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 47일째-고보댐과 원폭자료관2004/08/09 1501
8월 5일 –
1940년부터 고보댐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전시동원령에 따라 양은이며 철이며 모든 것을 동원하던 시절 전기야말로 중요한 군수산업자원이었다. 문제는 당시 식민지민이란 이름하에 조선인과 중국인을 강제동원한 것이다. 고보댐은 저수용량대신 낙차가 중요했기에 산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때문에 댐으로 가는 길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계곡이 이어졌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몇 개나 되는 발전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 발전소는 산에 터널을 뚫고 물을 낙하시켜 발전을 했다한다. 고보댐을 올라가는 길에 미요시시 기미타손(君田村)지소에 들렀다. 우리로 치면 읍사무소가 된다고 했다.
이곳에 들어서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한글 표지판이었다. 도선배는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듯 설명을 했다. 게시판에는 1959년 조선인들이 귀국하면서 기념식수한 나무란 설명이 붙어 있었다. 도선배에게 처음 이곳을 소개해준 후꾸마사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곳엔 과거 공산당 세력이 아주 컸다고 한다. 그러니 조선말로 게시판이 붙어있는 채로 읍사무소 한복판에 보존되고 있으리라.
산길을 따라 얼마를 더 올라가자 댐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것이 나타난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그토록 수많은 조선인이 죽었다니 아닌 것 같았다. 역시 상식은 맞았다. 이것은 고보댐이 아니고 고보댐 아래에 있는 수위 조절용 댐이란다. 이름은 꾸쯔가하라(沓原)댐이다. 도선배가 여기에서 멈춘 이유가 있었다. 고겟스소(湖月莊)라는 건물흔적이 얼마 전에 올 때까지 여기 있었단다. 고겟스소란 댐으로 물을 막으며 자연스레 호수가 생기고 이 호수를 배경으로 달이 뜨면 일본군과 관리들이 이곳에 기생들을 옆에 앉히고 온갖 추태만상을 보이던 곳이라 한다. 도 선배는 처음 이곳을 보았을 때 2차대전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던 요정집과 분위기가 똑같아서 단번에 어떤 건물인지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엔 강제동원된 댐공사를 피해 도망하던 조선인들을 잡아 고문하던 고문장이 있는 곳이었다 한다. 조선인들의 비명과 호수의 달빛을 보며 즐기던 일본인들의 도락이 함께 하던 역설의 현장이었다.
고보댐은 좁은 협곡사이에 높게 건설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포장로가 있었을리 만무한 당시의 수송수단은 삭도였다. 일종의 짐을 실어나르는 케이블카이다. 지금도 삭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선배는 후꾸마사 선생의 말을 옮겨 설명했다. 당시 삭도에 실려온 콘크리트를 쏟아 붓는데 콘크리트가 잘 섞이고 공기층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댐 아래에서 콘그리트를 휘 젖는 일을 조선인들이 하고 있었다. 허술한 삭도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만큼 콘크리트를 쏟아 붓지 못했고 결국 아래에서 일하던 조선인들 위로 콘크리트가 쏟아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조선인들은 그 아래에서 모두 콘그리트에 묻히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댐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댐위를 걷는자들이여 신발을 벗어들고 그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경건히 발을 떼시라.
히로시마원폭돔이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순례객들이 줄을 이어 걷고 있었다. 내일은 고이즈미수상까지 참석하는 세계적인 행사일이다.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전시관을 올랐다. 오랜시간 꼼꼼히 보고 또 본다. 핵을 잘 안다고 스스로 생각해왔지만 내 의식에서 결여되어 있는 것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생생한 피해에 대한 현장인식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논리와 달라서 보고 또 보고를 계속하여도 관성화 되지 않는 그 무엇이었다.
일본에 오기 전 급할 때 사용하기 위한 일본어를 배우는데 많은 선생님들의 수고가 동원되었다. 그중 하나가 ‘물좀주세요’란 뜻의 ‘미즈오 쿠다사이’였다. 카데나 탄약고를 이틀에 걸쳐 돌아보며 걷고 있을 때 살인적인 8월의 폭염에 탈진상태에 이르러 만난 첫 사람에게 건넨 말이 바로 ‘미즈오 쿠다사이’였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나의 상상력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예수의 그 고단함으로 인도되어 있었다.
원폭자료관의 전시물중에 나의 눈을 끈 것이 있었다. 원폭을 당한 히로시마 사람들이 일그러진 신체와 8월의 폭염에 견디다 못해 절규한 말이 바로 ‘미즈오 쿠다사이 물좀 주세요’였다는 설명판이 그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이 조금씩 내 몸에 전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오래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전율하고 있었다. 물 한모금의 절박함으로 우리의 평화운동은 항상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자료관의 원폭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나 자신의 피해자로서의 측면과 가해자로서의 측면중 피해자로서의 측면이 강조되어 있었다. 피해자로서의 인식은 전세계에 핵무기 사용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보편적 가치로 일본인을 안내 할 터였다. 그러나 가해자로서의 반성 없는 피해의식에 대한 경도는 반핵평화운동에 대한 큰 장애물로 보였다.
전시물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들 중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이 일본에 건너와 있다가 피폭 당했다는 설명이다. 히로시마가 폭격대상이 된 것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주공부대였던 5사단과 군수보급창등 핵심 군사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철도가 도쿄에서 히로시마까지 연결되어 있었기에 갑오농민전쟁을 탄압했던 일본인부대도 히로시마항구를 통해 출발했다. 히로시마의 침략사가 원폭피해사로 가려질 순 없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전쟁범죄 박물관에도 일본인들이 돈을 내서 세운 히로시마 원폭피해관 박물관입구에 크게 세워져 있다. 이전에 그것을 보며 내가 존중했던 것은 공교롭게도 일본의 원폭피해가 아니었다. 그들보다 더한 상흔을 가진 베트남이 일본의 상처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통을 체험한자만이 진정한 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 물 한모금의 그 절박함이 항상 평화운동의 출발점이 되어야한다. 다시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우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