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브라이트 회고록 이시우 2005/02/27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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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입수]올브라이트 前 미 국무장관 회고록 ‘마담장관’ 발췌요약
“김정일은 워싱턴 방문 거부했지만, 對美 수교 원했다”
외부기고자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열린 만찬에서 건배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올브

올브라이트가 전하는 김정일의 발언록

■ “미군은 한반도 안정 역할을 맡고 있다”
■ “미사일 수출은 외화벌이, 보상해 준다면 수출 중지할 것”
■ “군부, 對美관계 개선 놓고 50대 50으로 갈려”
■ “(反美 의식 키우려)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다”
■ “스웨덴식 경제 모델과 태국에 관심 많다”
■ “열흘 단위로 새 外畵 챙기고, 오스카 영화 좋아해”

내가 국무장관 자리를 떠나고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뒤 지난날 클린턴 행정부가 시도했던 한반도 정책이 어떠했는가는 더욱 명확해졌다. 이 글은 한반도 긴장완화에서부터 북한 핵 개발에 이르기까지 내가 미 국무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미국이 한반도 정책과 관련해 잡았거나 놓쳐 버린 기회들(opportu nities)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전쟁이 그치고 40년이 지난 뒤인 1993년 2월 나는 유엔 주재 미 대사가 됐다. 그러나 북한을 보는 나의 시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북한 체제의 근본 성격이 바뀌지 않았던 탓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독재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일성은 그의 생애 말기에 핵무기 개발에 집착했다.

북한은 옛소련과 동구권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냉전시대가 끝난 뒤 이들 국가와의 관계를 상실한 데다 잇따른 자연재해로 경제는 엉망이 됐다. 핵 개발 야망은 냉전이 막을 내린 뒤 북한의 급격한 경제 퇴조 때문에 더욱 서둘러 추진되었을 것이다. 1993~94년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관리 체제에서 탈퇴하겠다고 발표한 첫 국가가 됐다.

그러면서 북한은 핵 원자로에서 연료봉을 제거한 뒤 플루토늄을 추출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럴 경우 5~6개 쯤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 위기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긴장 상태는 거의 정점에 이르렀다. 실제로 전쟁이 터질 조짐도 없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유엔에서 나는 북한 대표의 독설에 가득찬 연설을 들어야 했다. 그가 싸움을 걸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발언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잠자코 있었다. 내 연설 차례가 오자 이렇게 말했다.

“토요일은 나의 생일입니다. 북한 대표의 옛 냉전시대의 수사학적 발언을 듣는 동안 내가 40년은 더 젊어졌다고 느끼게 됐습니다. 그 점에 대해 북한 대표에게 감사드립니다. 물론 이는 북한 대표가 뜻한 바는 아니겠지만….”

對北정책 검토의 3가지 바탕

클린턴 행정부는 평양의 핵무기 개발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 원자로 공습을 포함한 여러 가능한 조치들을 검토했다. 다행히 북한은 악착같이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로버트 갈루치 대사는 평양 당국과 길게 협상을 벌여왔다.

1994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주선으로 회담을 열었고, 이른바 ‘1994 북·미제네바협정’(Agreed Framework)을 맺었다. 이 협정은 북한으로 하여금 원자로를 폐쇄하고 8,000개의 연료봉에 봉인(封印)을 붙여 IAEA 감독 아래 플루토늄 생산설비를 동결하도록 요구했다.

그 반대급부로 미국은 한국·일본 등 우방국들과 함께 두 개의 민간용 핵발전소(경수로)를 지어 주기로 했다. 북한은 ‘IAEA 감독 아래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했다는 것을 투명하게 보여주기 전에는 경수로 가동에 필요한 최종 부품을 받지 못한다’는 데 동의했다. 일부에서는 한반도의 모든 이슈를 다 해결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지만, 제瑠謀河ㅐ?한반도가 부닥친 위기와 북한 핵무장 가능성을 막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여전히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1997년 1월 내가 국무장관이 되자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대치 상황이 낳을 위험을 줄이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다. 세 가지 요소가 나로 하여금 보다 분명한 노력이 당장 요구된다는 판단을 내리도록 이끌었다. 첫째 요소는 북한의 허약함이었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긍지로 여겨 왔다. 그러나 1994년 그가 죽고 아들 김정일이 뒤를 이어받자 북한은 식량·비료·연료를 외부 세계의 도움에 기대게 됐다.

우리에게 제기된 물음은, 어려움에 처한 북한이 고립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책임 있게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무모한 행동을 저지를 것인가였다. 우리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북한이 책임 있는 쪽으로 그 정책을 펴 나가도록 영향력을 끼치고자 했다.

둘째 요소는 1997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했다는 점이었다. 냉전시대 한국의 역대 통치자들은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의 위협을 강조했다. 김대중은 그들과는 달랐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당시 나는 전국민주학회(NDI, National Democratic Institute, 전 세계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국제적 비정부기구. 올브라이트 는 현재 NDI 회장직을 맡고 있다-편집자) 대표로 서울을 방문했다.

비록 자택에서 연금 상태에 있었지만, 김대중은 한국 민주화를 위한 뚜렷한 비전을 펼쳐 보였다. 헤어지기에 앞서 그는 붓글씨로 내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주었다.

‘참되고 실천적인 길을 걷는다면 언제든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다.’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나는 그 액자를 들고가 그의 서명을 다시 받았다. 김대중을 만나면서 나는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를 떠올렸다. 둘 다 옥고를 치른 뒤 대통령직에 오른 인물들이다. 공식 면담에서 72세의 김대중은 내게 그의 새로운 대(對)북한 햇볕정책을 설명했다. 한국의 역대 집권자들은 북한과의 화해를 입으로만 떠들었지만, 김대중은 실제로 평화공존을 추구할 생각이었다.

세번째 요소는 북한의 군사력 과시(military prowess)였다. 지구상에서 북한 정권처럼 국내경제정책(butter)과 국방정책(guns)을 뚜렷이 차별화한 정권은 없다. 국민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가운데 북한은 100만명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미사일 같은 정교한 무기들을 생산, 판매해 왔다. 미사일과 관련 기술은 북한의 주요 외화벌이다.

1998년 북한이 발사한 3단계 대포동 미사일을 좀 더 개발한다면 미국 영토에도 닿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장거리 미사일과 그 탄두에 탑재할 수 있는 핵무기 개발은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백남순·조명록과의 만남

이러한 대북정책의 세 가지 요소를 검토한 끝에 클린턴 대통령과 나는 전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에게 미국의 한반도정책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맡겼다. 처음에 페리는 그런 일을 맡기를 망설였지만,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마침내 수락했다. 한반도에서의 판단착오는 전쟁으로 이어져 수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동아시아의 안정은 물론 3만7,000명의 주한미군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곧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페리는 판단했을 것이다(나는 한국 방문 당시 휴전선으로 가 망원경으로 북한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곳은 비옥한 땅과 메마른 황무지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한 북한 장교가 마찬가지로 망원경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페리 전 장관은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보좌역, 찰스 카르트만 한국평화회담특사의 측면 지원을 받았다. 페리는 (북한의 미사일 개발 위기로 인해 대결과 긴장 상태를 이어가는) 현상유지(status quo)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미국이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발휘해 북한과 협상을 통해 포괄적이면서도 단계별로 문제를 풀어가자는 안을 내놓았다. “북한이 머지않아 붕괴할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1999년 5월 페리와 셔먼은 평양에서 북한 관리들과 접촉하고 미국이 협상할 뜻이 있음을 전했다. 북한이 넉 달 동안이나 뜸을 들이다 내놓은 답변은 긍정적인 쪽이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계획돼 있던 또 다른 미사일 발사 실험을 멈추겠다고 밝혔고, 클린턴 대통령은 비(非)군사부문의 교역, 금융 국제결제, 여행 그리고 관리들끼리의 접촉 제한을 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동안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2000년 6월 평양에서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회담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진행됐다. 곧 이어 남북이산가족 상봉 모임이 열렸고, 2000년 올림픽 게임 개회식에서 남북한 선수가 함께 입장했다. 김대중은 그의 남북 화해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무도회에서 춤 상대가 없는 여자(wallflower) 같은 처지에 익숙해 있던 북한 외교관들은 외교 무대에서 눈길을 끌게 됐다. 2000년 7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모임에서 북한과 미국의 외무장관이 처음으로 만나 회담을 갖게 됐다. 15분 예정의 회담에 앞서 백남순 외교부장과 내가 서로 악수를 나누자 사진기자단이 번갈아 가며 세 번이나 몰려와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록을 세웠다.

“백남순에게 별로 기대를 걸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부드럽고 프로 외교관의 자세로 나를 대했다. 회담은 1시간 넘게 이어졌다. 한 가지 안건은 클린턴 대통령이 윌리엄 페리 전 국방을 평양으로 파견했듯, 김정일 위원장이 고위급 특사를 워싱턴에 보낼 것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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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쪽에서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 안건에 대해 빨리 답변을 주지 않았다. 석 달 뒤인 2000년 10월 김정일은 마침내 군부 서열 2위인 조명록 부원수를 고위급 특사로 파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북한의 대외정책이 어떻게 이뤄지든 북한 군부가 그 결정에 참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조명록은 국무부에서 나와 만났을 때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30분도 채 안 돼 그가 백악관에 도착했을 때는 견장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군 정복 차림이었다. 그는 김정일의 친서를 클린턴에게 전하면서, 평양으로 초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클린턴은 “그 제안을 검토하겠지만, 먼저 평양 방문을 성공리에 끝낼 수 있도록 사전 조율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명록은 보다 명확한 답변을 요구했다.

김정일, “대화로 푼다면 못 해낼 일 없다”

클린턴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먼저 평양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조명록은 “만약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함께 온다면 우리는 모든 문제를 풀 답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조명록의 임무는 클린턴의 평양 방문 약속을 받아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울러 조명록은 북한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과 관련해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몇 가지 건설적인 제안을 들고 나왔다.

만약 클린턴·김정일 평양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면 동아시아는 전보다 훨씬 덜 위험한 지역으로 바뀔 듯 보였다. 그런 까닭에 조명록이 “예비단계로서 미 국무장관을 먼저 평양으로 초대하라”는 우리측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강한 호기심을 품게 됐다.

내가 평양에서 부닥친 민감한 문제는 일정을 어떻게 짤 것인가였다. 북한 관리들은 김일성 묘소 방문을 강력히 주장했다. 통상적으로 이는 간단한 의례절차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벌인 당사자였다. 5만4,000명의 미군을 포함해 수백만 명의 한국인들이 전쟁에서 희생당했다. 그리고 미국을 비난하는 선전 체제를 구축했고 그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국민들을 세뇌시킨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묘소 방문이 외교적 필요(diplomatic necessity) 절차’라는 판단에 따라 김일성 묘소로 갔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그 어떤 존경심을 바칠 수가 없었다.

묘소는 김일성기념궁전 안에 있었다. 그곳에서 워싱턴에서 만났던 조명록 부원수를 다시 만났다. 그와 짧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내는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다른 모든 북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나는 미국 국기가 그려진 핀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골라 달고 다녔다.

김일성 묘소에 들른 뒤 나는 커다란 아파트 단지 가까이 자리한 한 유아원을 방문했다. 나는 잘 교육받은 5살짜리 어린아이들과 어울려 춤을 추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는 그 춤에 맞춰 아이들이 부른 노래는 반제(反帝) 투쟁의 영광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평양에서 세계식량프로그램(WFP)의 지역 책임자도 만나 얘기를 들어 봤다. WFP는 내가 방문했던 유아원을 포함해 800만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대 주고 있었다. WFP 식량의 상당량은 ‘제국주의자’ 미국이 제공한 것이다.

일정상 또 다른 복잡한 문제는 김정일과의 면담 일정이 구체적으로 잡혀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이틀 동안의 평양 방문에서 둘째 날에 면담이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렇지만 어느 북한 관리도 그에 대해 정확히 말해 주지 않았다.

정교하게 짜이는 국제 외교 관례에 비춰볼 때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도착 첫날 점심 식사를 하고 있던 중 오후에 예정된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그 대신 ‘위대한 지도자’로 일컬어지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기로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호기심을 품고 면담을 기다렸다. 우리는 김정일에 대해 잘 몰랐다. 그가 폐쇄적인 인물이고, 정치보다 영화 제작과 감상에 흥미가 많다는 것쯤만 알 뿐이었다. 그러나 그를 근래에 만났던 김대중과 중국·러시아 관리들은 “김정일이 아는 것이 많고, 유머 감각도 풍부하며,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알려 주었다.

김정일은 그가 늘 입는 카키색 옷을 입고 활짝 웃으며 내 두 손을 잡았다. 나는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키가 비슷했다. 둘이 함께 서자,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한 북한 사진기자는 1950년대 구형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김정일은 둥근 얼굴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머리카락은 놀랍도록 부풀린 모습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김정일은 김일성 묘소를 참배해 준 점과 아울러, 김일성 사망 때 클린턴 대통령이 조문 메시지를 보내온 데 대해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또한 식량을 비롯한 미국의 인도주의적 지원도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클린턴이 평양을 방문하기를 희망했다. “만약 서로 성실하고 또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가 못 해낼 일은 없다”고 말했다.

미사일 수출은 외화벌이?

북한과의 외교는 시간을 길게 두고 천천히 관계를 회복해 나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내 경우 평양에서 이틀 뒤면 떠나야 하고 또 3개월 뒤면 국무장관 자리를 그만둬야 했다. 그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주요 정책들을 설명한 뒤 김정일에게 “북한 미사일과 관련한 만족스러운 합의 없이 내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권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정일은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며, 미사일 문제는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시작한 것은 “1년에 세 번쯤 오로지 통신위성을 쏘아 올리려는 평화적인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만일 제3국이 북한 통신위성을 쏘아올려 준다면 미사일 개발 명분은 없어질 것인가.

내가 “미국은 북한 미사일 수출을 큰 문제로 여긴다”고 말을 꺼내자, 김정일은 “우리가 시리아와 이란에 미사일을 수출하는 것은 외화벌이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외화벌이가 목적이지요. 그래서 분명한 것은 만약 당신이 그에 대한 어떤 보상을 다짐해 준다면 우리는 미사일 수출을 중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김위원장,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북한의 의도를 몰라 걱정해 왔고, 미사일 생산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단지 외화벌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어요.”
그러자 김정일은 말을 바꾸었다.

“글쎄, 그 대목은 외화벌이만은 아니지요. 우리는 주체(self-reliance) 사상의 일부로써 군사력을 키워 왔습니다.”

그는 “남한의 군사력이 걱정”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만약 남한이 사정거리 50km(500km의 착각인 듯하다-역자 주)의 미사일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지 않겠다. 그런 미사일이 이미 배치됐다면, 어쩔 수 없다. 군부대를 사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러나 생산을 중지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방정책을 편 지 10년이 됐고, 우리가 중·소 두 나라와 맺은 군사동맹이 해소된 지도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 우리 군 장비들을 새로 바꿔야 하지만 할 수 없다. 만약 남북한 간에 군사적 대치 상황이 없다면 무기들도 쓸모 없겠지만….”

김정일은 그가 내게 한 말들을 언론에 발표해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기자회견에 앞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면담이 거의 끝날 무렵 김정일은
“북한 문화와 예술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큰 볼거리를 마련했다”며 평양 5·1경기장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날 저녁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김정일과 함께 내가 자리를 향해 걸어가자, 군중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환영했다. 물론 나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아챘다. 텅 빈 평양 거리와 경기장 안의 모습은 너무 대조적이었다. 저 모든 사람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김정일, “저것이 마지막 발사가 될 겁니다”

그날 공연은 올림픽 개막식을 보는 것보다 더 엄청났다(on steroids). 그리고 그 공연이 (김정일이 말한 대로)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성을 띤 것임을 곧 깨달았다. 그것은 북한 공산당 창건 50주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어서 그리 즐겁지 못했다. 공연은 엄청나게 큰 이미지의 낫·망치 그리고 붓을 카드섹션 팀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러고는 갑자기 운동장 곳곳에서 어린이들이 꽃을 들고 춤을 추었고, 병사들이 창검을 앞으로 내미는 동작을 되풀이했다.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대포에서 사람을 쏘아 그물에 내려앉히는 묘기를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로 이뤄진 카드섹션 팀이 재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여러 형상과 전투적 구호를 만들어 냈다. 동시에 벼락 같은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공연자 규모는 모두 합쳐 10만명은 돼 보였고, 그것을 바라보는 군중은 20만명쯤이었다.

카드섹션 공연 중간쯤에 대포동 미사일 발사를 묘사하는 대목도 들어 있었다. 관중들의 박수소리가 가라앉기도 전에 김정일은 나에게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통역자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저것은 우리의 처음 미사일 발사입니다만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그날 저녁 공연과 그의 이 같은 발언은 복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김정일의 발언에 기운을 얻었고, 앞으로도 그의 그런 생각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저녁에 공식 만찬 모임이 열렸다. 김정일과 나는 건배했고, 조명록 부원수와도 건배했다. 다른 사람들이 거듭 내게 다가와 빈 술잔을 채우고 건배를 제의하는 것을 김정일이 말려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김정일은 남들보다 술을 훨씬 덜 마셨다. 그는 프랑스산(産) 포도주로 나를 접대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듯 보였다. 이런저런 대화 도중에 북한에 컴퓨터가 얼마나 있는가 물어 봤다. 그는 “수십만 대가 있으며, 나 자신 3대를 사용한다”고 답변했다. 그는 나중에 미 국무부 웹사이트 주소를 물어 봤다.

김정일은 영어 교육에도 관심이 높았다. 옆에 선 통역자의 영어가 어떠냐면서 “김대중의 통역자만큼 잘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가련한 통역자가 곤란한 처지에 몰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김대중의 통역자는 여자인데, 내가 겪어본 통역자 가운데 아주 우수한 사람으로 꼽힐 만하지요. 김위원장의 통역자도 같은 수준이네요.”

김정일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통역자도 마찬가지였다. 김정일은 북한 사람들이 더 많이 영어를 말했으면 하는 희망을 나타내면서 “한국계 미국인이 북한에 와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했다. 만찬 끝 무렵 김정일이 영화광(狂)이라는 얘기가 사실인지 물어 봤다. 그는 밝게 웃었다.

“맞습니다. 나는 최근에 만들어진 영화를 열흘 단위로 챙겨 봅니다. 오스카(Oscar)상을 탄 영화들을 좋아하지요.”

북한 군부, 대미관계 놓고 50대 50으로 갈려

그 다음날 오후 김정일을 다시 만났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 대표단이 도착 첫날 여러 질문 항목이 담긴 질의서를 북한 대표에게 건네주었는데, 그날 늦게라도 답변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김정일은 그 질문서를 보여달라더니, 옆에 배석한 북한 행정 전문가들에게도 상의 없이 직접 답변을 주기 시작했다. ‘만약 금전적 보상을 해 준다면 북한 미사일 수출을 당장 중지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 항목을 읽더니 그는 “Yes”라고 답변했다. ‘미사일 수출 중지는 포괄적인 것으로, 모든 미사일 관련 부품, 훈련, 기술을 포함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항목에도 그의 답변은 “Yes”였다.

‘만약 남한이 다국적 미사일 기술통제(MTC) 체제에 가입한다면 북한도 가입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김정일은 “이 문제는 더 논의해 보자”며 즉답을 피했다. 나는 전문가들로 짜여진 실무단이 별도로 만나 회담을 갖자고 제안했고, 김정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레이시아를 회담장소로 꼽았다.

주한미군에 대한 김정일의 시각은 어떠할까. 김정일은 냉전 이래로 북한 정권의 시각이 달라졌다고 입을 열었다.

“미군은 지금 한반도의 안정 역할을 맡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우리 군부 내에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놓고 50대 50으로 갈려 있어요. 우리 외교부에서도 미국과의 대화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지요.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곳(북한)에도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이곳에서는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어요. 남한에서도 마찬가지고…. 결국 그 해결책은 북·미 관계 정상화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나는 김정일에게 우리의 대화가 미국과 북한 양측이 서로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이렇게 맞장구쳤다.

“남한 사람들이 여기 왔을 때 이렇게 물어 봤어요. 내 머리 위에 뿔이 났는지 확인하러 왔느냐고. 그들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많은 오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이를테면 우리는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습니다. 이곳 아이들은 미국인을 그냥 ‘미국인’이라고 배우지 않고 ‘미국 개자식들’(American bastards)이라고 배우지요.”

그날 저녁 우리는 또 다른 만찬 모임을 가졌다. 의전 절차(protocol)에 따라 우리가 주최한 모임이어서 양식과 한식을 곁들였다. 김정일과 나는 선물을 주고받은 다음 경제 문제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김정일은 북한 경제 사정이 악순환을 겪고 있음을 인정했다. 당시 북한은 잇따른 가뭄으로 수력발전소를 가동할 수 없었고, 제철소 용광로 등은 석탄 부족으로 손상을 입었으며, 전기가 끊겨 (광산을 가동하지 못하는 바람에) 석탄을 캐낼 수 없었다.

나는 김정일에게 북한 경제 개방을 고려하고 있는지를 물어봤다.

“‘개방’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 용어 정의부터 해야 합니다. 나라마다 개방 방식이 다들 다르니까요. 우리는 서구식 개방은 용납 못 합니다. 우리 전통을 파괴하는 개방은 안 됩니다.”

그는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뒤섞은 중국식 모델에는 흥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스웨덴 모델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는 스웨덴식 모델을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관심을 가진 또 다른 모델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태국 모델을 꼽았다.

“태국은 오랫동안 왕정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독립을 유지해 왔고, 그리고 시장경제입니다. 나는 (스웨덴 모델뿐 아니라) 태국 모델에도 관심이 있어요.”

나는 태국 왕정과 태국 시장경제, 둘 가운데 어느 쪽에 김정일이 더 관심을 갖고 있을까 생각해 봤다.

김정일, 무엇을 바라는가

그 다음날 아침 나를 태운 비행기는 동쪽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날아 서울로 향했다. 비무장지대 위를 날다가 만에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에서 나는 청와대로 김대중 대통령을 다시 방문했고, 일본 외무장관과도 만났다. 그리고는 워싱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번 방북 결과를 정리해 보았다.

무엇보다 북·미 정상회담 안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숙제였다. 김정일은 정상회담을 매우 진지하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북한은 미사일 문제에 대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양보할 자세가 돼 있는 듯 보였다. 나는 평양에서 보상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를 피했지만, 식량과 연료 등을 북한에 건네는 비용은 미사일이 수출돼 생겨나는 위협을 방어하는 데 들 비용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김정일로부터 받은 느낌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김대중은 “김정일은 상대방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지적인 인물”이라고 평했다. 나는 김대중의 그런 평이 정확하다는 것을 평양에서 확인했다. 김정일은 고립된 인물이었지만, 외부세계의 정보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비참한 경제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망에 빠져 일을 저지를 인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는 확신에 차 있는 듯이 보였다. 그는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보다 미국과의 정상적인 외교 관계 설정을 바라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대미 관계 정상화는 (북한이 주장해왔듯)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북한을 지켜줄 것이고, 국제사회는 김정일을 업신여기기 어려운 인물로 보게 될 것이다.

워싱턴에 돌아온 뒤 바로 결정해야 할 사안은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에 관한 것이었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샌디 버거와 나는 “만약 북한 미사일 문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타결짓는 쪽으로 도움이 된다면 클린턴이 평양으로 가야 한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클린턴 자신도 평양에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북한의 외교적 스타일, 우방국들의 입장, 미 국내정치적 여건 등 고려해야 할 여러 사안들로 말미암아 평양행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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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김정일과 합의한 대로) 11월 첫째주에 북·미 양국의 실무 전문가들이 말레이시아에서 접촉했다. 미 실무자들은 김정일·클린턴 정상회담이 이뤄질 경우 미국이 바라는 전제조건들을 제시했다.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은 양국이 지켜야 할 의무를 비롯해 세부적인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점을 북한 실무자들에게 강조했다. 클린턴이 평양에 가서 세부적인 사안을 놓고 협상을 벌일 만큼 시간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은 북한이 미사일 생산, 시험발사, 배치, 수출을 일절 중단하는 조건으로 북한의 통신위성을 제3국에서 쏘아올릴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우리는 북한이 이미 (휴전선 가까이에) 배치한 미사일도 단계적으로 제거하기를 희망했다. 나아가 북한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바랐다.

아울러 북한이 1994년 북·미제네바협정을 엄격히 지키고 비밀 핵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않기를 바랐다. 미국이 지닌 북·미협상의 큰 지렛대는 (김정일이 바라는 대로) 양국 관계의 정상화였다. 우리는 위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김정일의 희망을 받아들여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여러 사람들과 토론 끝에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관한 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것으로 확신했다.

우리는 북한이 미사일 수출 제한에 동의할 것이고, 그럴 경우 이란과 시리아 등이 미국의 우방국들을 위협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했다. 아울러 북한은 일본과 한국을 겨냥한 미사일 추가 배치를 하지 않는 데 동의할 것으로 보았다.

중동평화협상이 클린턴의 평양行 발목 잡아

김대중은 클린턴의 평양행을 아주 강력히 권했다. 그는 “김정일이 클린턴의 평양 방문길이 성공을 거두기를 바랄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클리턴의 임기가 거의 끝나 가는 무렵이어서)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미 의회의 많은 의원들과 우파 정치분석가들은 북·미정상회담 자체를 반대했다. 그 배경에는 그들이 그동안 추진해 오던 국가미사일방어(MD) 계획을 클린턴·김정일정상회담이 흐트러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일부 반대자들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비롯, 냉전 시기에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에 있었던 여러 정상회담의 성과를 깎아내리면서, 클린턴의 평양 방문은 북한의 사악한 정권을 적법화(legitimate)시켜주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클린턴은 임기 말이어서 이미 시기가 늦었으니, 차기 대통령에게 북한과의 추가 협상을 넘기라”고 주장했다. 조지 부시가 2002년말 대선에서 승자가 된 뒤 클린턴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나의 평양정상회담을 반대합니까.”

이에 대해 부시는 “그것은 당신이 결정할 사안”이라고 답변했다. 부시의 그런 답변은 지극히 옳았다고 본다. 우리는 어느 때나 단 한 사람의 국정(國政) 최고책임자를 두고 있을 뿐이다. 클린턴의 평양행을 가로막은 것은 비판자들의 주장이나 북한과 북·미 협상을 둘러싼 잠재적인 시각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막바지에 몰린 중동평화협상이었다. 대사 출신으로 클린턴 행정부에서 한반도정책 자문관 역할을 맡아온 웬디 셔먼은 2000년 12월의 대부분을 클린턴의 평양행 준비에 쏟았다. 셔먼은 북한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받아내려고 했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경우 북·미정상회담을 어느 날로 잡을 것인가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백악관은 최종 결정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중동평화협상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 휴가철이 다가오면서 클린턴은 (서울과 도쿄에 들르는 것을 포함한) 평양행이냐, 아니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줄다리기를 매듭짓는 일에 매달려야 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김정일에게 워싱턴을 방문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북한 지도자들은 그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뒤늦게 평양회담이 아닌 워싱턴회담으로 일정을 바꾼 점 그리고 체면(face)을 중시하는 동아시아 외교의 특징을 떠올리면 북한의 거부는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반도 긴장을 북·미정상회담으로 풀어내지 못한 점은) 불행한 일이었다.

다시 유령과의 싸움

한국어는 동사(動詞)의 끝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말의 뜻이 확 달라진다. 국무장관을 그만두면서 한반도 상황도 많은 다른 가능성들이 열려 있었음을 느꼈다. 나는 클린턴 행정부가 대북한 외교정책에서 부시 행정부에 열린 가능성을 남겨두었다고 판단했다. 권력 이동기에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 지명자는 내게 “우리 새 행정부 외교팀은 당신이 추진해 왔던 정책들을 대체로 이어받을 것입니다”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예상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2001년 3월 부시를 만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던 김대중은 “부시 새 행정부가 대북한 정책 검토를 끝내기 전까지는 북한과의 협상을 이어 나가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2002년 여름 부시 행정부가 마침내 북한과 일련의 대화를 시작하려 했을 즈음 새로운 골칫거리가 떠올랐다. 북한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1994 북·미제네바협정 위반이었다.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이 이를 추궁하자 북한 관리는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 뒤에 벌어진 상황은 세월이 한 바퀴 돌아 마치 클린턴 행정부가 처음 출범했던 무렵에 부닥쳤던 것과 비슷한 유령(specter)과의 싸움과 긴장이 진행중이다. 2003년의 해법은 1994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대(對)북한 정책은 다음 네 가지가 기본 원칙(principles)일 것이다. 첫째, 한반도는 비핵화돼야 하며, 북한의 핵 무장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 북한과 적극적인 직접대화가 바람직하지만, 그 대화는 평양에 대한 어떤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핵 확산과 전쟁 위험을 막는 수단으로서다. 셋째, (한국·일본을 비롯한) 미국 우방국들과의 완전한 조율 아래 대북정책이 진행돼야 한다. 넷째, 대북 협상은 하루라도 빨리 이뤄져야 한다.

2002년 11월 나는 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나는 또 다시 청와대로 가 김대중을 만났다. 아마도 마지막 만남일 것이다. 그는 아들의 비리 문제로 지지도가 떨어진 상태였다. 우리 둘은 그 동안 북한 문제를 놓고 함께 노력했던 일들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많은 사람들은 햇볕정책이 실패했다고 낙인을 찍었지만, 김대중은 그런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처음부터 나는 모든 일이 그렇게 빨리 바뀔 것으로 기대를 품지는 않았어요.”
북한 핵무기 개발에 대한 견해를 물어 봤다.

“큰 걱정거리입니다. 북한은 그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을 때까지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 지도자들은 아무도 믿지 않아요. 그들은 미국이 (1999년 코소보전쟁때) 핵무기도 없는 세르비아를 혼냈던 일,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핵무기를 보유했던 파키스탄이 지금은 미국의 동맹국이 된 것을 지켜보았어요. 그들은 핵무기가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아줄 것으로 믿고 있어요.

북한으로 하여금 안보상의 위협이 없다는 점을 확신시켜 줘야 합니다. 우리는 클린턴 행정부 임기 말에 한반도 긴장을 누그러뜨릴 아주 좋은 기회를 가졌었지요.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당신과 클린턴 대통령이 내게 보낸 지지를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2003년 09월호 | 입력날짜 2003.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