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8일째-대인지뢰문제도 유엔사문제2004/06/27 1433
땀
걸으며 장마가 문제인 것은 비가 아니라 비온 뒤의 바람한 점 없는 폭염이다.
땀이 얼굴선을 타고 흘러 턱에 매달렸다가는 대지위로 떨어진다. 이 땅에 흘러내린 땀 얼마랴 이 땅에 뿌려진 피 얼마랴. 때는 바야흐로 6월 그때에도 6월은 어김없는 장마철이었다. 장마는 모든 쇠라는 쇠는 다 녹슬게 했을 것이다. 총이며 대포며 전투기까지. 고장 난 총으로는, 녹슨 대포로는 어쩌지 못하겠지하는 자연의 순진함 따위는 비웃으며, 자연이 그렇게 말려도 전쟁은 그칠 줄 몰랐다. 한해가 가고 또 한해가 가고 또 가고 다시 또 갔다. 자연의 도전을 사람의 열광과 맹신은 간단히 이겨냈다. 쇠의 녹도 눈물을 흘리며 전쟁을 말렸지만 전쟁은 계속됐다. 소금장수는 울리고 우산장수는 웃게 했다던 6월 장마는 모두를 울게 했다. 그래도 모자라 통곡하고 절규하게 했다.
이 참혹한 대지에 전쟁을 지우고 무엇을 말하랴. 전쟁을 반성하지 않고 무엇을 전망하랴
전쟁을 체험치 않은 이에게, 추체험할 기회를 가져보지도 못한 이에게, 그나마도 거부한 이에게 유엔사는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이 모든 대지가 지금까지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유엔사의 무혐의는 찾아볼 수 없다. 유엔사와 같은 실체를 곁에두고 우린 항상 다른것에서 그 실체를 찾으려 했다.
대인지뢰
대인지뢰문제를 보자. 대인지뢰의 가장 많은 수는 한국전쟁때 매설되었고 이때는 유엔군사령부가 작전지휘권을 행사할 때였다. 육군본부가 1970년 발행한 육군발전사에 의하면 1950년 당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인지뢰는 7600개, 대전차 지뢰 360개 뿐이었다.(육군발전사 상권 1970 육군본부 p207~208)
그러나 미군의 한국전 참전기록에는 미군이 어떻게 해서 한반도에 백만개가 넘는 대인지뢰를 매설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과거 지뢰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이 밟은 대인지뢰는 한국 전쟁 당시 유엔사의 작전 통제권 하에서 매설되었거나 비행기에 의해 살포된 것들이었음이 당시 거주하던 주민들과 군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다음은 그동안 민간인들의 증언으로만 확인되던 한국전 당시 미군들의 지뢰매설 상황이 어떠했는지 미군들 스스로의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한국에서의 전투지원 (Combat Support in Korea)by captain John G. Webstover 1955 -combat forces press- p.58~66의 내용/65야전 공병대대 S-2 중위 샘 D. 스태로빈
1. 지뢰란 양면성을 띈 무기이다. 적당히 사용하면 강력한 방어수단이 될 수도 있고 잘못 사용하면 재앙이 될 수도 있다.나는 최소한 150대의 사용 불가능한 북의 탱크를 보았는데 이들 중 한 대도 지뢰에 의해 파괴된 것은 없었다. 나는 또한 수많은 미군 탱크와 트럭들이 우리 자신의 지뢰에 의해 파
괴된 것을 볼 수 있었다.
2. 미군 지뢰전 교리는 흠 잡을 데가 없으나 8군이 120.000발의 지뢰를 부대에 보낸 후 불과 20.000발만이 보유하고 있거나 매설 기록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100.000발은 버리거나 기록도 하지 않고 매설되었다.
3. 보병들은 가끔 우리 중대에 그들 정면에 공간이 생긴 곳에 무엄호 지뢰지대를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보병 지휘관들에게 이것은 건전한 방법이 아니라고 조언을 했지만 수차에 걸쳐 강압적인 이들 지휘관의 고집에 못 이겨 지뢰지대를 설치해 주었었다. 내 개인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런 일이 타 부대에서도 자주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6. 특히 지뢰지대를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 한국전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지뢰가 매설된 지역에 다시 돌아오기 전에는 정확한 지뢰지대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가 깨닫지 못했다. 우리가 무분별하게 지뢰지대를 설치한다는 것은 이미 매설된 지뢰지대에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거나 또 우군지역 주민과의 친선을 도모할 생각이 전혀 없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을 하지 않고 지뢰를 매설했던 여러 부대의 예를 들 수 있었다. 또 급히 서둘러 철수하는 바람에 지뢰를 매설하라고 하면 이동중인 트럭 위에서 장진된 지뢰를 내어 던져 버리는 식으로 타락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7. 미 제 25사단이 1951년 3월 초에 한강을 도하할 때 우리는 매설기록이 없는 미군지뢰지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그 지역에서 작전하는 부대들을 찾아가서 지뢰지대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제3공병대대의 S-3가 철수해야한다는 압력에 못 이겨 기록을 하지 못 했던 의정부 근처의 부대가 설치한 지뢰지대가 있음을 기억해 냈다. 우리는 그가 지적한 지점에서 많은 차량들이 지뢰에 파괴되고 병사들이 죽음을 당했음을 알았다.
8. 아군보병들이 요덕동 도로를 따라 남으로 728고지를 향하여 철수하고 있을 때 적은 제 2,3지뢰지대를 통해 증강된 연대규모의 공격력으로 의기양양하게 공격을 가해왔다. 이 지뢰지대는 500여발의 대인지뢰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화기 화력으로 엄호되었었다.
36. 이 교전 후 전선을 축소하면서 우리는 계속 도로 대화구를 설치하고 지뢰지대를 증가시켰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지뢰 지대 당 500발정도의 대인지뢰가 매설되었고 8개의 지뢰지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대략 4,000발 정도의 지뢰가 한 국지전투에서만 사용된 것이다. 이들 지뢰는 전쟁 후 공식적으로 제거된 기록이 없다. 어디엔가 묻혀 있는 것이다. 이들 지뢰가 바로 여기저기 흘러다니며 사고를 일으키는 지뢰들이다.
또한 한국전쟁이후 가장 집중적으로 지뢰가 매설된 또한번의 시기는 1962년 쿠바미사일위기 직후이다. 쿠바 미사일위기는 대소련전선에서의 군사적 긴장으로 연결됐고 우리나라도 예외없이 이런 긴장은 적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파주 연천 양구지역등 주로 민통선에선 분명히 지뢰가 동시에 매설되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들 기록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2002년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과거 미군은 한국 전쟁 당시로부터 60년대까지 수십 곳의 주둔기지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였다. 그러나 70년대 전후 철수하면서 지뢰 제거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지뢰 매설 정보조차 한국군에게 이양하지 않아 미군이 매설한 지뢰로 인한 피해가 2002년까지 계속 되었다. 조사된 바에 의하면 그 피해는 21개 지역 100명에 이르며 김포, 파주, 연천, 철원, 고성 5개 지역 주민들은 집단피해를 당했고, 주한미군조차도 5명이 지뢰사고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78년 한미연합사가 창설되면서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이 이양되기 전까지의 대인지뢰의 모든 총체적 책임은 유엔사가 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