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54일째-1차걷기명상을 정리하며2004/12/03 2012
1차 걷기명상을 정리하며
이마바리에서 강화로
유후인을 떠나 시코쿠의 이마바리로 간다. 가는 길에 바다가 있어 배를 타야한다. 이제 일본은 추석명절이 시작되어 배편 예약이 쉽지 않은 시절이란다. 그러나 도유사 선배의 일정진행은 언제나 완벽했다. 우리는 무리없이 항구에 도착했고 배에 올랐다.
눈물을 흘리며 바다를 건너본 사람은 바닷물이 눈물이 모여 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서있는 사람은 바람으로 하여 바다가 요동친다고 생각할지 모를일이다. 저마다의 바다가 있다. 저마다 바다를 품고 나누어가져도 바다는 조금도 줄지 않는다. 바다는 조금도 줄지 않는 것이다. 눈부신 바다를 볼 수 없다면 차라리 눈을 감을 일이다. 그리고 바다의 소리와 교감하고 대화할 일이다.
시코쿠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원자력발전소가 눈에 띈다. 이번 일정에서 울산, 큐슈에 이어 세 번째 보는 원전이다. 8월6일 히로시마의 중국전력회사 앞에서 있었던 반핵집회에서 보았듯이 현재 일본의 반핵운동의 쟁점은 원전문제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요미우리신문에 히로시마행사 사진과 더불어 원전에서의 냉각수 유출 사고에 대한 기사가 톱으로 나란히 실렸다. 원전의 폐기물은 재처리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재처리와 관련된 문제가 북핵문제의 쟁점이었으니 평화적 원전과 군사적 목적의 원전의 경계란 참으로 구분짖기 어려운 문제이다. 어쨌든 오늘 만나러 가는 분들이 원전반대와 일본교과서문제등에 대해 치열히 싸우시는 분들이라는 소개가 있었다. 두분의 중심인물은 모두 서점을 운영하고 계셨다. 한분은 마침 한국에 가신 참이라 뵐 수가 없었고, 다카이 선생과 그의 부인인 히데코선생, 철도노조를 퇴직하고 평화운동과 지역운동에 혼신을 다하고 계시는 야마나타선생, 교과서왜곡문제에 대해 가장 선봉에서 싸우시는 학교 선생님 한분과 아사히신문의 기자와 에이미현신문기자가 그날 저녘의 교류회에 참석했다.
다카이 선생의 넓은 이마와 콧수염이 내겐 레닌을 연상시켰지만 한국에서 오신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전봉준을 닮았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인다고 했다. 어쨌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일본에서 한국을 공부하며 한국의 문제에 대해 힘써온 그는 전봉준과 닮았다는 인상평을 매우 흡족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다카이 선생이 말했다. “우리 술을 먹다보면 진지한 얘기를 하기 어려워 질 수 있으니 먼저 공부와 토론을 먼저 시작합시다.” 그토록 오랫동안 한국문제에 관심과 일가견을 가진 그들에게 유엔사 문제는 역시 낯선 문제였다. 유엔사문제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한국지도를 미리 준비해 온 분이 있어 이야기가 쉬웠다. 우선 서해교전으로부터 경의선철도 연결문제와 고엽제 피해문제등 비무장지대와 한강하구수역, 서해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일들이 유엔사와 관련된 문제라는 사실에 우선 그들은 놀라워했다. 두 번째는 일본에 존재하는 7개의 유엔사 후방기지가 유엔사의 작전통제 아래 한반도 전쟁에 동원되는 존재라는 점에 놀라워했다. 셋째 무엇보다 그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자위대가 1951년 요시다-애치슨 사이의 유엔사지원에대한교환공문에 의해 자동개입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그럴까하며 확인을 재차 요청하여 한국전 당시 원산상륙작전시 기뢰제거를 위해 동원된 일본소해부대의 예를 들자 그런 것이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워했다. 유사법제 통과시 일본의회에서 관방장관에 대한 청문회를 했는데 한 의원이 요시다 애치슨공문이 여전히 유효한가를 물었고, 관방장관은 유효하다고 답변했다. 이런 사실을 일본의 지식인들이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오히려 의외였다.
다음으로는 히데코선생이 걷기명상에 대해 물었다. 왜 걷기와 같은 형식을 택했는가 그리고 그것은 효과가 있는 방식인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답했다. 걷기 명상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걷기가 고통스러울 정도의 단계를 지나가면 영감처럼 생각이 간명해지고 추동력을 갖게되는 살아있는 것이 된다. 깨달음이 곧 실천력으로 전화되는 그런 단계가 있음을 나는 걷기를 통해 여러번 느꼈다. 명상이 회색의 관념이 아닌 현실에서 살아있는 사고작용임을 깨달은 것이다. 걷기명상은 자신을 세계보다 낮은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며, 고통과의 친화이며, 낯선 것과의 대화이다. 사물에 대한, 또는 세계에 대해 처음 관계맺음의 단계를 ‘관물’이라 하지 않고 ‘관심’이라 한다. 물건을 보기전에 마음을 보는 것이 우선임을 뜻한다. 유엔사해체에 대한 길고 먼 일정의 첫단계인 관심에 대해 내가 나의 마음을 보고 그 울림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 관심을 갖게 하는 단계까지가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본격적인 해결과 대안을 위한 캠페인은 나같은 개인의 몫은 아니다. 대중을 중심으로 세우기 위한 조직과 단체의 몫이다.
모두들 그런 생각이 일본에서는 독특한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는 나의 사진작품세계로 옮겨 갔다. 나의 사진작업과 이런 일들은 어떻게 연관되는지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사진은 폭로와 정치의 도구이기보다는 사색의 도구이다. 그게 나에게 맞는다. 나의 관심은 가장 아픈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평화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상상력은 아름다움을 통해 추동된다. 평화의 상상력이란 자연과 역사와 문명의 결에서 전쟁을 포위할 수 있는 민중적 지혜의 씨앗을 찾는 것이다. 예를들면 핀란드의 사우나를 참고할만하다. 전쟁은 남성의 전쟁이고 여성은 전쟁으로 하여 이중,삼중의 피해를 입어왔다. 그중 하나가 전쟁터의 위안부이다. 핀란드는 소련과의 전쟁시 병사들에게 위안부 대신 일인용 천막을 제공하고, 달궈진돌에 물을 부어 증기를 쏘이게 하는 사우나를 하도록 장려했다. 그 결과 핀란드는 위안부와 같은 구조를 갖지 않고도 전쟁을 치룰 수 있었다. 핀란드에서 이런 대안이 가능했던 것은 생활속에 완전히 뿌리내린 핀란드식 사우나 공동체라는 전통문화의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일인용천막사우나라는 현실적인 형식을 창안한데 있었다.
핀란드 사우나는 온천에 민감한 일본사람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쟁점이 된 것은 일본의 온천문화에선 그것이 부정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평화문화와 평화적상상력에 대한 오랜 토론이 된 셈이다. 통역을 하시던 도선배가 정지를 요청하고서야 겨우 논쟁이 수습되었다.
모임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인상깊은 것이 있었다. 기자들이 떠나면서 음식을 준비한 다카이선생께 천엔씩 돈을 내고 가는 것이었다. 그날의 저녘 값이었다. 기자에게 촌지를 주거나 식사대접의 명목으로 이뤄지는 언론계관행에 익숙한 나로서는 참신한 장면이었다. 기자도 참석자의 한사람일 뿐 인 것이다. 다음날까지 함께 자고 아침을 준비해 준 일본분들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마바리에서의 마지막 교류회는 나의 1차걷기명상을 정리하는데 좋은 시간이 되었다. 그분들은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섬세하게 계산에 넣어 두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하나 섬세하지 않은 배려가 없었다.
공항이 가까워질수록 도선배에게 10월에 있을 2차 일본걷기일정에 대해 큰짐을 넘겨드리고 가는 것 같아 못내 마음이 편치 않다. 돈도 떨어져 변변한 사례도 표할길이 없어 더욱 그랬다. 도선배는 공항에 나를 내려놓고 총총히 사라지신다. 그의 뒷모습에 노을이 비낀다.
홀로된 공항에서의 시간이란 깊은 아쉬움과 설레임의 이중주이다. 이제 느슨한 전쟁속에서 10월까지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긴 여백속으로, 아니 오리무중의 안개속으로 이제 들어간다. 노을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빛을 밝히지도, 어둠에 물들지도 못한 짙푸른 고요를 뒤로 하고 비행기는 서서히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안도감 대신 안도감에 대한 경계가 앞선다.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갈지를 정해놓지 않고 있었다. 어머님이 계신 예산일지 식구들이 있는 명륜동으로 갈지… 긴 숨고르기가 필요했다. 아무도 맞아주는 사람이 없을 강화도 집으로 발길을 잡았다. 버스는 이미 끊겼고 집을 향해 밤길을 걷는다. 첫날 떠날때의 짐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던 길이다. 걷기 중간에 짐을 많이 줄였는데 일본에서 얻어온 자료집등으로 어느새 짐은 처음보다 더 무거워져 있었다. 달빛도 없는 길을 걸으며 첫날의 느낌을 다시 줍는다. 거름 냄새도 풀냄새도 모두 그대로다. 집으로 가는 길에 해병대가 있다. 언젠가 오늘처럼 달이 없는 밤에 해병대앞을 지날때의 일이다. 잠시 졸고 있었을 초병이 나의 발자국 소리에 깜짝 놀라며 ‘헛’하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그의 총에서 ‘철커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어두운 밤이면 특히 이렇게 큰 짐을 짊어지고 지날 때면 긴장을 하게 된다. 잠결에 혹시 있을 수 있는 해병대원의 실수에 대한 우려때문이다. 전쟁의 궤적을 찾아 먼길을 돌아왔지만 다시 집 앞에서 살아있는 전쟁의 긴장과 만난다. 오늘밤엔 차라리 그 긴장이 고마웠다.
동네는 잠들어 있었다. 불꺼져 있을 집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사람들이 마루에서 웅성거린다. 집지킴이가 사람들을 데려와서 노는 날인가 싶었다. 오늘밤 내가 불청객이 되어 어쩌나 싶었다. 그런데 집에 와 있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한 아가씨가 ‘선생님’ 하며 놀라 맞이한다. 화천에 취재를 왔던 참여사회기자 성희씨였다. 한일청년평화교류프로그램의 하나로 한국에 방문해 있던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이 바로 윗집인 김정택목사님 댁에 숙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인인 임정숙선생님의 안내로 잠시 집에 들렀다는 것이다. 귀신이 나올지 모른다고 겁을 주었다는데 내가 귀신처럼 그들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랜만의 뜻밖의 만남에 반가와 하며 그들의 숙소에 올라가 잠시 만남을 갖기로 했다. 피스보트에 참가한 일본청년들과 재일조선인들 그리고 한국의 청년들이 이미 12시가 넘은 시간에도 삼삼오오 토론이 뜨겁다. 비폭력평화물결의 김박태식과 이라트파병반대행동의 임영신님도 있었다. 강화지역운동의 구심인 김정택목사님도 젊은이들 틈에서 함께 하고 계셨다. 이야기가 무르익은 것은 아니었지만 김목사님이 어려운 말을 먼저 꺼내 내게 물었다. 이시우의 걷기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보통 준비를 해서 싸워야 그게 성과로 이어지는데 이시우의 걷기는 과연 그런 준비가 되어서 조직적인 성과와 연결이 되는 것인지, 그냥 도사처럼 걸은 것인지… WTO 싸움 초반에 백인걷기가 있었는데 대중투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목사님은 나를 너무 크게 보고 계신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군가 다른 사람들도 그런 비판의식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답했다. 이번 일은 조직적 행동과는 무관하다. 잠수함에 독가스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넣어지는 토끼처럼 나의 역할은 예술가로서 조직이 나아가고 대중이 나아갈 길을 먼저 가 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뿐이다. 그 이상을 하려한다면 주인으로 나설 조직의 앞을 가로막든지 이끌려는 것이다. 내 역할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님과 같은 판단이 없지 않을 터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자의적인 설정이고 이해하는 사람의 맥락에 의해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일이란 점에 생각이 미친다. 이미 파문은 일어났고, 파문이란 언젠가 가라앉을 것이다. 맥락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파문을 지우려는 것 자체가 더 복잡한 파문을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파문에 대해서도 응시할 의무가 나에겐 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1차 걷기의 마지막 이틀간의 여정에서 1차 걷기를 되돌아볼 기회를 가진 것은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 걷기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