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민문연사건 상고이유서

상고이유서

98도 1813형사 3(차)부

제출인 : 이승구

1. 들어가는 말

이 시대를 함께 고민하며 살아가는 재판장님.
시대의 문제를 법이란 기준으로 예리하게 규정하시는 재판장님.
저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법이 두려워 졌습니다.
처음 노동현장에 침투한 주사파 조직으로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았을 때부터 노동이란 말이, 조직이란 말이 이렇게 낳설게 느껴지고 괴물의 모습을 한 그런 용어들이 저를 대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건의 배경을 제공했던 박홍총장, 김일성 사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김영삼 정권에 대해 증오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건 비상식이다. 이건 불합리이다. 때문에 결코 굴복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것은 정당하게 법적으로 역사적으로 평가 될 것이란 신념으로 어려운 재판을 이어 왔습니다. 그러나 1심과 항소심 재판을 거치면서 자신감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까지 얘기하는데도 진실이 전달되기 보다 글자 하나 수정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고 있는 판결문이 거스를 수 없는 벽으로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중에 진짜 주사파가 있엇던 것이 아닐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체사상에 감염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모든 것이 의심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사건의 회원들에 대해서도 불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났는데 생활에선 이미 다 잊혀진 일이라고 해서 갈수록 관심도 떨어지고 까마득한 후배였던 제가 책임을 지고 이 사건을 대표하게 된다는 것이 야속했습니다. 처음엔 적극적으로 도와주던 부인도 평범한 남편과 살고 싶다며 이렇게 까지 싸울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재판이 저에게 준 큰 형벌은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었고 외로움이었습니다.
항소심 판결을 받고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간 날 깊은 잠에 든 아들의 얼굴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우성이가 아버지에 대해 부끄럽지 않게 얘기 할 수 있게 해주자. 최선을 다하자. 돈을모으고, 자료를 구하고, 자문을 구하고
그리고 이렇게 서면으로 판사님과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1. 강령에 나타난 용어의 문제

우선 용어에 대한 관점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재판에서 강령에 쓰인 노동해방이니 자주,민주,통일이니 하는 용어가 이적단체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로 지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과학적 용어를 쓰게 된 배경과 그 진의에 대해서는 두차례의 재판 과정에서 자세한 설명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의혹이 가시지 않는 것은 용어사용에 대한 관점의 문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용어나 개념은 현실을 반영할 뿐아니라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 입니다. 예를들면 계급과 계층이란 개념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포함하고 있으므로서로 교환해서 사용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노민문연 강령에 나타난 용어나 개념을 이데올로기와 신념체계의 문제로까지 확산시켜 생각하는 데에는 아무 이의가 없습니다. 어떤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이데올로기적 판단을 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용의 분석을 위해 표면적 내용에 집중하는 방법은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아무런 설득력도 주지못합니다.
예를들면 [속도전]이란 말을 자본주의 경영비법에서 시테크를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작년부터 우리식의 개념으로 쓰고 있는 말입니다. [속도전]은 북한에서도 경제뿐아니라 예술에서도 지도원리로 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용어는 같고 객관적 내용도 일치하는 점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속도전 개념을 남한에서 똑같이 쓰고 있다고 보진 않을것입니다. 더구나 이적성을 물어 구속되는 일도 없습니다. 만일 검찰에서 수행한 방법처럼 속도전이란 말이 나오는 북한의 텍스트와 남한의 텍스트를만을 대조해보면 속도전의 원천과 목표가 수령이냐, 아니면 그룹의 회장이냐 하는 차이만을 빼면 거의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법집행의 형평성을 따진다면 그 용법의 이적성이 반드시 물어져야 할것입니다.
최근에는 정주영 회장이 북을 방문하고 와서 기자회견하는 자리에서 ‘이번에는 김정일 장군을 보지 못했다. 9월달에는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김정일 ‘장군’이란 공식적인 호칭도 아니고 북에서 쓰는 극 존칭입니다. 문익환목사가 방북했을 때 가장 요란스럽게 대응한 것이 ‘존경하는 김일성주석’이란 대목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과연 법집행에 객관적 기준이 있는가를 의심하게 까지 합니다. 그러나 용어사용에 대한 법집행에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용어가 가지고 있는 자체의 성질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는 용도’입니다. 용어는 사회적 맥락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용어나 개념은 이미 사용되는 순간부터 이데올로기적인 차별성을 고려하면서 사용됩니다. 중요한 것은 용어의 표면적이고 객관적 내용을 밝히는데 촛점을 둘것이 아니라 잠재된 의미까지 포함하는 맥락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분석에 영향을 미치는 맥락의 문제를 협소하게 규정해 버림으로서 ‘의미의 사회적 결정’과 같은 문제제기 자체를 막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예를들면 문익환목사의 김주석 발언에 대해선 그것이 문목사의 이적성을 표현하는 전부인것처럼 상징화 되는데 비해, 정주영회장의 김정일 장군 발언에 대해선 언급조차 안하므로서 이적성이 전무하다는 식의 극단적인 모순에 빠지게 되고 법집행은 형평성을 잃고 맙니다. 이것은 가치체계의 법적 표현인 법률이 다원주의적이고 다양한 가치체계를 폭넓게 수용하고 있지 못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는 법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 판단의 중심에 서있음을 인정하는 자기 반성으로부터 시작할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관점은 강령이나 개념과 같은 텍스트를 ‘개인’이 만들어 내는 자유의지의 결과물로 간주하는 견해를 취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일상생활에선 그와 반대로 주체없는 구조를 선택할 뿐입니다. 다음 논문의 부분을 발췌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전 사회적 의미망이 사회적 행위를 규정한다. 사회적 의미망은 이미 유사한 어휘들 사이에 차별성을 확립해 놓은 외적 체계이다. 사회적 의미에 규정되는 한에서 행위 주체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전혀 비반성적인 주체일 뿐이다. 사회적 행위가 서로 상이한 개인들의 서로 다른 행위 양식을 포함한다는 것은 행위의 자울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의 분할효과를 입증해주는 것이다. 행위자는 '의식' 속에서만 반성적 주체이다.왜냐하면 차별성의 체계에 의해 규정되는 비반성적 행위에서 주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중략) '말한다는 것'은 자유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체계에 통합되는 과정이다.이 관점에서 반성은 오로지 체계에 대해서만 행해질 수 있다. 체계에 대해서 수행되는 행위에 응하지 않는 것만이 체계의 질서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특정한 개인이 의식내에서 반성하는지 여부는 문제가 아니다.(논문 남북한 정치담론 비교연구,52쪽,연세대 대학원 전효관)]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용어와 개념 같은 텍스트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현상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분석을 할려면 그 용어가 쓰인 사회적 맥락에 대한 분석이 전제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속에서 반성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의 행위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 져야 합니다. 용어와 그 범위내에서 이루어진 실천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그렇습니다.

2. 과연 우리는 주체사상을 받아들이고 신념화 할 수 있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다음으로는 노민문연 강령을 당시 재야운동권이란 사회적 맥락을 분석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검찰은 노민문연을 주사파 조직으로서 규정하고 그 이적성을 묻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은 한 개인이나 단체가 만들어 내거나 도입한 것이 아니라 재야운동의 역사적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채택된것이므로 재야의 의식화발전 과정을 분석해 보는 것은 중요한 사회적 맥락을 분석하는 일이 됩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남쪽의 재야운동권은 주체사상을 소화할 지적풍토와 체계를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운동권의 역사와 구조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진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IMF에 대해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무대응 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진보적 목소리를 대변해 왔던 진보진영자체의 위기를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러나 IMF체제의 문제는 이미 사회과학운동의 초기에 제기되고 고민된 주제입니다. 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하면서 과학적 운동에 대해 고민하게된 운동권이 최초로 접한 서구진보사상은 서구의 사상역사와 반대로 진행됩니다. 즉 서구 진보운동이 헤겔에 대한 부정으로 시작해서 마르크스 레닌을 거쳐 스탈린에 의해 한 매듭이 지어지고 스탈린 격하운동과 더불어 진행된 서구유럽의 루카치나 프랑크푸르트학파 계열의 사회민주주의 사상, 그뒤의 68년 프랑스 5월혁명의 푸코, 라캉등의 세대로 이어 집니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운동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체계있게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독재치하에서 사상의 자유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번역가능한 서적과 사상을 먼저 경험하게 됩니다. 루카치등 독재치하에서 열려진 서적이 진보운동의 시작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68년 5월세대 이후의 경향인 남미의 종속이론등이 소개되고 이때 IMF등의 세계체제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과정에서 자본론과 레닌의 원전이 위험을 무릎 쓰고 소개 되었습니다. 조직형태로서 지하당 같은 개념이 생긴 것은 이때부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후 세계자본주의와 우리나라 관계 규명문제에서 진행된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주체사상이 소개 되었습니다. 여기까지의 현상적인 궤적을 보면 마르크스, 레닌사상이나 주체사상은 초기에 제안된 핵심 논쟁중의 하나인 IMF체제에 대한 비판적 극복을 이루어 낸 사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작 IMF사태가 발생하는 시점에서는 진보진영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대비나 경계에 대해 얘기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비해 서구의 수정주의라고 분류되는 사상가들은 IMF를 초지일관 감시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운동과 대안을 만들어가고 있었으며, 북한은 방향은 다르지만 사회주의 고수입장을 여전히 견지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에서의 사상적 뿌리는 파헤쳐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점이 한국의 진보사상을 분석할 때 서구변혁이론이나 주체사상과 같은 용어를 쓰고 있다고 해서 똑같은 변혁이론으로 분석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10년이상의 궤적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변혁이론은 대안이론으로서 보다 저항이론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김영삼 대통령 집권시절에 ‘세계화’라는 화두에 진보진영이 답하지 못하고 있는데서도 드러납니다. 독재에 저항하여 민주화를 주장하고 저항적 통일운동을 통해서 사회적 역할을 하려했던 시기를 제외하고 진보진영이 사상적 화두를 계속 지속 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진보진영의 사상운동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보면 저항 이데올로기의 성격이 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용어의 사용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반영이나 본질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그 용어를 씀으로서 얻어지는 정치적 효과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적 효과입니다. 다음의 예는 남북의 두 지도자가 저술한 내용입니다. 왜 운동권이 용어의 저항적 효과에 주목하는지 보겠습니다.

모든 일은 모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루어지고 그 결과 역시 사람에게로 귀결된다. 무슨 일이거나 사람의 머리와 손으로 출발되어 흥하는 것도 망하는 것도 결국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행동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다.(박정희 저[국민의 길]102쪽)

대중운동을 강화 발전시키자면 사람의 자주성과 창발성을 적극 발동 시켜야 하며 그러자면 결국 사람과의 사업을 잘하여야 한다. 노동계급의 당은 사람과의 사업을 잘 하여 사람들의 자주적인 사상의식과 창조적 능력을 높이고 대중운동에서 그들이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역할을 원만히 놀도록 하여야 대중운동을 확대 발전 시킬수 있으며 혁명과 건설에서 그 위력을 증대 시킬수 있다.(김일성의 [영도예술]40-41쪽)

87년이후 부쩍 증가한 [사람중심]이란 용어는 87년 6월항쟁의 결과 대규모로 진출한 대중운동을 포괄하고 지도하기 위한 정치적 용어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그 근원은 대중운동 내부에 있었습니다. 6월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등장한 [인간답게 살아보자]라는 구호는 그것을 개념화하고 일반화 하는데서 독자적인 사상을 형성하는데, 그 용어의 기원을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에서 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박정희는 대중운동의 측면에서 볼 때는 독재자로 낙인 찍혀 있었기 때문에 수용의 대상이 아닌 저항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재로부터 오랜 시련 끝에 승리감을 되찾은 사람들에게 독재자의 개념을 참고했어야 된다는 것은 억측에 불과할 따름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동으로 북한 지도자의 개념을 채용하게 된 것이다? 이런 논리가 바로 남북대치라는 맥락이 만들어내는 논리가 아닐까요? 두 국가의 [사람사업]에 대한 견해는 6월항쟁을 통해 성장한 대중운동에 참고는 될 수있을지언정 교시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두사람의 어록을 보겠습니다.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관계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다루는 관계입니다.인간인 피지도자로 하여금 지도자에게 기꺼이 따르게 하는 가장 긴요한 요소는 지도자의 인간성 그것입니다…. 솔선 수범, 희생의 정신, 그리고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또 협조할줄 알아야 하며, 아울러 성품이 고상하고 덕망이 뛰어나고, 언행이 일치하고 국가와 국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충성해야만 합니다(박정희저 [지도자의 길]58쪽)

인민적 사업작풍은 바로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인민대중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인민대중의 참다운 충복이 되기위한 데서 나서는 원칙적 요구들을 훌륭히 구현할수 있게 한다.인민대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무한한 헌신성으로 일관된 인민적 사업작풍을 세울 때 인민대중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그들을 겸손하고 소탈하게 그리고 원칙적이면서도 인간성 있게 대할수있게 된다.(김일성저 [영도예술]179쪽)

둘다 지도의 본질을 사람과의 사업으로 정의하는 한 지도의 목표보다는 지도자의 개인적 자질이 좀더 중요한 위상을 점합니다. 박정희는 ‘지도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다른 여러 사람보다 뛰어난 어떤 사람이 다른 여러 사람들을 가르키고 이끌어 가는 일’이라고 정의 합니다. 김일성 역시 ‘지도 문제는 다름 아닌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문제’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점에서 6월항쟁을 통해 성취한 대중운동의 성과는 국가적 규모의 지도를 생각할 수준도 안됐거니와 독재에 항거한 경험으로부터 체질적으로 위대한 영도자 ,지도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새롭게 성장한 사회적 집단인 대중운동 세력을 포괄하면서도 양국가와는 차별성을 갖는 개념으로서 [사람중심]의 개념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당과 수령을 기본전제로 하는 북한의 [사람중심] 개념과 한국 대중운동의 [사람중심] 개념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일치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북한에 대한 한국사회의 맥락에 대한 분석을 요구합니다.

3.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떤 사회적 맥락속에서 전개되어 왔는가?

당시 제도권까지를 포괄하는 북한에 대한 인식수준을 분석함으로서 노민문연 강령의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규명해 보고자 합니다.
1970년대까지의 연구는 연구라기 보다 정부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 주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특기할 것은 1980년대 중반이후 [북한바로알기운동]은 남한 사회의 마지막 보루였던 북한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찾게 되었다는데 그 상징적 성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말에는 이런 분위기를 타고 북한사회를 그들이 내세우는 이념에 기초해서 내재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물론 이 연구성과들은 북한 사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는 비판을 가능하게 하지만 연구의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제도학계를 중심으로 한 북한학회의 창립등은 북한이 없어져야 할 대상에서 이해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합니다. 이는 북한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시각을 해체하고 합리적 지식에 근거한 통일비용과 체제구상과 같은 논의들을 활성화시키고 있습니다. 북한은 감성의 영역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이전되면서 남한의 ‘타자’로 규정됩니다. 이는 북한의 지배라는 차원에 관심이 모아져 있음을 말합니다.
노민문연의 강령은 89년 북한에 대한 내재적 역사적 관점이 우세하던 시기에 위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우세하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긍정적인 면을 많이 드러냈다 하더라도 북을 찬양하거나 고무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재론적 방법론은 북에 의해서는 관념론적인 방법론으로 비판받는 것이며 그러한 비판은 남한에서도 예외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연구자들은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내재적-비판적 관점으로 수정합니다. 이종석씨와 송두율씨가 이를 주도합니다. 재야운동권의 북한에 대한 관점도 크게 이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송두율씨가 비유하듯이 남한정부편도 북한정부편도 아닌 경계인의 위치가 남한 대중운동의 솔직한 자리였습니다.
자주,민주,통일,노동해방, 미제국주의, 노동자계급과 같은 사회과학 용어들은 당시 재야 운동권의 분위기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개념들로 그 자체가 운동권의 영역을 틀짓는 사회적 효과를 갖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특별히 그런 용어를 비판적으로 하나 하나 수정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던 점은 분명 반성되는 것이나, 이미 구조화되어 있는 용어의 틀을 개별단체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간해방이란 말대신 홍익인간이란 말을 쓰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용어를 쓰면 마치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오해받는 분위기에서 설명을 하다하다 포기 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때문에 당시 노동조합 노보등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쓰이던 용어들을 사용한 것에 대해 개인이나 개별 단체의 자유의지라고 못박아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없습니다.

정리하면 용어는 검찰이 보는 것과 같이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용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인 강령자체와 북한의 문건중에 일치하는 부분을 짜맞추는 식은 올바른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분석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개념의 분석은 사회적 맥락에서 개념의 용도와 그것의 사회적 효과를 밝히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로부터 저는 대중운동세력이 가진 개념들의 이데올로기는 저항 이데올로기의 확산 효과란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회주의와 혁명의 차원이 아닌 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요구속에서 채택한 사회과학용어들의 투박함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과는 관계가 없는 것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노민문연의 강령이 처한 자리도 이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섬세한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이지만 그 긴장감을 잃는 순간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편향에 빠지게 됨도 아울러 강조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판사님의 진지한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4 노민문연의 활동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앞서 노민문연 강령의 이적성과 관련하여 용어와 개념을 사회적 맥락에서 파악해 주실 것을 부탁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노민문연 자체의 활동은 당시의 분위기로 환원되는 무의미한 것이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회적 분위기의 어쩔 수 없는 규정을 받으면서도 저희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성과를 반성하고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전국노동자대회등 대규모 행사에서 전문적으로 예술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노동자들이 창작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대규모 집단 공연을 만들어내자 그 뒤에 북한의 조직창작론이란 것이 소개되어 회자 되었습니다. 우리가 북한 것을 보고 실천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창작에 조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발견해 낸 것입니다. 거기에 전대협의 문화패들이 북한의 조직창작론이란 말을 붙이는 것에 대해 인정받는 기분도 들었고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말을 했던 전대협 문화패들도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통일노래 한마당 같은 것에 조직창작이란 말이 어느 순간부터 붙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들의 성과가 조직창작론이란 이름으로 불려지든 말든 북한문예론의 추종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지혜에 의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도 우리는 조직창작론이란 개념을 써야 했습니다.
자주문예운동이란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민문연은 한국에 주체사상이 보급되기 전부터 현장 노동자들과 함께 민족문화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현장에 기반한 자주문예운동론이 나온 것은 김형수 시인에 의해 90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분명 실체는 있었지만 보편적인 개념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 였기 때문에 이런 개념들은 쉽게 통용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차별성을 두는데서의 편리함 때문이기도 했고 뭔가 보편적 권위를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용어나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는 길은 다른 단체들과의 연대를 단절하는 길 밖엔 없었을 것입니다.
노민문연활동에서 북한의 문건에 등장하는 용어와 일치하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본다면 노민문연의 활동은 나름대로 창조적인 몫을 이 사회에서 담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문화]라는 개념을 전파하는데 역할을 한 것입니다. 당시 비슷한 단체였던 노동자문예운동연합과 서울노동자 예술문화단체 협의회에서는 문화가 아닌 예술의 개념을 주장했지만 저희들의 판단으로는 예술에 대한 기존의 전문적이고 고급화된 인상 때문에 노동자들이 주체로 나서기 어렵다고 판단, 더 일상적인 개념인 문화라는 개념을 고수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문화냐 예술이냐로 논쟁을 벌였던 당사자들이 90년대 들어서서 문화론을 다시 들고 나오는 결과를 낳았고, 관에서도 대중문화운동에 자극받아 제도권의 ‘문화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노민문연의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외부의 이론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을 깊이 이해한 토대에서 어떤 이론이 들어와도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방어하고자 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소박한 예술적 욕구에 대한 경험적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눈물을 흘렸던 일이 생각납니다. 청계피복노조가 88년들어 노조의 합법성을 찾기위해 노력할 때 였습니다.
청계피복의 어린 근로자들과 자신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보여주는 생활극을 짜서 합법성공청회때 발표하자는 의견이 나와 연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선배의 도움을 받아 연극반을 함께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일이 늦게 끝나서 서둘러 연습장인 전태일 기념사업회 문을 들어서는데 엉엉 우는 소리가 안에서 들려 왔습니다. 저보다 한참 어렸던 호일이의 울음소리 였습니다. 표정이 밝은 편은 아니었던 아이라 덜컹 걱정이 되어서 달려들어가 보았습니다. 무슨일인지 묻자 이번엔 다른 사람들까지도 복받쳤다는 듯이 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간신히 진정되고서야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원래 대본을 자세히 짤줄을 몰라서 저의 선배가 대충 큰 틀만 짜주고 나머지는 자기 생활을 상상해가며 채워가면 될거라고 했기에 우리는 별 수 없이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싱일을 하는 순이가 일하는 장면을 표현해보라니까 졸다가 미싱바늘에 찔리는 장면을 연기했답니다. 그러자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윤경이란 누나가 얼른 손가락을 미싱기름에 넣으면서 이러면 피가 좀 덜 날거야라고 얘기했답니다. 생활에서는 일상적인 일이었는데 연기를 해놓고 보니까 갑자기 자신들의 생활이 복받쳐오더랍니다. 연기하다가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어 버린 사연이었습니다. 그날 호일이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제게 말했습니다.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 알겠어요 형’ 그 말을 듣고 호일이에게 얼마가 가슴에 사묻힌 것이 있었는지 느끼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우린 서로 부등켜 안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표현이 서툴던 호일이는 놀랍게 자기를 표현할줄 알게 되었습니니다. 공청회날 우리 배우들의 연기에 장내는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10년이나 연극을 했던 선배가 연극을 보고 저의 뒤에 와서 조용히 얘기했습니다. ‘전문배우들 연기보다 더 감동적이다. 내가 뭘했는지 부끄럽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날밤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잠 못 들던 호일이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형식의 연기가 아닌 내면의 연기를 보게된 저는 잠시 전공인 사진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연기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감수성이 열리기만 하면 폭발하듯 능력이 터져나온다는 확신. 꼭 그것을 꽃피워 주고 싶은 생각. 이것이 저와 노민문연이 서툰 이론에 반대하면서 노동자 문화운동을 해왔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노민문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활동을 오래전에 그만둔 상태에서 이런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대북정책이 무원칙하게 적용되던 현실의 희생양이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강한 내용의 강령을 가진 단체들도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민문연의 활동과 그 이유에 대해서는 1심의 연성수 답변서와 항소심의 항소이유서를 참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판사님의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제출인 이승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