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프랑스 파리 개선문

주체-프랑스 파리 개선문

근대국가라는 법적체계의 시작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부터지만 정치적 근대체계의 시작은 1789년 프랑스혁명이다. 베스트팔렌조약은 자본세력이 주체였지만 프랑스 혁명은 인민이 주체였다. 혁명이 가져온 변화의 핵심측면은 지배에 있어 정치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상층계급에게만 한정되던 정치가 인민에게 개방되었다는 것, 인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이제 더는 정치권력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1)이 근대민주주의의 탄생인 것이다. 이처럼 ‘정치에 의한 지배’의 작동은 아래로부터의 인민의 투쟁으로 쟁취해 지배세력에게 강요된 것이다. 그러나 인민이 쟁취한 정치는 루미스의 말을 적용하면 도난당한다. 복고왕정의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프랑스혁명을 승인하는 오를레앙공을 새 왕으로 추대하는 1830년 7월혁명을 성공시킨 디에르(Adolphe Thiers)일파는 “오를레앙공이 받아 쓸 왕관은 프랑스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다.”2)라고 했다. 디에르는 인민의 자기지배를 대표자에 의한 지배로 전치시킨 것이다. 인민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위기에 처한 지배는 인민을 ‘주인’으로 만들어 인민에게 근대적 지배를 수용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선출’을 담당하는 ‘주인’으로 왜소화해버렸다. 인민은 스스로 정치의 주체임이 선포되지만 일정기간 자신을 지배하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노예’로 전락한다. 또한 근대 시민혁명으로 특정한 사회적 차별은 혁파되었지만 근대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 쟁점화되지 않은 많은 사회적 차별은 ‘주어진 것’으로 수용하는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가 현실화되었다. 여성, 이주노동자, 성소수자등 인민은 자신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차별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보유하며 정치적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차별의 정체성이 민주주의와 불화하지 않고 공존하게 되었다.3) 이처럼 ‘자기지배’라는 정치의 정의는 대의정치, 선출정치로 왜곡되었으며 이마저도 끝없이 소수를 배제하는 정치로 합법화되었다. 시민혁명으로 주체는 정치를 쟁취했지만 정치는 이렇게 도난당했고 주체는 배제되고 소외되었다.

1) 조르지오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서울: 새물결, 2008), p.47
2) 노명식, 프랑스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 1789-1871, (서울: 도서출판 까치, 1977), p.212
3) 조희연, 「한국적 ‘급진민주주의론’의 개념적․이론적 재구축을 위한 일 연구」, 데모스No.1, (서울: 데모스, 2011), pp.5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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