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파견, 카투사 컴홈! -한겨레21 이시우 2005/05/31 199

2005.5.27 (금) 21:28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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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파견, 카투사 컴홈!

[한겨레] 세계 미군기지 그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군대
주한미군이 대체병력 필요하면 자기들 돈 내고 써야
▣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950년 8월. 피란민이 몰려 살던 대구와 부산의 거리. 한국군과 미군이 길 가던 장정을 불러세운다. 다짜고짜 소총(M1)을 메게 한다. 소총이 땅에 끌리지 않을 정도의 키를 가진 장정이면 그대로 징집됐다. 이들은 시 외곽의 빈 건물 등 집결지에서 대기하다가 일정 인원에 이르면 부산으로 보내졌다.

1950년 8월16일 이렇게 모인 ‘최초의 카투사’ 313명이 일본배로 부산을 출발해 8월18일 오후 일본에 도착했다. 그 뒤 매일 2천여명의 카투사 신병보충선이 부산항을 떠났다. 마지막 병력보충선이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것은 8월24일, 이때까지 모인 한국군 보충병은 8625명에 달했다. 일본에 도착한 카투사들은 요코하마항에서 기차를 타고 후지산 밑의 오덴바역에 도착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7사단이 텐트를 치고 훈련을 준비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카투사들은 면역처리 과정을 거친 뒤 피복을 지급받았다. 이들은 ‘K-’로 시작하는 군번만 가진 채 구체적인 소속도 없이 전투에 내몰렸다.

50년 미국의 강제징집에서 출발
한국전쟁 때 참전한 카투사들의 증언과 미국의 관련 자료를 분석한 <카투사의 어제와 오늘>(1993년, 주한미8군 한국군지원단)이 밝힌 ‘카투사의 탄생’ 풍경이다.

인천상륙작전이라을 앞두고 시급히 병력을 보충해야 했던 미 7사단은 궁여지책으로 한국인을 징집해 병력 부족분을 메웠다. 거리 징집만으로는 여의치 않자 피란민 숙소를 검색하거나 단체를 집단 징집하기도 했다. 일부 지원병도 있었고 대대급 규모의 경찰도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병역법의 절차에 따라 정식 입영할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으나, 실제 제2국민병에 의한 한국군의 강제 징집은 8월24일부터 시작됐다. 뚜렷한 기준도 없이 한국인을 미군으로 ‘강제 징집’한 것은 미국의 월권이었다. 이 과정을 두고 미국의 한 자료는 “총부리로 신병을 모집하는 적군의 강제 징집과 다르지 않았다”(, Robert leckie, 1962)고 표현했다.

55년 세월이 흘렀다. 2005년 5월17일 아침 6시 반. 용산 미군기지 캠프 코이너 앞 농구장. 원∼ 원, 투∼ 투, 스리∼ 스리, 포∼ 포… 힘찬 선창과 복창이 울려퍼진다. 2호수송대대 498중대원들이 근력운동과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한창 PT(체력단련) 중이다. 44명가량의 부대원 가운데 한국인 얼굴을 한 이는 18명.

4명은 한국계 미군이고 나머지는 카투사다. 대원들 틈에 끼어 땀을 흘리던 미군 여성 중대장 프리처드 브라운 대위는 “카투사들 체력이 정말 좋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반팔, 반바지 운동복에 야광 안전조끼를 입은 이들은 7시 정각이 되자 박수를 치며 훈련을 마쳤다. 미군들은 승용차를 타고 흩어졌고, 카투사들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숙소로 걸어갔다. 웃고 장난치는 이들도 있었고, 다른 중대 선임자에게 경례를 붙이는 이들도 있었다.

카투사(KATUSA·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the US Army)는 미군에 증원된 한국군이다. 한국군이면서 미군부대에서 미군과 똑같이 생활하고 훈련받는다.

인사행정권은 한국군에 있고 지휘통제권은 미군에 있는, 이중의 명령체계에 놓인 군인들이다. 세계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군대이다. 55년 세월을 건너뛰어 카투사의 일상 풍경은 괄목할 만하게 바뀌었다. 병영생활의 처우와 지위는 미군과 동등한 수준으로 개선됐다. 1950년에 최대 2만6021명을 기록했던 숫자는 2005년 3768명으로 대폭 줄었다. 그러나 바뀌지 않은 게 있다. 이들이 ‘누구인지’ ‘왜 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5년 동안 아무런 법적·제도적 근거 없이 운영돼온 탓이다.

과거의 카투사가 그랬다면, 미래의 카투사는 어떻게 될까.

이를 놓고 한국군과 미군, 한국의 국회의원의 주장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치닫는 풀리지 않는 3차 방정식 같다(상자기사 참조). 육군본부 소속 미 8군 한국군지원단장 김덕곤 대령은 주한미군 감축에 따라 카투사 수도 자연히 줄어들게 되므로 굳이 55년 관행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태도다. 찰스 캠벨 미 8군 사령관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카투사 수 유지는 필수적이며, 카투사를 감원해 미군과 1대1로 대체하면 전투력 유지가 어렵다. 유사시에 대비해 수천명의 카투사 예비군도 필요하다”고 말해, 현상유지를 강조했다. 국회 국방위 소속 임종인 의원(열린우리당)은 카투사 지원을 당장 중단하거나, 지원 제도를 유지하려면 한-미 양국의 협정과 국회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투사의 지위에 대해서도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군은 카투사를 “미군에 증원된 한국육군요원”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지위를 내세웠다. 미군은 “한국군과 미군 사이의 통역·연락 기능”이라고 보았다. 임종인 의원은 “불법 파견된 주한미군 대체병력”이라고 말했다.

‘카투사의 탄생’ 과정을 보면, 카투사는 주한미군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도입됐다. 대체병력이었던 셈이다. 캠벨 사령관은 이를 시인한 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카투사의 중요성이 바뀌었다”면서 “한국군과 지역민을 위한 통역 및 연락 임무”를 거듭 강조했다. 대체병력이냐 아니냐는 카투사 제도 운영을 둘러싼 논란 중에 가장 ‘날이 선’ 문제다. 대체병력으로 인정될 경우 카투사가 일하는 몫의 주한미군 인건비 절감액이 계산된다. 한국쪽이 그만큼 방위비 분담금을 ‘덜’ 내도 된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병력 충원 위해 도입됐지만 대체병력 아니다?
국방부는 지난 4월 국회 국방위 국방현안보고 서면답변에서 “카투사 문제를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미국쪽에) 간접지원 현황에 포함시킬 것을 제안해왔으나, 주한미군은 카투사를 대체병력으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간접지원 현황에 포함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또 “규모가 크다면 방위비 분담금 규모를 줄이기 위한 논리로 활용할 수는 있다”고 답변했다. 방위비 분담이 시작된 1991년 원화로 1073억원이었던 한국의 분담금은 1994년 2080억원, 1997년 3449억원, 2000년 4557억원, 2003년 6686억원, 2004년 7469억원으로 줄곧 늘었다. 올해 처음으로 예년보다 8.9% 줄어든 6804억원에 타결됐다.

카투사가 아무런 지위와 역할의 변동 없이 이어져올 동안 한국의 군 작전권은 더디지만 보폭을 옮겼다.

카투사 운영 실무를 다룬 미 8군 규정 600-2는 카투사 제도의 기원을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유엔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간의 비공식 협정에 따라” 시작됐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공식 협정의 내용을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 주한미군이 카투사 제도의 유일한 근거로 꼽는 것은 1950년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작전(지휘)권 이양 서한이다. 서한은 “…현 작전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며 여사한 지휘권을 귀하가 직접 행사하거나 귀하가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작전하도록 임명한 기타 지휘관으로 하여금 대행하게 할 수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독일 미군기지에선 민간노동자들이 담당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1954년 11월 ‘한-미 합의의사록’은 “대한민국 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 ‘통제’권에 둔다”고 정했다. 순수 군작전 때에만 지휘받는다는 뜻이다. 1961년 5·16 뒤 체결한 ‘작전통제권 귀속에 관한 공동성명’은 “작전권을 공산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위하는 데만 행사한다”고 제한했다. 이에 따라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권은 작전 때에만 행사되고 다른 군수행정상의 책임은 한국이 보유하게 됐다.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며 작전권 귀속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연합사령관은 미군이 맡았지만 한국군이 사령부 구성에 동등하게 참여하게 됐고, 한국 방위를 위해 배치된 부대에 대한 사령부의 통제는 한미군사위원회의 지위를 받았다. 1990년대 들어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돼 1994년 12월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국에 돌아왔다. 다시 10여년 세월이 흐른 2004년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화 정책에 따라 주둔군의 규모와 성격을 바꾸고 있고, 한국 정부는 자주국방을 앞세워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얘기를 꺼내에 이르렀다. 전시 작전권이 한국군에 넘어오면 한미연합사령부는 해체된다.

미군이 주둔하는 나라 어느 곳에도 카투사와 유사한 제도는 없다. 미군 7만명이 주둔하고 있는 독일을 보면, 미군을 지원하는 일은 모두 ‘미군이 고용한 민간 노동자’들이 담당한다. 월급과 복지·처우는 이들이 소속된 산별노조와 주독미군 당국이 직접 협상한다. 주한 독일대사관 무관 기브너 대령은 “이들은 부대 운영에 필요한 시설 보수, 기술·환경 정비, 보급 지원 일을 담당한다”면서 “통역 등의 전문인력 역시 미군의 필요에 따라 고용한다”고 말했다. 주독미군 기지에서 이런 일을 하는 ‘독일 민간인 카투사’(군속)는 9만명이다. 1991년까지 미군이 주둔했던 필리핀도 마찬가지다. 필리핀대사관 관계자는 “미군기지에 파견된 필리핀 군인이 있었으나, 이들은 기지 안전·경비를 담당했다”면서 “미군이 필요한 인력은 미군이 자체적으로 고용했다”고 밝혔다. 그는 “‘필리핀 카투사’들은 미군의 보조자가 아니라, 기지 안에서부터 밖을 지키고 또 밖에서부터 안을 지키는 안전요원들이었다”고 설명했다.

1993년 <카투사의 어제와 오늘>을 엮은 정성길 전 한국군지원단장(1993∼95년)은 이 책에서 “전쟁이란 급박한 상황에서 설립된 이 제도를 우리는 휴전 이후에도 관행적으로 존속시켜왔다”면서 카투사 존속을 둘러싼 법적 정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군대는 한 나라의 주권 원칙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국가 하부 조직임에도 한 나라의 군대가 다른 나라의 군대에 들어가서 존재하는데 아무런 공식적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 카투사 제도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카투사는 위대한 연락 기능”
[서면인터뷰 / 찰스 캠벨 미 8군 사령관 ]
전투 준비 태세 위해 수적 유지 필수적
찰스 캠벨 미 8군 사령관은 카투사의 지위를 한국군과 미군 사이의 ‘연락 기능’(liaison function)이라고 밝혔다. 카투사가 주한미군의 대체 병력인지를 묻자 “카투사가 없다면 ‘전투준비태세’(readiness)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만 답변했다. 카투사의 주한미군 대체 병력 기능을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나온 답변으로 풀이된다. 또 그는 카투사 제도의 폐지에 대해 “카투사의 수적 유지는 필수적”이라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한겨레21>은 5월12일 서면으로 취재 질의서를 보냈고, 찰스 캠벨 사령관은 5월18일 미 8군 공보실을 통해 비교적 신속하게 답변을 보내왔다. 미 8군 공보실이 번역한 한국어 답변과 영어 원문을 함께 싣는다. 카투사의 인사행정은 한국군이, 지휘통제는 미군이 담당하고 있다. 카투사의 배치와 관리는 어떤 규정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카투사 제도에 관한 모든 것이 미 8군 규정 600-2에 따라 운용된다. 이 규정은 한국 내 미 8군 부대에 배치되거나 소속된 한국군의 정책, 인사행정 절차, 관리, 교육, 훈련, 그리고 보급에 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The entire KATUSA program is spelled out in Eighth US Army Regulation 600-2. This regulation prescribes policy and establishes procedures for personnel administration, management, education, training, and logistical support of Republic of Korea Army(ROKA) personnel assigned or attached to 8th US Army units in the Republic of Korea. 미군이 머무는 다른 나라에도 카투사와 유사한 지원병력이 있는가. 미군은 많은 국가들의 군과 긴밀하고 전문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나, 카투사 제도처럼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그와 비슷한 예는 없다. Although the United States Army has shared close professional working relationships with many other countries’ armed forces personnel, none come close to equaling the scope and unique relationship engendered within the KATUSA Program. 카투사 요원들의 활동범위와 지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카투사는 주한미군의 대체 병력인가. 카투사 제도의 가치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카투사가 없다면 한-미 군간의 연락기능을 대체할 다른 수단을 증원해야 할 것이다. 전투준비태세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카투사 제도의 가치는 기본적으로 조국을 위해 복무하는 위대한 젊은이들이 가진 연락기능이다. 이들은 전투준비태세를 확립하고 방어력을 증가시켜 50년이 넘도록 성공적으로 침략을 저지했다. There is a definite value to having the KATUSA Program. Without it the liaison functions between the US and ROK forces would have to be augmented in some other way. Readiness could be affected in a negative way. The value of the KATUSA Program is primarily in the liaison function that the great young men serving their country bring to readiness and the upgrade to the defense posture that has successfully continued to deter aggression for over 50 years now. 카투사로 인한 미군의 인건비 절감액은 연평균 어느 정도인가? 예산과 결부해 가치를 논하기는 어려운 사항이다. 카투사 제도는 원래 한국 동란 중 미군부대 전투 인력을 100%까지 충원할 목적으로 도입됐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카투사 제도의 중요성이 카투사들이 기여하는 한국 방어력 증가로 바뀌었다. 그외 각 부대 내에서 카투사 개개인이 정상 근무를 통해 한국군과 지역민을 위한 통역과 연락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군지원단 답변을 참조하기 바란다.

This is a difficult concept to put a budget value to. Originally, the KATUSA Program was designed to augment US forces and to bring individual units up to 100% of their wartime strength. Over time, the importance of the KATUSA Program shifted to what the KATUSA Soldiers brought to the enhancement of the defense posture of the Republic of South Korea. Besides performing their normal duties as individual members of units, KATUSA Soldiers also serve as interpreters and liaisons with both the Republic of Korea Army and the civilian populace. Reference ROK Spt Gp Infor for more details. 카투사 제도가 없어진다면 주한미군 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정전 상태하에서 각 미 8군 부대가 전투준비태세를 확립하는 데는 카투사의 수적 유지가 필수적이다. 유사시에는 이미 한국에 있는 미군부대나 보충부대의 통역 지원을 위해 수천명의 카투사 예비군 충원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미 8군으로서는 카투사의 감원은 휴전하에서나 전시를 막론하고 1대1(카투사 대 미군) 충원(대체·교환의 뜻-편집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1대1 충원을 하더라도 미 8군으로서는 카투사 제도가 기여하는 측정조차 불가능한 능력과 연합군의 전투력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For armistice, maintaining the same level of KATUSA is extremely vital to the readiness of Eighth Army’s units. For contingencies, war plans require the recall of several thousand KATUSA Soldiers to support units and supplement deploying units with interpreters. The bottom-line for 8th US Army is that any KATUSA reduction, for either armistice or contingencies, would require a 1 for 1 replacement. However, even at a 1 to 1 ratio 8th US Army would still never overcome the immeasurable capabilities and coalition strength that the KATUSA Program provides to this command.

“고작 200~300억원 갖고…”
[인터뷰 / 미 8군 한국군지원단장 김덕곤 대령]
주한미군은 후생복지비로 카투사 1인당 연간 9천달러 지출 카투사 인사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김덕곤 미 8군 한국군지원단장(대령)은 “주한미군 감축에 따라 카투사 병력 수도 2008년께면 2500명 이내로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카투사로 인한 주한미군의 인건비 절감액에 대해서는 “고작 500억∼600억원 정도를 놓고 따질 상황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카투사 제도 유지의 법적 근거는 무엇인가.
명시적인 협정이나 법적 근거는 없다. 유일한 근거라면 1950년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보낸 작전지휘권 이양 서한이다.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이므로 주독미군이나 주일미군과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다.

명시적인 협정도, 법적 근거도 없다면 불법적인 운영 아닌가.
55년간 아무런 문제 없이 유지돼왔다. 주한미군 감축에 따라 카투사 병력 수도 2008년이 되면 2500명 이하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예상치다. 선발 인원은 한-미 군당국간에 조절하므로 내가 공식적으로 밝힐 내용은 아니다. 지난해 카투사 선발 인원이 1천명 줄어든 것을 보면 상식적으로 그렇게 예상된다는 뜻이다.

카투사의 법적 지위를 무엇이라고 보나.
문자 그대로 미군에 증원된 한국군이다. 한국군 월급을 받고 한국군 정신으로 일한다. 일상적인 처우도 개선돼 이젠 월급과 PX 이용 빼고는 모든 게 미군과 동등하다. 주한미군과 가장 가까이에서 부대끼며 한국을 알리는 엘리트들이므로 사명감이 크다.

카투사는 주한미군의 대체병력인가.
미군은 공식적으로 밝힌 건 아니지만 카투사를 대체병력으로 인정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주한미군이 아태지역 신속기동군 성격으로 바뀌면 역할, 규모, 운영 방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카투사가 대체병력이냐 아니냐는 큰 의미가 없어진다.

카투사 제도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미군의 인건비 절감액을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인건비를 월급만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주한미군이 카투사에게 지원하는 각종 후생복지비가 1인당 연간 9천달러다. 4천명이면 연간 3600만달러, 우리 돈으로 360억원이다. 미군 월급을 200만원으로 해서 1천억원에 이른다고들 하는데, 실제보다 부풀려졌다. 굳이 계산해도 실제 인건비에서 각종 지원비 빼면 연간 고작 200~300억원 정도일 것이다. 카투사 수가 줄면 더 내려간다. 우리 국민소득이 그 정도의 돈을 쩨쩨하게 따질 상황은 아니지 않나. 유사시를 대비해 미군이 보유한 각종 전투 장비들과 미군의 방위 분담으로 우리가 얻는 유·무형의 소득을 생각해보라.

“미군 인건비 절감 1천억원”
[인터뷰 /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
카투사 지원은 협정도 근거도 없는 국내법 위반
지난 4월 국회 국방위에서 “카투사 지원으로 인한 미군의 인건비 절감액을 인정받으면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1천억원가량 줄일 수 있다”고 밝힌 임종인 의원(열린우리당)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카투사 지원 중단”을 주장했다.

임 의원은 “양국의 협정도 이렇다 할 법적 근거를 없이 카투사를 계속 지원하는 것은 국내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카투사의 지위를 어떻게 보나. 불법 파견이다. 명백한 국내법 위반이다. 병역법에 그저 현역병을 뽑아서 여러 부대 배치하는 과정에 카투사도 있다는 정도로만 나와 있다. 양국의 협정도, 파견 목적이나 지속 근거도 법적으로 마련되지 않은 채 55년간 유지돼온,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형적인 제도다. 전쟁 중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졌고 그게 근거라고 하는데, 그럼 전쟁이 끝난 뒤에는 왜 유지하고 있나.

어떤 뒷받침이 필요한가. 일단 데려오는 게 맞다. 양국이 명확하게 협정을 맺고 국민 동의를 물은 다음 필요한 국내법 마련·정비 절차를 밟아야 한다. 당장 지원 중단이 어렵다면 입법 절차를 밟는 동안 유지하되,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반영해야 한다. 카투사로 인한 미군의 인건비 절감액을 우리가 부담하는 직접지원금에서 빼거나, 간접지원금에라도 계산해야 한다.

미군은 카투사로 인한 인건비 절감액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러니까 문제다. 카투사 제도 유지를 원하는 쪽이 어디인가. 미군쪽은 카투사를 고급 공짜 노동력으로 여겨왔다. 왜 멀쩡한 우리 젊은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지러 와서 미군의 보조 역할만 해야 하나.

올해 방위비 분담금이 처음으로 줄고 내년도 동결됐는데. 최소 4천억원 이하로 대폭 줄어야 한다. 지난해 7500억원 가운데 실제 연합방위력 증대에 쓰이는 돈은 10%도 안 됐다. 미군부대 인건비, 미군 아파트 건설비 등 우리 군의 전력 증강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곳에 대부분 쓰였다.

7500억원이면 55만 사병에게 12만원씩 월급 줄 수 있는 돈이다.

카투사 제도 정비에 대한 논의가 그동안 국회에서 없었나 DJ 정부 이래 간혹 문제 제기는 있었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주한미군이 줄고 역할도 바뀌고 있으니, 이참에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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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5.27 (금) 18:12 한겨레21

풍족했지만 자존심은 꽝이었다

[한겨레] 1960년대, 80년대, 2000년대 카투사들의 만남
“개인적으로는 자랑스러웠으나 국가적으로는 이제 없어져야”
▣ 진행 ·정리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사회 섭외율 100%였다. 전화 한통에 모두 응낙해주셨다.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다.

이근창(이하 이) 내가 카투사 한 걸 어떻게 찾았나 몰라.

사회 네이버에 물어보다가…. 쓰신 책 <빈곤을 극복한 삶의 지혜, 고통을 이긴 삶의 보람>에 카투사 얘기가 나와서 알게 됐다.

사단장 철학대로 뽑다가 시험제로

이 카투사가 뭔지도 모를 때였다. 5·16 나고 다들 군대 가라고 했다.

영어교사 하고 있었는데 끌려가기 전에 가야겠다 싶었다. 은사 중 한명은 경제학 박사였는데 대학 강의 중에 끌려가기도 했다. 1964년 우리 국민소득이 100달러였으니까 61년이면 80달러쯤 됐을 거다. 3사단 부관부 장교계에 근무했는데 한달에 서너명을 카투사로 뽑아보냈다. ‘백’이 많이 작용했다. 사단장 철학에 따라 제각각이었는데 우리 부대는 시험 봐서 뽑았다. 군생활 6개월 뒤에 차출됐다.

K-MAG이라고 미 군사고문단 본부에 배치됐다.

황부영(이하 황) 역사책에 나오는 그 K-MAG! 우리 땐 공모제였다. 85년 9월부터 88년 2월까지 근무했다.

사회 ‘카고시’ 시절이다. 카투사 가기가 고시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던.

황 80년대 중반은 반미 감정이 높을 때라 심적 갈등이 많았다. 논산에서 6주 훈련 마치고 평택 캠프 험프리 KRTC(카투사 리세션 트레이닝 센터)에서 3주 교육 받았다. 미군은 부대에서 써먹기 좋은 스킬을 가르치려 하고, 카투사 교관은 정신교육을 강조해 양쪽 기싸움이 좀 있었다. 솔직히 양놈들. 걔들은 영어 잘하는 것 빼곤 독도법이니 뭐니 가르쳐봤자 돌탱이였다. 그런데 한국 애들은 딱 3일만 가르쳐도 되거든. 우린 교련 배웠으니까. 한국군인 카투사 교관들은 정신력을 유독 따졌는데 지금 보면 어설픈 민족 감정이다. “몸은 미국에 팔려가도 정신은 한국군이다” 뭐 이런 식이었다. 교육 중에 영어시험 쳤는데 1, 2등은 단본부, 3등부터 10등까지는 용산 이렇게 배치했다. 이와 별도로 테니스장에 모아놓고 키 크고 인물 좋고 집안 좋은 애들은 따로 분류했다. 난 시험에서 4등인가 해서 용산 정보처 땅굴탐사반에 배치됐다.

최봉준(이하 최) 땅굴도 찾아다녔나? 황 겉으로는 정보병이었지만 실제로는 따까리였다.

최 2001년 9월부터 2003년 11월까지 의정부 미 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군종 생활했다. 토익 성적 확 낮춰 지원받아 뺑뺑이 돌릴 때였다. 교육은 의정부 캠프 잭슨 내 KTA(카투사 트레이드 아카데미)에서 받았다. ‘좌향좌 우향우, 줄줄이 가’ 이런 거 영어로 듣기, 사격훈련 등 딱 4주간이었다. 보직 교육은 없었다. 성적순도 아니었고 그때그때 사람 빈 곳에 배치되니까 어딜 갈지 몰랐다.

JSA(공동경비구역) 근무랑 군종병은 심사를 했다. JSA는 키가 커야 했다. 그래서 군종병 지원했다. 가톨릭, 개신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한 예배당에서 시간 바꿔 예배 보는데 예배 세팅하는 일을 했다.

이 K-MAG 본부 배차계에 가라더라. 미군이 30만이던 시절이니까 운전병도 많았다. 180명 가운데 80∼90명은 보초 서고 40명은 행정 봤다. 행정병들은 2층 침대 썼다. 보초병들은 단층에 모포 깔고 잤지. 진짜 행정의 파워는 서무계였다.

통역 겸 타이핑을 했다.

‘미제의 방위’라는 질시 받았다
사회 왜 카투사를 선택했나.

최 안 됨 말고 되면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황 우리 땐 영어 잘한다는 것도 메리트 중 하나였다. 실제로는 미군이 쓰는 욕을 주로 배웠지만.

최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원칙적으로 주말 쉬고 미국, 한국 공휴일 다 쉬고, 5시에 퇴근하고. 하지만 칼퇴근은 아니었다. 카투사들은 열심히 일한다. 아무리 영어 잘해도 미군보다는 못하니까 빨리 일을 배워 섹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래서 악착같이 한다. 일과 뒤에는 공부하거나 놀았다. 미군하고도 잘 어울렸다. 주말에 패스 받고 집에도 자주 갔다.

황 집에서 나중에는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웃음) 우리도 미군과 업무 경쟁이 많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존재감과 사회적 존재감이 충돌한다고 할까.

꿀리지 않으려고 뭐든 기를 쓰고 했지만, ‘얘들이 나보다 영어는 잘하지만 일은 못해’ 하는 경쟁심과 ‘그래봤자 양놈 좋은 일 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함께 들었다. 난 84학번인데 굉장히 엄숙하던 시절이다. 카투사를 보는 시각은 두 가지였다. 군대 생활 편히 한다는 부러움과 미제의 방위라는 질시. 87년 6월항쟁, 대선 다 군에서 겪었다. 87년 대선 끝나고 용산에 유리창 깨진 막사가 즐비했다고들 한다. 카투사들도 피끓는 젊은이들이었으니 결과에 대한 반발이었지.

다음날 집합 때 안 나간 카투사도 많았다. 그때만 해도 군에서는 누굴 찍으라는 지시가 은밀히 왔다. 용산에서는 그게 안 통했다. ‘반동표’가 딱 두표 나왔다.

그 중 하나가 내 직속 쫄따구였는데 걔는 내내 인간 취급 못 받았다.

최 혹시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나? 황 도움이 많이 됐고 미국도 알던 시절이었지만 제대하고 다시는 이태원(서울 용산 소재)에 가고 싶지 않았다. 3년 내내 미군과 한방을 썼지만, 술 먹으러 나가면 내국인 출입을 금지하는 곳이 많았다. 그게 참 자존심이 상했다.

두어해 전 우연히 이태원에 갔더니 내국인 출금 장소가 거의 없더라. 15년 사이에 많이 바뀐 거다.

이 우리 땐 아예 그런 술집이 없었지. 이태원도 그리 큰 길이 아니었고.

황 미군 부대 내 아리랑택시가 미제 차에서 국산 차로 바뀌었더라. 나라가 고맙다까지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나아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카투사 갔을 때 물질적으로 충격받는 게 많았다. 막사가 우리 집보다 더 좋았다.

이 60년대 초반만 해도 카투사 온 사람 중에 무학자가 많았다. 내가 놀란 건 밥이었다. 한국 부대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보리밥에 멀건 된장국. 꽁치 냄새는 나는데 꽁치는 없는 그런 밥 먹다 갔으니까. 심지어 숟가락도 없이 군번 인식표로 먹었다. 미군 서무계 시절 내 사무실이 (좌담을 하던 중국음식점 방을 가리키며) 여기보다 컸다. 혼자서 썼다. 서무계 책임자는 미군 중위였는데 운전병들 구별을 못했기 때문에 실무는 다 내가 했다. 휴가처리, 사고처리, 인사처리까지 내 맘대로 했지. 한마디로 오야붕이었다. 하지만 월급은 한국군하고 똑같았다. 130원.

사회 당시 보통 월급쟁이랑 비교하면? 이 64년 제대 뒤 천양산업에 취직해서 8천원 받았으니까 지금하고 비율은 비슷할 것 같다. 반미 감정은커녕 오히려 미군을 존경했다. 미군을 잘 사귀고 친구 만들려고 애를 많이 썼다. 부대 생활도 풍요로웠다. 도서관도 잘돼 있고 음악감상실, 극장, 오락실도 있고. 한국 부대에서는 구타를 많이 했지만, 미군 부대는 때리는 게 없었다. 카투사들 사이에서 때리는 건 있었지만, 단체 기합이지 한명을 때리진 않았다.

‘정의로운’난동에 관한 추억
황 그래서 백 쓰고 돈 써서 갔나 보다. 70년대 논산에서 있는 집 자식이 선 줄에 끼어 있다가 그 줄이 몽땅 카투사로 빠지는 덕에 카투사 간 경우도 있다는 얘길 들었다. 용산 기지 내 클럽 중에 도박하는 곳이 있었다. 거기서 일하는 분들 말이 ‘카투사 시험 봐서 오니까 슬롯머신에 매달려 있는 애들이 없다’는 거다.

그 전 카투사들은 돈 있는 집 자식이 많았으니까 도박을 했겠지. 나 병장 때 7천원하고 동전 몇개 월급으로 받았는데 그걸로 어떻게 도박을 하나. 80년대 중반 넘어가며 카투사 처우도 많이 변한 걸로 알고 있다. 86년부턴가 이발병도 없어졌다. 대걸레 빠는 데서 간이로 머리 디밀고 깎았는데, 쿠폰을 줘서 바버숍에서 깎게 됐다. 하지만 극장 갈 때는 카투사들이 먼저 도착해도 미군 먼저 다 들어가고 남는 자리 있으면 그때야 들어갈 수 있었다.

최 우리는 똑같이 줄서서 들어갔다.

이 극장표가 중대에 몇장씩 나온다. 서무계라 내 몫은 꼭 한장씩 있었다.

시레이션(전투식량)에 대한 기억은 선연하다. 한달에 한번씩 나오는데 화랑 담배 30갑이 들어 있었다. 나오면 뜯지도 않고 그대로 팔지. 훈련장에 아줌마들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황 그 시절에 사고 치면 원복시킨다(한국군에 돌려보낸다)는 말은 정말 위협이었겠다.

이 큰 위협이었지.

최 우리는 반복해서 배웠다. 카투사 인사권은 한국군에 있다, 징계권도 한국군에 있다.

황 원복시킨다는 말 미군에게 들어본 적 없나? 최 그런 말은 금지돼 있었다.

황 여건이 참 달라졌다. 일병 땐데 피크닉 에어리어에서 바비큐 파티하던 날이다. 스와이처라는 미군이, 이름도 그렇게 괴상했는데, 큰 카세트를 들고 왔다.

컨트리풍 노래였는데, 가사가 골때렸다. 한국에 오면 이쁜 여대생들과 씨 뿌리며 잘 수 있다, 이런 유의 심한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서 테이블 엎고 맥주캔 던지고 카세트 발로 찼다. 정의로운 난동이었지. 그 일로 시말서 썼다. 징계는 안 받고 카투사 군기교육대 가서 봉체조 몇번 했다. 근데 그날 밤, 그 다음날 밤 막사에 미군들이 술병 들고 줄줄이 찾아오는데 히스패닉과 흑인들이었다. 스와이처는 백인이었다. 미군 내의 인종차별 때문이었겠지. 꼭 잘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신나긴 했다. 원복이 걸렸다면 몸 사렸겠지.

이 원복 그것 참…. 제일 가슴 아픈 일은 운전병들이 기름 빼 팔아먹는 거였다. 거짓말로 출입증 끊고 휘발유 팔러 나갔다 오는 거야. 문제는 그러다 교통사고가 나는 거다. 안 그래도 서툰 운전에 조바심을 내다 보니까. 사고 치면 그걸로 원복이다. 무조건이다. 웬만하면 내가 변명조로 보고서 써주지만, 서전이 같이 조사 나가면 어쩔 수 없을 때가 많다. 원복시킬 땐 정말 가슴 아팠다. 우리가 못살아서…. 여의도 벌판에서 천막 치고 훈련하던 날, 한 운전병이 천막을 훔쳤다.

싣고 나가서 한강 백사장에 파묻었다. 천막 하나면 값이 꽤 나갔다. 카투사들은 그 사실을 알았다. 내 위 영어 한마디 못하는 한국군 중사는 보고하라고 했지만, 보고하러 가는 척하고는 딴 데 갔다 왔다. 그땐 한국 사람들끼리는 도둑놈 취급 안 했다. 미군 거 훔친 거니까. 다음날 미군 마스터 서전이 뭘 트럭에 싣고 나가는 걸 봤는데 무슨 일이냐는 거다.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보고했다. 헌병대가 곧바로 와서 걜 데리고 갔다. 8군 헌병에게 인계하면서 영창에는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도둑질한 녀석을 사회 나와서 만났는데 그렇게 고마워하더라.

카투사 나왔단 말 못 꺼내던 시절
최 그런 얘기는 신기할 따름이다. 80년대랑 지금은 생활 조건은 큰 차이가 없지만 시각은 참 다른 것 같다. 황 선배는 뭘 위해 우리가 이 일을 하나, 갈등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한국군을 위해 있는 것이고 미군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황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 모양이다. 우리 땐 도덕적 부채감이 있었다. 한 친구도 카투사였는데 89년 말 한 대기업에 입사했다. 부서 신입사원들이 아무도 군대 얘기를 안 하더란다. 그래서 ‘방위였나 보다’ 여기다가 친구가 먼저 ‘난 카투사 나왔다’고 얘기했다. 그제야 다들 자기도 카투사 나왔다고 입을 열었다고 한다. ‘모두 미군 방위 출신이네’ 하면서 웃었다더라.

최 길 가다 보면 ‘헤이 카투사’라고 부르는 미군이 있다. 그러면 ‘우리 이름은 카투사가 아니다. 계급과 이름을 똑바로 불러라’라고 말한다. 카투사는 원하면 미 하사관학교 초급지휘자 양성과정(PLDC)에도 갈 수 있다. 거길 통과하면 노란 바탕에 검은색 호랑이 문양인 휘장이 나온다. 그런 거 붙이고 싶어하는 카투사도 많다.

사회 2002년 장갑차 사건 났을 때 내부 분위기는 어땠나? 최 위험 등급이 아주 높이 올라갔다. 절대 사람들 많은 데 가지 말라, 절대 군복 입고 나가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광화문, 대학로 이런 데 가지 말라고 금지 지역도 정해줬다. 일부 미군들은 동두천 시내에만 나가도 어떻게 될 거라고 무서워하기도 했다.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미군들이 많았다. 두 소녀가 사고로 죽었다, 반미 감정 심하다, 이런 식으로만 전달받았으니까. 황 걔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에 별 관심이 없다. 미국이 그라나다 침공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침공’을 ‘엔터’라고 표현하더라. 일본이 만주 침략을 진입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

이 나는 카투사에서 큰 소득을 얻어서 나왔다. 운명이 달라졌다. 캠프랑 시내 돌아다니는 ‘섹 버스’ 터미널에 광고가 붙어 있는데, 오늘의 명언 같은 걸 크게 써붙여놓곤 했다. 어느 날 막걸리 마시러 명동 나가는 길이었다.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말이 붙어 있는 걸 봤다. 그게 딱 가슴에 와 닿았다. 난 사실 교사 하기가 싫었다. 선생이 등록금 독촉하던 때다. 페이퍼 워크도 쩨쩨하고 답답했다. 그 문구를 본 뒤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지적 수준이 있는 미군도 적극적으로 사귀었다. 제대하던 해인 64년에 1억달러 수출탑이 처음 만들어졌고 남대문에 수출공사도 생기며 사회 전체가 들썩였다.

무역사 제도라는 것도 처음 시행됐다. 내가 우리나라 무역사 1호다. 나중에 부도나긴 했지만 천양산업이라고 수출 실적 1∼4위를 다투던 회사에 톱으로 뽑혔다.

사회 카투사의 법적·제도적 근거가 없다고 한다. 법적 근거를 만들고, 인원을 지원해준 만큼 미군의 인건비 절감액을 방위비 분담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황 1대1 인건비로 하면 안 되지. 미군보다 두세배는 더 일하는데.

이 우리 행정반 사람들 거의 다 출세했다. 미국 유학 가서 박사학위 받고, 국제적으로 활동한 이들도 많다. 그런 힘이 우리 사회를 이끈 동력이 됐다. 미국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감사해야 할 것도 있다. 미군이 6·25 때 참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틀림없이 공산화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얼마나 비참하겠나. 미 원조물자로 연명했던 고마움도 잊으면 안 된다.

땅도 공짠데 몸도 공짜로 대줘야 하나?
황 고마움을 잊지 않고도, 할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

최 미국은 일방적으로 우릴 도와주려고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게 아니지 않나. 자기의 이해관계가 있으니까 전략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조건을 이용하는 거다.

이 그렇지. 도와주려고 있는 건 아니지. 미국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황 드디어 교수님 입에서 카투사 용어가 나왔다.

이 미국이 고맙다고 했지만 미군들이 못되게 굴어 꼴보기 싫었던 것도 많다. 무역회사 미국 주재원으로 있다가 68년 귀국할 때 노스웨스트 항공 타고 김포 비행장에 내렸다. 활주로에 내려 버스 타려고 걸어가는데, 스태프 서전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막 내린 미군 20여명 앞에 서서 이러는 거다. “웰컴 투 가비지 컨추리.”(쓰레기 나라에 온 걸 환영한다)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던지 얼굴이 다 벌게졌다. 그 서전이 특히 나빠서가 아니라 미군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고마움이 많지만 그 말은 정말 맺힌다. ‘그러니까 저 녀석들이 세계 곳곳에서 양키 고 홈 소리를 듣지’ 싶었다.

황 그 말 들었다면 나는 막 욕하면서 달려들었을 것 같다.

최 나는 따졌을 것 같다.

이 개척정신과 개인주의가 미국의 정신인데, 지금 미국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이라크 침공 보면서 부시를 무지 욕했다. 아무리 후세인이 못된 놈이라고 해도 어떻게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그 많은 사람을 죽이는지.

부시는 지옥 제일 먼저 갈 놈이다 했지. 부시가 전쟁을 2년 전부터 준비했다는 거 아닌가. 오펙 석유회사들이 로비하고.

최 미군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답답하다. 이라크에 나가 있는 것도 한국에 온 것도 다 지켜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너희 힘을 유지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냐고 해도 도통 말이 안 통한다. 생각들이 없다. 사회 카투사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이 법적인 근거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카투사 인건비를 돈으로 내놔라 하면 우리쪽 부담도 더 늘어나지 않나? 황 방위비 분담금 간접 비용에라도 포함시키자는 말이다. 아닌 말로 땅도 거의 공짜로 대주는데 몸도 공짜로 대줘야 하나.

이 그건 말이 되겠네.

황 군대의 여러 탈출구 중에서 카투사만 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과거에는 방위비 분담을 안 했지만 이젠 분담하니까, 우리도 쓸 돈 쓰되 계산은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또 이제는 미군 문화가 새로운 게 아니다. 영어든 국제적 감각이든 물질적 풍요든 굳이 불공평한 관계를 이어가며 배울 필요가 없지 않나.

최 중요한 것은 미군이 줄고 있다는 거다. 카투사가 공급 과잉이다.

카투사끼리도 얘기하지만, 자주국방 실현되면 언젠가 미군도 떠난다. 카투사 한 사람에게는 자랑스럽고 좋은 경험일 수 있지만 제도는 국가적으로 볼 때 없어져야 한다.

황 카투사 신조 배웠나? 우리 땐 ‘주인정신을 갖자’가 있었다.

최 ‘민간외교관이다’ 이런 말은 없었나? 황 그런 거짓말은 있어도 기억 못하겠고. (웃음) 최 어? 난 뿌듯하게 생각했는데. 달리기할 때 한국 노래도 오기로 하고 그랬다. 만화 주제가 불렀다.

한국군 조건이 카투사보다 좋아져야
이 60년대에는 어떤 점에서 군인이 민간인보다 수준이 높았다. 여러 역사적 평가가 있겠지만, 미군 영향이었다고도 할 수도 있다. 카투사도 일조했다.

고칠 것은 고치되 평가할 것은 제대로 해줘야 한다.

황 카투사가 다른 나라에는 없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카투사보다 한국군의 조건이 좋아져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최 카투사는 미군의 파트너다. 카투사가 없으면 미군 전력에 막대한 차질이 생긴다. 하지만 미군은 일상적인 립서비스만 그렇게 하고,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얘기 안 한다. 그런 현실이 제도에 정확하게 반영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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