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이시우 2005/02/27 247

http://monthly2.joins.com/monthly/article/mj_article_view/0,5459,aid%252D212155%252Dservcode%252D9200204,00.html

연중기획/이슬람이야기] 흔들리는 神政국가 이란
‘神의 통치’ 아닌‘인간에 의한 정치’ 원한다
외부기고자 서정민 중앙일보 국제부 기자(amirseo@joongang.co.kr)

이란 경찰이 지난 6월 12일 수도 테헤란의 샤히드 바헤슈티 대학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의

“독재자 하메네이를 처형하라.”
“무능력한 하타미도 물러나라.”
“성직자 정권의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다.”
지난 6월 중순 발생한 이란의 반정부 시위에서 학생·시민들이 외친 구호들이다. 이들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강권통치와 개혁파 대통령 모하메드 하타미의 지지부진한 개혁 속도에 대한 불만을 강력히 표현했다. 시내를 통과하던 수천 대의 차량들은 반정부 시위 지지 표시로 경적을 울리기도 했다.

이란에 불어닥치는 외풍(外風)도 만만치 않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미국은 대이란 ‘압박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과 일부 서방 국가들은 ‘이란이 이라크 내정에 개입하지 말 것’을 엄중 경고하고 이란의 핵 개발 의혹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다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제2의 이라크’가 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이래저래 1979년 민중혁명 이후 등장한 강력한 이슬람 정권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지난 7월8일 시아파의 성지인 이라크의 나자프에서 만난 한 이란 대학생은 현 이란 정권에 대한 “우리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다”며 정권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방학을 이용해 나자프와 카르발라를 찾아 이라크를 방문한 그는 또 “현 정권이 앞으로 수년 내에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경우 23년 전 상황이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테헤란 대학에 재학중인 그는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비밀 정보기관원들이 이란인들이 순례를 행하는 이곳 이라크 성지들에서도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란 젊은이들의 불만은 지난 6월10일 폭발했다.

이날 테헤란 대학생 800여 명은 정부의 대학 사유화정책에 반대하는 소규모 집회를 열었다. 대학 사유화는 등록금의 폭발적 인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시위는 수일 만에 이란내 여러 대학을 중심으로 수천 명이 참가하는 규모로 발전했다. 시위대는 반정부 구호들을 외치고 경찰과 이슬람 민병대에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이슬람 정권은 강경 진압으로 맞섰다. 하메네이는 지난 6월12일 대국민 연설을 통해 “대학생들을 포함해 시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국으로부터 일말의 선처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 고위 관리들도 반정부 시위에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틀 후인 14일 새벽에는 친정부 ‘바시즈 자원 민병대’ 소속 수백 명이 반정부 시위의 중심지인 대학들에 난입했다. 테헤란 대학에서는 쇠파이프·몽둥이·칼 등으로 무장한 민병대가 학생들을 공격해 최소한 15명이 중상을 입었고, 알라메 타바타바이 대학에서도 유사한 충돌이 발생해 50명의 학생이 부상했다. 부상자 중 한 명은 결국 숨졌다.

민중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이슬람 보수세력은 대중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난 1999년 7월 발생한 시위에도 이란 정부는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보안군과 강경 보수세력들이 언론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학생 1명이 숨지고 지난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최악의 시가전이 촉발됐다.
이란 정권은 미국이 이 시위를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메네이는 “미국이 시위를 조장하고 있다”며 “군사적으로 이란 정권을 전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이 이란 정권과 국민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소聆?반(反)이란 위성TV인 NITV를 시청한 사람들이 이 시위를 주동했다”며 “이슬람공화국을 붕괴시키려는 ‘악마적인’ 미국의 음모를 좌절시키기 위해서라도 학생들이 진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img2R
하메네이의 미국 비난은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이란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이 젊은이들을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인도하지 않고 있다”고 6월8일 말한 직후 발표됐다. “미국은 우리의 정책결정 기구들이 혼란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는 등 각종 소문을 퍼뜨리며 다양한 방식의 선동을 시도중”이라고 하메네이는 주장했다.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은 “모든 비난에 대해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말하면서 “미국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이란인들의 열망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도 “미국은 정치적 견해를 평화적으로 표출하는 학생들에 대한 폭력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란의 정치불안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기인한다. 중동 국가 중 한국의 최대 교역국인 이란은 급속한 인구증가, 석유산업에 의존하는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대미 관계 악화로 인한 외교의 어려움 등으로 경제개혁이 지지부진하면서 정치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이슬람 통치와 경제개혁

1966년 실시된 인구 센서스에서 이란 인구는 약 2,600만 명이었다. 그러나 2002년의 집계에 따르면 이란의 인구는 약6,300만 명으로 35년 동안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이란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부진한 경제성장으로 현재 15~64세의 경제활동인구 중 약 350만 명이 실직 상태다. 더욱이 향후 4년간 약 550만 명의 고등학교 졸업자가 취업전선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악의 경우 매년 150만 명의 신규 실업자가 발생하고 실업률이 24%까지 상승할 것으로 우려된다. 높은 실업률과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청년층의 비중은 잠재적인 사회 및 정치 불안 요소가 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농업국가의 성격을 가진 이란은 세계 제2차대전 이후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 및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1947년부터 시작된 5개년 개발 계획은 비석유 부문 육성 및 농업생산 증대를 위해 석유 수입을 주된 자금원으로 의존하고 있다. 또한 식량에서 원자재·중간재 및 자본재에 이르기까지 국내 수요량의 5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대외의존형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어, 유가하락으로 인한 외화수입 감소시 원자재·부품 등의 수입 재원 부족으로 연쇄적으로 경기가 침체되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는 경제구조 개선을 위한 외국인투자 유치에 결정적 장애 요소가 된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이슬람혁명으로 악화돼 1979년 외교 관계를 공식 단절했다. 팔레비 국왕 시절만 해도 미국은 이란을 이스라엘 다음으로 중동에서 중요한 우방으로 생각했다. 이란은 옛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미국의 전략적 전초기지 및 석유 공급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이란의 왕정이 이슬람혁명으로 붕괴되면서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미국으로 도피한 이란 국왕의 소환을 주장하던 이란 대학생들이 1979년 11월 테헤란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53명의 인질을 444일간 억류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냉각됐다. 또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공식적으로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양국은 ‘원수지간’이 됐다

1990년대 들어 이란 정부는 국제화 추세 속에서 고립경제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국내의 부족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외국의 투자 및 진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후 이란은 미국의 경제제재 입장을 완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1997년 출범한 개혁파 하타미 정부는 미국에 여러 차례 화해의 손짓을 보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미국은 ‘원리주의 통치를 바탕으로 테러를 지원하는’ 현 이슬람 정권을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1995년 이래 대이란 무역금지·경제제재를 취하고 있고, 세계은행(WB)의 대이란 차관 제공과 이란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을 저지하고 있다. 특히 2002년 1월말 부시 대통령이 이란을 ‘악의 축’의 한 국가로 지목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은 2002년 2월15일 이란의 WTO 가입 신청을 재차 봉쇄했다. 결국 경제발전을 위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이란이 가까운 미래에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정치적 과제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보수·개혁의 대립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란의 경제발전 실패 원인으로 보수·개혁 세력의 첨예한 대립을 지적한다. 양측의 소모적 대립으로 근본적인 경제개혁이 추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란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로 시작된 이슬람혁명으로 수립되었다. 왕정 붕괴 후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선출된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6명의 성직자와 6명의 법조인으로 구성된 헌법수호위원회 (the Council of Guardians)를 최고의결기관으로 하는 신정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1980년 시작된 이라크와의 전쟁이 8년 동안 지속돼 국민들의 생활이 궁핍해지고 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면서 이슬람 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신정국가의 이러한 폐쇄적인 정치·경제 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과 저항이 태동한 것이다. 1989년 당선된 중도개혁파 라프산자니 대통령이 경제개혁을 시행했지만 큰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결국 이란 국민들은 보다 개혁적인 인물을 선택했다. 1997년 개혁주의자 하타미의 대통령 당선으로 젊은이들은 다시 한번 개혁의 물결을 기대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정부의 개혁 속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하타미 대통령도 보수파들의 견제에 밀려 개혁 정책을 제대로 시행할 수 없었다. 2001년 재선된 하타미 정권은 여러 개혁안을 만들어 의회 의결을 거쳤지만 헌법수호위원회가 번번이 이를 부결시키고는 했다. 예를 들어 보수주의 헌법수호위는 경제 개방을 위해 2002년 초에 제정된 신(新)외국인 투자법의 인준을 거부했다.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 정부 내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은 두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다.우선 전통주의적 성직자와 부유한 상인을 중심으로 강력한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호자티에(Hojjatieh)가 있고, 이에 반하는 개혁주의 성향을 가진 정부의 관료들이 대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다 비종교적이고 사회주의적 혹은 시장경제적 성향을 가진 정부 관료들이 국유화 정책과 토지 소유제도 개혁 등과 같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을 주장하는 반면, 호자티에 그룹은 종교적 근거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많은 성직자들은 대지주로 알려져 있고 보수주의자들이 국가 소유의 기업들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음) 개혁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특히 2000년 5월 제6차 의회 선거에서 개혁 성향을 가진 인사들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경제개혁이 원활히 진행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대부분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헌법수호위원회가 개혁 성향의 정부 정책에 지속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현재 사법부와 이란 경제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파들은 외국인 투자를 통한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원하지 않고 있다’고 중동의 경제전문지 MEED는 수차례 지적했다.

이란의 종교 지도자들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시아파 이슬람의 정치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시아파의 등장은 이슬람의 창시자인 사도 모하메드 사후(死後) 계승권 분쟁으로 시작된다.시아파는 오직 모하메드의 자손들만이 이슬람의 지도자(imam)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도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를 후계자로 추대했다. 그러나 알리는 3명의 칼리프가 모하메드를 승계한 후에야 이슬람의 지도자로 선출될 수 있었고 그마저 2년도 안 돼 살해당했다. 시아파는 수니파 우마위야 왕조의 창시자 무아위야가 알리와 그의 장남 하산(Hasan)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하산의 동생 후세인(Husayn)도 680년에 이라크의 카르발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죽었다. 이처럼 살해와 박해를 지속적으로 받아온 시아파는 다수파인 수니파와 달리 ‘숨은 이맘’인 구세주 사상을 가지고 있다. 알리의 이맘 지위는 후세인을 거쳐 12번째 자손까지 계승되었다. 시아파는 어린 나이에 이라크의 사마라시(市)에서 사라진 제12대 이맘이 죽은 것이 아니고 ‘숨은 이맘’으로서 언젠가 지상에 구세주로 나타난다고 믿는다.

따라서 집단 예배 인도자로서 종교적 권위만 가지는 수니파의 이맘과 달리 시아파의 이맘은 알라와 ‘숨은 이맘’을 대리해 현세를 통치할 수 있는 정치적 권한을 부여받는다. 이란의 하메네이가 대통령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는 것도 이 같은 사상에 따른 것이다. 또 이맘의 지위는 절대적이다. 이란의 대통령은 행정부만 담당하면서 정부의 조직을 관리하고 관료들을 지휘하는 국무총리의 지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란의 이슬람 헌법은 종교세력이 주도하는 헌법수호위원회가 의회의 모든 결의를 심사·인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img3L
따라서 대부분의 중동 정세 분석가들은 개헌 혹은 보수파의 타도 없이는 이란의 현재 통치구도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미국은 북핵 문제와 더불어 이란의 핵 개발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우려는 1995년초 러시아가 이란에 1,000MW 규모의 원자로를 제공할 것을 결정했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부터다. 미국·영국·이스라엘은 이란이 수년 내에 핵무기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음을 국제사회에 일제히 경고했다. 당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핵무기를 생산하려는 의도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고 발표했지만 미국은 계속 이란이 핵무기 생산을 위해 우라늄 농축을 진행 중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핵 시설은 “평화적 목적”

이라크전쟁이 끝난 이후 이란의 핵 개발 의혹에 관한 정황들이 계속 공개되고 있다. 일본 교도(共同)통신은 6월14일 이란이 지난 5월 IAEA에 실험용 중수로(重水爐)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고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중수로는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핵 시설이다. 이란이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중수로(40MW급)는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230㎞ 떨어진 지역에 세워질 것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이 중수로는 이란이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핵심 증거로 미국과 이란 반체제 인사들이 수차례 지목했던 시설이다.

이란은 지속적으로 중수로 건설 계획을 밝히며 ‘평화적 목적’이라는 입장을 강조했다. 골람레자 아가자데 이란원자력기구(AEOI) 의장은 6월10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란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추가 의정서 서명에 반대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먼저 평화적인 핵 발전 프로그램을 위한 최신 기술 획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아가자데 의장은 “IAEA가 약소국들에 대한 차별을 종식하고 모든 회원국에 공평한 핵 기술 접근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자신들에 대한 핵 의혹을 거듭 제기하는미국을 겨냥해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과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지난 3개월간 6팀의 IAEA 사찰팀이 핵 시설을 조사했고, 이는 우리의 투명성을 증명하는 것”이라면서 “IAEA에 신고하지 않는 핵 시설은 이란에는 없다”고 거듭 밝혔다.

그러나 미국은 “어떠한 형태의 핵 개발도 용납할 수 없다”며 조건 없이 IAEA의 핵사찰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이라크와 전쟁을 벌인 미국으로서는 이란의 핵 개발을 어떠한 형태로든 묵과할 수 없다며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미국은 또 러시아가 핵 연료를 제공하기로 합의하고 민간 주도로 경수로가 건설되고 있기 때문에 우라늄 농축 시설과 중수로 건설을 강행하는 것은 핵무기 개발 의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임을 강조했다.
img4R
이란 ‘제2의 이라크’ 되나

양국의 논란에 대해 IAEA는 지난 6월16일 빈에서 개막된 정기 이사회에서 “이란이 NPT의 부속 의정서에 서명하고 IAEA가 이란의 신고 시설 외에 모든 의심 시설들을 사찰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동 전문가들은 “결과적으로 금명간 IAEA를 포함한 국제사회는 이란에 핵 사찰을 보다 강력하게 요구하게 될 것이고, 이 같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은 이란사회에 다시 한번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핵 사찰을 다시 수용한다는 것은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10여 년을 대치하던 이라크가 ‘쉽게’ 무너져 연합군 군정 하에 놓이면서 미국은 이란을 중동내 ‘유일한 미국의 주적(主適)’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이란이 미국에 강력히 대항하는 유일한 중동 국가가 된 것이다. 시리아와 리비아는 이미 미국에 대한 화해의 손짓을 보내고 있고 수단과 예멘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 결국 화살은 이란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라크전쟁 중에도 미국은 이란이 이라크전쟁 중 혹은 전후에 이라크 내부정치에 개입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이슬람혁명으로 충격을 받았던 미국은 시아파가 전체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이라크가 ‘이란식 신정국가’로 향하는 것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확인했다.

미국은 이란이 전후 정치적 공백상태인 이라크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다. 더욱이 미국이 석유를 노리고 이라크를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미국의 대이란 군사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대규모 유전 및 가스전이 위치한 카스피해에 접한 이란이 석유전략적 측면에서 미국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 미국이 이란의 정권교체 혹은 점령을 달성한다면 미국의 세계 에너지 수급 체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란에 대한 금명간 미국의 직접적인 무력행사는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재선을 준비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전쟁으로 지나치게 부각된 공격적인 이미지를 당분간 중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때문에 미국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이라크 전후 복구사업에 집중하면서 이란에 대한 외교적, 경제적 압박수단을 동원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국내경제 및 정치·사회적 불안정을 겪고 있는 이란으로서는 미국의 ‘압박’자체가 견디기 힘든 부담이 될 수 있다.

2003년 07월호 | 입력날짜 2003.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