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와 ‘이정희’는 어떻게 국가보안법을 무릎꿇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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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와 ‘이정희’는 어떻게 국가보안법을 무릎꿇렸나?
[인터뷰]28개 공소조항 무력화…’법정콘서트 무죄’의 주인공 이시우 작가
문형구 기자 munhyungu@daum.net
입력 2012-11-26 19:48:30 l 수정 2012-11-27 14:3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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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작가
저명한 사진작가인 이시우 씨가 미군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결심한 것은 2001년 9.11 사건 직후였다. 그가 처음 시도한 형상화 작업은 주한미군이 보유한 핵무기에 대한 것이었다. 첫 2~3년간 무작정 미군기지를 돌아다니며 ‘정말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는 그는, 어느 지점에선가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하게 됐고 새로운 이미지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대한, 전혀 생면부지의 주제”를,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고 감당해야 하는 길을, 이시우는 예술가의 열정과 집중력으로 하나씩 극복해 나갔다. 그러나 그 고된 싸움의 정점에서 그가 마주친 것은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 그의 예술활동은, 미국의 핵잠수함, 열화우라늄탄, 화학무기, 작계5027과 같은 미국의 침략적 본성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에 대한 수사자료엔 주한미군 대테러담당관과 오산공군기지 사령관의 감정서가 첨부돼 있었다. 이시우의 활동이 안보에 위협이 되는 만큼, 그를 수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 때서야 명확히 깨달았다. 2004년부터 감청이 시작됐는데, 그 시발이 판문점에 있는 화학무기 표식을 보도한 다음이었다. 당시 미국은 안보리 결의없이 이라크에 쳐들어갔고, 그 침략의 가장 큰 명분이 화학무기였다. 그런데 주한미군이 화학 무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니, 미군이 발칵 뒤집어졌다”
ⓒ민중의소리 유동수 디자인실장
이시우 사건은, 정치사상·결사의 자유를 억누르는 국내적 요소만이 아니라, 미국의 활동과 관련한 장애요인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국가보안법의 실체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 사건의 극적인 반전은 더 흥미롭다. 2008년 1월에 있었던 1심에서 검찰은 10년형을 구형했지만, 피고측은 모든 피의사실에 대한 완전 무죄라는 쾌거를 일궈낸다. 국가보안법 6개 조항에 거친 28개 공소조항, 국가보안법의 백과사전이라 불린 사건에서 만들어진 가히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4년여의 도감청과 미행, 40여권의 방대한 수사자료로 무장한 검찰을, 이시우와 변호사 이정희(현 통합진보당 대선후보)는 이적표현물에 대한 국정원 대출과 초유의 슬라이드 재판을 창안함으로써 완벽하게 제압한 것이다. 이시우 사건은 이후 2심과 3심에서도 잇달아 승리하면서, 국가보안법 사건에서의 첫 완전 무죄 판례를 남겼다.
이시우 작가는 최근 본인의 재판을 주제로 이정희 변호사와 함께 한 대담집(『법정 콘서트 무죄』, 최진섭 씀, 도서출판 창해)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역사적 판결의 재판 과정과 국가보안법 및 그의 작품세계, 그리고 변호사 ‘이정희’에 대한 생각을 듣기 위해 23일 이시우 작가를 만났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다. 연락을 해야 하는데 휴대폰을 안쓰셔서 곤란했다. 혹시 도감청 피해 때문인가?
그런 면이 있다. 나중에 경찰 기록을 봤더니, 한 4년 정도를 도청했더라. 친구들과 나눴던 자잘한 이야기들까지 다 도청이 돼 있고, 그런 기록을 가지고 공격을 하니까… 정말 엉뚱한 , 아 이게 그런 뜻이었나? 제가 했던 말인데도 의아해 할 정도로 엮어놨다. 국가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국가라는 덩어리가 내 옆에 딱 붙어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휴대폰을 안 쓰게 됐다.
-그렇게 도청을 했으니, 지인들 중에 피해를 받으신 분들도 있겠다.
그렇다. 4년 간의 도감청을 통해서 검찰이 유일하게 하나 기소한 게 있다. 몇 년도인가, 1월초에 청년들이 금강산 사진 촬영대회를 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나도 거기 다녀와서 강화도 사는 친구한테 ‘공화국에 새해 인사 갔다왔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 검찰이 이게 이시우가 북을 자진해서 지원한 근거라고 제시했다. 그리곤 그 친구를 불러다가 심문을 하겠다고 나를 압박을 하는 거다. 저야 이미 각오가 돼 있으니 큰 문제가 없지만,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가 불려다니면서 피해를 보게 될 것이고… 아 그게 참 마음이 약해지게 하는 거더라. 그 친구를 소환하겠다고 계속 협박하면서 ‘묵비권 풀어라’ 이랬던 거다. 그 친구가 가장 피해를 많이 봤다. 그 후로는 집에 전화하셨던 분들께도, 제가 ‘전화를 자제하시라’고 오히려 권고해 드렸다. 다음부터는 전화가 거의 안 온다(웃음).
-2007년 봄에 연행 되기 전까지 몇 년 동안 감시를 당했고, 본인도 잊고 있던 행적들이 일기장보다 훨씬 자세하게 기록돼 있었던 것인데, 느낌이 어땠나?
어떤 분은 자서전을 써 줬다는 얘기까지 하더라. 어쨌든 ‘치부를 드러냈다’ 이런 건 감당할 만한데, 저조차도 잊어버렸던 부분들을 보고 있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국가와 권력이 나를 송두리째 보고 있었다. ‘기분이 나쁘다’라는 이런 것 보다, 항상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수갑 채울 준비를 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렇게 검찰에서 오랜 기간 준비를 해서 기소했다. 수사자료만 40여권이었다고 하는데, 최초의 완전 무죄판결이 나왔다.
완전무죄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당위는 있겠지만, 완전 무죄가 현실적으로는 어렵지 않겠냐… 가장 크게 걸렸던 조항들을 보면, 사진들에 대해 군사기밀 탐지, 누출 이게 한덩어리가 있었고 또 책 저술이 찬양고무다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이적 표현물 소지. 제가 연변에 갔다가 북한 책을 사 온 적이 있다. 가격이 굉장히 싸서, 공안에 뺏겨도 ‘별로 손해가 아니다’ 싶어서 동전 주고 사서 들어왔다.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지만, 변호사님들이 가장 어려워했던 게 사실 이적표현물 부분이었다. 또 하나는 회합통신으로, 일본 교포 중에 조총련 관계자나 한통련 관계자들 만났다는 거였다.
일단은 창작 표현의 자유라는 것을 과연 국가가 압박할 수 있느냐에 대해, 예술 창작의 자유가 승리한 것이다. 찬양고무 혐의 관련해선 오히려 판사가 더 적극적으로 변호를 하더라.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를 중심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고 검찰을 훈계할 정도였다. 마구잡이로 찬양고무 혐의로 잡아넣었던 것에 대해서 엄격한 기준을 수립한 것이다. 이적표현물 소지는, 변호사들도 ‘이건 자신할 수 없다. 법적으로 딱 걸리게 돼 있어서 어렵다’ 그러시더라. 그래서 처음엔 최고의 국가보안법 전문가들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저도 좌절할 수밖에 없더라. 나중엔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작심을 하고 내가 갖고 있던 똑같은 책을 국회도서관, 중앙도서관, 그리고 국정원까지 가서 대출 신청을 했다. 그랬더니 등록됐다고 책을 찾아가라고 하더라. 이렇게 가장 큰 컴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법리상으로는 가장 포기하기 쉬운 것인데, 싸워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조총련, 한통련 분들 만난 것은, 일상적이고 의례적인 접촉만으로 ‘회합통신’이라 볼 수 없다. 이렇게 나왔다. 그 뒤로도 판결에 힘입어 사교적 목적의 접촉은 정당성이 살아났다는 평가였다. 전체적으론 이정희 변호사가 당시 정리를 잘 해주셨는데, ‘평화적 감시권’을 인정받은 판례였다. 제가 주로 했던 작업이 평화를 가지고 사진 이론 작업을 쭉 했던 것인데, 대추리와 매향리 사건을 통해서 헌법상 ‘평화적 생존권’을 보장받았다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시민의 권리로 평화를 위한 감시활동을 한다는 측면에서 평화적 감시권을 인정받은 것이다.
-미군 관련 특종들이 굉장히 많다. 기자 입장에서 보기에, 보통의 노력과 집념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나고 보니, 제가 사진가이고 예술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런 걸 찾아냈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아서 할 말을 찾다보니 그런 것 같더다. 예술이란 게 관념적인 이론만 갖고 되는 게 아니고 현장에 가서 직접 찍어야지 완성되잖나. 또 현장을 증거사진 찍듯 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찾아내고 형상화시키는 것까지가 예술의 임무이다 보니… 새로운 이미지라는 것은 사실은 다 지나쳤던 것들이다. 화학무기 표식의 경우에도, 유엔사에서 초청을 해서 굉장히 많은 기자들이 저와 똑같이 그 앞을 지나갔었다. 그런데 나만 그 사진을 찍었고 이로 인해 미군이 완전히 뒤집혔던 거다. 다 익숙한 것들이라도 어떤 예술적 목표를 가지고 이미지를 만들어야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이론과 경험과 학습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예술적 감성으로 아주 미묘한 것을 잡아내는 것도 중요한 예술적 능력이지만, 제가 하는 작품들의 경우엔 고도의 지식과 경험, 훈련이 필요한 것들이다. 제가 추구하는 예술론이 그렇다. 제 생각은, 어떤 하나의 예술적 작품이 나오기 위해선 90%의 학습과 9%의 실천과 1%의 영감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 생각 때문에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리고, 거대한, 전혀 생면부지의 주제를 하나씩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처음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주한미군이 보유한 핵무기를 찾아내겠다라는 생각에서 작업을 시작했고, 2~3년 동안 무작정 미군기지를 돌아다녀 봤다. 그렇지만 경험을 많이 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무의미한 시간들이었다. 나중엔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지, 무엇을 관찰해서 찾아낼 수 있는 지에 대한 이론이 정립된 다음에야, 내가 매일 보고 다녔던 것들이, 다시 보이더라.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없던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런 모든 힘이 하나의 이미지를 찾아내기 위한 과정에서 만들어졌던 거 같다. 구체적 형상을 딱 찍어내야 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목표라든가 치열성 이런 게 남달랐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다.
-전인미답의 길이기 때문에 더 압박감이 심했겠다.
예컨대 독일 미군기지는 독일 경찰들과 숨바꼭질 하듯이 다녔다. 다른 나라에서 경찰에 잡혀가면 너무 복잡한 일이니까. 그런 문제들이, 같이 하는 게 아니라 혼자 해결하고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라서… 당시의 열정과 집중력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다시 하라면 할 수 있을까 싶다.
-2007년 봄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5개월 후에 10년 구형을 받았을 땐, 어떤 느낌이었나?
냉전의 망령, 분단의 망령이 나를 사로잡은 듯한 느낌이었다. 판결 직전엔 재향군인회 최고 임원들이 법원에 ‘이시우를 최고형에 처해 달라’고 탄원서를 공개적으로 제출했다. 판결과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거의 ‘불가촉천민’이 돼 버리는구나. 이런 느낌이었다. 당시엔 저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도 불편함이 느껴졌다. 재판정에서 정말 필요한 증언이 있었다. 모든 혐의를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결정적 증언을 해주실 분이 있었고, 굉장히 친했는데도, 결국 못나오시더라. 내가 이렇게 부담스러운 인물이 됐구나라는 게 굉장히 외롭고 슬펐다. 그 후로도 계속 되는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이시우 그러면 종북좌파의 핵심이고 빨갱이의 원흉이고 그렇게까지 낙인이 찍힌 상태라서, 저도 사람들을 만나는 게 부담스럽다. 그 분들께 해가 되지 않을까 싶고… 이 사건이 나기 전엔 일본 교포들을 만나면, 그 분들이 부담스러워 했었다. 자기들을 만나면 문제 될까봐. 그 때는 제가 ‘괜찮습니다. 무슨 문제가 됩니까’라고 오히려 위로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 입장을 다 알겠는 거다. 마이더스의 손처럼, 저 만나는 사람들이 다 감시받고… 저와 관련해서 국가보안법 사건이 두 건이나 터졌다. 저 때문에 파생되어 다른 분들이 힘들어지는 데 대한 죄스러움 때문에 사람 만나는 걸 절제하거나 기피하거나 그렇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 있었나?
해병대 중위 한 명은 ‘공산당 선언’을 자기 싸이 홈피에 올린 게 걸려서 실형을 받고 재판중이다. 너무 미안한 게, 이 분은 평소에 제 사진을 좋아해서 일부러 강화도 근무를 자원했다. 주말마다 해병대 근무를 쉬니까, 찾아오더라. 첫 번째엔 반갑게 맞았는데. 두 번 오니까 제가 좀 불안해지더라. 세 번째부터 ‘바쁘다’, 뭐하다 핑계로 안 만나니, 이 친구가 처음엔 좀 서운해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났는데 마침 강화도에서, 조봉암 선생이 명예회복이 되셔서 예술가들끼리 조봉암 선생 다녔던 길을 걷기로 했다. 이 친구가 여기 참여했는데, 그것 때문에 기무사 조사를 받기 시작한 거다. 기무사에서 싸이 홈피를 털다가 옛날에 올렸던 공산당 선언이 나왔고 이게 국가보안법으로 걸렸다. 공산당 선언이 지금 무슨 문제가 되나. 군인이 아니었으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텐데. 군대에서도 신망이 높아서, 동료들이 다들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별 일 없을 거다’ 생각했는데 결국 실형까지 받게 된 거다.
-원래 작업의 주제는 국가보안법이 아니지 않나. 그런데 미군 관련 작업을 하다보니 결국 덮쳐온 게 국가보안법이다. 무죄판결을 거치며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생각해 볼 계기가 됐겠다.
제 사건이 의미있는 사건이었던 게 그 부분이다. 국가보안법과 미국이라는 게 논리적으론 관계가 없잖나. 제 사건에서 검찰이 감정서를 쭉 보여줬는데, 용산 미군기지에 있는 대테러 담당관과 오산공군기지 사령관이 ‘이시우는 잡아넣어야 한다’면서 제출한 감정서가 있었다. 그 때서야 명확히 깨달았다. 2004년부터 감청이 시작됐는데, 그 시발이 판문점에 있는 화학무기 표식을 보도한 다음이었다. 보도 전에 유엔사 공보관한테 제가 확인했다. ‘오늘 판문점 초청행사로 공개했던 내용과 사진들을 보도해도 되느냐’ 물어봤다. ‘당연히 그렇게 하시라고 초청한 거다’라고 했다. 혹시 몰라서 미 대사관 공보관한테 또 확인했다. ‘공개해도 되냐’ ‘당연히 하셔야죠’. 그래서 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미국은 안보리 결의없이 이라크에 쳐들어갔고, 그 침략의 가장 큰 명분이 화학무기였다. 전쟁후에도 그걸 찾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런데 주한미군이 화학 무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니, 미군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리곤 그 다음해에도 취재신청을 했더니 이시우씨는 ‘비밀 위반’에 걸려있어서 취재 불허 대상이라고 통보가 오더라. 그래서 ‘당신들이 다 허용해서 보도한 거 아니냐’ 따져서 그건 풀었다. 그런데 겉으론 풀어놓고 수사가 그 때쯤 시작된 거다. 제가 볼 땐, 미군에서 직접 부탁하거나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사석에서 언질만 줘도 알아서 하지 않나. 어찌 됐건,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고, 미국의 압력이 국가보안법 사건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게 이 사건을 통해 보여졌다. 국가보안법의 국내적 요소 뿐 아니라 미국이 반미 세력, 그들과 불편한 세력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국가보안법이 쓰일 수 있다는 것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제 사건을 통해 반쯤은 입증된 셈이다. 국가보안법의 실체의 단면이 드러난 셈이다.
-사건을 맡게 된 이정희 통합진보당 전 대표와는 원래부터 친했나?
전혀 몰랐던 분이다. 처음엔, 딱 한 번 뵌 적이 있는 최병모 변호사를 찾아갔다. 사건을 맞아주겠다고 하셔서 최 변호사님이 맡는 줄 알았다. 이정희 변호사는 첫 인상이 너무 부드러우셔서, 과연 거친 국가보안법 싸움을 하실 수 있을까 좀 걱정스러웠다. 최 변호사가 빠지셔서 서운하다 이런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이정희 변호사가 ‘외유내강의 표본이구나’ 이런 느낌을 받게 된 계기가 있다. 보석 신청을 한 번 했는데 기각이 됐다. 그런데 또 하시더라. 보통은 한번 안 되면 포기하지 않나. 그런데 또 하고, 또 하고 그런 식이었다. 이정희 변호사가 그렇더라. 이건 법적으로 관철시켜야 하는 문제다라고 생각하면 끝장을 보더라. 놀랐다.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신념을 끝까지 적용시켜가는 진정성 같은 거였다. 재판이 시작되고선 또 놀랐다. 아주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검사를 압도해가는 능력이었다. 정말 눈하나 깜짝 않고 말이다. 검사는 흥분해서 막 길길이 뛰는데, 이정희 변호사는 차분하게 경청을 하다가 허점을 정확히 집어내서 상대방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걸 봤다. 단순히 지적인 능력 뿐이 아니라 핵심을 간파하는 데 있어서 놀라운 탁월함이 있었다. 또 하나는 학습능력이랄까. 제 재판이 워낙 방대한 자료여서 분야별로 변호사들이 나눠서 대응했지만 전체 주심변호사가 이정희 변호사였다. 그런데 그 전체를 모두 정확하게 꿰뚫고 검찰 측의 답변과 공격에 대해서까지 완전히 격파하더라. 이정희 변호사는 보통 재판 전날에 밤을 샜다. 밤을 새서라도 그 내용을 완전히 돌파하는 거다. 그런 지적 능력이나 판단력, 자기 신념에서의 진정성. 여튼 굉장히 놀라운 한 사람을 제 인생에서 만난 경험을 했다.
-재판에서 사진 작품을 슬라이드로 프리젠테이션했다. 그런 아이디어는 누가 냈나?
이정희 변호사가 냈다. 그걸 제안할 때도 놀랐다. ‘내 의중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기 생각과 일치시켜 놓고 있구나’. 이런 느낌이었다. ‘제 사건이 국가기밀 누설이 아니고 창작, 표현의 자유 문제다’ 라는 걸 설명드리면, 다른 변호사들은 ‘그건 법정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명분일 뿐이고. 뭔가 다른 게 있겠지’라는 그런 묘한 느낌을 줬었다. 그런데 이정희 변호사는 정말 나를 믿고 그에 기반해서 창작의 문제라는 걸 보여줄 재판의 형식을 창안해 낸 거다. 지금은 슬라이드 같은 것도 세팅이 돼 있는데, 당시만 해도 기계적으로도 설치가 돼 있지 않았다. 재판부가 ‘준비가 안 된다. 꼭 해야되겠냐’며 몇 번이나 미뤘다. 이정희 변호사가 집요하게 관철시켜서 결국 재판부에서 억지로 갖다놓고 시작이 된 거다. 그런데 재판의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바뀐 게 그 슬라이드 재판이었다. 영상으로 제가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설명을 하면서 변론을 하니까, 어느 순간 판사가 자기도 모르게 ‘아.. ’, 청중들이 있는데도 감탄사를 쏟아놓고 고개를 막 끄덕거리는 모양이 연출된 거다. 전적으로 그 전환점을 마련한 게 이정희 변호사의 창안이었다.
-진보당 사태 관련한 <진보의 블랙박스를 열다> 집필에도 참여했다. 계기가 뭔가?
사람마다 사건을 바라보는 단서가 각각일 텐데, 저 같은 경우는 이정희 대표의 눈을 통해서, 이정희 대표에 대한 아주 높은 ‘인간적 신뢰’에 기반해서 그 사건을 보게 된 거다. 사실을 확인하자라고 하는 이정희 대표의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전부 묵살되는 것부터, 사태의 진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정희’라는 인간의 성품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사실확인을 자꾸 주장하는 게 도리어 뭔가를 의도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렇게 계속 보도가 됐다. 그런데 이정희를 잘 아는 제 생각은 그랬다. 전혀 그 사건을 몰랐지만, 분명 이정희 대표의 말이 맞을 거다라는 신뢰가 있었다. 절대 사실에 기초하지 않으면 판단을 진행하지 않는 그의 성품이, 통합진보당 사태 당시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최소한, ‘이건 분명 잘못됐다’라는 확신을 갖게 된 거다. 최진섭 기자(‘진보의 블랙박스를 열다’ 편집인)도 제 느낌을 듣고 ‘이건 분명 뭔가 있다’라는 단서를 갖고 움직인 거다. 최 기자가 내게 가진 믿음, 또 내가 이정희 대표에 갖고 있는 믿음, 이런 인간적인 신뢰가 책을 만들어낸 거다.
-다음달 중순까지 주체사상(主體寫像:주체 담론의 미학적 상)전을 연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체제에 대한 도전의 의미인가?
그렇다. 국가보안법 사건을 겪고 이런 저런 제안들을 해봤는데, 대부분 반응이 ‘의견은 좋은데, 현실적으론 어렵다’는 거였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정체상태에 빠진 운동이다’라는 반응이었다. 스스로 패배주의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패배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런 정체상태 같은 거였다. 그럼 국가보안법의 틀을 비집고 ‘국가보안법을 가지고 놀아보자’. 국가보안법이라는 올가미, ‘금기의 영역’을 벗어던지게, 이걸 좀 자유롭게 해보자라는 ‘국가보안법 가지고 놀기 프로젝트’ 그런 걸 제안했었다. 그 때 생각했던 게, 첫째가 주체사상전이고, 두 번째가 헌법3조 ‘영토조항’을 가지고 작업해 본 거고, 다음이 국가기밀 부분이다. 최소 이 세 가지가, ‘국가보안법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의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문제로부터 출발해서 다뤄보자.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틈이 있는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 그 ‘예술적 상상력을 보여주자’라는 게 전시회의 취지였다. 사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도전이라고 하면, 넘지못할 벽과 같은 느낌인데, 그냥 가지고 놀기, 무력화시키고,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주물러버리는. 현실법적으론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무너뜨려보자라는 게 하나의 흐름이었다.
또하나는 이 주체사상전은 사실 제목만 딱 해도 강렬하잖나. 실제로 이 전시회 오프닝에 사람이 거의 안왔다.(웃음) 이전 전시회들과 비교해, 정말 극소수만 왔다. 주체사상이란 단어가 딱 우리사회에 던져졌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왜 우린 주체사상, 혹은 주체라는 단어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이 전시회를 하기 전부터 ‘이시우를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넣으라’는 글이 인터넷에 돌았다. 주체사상이라는 이름만 딱 걸었을 때도, 우리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저도 보고 싶었고. 정작 우리가 주체라는 담론를 고민하지 못하다 보니까… 지금은 철학의 시대적 화두가, 타자를 중심으로 한 주체에 대한 비판에서, 다시 주체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는 흐름이다. 주체에 대한 풍부한 논의와 담론이 필요하고 새로운 주체 개념을 찾아야 할 상황인데, 주체사상이란 금기에 딱 갖혀있는 것이다.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 미래의 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