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OI에 대하여2005/03/21 1225

http://www.tongilnews.com/article.asp?mainflag=Y&menuid=203000&articleid=53108

RSOI에 대하여 – 이시우
2005-03-21 오전 11:22:15

이시우(사진작가)

오는 19일부터 25일까지 1주일간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서 ‘한미 연합전시증원’(RSOI) 연습과 ‘독수리 연습’(Foal Eagle)의 병합훈련이 진행된다. 2002년부터 병합해 실시되고 있는 두 연습은 매년 개최되는 최대 규모의 한.미 동맹간 군사연습이다. 이번 군사연습에 대해 평화운동가로 더 알려진 사진작가 이시우 씨의 특별연재를 비정기적으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2001년까지는 통상 2년에 한번씩 변경되는 5027작전계획의 자세한 내용이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작전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군사연습이야말로 가장 ‘자세한 내용’ 이 아닐 수 없다.

RSOI의 절차

RSOI(Reception Staging Onward movement and Interrelation)는 수용, 대기, 전방이동 및 통합을 의미한다. 미 증원군이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항만 및 공항 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수용하고, 다른 부대와 물자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시키며, 전선으로 이동시켜 부대를 재편성함으로서 전쟁준비를 완료하기 직전단계까지의 절차를 익히기 위한 연습이 RSOI이다. 병참의 마지막과 전투의 시작사이의 중간 단계가 RSOI인 것이다.

독수리 연습은 이렇게 전선에 배치된 전투부대들이 펼치는 실전연습이다.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 대한 전쟁계획은 작계1002와 작계1003으로 알려졌는데 1002는 ‘사막의 방패작전’으로 1003은 ‘사막의 폭풍작전’으로 명명되었다. 사막의 방패작전은 전쟁 결정이 나기 전까지 모든 전쟁준비를 완료시키는 병참계획이 중심이라면, 사막의 폭풍작전은 전쟁계획이다. 걸프전의 경우 사막의 방패작전과 폭풍작전 사이에는 연속되지 않는 혼란의 공간이 존재했다.

병력과 물자가 모두 전구에 도착하고 RSOI 즉 수용, 대기, 이동과 통합이 끝났다고 해서 자동으로 전쟁에 돌입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단계까지도 전쟁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일 수 있으며 백악관의 전쟁에 대한 결심이 철회되면 배치된 병력은 다시 철수될 수 있다. RSOI의 단계에서 전쟁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합참의장의 경고명령이 필요하며 대통령의 국가안전지시(NSD)와 이에 따른 합참의장의 실행명령이 필요하다.

경고명령이란 미합참(JCS) 문건에 의하면 ‘다음에 올 작전과 명령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D-day H-hour 까지 완벽한 전쟁작전을 준비하라는 특별명령이 하달되는 것이다. 일단 경고명령이 하달되면 전쟁 계획을 수행할 완벽한 준비를 갖추는 것이 전구사령관(한반도의 경우에는 주한미군사령관)의 역할이 된다. 이 명령서는 여러 명의 국방부 고위관리들의 손을 거쳐 재검토되고 대통령의 최종승인이 내리면 즉각 전달된다.

대통령은 최종결심이 서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전쟁결심을 합의하고 전쟁에 돌입하는 이유를 합리화시키는 이른바 ‘국가안전지시’라는 이름의 공식적인 대통령 명령서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국가안전보장회의 참모들에게 지시한다. 이것은 보통 역사적인 기록문건이 된다. 흔히 생각하듯 전쟁발발계획은 명확한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순차적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전쟁이 결정되는 단 한번의 토의나 회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정확판단일 것이다. 다만 여러 가지 상황이 서로 맞아 들어간 어느 시점쯤에서 전쟁의 윤곽이 확실해진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합참의장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경고명령을 전달하는 시점이 전쟁결심과 계획이 확고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 이 모든 것이 번복될 수도 있다. 대통령은 한두 쪽에 불과한 간단명료한 일급기밀문서인 국가안전지시(NSD)를 전시내각에 제출하고 그럼으로써 전쟁은 실행되는 것이다. 합참의장은 실행명령이 담긴 오렌지색 표지의 일급비밀문서를 국방장관으로부터 승인받아 전구사령관에게 기밀로 전송한다. 이제 전선에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반도 전쟁계획인 5027에 병참과 RSOI단계까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걸프전과 이라크전을 통해 드러난 작전계획의 면모로 볼 때 1003에 해당하는 5027과는 별도로 1002에 해당하는 또 다른 502? 계획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방성은 68개의 주요전쟁계획서을 보관하고 있다. 이중에서 가장 세밀하고 두꺼운 문서가 한반도와 이라크전쟁계획이다.

이미 공개된 5026, 5029, 5030에서 보여지듯 다른 전구에 비해 가장 정밀한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반도 비무장지대전구이므로 1002에 해당하는 계획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존재함에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면 그만큼 기밀이 유지되어야 하는 계획일 것이기 때문이다.

중부사령부의 이라크 전쟁계획인 1002는 걸프전쟁을 통해 그 자세한 내용이 드러났다. 이것은 10만명의 지상군을 3-4개월 동안에 걸쳐 그 지역으로 이동시키려는 극비의 비상계획이었다. 텐-오-투(Ten-oh-two)라 불리는 이 계획은 합참(JCS)이 소련 혹은 이란과의 전투가 있을 경우에 대비하여 표준전투계획을 입안했던 1980년대 초에 탄생했다. 여기에는 매우 상세한 수송 및 병참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1990년에 수정보완된 작전계획1002-90에 의하면 제 1일에는 F-15전술폭격기들이 그 지역으로 파견된다. 제 7일까지는 대부분의 지상군대기부대 즉 82공수단에서 차출된 약 2천 3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소위 사단대기부대가 현지에 도착한다. 제17일에는 미국본토에서 출발한 해병대가 도착하여 MPS(해상사전배치선단)가 인도양의 군사기지인 디에고가르시아섬으로부터 실어온 탄약과 휴대품과 장비를 공급받고 합세한다. 제27일째부터는 최초의 중무장 탱크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쿠웨이트에 먼저 도착한 병력이 뒤이어 도착할 병력이 올 때까지 대기하고 시차별로 전개되어 도착하는 병력들과 통합합류하여 전선까지 이동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전쟁개시일로 알려진 D-day에 앞서 배치개시일인 C-day(Commencement-day)는 30일의 사전 경보에 의해 준비된다. 이는 이라크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1990년 8월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후 미군 각 부대가 사우디에 도착하는데 미 지상군 약 3만명이 3주간 전후, 약 8만명이 1개월 전후 미공군 전투기 주력부대가 1-3주간전후의 시간이 걸렸다. 해군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가 인도양에서 페르시아만에 도착한 것은 전쟁발발 4일째였고 2번째 항공모함 아이젠하워호가 지중해에서 홍해에 도착한 것이 6일째, 그리고 세 번째 항모 케네디호가 미국동해안의 노포크기지에서 지중해에 도착한 것이 14일째 7함대 기함이 요코스카를 출항할 수 있었던 것이 28일째였다. 미국에서 대서양을 거쳐 사우디로 전개되는 것과 미국에서 태평양을 거쳐 한국에 전재하는 코스와는 지리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동거리는 1만 수천 킬로미터이기 때문에 미군주력군이 전개에 걸리는 일수는 대략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국주둔 미군이 한국에 전개하는데 걸리는 일수는 항공전력 주력군이 침공후 약 10일, 지상군 2-3개 사단이 3주일, 6개사단이 1개월 이상 걸린다. 지상전력을 직접 전투에 투입할 경우 도착 후 전투계획의 작성, 정보수집, 명령의 확인, 공군 및 여타 전투부대와 조정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1주일이상이 걸릴 것이다.(주한미군 역사.쟁점.전망 p296-297, 김일영 조성렬, 한울아카데미)

미군에게 있어서의 RSOI라는 것

미군의 대부분의 전쟁계획의 기본적 해법은 미국 군대조직의 거대한 부분을 동원하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기간 수송시설과 병참능력의 일부를 수개월에 걸쳐 아시아든 중동이든 전쟁이 일어날 곳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미군에게 있어서 이는 무시될 수 없는 교리이며 이 교리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이라크가 쿠웨이트와의 국경선에 병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을 때 미군을 방심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파월 합참의장은 계속 들어오는 우려 섞인 정보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시종 냉담했다. 그는 야전부대가 전투를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지 확고한 기준이 있었고, 이라크 군은 아직까지는 진짜로 공격을 개시하려는 듯이 행동하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이라크 군은 네 가지 사항이 결여되어 있었다.

1. 통신망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보기에는 교신 횟수가 너무 적다는 것을 통신차단을 통해 알 수 있었다.
2. 공격적 행위에 대비한 야포장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3. 그밖의 군수품이 거기에 없었다.
4. 기갑탱크부대에 의한 공격을 후원한 병참 공급 통로들이 불충분했다.
(사령관들, p231 봅우드워드, 중앙출판사)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이라크군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이는 뛰어난 정보수집력에도 불구하고 정보에 대한 판단기준에 의해 정보는 제 역할을 할 수도 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확인케 하는 사례이다. 때문에 미군과 대적하려는 상대는 미군의 교리를 이해하려 할 것이고 그 교리의 허를 찌름으로서 기습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후세인이 그렇게 한 것이다.

몽골제국 이래 세계 유일의 패권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미군은 본토에서의 전쟁보다도 해외 각지에서의 해외전쟁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해외전쟁을 위해서는 미국으로부터 병력을 이동, 전개시키고, 배치하며 전선에서 다시 병력을 통합시키는 것이 필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한 연습이 RSOI이다. 그러니 해외전쟁을 위한 필수적 전제중의 하나가 RSOI인 것이다. RSOI는 작전적 차원의 연습, 즉 작전계획에 따른 연습이다. 미국 국방성이 운영하고 있는 68개의 주요 전쟁계획과 긴급대책은 병참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당연히 이를 위한 RSOI연습은 작전차원의 군사연습에서 기본이 되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패권을 겨루던 시기부터, 전투가 이루어지기 전에 병참에 의해 전쟁의 성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병력의 이동 배치 등의 병참과 관련되어 가장 극적인 실패 사례가 러일전쟁의 정점이었던 쓰시마 해전이다. 일본과의 결전을 위해 러시아 극동함대 사령관인 로제스트벤스키가 이끄는 선단은 북해를 빠져나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대마도에 이른다. 일본의 도고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사세보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오랜 항해로 지칠 대로 지친 로제스트벤스키 함대를 만나 단 몇 시간 만에 전멸시킨다.

이로써 짜르의 시대가 가고 러시아는 혁명의 시대로 접어든다. 로제스트벤스키함대의 실패는 RSOI의 실패였다. 병력의 배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와 방어이다. 속도에 치중하다 방어에 실패할 수도 있고 방어에 치중하다 속도에 실패할 수도 있다.

로제스트벤스키 함대는 수에즈운하를 통과를 포기하고 희망봉을 선택했던 것도 혹시라도 매복해 있을지 모르는 일본군에 의한 공격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방어 때문에 속도는 포기되었고 일본군과 싸우기도 전에 바다와 싸우며 기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상대를 맹렬하게 추적하다가 후방에서 이어지는 병참선을 튼튼히 확보하지 못해 실패한 경우도 있다. 러시아군대와 싸우던 나폴레옹군대가 그 경우일 것이다. 걸프전에서도 지나친 속도는 배제되었다. 당시 체니 국방장관은 전쟁계획 입안자들이 모든 병력을 집중해서 이라크 국경선 전면의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식으로 계획을 수립하기를 바랐다. 그는 파월에게 사우디-이라크 국경선 서안을 따라 쿠웨이트로부터 300-400마일 떨어진 요르단 국경에 이르는 곳까지 지상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어떤가하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서쪽으로부터 바그다드로 진격해 들어가는 불의의 기습은 이라크의 요새와 방비가 없는 지역으로 지상군이 진격하는 것이고 바그다드와 요르단 간의 통신선을 두절시키며 이라크 서안에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고정식 스커드 미사일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파월은 이에 대해 신속히 반대했다. 그것은 미군을 너무 멀리 진격시키는 것이며 병참 보급의 문제가 해결하지 못한 채 지나친 속도로 위기를 자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배치작전계획의 요소들

신속배치군

배치작전계획은 RSOI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병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배치작전의 중요한 개념이 신속배치군이다. 1980년 신속배치군이 건설된 것은 바로 원정을 위한 속도 때문이었다. 1980년 1월 카터 대통령은 ‘카터독트린’을 선언했는데 그것은 페르시아만에서부터의 석유공급은 미국의 중차대한 이익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속배치군의 초기건설은 미군내에 지금까지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군종간의 갈등으로 엉망이 되었다.

이미 1979년 합참이 페르시아만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은 신속배치군(RDF)의 창설 지시를 받았을 때는 해병대를 주축으로 한 통합형태가 당연히 거론되었다. 새로운 부대는 해외 상주 주둔군이 아니면서도 위기 지역에 신속히 배치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명백히 원정적이어야만 했다.

한편, 해병대는 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작전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고 그런 장비도 갖추고 있으니 그 자체가 이미 원정군이 아닌가. 이 신속 배치군은 또 중장비의 공수가 페르시아만 같은 먼 지역에까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 해상수송에 의존해야 하니 해병대야말로 해상수송에 맞아떨어지는 군종이다. 끝으로 신속군은 또 성격상 상륙전을 주로 감행할 것이기 때문에 상륙전이야말로 해병대의 주특기 아닌가. 따라서 신속배치군은 육군 및 공군의 필수요원 몇 명 정도만 거느리는 하나의 통합해병대 사령부의 모델이 당시로서는 결정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합참은 당시 이 모델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합참이 이 모델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해병대가 그 임무를 몽땅 떠맡아 새로운 예산과 새로 생길 고위 보직들을 독차지해 버리게 된다. 그것은 다른 군종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월남전 당시의 사이공 사령부와 같은 하나의 통합구조안이 각 군종의 타협을 거쳐서 채택되고 말았다.

또 이 사령부의 골격을 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브라운 국방장관이 편성지시를 내린 지 거의 6년만인 1983년 1월에 와서야 한 육군 장성의 지휘아래, 기타 보직들은 각 군종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고루 나누어진 채 드디어 골격이 드러났다. 그 결과 균등배분의 원칙에 대한 보상으로서 문자그대로와는 달리 신속하고도 명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할 참모들만 우글거리는 또 하나의 사령부인 신속배치군이 탄생했다.

1980년 2월4일 플로리다주의 탬파근교 맥딜 공군기지에서 편성이 시작되어 군종간의 온갖 이해관계로 뒤엉킨 신속전개 합동군은 이후 걸프전과 이라크전을 수행한 중부사령부의 전신이 되었다. 그 부대는 한참 후에야 해병대 사령관으로 재직한 켈리(P.X.Kelley) 해병대장의 휘하에 있게 되었다.

“카터독트린을 실현하려 ‘신속개입군’을 편성하는 과정에 정부의 지도자들은 곧 항공모함전투단과 수륙양용군이 아라비아에서의 미국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군 자산임을 알게 되었다고 켈리 장군은 뒤에 술회했다. 신속배치군처럼 군종간의 갈등과 이해관계가 첨예했던 사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신속배치군이 바로 원정군적 성격을 갖는 미군체계의 기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상식이 전복되는 그토록 격렬한 갈등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MPS(Maritime Prepositioning Ships) 해상사전배치선단

MPS라 불리는 해상사전배치선단도 바로 병력과 물자의 이동과 배치를 위한 과정에서 구상되었다. 장기간에 걸쳐 심사숙고된 결과 해상사전배치함(MPS;Maritime Prepositioning Ship) 계획이 탄생됐다. 처음에 단기사전배치함(NTPS:Near-Term Prepositioning Ship)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이 계획은 1980년 여름 해병상륙여단(MAB)과 15일간의 보급품을 적재한 6척의 배가 인도양으로 발진했다.

해상사전배치함 계획은 1982년까지 총 18척으로 구성되었고, 그들은 해병상륙여단(MAB)의 30일간의 보급품뿐만 아니라 육군과 공군부대를 위한 군수물자까지도 수송했다. MPS계획은 MAB의 장비와 30일간의 보급품을 실은 각각 4,5척의 민간인차용선(Roll On/Roll Off ship)으로 구성된 세 개의 전대로 발전되었다. 첫 번째 전대는 1984년 7월에 동대서양으로 전개했고 두 번째 전대는 1985년 12월에 디에고가르시아섬에서 해병이 맡고 있던 NTPS와 대체되었다. 마지막 전대는 1986년 10월 괌과 티니안섬으로 항해하였다. 그리고 걸프전에 이들은 총동원되었다.

그러나 MPS배치계획은 처음에 단순히 무력시위용으로 제안되었다가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폐기되었다가 본격적인 전쟁계획의 실행과 함께 다시 추진되었다. MPS를 둘러싼 이 논쟁은 당시 미군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례가 된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이 분명해지자 당시 베이커 국무장관은 이라크에 완곡하게 의사를 전달한다. 국방부를 대신하는 폴 월포위츠는 이 전언의 내용을 반대하면서 보다 강경한 것을 요구했다. 강경한 어조의 전언을 보낼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보내지 않는 편이 낫다고 그는 말했다.

그후 펜타곤에서 월포위츠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지를 궁리했다. 그는 MPS 즉 해상조기배치선단을 이동시키자는 안을 내 놓았다. 이 선단의 거점인 인도양 디에고가르시아 섬의 미군기지는 페르시아만에서 가장 가까운 공급기지이면서도 그곳으로부터 3천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이 선단은 1만 6천명 이상의 해병부대를 위한 30일분의 식품과 탄약과 군수품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합참의장이던 파월은 그런 식의 군사력 과시를 반대했다. 무엇을 위해서 그럼으로써 무슨 성과가 있을 것인가? 그 임무는 무엇인가? 하고 그는 물었다. 파월은 대개의 경우 그의 군대를 경보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문관들의 기발한 착상을 믿고서 눈에 뚜렷이 보이는 목표도 없는 상태에서 행동에 뛰어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파월은 모호한 목표를 보고 행동을 개시했다가 행정부가 ‘진짜로’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작전 도중에 군에게 말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MPS를 움직인다는 것은 곧 지상군의 행동이 뒤따른다는 것을 뜻하지만 그것에 대해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라크에 대한 무력시위용으로 KC-135기를 아랍에미리트에 파견한 것은 그리 큰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음을 그는 주지시켰다. 그것은 실수였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사실을 발표하자 깜짝 놀란 것은 이라크사람들이 아니라 아랍에미리트였다. 그리고 MPS를 배치하면 그 사실이 언론쪽에 유출될 것이고 그러면 행정부는 또 무어라고 해명을 해야할 것이었다.

월포위츠는 이러한 태도는 군사력의 과시가 외교적인 문제에 가져올 수 있는 파급효과를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호한 가운데서도 이익은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쿠웨이트로부터 직접적인 도움 요청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MPS를 파견하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한 파월의 의견이 주효했고 결국 MPS는 배치되지 않았다.

MPS의 배치는 RSOI의 전단계이며 파월부류의 견해와는 달리 그 자체로 군사적 시위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월포위츠의 제안은 최소한 당시의 군사적 교리와 배치되는 것이었음을 위의 논쟁은 말해준다.

한편, 쿠웨이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병력을 접수해야할 국가와 미국사이에 부대와 병력을 수용할 법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RSOI연습 따위는 무의미하다. 우리의 경우엔 이미 90년대 초반 전시접수국지원협정을 체결하고 있어 아무런 법적 장애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이 협정의 체결이후인 1994년부터 RSOI연습이 실시된 것이다.

군사력이 전시국가에 의해 접수되었다 해도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있다. 미완의 전쟁계획과 무엇보다 공격의 위협이 그것이다.

배치작전과 전쟁계획

배치개시가 시작되었다 해도 모든 전쟁계획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증원군 파병을 결정하고서도 증원군이 교체병력인지 공격용인지 과시용인지를 특별히 결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증원군의 궁극적 용도는 나중에 결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걸프전 당시 파월의 기획 정책 참모부서인 J-5는 파월에게 걸프지역에 배치한 병력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4가지 가능성이 열거되었다.

1. 방어 및 억지전략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것
2. 6개월이나 1년 동안 유효할 제재를 유지하면서 장기간의 봉쇄를 준비하는 것
3. 전쟁에 돌입하는 것
4. 확실한 공격위협을 위한 충분한 군대를 증파하고 분담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미 전쟁터에 병력이 대기중인 상태에서도 이렇게 많은 가능성이 불투명하게 혼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투를 해야 하는 군인과 정책을 결정해야하는 민간인 정책결정자들 사이의 민-군 갈등의 골이 가장 깊어지는 순간으로 돌입함을 의미한다.

당시 신임 공군참모총장이었던 맥피크 장군은 “이 나라는 단지 제3세계의 작은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는 이라크를 상대하는데도 마치 3차대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법석을 떨고 있다”고 비꼬았다. 배치명령-경고명령-국가안전지시-실행명령으로 이어지는 전쟁실행 절차가 끝났다 해도 곧장 전쟁에 돌입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헌법에 의하면 전쟁에 대한 선전포고는 의회가 하도록 되어 있다. 걸프전을 제외하고 어떤 전쟁도 의회에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미국법은 모순되게도 대통령권한법에는 대통령의 전쟁선포권이 있어서 2차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모두 대통령의 일방적 결정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소장파 군인들은 군대는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지 정치인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명제를 만들어 백악관에 베트남 전쟁의 책임을 돌렸다. 정치인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전쟁이 되기 위해서는 국민의 대의체인 의회에서 전쟁결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초점이었다.

그들 세력의 중심에 파월이 있었다. 걸프전 당시 파월을 중심으로 한 재래전파는 의회결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통과시킨 것을 가장 큰 승리로 판단했다. 그러나 의회에서의 논쟁으로 무력사용시기가 늦어지고 군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전쟁 기간이 길어지게 된다면 그 책임 추궁을 당하는 쪽은 의회가 아닌 대통령이 되는 것도 분명했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대기중인 군인들이었다.

RSOI단계의 위기

이러한 작전계획의 혼란이 아니어도 병력이 대기하는 상태는 가장 큰 위험의 단계가 된다.

우선 대기 상태에 있는 군인들의 사기저하이다. 걸프전 당시 NBC의 토요일 방송프로인 ‘야간뉴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사우디의 미군들은 대단히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군인들은 쓸데없이 정력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해군들은 무위도식하는데 신물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분명한 군사적 목표가 없는 거죠.”

그러나 무엇보다 큰 위험은 상대방으로부터의 공격이다. 만일 합참의장으로부터 ‘한반도 비무장지대 전구에 대한 북의 공격을 막아내고 지시하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라’는 군대 배치에 대한 명령이 떨어지면 이 직접적인 명령은 배치에 대한 작전계획(이라크의 경우 작계1002)의 실행이 된다. 국방성의 작전참모들은 우선 군대배치를 준비하는 작업을 하고 그 다음에는 대기하는 일이 시작된다.

걸프전의 경우, 제일먼저 파견 배치된 부대는 버지니아 랭글리 공군기지에 있던 제1전술전투비행단 소속의 48대의 최신예 F-15전투기였다. 82공수단 소속의 2천 3백명의 기동여단이 그 다음으로 파견 배치됐다. 이들 선발 비행기와 공수부대는 이틀 후에 도착했다. 도착과 함께 RSOI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병력이 도착하기까지 ‘대기’ 상태에 놓이는 이들 부대의 안전은 가장 위험한 상태가 된다.

기동여단은 지극히 간단하게 무장한 부대였기 때문에 군사전문가들의 견지에서 볼 때 그 부대가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대규모 비행장 하나를 지켜낼 수 있는 정도였다. 1개 여단과 48대의 제트전투기와 그 지역의 해군력으로는 도저히 사담의 6개 사단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공격받기 쉬운 것이었고 사담에게는 쳐들어올 절호의 기회였다.

선발부대의 취약성이 실끝만큼이라도 노출되면 그것은 곧 공격의 빌미가 되므로 RSOI단계의 지휘부에서는 이들 부대의 취약성을 호도하기 위한 기만 작전을 언론을 상대로 펼쳐야 할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배치 단계에서 언론을 통해 화려한 최신무기와 병력을 과시하는 것은 일종의 위장술로서 유용하다.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국이 수십만 대군을 일거에 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는 미국이 이 단계의 위험을 모면하는데 매우 중요한 허위이미지로서 작동한다. 배치 후 3주 내지 4주 동안 이들 군대는 무방비 상태에서 지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누설되어서는 안되는 비밀이 된다.

피트 윌리암스는 일급비밀을 취급하고 있는 체니의 측근으로 신뢰받고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도 얼마나 많은 군대가 파견될 계획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는 다른 국방부 고위관리나 고급장교들로부터 10만 또는 15만명 선에 이를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은 정확히 25만명 선이었다. 그가 파월에게 물어보았을 때 합참의장은 얼버무렸다. 파월은 마치 군대의 규모와 배치문제에 대해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사령관들, p309 봅우드워드 중앙출판사)

그러나 이러한 기밀유지는 미군으로서는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이들 군사력 배치를 위한 작전계획은 짧게 잡아도 수개월이 소요되는 장기적인 군사작전이다. 이같은 대규모 군사배치는 숨겨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명령은 여러 나라의 부대에까지 전달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도 얼마나 오랫동안 파병이 계속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언론과 이에 따른 여론이 사실을 알지 못할 경우 여론의 지지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단계에서 여론의 지지대신 압력이 가중될 경우 지휘관은 ‘여론의 지지’와 ‘기밀의 유지’라는 선택의 중간에서 여론의 지지를 위한 성급한 선택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상대방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안겨준다. 결국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가 이 단계의 성패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전쟁집행자인 군인이 ‘군사력의 해외배치를 반대하는 반전여론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면 반전여론의 목표가 바로 선발배치부대의 취약성에 대한 정보에 있다고 생각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중심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국민으로부터 지지받지 못하는 전쟁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은 민간인 정책가들보다도 군인에게 더 큰 법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의도야 알 수 없지만 걸프전 당시 듀건 공군참모총장에 의해 결국 이런 사고는 터지고 말았다.

파월은 공군참모총장 마이클 듀건의 이라크전쟁수행능력에 대해 기자들과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다… 공군력의 우위가 주된 화제였고 공군력을 통한 승리는 일방적인 승리를 가능케 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기사는 미국의 작전 지원에 F-15비행중대가 포함되어 있다는 듀건의 말로 끝나고 있었다… 파월은 사태가 전개되는 가장 미묘한 순간에 자신이 육해공군 및 참모총장들과 힘겹게 합의해 놓은 것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특별항공기의 숫자와 기종-파월이 대중매체에 그렇게도 넘겨주지 않으려고 고심했던 세목들-을 포함해서 그 지역에서의 미군의 전개와 전투를 위한 일반적 준비상태에 관한 상황보고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지가 듀건 및 합참의 다섯 장성과 지난주 사우디를 여행하면서 열 시간 정도 인터뷰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렇게 밀폐된 장소에서 기자들과 그렇게 오랫동안 말하는 것은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파월은 알고 있었고 아무리 하급 장교라 해도 그쯤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사령관들, p322-323 봅우드워드 중앙출판사)

결국 듀건은 체니에 의해 해임됐다. 이 불명예스러운 사건에 파월이 개입했다고 믿는 공군지휘부는 클라우제비치에 입각한 육군의 전쟁이론과 교리를 전면 부인하며 공격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으며 뿌리깊은 군종간의 갈등에 불을 붙였다. 어찌 보면 군은 ‘여론’이란 적에게 패배를 당한 셈이다.

미군이 비무장지대나 또는 다른 어떤 전구로 거대한 병력을 투입한다는 사실이 상대방의 정보망에 드러나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병력이동에 따른 심각한 병참문제와 보급계획도 해결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10만 병력이 그들의 무기와 장비를 지니고 여러 날에 걸쳐 수백 킬로미터를 전구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대규모의 병력을 소리없이 이동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호치민 루트가 그토록 부각된 것은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쟁계획에서 시차별 부대전개라는 것만큼 큰 부담은 없다. 이는 러일전쟁 당시 로제스트벤스키의 함대에 비하면 비할 바 없이 빨라진 속도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상대의 방어능력도 그 정도는 빨라져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배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과정이야말로 전쟁 그 자체보다도 더 위험한 과정이며 대부분의 경우 해외원정군일 수밖에 없는 미군에겐 숙명이기도 하다. 완전한 배치가 완료되기 전까지 미군은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대방의 공격을 저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걸프전의 경우 배치 우선순위의 마지막 단계였던 제24기계화사단 소속의 탱크가 완전히 배치되는 시점부터 미군지휘관들은 안심하기 시작했다. 파월합참의장도 사담이 그 시점에서는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면 미군의 규모가 매우 적었던 초기 2주일 동안의 공격기회를 사담이 놓쳤기 때문이다.

완전한 배치 단계와 시차별 선발 부대들의 대기와 이동 통합이 맞물림으로서 RSOI연습의 정밀한 연구야말로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한반도 전쟁계획 목록의 일부를 알 수 있는 실제 증거가 되는 셈이다.

RSOI 연습에 대한 평화감시

2004년 3월 RSOI연습차 평택항에 입항한 MPS(해상사전배치선단)에는 지상병력을 위한 군수 물자가 적재되어 있었고 이것들은 수십일에 걸쳐 항구로 하역되었으며, 평택항에서 가장 가까운 캠프 험프리 영내로 백여대에 달하는 콘테이너 차량이 들어가는 것이 이곳 주민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또한 MPS를 통해 하역되어 육지에 배치되는 상륙정의 사진도 언론에 노출 되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부 겸 한미연합사령부 겸 유엔군사령부 공보실에서는 이는 단순한 연습으로 물자를 하역하고 다시 선적하는 훈련을 1개월여에 걸쳐 하는 것일 뿐이라고 발표했다. 비어있는 콘테이너 박스가 MPS에서 내려지고 다시 올려졌다는 주장이다. MPS의 배치는 지상군의 배치를 전제한다. 지상군도 배치되지 않는데 지상군을 위한 장비와 물자의 보급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RSOI연습의 막바지인 2004년 3월 27일(토) 오후 5시경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사거리에서 24대의 미군차량이 줄지어 지나가는 것이 목격되었다.(통일뉴스 기사 재인용-http://www.tongilnews.com/article.asp?menuid=101000&articleid=42848) 그들 차량중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차량번호판에는 USMC F2009라고 씌여져 있었다. USMC는 US Marin Corp의 약자로 미해병대란 뜻이고 F2009는 그 차량만의 고유번호이다. 그 차량에 실려져 있는 관모양의 상자에는 다음과 같이 깨알같은 글씨가 씌여 있었다.

3 FSSG EQUIPMENT PLACARD RSOI
UNIT : CSSD-37
TYPE : TENT
SPOE : IWAKUNI

위의 익숙치 않은 영문약어부터 정리해야겠다.

3 FSSG (Force Service Support Group: 3 야전근무지원단)
CSSD-37 (Combat Service Supprt Detachment 37 전투근무지원파견대)
SPOE (Sea Port of Embarkation : 선적항)

내용을 정리하면 이 상자는 이와쿠니 미 해병대 3야전근무지원단의 RSOI를 게시, 광고하는 장비를 넣은 상자로, 관리부대는 CSSD-37 즉 37전투근무지원파견대이며 내용물은 텐트이고 선적한 항구는 일본의 이와쿠니 미해병대기지인 것이다.

그 다음엔 CSSD-37 즉 37전투근무지원단에 대해 알아보자.

이 부대는 제4 해병공지기동부대(MAGFT:Marine Air-Ground Task Force)를 구성하는 4개 구성단위중 하나이다. 4해병공지기동부대는 전시에 적을 선제타격하기 위한 공지전 교리에 입각하여 구성된 해병부대이다. 이 부대는 사령부와 지상전투와 공중전투, 그리고 전투근무지원단위 등 4개의 단위로 구성된다. 그 구성은 상황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는 있지만 4개 단위의 기본 구성은 일정하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99년 미태평양사령부 산하의 군사연습은 ‘코브라골드(Cobra Gold ’99′) 기간 중에 4해병공지기동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사령부단위는 4해병의 사령부와 참모, 3해병사단, 3해병원정부대의 파견대로 구성되었다. 지상전단위는 켈리포니아 29팜스의 보병부대의 해병사단과 포병을 기초로 하여 3여단, 7해병, 하와이의 포병부대의 C포병, 1여단, 12해병을 포함했다. 이들은 항공수송, 근접지원등 항공지원을 받았다. 항공전투단위는 오끼나와에 있는 262중헬기분대, 1해병공수비행단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전투근무지원단위는 CSSD-37과 3 FSSG의 해병대원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니까 전곡에서 필자의 눈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 24대의 차량은 해병공지기동부대와 함께 훈련하고 있는 전투근무지원부대인 것이다. 전곡에서 이들을 마주쳤기에 이들이 어디에서 훈련을 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연천 동쪽으로 이들 부대가 훈련할 수 있는 대규모 훈련장은 단 한 곳 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천 영중면의 영평로드리게스 미8군 종합훈련장이 그곳이다.

그 다음은 이들이 어디로 이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이들은 전곡에서 한탄강을 지나 문산쪽으로 향했다. 추측컨대 2사단의 2여단 본부가 있는 캠프하우즈로 갈 듯 했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문산 선유사거리에서 깨어졌다. 문산시내가 아닌 통일대교 즉, 민통선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민통선 안에 있는 미군기지는 캠프그리브스와 캠프보니파스, 캠프리버티벨, 워리어베이스 이다. 캠프보니파스는 유엔사경비대 업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최전방이긴 하지만 대규모 병력을 수용할 공간은 없다. 캠프리버티벨은 보니파스와 붙어 있는 기지로 2사단 산하의 기지이지만 이곳 또한 대규모 병력의 수용공간은 없다. 캠프그리브스는 임진각에서도 육안관측이 가능한 임진강 맞은편의 산능선을 따라 배치된 기지이다. 리버티벨과 그리브스에 506보병 1대대가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워리어 베이스를 중심으로 훈련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전투근무지원부대의 차량이 통일대교를 넘어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RSOI가 지휘소 연습이며 독수리연습이 후방에서 방어위주로 실시되는 실전훈련이라는 공식보도가 거짓이며 전방배치된 해병대들의 공격적인 군사연습이란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2005년 3월 20일 대구광역시에 위치한 2군 사령부 인근, 고모령 고개에서는 RSOI연습의 일환으로 스트라이커 부대 훈련시범이 있었다.(통일뉴스 관련기사-http://www.tongilnews.com/article.asp?menuid=101000&articleid=53089)

지상전 병력을 태운 하와이의 고속정이 도착하기 전 스트라이커부대가 작전을 시작하는 것은 기동부대로서의 속도 때문이다. 그러나 스트라이커 부대가 최신장비로 무장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경무장부대이다. 걸프전에서의 선발 배치된 공수여단보다도 적은 규모이다. 이들이 중무장한 대규모 병력을 단번에 제압할 수는 없다. 이들의 작전이 성공하려면 체계통합(A system of system)을 전제로 한 전투개념이 필요하다.

이러한 체계통합은 정찰 및 감시와 같은 전장 환경 가시화를 위한 센서체계 그리고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 평가 및 분배할 수 있는 C4I수준의 지휘통제체계 그리고 정밀타격과 같은 슈터체계로 가능하다. 인공위성이나 U-2기 같은 전략정찰만으로는 전장의 수요를 충족할 수 없으며 각부대가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소형 무인정찰기 같은 전술정찰능력을 필요로 한다. 실시간으로 전장 정보를 분석평가하고 전투원에게 분배할 수 있는 지휘통제체계가 필요하다.

스트라이커부대는 미군이 세계각지에 주둔함으로서 피할 수 없었던 인계철선전략으로부터의 탈출로 주한미군 철수의 장기적 신호로 볼 수 있지만 전쟁 수행의 기동성을 비약적으로 높이려는 새로운 전략이란 점에서 긴장을 유발시키고 있다.

한편, 이들 신규부대의 배치는 RSOI가 태평양사령부의 작전술 차원을 넘어 국방성이 직접 개입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지구상의 그 어느 곳에라도 신규로 병력을 배치할 때에는 ‘반드시’ 국방장관의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합참의장이 ‘군사배치승인요청서’를 국방장관에게 제출하면 국방장관이 서명함으로서 배치가 실행되는 것이다. 파나마전쟁시 체니 국방장관은 ‘멋진 소포’라는 암호명의 군사배치승인요청서에 서명했다. 이 부대의 구성은 델타 기동대대 1개 부대, 16기의 헬기로 구성된 ‘은제탄환’부대, 3명의 암호정보 청취자로 구성된 ‘개똥지빠귀의 집’ 팀이었다.

이 신규배치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군사훈련의 강화를 위한 타당하고도 신중한 대비, 고조된 긴장상태에 대한 대응, 그리고 작전수행능력을 강화함으로써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 덧붙여서 이 병력과 파나마에 있는 기존의 다른 병력들에 의한 군사훈련은 실제작전에 대비한 최상의 예행연습이기도 했다. 스트라이커부대의 배치는 전시가 아니어도 국방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변하지 않았으며 RSOI연습은 주한미군사령부 군사연습이나 태평양사령부의 연습 차원을 넘어 미 국방성까지 관여하는 군사연습임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