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6월 카륜회의에서 주체사상에 입각한 항일운동 방침이 제시되고 난후 김일성에 닥친 최악의 시련은 민생단사건이었다. 1932년 2월 간도일대 조선인들의 민생을 챙긴다며 ‘자유낙토건설’을 명분으로 내세워 마치 조선인들이 만주에 영토야심이라도 가진듯한 인상을 풍겨 조선과 중국인민사이의 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민생단이 창립되었다. 밥을 흘려도 민생단, 밥을 물에 말아 먹어도 민생단,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민생단으로 몰아 무고한 사람들을 일제의 간첩으로 모는 꼬투리는 끝이 없었다.1) 중국인들은 조선족을 일본의 주구로 취급하며 조선족부락을 약탈했다. 1933년 6월 중공 만주성위의 순시원 반경우에 의해 민생단으로 지목된 박두만이 반경우를 사살하고 일제 토벌군을 끌어들임으로써 혁명근거지가 파괴됨으로써 박두만이 일제의 간첩이라는 주장이 먹혀들게 된다.2)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할지 모를 얽히고설킨 복잡함과 혼돈이 민생단 사건의 특징이다.3) 알랭바디우가 묘사한 ‘공백의 가장자리(edge of void)’에 조선인들은 위치해 있었다. 즉 아무런 법적 지위도 부여받지 못하는 처지의 공백상태, 그리고 그 주변에 거주하며 적의 적으로부터도 적으로 취급되는 이중구속의 위치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또한 아감벤이 말한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 ‘버림받은 생명’ 호모 사케르였다. 김일성의 업적은 포이에르바하처럼 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관조하는데 머물지 않고 직접 뛰어들어 해결했다는 데 있다. 그는 1935년 다홍왜회의에서 민생단이 주장한 배타적인 ‘민족’구호와 민족해방투쟁노선의 민족적 임무와 국제적 임무의 통일을 명확히 구별하고 반민생단투쟁 방침을 정리하여 제시했다.4) 민생단 문서를 불살라버렸다는 대목에서 그가 ‘민생단’이란 형식틀에 묶여 있던 ‘민족’을 극복하고 새로운 주체의 형식으로서 ‘민족’을 제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이를 어떤 기존공식이나 명제에 매달리는 것보다 자기나라 인민의 이익과 자기나라의 실정에 맞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원칙이라고 설명한다.5) 현대철학이 목격한 소외와 구속의 문제를 풀기 위한 원리로 헤겔의 구체성의 변증법과, 주체의 형식화를 고민해 본다면 반‘민생단’투쟁은 주목할 사례이다.
1) 한홍구, 「밥을 흘려도 죽였다: 민생단 사건-1」, 한겨레21 399호, 2002.3.6 2)김성호, 연변민생단사건 연구, (서울: 백산자료원, 1999), p.132; 한홍구, 「만주의 한국민족해방운동과 중국공산당-민생단사건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27권, p.253참조
3) 한홍구, 「그 긴밤, 우리는 부르지 못한 노래, 밤이 부른 노래」, 밤은 노래한다, 해제 (문학과 지성사,2008), p.326
4) 사회과학출판사 편, 정치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73), p.249
5) 사회과학출판사 편, 정치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73), p.1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