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21일째-유엔사해체와미군전술의약한고리-군종갈등 2004/07/13 1242

미군혁신과 재배치전략의 근원지는 해군. 요코스카기지의 이지스함

유엔사 해체와 미군전술의 약한고리-군종갈등

이시우

삼척
삼척의 한재를 지나며 오랜만에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해무가 짙게 덮인 절벽이다. 파도는 암초(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이친다. 해무도 이 바다언덕을 떠나지 못하고 잊을만하면 찾아온단다. 모든 그리운 것들은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린다.

합동성
미군개혁과 혁신의 핵심주제는 ‘합동성의 강화’이다. 이것은 합동성에 문제가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즉 육,해,공군의 군종간 이기주의가 미군개혁의 최대 걸림돌이란 문제의식이 숨어 있다. 미군의 군사기술등은 놀라울 정도로 혁신 발전되어가고 있지만 정작 군종간 이기주의는 문화적으로 뿌리깊게 박혀 있어 그 극복이 쉽지 않다. 전략과 작전차원에서 우세하다해도 전술차원에서의 실수나 오류는 전체 전역에 치명적 영향을 끼칠수도 있다는 점에서 합동성의 장애가 아닐 수 없다. 군종이기주의는 군사혁신의 약한고리인 것이다. 미국의 한 군사전문기자는 이들 군종간의 문화가 얼마나 뿌리깊게 자기문화를 발전시켜 왔는가를 경험한 적이 있다. 공군장성을 취재하기 위해 가던 중 활주로에서 가벼운 사고가 나서 장성이 타고 있다는 승용차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자는 승용차의 뒷좌석을 살피며 장성을 찾았다. 그러나 뒷 좌석에는 두명의 대위계급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 운전석에 ‘멍청한 기자양반 나 여기있네’라는 소리가 들렸다. 공군은 비행기를 운전하는 사람이 최고상관이다. 이런 습관은 자동차를 탈때도 반영되어 마치 운전기사처럼 상관이 운전석에 앉는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해군은 장성이 함교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조타수가 배를 운전하거나 포술장들이 함포를 발사한다. 이런 습관 때문에 승용차를 이용할 때 해군장성은 뒷좌석에 앉는다. 그래서 기자는 우스개소리로 미군 장성들의 수송문제를 해결하려면 해군과 공군 장성을 한차에 태우면 경비가 절감될 것이라는 제안을 했다 한다.

군종간에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의 대립과 갈등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 결과를 보자

1979년 합참이 페르시아만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은 신속배치군(RDF)의 창설 지시를 받았을때의 일이다. 해병대를 주축으로 한 “통합”형태가 당시 거론되었다. 새로운 부대는 해외 상주 주둔군이 아니면서도 위기 지역에 신속히 배치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명백히 원정적이어야만 했다. 한편 해병대는 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작전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고 그런 장비도 갖추고 있으니 그 자체가 이미 원정군이 아니던가. 이 신속 배치군은 또 중장비의 공수가 페르시아만 같은 먼 지역에까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 해상수송에 의존해야 하니 해병대야말로 해상수송에 맞아떨어지는 군종이다. 끝으로 신속군은 또 성격상 상륙전을 주로 감행할 것이기 때문에 상륙전이야말로 해병대의 주특기 아닌가. 따라서 신속배치군은 육군 및 공군의 필수요원 몇 명 정도만 거느리는 하나의 “통합”해병대 사령부의 모델이 당시로서는 결정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합참은 당시 이 모델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합참이 이 모델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해병대가 그 임무를 몽땅 떠맡아 새로운 예산과 새로 생길 고위 보직들을 독차지해 버리게 된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사이공 사령부와 같은 하나의 통합구조안이 각 군종의 타협을 거쳐서 채택되고 말았다. 또 이 사령부의 골격을 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브라운 국방장관이 편성지시를 내린 지 거의 6년만인 1983년 1월에 와서야 한 육군 장성의 지휘아래, 기타 보직들은 각 군종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고루 나누어진 채 드디어 골격이 드러났다. 그 결과 균등배분의 원칙에 대한 보상으로서 문자그대로와는 달리 신속하고도 명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할 참모들만 우글거리는 또 하나의 사령부인 신속배치군이 탄생했다.(국방성과 전쟁술The Pentagon and The Art of War.1986년.40~41쪽.루트웤.명지출판사)

한편, 유고전은 정치가들과 군부간의 전략적 갈등 양상이 어떻게 전술적 오류를 생산하는가를 보여준다.

나토 공격기의 운용고도를 15,000피트 이상으로 제한했던 정치적인 결정도 여전히 이견이 있는 분야이다. 이는 나토군 항공기를 유고군이 보유했던 대부분의 휴대용 지대공미사일과 대공포의 사거리로 안전하도록 만들었으나, 항공전역 계획입안자와 조종사들이 오랫동안 훈련해왔던 전장항공후방차단(Battlefield Air Interdiction아군지상군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적의 지상표적 즉 제2 제3제대를 공격하는 작전) 기법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도록 행동의 자유를 구속하였다. 또한 표적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능력에도 악영향을 미쳐 표적처리의 오류를 증가시켰다. 최악의 실례가 高고도에서 미공군 조종사가 알바니아계 피난민의 트랙터와 민간차량을 세르비아군 기갑부대로 오인했던 4월14일의 쟈코비카(Djakovica) 오폭사건이었다.

오폭사건은 모든 작전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연유할 때 다른 전개양상을 보인다. 전역초기부터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부 스스로 강조했고, 민간이 받아들인 신념, 즉 현대식 정찰체계와 스마트무기의 위력으로 ‘부수피해’를 제한할 수 있다는 일반대중의 생각이 폭격작전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촉발되었으며, 심지어 정치가들이 가끔 공격을 중지하도록 지시하는 사례도 있었다. 한편 기계적인 결함이 일으킨 전술상의 오류도 심각한 것이었다.

약 17-27피트 크기의 원격제어 비행체인 소형기는 조종사들이 기피하는 지역, 때때로 세르비아군 참호 상공 2-3천 피트 상공에 투입하여 귀환하지 못했다. 이는 적진지 상공에서 유유히 활강했거나 지상포화를 회피할 능력이 없지도 않았지만, 성가신 모기와 같이 붕붕거리는 소리가 무인기가 손쉬운 표적이 되었던 원인이었던 것 같다. 나토군 유인기가 2대 추락한 반면 무인기는 최소한 22대가 적의 사격이나 기계고장으로 추락하였다. 여기에는 미군 무인기 12대도 포함된다.

항공력만으로 치뤄진 전쟁인 유고전의 사례는 합동성 강화의 과제가 허물어 질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보여준다. 실제 지상군지지자와 항공력주창자들 간의 서로 상이한 평가를 확인시킨 전쟁이 유고전이었다.

어떤 전쟁에서든 “교훈”을 도출하는 것은 일종의 선택의 문제이다. 이미 항공력(Air Power) 주창자들은 코소보전쟁을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항공폭격에 의한 승리’를 기어코 달성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장차전은 항공기, 센서 및 항공투발 정밀무기체계가 전쟁을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는 상반되게 지상군 지지자들은 군사적․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함에 있어 항공력의 제한성이 강조되었던 코소보전쟁에서 전혀 상이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오웬스 제독은 그의 저서에서 ‘불확실성의 제거’가 군사혁신의 목표임을 밝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불확실성이 제거 될 만큼 정밀기술과 조직은 발전되지 못했으며 전술적 오류는 이라크전쟁대 까지 끊임없이 미군을 전장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예를들면 항공기의 출현은 전장을 지역으로 확대시켰다. 이러한 전장공간의 확대이전에 대해 H.G. Wells는 “The War in the Air”에서 정확하게 예측하였다.

“날으는 기계로 전쟁의 성격이 변했다. 前線에서의 업무가 아니라 地域에서의 업무로 바뀌었다. 승자나 패자 어느 쪽도 혹심한 피해를 면할 수 없으며 전쟁의 파괴가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모호성(indecisiveness)도 증가하였다.” 라고 갈파했다. 웰즈의 이러한 지적으로부터 약 14년 후인 1922년 12월11일에 Hague Aerial Bombardment Rules의 초안이 작성되었는데, “군사적 성격이 아닌 사적 재산을 파괴하거나 피해를 주고 비전투원을 가해하여 민간인을 테러하는 목적의 공중폭격은 금지한다.” 는 22조가 가장 주목할 만 하다.

이러한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것이 군사혁신의 목표였다. 그러나 이라크전에서까지도 미군이 자랑했던 초정밀무기들은 민간인들을 폭격했다.
83년 그레나다상륙작전에서 보여준 사례가 지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핵심인 군종간 갈등은 이 시간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레나다 상륙작전의 이름은 “불같은 분노”였다. 이“분노”는 1983년 11월25일 새벽 5시 36분에 터트려지기 시작했는데 이란 인질 구출 작전이 실패한 이상 이 작전마저 실패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완전 무장한1.250명의 해병 상륙부대와 2개의 유격대대가 인디펜던스항모전대에서 발진한 전폭기들과 공군건쉽의 엄호를 받으면서 미명을 뚫고 위풍도 당당하게 그레나다 해변에 상륙했다. 그때 그 섬에 주둔하고 있던 쿠바군대와 소규모의 그레나다군은 싸울 생각이야 있었겠지만 위세 높은 이 상륙군을 맞아 기가 꺽이고 말았음직도 했다. 쿠바군 가운데 636명은 군사훈련 소집 정도를 받은 단순 건설 노동자들이었으며, 장교 22명을 포함, 직업 군인은 고작 43명 미만이었다. 그리고 상륙당시 그레나다에는 요즘 제 3세계의 작은 나라라면 갖고 있는 어떤 종류의 방공체계도 없었다. 이섬에는 그 흔한 전투기 한대, 미사일 한발도 없었다. 또 공식 보고서에서는“중무장” 한 것으로 기술된 쿠바군과 그들의 장비는 과연 어떠했던가. 전차 한 대 포 한문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기갑 차량 몇 대와 낡아빠진 대공포 몇문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상륙군 제1파는 현지군의 미미한 저항을 받고는 상륙 이틀만인 11월 26일 제 82공정 사단 소속 2개 대대를 더 불러 올려서 상륙군의 전력을 강화해야만 했다. 추가부대로도 충분치 않아 28일에는 제82공정사단의 공수부대원들이 또 투입되었다. 그때까지 침공은 신속하게 진행되지 않고 지구전 형태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전과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세인트조지 의과 대학 구내에 갇혀 있던 미국인 학생 224명을 구출한 것인데 이것도 공격 이튿날인 26일 오후 늦게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까지 침공군은 쿠바와 그레나다군의 자비심에 모든 것을 내 맡긴채 꼼짝하지 않고 그 중요한 시간을 허송했다. 그때 쿠바군대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학생들을 인질로 잡거나 살해 할 수 있었다. 어찌, 그들에게 자비심이 없었다 하겠는가. 그들은 침공군을 맞아 절망적인 전투를 치르는 상황 아래서 학생들을 잡고 정치적 흥정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었다. 한편, 상륙군 1파인 해병대와 유격대가 섬 반대편에 상륙했기 때문에 그 목표 대상들이 있는 수도 세인트 조지 주변과 섬 중앙부에 “분노”작전의 시급한 임무 달성을 위해 또하나의 특공대가 투입되어야만 했다. 그 가운데 델타포스(Delta Force)인 듯한 제 1대는 리치몬드 힐에 있던 것으로 믿어지던 정치범들을 보호하고, 제 2대는 이 섬의 방송국을 점령폐쇄하며, 제 3대는 그레나다의 총독으로서 영국 여왕의 대표인 폴 스쿤경 보호등의 임무를 각각 부여 받았다. 그레나다에서 권력을 장악한 살인도당에 대항하던 스쿤 경은 당시 세인트조지 인근의 한 언덕 위에 있는 그의 관저에서 지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는 구출되여 미군의 손에 들어와 세계만방을 향해 자신이 직접 미군의 그레나다 무력침공을 요청했음을 선언하도록 하기 위해 한시가 급한 사람이었다. 해군의 정예부대인 SEAL의 1개 q대도 25일 미명 그레나다에 상륙, 본격적인 침공작전이 개시되기 전 스쿤경을 고스란히 구출하도록 그의 관저로 쇄도했다. SEAL군 22명은 소형 상륙정편으로 인근해변에 도착, 곧장 길을 열어, 총독 관저로 달려갔으며 스쿤경과 그의 가족은 그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그 반가움도 잠깐이었다. 거기에는 쿠바군이 운전하던 낡은 BTR60장갑차 3대가 기다리고 있었다.이 장갑차는 원래 장비가 허술한 것이기 때문에 대전차 무기만 있더라도 이를 관통, 간단히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SEAL은 그때 소형화기만 갖고 있어서 도리어 이들 그레나다 군대로부터 저지당해, 총독 관저에 총독가족들과 함께 갇히고 말았으며, 결국, SEAL대원 한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부상했다. 마침내 이 구출 특공대를 구출할 또 다른 특공대를 투입해야할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상륙군 사령관 조셉메츠컬프 해군중장과 그의 부사령관인 노먼슈와츠코프 육군소장은 이긴급구출작전에 헬기를 동원한 가운데 1~2개 소대병력 규모의 소규모 작전을 단념하고 그 대신 해병대원 250명,M60전차 4대와 장갑차량 13대를 동원 또하나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상륙군은 헬기가 공중에 뜬 다음에야 섬 주위를 반쯤 도는등 알맞은 상륙 지점을 찾아 헤맸다. 한편 이 해병대와 전차들은 총독관저로부터 긴급 구조 요청을 받은지 24시간도 훨씬 지난 다음날 하오 8시 수도바로 북쪽에 있는 그나마 그랜드몰 해변에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그때까지 포위된 총독관저를 위해 지원사격을 하던 중 그 이름도 용감한 코브라건쉽 두 대가 그만 격추되고 말았다. 이 해병대는 이튿날 상오 9시 총독관저 주변에 도착, 총독, 총독 가족, 그리고 해군특공대 SEAL을 구조한 것도 현장도착 3시간 후인 상오 7시였다. 한편 리치몬드힐 감옥의 정치범들을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엘리트육군특공대로서 그 존재마저 장막에 가려져 있는 델타포스도 임무에 실패하고 사망자만 많이 냈는데 이 구출군을 구출해 낸 것도 역시 해병대였다.

유격대, 공수대 및 해병대등 미군의 정예부대들이 독일군도 러시아군도 아닌 쿠바군과 한점, 섬나라인 그레나다군과의 싸움에서는 간단히 승리를 거둘 수 있어야 했다. 포인트설리니스에 건설중이던 비행장 활주로에 낙하한 유격대원들은 작전착오로 적의 총구앞에 떨어져 고전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그결과 훈장만은 많이 탔다. 또다른 초기 침공작전의 하나로2개 해병중대가 펄스 공항과 인근촌락에 헬기로 침투했으나, 다행히 그곳이 사실상 무방비였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제 82 공정소속 장병들이 개입했을 때, 프리퀸트와 컬비니에 있던 쿠바군의 “강력한”저항에 부딪쳤는데, 그랜드몰에 상륙한 해병대들도 스쿤경을 구출한 후, 그레나다의 국방성인 포트 프레드릭을 공격할 때도 역시 저항을 받았다. 작전이 끝날때까지 미군전사 18명, 부상 116명, 헬기 몇 대 파괴등의 손해가 났다. 그리고 다른 인명피해도 많았다. 보트전복으로 SEAL대원 4명 익사, 헬기충돌로 수명 사망, 오폭으로 12명 부상과 그레나다 원주민 21명 사망등. 이렇게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끝난후 군사 지도자들이나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상륙작전의 결과는 “군사적 일대 승리”라고 표현했으며, 작전담당사령관이던 메츠컬프 해군중장은 “우리들은 그들을 싹쓸어 날려 보냈다”고 했다.
이 “분노” 작전을 눈여겨보면 월남전, 이란 인질 구출 작전, 그리고 베이루트 폭격작전등에서 그동안 익히 보아오던 구조적 결함이 또한번 드러나기 시작한다.

첫째, 이 “불같은 분노”작전의 각 국면이 지상전투임에도 불구하고 그레나다가 지리적으로 버어지니아주의 해군지대 대서양 사령부의 책임관할 구역안에 있다는 그 이유 하나로 해군장교들이 이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지휘한 것이었다. 대서양 사령관 웨슬리 제독은 당시 사실상의 전선 사령관으로, 메츠컬프 중장은 그의 작전사령관이었다. 이들 해군장성들은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 항모전단들의 당당한 교대를 감독하고, 대잠수함전과 호송작전을 기획하는 해상전문가들일 따름이다. 이런 장교들이 공수공격과 특공대 구출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지상작전의 책임자들이라니. 사실 어느 해군사령부 안에도 해병대는 있으며 웨슬리 “통합”대서양 사령부안에도 육군과 공군 요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령부의 사령관이 실제 해군출신이기 때문에 이 사령부에 파견된 기타 군종 대표들의 계급이나 수가 낮고 적기 마련이다. 그리고 메츠컬프중장은 육군의 슈와츠코프소장을 자신의 보좌관 정도로 두고 있지 않았던가.역시, 상원의 한 청문회가 밝힌 바와 같이 미군에는 단일 지상군 사령부라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육군과 해군은 이 주장에 대해 수긍할 것 같지는 않을 것 같다. 이 “분노”작전은 화장품만 빼두고는 철저히 해군일색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상대하여 싸울 적의 군함이나, 뒤쫒아볼 만한 적의 잠수함이 없었으니 바다에서만 있기 마련인 해상전이라고는 이 그레나다 전투에서 전혀 없었다. 다만 항공모함발진의 전폭기들이 몇차례정도 공습한 것이 해군측이 실제로 이 작전에서 행한 전부였다. 따라서 작전을 해군화 했던 바로 그 관료적인 견강부회가 이 작전의 전체 개념을 망쳐 놓았다.(국방성과 전쟁술The Pentagon and The Art of War.1986년.50~55쪽.루트웤.명지출판사)

이러한 군종간의 문화적 차이는 이미 오래전에 확인되고 공고화 되어 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이다.

미 8군은 ‘위급’으로 표시한 전보를 많은 상급 부대에 동시에 발송하였다. 갑작스런 해군항공지원요청으로 77해상기동부대가 두달 동안 실시한 지상군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이 시작 되었고 인천상륙작전때까지 대부분의 항모 항공기의 시간과 노력을 여기에 소모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해군.해병대와 공군 육군의 근접 항공지원이 서로 다른 개념으로 운영되고 있던 시기였다. 해군과 해병의 근접항공지원은 태평양 전쟁때부터 지상군과 해군의 공격작전의 일부로 발전되었다. 항공기 몇 대를 지상군 지휘관이 직접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대의 항공기가 계속 전선을 순회하다가 전선에서 50-200야드 이내에 표적을 공격하기 위해 조종사들은 전선에 있는 훈련팀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정보를 받아 유기적인 지원이 가능하였다.
반면에 공군과 육군이 발전시킨 근접항공지원은 유럽에서 발전된 것으로 항공기가 통제권을 전선에 있는 요원들한테 주지 않았다. 항공기는 전선에서 합동작전통제소(JOC)의 지시에 따라 전선으로 이동하여 전선에 도착하면 지상요원들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고 공중에서 비행하고 있는 통제항공기가 통제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공군방식 항공근접지원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첫번째 이유는 워싱턴에 있는 고위층이 전술항공보다는 전략항공에 더 중요성을 두겠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극동공군이나 미8군의 임무에 근접 항공지원을 위한 훈련이나 준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군항모에 의한 근접항공지원이 부산지역을 지키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지만 해군항모에서 이륙한 항공기가 제대로 통제체계가 구축되지도 않은 시스템하에서 공중에서 비행하고 있는 항공기의 통제로 지상군을 지원하게 됨으로써 그 효율이 대폭 저하되는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한국해전사 p68.69)

군종간의 합동성을 강화하고 전략 작전 전술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어 온 것은 통신이었다. 그러나 통신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려운문제가 아닐 것 같지만 이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역시 군종간이기주의이다. 자신들끼리만의 통신문화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되어 있지만 다른 군종간의 통신은 아직까지도 2차세계대전 전의 수준인 경우가 많다.

7월24일…워커장군은 7함대가 근접항공지원을 하도록 도쿄에 요청했다…
모어하우스 제독은 조이제독에게 “우리가 당연히 도와야 하지만 걱정이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전선에 항공통제를 위한 훈련된 요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중과 지상의 통신은 폭주하고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통제수단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군의 전선을 표시하는 수단 위치를 식별할 수 있는 좌표체계와 통일된 지도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스트러블 제독은 항모항공기가 근접항공지원에 성공하려면 통제와 통신이 잘되어야함으로, 이를 위해서는 1상륙부대의 전술통제부대를 그들의 장비와 함께 한국으로 보내든지 함대의 경험이 있는 전문팀을 그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했다. 조이제독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해군항공기들이 5공군과 협력하여 지상군을 근접지원하는 것은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나 통제를 극동공군이 담당하게 되는데 이것에 성공여부는 두세력간에 원할한 통신에 달려 있다.”..항공기들은 5공군의 전방본부인 대구에 설치되어 있는 합동작전통제소(JOC)의 통제를 받도록 지시되었다. 그러나 통신망이 폭주하여 교신이 불가능하였고 공군통제기의 숫자가 너무적어 근접지원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합동작전을 할 수 있는 지도도 없었고 표적을 공격하기 위한 순회대기원칙도 없었다. 또한 통신문제뿐만 아니라 한국지명들을 발음하기가 힘들었고 서로 비슷비슷하여 이해하기 힘들었다. 해군항공기들은 공군통제기와 교신을 시도하다가 교신이 되지 않아 조종사가 직접 표적을 찾아 비행하다가 어떤 항공기는 표적을 찾아 공격하고 어떤 항공기는 표적을 찾지 못하고 항모로 귀환하다가 바다에 무장을 버리는 일도 있었다..(한국해전사.p70.71)

전술상의 오류나 약점은 수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구조적으로 양산시키는 문제로서 미군내에 뿌리깊은 군종간이기주의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들 문화적 차이가 극복되지 않는 한 지정한 미군개혁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유엔사해체와 군종갈등

현재 전세계적 미군재배치 작업을 주도하는 군종은 대체로 해군이다. 주한 유엔사의 한반도내 주력은 육군이다. 육군출신 유엔군사령관이 해군이 주도하는 미군개혁에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미군재배치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 차원의 미군개혁에 의해 감축되는 2사단의 현실은 이라크로의 차출이건 경무장신속기동군으로의 재편이든 지휘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있으며 유엔사해체나 한미연합사해체에 대해 한번은 정리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모든 작전차원의 군사연습에서도 해군공군 육군은 각자 따로따로의 야외기동연습을 실시하고 있다. 전술차원에서의 합동성에 대한 강조는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제과정에서 그것은 대체로 형식적이다. 합동성의 고리는 약한 반면 유엔사를 비롯 어느 하나라도 해체해야할 이유는 절박하다.

2004.7.10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