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과 원자탄 이시우 2005/08/23 345

http://www.ifins.org/pages/kison-hhlee%20publications70.htm

한국전과 원자탄, 맥아더만 사용 주장하진 않았다

이흥환(KISON 선임 편집위원)

지난 3월1일 국내 언론에는 6 25 전쟁 당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원자탄 사용을 요구했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 ‘맥아더, 6 25 때 원자탄 30여 발 투하 요구’라는 제목이 달린 이 기사는, 북한의 ‘통일신보’가 미 시카고 대학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글을 인용해 이 사실을 전했다면서 통일신보가 전한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고 있다. 아래에 이 기사의 첫머리를 그대로 인용한다. 인용문의 밑줄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필자가 그어놓은 것으로, 이 글은 바로 이 밑줄 부분의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6 25 전쟁 당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군은 총사령관에 임명되자마자 원자폭탄 사용을 요구했고, 그후에도 30여 발의 원자탄을 투하하면 10일 안에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또 맥아더 사령관을 해임한 뒤에도 원자폭탄 사용을 여러 차례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략) 이는 맥아더 사령관이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을 계기로 핵 무기 사용을 검토했고, 맥아더 사령관 해임의 주요 사유가 핵 무기 사용을 둘러싼 미국 정부와의 갈등이라는 그간의 알려진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이 인용 기사는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 임명 직후 원자폭탄 사용을 요구했으며 맥아더가 원자탄 30개로 전쟁 종결을 주장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맥아더 해임 후에도 미국은 원자탄 사용을 여러 차례 검토했다는 세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가 강조한 점 세 가지는 모두 사실과 거리가 멀다. 멀어도 한창 멀다. 우선, 마치 맥아더만이 원자탄 사용을 요구했고 워싱턴이 이를 반대했으나 맥아더 해임 뒤에는 워싱턴도 원자탄 사용을 검토했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6 25 당시 원자탄 사용 가능성은 개전 초기부터 정전협상이 이루어지던 시점까지 전쟁 전체 기간을 통해 워싱턴에서 시기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또, 맥아더의 원자탄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발언 내용은 처음 밝혀진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것이다. 정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에서 쏟아져 나온 한국전 관련 자료 곳곳에 맥아더의 발언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더구나 브루스 커밍스의 글이나 ‘통일신보’의 인용 기사문 그 어디에도 인용된 부분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브루스 커밍스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6 25의 참혹상이었다. 네이팜 폭탄 대량 사용으로 전투 지역뿐 아니라 민간인 거주 지역이 초토화되었고, 미 공군의 화력은 일반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공할 만한 것이었으며, 핵 무기 사용이 검토되었다는 사실마저도 이제는 ‘잊혀져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답보 상태에 있는 현재 북미 간 핵 문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6 25라는 과거 사례를 재조명하고 있을 뿐, 브루스 커밍스는 이 글에서 단 한번도 ‘이러이러한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는 말은 쓰고 있지 않다.

개전 이튿날 이미 원자탄 사용 계획 수립

한국전이 터지면서 워싱턴에서 ‘원자폭탄(A-bomb)’이라는 말이 처음 거론된 것은 미국 시간으로 6월25일 일요일 저녁이다(한국 시간 6월26일 아침). 오후 7시 45분 저녁 식사를 겸한 블레어 하우스(미 대통령 영빈관) 비밀 회의 내용을 기록한 국무부의 1급 비밀 해제 문서에는 이 회의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미 공군참모총장 밴던버그(Gen. Hoyt S. Vanderberg)가 원자탄 사용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 회의에는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해 애치슨 국무장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 해군 작전참모장 셔먼 제독 및 밴던버그 공군참모총장 등 고위직 14명이 참석했다. 이 문서의 제목[Korean Situation]처럼 한국전 발발 이후 한국 상황을 논의하기 위한 첫 고위직 확대 회의였다. 문서 일부 내용을 대화체로 재구성해 본다. 러시아 극동함대의 전력을 묻는 트루먼의 질문에 셔먼 제독의 상세한 브리핑이 있는 직후의 대화이다.

밴던버그(공군 참모총장): 북한군을 저지해야 한다. 소련이 싸움에 끼어들지 않으리라는 가정 하에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북한 공군이 나설 경우 우리 공군력으로 북한군 탱크를 전멸시킬 수 있다.
소련 제트기가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아주 가까운 공군 기지에서 발진할 것이다.

트루먼: 소련의 극동 지역 공군력은 어떤가?

밴던버그: (소련 공군력에 대한 설명 후)소련 제트기 상당 수가 중국 샹하이에 주둔해 있다.

트루먼: 극동 지역에 있는 소련 공군 기지를 분쇄할 수 있는가?

밴던버그: 시간이 걸리지만 할 수 있다. 원자탄을 사용한다면.

이 회의를 주재한 후 트루먼은 다섯 가지 지시사항을 하달한다. 그 가운데 네 번째 항목은 ‘공군은 극동 지역 소련 공군 기지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는(wipe out) 계획을 수립해야 함. 이는 실행을 위한 지시가 아니며 계획 수립을 위한 지시임’이다.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할 경우 핵 공격을 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였다. 남가주 대학 역사학과의 로저 딩먼(Roger Dingman) 교수는 ‘한국전 때의 원자탄 외교(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라는 글에서 ‘이 회의 참석자 가운데 그 누구도 대통령의 이 지시 사항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밴던버그는 소련이 자국 영토에 대한 공격을 당하지 않는 한 드러내놓고 한국전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워싱턴은 중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북한은 러시아의 종속국이지 중국의 종속국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6 25가 터졌을 당시 미국의 핵 능력은 소련을 능가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핵 폭탄 3백여 개를 비축하고 있었고, 소련 내 목표물을 향해 핵 폭탄 공격을 할 수 있는 폭격기도 292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소련이 1950년 말까지 비축하고 있던 핵 폭탄은 10~20개였다. 하지만 한국전 발발 당시 미국은 미 본토 바깥으로는 단 한 대의 전략 폭격기도 내보낸 적이 없는 상황이었고, 미 전략공군사령부(SAC, Strategic Air Command)도 모스크바를 항복시킬 수 있는 핵 공격을 준비하려면 최소한 3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핵 폭격기를 발진시킬 수 있는 적절한 전진 기지가 없고, 미 본토 바깥에서의 작전에 필요한 폭격기 연료 공급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즉각 사용 가능한 핵 무기가 한반도 인근에는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이 일어나자마자 이튿날부터 핵 무기 사용 가능성을 전쟁 수행 계획에 포함시켰고, 이 가능성은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로 바뀌면서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한국전에서의 원자탄은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였지, 사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또, 미 군부 지도부든 정치권 지도자든 원자탄의 사용 시기와 방법, 사용 지역(한국 내냐 아니면 중국, 소련이냐) 등에서 내부 이견이 있긴 했으나 원자탄이 군사 외교 정치적 측면에서 한국전에서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된다는 점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워싱턴 정치 드라마의 훌륭한 소도구

워싱턴에서의 핵 무기는 군사용 전략 병기만이 아니었다. 한국전에서의 원자탄은 민주당 트루먼 행정부가 공화당 보수파와 맥아더를 상대로 펼치는 숨막히는 정치 드라마에서 써먹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소도구였다.

트루먼의 핵 공격 계획 수립 결정 이후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맥아더에게 핵 무기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권한을 위임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합참 내부에서는 맥아더에게 권한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결국 브래들리는 합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트루먼의 백악관도 애치슨의 국무부도, 심지어 펜타곤 군부도 맥아더를 신뢰하지 않았다. 우선, 대규모 병력 투입으로 한국전 확대를 주장하는 맥아더는 외교 군사 전략에서 유럽을 우선시하고 있던 트루먼 행정부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더구나 맥아더가 결정적인 전황이 아님에도 핵 무기를 사용할 시점이라는 그릇된 판단을 할 수도 있었다.

한국에서의 원자탄 사용 여부 및 시기와 방법 등을 놓고 백악관의 트루먼 참모들은 의견이 심하게 갈려 있었다. 국무부의 정책수립팀(PPS, Policy Planning Staff)은 머리를 맞댄 끝에 ‘모스크바나 베이징이 전쟁에 개입해 군사적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 한해 한국 내에서 원자탄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던 상황이었다. 핵 무기 비축고를 관장하는 특수무기프로젝트 팀장은 ‘북한군에 의해 미군이 한반도에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면 핵 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소극적 사용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1950년 7월 낙동강 전선 밑으로 밀린 한국에서의 전황은 악화일로였다.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키고 중국-타이완 분쟁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타이완 해협에 7함대를 배치시킨 전술도 결국 별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다. 7함대 사령관은 중국의 타이완 침공을 막으면서 동시에 한국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7월 중순, 원자탄 사용을 줄기차게 주장해오던 밴던버그 공군참모총장과 신중론을 펴던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같이 도쿄로 날아가 맥아더를 만난다. 콜린스는 이때 ‘군사 목표물에 대한 원자탄 사용’이라는 제목의 작전참모부 보고서를 읽은 뒤였다.

맥아더와의 3자 회동에서 콜린스는 한국에서의 원자탄 사용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자신이 원자폭탄 사용을 요청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핵 사용 명령이 떨어지면 72시간 내에 핵 무기를 손에 쥘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맥아더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주요 핵 공격 목표는 압록강 발전소였다.

밴던버그는 맥아더에게 중국군이 개입할 경우 퇴치 방법을 물었고, 맥아더는 ‘중국군을 북한 지역 내에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독특한 방법으로 원자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밴던버그는 그럴 경우 즉각 B-29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밴던버그는 브래들리 합참의장에게 전략공군사령부의 B-29를 즉시 한국으로 보내 북한 내 주요 도시를 폭격할 것을 건의한다. 하지만 브래들리는 이 건의를 거부하는 대신 전술 핵 폭격기 B-29 10대를 괌에 배치시킨다.

트루먼 행정부는 이 괌 배치 이전에 영국과 사전 조율을 거쳐 핵 폭격기 B-29를 유럽에 배치시킨 바 있다. 소련을 겨냥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영국은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다. 미국의 핵 능력을 과시해 소련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 핵 폭격기에는 핵 탄두용 핵심 부품은 실려 있지 않았다. 1948년 베를린 봉쇄 때 써먹었던 일종의 기만 전술이었다.

유럽에 이은 B-29의 괌 배치는 정치적 의도가 깔린 군사 전략이었다. B-29를 한국에 가까운 서태평양에 배치시킴으로써 브래들리와 트루먼은 두 가지를 노렸다. 하나는 중국을, 하나는 공화당과 맥아더를 겨냥한 것이었다.

우선 중국에게 강력한 신호를 보내 타이완을 넘보지 말 것과 동시에 장개석에게는 중국 본토를 공격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암시가 될 수 있었다(미국의 이런 의도가 중국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당시 맥아더는 워싱턴에 인천 상륙 작전을 건의해 놓고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맥아더 구상을 반신반의하고 있던 워싱턴은 확실한 답을 내놓지 않았고, 맥아더는 불평을 털어놓았다. B-29의 괌 배치는 이런 맥아더를 다독거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맥아더뿐만 아니라 공화당에게도 트루먼 행정부의 강력한 전쟁 의지를 보여준 셈이다. 공화당은 트루먼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을 미적지근하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공격했다. 트루먼의 대중 인기도는 하락세였고 확전을 주장하는 맥아더의 강력한 목소리는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상황이었다.

B-29는 압록강을 넘은 중국군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B-29의 귀환 이전에 국무부는 미 공군의 중국 내 폭격 목표물 선정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검토하고 있었다. 단순한 핵 능력의 세 과시 차원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닌 셈이다.

원자탄 사용 가능성의 세 번째 위기

1950년 11월,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은 원자탄 사용 위기를 또 한번 고조시킨다. 6월의 트루먼 지시 사항과 7월말의 비공개적인 B-29 이동은 기본적으로 적에 대한 억제력 발휘 차원이었고, 워싱턴은 이 억제 전략이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으며, 앞으로도 원자탄을 이용한 억제력의 효용성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군 개입은 한국전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트루먼은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핵 무기 사용에 대해 언급한다. 11월30일 기자 회견에서 트루먼은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겠다”고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핵 무기 사용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라고도 했다.

이때의 기자 회견에서 트루먼은 ‘현지 군 사령관의 책임 하에(in charge of)’ 핵이 사용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고, 이 말 한마디는 미 정계는 물론 국제 사회에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몰고 왔다. 핵 무기 사용의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이 그 책임을 ‘현지 군사령관’에게 떠넘긴 셈이었다. 영국의 아트리 총리가 워싱턴으로 날아오고, 트루먼의 숨은 의도를 궁금해 하는 워싱턴 정치판이 발칵 뒤집혔으나, 더 이상의 이렇다할 진척은 없었다.

하지만 펜타곤은 나름대로 한국에서의 핵 무기 사용 불가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군 전략가들이 내세우는 사용 불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중국군 개입 이전에도 핵 무기 사용에 대한 검토가 있긴 했으나 한국전에 대한 중국의 태도와 의도가 분명하지 않았으며, 적군(북한군)의 소규모 부대를 상대로 과연 핵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 확신이 서 있질 않았다. 게다가 대규모의 중국군이 한반도에 투입된 이후 펜타곤의 합참전략수립위원회(JSPC)에서는 중국군을 억제시키기보다는 방어하는 수단으로 핵 무기를 사용하는 것만이 합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둘째, 합참은 한국전 상황이 반드시 핵 무기를 사용해야만 하는 절박한 것이었느냐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번에도 합참은 두 명의 장성을 도쿄로 보낸다. 전술 핵 무기 사용을 탐탁해 하지 않았던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소련을 상대로 핵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미 공군 정보참모장 찰스 케벌 두 사람이었다. 맥아더는 한국 상황이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으며 핵 무기 사용 결정을 연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콜린스 육참총장은 워싱턴에 돌아와 한국전에서는 핵 무기가 필요하지 않다고 아예 공개적으로 언급해 버렸다.

워싱턴은 핵 무기 사용 시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도 계산을 해두고 있었다. 유엔을 중심으로 한 동맹 관계가 깨질 가능성, 아시아에서 미국의 신뢰도 추락, 중국과의 전면전 가능성 등이었다.

결국 대통령의 핵 사용에 대한 단호한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트루먼 행정부 고위 참모와 군 전문가들은 한국에서의 핵 무기 사용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1951년 1월 맥아더조차도 퇴각하는 유엔군을 방어하기 위해 핵 무기를 전진 배치시키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중국으로의 전선 확대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워싱턴 합참에 타전한 12월24일자 맥아더의 전문은 중국 해안을 봉쇄하고, 군수품을 공급하는 중국 내 산업 시설을 함포와 공습으로 휩쓸어버릴 것을 제안하고 있다.

맥아더는 또 펜타곤에 중국 내 폭격 목표물 명단을 보내면서, 이 목표물을 폭격하기 위해서는 34개의 원자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가운데 4개는 대규모의 중국 지상군에게 사용하려는 것이었고, 또 다른 4개는 ‘적 공군력이 밀집되어 있는 주요 기지’를 목표물로 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 영토 내에는 공군력을 밀집시킬 만한 주요 기지가 없었으므로 결국 맥아더가 언급한 목표물은 중국, 즉 만주 지역의 공군 기지를 일컫는 것이었다.

이 만주 지역 핵 폭격 구상과 관련, 존스 홉킨스 대학 작전연구실의 육군 비밀 연구보고서는, 중국군의 당시 총 병력이 120개 사단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34개의 핵 폭탄으로는 중국군을 제압할 수 없으며 360개의 원자탄을 사용할 경우에도 중국 총 병력의 30%에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엔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자연인으로 돌아와 있던 1952년 12월17일 맥아더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아이젠하워에게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던 한국에서의 핵 무기 사용 구상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만주 진입 지역에 30~50개의 원자탄을 떨어뜨린다. 우리 뒤로 동해에서 서해에 이르기까지 코발트 방사선 막을 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소 60년 동안은 북쪽에서 쳐내려올 땅이 한국 내에는 없게 되어 소련으로서는 할 일이 없어지는 셈이다.’

코발트 방사선이란 플루토늄 재처리를 통해 얻어지는 코발트 60을 말한다. 맥아더의 이 구상은 공상이 아니었다. 이미 워싱턴의 합참은 만주 국경 지역의 북쪽에 방사선 방역선(radioactive cordon sanitaire)을 형성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계획은 미 하원에서도 제안이 된 바 있다. 발의자는 2000년 미 대선의 민주당 후보였던 앨 고어의 아버지인 앨버트 고어 시니어 하원의원이었다. 고어 시니어 의원의 고향 테네시 주에는 오우크 릿지 원자력 실험실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우크 릿지 실험실의 핵 과학자로부터 이 코발트 60 방역선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51년 봄부터 워싱턴에서는 정전 협상에 대한 얘기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신경전도 점차 노골적인 대립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백악관이 정전협상에 대한 대통령 발표문을 다듬고 있던 순간에 맥아더는 공개적으로 중국을 향해 ‘더 이상 관대할 수만은 없다’고 포문을 열어 트루먼뿐만 아니라 참모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트루먼의 지지도는 26%까지 뚝 떨어져 있었다. 군 정보기관과 CIA의 정보 보고를 바탕으로 소련군이 증강되고 있다고 워싱턴이 입을 열면, 맥아더는 아니라도 맞받아쳤다. 중국군 비행기가 만주 비행 기지에서 대기 상태에 들어갔으며, 소련 잠수함이 블라디보스톡에 집결했고, 소련군 일부가 사할린 남부로 이동했다는 정보가 트루먼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공개적으로 이를 부인했다.

1951년 4월 초 트루먼은 마침내 세 번째 결심을 한다. 완전한 핵 탄두를 탑재한 B-29 전술 핵 폭격기를 태평양에 배치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4월7일, 99 중형 폭격기 편대에게 괌으로 이동시킬 원자탄을 탑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최종 폭격 명령이 떨어지면 오키나와로 날아갈 폭격기 편대였다.

이때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시킨다는 결심을 한 상태였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에게도 자신의 의중을 통보했다. 핵 폭격기 배치는 트루먼에게는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 트루먼이 핵 폭격기를 배치하지 않을 경우, 결과적으로는 현지 사령관 맥아더의 말(중소군의 증강이 없다는)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핵 폭격기를 배치한다는 것은 현지 사령관의 판단이 틀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따라서 맥아더를 해임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될 수도 있는 조처였다.

결국 트루먼은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처음으로 미 본토 바깥으로 핵 전술 폭격기를 내보낸 대통령이 되었고,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괌에 B-29를 배치시킨 후 워싱턴은 여러 갈래로 핵 무기 사용의 가능성을 높여나갔다. 전략공군사령부는 핵 무기 지휘팀을 도쿄로 파견했고, 지휘 사령관은 도쿄에 머물렀다. 언제 있을지 모를 핵 공격을 총괄하기 위해서였다. 트루먼은 맥아더 후임인 리지웨이 장군에게 한반도 바깥에서의 핵 보복 공격에 따른 지휘권을 넘겼고, 공화당 지도부에게는 핵 무기를 사용한다는 자신의 분명한 의사를 밝혔다. 한편 워싱턴은 베이징에 워싱턴의 의도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홍콩에 밀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트루먼이 움직이자 소련에서 정전 협상을 타진하는 신호가 들어왔고, 공세 일변도였던 중국군의 움직임은 방어세로 바뀌었다. B-29가 미 본토로 귀환한 것은 1951년 6월이다. 주 유엔 소련 대표가 유엔에서 정전 협상을 위한 문이 열려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기 직전이었다.

천의 얼굴을 한 핵 무기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반도에서의 핵 위기는 주춤하는 듯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핵 무기 사용 가능성에 관한 한 트루먼 행정부 때보다는 훨씬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소련의 핵 보복 능력이 커졌고, 해외 전진 기지가 적절치 못한 점 등 핵 무기 사용에 따른 제약이 여전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아이젠하워와 덜레스 국무장관의 핵 무기에 대한 입장이 트루먼-애치슨 때와는 차이가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선거 공약대로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조차도 핵 무기 사용 계획인 작전계획 8-52(Op-Plan 8-52)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리는 태도가 역력했다.

핵 전문가 사이에서는 한국전에서 핵 무기를 사용할 경우 미국의 핵 비축고 유지에 영향이 있다는 의견이 심각하게 대두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핵 무기 사용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약 판문점에서의 정전 협상에 진척이 없었을 경우, 즉 워싱턴이 수용할 만한 협상 내용이 도출되지 않았을 경우 한국전은 핵전으로 비화되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결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도 트루먼 때와 마찬가지로 정전협상을 진행시키면서 핵 무기의 유용성을 충분히 활용한 셈이다.

그러나 학계 일부에서는 미국의 이런 핵 억제력이 사실은 중국에 먹혀들었다고 보기 힘들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아이젠하워>의 저자 앰브로우즈(Ambrose)나 <한국전쟁>의 저자 버튼 카우프만(Burton Kaufman)은 미국의 핵 위협은 사실상 없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이미 미국의 핵 능력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며, 아이젠하워가 핵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핵 위협은 중국의 행동을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5월 소련의 일본 공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국가안보회의의 핵 비상 계획을 승인하기도 했지만, 한국전이 종전될 때까지 핵 무기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놓지는 않았다.

미국은 한국전에서 핵을 여러 형태로 활용했다. 국내 정치용으로, 외교용으로, 군사 전략용으로 그 활용도는 다양했다.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언어 ‘폭격’에도 핵 무기가 동원되었고, 핵탄의 핵심 부품을 빼놓은 채 핵 폭격기를 배치해 억제력을 발휘시키는 전술에도 동원되었으며, 실제 핵탄두를 탑재한 폭격기를 태평양에 배치하기도 했다.

공화당과 맥아더를 상대로 한 트루먼의 정치 드라마, 브래들리 합참의장 등 펜타곤 장성들의 대 아시아 군사전략, 펜타곤 군부와 민간 국무부의 세 겨루기, 중국 마오쩌뚱과 타이완 장개석의 대립, 스탈린의 대미 견제 등 얽히고 설킨 국내 국제 정치의 숨가쁘게 돌아가는 회전판의 중심축이 바로 한국전의 핵 무기였다. @KISON

<신동아> 2005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