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리 오폭의 진실① 이시우 2005/07/05 358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66048&ar_seq=1
적군 피해 0, 민간인 사상자만 136명
미군, 3차례 폭격 “성공적”으로 평가
[한국전쟁 산성리 오폭의 진실①] 도진순 창원대 교수 기고
오마이뉴스(news)
한국전쟁중인 1951년 1월 19일 경북 예천군 보문면 학가산 자락의 산간마을 산성리에 무차별 폭격이 있었다. 안동 MBC의 강병규 PD, 진보적 미국 지식인 션 매크로혼(Sean McCrohon)과 같이 이 사건을 깊이 추적한 도진순 창원대 교수가 3회에 걸쳐 쓴 ‘특종 자료로 보는 산성리 오폭의 진실’을 <오마이뉴스>에 연재한다. 이 사건과 관련해 지난 6월 28일 안동 MBC에서는 ‘산성리 폭격의 진실’을 소개했으며, 도 교수의 논문은 <역사비평> 가을호에 수록될 예정이다. <편집자 주>
▲ 1951년 1월 19일 경북 예천군 보문면 학가산 자락의 산간마을 산성리에 무차별 폭격이 있었다. 당시 마을에 남아있던 ’50 캘리버(Caliber) 기관총’ 탄두.
ⓒ2005 안동MBC 제공
1950년 말 한국전쟁에서 중국군 참전 이후 미군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미 공군력을 동원했으며, 대대적인 폭격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공중 폭격 문제를 제외하면 한국전쟁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없는데도, 지금까지 미군의 오폭(誤爆) 및 남폭(濫爆) 사건은 비중에 걸맞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행위자를 추적하기 힘들다는 점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전시학살 문제에 있어서 최대의 난관은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를 규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공중 폭격의 경우, 백주 대낮에 벌어져 설령 목격자가 많더라도 대부분 가장 기초적인 비행기의 기종이라든지 폭격의 횟수마저 잘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산성리 폭격’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관련 자료가 완벽하게 남아 있다.
최초·최고의 폭격 자료, 정찰임무보고서(MMR)
공중 폭격에 있어서 가장 선도적이면서 중요한 작업이 정찰이다. 정찰기는 폭격의 대상을 선정하고, 전투기와 교신하면서 연막탄이나 좌표로 표적(Target)을 안내하고, 전투기와 폭격기의 공습을 지시·관찰한다. 일반적으로 정찰기에는 공군인 조종사와, 지상의 상황을 잘 아는 육군 관측자가 동승해 임무를 수행한다.
이들은 기지로 돌아오자마자 정해진 양식에 따라 ‘정찰임무보고’(MMR; Mosquito Mission Report)와 ‘관측일지’(OL; Observer Log)를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때문에 공중 폭격에 대한 최초이자 최고의 자료는 바로 ‘정찰임무보고’와 ‘관측일지’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51년 1월 19일 산성리에는 14시 50분, 15시 40분, 15시 55분 등 세 차례나 공중 폭격이 있었다.
[1차 폭격] 네이팜(Nap)에 의한 초토화… 폭격의 근거는 폭발과 흰옷
▲ [문서 1] Mosquito Mission Report – Dade & Wolf.
4.FIGHTER WORKED AND RESULTS(Number, type, load, time)
폭격시각 호출부호 기수 기종 탑재무기 폭격결과
14:50 Onionskin 1103 4 F9F Nap Rx 50 Hit vill[age]at DR6457, Fires,explosion Exell[enct] Res[ults]. * []는 필자가 보완한 것
Onionskin 03 13 F4U
AD 500-250-Nap
200-Rx
50-200
Dest[royed] & burned remainder of houses in vill at DR6457. Exell Results. Numerous explos[ion] and fires, at DR5607 N to DR5275 vill and houses hit. 3 vill at DR5466 also.
5.OBSERVATION
A. Enemy : Many people in white in area of DR5466, DR5607, DR6457
ⓒ Mosquito Mission Report
[문서1]은 1951년 1월 19일 14시 50분, 산성리 첫 폭격을 관찰한 정찰임무보고다. 이 문서에는 조종사와 관측자 이름, 날씨, 가시거리, 이륙시각(T/O), 착륙시각(LAND), 비행고도(ALT), 목표지점 도착시간(TTT), 목표지점 정찰시간(TOR), 기지로 귀환한 시간(TR) 등 여러가지 정보가 자세히 기술돼 있다.
정찰임무보고에는 타겟을 지도상의 좌표로 삼아 지명을 표시하는데, 산성리 좌표는 DR6457이다. 정찰임무보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문서1]의 노란 박스로 표시된 4항(폭격 상황)과 5항(적정·敵情)이다.
위 문서의 4항(탑재 무기)을 보면 Nap은 ‘네이팜’, Rx는 ‘로켓’, 50은 ’50 캘리버(Caliber) 기관총’을 의미한다. 지금도 산성리에는 1951년 1월 19일 폭격에 사용된 네이팜탄의 껍데기, 로켓 탄환과 50 갤리버 기관총 탄환의 탄피가 남아 있다. 탑재 무기에서 주목할 것은 단연 네이팜이다. 네이팜은 2차대전 말에 처음 개발돼 한국전쟁 당시 일종의 신식 무기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이같은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베트남전에서 네이팜은 비인간적인 무기로 세계적으로 비난받았으며, 현재 사용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같은 문서 4항에 따르면, 이날 14시 50분 산성리 폭격에는 모두 18대의 전투기가 동원되었다. 어떤 신문에서는 호출부호를 비행기로 착각해 두 대가 공격했다고 하는데, 호출부호는 편대 이상의 공격조를 공통으로 호출하는 부호이고, F9F, F4U, AD 등 기종 앞의 숫자가 동원된 전투기의 대수이다.
위 문서에 따르면, 먼저 ‘Onionskin 1103′이란 호출부호의 F9F 전투기 4대가 네이팜탄, 로켓, 50 캘리버 기관총으로 산성리를 공습했다. 한편, ‘Onionskin 03′이란 호출부호의 F4U와 AD기도 동원됐다. F4U는 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단발 전투기로 콜새르(Corsair)라 불리며, 용량이 커서 대형폭탄을 탑재할 수 있다. 이날 14시 50분 18대의 전투기 가운데 13대가 콜새르(Corsair)이며, 주로 네이팜탄으로 산성리를 폭격했다. F4U가 산성리 네이팜 폭격을 주도했다면, 1대의 AD 공습기(skyraider)기는 로켓과 50 캘리버 등으로 이를 보조했다.
산성리 폭격 결과에 관해서는 “화재와 폭발(Fires, explosion), 대성공(Exell Res)”, “남은 집들 파괴·소각(Dest & burned remainder of houses)”, “대성공(Exell Results)”으로 보고했다. 한겨울 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산간 마을에 네이팜이 투하되면, “성공적으로” 화재(Fires)·파괴(Dest)·소각(burned)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폭격 결과 보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폭발(explosion)’이다. 즉 미군은 ‘폭발’을 탄약이나 기름 등 적의 군수물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해 산성리를 폭격한 근거의 하나로 제시했다. 더욱 웃기는 것은 [문서1] 5항 ‘적정(敵情)’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다”고 보고한 것이다. 폭격 당시 산성리 주민들은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했는데, 미군은 ‘흰옷 입은 사람’들을 주민이 아니라 적으로 보고했다. 이 역시 폭격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Onionskin 03의 14대 폭격기들은 산성리 외에도 DR5607 북쪽에서 DR5275까지의 마을과 집들, DR5466의 세 마을을 격심하게 폭격해 수많은 화재와 폭발이 일어났다. 이날 폭격이 산성리 외에도 여러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2~3차 폭격] 미군 “성공적이었고, 많은 화재가 발생했다”
▲ [문서 2] Mosquito Mission Report – Bottenfield & Neville.
4. FIGHTER WORKED AND RESULTS (Number, type, load, time)
폭격시각 호출부호 기수 기종 탑재무기 폭격결과
15:40 5013
Onionskin 5 AD 500 Nap 50 Hit vill at DR5607+DR6457 Exell coverage on both ft[fighter]s, many burns started
15:55 Utah A 4 F80 50 straf vill at DR6457
5.OBSERVATION
A. Enemy : 10-20 tps[troops] in vill at DR5276 to DR5066. Evidences of supplies and much traffic observed. Many guerillas rpted[reported]in this area.
ⓒ Mosquito Mission Report
이러한 ‘적정’ 보고로 이날 14시 50분 산성리 폭격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1차 폭격이 발생한 지 50분이 지난 15시 40분, 이로부터 다시 15분 뒤인 15시 55분, 산성리은 연이어 2~3차 추가 폭격을 당했다. 2~3차 폭격에 대해서도 ‘정찰임무보고’와 ‘관측일지’가 남아 있다. [문서 2]는 이 정찰임무보고의 앞부분이다(폭격 시간은 OL에 나와 있는 것이다).
먼저 [문서2] 4항을 보면 1951년 1월 19일 15시 40분 2차 폭격에는 5대의 AD 공습기가 산성리(DR6457)과 예천군 북쪽 산악지대(DR 5067)를 공격했는데, 이번에도 네이팜이 투하됐다.
그런데 5항 ‘적정’ 란을 보면 DR5276, DR5607 등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게릴라 등 구체적인 적정을 보고했지만, 산성리 DR6457의 적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즉, 산성리에 대해서는 적정을 보고하지도,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미군은 전투기 조종사, 정찰기 조종사, 지상통제반 어느 누구라도 적정에 대해 의심을 제기할 경우 폭격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 정찰기가 산성리의 적정을 부인했다면, 산성리에 더 이상 폭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정을 부인하지 않아 결국 “청소해야(clean out) 한다”는 지상통제반의 주장이 관철돼 산성리가 다시 폭격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이번 정찰도 역시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찰고도(ALT)가 최저 1000피트였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대로 된 정찰을 위해서는 300피트(91.44m) 이하의 저공비행이 필요한데, 이 정찰기는 적정 정찰 높이의 3배나 높은 1000피트(304.8m) 이상으로 비행했다. 이러한 무성의한 태도는 산성리에 대한 기존의 폭격을 정당화시키고, 나아가 추가 폭격을 초래하는데 일조했다.
2차 폭격 이후 불과 15분 뒤인 이날 15시 55분, 다시 단발 제트전투기인 F80 4대가 50 갤리버 기관총으로 산성리 일대를 공격했다. 14시 50분, 15시 40분의 폭격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해군 폭격기에 의한 것이었지만, 15시 55분의 폭격은 F80으로 미 5공군에 의한 것이었다. 3차 폭격의 경우 탑재 무기에 네이팜은 없고, 50 캘리버 기관총만 있었다. 즉 3차 폭격은 1~2차 폭격에 비해 경미한 것이었고, 마무리 폭격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연이은 두 차례의 폭격 결과도 “성공적(Exell coverage)”이었고, “많은 화재가 발생했다(many burns started)”고 보고했다. 과연 폭격은 성공적이었을까? 폭격 이후 한국군 2사단이 산성리를 방문했다. 그러나 적군의 피해는 하나도 없었고, 민간인 사상자가 136명이나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