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사진이길 원한다 [이시우]
사진영상의 해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지나갔다. 97년부터 신바람 사진교육연구소에서는 98년이 사진의 해가 되리란 예상속에 통일사진문화 건설을 위한 다방면의 준비를 시작했다. 사진교육, 사진이론, 대중사진조직등에서 철학과 미학을 바탕으로 5단계의 사진교안과 교재를 완성하고, 사진문화론, 남한사진문화, 북한사진문화, 통일사진문화에 관한 연구발표회를 가졌다. 대중 사진모임과 전문사진가 조직의 차이를 통일시켜가는 장으로서 사진교육연구소를 만들어 운영했다. 그런 성과를 바탕으로 97년 남북공동사진전 기획안을 민예총에 제출했지만 정작 북과의 회담에서는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들은 바가 없다.
사진학회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사진계라는 제도 밖에 서 있다는 것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리고, 함께 했던 회원들에게도 미안했다. 나는 개인전 같은 것에 처음부터 관심 도 없었고 권유한 적도 없었다. 그런 내가 사진전을 하게 된 것은 이름을 만들고, 사진 계에 다리를 놓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만약 사진계에 내가 다리를 놓는데 성공하면 그 안과 밖을 넘나들며 경계를 허무는 일을 하고 싶다. 나는 사진계가 우리 시대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계에는 황석영도 없고 윤이상도 없으며, 이응로도 없다. 예술가는 시대의 맨 앞에서 시대를 예감하고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예지와 헌신을 전제로 해서만 헤밍웨이의 저 유명한 말은 가능하다. “위대한 예술가 이면서 위대한 사상가가 아닌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이 말을 뒤집어서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지도자 이면서 위대한 예술가 아닌 사람은 없다.” 우리는 예술이 지도자의 선택과목에서 필수과목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술가는 그래서 시대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창작 기획과정-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은 사전기획에 의해 준비되었다. 사진교육연구소가 만들어지기 전에 신바람 사진분과에서부터 이 기획안은 제출됐다. 전문가와 대중작가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작업으로 시도된 조직 창작방법이었다. 우선 철저한 자료조사가 있고 답사를 통해 창작핵을 마련했다. 창작핵은 치열한 고민 속에서만 나왔다. 창작핵이 잡히지 않으면 몇 번이고 시간과 돈을 들여 답사를 갔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준비가 된 상태에 서만 촬영 길에 올랐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들이라 창작핵에 대한 설명은 차안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아무 말 없이 혼신을 다해 촬영에 임했다. 그렇게 촬영된 작품은 또 한두 주일이 지난 뒤에야 품평이 가능했다. 품평은 창작만큼이나 치열했다.
뭐가 잘되고 못되고의 기준을 창작 핵을 정면에 세워놓고 진행되는 품평이었다. 남들은 검열을 폐지한다는데 우리는 검열을 강화했다. 그러나 우리의 검열은 제도권의 검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창작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안내 하는 섬세한 배려의 과정이었다. 이런 사전 심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창작자를 중심에 두고 진행되는 품평은 생생한 창작과 교육의 과정이었다. 그 결과물을 가지고 우리는 사진집을 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회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우리 주제에 무슨’, ‘아직은 때가 아니다’. 사진계를 너무 거대하게 보는 소심함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나 또한 그 와중에 중심을 잃고 말았다. 첫 실패. 다음 작업의 디딤돌을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시회였다.
그러나 사실 이 작업의 99%는 신바람 사진분과 사진교육연구소 회원들의 성과이다. 서로에게 감동받고 이끌어 주던 과정이 없었다면 이 작업은 끝맺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1%의 공을 들여 100%를 만든 것에 불과했다. 처음의 기획에서는 많이 미완성인 100%. 그래서 이 사진집과 전시회가 짐스럽다. 함께 못한 회원들에게는 앞으로는 통크고 대담해지자고 말하고 싶고, 사진계에 계신 분들에게는 사진문화 대중이 주체가 되는 과정이 얼마나 힘겨운가를 이해하고 스스로도 의식 못하는 사이 권력이 되어버린 사진 계의 경계 허물기에 나서달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