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가스 제조공장’ 흔적이 남은 오쿠노시마 이시우 2006/03/24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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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지운 독가스섬을 아십니까
[르포] 2차대전의 ‘독가스 제조공장’ 흔적이 남은 오쿠노시마
효도 케이지(dolmange) 기자

▲ 오쿠노시마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입던 방독옷과 방독면만 등이 독가스자료관에 전시돼 있다.

ⓒ 효도 케이지

연간 100만명이 방문하는 히로시마시 원폭 투하 폭심지에 있는 평화기념공원. 직선과 원근법을 이용한 이 커다란 공원은 일본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가 니시타 겐조가 2차 세계 대전 중 ‘대동아건설기념’을 주제로 구상한 것을 바탕으로 1954년에 완성된 것이다.

공원 중심에 있는 위령비에는 “편하게 주무세요. 잘못은 다시 하지 않으니까”라고 새겨져 있다. 위령비 뒤에는 세상에서 핵무기가 없어질 때까지 켜놓는다는 촛불이 있다. 위령비 정면에서 보면 그 촛불이 아지랑이처럼 원폭 피해의 상징인 원폭돔에 흔들려 보인다.

일본의 많은 학생들은 수학여행으로 이곳을 방문하고 매년 8월 6일에는 총리가 방문해 기원 행사를 한다. 원근법의 시각적 효과로 가득 찬 이 공원에서 회한의 집단의식과 위령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하지만 기념비에 새겨진 “잘못”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모한 전쟁을 기도한 잘못을 후회하는지? 혹은 아시아를 침략한 잘못을 후회하는지?

일본인 누구나 ‘히로시마’를 듣게 되면 조건반사적으로 “원폭이라는 비인도적 무기의 피해지”라고 상기한다. 그러나 히로시마에는 대부분의 일본인이 모르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지도에서 지워진 섬

▲ 독가스통이 있던 당시의 사진을 보이면서 설명하는 야마우치씨.

ⓒ 효도 케이지

히로시마시에서 동쪽으로 약 70km에 위치한 오쿠노시마는 다다노우미항에서 배를 타면 불과 10분만에 도착하는 둘레 4km의 작은 섬이다. 현재는 국립 휴양지로 지정돼 있으며 숙박시설과 해수욕장 등이 있어 가족 동반객들이 많이 방문한다. 한가로운 세토나이카이에 둘러싸인 섬은 흰 토끼가 많이 사는 등 목가적인 풍경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섬에 일본인들이 잊고 싶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육군 독가스 제조 공장터가 그것이다. 1929년부터 1945년까지 16년간, 이 공장에서는 6616톤의 독가스가 제조됐으며 이 섬은 군사기밀을 지키기 위해 지도에서 지워졌다. 이 섬에서 제조된 독가스의 절반은 중국 대륙으로 보내져 전쟁에 사용됐다.

나는 지난해 8월 오쿠노시마에서 역사 가이드를 하는 야마우치 마사유키씨의 안내로 독가스 제조공장의 흔적을 찾았다.

1961년에 시작된 휴양지 건설공사로 독가스를 만들던 공장이 있던 곳이 지금은 테니스 코트와 수영장 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발전소, 독가스 저장고 등의 흔적은 섬의 곳곳에 남아 있다.

야마우치씨는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라진 옛터를 설명했다. 제조된 독가스는 직경 2m, 길이 5m 정도의 탱크에 보관됐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저장고 금속의 파편이 널려 있었다.

이러한 곳을 휴양지로 만든 것이 놀라운 일이지만 더 놀랍던 것은 아직도 땅속에 독가스탄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개발할때마다 독가스로 오염된 것으로 추측되는 토양을 끊임 없이 파낸다. 파내진 흙더미는 섬의 한곳에 천 덮개 밑에 쌓여있다.

야마우치씨 말에 따르면 2차대전 후 독가스탄 처리를 맡은 화학회사 테이진이 약 65만발의 구토성 가스탄들을 오쿠노시마에 묻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섬의 일각에는 이러한 독가스 제조의 역사를 알리는 ‘독가스 자료관’이 있다. 독가스 제조에 종사하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중심이 돼 설립한 이 자료관에는 독가스를 제조하던 기계, 종업원이 입던 방독복, 독가스탄, 중국에서의 사용된 사진과 문서등이 보관돼 있다.

사회과 교사생활을 하다 퇴직해 현재 오쿠노시마 독가스 제조의 역사 연구와 가이드를 하고 있는 야마우치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이 섬의 독가스 제조실태를 조사하게 된 계기는 이 섬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의 건강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조사를 계속하는 가운데 히로시마에 대해서 피해의 측면 뿐만 아니라 가해 측면을 다음 세대에게 알려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섬에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들이 평화학습과 수학여행으로 연간 약6만명이 방문한다. 중국에서도 독가스전의 증언자와 연구자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 전시중 미난성가스 이페릿을 생산한 공장모습.

ⓒ 독가스섬역사연구소 야마우치 마사유키
온갖 독가스가 만들어진 곳

오쿠노시마에서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어떤 종류의 독가스를 만들었을까?

전쟁 당시 이 섬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소수의 기술자 외에는 “일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선전에 속아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동원된 히로시마 부근의 소년소녀들이 있다. 소년소녀들은 “독가스 무기는 고통이나 유혈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비인도적이지 않다”는 군의 거짓말에 속았고 또 오쿠노시마에서 일한 내용은 부모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독가스는 오쿠노시마뿐만 아니라 일본군 전체에서 암호처럼 색 이름으로 분류됐다. 예를 들어 최류가스는 ‘미도리(녹색)’. 호흡기와 점막을 해치는 구토성(재채기성) 가스는 ‘아카(빨간색)’. 피부·점막을 진물러 눈·호흡기·소화기를 해치는 더 강력한 미난성 가스는 ‘기(노란색)’라고 불렸다.

구토성 가스는 비치사성 가스라고 하지만 농도가 진한 경우 치사 능력을 가진다.

또 치사성이라고 하는 미난성 가스를 피하기 위해서는 방독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또한 냄새 때문에 방독복으로 온몸을 가릴 필요가 있다. 머스터드 가스라고 불리는 이페릿이나 루이사이트가 이것에 해당된다.

이런 독극물을 취급하기 때문에 독가스 공장에서 일하던 소년소녀들이 다치는 사고가 많았다. 2차대전 후 실시한 종업원 전체에 대한 건강조사에 의하면 만성 기관지염이나 폐암 등의 질병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 지금도 독가스에 오염된 것으로 추측되는 토양이 끊임 없이 파내지고 있으며, 이 흙들은 비닐 더미에 덮혀 보관되고 있다.

ⓒ 효도 케이지

일본군 독가스전의 실태

오쿠노시마에서 만들어진 독가스가 어떻게 사용됐을까?

일본에서 독가스전의 실태조사·연구가 시작된 것은 1984년으로 극히 최근 일이다. 역사학자 아와야 겐타로 교수가 1984년 미국국립공문서관(NARA)에서 독가스전의 증거 서류를 발굴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를 <아사히 신문>이 특종해 과거의 독가스작전이 일본 사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자료가 발굴된 이유는 일본군이 항복한 후 독가스 작전에 관한 자료·기록을 소각했고, 현재도 방위청이 보관중인 중요 자료는 비공개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군이 전쟁에서 독가스에 의존하게 되었는가. 일본의 독가스전의 연구는 아와야 교수나 종군위안부 강제징용 실증 연구로 알려져 있는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고 중국 연구자들도 현장조사, 청취조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1899년 체결된 ‘독가스의 금지에 관한 헤이그 선언’ 및 1900년 체결된 ‘헤이그 육군전쟁 협약’으로 독가스 사용이 금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 구미국가들간에 격렬한 독가스전이 전개되면서 100만명 전후의 사상자를 냈다.

그 반성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 여론은 독가스의 전면사용 금지로 흐르고 있었지만 일본군은 독가스 연구와 제조를 준비했다. 그 배경에는 1920년대 일본 경제 불황으로 일본군의 인원 삭감과 무기의 ‘현대화’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오쿠노시마에 육군 독가스 공장이 건설된 것이다.

오쿠노시마에서 제조된 독가스 무기의 원재료는 미츠이·스미토모·미츠비시·후루카와 등 재벌 기업들이 납품했다.

요시미씨 연구에 따르면 1930년 만주사변 이후 국지적이 벌어지면서 최루성 가스 등의 비교적 덜 독한 독가스가 사용됐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보다 강력한 구토성 가스를 사용하게 된 것은 1937년 발생한 중일전쟁 때였다. 국민당 군대의 반격에 시달리던 일본군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으며 특히, 전황이 나쁠때나 험난한 지형에서 침공할 때 독가스를 사용했다.

독가스 사용은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사용후에는 독가스통을 가지고 돌아오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서방 기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도시지역에서 사용을 피했으며 한번 사용할 경우 가능한 적을 섬멸(1938년 산서성 진남(晋南) 작전에서의 육군 지령)해서 증거를 은멸하라고 했다. 독가스로 괴로워하는 중국 병사들을 입막음하기 위해서 칼로 죽인 것은 이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즉 오쿠노시마에서 일하는 소년소녀들에게는 독가스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 좋은 무기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전쟁터에서 무자비한 섬멸전에 독가스를 사용했던 셈이다.

더욱 더 악화딘 독가스전

▲ 전후 오쿠노시마에서 독가스를 처리하는 모습.

ⓒ 독가스섬역사연구소 야마우치 마사유키
1939년 8월 관동군사령부 밑에서 중국 동북부에 사는 60여명의 중국인에게 청산가스의 생체실험을 실시했다. 게다가 그 즈음부터’기’ 즉 미난성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등 독가스 사용은 더욱 심해졌다. 특히 팔로군 게릴라에 시달리고 있던 일본군은 독가스로 복수했다. “다 죽여, 다 태워, 다 빼앗는다”는 삼광작전에서 침공·후퇴할 때 독가스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일본 독가스 작전은 마침내 국제사회에 노출되었다. 미국 저널리스트 잭 벨덴은 1941년 10월 후베이성 의창에서 국민당군과의 공방전에서 후송된 중국인 병사로부터 비정상적인 피부의 상처를 취재해 보도하면서 일본군의 독가스 사용실태가 구미권에 알려졌다.

이후 미국은 대일 독가스전 계획을 작성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본군은 이미 일본보다 강력한 독가스 무기를 보유하고 있던 미국의 복수를 우려해 미군이나 영국에 대해서는 극히 한정적으로 독가스를 사용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1944년 7월까지 비난성가스 등의 강력한 독가스를 사용했다.

일본이 동남아에서 미국에 대한 독가스 선제 공격을 벌인 데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일본 본토 공습 작전에서 당초 독가스 사용을 계획하고 있었다. 도쿄·나고야·오사카 등의 군사시설이 있는 도시마다 독가스탄을 투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정보다 빨리 원폭이 투하돼 일본이 항복하면서 대일 독가스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군은 전쟁범죄의 기소를 피하기 위해 독가스 작전에 관한 문서기록을 소각하고 남은 독가스 무기도 폐기하거나 투기했다.

책임 묻지 않은 전쟁범죄…독가스 피해 외면한 일본 정부

일본군의 중국에 대한 독가스 사용은 중일 양국이 비준한 ‘독가스의 금지에 관한 헤이그 선언’을 분명히 위반한 전쟁 범죄이다. 그러나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일본군의 독가스 사용은 여러 가지 증거가 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사처벌되지는 않았다.

그 배경에는 독가스 무기에서 우위에 서있던 미국이 소련과의 군사패권 경쟁에서 스스로 손을 묶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독가스전을 지휘한 지도자들은 연합국에 의해서 재판받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1997년에 비준한 화학무기 금지조약에 의해 10년 이내에 국내 외에 폐기된 화학무기를 처리하는 의무가 있다. 그 처리사업에 현재까지 약 485억엔(한화 4100억원)의 비용을 투자했지만 아직도 많은 독가스가 중국 각지에 남아 있어 기한인 2007년까지 끝내기 어려운 전망이다.

폐기된 독가스탄은 지금도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 일본에서는 2002년부터 2003년에 이바라기현과 후쿠오카현에서 땅에 묻힌 독가스탄을 파낸 사람이 피독된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도 투기된 독가스에 의한 사상 사고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2003년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에서는 일본군이 투기한 미란성 독가스캔을 땅속에서 파내다 44명이 피독, 1명이 사망한 사고가 일어났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국내 및 중국의 피해자들에게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치치하얼시의 피해자에게 폐기 가스의 처리라는 명목으로 간접적으로 돈을 지불하고 있을 뿐이다. 또 비치사성 가스를 사용한 것은 시인하지만 치사성 가스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종래의 견해를 바꾸지 않고 있다. 방위청에 보관되고 있는 자료의 공개와 피해자에게의 사과 등 일본 정부의 성실한 대응이 요구된다.

▲ 오쿠노시마 전후 독가스 처리의 모습(1946년). 증언자에 따르면 이 사진의 독가스탄들은 바다에 투기되었다고 한다.

ⓒ 독가스섬역사연구소 야마우치 마사유키

피해자와 가해자.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한국 학생들이 오쿠노시마를 방문한 뒤 쓴 기행문을 보니 일본이 자기 역사를 직시해 왔는지 의문을 든다. 고교생 최한결씨는 이렇게 썼다.

“60년간 이렇게 놓여져 있는 더미들을 보며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일본이 그들의 가해를 인정하고 피해를 말했다면 일본은 당당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 감추기에 급급한, 아직도 그들은 일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들을 보자니 몸을 비겁하게 수그리고 있는 일본이 눈에 그려졌다.”

그렇다. 일본 대부분의 역사교육은 피해의 역사를 보면서 함께 가해의 역사를 돌아보는 서로 다룬 시각의 균형이 부족했고 지금도 그렇다.

초등학생 이예은씨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독가스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며 “앞으로도 독가스와 같은 무서운 무기를 만들게 아니라, 세계와 하나 되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고 썼다.

그 글을 보면서 원폭돔 위령비의 비문 “잘못을 다시 하지 않도록”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http://www.peacemuseum.or.kr/) 주최의 2005년 히로시마 방문에서 길 안내 겸 통역자로 참가한 것을 기초로 쓴 것이고 위 홈페이지에도 기고한 것임을 밝혀둔다. 홈 페이지에는 학생 참가자들의 기행문이 게재되어 있다.

<참고 문헌>
요시미 요시아키, <독가스전과 일본군>, 이와나미 쇼텐, 2004
시마모토 야스코, <전쟁에서 죽는다는 것>, <<세카이>>2006년 1월호, 이와나미 쇼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