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주도 이르쿠츠크와 치타는 극동의 민족운동가들에게 레닌의 민족․식민지테제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지켜볼 시험대였다. 자본주의체제인 극동공화국의 설립은 시베리아내전시기 유라시아의 주도권을 관철시켜나가는데 있어서 레닌의 유연하고 정확한 정치전략을 상징하는 구상이었다. 레닌주의가 ‘이론의 정치화’와 ‘정치의 이론화’라는 두 축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설명된다고 했을 때 극동공화국구상은 정치의 이론화란 축을 설명하는 상징이 될 것이다. 또한 극동공화국은 2년밖에 존재하지 않은 단명국가였으나 러시아에서의 조선, 몽골, 중국의 독립운동전개에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1) 완충국가에 대한 구상은 이동휘의 상해파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던 크라스노체코프가 제안하고 주도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완충국가의 건설을 반대한 반대파는 이후 이르쿠츠크고려공산당의 지원자로 등장하는 슈미야츠키그룹이었다. 크라스노체코프와 슈미야츠키의 노선대립은 슈미야츠키의 승리로 끝나면서 레닌주의가 국제주의가 아닌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신호로 보였다. 자유시참변은 슈미야츠키와 손잡은 이르쿠츠크파에게 그 책임이 있었다. 스스로의 운명은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개척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은 자유시참변이 독립운동사에 던진 가장 큰 교훈이었다. 자유시참변의 비극은 세계의 곳곳에서 아직도 재연되고 있다. 버틀러가 난민 속에서 발견하는 ‘국가없음’(statelessness)의 존재는 지구화시대의 구성적 외부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특정한 민족적 집단을 우리로 지칭하고 그러하지 않은 민족적소수자를 타자로서 추방하고 배제한다. 이런 점에서 국가없는 자가 포박된 곳은 정치공간이 구성되기 위해 필수적인 외부, 즉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가 된다.”2)
1) 극동민족대회의 회기를 이용해 코민테른당국은 한국공산주의자들의 파쟁을 조정해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두가지 방향으로 노력했다. 한가지는 1923년 1월3일에 상해에서 임정의 장래를 놓고 열린 국민대표대회였다. 그러나 새로운 파쟁이 벌어졌다. 임정을 해체하고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창조파, 그리고 개조가 필요하다는 개조파가 대립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민대표대회는 코민테른의 의도와 반대로 가고 말았다. 코민테른이 시도한 또 한 가지의 방향은 1922년 11월에 베르흐네우진스크, 즉 울란우데에서 고려공산당합동대회를 열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파탄 나고 만다. 울란우데는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계기마다 방향을 전환하게 했던 장소가 되고 말았다. 결국 1922년 12월에 코민테른은 모든 파벌의 해산을 결정했다. 이와 동시에 소련은 러시아영토 안에 조선인의 임시정부를 세우려는 기도를 금지시켰다. 그 배경에는 1922년 말의 일본의 시베리아 철병과 러일협상이라는 새 국면의 전개가 깔려 있었다. 유라시아체계가 여지없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 주해연 역,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서울: 산책자, 2008), p.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