(26일) 26일 이미 강화에 인민군이 진입을 했고 보도연맹 참사는 일어나지 않앗다. 그런데 강화치안대에서 올린 1200명의 명단이 아마도 보도연맹원 명단이거나 아니면 그것이 기초한 자료일것으로 추정된다.
*6.29~7.4일 까지 인천에서는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잇었음. 충청도 지역등은 9월이후 보도연맹 사건이 일어남.

한국전쟁시 강화도와 인근섬에서의 학살
1. 강화에서의 좌익의 후퇴와 학살
인민군 주둔지는 온수리(현 초등학교)로 2000명 가량 주둔. 10이정도후 철수 일부가 남아서 인민군 교육 했고, 치안은 내무서원 중심으로 담당.
1차철수: 내무서원등 좌익계열의 무장대가 1950년 9월 18일 강화에서 철수
김추성등 민주청년반공돌격대 소속 대원 3명 사망.
재진입: 9월 22일 내무서원을 중심으로 무장한 좌익의 강화 재진입
300명 가량의 인원을 검거
강화산업조합에서 분류-100명 정도
인애성에서 70여명 학살-처음엔 32명정도로 알앗는데 나머지 30여명은 송악산 부근에서 학살.
2차철수: 10월 2일 약2000여명이 철수함(3천명설도 있음) 강화본도만 1000명,
교동 500~1000명,

2. 경찰과 우익에 의한 학살
1) 1950년 10월 -1.4후퇴 전까지(강화는 1.2일)
(1)신사터 학살/ 온수리 장씨(길상면 인민위원장)의 예)경찰에 연행후 신사터에서 학살당함.
유광용의 모친의 예)벼가 누렇게 익었을 때 검거후 학살당함-며느리의 증언
신사터는 초지닌 가는길목좌편. 재판받으러 가는 도중 학살.
(2) 월미도 수장의 예/ 선상재판, 200명중 15명정도 생존(최종 정박지인 마산에 도차갷ㅆ을때) 배를 내릴때 모두사라짐.
교동과 강화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양사와 염하강을 거쳐 최종은 월미도로… 월미도 정박 함대에서 재판
105명 이상이 재판받고 1.4후퇴전에 풀려남. 이후 이들도 학살됨
이것으로 보아 10월에서 11월까지 강화의 학살은 재판전 무조건 학살과 재판 학살 그리고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학살로 나눠짐.

2) 1.4후퇴 전후의 학살
(1)강화향토방위 특공대 12월18일 조직*경성배경
-인민군의 남하
1950년 12월 17일 개성 송악산에 2000명 인민군 주둔. 황해도 배천 인민군 점령
12월 156일 유엔군 임진강 건너편으로 철수 38방어선 구축
12월 20일 황해도 연안 점령
-연백, 개풍의 우익유격대 강화 철수
교동청년 방위군1950년 12월 19일 군청 소집(지시내린 것은 20일 이때는 사전지시), 17,18세~40세가 대상자. 24일 5000명정도가 제주도로 철수.
(3)조직 /면단위별 조직
(4) 성격: 가을에 일어났던 학살과 달리 법적인 절차나 법적 기관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의 학살/ 안일채의 주장
최초의 학살 시점: 1월2(3)일- 안?의 증언과 터키군주둔(1월 4일 부천소사주둔)
안:김포에서 체포되었다가 경찰에서 풀려나면 다시 터키군이 체포하여 다시 경찰에 수감 되기를 세 번 세 번째 나올땐 ‘성동리로 가면 다죽는다’는 말들었다. 성동리는 갑곶을 말하는듯.
온수리 사슬재 학살/ 1월4(5)일부터 1월8일
안?의 증언/ 우체국에 수감 밤 1시에 사슬재 학살-김동환9강화특공대) 60명 처단
조?의 기일 음력 1950년 11월 30일(1월 7일)
서?의 증언-150명 시신확인
특사령을 받고 돌아오는 자에 대한 학살
임?의 증언 부친을 찾아오는 청년들이 매우 많았음
강화 광성보로 들어갔는데 모두 죽었다고 함.
김동환의 증언 105명 체포 60명 처단 -1월 7일
이들을 죽인 이유: 1월 6일 돌미루로 돌아오는 선발대 내무서원3명 체포- 후발대 대거 진입 정보 수집, 1월 7일 대거학살(체포자와 수감자 모두), 1월 8일 돌미루 289명 생포
*체포자들 강화 장날(12일)조리돌린후 상중하 구분이후 상에 속한 자 학살
이들의 학살 시기 강화가 2.7장이므로 1951년 1월 12일 조리를 돌았고 이후에 학살 당함. / 1월 16(17)일 삼산면으로 후퇴시 경찰서 유치장학살
이것이 강화 호국의 성지라는 이유가 된 사건 그러나 1개대대 인민군 중대와 싸웠다고 하나 1.16~1.30 사이가 인민군이 강화 장악한 시기.(7명의 경기도 빨치산이 먼저 들어오는데 이들 7명의 정예대원에 의해 강화 특공대 삼산면으로 후퇴하게 된 것)
감곶, 월곶, 옥계 학살: 수감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학살
경찰서 유치장 학살: 불은면 지레 출신 경기도 빨치산들의 강화 진입시(1월 16일) 유치장에 수많은 시체목격 발목까지 피가 찰 정도로 참혹.
외포리 학살 : 삼산으로 후퇴하면서 배에 태우고 나가 수장시킴(황청리)-생존자 서영선

*정리/ 1월2(3)일 전에 학살-양조장과 각면 수용자
1월7일 특사령 받고 돌아온 자 처형 / 1월초 학살이 온수리에서는 특사령 학살까지 이어짐
1월 7일~16일: 돌미루등 북으로 피난간 민간인들 체포 및 학살(전투라고 볼수없음. 20명도 안되는 총을 가진 사람들이 300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7분만에 학살한 사건이므로)
12월 말~1월16일: 강화에 있는 부역자 및 월북자 가족, 혐의없는 민간인 학살
1월17일; 후퇴시 학살(외포리)
*좌익청년들이 2000~3000명 철수한 상황이었고 청년방위대5000명 정도가 제주로 철수하여 조우익이 모두 빠진 상황이었다. 즉 강화에는 청장년 남자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 남자들이 없는 땅에서 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승천포 학살
1950년 12월20일 6명 체포이후 41명 본진체포
이들은 양조장에 수감되었다. 이후 가장 초기에 학살 당했을 확률이 높다.
이계용과 서북 청년단/ 하점면 향토방위 특공대 1950년 11월20일 조직
(사촌형 이계운(?)-대구 조창희 판사에게 학살혐의로 재판

학살 주도 세력과 미군과의 관계
*울프팩:서북청년단등이 조직, 반공시위 주축. 강화에 본부를 둠 울프팩 2연대 타이거 여단은 교동에 본부 -울프팩이 북에서 교동, 석모도,주문도, 말도로 남하. 전쟁전부터 상당히 훈련된 부대(자위적인 조직이 아님) 켈로부대 해제문서에 의하면 50년 12얼부터 미군CIC(방첩대)와 통신하며 작전을 전개,
미정보2사령부(불음도 당하말)
702함대 인천상륙작전
니콜스(네크)가 강화에 많이 다녀갔음

*반공유격대
50년 12월 20일 연백치안대 해성치안대, 유곡 치안대, 최현기 연백 해성면
이승만 고향 인 평주문목면 평산유격대가 해송으로 철수
평안도에서 용매도 기린도 백령도로 온 것이 동키부대, 강화도로 온 것이 울프팩부대
이미 미군과 특수부대 조직 전부터 통신하며 작전
301,302, 303함정등이 9월부터 계속 돌아다님
교동은 우익 무장대가 작업한 반면, 강화 본도는 이미 자위적 자생적 조직이 있었음.
교동의 경우 학교여선생등을 하루에 3번씩 동네어귀에서 학살함
강화 특공대 삼산절반 점령교동 말도등은 북쪽서 내려온 유격대들이 점령
북파간첩의 최후 거점인 불음도,
김도재 연백우익유격대-호국군(지금의 방위(단기사병)이승만의 친위대로 유엔사가 통제하지 않는 조직 대한청년단을 근간으로 건설.
교동읍내리에 KLO부대 본부가 있었으나 볼음도가 더 큰 규모의 부대
조봉기(황해 벽성군 봉송면?서부청년단원)가 찬우물서 18명 학살
최중석이 삼산으로 후퇴하며 실탄이 부족할 때 서도에서 지원받음 서도가 근거지인 것으로 추측되는 단서
강화는 학살지만 30군데가 넘음
*황해도 동키, 울프팩 대원들은 기독교 요직에 있음 시도 신도 장봉도 학살에 내리교회 교인도 포함되어 있다.
김홍도 목사나 조용기목사가 괜히 나온게 아님. 교계 지도자 인사들이 교동 다녀감.
*하점 신봉리-
좌우익 대립 살벌하고 전두환 박정희등 몰표가 나오는 곳. 그러나 한 분과의 인터뷰에서“그때 북이 이겼어야 돼‘ 하는 소리들음 지금도 친북인사가 있음.그러나 이들은 철저히 숨어 있음. 많은 사람들이 월북하고 다시 내려 왔을것. 산이포쪽에서 1주일간 학살 비명을 들음. 그중 한명이 살아남음. 집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하점 파출소로 끌려가 죽음. 이런 일들로 봐서 월북자들이 신봉리로 귀향해 살고 있을 가능성 추측.
신봉리 할머니들 남편생존여부를 증언하지 않음.
*50년 7월22일 청년방위군 대통령령 개정으로 9월 다시. 향토방위대 경찰통제 지시 받아 48시간 이내에 인계하도록 함.
휴전선부근 학살은 그간 전혀 연구안됨 후방은 60년대 1차조사가 끝남.
이경제의원 2000~2003년 사이 벌률개정하여 경방단, 소년단등을 국가보훈처 국가유공자로 만듦.
301 함정등을 따라 유격대부대 함정들이 이동하는 사진
인민군들 순위도, 소수압도등은 장악못함 50년 7월부터서해도서 유격전 진행
인천 폭격시엔 시도신도등은 우익무장대원이 장악한 상태
영흥도는 군군유엔군진입전 내리교회 집사들이 장악. 이미 긴장 관계가 존재
신천 정주에서 내려온 기독교인들 이야기-단행본 1955년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등에 수록
은율 장연군 김종벽(구월산유격대)진남포에서 내려오던 북… CIC첩보요원 육군대위로 올라감
미군측에서 철수명령하자 12월말 미군첩보장교 철수강요. 미군이 백령도 유격대 데리고 가서 김종벽부대 생포해옴 그리고 데리고 오면서 300명 가량 수장

*불은면 83세 할머니의 예
이분은 보일러 고장아거나 농기계 수리할일 있으면 인천에 사는 아들을 부르지 절대 이웃을 부르지 않았다.남편이 얼북했다는 이유로 산모였을때 고문을 당함 . 가가스로 출산은 했으나 다시 잡혀서 가진 고문을 받고 아이는 사망 할머니는 미침.
마을 사람들 ‘저거 미치지 dskgdkt으면 내가 솨죽였을 텐데’ 라는 말을 정신이 낫을대 들음 어떤 농사를 저도 고문했던 사람들이 모두 빼앗아감. 시어머니로부터도 구박. 이 gkfajls는 가해자를 알고 있다. 그 사람이 자니가는데 질려버리더라, 자기도 모르게 등을 돌려 e망가고 있더라.
* 전쟁전 삼각관계의 연인이엇는데 그녀가 결혼해버리자 이 여인을 치안대에 끌고가 고문. 우물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자 우물에서 건져내 다시고문
* 살아남은 젖먹이를 어미가 살아서 손잡으려 하자…
*경찰서에 들어왔을때 소족, 엿, 감 이 많았던 것을 기억. 그만큼 수많은 약탈이 잇었음.
* 어떤집은 그가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치안대에게 밀고하여 그사람들 돈은 특공대에 주고 그 사람들은 죽임. 그 시신을 아들이 직접 인수했는데도 월북자로 처리.

*가해자들은 어렵게라도 증언을 하지만 피해자 집안은 절대 증언 못하더라 푸코의 말처럼 어떤 사회든지 전쟁의 흔적은 남아 있다. 충격적으로 피해 당한 사람들은 성격장애, 정신질환자가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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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민간인이란 주제에 접근하다보니 몇가지 자료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1.
최근 군사기밀딱지가 붙은 육군본부의 ‘6.25사변 육군전사 3권’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료는 글자의 요철이 보일 정도로 타자식 인쇄기법으로 발간된 자료입니다. 안강지역 전투시 작전명령서에 민간인을 전쟁에 이용하라는 내용이 발견됩니다.

작전명령 제 157호
4283.9.1.12:00경북 대구
3. 다항
A-A선을 확보하면 즉시 철조망대전차 및 대인지뢰를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라 가능하면 민간인을 이용하여도 가하다.
-합참총장 정일권-
(육군본부전사감실 발행 1954년11월11일 인쇄, 11월30일 발행)

한편 제네바 전시사민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이는 전쟁범죄 행위입니다.
이 협약은 1949년 8월12일 제네바에서 서명되어 1950년 10월21일에 효력을 발생하였습니다. 협약은 전시에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교전국 쌍방의 영토안에 있는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과 관련된 교전국들과 인도주의 단체들의 권리와 의무를 규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1907년 헤이그에서 체결된 육전법규에 따르면, 평화적 도시와 농촌에 대한 무차별 폭격과 포위의 금지, 전투행동시 역사적인 유적과유물에 대한 파괴행위의금지, 전쟁포로와 부상자들에 대한 잔인한고문과 학살의 금지, 점령지역에서의 무고한 평화적 주민들에 대한 박해와 학살의 금지등이다. 이같은 전쟁법규를 위반한 행위는 국제법상 전쟁범죄로 인정된다.

2. 강화볼음도 교동도등은 강화본섬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 자생적인 좌우대립의 결과였던 것과 달리 38선이북에서 내려온 유격대에 의한 학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볼음도에서는 미군 제2정보사령부가 있었고 이를 근거로 울프팩, 동키부대등 반공유격대가 조직적 활동을 한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다음글은 해군사에 등장하는 95기동부대 관련 글로서 정보사령부와 극동해군사령부 유엔군사령부와의 관게를 추적할 단서를 제공합니다.

*부분의 글은 볼음도나 교동을 중심으로 횔동했던 정보사령부와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95기동부대 창설

1950년 9월 12일 봉쇄와 폭격부대의 조직이 바뀌었다.알란스미스제독이 딕시(AD-14)함에 승함하여 새로운 95기동부대를 맡게 되었다. 이후로 95기동부대가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봉쇄와 호송임무를 수행하였다…95기동부대의 공식명칭은 ‘유엔봉쇄및 호송부대’였다.

95.1기동전단은 한국의 서해안을 담당하였으며 영국제독이 전단을 지휘하였다. 동해안은 95.2기동전단이 담당하였다.

*서해안을 담당한 95.1기동전단은 항모 해상봉쇄및 초계세력 그리고 서해안 도서 방어세력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해안과는 달리 서해안은 섬들이 많아서 게릴라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전쟁의 마지막 18개월은 38선 근해의 섬들을 장악하기 위한 대결이었다. 점령한 몇개의 섬에 유엔군은 유엔항공기들의 통제를 위하여 레이더를 설치했다. 일부 서해안 섬들은 손상을 입은 아군 항공기들의 조종사를 탐색하고 구출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일부섬들은 정보수집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서해안 작전은 동해안과는 달리 섬을 지원하는 작전이 많았다.

한국전쟁해전사(Malcolm W .Cagle Frank A. Manson -21세기군사연구소 p342-344)

http://www.militaryreview.com/CS/mrboard/bbs.php3?db=gen46&inc=read&no=317&page=8&search=&search_part=

美 CIA의 ‘영도유격대’

6·25전쟁 당시 반공 유격대 활동은 초기부터 있었다. 비록 소규모이지만 북한군이 점령한 강원도·경기도 지역 등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유격대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들은 북한군이나 국군·경찰로부터 획득한 무기로 무장했다.

국군도 적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유격사령부·명부대·결사유격대 등을 창설, 작전을 전개했고 미국도 군 당국은 물론 중앙정보국(CIA)에서도 유격전을 수립·실행했다.

이 가운데 영도유격대는 전쟁 당시 부산 영도를 근거지로 강원도 일대와 함경남북도까지 공중·해상으로 침투해 활동한 유격대다. 이 유격대는 미 CIA가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언어나 인종적 요소·지형 미숙 등으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으로 편성한 부대다.

전쟁이 일어나자 CIA는 극동군사령부·미8군사령부와 별도로 활동했다. 1951년 초 미8군과 CIA는 적 후방 작전 지역을 서로 구분, 미8군이 서해안을 맡고 CIA는 동해안과 북한 동북부 산악 지역을 담당하기로 합의했다.

작전 지역이 동해안 북부 지역이므로 대원들은 1·4후퇴시 월남한 강원도·함경도 출신 가운데 북한에서 반공 투쟁 경력이 있는 사람을 주로 모집했다. 1200명에 이르는 대원은 영도 기지에 설치된 유격훈련장과 해상훈련장에서 전투 훈련은 물론 낙하산 훈련·수중폭파 훈련도 받았다.

영도유격대는 강원도 북부로부터 함경남북도 지역을 황룡관구·청룡관구·백호관구·오봉관구 등 4개 작전 지구로 편성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재진출 이후 고착화된 지상작전을 타개할 목적으로 적 후방 교란과 첩보 수집을 위해 51년 4월부터 52년 10월까지 약 900명이 해상·공중을 통해 본격적으로 침투했다. 대원들은 현지에서 많은 반공청년을 규합, 지역 주민과 유기적 활동을 전개했다.

후방 지역에 침투한 대원들은 51년 7월16일 최제부 등 대원 12명이 함경북도 무산군 연사면 소재 임산 작업장을 기습하는 작전처럼 소규모 작전을 주로 하되 10월28일 함경남도 갑산읍에 북한군 대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부대본부에 제공, 전투기의 지원을 받아 합동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와 별도로 해상대는 함경남도 여도를 중심으로 원산에서 청진에 이르는 전 해안을 작전 지역으로 설정, 52년 1월 하순 함북 학성군 일신철교 폭파작전을 비롯해 10여 차례 작전을 수행했다

이처럼 유격대원들은 적 후방 지역에서 내무서·군용 창고·탄약 공장 등을 공격해 민심을 교란하고 북한군·중공군의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방해했다. 이에 따라 북한 측이 내륙에 침투한 유격대 토벌과 해안지대의 경비 강화를 위해 병력을 늘려 배치했으므로 유격대 활동은 적의 병력 분산에 기여했다.

그러나 52년 여름부터 CIA 측은 북한 지역에 침투한 대원들이 점차 적에게 노출돼 북한으로부터 온 첩보 보고를 불신한 데다 정전협상의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자 12월 초 부대를 해체했다. 침투 대원 가운데 귀환한 40명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북한 지역에서 전사했거나 실종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국가가 어려울 때 계급도 군번도 없이 적 후방으로 침투, 활발한 유격 활동을 전개한 영도유격대는 CIA의 통제 아래 운용됐고 정전 이전에 해체돼 그들의 경험과 교훈마저 잊혀졌다. 생존 대원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음을 아쉽게 여기면서 젊음을 불살랐던 ‘영도 태종대’가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다.

< 조성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

‘하위수준의 음성도청(LLVI:Low-Level Voice Intercept)을 수행하는 다른 부대는 지프를 타거나 전방근처의 벙커에서 도청작전을 수행한것으로 알려졌다. 입수한 첩보는 바로 전투부대들로 송신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22개의 LLVI팀이 작전을 수행했다.

북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섬들에서 활동하던 신호정보부대들은 북한, 중국,및 소련이 자국조종사들에게 보내는 명령을 입수할 수 있었다. 도청요원들은 입수한 정보를 ‘레이더신호’로 위장해 북한영공에서 작전을 수행중인 미군조종사들에게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조종사들이 정보를 받으면 ‘공격성공률’이 현저하게 증가했다.’

(NSA p47 제임스뱀포드-서울문화사)

위의 자료에서 북한에서 떨어진 작은섬들이란 서해5도를 이름이 분명합니다. 동해에는 작은 섬들이 없기 때문이죠. 위 소속부대는 겉으로는 육군보안국소속이지만 여기에 파견된 국가안보국(NSA)이 실제중심조직이었습니다. 육군보안국소속 NSA요원 폴오도노비치 같은 실명도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불음도 제2정보사령부가 육군소속이면서 NSA와도 연관된 조직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볼만 합니다. 실제 NSA는 독자적인 조직으로서 보다는 조직내의 조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NSA 간판따위를 달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제2사령부의 조직선에 대한 혼선이기보다는 오히려 제2정보사령부의 실체에 더 접근하게 된다고 봅니다.

1950.6.31 트로먼 미공군이 작전에 필요하면 북한의 군사목표를 공격할것과 해군은 한국의 모든해안을 봉쇄할것맥아더원수에게 몇개의 지상부대의 사용을 허가함
1950.7.1미육해공군3군대변인 발표요지1.한국동해안에 대한 봉쇄, 영국해군 협력하에 속행
1950.7.1 적 김포에 상륙점령
1950.7.3 강화수도를 경비중인 아군50호 경비정이 적 선박(40톤급,군인만재)4척을 격침
1950.7.4일 적 인천점령 미해군의 한국해안봉쇄를 공식으로 소련에 통고
1950.7.6 한미연합으로 해군방위사령부 부산에 설치
1950.7.14
미해군은 주로 동해안, 영해군은 서해안을 담당
영국해군 이미 한국 서해안에서 작전에 가담. 인천부근에서 적 연안을 포격
1950.7.22비상시 향토 방위령 공포
1950.7.28 해군 서해안에서 적 수송수단 12척 격침
1950.8.1비상시향토방위령, 국회승인 받지못해 폐기 공포
1950.8.4 B26 인천 폭격 1만톤급수송선 격침,
비상시 향토방위령 긴급명령 제 10호로 공포
1950.8.5유엔순양함2척 구축함2척 인천군사목표에 대해 2시간 함포사격
유엔공군 김포비행장을 2회공격 적 야크전투기 27대 파괴
미제 5공군 B26김천대전수원 서울 인천등지에 야간 소이탄 공격
1950.8.7인천부근 적 군사시설을 함포사격
1950.8.11비상향토방위령 세칙공포
1950.8.15 해군초계선 인천에 접근중인 적의 정크 9척 격침
1950.8.18 해군 덕적도 상륙
(한국전쟁일지- 군사문제연구소)

계인주 대령을 동경의 GHQ G-2에 인계한 최규봉 대장은 귀국후 동래의 본부회의에 돌아와서는 여기저기의 피난민 수용소를 순방하며 피난민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던 중 8월 10일 “부산으로 내려가 백구(*흰갈매기)호에 승선하라”는 명령을 받고 24명의 대원을 이끌고 해군함정 백구호에 승선했더니 거기에는 당시 해군정보국장 함명수 소령가 해군 정봅대원 12명도 타고 있었다. 백구호는 부산을 떠나 서해 남양만 앞바다의 덕적도로 향했다.

당시 한국육해공군은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작전명령을 받고 있었다. 8월12일 오전 5시 한국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해군소장)의 명령을 받고 한국해군 701함(함장 이정)에 승선한 해군육전대(해병대전신)는 북한군이 무방비로 방치해 두고 있던 서해안의 덕적도를 점령했다.

덕적도에 도착한 다음날 최규봉 대장은 어선을 구해 완전무장한 간부요원 1명, 대원3명과 어민 두사람을 안내원으로 선발해 영흥도의 상항을 정탐케 했다.

정탐복를 받은 한국해군육전대가 인천항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강화만이 요충지인 영흥도에 기습 상륙, 탈환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준비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케 되었다. 켈로팀은 한국해군 702함을 타고 영흥도로 향했다.

영흥도 주민들 역시 덕적도 사람들처럼 우리측에 협조적이라는 현황보고에 따라 파견대는 안심하고 영흥도로 옮겨 면사무소 앞에 천막 다섯개를 쳤다. 그로부터 켈로 영흥도 파견대원들은 어부를 가장하여 주변해역의 수로, 수심, 조류의 흐름, 간만의 차, 인천항 인근에 부설된 기뢰의 수와 위치및 해안과 내륙지방에 포진한 적의 병력 규모를 정찰하기 시작했다.
(KLO의 한국전 비사 p 56~57 이창건지음 지성사)

아래는 KLO 조직표에서 강화 지역대장까지의 지휘선만을 요약한 것입니다.

KLO부대 서울본부-위스키대(박태현대장)-강화도 조항준

-썬대(전훈대장)- 교동 노재권

-고트대(최규봉대장)- 교동 김선희

(위의책p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