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치회고록-94전쟁계획 이시우 2005/04/20 352
<미, 영변 공격시 군사시설 파괴도 검토>
[연합뉴스 2005-04-01 08:45]
책, 벼랑끝의 북미협상:제1차 북핵 위기
갈루치 최근 저작서 주장 미, 한국특성 맞는 新교민소개안도 마련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미국은 1994년 6월 13일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하고 사찰단 추방을 경고하고 나서자 영변 등 핵시설외에 북한의 반격에 대비해 주요 군사시설도 공격하는 방안을 한때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조지 부시(시니어) 행정부 출범후 로버트 리스카시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과 도널드 그레그 주한대사 등은 한반도내 핵무기 철수를 주장했으나 백악관이 이를 묵살해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31일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25일 한글판(김태현역)이 출간된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차관보(조지타운대 월시 국제대학장) 등 미국의 한반도전문가 3인의 공저 ‘제1차 북핵위기: 벼랑끝 북핵협상(The First North Korean Nuclear Crisis: Going Critical)’에 나타나 있다. 이 책은 북핵 대사로 94년 북미 제네바합의를 탄생시킨 갈루치 전 차관보와 국무부 관리로 북미합의서 작성에 관여한 조엘 위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 조지 부시 대통령과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위원회(NSC)에서 일했던 데니얼 포네먼 국제정책포럼(FIP) 연구원이 함께 저술했다.
책 내용 중 당시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 놓였던 한반도 관련 부분을 정리해본다.
◇’오시라크 옵션’
94년 6월 10일 빈에서 열린 IAEA 이사회에서 대북 제재안을 의결한 지 사흘만인 6월 13일 북한은 IAEA 탈퇴를 전격 선언했다. 빈 주재 북 외교관들은 영변에 머물고 있는 사찰단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이튿날인 14일 미 정부는 장관급 회의를 열어 ▲한반도 군사력 증강 ▲제재안 의결 ▲최후의 외교적 노력 등에 대해 논의했는데 여기서 ‘오시라크(Osirak)’ 옵션으로 불린 새로운 대안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시라크는 81년 이스라엘이 공중폭격을 통해 파괴한 이라크의 원전시설과 그 시설이 있던 지명으로 오시라크 옵션은 곧 영변에 대한 기습공격을 의미했다.
회의에서는 오시라크 옵션을 실행하더라도 군사력 증강이 완료된 후에나 가능하며 한국 정부와도 사전에 상의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영변 핵시설 공격안에는 ▲영변 재처리 시설 공격 ▲재처리 시설 및 5MW급 원자로, 사용후 연료봉 저장고 등 영변의 다른 핵시설 함께 파괴 ▲모든 핵시설과 동시에 북한의 보복행동 능력 약화를 위한 주요 군사시설 파괴 등 3가지 방안이 있었다.
재처리 시설만 파괴하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몇 년 더 후퇴시키면서 방사능 유출 가능성이 낮고 특히 북한이 전면전에 나설 가능성이 그중 낮았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이미 추출한 것으로 여겨지는 핵탄두 한 두개 분량의 플루토늄이 재처리시설에 남아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둘째안인 모든 핵시설 파괴는 제한폭격에 비해 위험도 크고 방사능물질 유출 확률도 높은데다 북한의 보복으로 전면전 발발 가능성도 높았다. 셋째안은 전면전 가능성이 높은 두번째 방법 선택시 자연히 군사시설까지 폭격해야 한다는 게 논리적 귀결이었으나 이는 한,일 등 전세계적으로 반대 의견이 높을 것으로 분석됐다.
◇주한미군 증강 3대 방안 준비
IAEA 이사회가 대북 제재안을 의결한 6월 10일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제출한 주례보고서에서 “핵위기 이후를 염두에 둬야 하며 군사적 태세나 선제공격 등으로 선택의 폭이 제한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북한체제의 붕괴를 추진하는 것을 하나의 선택으로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페리 장관은 유엔의 제재집행에 필요한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존 샬리카쉬빌리 합참의장과 군사적 테세를 점검했으며 클린턴 대통령은 지휘부 건설 및 나머지 군대 의 진주를 도울 선발대 250명의 파견을 승인한 상태였다.
전력증강을 위한 3가지 대안은 ▲대규모 증원 대비한 정지작업 위해 비전투부대 2천명 파견 ▲지상군 1만명, 여러 편대의 전투기 대대, 한 척의 항모전단 파견 ▲지상군 5만명, 항공기 400대, 다수의 로켓 발사대와 패트리어트 미사일부대 파견, 예비군 소집과 경제제재를 집행할 항공모함 전대의 추가 파견 등이다. 국방부는 3가지 대안 모두가 유엔의 제재 돌입 이전에 완료돼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한국특성 맞게 新교민소개안 마련
한반도 상공에 전운이 점차 고조되자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 대비태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위기가 악화되면서 한국사회에는 불안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방북 중재’를 앞둔 카터 전 대통령이 서울에 체류하고 있던 이틀동안에만 주가가 4% 하락했고 한 라면회사는 쇄도하는 주문 때문에 생산량을 30% 증가시켰다.
한국 정부는 걸프전쟁을 연상시키는 CNN 취재팀이 한국에 온 것을 염두에 두고 언론의 과장된 보도를 비난하면서도 6월 13일 600만이 넘는 예비군에 대한 소집 점검을 했다. 제임스 레이니 주한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 거주 교민 소개대책을 강구했는데 찰스 카트만 부대사가 이 계획의 담당자였다.
카트만 부대사는 대사관에 비치된 20년 전에 발간된 ‘비전투요원 소개작전(NEO)’ 계획서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판단, 주한미군과 협조해 새로운 NEO 개발에 착수했다.
로버트 갈루치 美(미) 국무 보좌관이 북미 고위급 회담 후 기자회견
수 개월 작업 끝에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간 이 계획에 따르면 주한 미국인들을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거리 밖으로 소개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군인가족과 국방부 소속 민간관리, 그들의 가족, 기타 미국 시민권자들은 가용한 상업운송 수단을 이용해 출발하게 돼있다. 나머지 민간인들은 국방부가 나서서 열흘 이내에 소개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미 시민들은 유사시 대중매체나 미 상공회의소 등의 조직을 이용한 비상연락망인 ‘워든(Warden) 시스템’을 통해 대피에 대한 통고를 받는다.
이후 한국 정부가 열차편을 제공, 부산 등 남쪽의 집결지로 이동하며 거기서 해상이나 항공편을 이용, 일본으로 대피한다. 공항시설이 파괴되면 해상로를 이용한다.
미국은 이에 따라 국무부와 일본 외무성이 서울에 합동위원회를 조직, 함께 민간인 소개계획을 세웠다.
6월 중순이 되자 서울 주재 외국대사관들은 언제 자국민 대피작전에 나서야 하는지 생각하느라 거의 업무가 마비되었다. 각국 대사관들은 항공편을 예약해두는 한편 날마다 카트만 부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아직 한국에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6월 16일 대통령이 병력 증파를 결정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게리 럭 사령관은 백악관에서 최고위급 회의가 시작되기 전 레이니 대사에게 급히 만나자고 연락, 대사관저에서 비밀 회동, 대사-군사령관 합동건의문을 작성해 워싱턴으로 보냈다.
이 건의문에서 그들은 “지금 워싱턴에서 내리려는 결정은 수 만명의 미국인 안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고려와 준비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미국은 한국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자국민 철수 및 북한과의 전쟁에 막 나설 참이었다’면서 자신이 레이니 대사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락해 제때 중단시켰다고 밝혔으나 회고 내용 중 틀린 부분이 많다. 백악관에는 문제의 기간에 김 대통령이 민간인 철수나 임박한 전쟁에 대해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한 기록이 없다.
◇한반도 핵무기 철수론
조지 부시(시니어)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검토보고서’인 국가안보검토 제28호(National Security Review)는 한국에 배치된 미 핵무기가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한 민간 전문가는 카터 대통령 당시 검토한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한국에 배치된 핵무기도 함께 철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군부내에서도 이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고 밝혔다.
‘핵무기는 군사적으로 무용지물로 정치적 문제만 야기한다’는 주장과 함께 ‘북한의 압도적인 재래식 전력을 감안, 핵무기는 불가결하다’는 주장이 맞섰다는 것이다.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계획 백지화로 전술핵무기의 철수계획도 취소됐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리스카시 주한미군사령관과 그레그 주한대사까지 나서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핵무기 철수론’은 당시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대통령 안보보좌관 등 백악관내 강경파들의 목소리에 묻혀 실현되지 못했다. 스코크로프트 보좌관은 핵무기 철수시 북한의 공격적 행동에 굴복해 혜택을 준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카터, 레이니 대사 ‘중재역’ 요청에 방북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미국의 북 핵시설 공격 검토로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 직면한 94년 6월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게 된 것은 레이니 당시 주한 미대사의 ‘일역 담당’ 권유를 받아들인 측면이 강하다.
카터 방북에 대해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은 찬성한 반면,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반대했고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김일성을 직접 면담, 미국의 관계 개선 의지 등 진의를 분명히 전달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며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소식을 듣자 클린턴 대통령에 전화를 걸어 “국제적 지지가 증가하고 있는 판국에 카터가 방북하는 것은 실수”라고 지적하기도 했으나 방북이 결정되자 카터 전 대통령을 서울로 초청, 한국의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카터 일행이 김포공항에 도착한 6월 13일은 북한이 IAEA 탈퇴를 선언한 뒤 사찰단 추방을 경고하던 시점이었다.
이렇게 되자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카터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 핵시설 공격 등) 모든 것은 사찰단에 대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