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은 미국대사 클레멘의 ‘민족자결주의’ 연설을 듣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보낸다. 장덕수는 2.8독립선언을 조직한데 이어 3.1독립선언을 추진한다. 마침 고종의 장례식과 겹쳐 3.1운동은 들불처럼 번지게 되고 이는 민족자결에 관심을 갖고 파리회의 모인 나라들에 알려지며 유라시아적 사건이 되었다. 서로 다른 계기들에서 출발했지만 3.1운동은 수많은 열망들이 하나의 꼭지점을 향함으로써 민족저항의 주체가 형성된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를 둘러싼 김규식의 놀라운 활동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미국의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은 레닌이 주창한 “민족․식민지테제”로 관심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고, 3.1운동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은 미국식 자유주의에서 소련식 사회주의노선으로 중심이 옮겨갔다. 3.1운동이 국내의 주체형성에 머물지 않고 유라시아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출발에서부터 유라시아적 의제와 형식,즉 유라시아적 주체를 품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