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도틀굴은 4.3항쟁 당시 토벌군을 피해 선흘리 주민들이 피신했다 피해당한 동굴이다. 4.3항쟁이 1차 진압되는 국면인 7월에 제주의 읍면장이 회의를 열어 공식 건의할 정도로 ‘빨갱이’란 말은 단순한 단어를 넘어선 첨예한 공포 그 자체였다.1) 이승만 반공독재의 최대 발명은 “빨갱이”라는 틀이다. 어떤 행위의 특징 때문에 빨갱이로 호명되는 것이 아니라 빨갱이라고 호명하면 빨갱이가 되는 것이다. 반공검사조차 이 수난을 피해가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호명의 주체는 절대권력을 행사한 이승만과 그의 위임을 받은 서북청년단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위임을 취소하는 순간 서북청년단장 김성주조차 죽음을 면치 못했다.2) 북한청년들은 빨갱이 사냥의 전위부대로 이용되었고 빨갱이란 덫에 걸려 결국 숙청당하였다. 이처럼 빨갱이란 호명은 누구라도 당장 국가와 국민의 ‘적’으로 만들 수 있는 마이다스의 손이었던 것이다. “빨갱이들이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아니다”는 식의 해명은 빨갱이란 형식틀이 패권을 행사하는 한 무의미한 항변이다. 빨갱이란 형식틀은 내용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빨갱이란 틀 자체를 극복하지 않는 한 빨갱이공포는 언제든 부활한다. 새로운 주체는 내용 뿐 아니라 형식을 창조할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1) 강원일보, 1948년 7월 2일자 2면
2) 박태균, 조봉암연구,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5), pp.202-207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