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 46일째-히로시마 고보댐2004/08/09 1263
8월 4일 –
한글자판에 내가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 실감한다. 오늘 처음으로 한글로 작업을 하자 작업 속도가 다르다. 틀이 내용을 규정하진 않지만 틀이 효율성은 규정한다.
오끼나와에서의 이야기를 하자 도유사 선배님은 추가 설명을 해주었다. 이하요우이치 현기노완시장은 노동조합운동출신으로 오끼나와 현 의회 의원을 거치고 시장이 되었다. 그는 타이라목사가 자신과 절친한 친구사이라고 했다.
아리메 마사오란 유명인사가 있다. 소학교 선생인데 72년 오끼나와 복귀까지 투쟁을 지도해온 분들이 다름아닌 학교 선생님들이라고 한다. 72년 복귀당시는 베트남전쟁 중이었고 미군기지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평화헌법 9조 위반이라고 반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오랜동안 그러했지만 당시 선생님들이 최선봉이었고, 다음이 미군기지노동조합원들 이었다고 한다.
오사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던 도 선배님과 히로시마로 향한다. 이제부터는 차로 이동한다. 1차걷기 명상이 마무리된 셈이다. 이제 일본에서의 2차 걷기명상을 조직하기 위한 일정들만이 남았다. 만나야할 사람들과의 인연이 이제 많은 것을 이루게 할 것이었다. 히로시마의 간판이 보이고 얼마 안되어 나타난 갈림길에 요나고로 가는 표지가 서있다. 요나고엔 북의 통신을 늘 감청하는 자위대 부대의 코끼리우리가 위치해 있다. 작년 내가 일본에 왔을때 이와쿠니에서 요나고까지 무턱대고 오려고 했던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 특히 그리고 또 하나 당시 투박한 지도로 히로시마와 요나고의 거리를 계산한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실감한다. 한국전 당시 미군의 상륙작전을 가장 망설이게 했던 것이 정확하지 않은 지도였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다. 내 인생엔 그렇게 지도가 운명의 화두 처럼 따라 붙는다.
우리는 우선 히로시마 근처의 미요시란 곳으로 간다. 고보댐을 보기 위해서이다. 더 정확하게는 고보댐을 만드는데 강제동원되어 죽어간 조선인들의 유골을 수년 째 발굴하여 한국 천안에 송환케한 일본인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도유사선배가 이시우를 위한 재일조선인 문제 이해시키기 차원의 배려였다. 그는 무리하지 않게 그러나 집요하게 나를 재일조선인 문제 속으로 끌고 갔다. 국제연대 특히 한-오끼나와 연대를 개척해 낸 그에게 가장 큰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재일조선인문제였다.
미요시에 도착했다. 산골에 위치한 한 작은집의 2층에는 사무실이 있었다. ‘빈고 후레아이 고우보우(備後ふれ合い工房)’ 빈고는 옛날 미요시의 지명이다. 오사카를 난이와로 토쿄를 에도로 부를때의 이름이다. 후레아이는 첫 만남을 의미하며 고우보우는 사무실을 이야기한다.
‘빈고 후레아이 고우보우(備後ふれ合い工房)’는 일제점령기 일본의 댐 건설이나 도로건설에 강제동원되어 사망한 채 땅에 묻힌 한국인들의 시신을 찾아내어 발굴하는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모임이었다. 유골 발굴 작업은 6년간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루어졌고, 이들 유골은 절에 일단 모셨다가 작년에 드디어 천안 망향의 동산으로 이장시키고 나서 일단 정지되었다고 했다. 우선 강제연행된 동포를 아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거의 돌아가셔서 유골을 찾기 힘들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레슬링 선수 김일을 생각나게하는 인상의 야마다씨와 청년 같은 쓰가모토씨가 우리를 맞는다. JR철도노조 출신이었다가 작년에 은퇴하고 새로운 일을 찾으며 이일을 맡아하고 계신다고 했다. 여기와서 안 사실인데 평화운동에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은 노동조합과 노조출신의 어르신들이었다. 얼마 뒤 유골을 봉안했던 절의 스님이 합류하셨다. 그는 북의 묘향산에서 본 스님처럼 삭발하지 않은 너무 평범한 아저씨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대처승이 사회운동에 더 적극적이라고 도 선배가 귀뜸해준다.
사람들과의 화제는 유골송환이후의 조직문제에서 유엔사문제로 옮겨 갔다.
도유사 선배와 다니는 곳마다 유엔사문제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놀라워 했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나 지금 이런 사람과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 하는 식으로 사람을 오도록 권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오랜만에 보는 조직의 마술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