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5일째-경의선과 유엔사2004/06/25 1517
도라산국제역은 인천공항 규모의 건물로 지어지지만 유엔사의 비협조에 의해 시골 간이역보다도 못한 상태다.
경의선과 유엔사-전쟁사를 쓸 것인가 교류사를 쓸 것인가?
이시우
작은 것
비가 온다니 나의 일회용 집을 세울 자리를 찾아야한다. 우선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일산은 김포보다 지붕이 있는 의자 등이 잘되어 있다. 비나 햇빛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설을 나처럼 절박하게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나같이 일회용 집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이런 휴식시설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비는 잠깐 피하고 뛰어서라도 집에 갈텐데 그런 불편함은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저 시설들은 그런 불편함은 참지 말라 한다. 생활의 작은 여백을 메꾸는데는 민감하면서 더 큰 생활 파괴는 외면하고 있진 않은지.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중요한 사회에 들어섰다.
중학교때 나는 과학자가 꿈이었다. 일본 번역판 과학 문고가 쏟아져 나올때다. 양자역학의 가설 중에 드브로이 정리를 설명하는데 이런 비유가 있었다. 빚을 갚아야 하는데 큰 빚과 작은 빚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당연히 작은 빚을 먼저 갚고 큰 빚은 나중에 생각한다. 나는 그때 그 비유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집도 없는데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이 비난받을 때였다. 그런데 집은 언제 살지 모르니까 우선 그보다는 싼 차라도 사서 인생을 즐기자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집 없어도 차를 사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되었다. 아마 당시 일본이 지금의 우리와 같은 상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율
외부의 강제와 규율이 필요할 때가 있다. 아침의 자명종이나, 행진 할 때의 구호가 그렇다.타율은 사라졌는데 자율의 리듬은 생기지 않았을 때 우리는 다시 과거를 기웃거린다. 그런 과정에서 역사는 퇴행하는 것이다. 자율이란 스스로의 리듬이다. 즐거움을 통해 만들어지는 리듬이다. 리듬이 살아 있을 때만이 진정한 자율이다. 조직이 도와줄 수는 있어도 결국은 나만의 리듬이 자율이다. 의지로도 되지 않을 때 습관처럼 저절로 움직여지는 것이 율律이다. 자율은 인식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에 있어서 가장 높은 단계이다.
철도
경의선은 타율의 산물이었다. 교류의 기획이 아니라 전쟁의 기획이었으며, 전쟁으로 갈라져 있다가 다시 연결되려는 이 순간까지도 유엔사에 의해 제 명운을 규정받고 있는 서글픈 우리 민족의 운명이다.
1843년 파리에서 철도가 개통되었을 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탁월한 직관력으로 철도의 혁명적 성격을 간파했다. 그는 철도에 의해 공간은 살해당하고 시간만이 남을 것이라고 간파했다. 철도는 자연적 지리공간의 독자성을 파괴해 버린다. 타율이다
유럽이 ‘철도열풍’이란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어갔던 시기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철도의 팽창속도는 경이로웠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철도망을 보유하면서 선진공업국 대열에 합류했다. 철도의 확장에 따라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에 비로소 하나의 통일된 경제공간이 성립하게 되었다. 철도산업은 영국의 자본을 전세계로 실어날랐다. 유럽과 미국 인도의 철도는 대체로 영국의 자본, 자재와 시설, 그리고 건설업자들에 의해 지어졌다. 철도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조해냈다. 철도망은 식민지공간을 지리적 자본주의적으로 재편하는데 동원되었다. 문명의 진보로 포장된 근대세계는 그 속에 이미 분열과 갈등이 내장되어 있었다.
철도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나라는 미국이었다. 영국의 운송혁명이 일차적으로 면화산업의 결과였다면 미국에서는 운송혁명이 산업혁명을 이끌었다. 막스베버는 “미국의 문화는 유럽문화를 완성시킨 철도라는 존재와 함께 시작되었다. 단순한 형태의 보행로 이전에, 짐수렛길 이전에 철도가 황야의 사바나 지대로, 원시림으로 뻗어갔다. 유럽에서는 철도가 교통을 중개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는 교통을 만들어 내었다.”고 지적했다….유럽에서 교통수단의 기계화가 전통적인 문화경관을 파괴하는 것으로 비쳐졌다면 미국의 철도는 그때까지 가치가 없던 광대한 황무지를 황금의 땅으로 바꿔놓았다. 유럽철도가 이미 발전하고 있던 도시 사이를 연결했다면 , 미국의 철도는 새로운 정착민들이 서부의 프런티어로 삶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M.페란드의 말처럼 “미국이야말로 철도의 산물”이었다.
1770년부터 1840년까지 미국에는 서부개척의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있었다. 서부개척의 가장큰 피해자들은 인디언 선주민들과 야생의 들소떼였다. 미국군대는 인디언들을 학살하면서 개척자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으로 밀려났다. 인디언들의 주식이었던 들소떼들은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제레미 레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미국철도의 그늘에 가린 들소떼의 몰락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미국철도는 서부변경지대로 군대와 이주민들을 빠르게 실어날랐다. 소고기 수요가 날로 증가하면서 목축업자들은 동부은행업자들, 철도 군대와 공모해서 서부의 들소소탕에 나섰다. 들소가죽은 미국전역에서 수요가 많았다. 들소고기는이주민들에게 진미로 꼽혔다.1871년에서 1874년 사이 남부의 들소떼는 들소사냥꾼들의 손에 의해 대량 학살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들소사냥은 인기있는 스포츠였다. 1872년 5월 <덴버로키산맥 뉴스>지는 “지나가는 열차로부터 무자비하게 총질을 당한 버펄로들의 시체가 버펄로지대를 관통하는 철로 양쪽에서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다.1870년대말 서부대평원에서 들소떼는 멸종되었다. 인디언들과 들소를 몰아낸뒤 카우보이들이 고용한 목축업자들은 그곳에서 소떼를 방목했다. 미국역사학자 프레드릭 터너는 미국인의 서부이주를 “역사상 가장 거대한 소떼의 이동”이라고 불렀다.
서부개척시대의 사고방식은 지금도 이라크전쟁에 대한 미국대통령후보의 연설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존 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는 이라크를 진공상태로 놔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워드 진은 말한다. 도대체 이라크가 왜 진공상태란 말인가? 이라크 민중들이 살고 있는 엄연한 영토인데… 이는 마치 서부개척 시대에 수백 수천의 인디언이 살고 있는 서부를 “비어 있는 땅”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다. 그들은 서부개척시대의 사고에서 타자를 보는 시각이 단 일보도 진보하지 않았다.
(2004년 6월 ‘The Progressive’에 실린 Howard Zinn의 글 “What Do We Do Now”재인용)
철도와 군사
철도역을 중심으로 화물야적장, 조차장 등이 들어서서 도시는 거대한 공장이 되어갔다. 철도의 예기치 않았던 부산물 가운데 하나는 군사기술의 혁신과 대량 학살 기술의 진보였다. 철도는 곧 대규모 병력 이동의 수단이었다. 군대 이동속도가 혁명적으로 개선되었다. 철도가 병사들과 군장비를 실어나르기 이전에 서양의 구식군대는 매일 15마일 이상 이동하지 못했다고 한다. 철도가 등장하면서 대규모 군대는 기차로 하루에 100마일 이상 이동할 수 있게되었다.
군이 광범위한 지역으로 분산되도록 만든 또 다른 요인이 있는데 이는 ‘전쟁과 정복’을 목적으로 철도의 사용이 급증했다는 점이었다. 철도를 군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에 걸쳐 실험한 바가 있었다. 프러시아 육군의 마수로부터 바덴에 위치해 있던 혁명군이 탈출을 시도하던 1848~1849년 당시 오스트리아가 군을 동원해 올뮤즈에서 프러시아군에 수모를 안겨주었던 1851년도 당시 그리고 1859년과 1864년도의 전쟁에서도 철도가 이용되었다. 당시 철도는 접전이전에 군을 동원하고 이들군을 배치할 목적에서 사용되었다. 개개 철도를 이용하여 얼마나 빠른 속도로 동원 및 배치할 수 있을 것인지는 얼마나 많은 철도라인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문제였다. 두지점을 연결하는 철도라인이 하나 이상인 경우가 드물다는 점으로 인해, 그리고 군이 동원 및 배치의 문제를 철도를 이용해 해결하고자 함에 따라서 군의 대형이 넓은 지역으로 분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지휘관이 의도하는바 또는 이같은 분산이 초래하게될 결과와는 무관하였다. 퀴니그라즈 전역에서는 다섯의 철도라인을 이용해 동원 및 배치(상대방은 하나의 라인을 이용)해 이들 병사가 200마일 이상의 지역으로 분산될 수밖에 없는 측에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 여타 형태의 위협 또는 회유책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형태의 기술적 도구인 ‘철도’에는 임의로 수마일을 더 가거나 특정지역을 우회해 갈수도 있는 인간 또는 말과는 달리 융통성이 없었다. 따라서 그 이전의 전투가 인간의 직관에 크게 의존했다면 철도가 군 작전에 널리 사용되면서 과학 및 수학적 형태의 계산이 매우 중요해졌다. 군인. 무기. 보급물자. 기차들을 중간에서 조정하고 개개 철도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며, 특정부분에서의 병목현상을 방지하려면 나름의 전문성을 구비하고 있는 참모가 필요하였다. 이처럼 고도의 정교성을 유지하려면 군인을 열차에 승차시키고, 도착지에 도달해 하차시키는 과정에서 적의 간섭등과 같은 인적 요소가 개입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전선으로부터 어느정도 떨어진 지역에서 병사들을 승차및 하차시킬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철도를 담당하는 요원들은 군에서 저명한 형태의 참모 집단이 되었다. 이들 집단에서 시작된 관행이 전부서로 확산되면서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된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1866년도 당시의 관행에는 발전의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철도와 계급
바야흐로 철도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모순을 첨예화시켰다. 더 나아가 자본은 철도를 따라 세계를 돌면서 모든 국가들을 자본주의세계로 재편해갔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철도가 부르주아의 세계정복을 위한 첨병이라고 통찰했다. 철도에 상품을 실은 부르주아는 만리장성을 쳐부수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의 증오까지도 굴복시키고 만다.
대공업에 의해 더욱더 발전해나가는 교통, 통신수단은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진시키면서 작자의 노동자들을 연결시켜준다. 이런 연결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어디서나 동일한 성격을 띤 수많은 지방적 투쟁이 하나의 전국적 투쟁, 즉 계급투쟁으로 집중된다. 그런데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빈약한 도로망으로 연결된 중세의 도시민들이 수세기에 걸쳐 달성한 그 단결을, 현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의 덕택으로 수년안에 달성하고 있다.
50년이 넘는 전쟁상태를 단 몇 달안에 평화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있다는 점에서 철도의 연결은 전망있는 선택이었다.
철도와 민족
철도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못지 않게 세계에 기여한 점이 있다. 바로 민족의 출현이다. 민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발견이 전제되어야 한다. 국외자와 자신이 속한 집단사이의 차이가 발견됨으로써 하나의 민족적 정체성이 성립하게 된다. 19세기이후 제국주의의 패권 경쟁속에서 세계는 민족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간다.
철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사’를 열었다. 철도는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비서구권 국가에 산업혁명의 결과를 실어날랐다. 서구인들에게 세계사가 자신들의 패권을 지구적으로 관철시키는 과정이었다면 비서구권에서는 타율적으로 자본주의 세계로 편입되는 고난의 과정이었다. 마르크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지역에 전개된 생산력, 특히 여러 발명들이 그후의 발전과정에서 상실될 것인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교통의 확장에 달려 있다. 근접지역을 벗어날 수 있는 교통이 존재하지 않는 한 모든 발명은 각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데, 야만족의 침입과 같은 우연사나 통상적인 전쟁조차도, 발전된 생산력과 욕구를 가진 한 국가로 하여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우선 교통이 세계적으로 될 때만 그리고 그 기초로서 대규모의 산업을 가질때만 경쟁적인 모든 민족을 끌어들이고 획득된 생산력의 지속성이 보장된다.
조선지배의 첫걸음으로 일본이 주목한 것은 바로 조선철도였다. 우리가 통일의 첫걸음으로 주목한 것이 철도였다. 100년의 전쟁사를 매듭짓고 교류사를 완성할 경의선의 개통일 몇 달 뒤에서 몇일 뒤로 다가오고 있건만 아직까지 당사자들이 밝히는 최대의 난관은 유엔사이다. 새로운 철도사가 자율로 갈 것이냐 타율로 갈 것이냐의 경계에 유엔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