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PHP연구소-북한의 최종 결말 이시우 2005/02/27 283
http://monthly2.joins.com/monthly/article/mj_article_view/0,5459,aid%252D212324%252Dservcode%252D9100106,00.html
[긴급입수] “북한의 최종 결말- 동아시아 냉전은 이렇게 무너진다” 발췌요약
일본 PHP연구소 2003년 8월11일 초판 발행
글 ·요약 최영재 월간중앙 외부기고자 글·하세가와 게이타로 長谷川慶太郞언론인(cyj@joongang.co.kr)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포옹하는 장쩌민(위), 사스 유행 당시 베이징을 떠나는 중국인들.(아래사진)
최악의 北中 관계…“후진타오의 中國, 5년내 北韓 버린다”
2002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동아시아 정세, 특히 북한에 극히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건이 잇따랐다. 그 한 가지는 이라크전쟁이고, 또 한 가지는 중국 광둥(廣東)성에서 발생하여 중국 전 국토로 확대된 신형 폐렴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다.
SARS는 중국의 문제로 북한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중국공산당과 북한의 관계는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밀접하고도 복잡하다. 중국의 동향은 북한이라는 나라를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다.
■ SARS가 뒤흔든 것
SARS 확대로 명백해진 것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가 이러한 대규모 유행병에 대처하면서 결정적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SARS는 적어도 2003년 2월 이미 광둥성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2개월에 걸쳐 중국 정부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도대체 환자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물론 발생 상황마저 확실하지 않은 사태에 빠져버렸다.
이 사태를 인민해방군병원의 노련한 내장외과(內臟外科) 권위자가 미국의 주간지에 흘려 세계는 충격을 받았다. 유엔의 전문 기관인 세계보건기구(WHO)가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지만, 중국 정부가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 바람에 WHO가 격노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왜 중국공산당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던 것일까. 고의일까. WHO가 제대로 정보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불가능했다면, 분명히 중국공산당이 고의로 은폐했다고 봐도 틀림없다. 은폐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중국에서 이러한 병이 발생했다면 중국의 위생 관리에 대한 불신감이 커진다는 점, 둘째로 중국의 경제활동에 지장이 생기는 점, 셋째는 현재의 중국 체제 자체에 대한 불신감이 생길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유언비어가 떠돌게 되어 있다. 당초 이상한 감기가 유행하는 듯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디서 나온 것도 아니고 치료에는 흑초(黑酢)가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가 발생해 순식간에 흑초가 매진되기도 했다. 또 그대로 베이징이 봉쇄된다는 소문도 퍼졌다.
베이징(北京)이 봉쇄되면 우선 식료품이 동날 우려가 있다. 그 때문에 서민들이 슈퍼마켓에 쇄도하여 식품매장 선반을 모두 비워 버렸다. 또 베이징이 봉쇄되기 전에 탈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교통기관도 공황 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음식점이라든가 영화관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곳이 감염원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휴대전화로 사람들 사이에 차례차례 전달되어 무서운 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중국은 휴대전화 2억2,000만대가 보급되어 있는 나라다. 이를 안 사람들이 일제히 행동한다. 그렇게 되면 이미 정부의 통제도 효과가 없게 된다.
■ 江澤民과 다른 노선으로 나가는 胡錦濤
이 사태가 겨우 국가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의 귀에 들어간 것은 4월 상순이었다. 후진타오는 즉각 위생부장, 일본으로 말하면 후생노동대신의 책임을 추궁하여 경질했다. 이어 정보를 은폐했다고 해서 베이징 시장도 바꾸었다. 이후 정보를 은폐했다는 증거가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해고하겠다면서 정보 공개에 전력을 다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것은 상당히 과격한 개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질된 위생부장은 장쩌민(江澤民)의 측근이다. 후진타오는 2002?11월 제16회 당대회에서 당총서기에 선임되었는데, 전임자인 장쩌민은 계속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즉 인민해방군의 최고지도자 지위에 있다.
후진타오는 군 최고지도자 측근의 목을 잘랐고, 그 후 전력을 다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자세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 후에도 120명에 이르는 의료기관 간부들을 정보를 은폐했다는 이유로 해임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중국은 대응을 강화했지만, 그래도 WHO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계속 의심을 품었다.
정보 입수의 자유 그리고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한 중국공산당은 나라를 통치할 힘을 가질 수 없다. 이를 인식한 후진타오는 장쩌민과는 다른 노선으로 정치의 민주화, 자유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는 공산당 일당독재를 서서히 해체해 나가는 노선이다.
■ 중국의 노선 대립이 북한의 운명을 결정한다
중국이 후진타오의 노선을 계속 추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예를 들면 북한 지원에 관하여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 한 번도 정보를 공개한 일이 없다. 어느 정도의 물자·에너지·무기·탄약·인원을 들여보낸 것인가. 한 번도 공표한 일이 없었다.
img2R2003년 4월23일부터 3일간, 베이징에서는 미국·중국·북한이 참가하는 3자회담이 열렸다. 그 직전 중국을 방문한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趙明祿)은 우선 처음으로 중국군을 방문하여 중국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두 사람과 회담하고 “우리나라를 온존시키는 것은 중국으로서 국방상의 가장 중대한 과제”라고 말했다.
북한이 무너지면 중국은 1,300km라는 조·중 국경에서 한국 및 미국과 직접 마주해야만 한다. 중국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조명록의 말은 그러한 경우를 피하려면 북한을 지원하라는 의미였다. 문자 그대로 ‘공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투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공갈을 하게 된 배경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중국 내부에서 두 가지 큰 입장이 부닥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종래와 같은 체제를 견지해 나간다는 방침과, 공산당 일당독재를 서서히 해체해 정치적 자유와 정보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후진타오 정권이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은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대립이며, 이 대립의 결과가 북한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대로 간다면 5년 후, 즉 2008년에 중국에서는 제17차 당대회가 열린다. 그때 후진타오는 물론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의 운명은 불확실하다. 말하자면 그의 영향력은 최대한 5년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북한의 운명도 ‘최대한’ 5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최대한’ 5년 후가 될 때까지는 실제로 여러 가지 일이 있다. 예를 들면 17차 당대회가 열린 다음 해인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열린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세계 전체가 참가한 올림픽은 공산권에서 개최된 적이 없다. 1980년의 모스크바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문에 서방 국가가 참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 아래서 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으로서는 뭐라고 해도 개최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공산당 일당독재를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적어도 그 시점에서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대립도 결말이 날 것이다.
이에 따라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통제가 대폭 완화되면, 북한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북한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공산당 일당독재를 견지하는 노선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지원이 없어지면 틀림없이 북한은 붕괴할 것이다.
반복하지만, 이 5년이라는 것은 ‘최대한’의 시나리오다. 그 후에는, 예를 들면 상하이만국박람회가 있다. 게다가 그보다 약간 전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좋다.
■ 중대한 의미를 갖는 중국의 서미트 참가
2003년 6월1~3일 프랑스에서 ‘에비앙 서미트’가 열렸다. 선진국 서미트라는 회합은 1975년부터 시작되어 에비앙 서미트는 28회째가 된다. 제1회 선진국 서미트 개최지는 란비였고, 지스카르 데스탱이 주도권을 쥐었는데, 당시 참가국은 프랑스·영국·독일·이탈리아·미국·일본 등 6개국이었다.
그 후 캐나다가 가입하여 선진 7개국회의가 되었다. 그리고 2002년부터 러시아가 완전한 형태로 참가해 현재는 G8이라고 불린다. 중국으로서는 여기에 참가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선진국 서미트에 참가하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면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캐나다 서미트에 참가하면서 핵무기 해체 비용 200억달러가 러시아에 지원되었? 이 덕분에 러시아는 소유즈 로켓을 발사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 비용은 미국이 돌봐주고 있다. 그 외에도 러시아에 대한 광범위한 경제 지원과 국제사회에서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용인되고 있다. 그것도 캐나다 서미트에 참가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한 환경이 제공되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대단히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솔직한 표현을 사용하면 이러한 경제적 환경을 빼고는 중국의 성장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SARS로 경제가 커다란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SARS가 중국에 준 경제적 피해는 얼마나 클까. 예를 들면 중국의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002년에 10%였던 광저우교역회의(廣州交易會)의 2003년 3월15일부터 5월15일까지 계약 금액은 전년 대비 1%밖에 안 된다. 즉, 광저우교역회의 전년을 100으로 했을 경우 2003년은 그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중국 전체로 보면 전년에는 10%를 차지했는데, 2003년에는 그 100분의 1, 전체의 0.1%가 된다는 것이다.
해외로부터의 비즈니스 손님과 관광객은 격감 정도가 아니다. 예를 들면 광저우교역회가 연 전시회에 2002년에는 37만명이 전 세계로부터 찾아왔지만, 2003년에는 불과 2,000명이었다. 베이징의 피해도 크다. 베이징반점(베이징의 특급 호텔)은 숙박이 정지되었고, 베이징 시내는 코스트 다운에나 비슷한 광경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중국경제는 위험한 사태에 빠졌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또한 지금까지의 경제성장을 생각하더라도 중국의 선진국 서미트 참가 여부는 절박한 문제다. 그러나 중국이 선진국 서미트의 정식 멤버가 되려고 한다면,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해체해야 한다는 준엄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서미트라는 국제회의의 성격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냉전의 부산물이다. 냉전 하에서 서방 여러 나라를 단결시켜 공산권에 대항하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여기에 러시아가 완전한 모양으로 가입하는 데는 3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는 국민이 자유롭게, 직접 또는 간접선거로 정치 최고권력자를 선출해야만 한다. 둘째는 자유로운 선거라는 것은 국민에 대한 지배정당이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 곧 특정 정당의 일당독재여서는 안 된다, 즉 정당 간의 자유로운 경쟁에서 선출해야 한다. 더욱이 세번째, 완전한 시장경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러시아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정식 멤버가 되었다. 중국은 현재는 그 세 가지 조건에 전혀 맞지 않는다.
에비앙 서미트가 열리기 직전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개도(開都) 400년 기념제가 있었다. G8 멤버들은 우선 그곳에서 얼굴을 익혔다. 기념제가 있은 후, 다른 선진국 서미트 멤버들은 프랑스 에비앙으로 향했다. 후진타오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왔다. 그곳에서 후진타오만이 중국으로 귀국하는 상황이 전개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후진타오가 유연한 대응을 보였다면 함께 에비앙으로 갈 수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후진타오는 에비앙 서미트에 참가했다. 그 일은 5월 중순에 결정된 것이지만, 이는 금후의 동아시아 정세를 볼 때 매우 중요하다.
다만 중국은 정식 멤버로 서미트에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손님 자격이었다. 서미트라는 것은, 그 참가 자격에 명확한 국제적 약속이 있지 않다. 원래 덜 공식적인 한 회합이다. 거기서 논의되는 테마나 내용은 ‘셀파’라고 부른다. 각국이 그에 따라 의견을 조정하고, 정식 서미트로 받아들인다.
서미트의 마지막에 발표될 공동성명도, 문안은 셀파 동료들이 조정해 작성한다. 일본의 경우 전통적으로 재무성의 재무관, 종전 같으면 대장성의 재무관이 셀파 역할을 수행한다.
이 셀파에 끼이는 것이 정식 멤버이고, 게스트는 셀파에 참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체적인 토의 내용이라든가 공동성명 최종 문안을 결정하는 자리에 게스트국 사람은 들어가지 않는다. 러시아가 이전에 서미트에 게스트로 참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후진타오의 참가도 게스트 자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가 가벼울 이유는 없다.
게스트 자격이었지만 미국 또는 일본과 이후 서미트의 큰 테마인 북한문제를 함께 해결할 결의를 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 정세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 중국의 노선 전환이 빨라진다
img3L앞에서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대립’이라는 말을 썼지만,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해체하는 노선에 장쩌민이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을 말한다면 2002년 10월 장쩌민이 부시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했을 때 장쩌민과 부시 사이에 합의가 될 수 있었다.
그때 장쩌민은 3일간 머물렀는데, 그 동안 장쩌민은 중국이 금?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인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 달에 개최될 16차 당대회에서는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 ‘3개 대표’사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등을 부시 대통령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렇게 요해(了解)를 구한 뒤 당대회에 임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때 후계자가 후진타오라는 것도 말하였고, 부시 대통령은 이를 납득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그 후의 당대회에서도 그 노선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준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중 관계에 대해서는 대립하고 있는 것 같이 논하는 쪽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이라크전쟁도, 중국은 한 번도 미국에 강하게 반대한 적이 없다. 오히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라크 사찰에 대한 비협력적 자세를 비난하는 결의인 1441호에 찬성하였다. 거부권을 행사하기는커녕 스스로 찬성한 것이다.
후진타오 노선은 기본적으로는 장쩌민 노선이다. 다만 양자 사이에는 속도라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장쩌민은 완만한 속도로 일당독재 체제를 서서히 풀어 가겠다고 하는 소프트 랜딩 노선이다. 후진타오는 ‘완만하게’를 말할 여유가 없이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자세를 SARS가 한층 더 강화시킨 것이다.
SARS의 경제적 피해가 아주 심각한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중국은 그 위기를 회피하기 위하여 철저한 격리 작전을 벌였다. 다행히 SARS는 감염 후 10일 이내에 발병한다. 10일간 격리해서 발병하지 않으면 감염원이 될 위험성은 없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격리자 수도 방대하다. 또 지방으로 가면 건강보험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가령 이환(罹患:병에 걸림)되더라도 병원에 갈 수도 없고 또 만일 감염자가 나왔을 경우에는 가족이 그 환자를 감추어 버린다. 격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이 SARS라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정보 공개다. 감염자 내지 접촉자, 발생된 장소 정보를 알아내 의사의 감시 하에 두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둘째는 감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염 위험이 있는 사람을 전원 격리하고 점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용 시설이 필요하다.
이 또한 쉽지 않다. 예를 들면 베이징에서는 발병자만 4,000명을 넘는 시점에서 수용 능력은 2,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인민해방군 공병대를 동원해 바라크를 건설하고, 군의관을 1,200명 징집하여 대처했다.
셋째는 모두 음압(音壓)이어야 한다. 즉, 감염자의 타액이라든가 기침이 외부로 나오지 않도록 바깥보다 기압을 낮게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한 설비가 필요하다. 이 또한 쉽지 않다.
SARS의 심각성 여하에 따라서는 앞에서 언급한 최대한 5년이라는 기간이 대폭 단축될 가능성도 있다. 즉,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고, 이는 적어도 2008년까지 북한을 지금 상태로 그냥 두지 않는다는 전망과 연결된다. 즉, SARS 이전의 북·중 관계는 이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지만 SARS 이전의 중국과 북한의 관계도 결코 좋다고 할 만한 것은 못 됐다. 특히 지난 1~2년 동안 중국은 북한에 대하여 불신감이 강했다. 그 관계는 일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북한이 중국에 대하여 정보를 밝히지 않는다는 사정이 있다.
■ 북한이 중국 첩보망을 파괴했다
예를 들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2002년 10월 장쩌민은 부시 대통령을 방문하였을 때 “당신은 북한이 핵개발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북한의 핵 개발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이는 중국이 북한 내부에서 가지고 있던 정보 수집 네트워크가 모두 파괴된 탓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01년을 전후해 중국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북한 당국에 적발되어 총살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의 정보가 중국으로 전혀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북한 핵 개발 정보는 당연히 중국이 누구보다 먼저 알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 당국도 경악했음에 틀림없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경계를 보다 강화한 것은 9·11 동시다발 테러 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전후부터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으로 이라크·이란과 함께 북한을 지명했다. 중국은 테러 국가로 인정된 북한을 동반자로 헤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때문에 중국은 아주 신경질적으로 북한을 관찰한다. 그것이 또한 북한으로서는 불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니 중국은 더욱 경계를 강화했다.
■ 美·中·北 3자회담의 진실
예를 들면 2003년 4월23일 미·중·북한의 3자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4월초 이 회담의 의제를 결정하기 위해 당시 중국의 부총리 겸 외교부장이었던 첸치천(錢其琛)이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그곳에서 김정일에게 3국이 회담을 하는데 거기에 북한도 참석하도록 타진했다.
김정일은 미국과 직접회담이 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퇴짜를 놓았다. 그러자 첸치천은 “우리는 단호한 결의”를 했다고 말하고 3일간 북한에 대한 원유 공급을 중단했다.
원유를 중단시킨 영향은 그 자리에서 나왔다. 결국 북한은 3국회담을 받아들이고, 겨우 4월23일 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회담의 휴식시간에 놀랄 만한 사태가 일어났다. 북한 외무성 미주국 부국장이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접근하여 “한 말씀 올리겠는데, 우리나라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우라늄 처리, 연료봉 8,000개도 처리를 끝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안전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외화벌이를 위해서도 사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즉, 북한은 핵무기를 해외에 팔 의향이 있다는 것을 미국 당국에 직접 알린 것이다.
잡담 자리라고는 하지만, 제임스 켈리가 경악한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정식 회담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의 진의를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또, 미국으로서는 그러한 짓을 할 기분도 아니었다. 이미 북·미 관계는 끊어져 버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안 파월 미 국무장관은 격노했다. 핵무기를 제3자에게 판다는 것은 사담 후세인 이상이다. 만일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이 이를 손에 넣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를 들어 시카고에 있는 세계 최대의 선물·현물거래소(Merchandise Exchange)를 겨냥한다면 시카고 시가지를 폐허로 만들 우려마저 있다.
파월이 지난 5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모든 수단을 다해 북한으로부터 핵 내지 그와 관련된 물자를 제3국에 파는 것을 저지하겠다”는 강한 자세를 표명한 것은 이러한 경위에서다.
이대로 나가게 되면 제2차 북·미·중 회담이 열리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은 더 이상 대화로 해결하려는 의욕이 소멸되고 있다. 북한이 교섭하려고 한다면 상대는 중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실력을 행사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의 원유 공급을 전면적으로 정지시킬 것인가다.
■ 원유 공급이 북한 先軍政治의 생명선
img4R북한의 치명적 약점은 연료 부족이다. 북한은 1994년에 설립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협정에 근거하여 미국으로부터 연간 50만t의 중유를 공급받아 왔다. 또한 거의 같은 양의 원유를 중국이 사실상 거의 무상이나 다름없는 저가로 공급해온 것으로 생각한다(대다수 전문가들은 중국이 제공하는 중유가 70만t 정도라고 보고 있다).
합계 100만t이라는 액체연료의 공급이 북한으로서는 생명선이다. 만일 중국으로부터의 원유 공급이 완전 중단되면 북한은 경제활동은 물론 인민군의 전력이 아주 단기간에 붕괴, 소멸될 것은 뻔한 이치다.
2002년 12월부터 KEDO 협정에 기초한 중유 공급을 미국은 정지했다. 이에 더하여 중국이 만일 원유 50만t 공급량을 전면적으로 끊는 사태가 발생하면 아주 단기간에, 어쩌면 반년 내지 9개월 전후로 북한 인민군은 모든 무기의 조작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북한 인민군이 장비한 무기는 모두 소련제 또는 모방이다. 소련제 지상무기는 거개가 디젤 엔진이다. 디젤 엔진은 연료가 끊어지면 연료의 경로에 공기가 차므로 엔진을 다시 시동하기 위해서는 공기를 빼내지 않으면 안 된다. 가솔린 엔진은 실린더 가운데 기화된 가솔린을 들여보낸 뒤 점화선을 가동시켜 불꽃을 튀기면 즉시 엔진이 시동된다.
디젤 엔진의 경우는 점화선이 없기 때문에 피스톤의 가운데 액체연료를 기화시킨 공기를 불어넣고 이어 디젤 엔진의 피스톤을 압착공기를 통하여 급속히 밀어 올려 연료의 발화점 이상의 단열압축을 행하여 그 상승된 온도로 연료를 발화시키는 방식이다. 연료를 끊은 후 엔진 시동은 디젤 엔진이 가솔린 엔진보다 훨씬 곤란하다.
즉, 북한 인민군이 장비한 중병기는 전부 연료 보급을 장기간 끊은 채 그대로 방치하면 엔진 재시동이 곤란하다. 그 때에는 인민군의 모든 중병기가 가동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엔진이 전혀 시동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전차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연료 보급이 없으면 모든 중무기는 ‘쇠 부스러기’의 산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 김정일이 외치는 ‘선군정치’(先軍政治)는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것은 군부의 활동을 유지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체제다. 이는 개인독재 체제임과 동시에 군부독재 체제다. 이를 견지하는 데도 연료 보급이 필수불가결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연료 보급이 끊어지면 그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극히 취약한 체질을 북한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 ‘혁명운동’을 추진해온 중국공산당의 과거
제16차 당대회가 열리기 한 달 전인 2002년 10월, 장쩌민 총서기가 부시 대통령에게 상세하게 설명한 내용은 다음달 열리는 제16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의 기본적인 성격을 ‘혁명정당’(革命政黨)에서 자유주의 국가의 일반적인 정당, 즉 국민정당(國民政黨)으로 체질을 완만한 속도로 개선하고 개혁해 나간다는 노선이었다.
적어도 장쩌민 총서기로서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미국주도의 일극지배 체제’ 아래에서 중국공산당이 중국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해서는 별 대안이 없었다. 중국공산당이 나아가야 할 기본 노선에 대하여 미국정부 수뇌의 이해와 지지를 구하는 길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의 노선 전환은 장쩌민 총서기가 부시 대통령에게 설명한 바와 같이 그 다음달의 제16차 당대회에서 모두 정식 결의로 채택되었고 또한 최고지도부의 인사도 바뀌었다. 여기서 새로운 제3세대로 불리는 지도층이 중국의 정권 중추를 장악하는 시대가 막을 열었다.
중국공산당이 ‘혁명정당’이기를 지속하려고 한다면 주변 제국에 대하여 ‘공산당 일당독재를 실현하기 위한 혁명’, 즉 ‘공산혁명’을 수출하여 공산주의 운동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노선으로 가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역으로 말한다면 중국공산당이 ‘혁명정당’을 그만두기로 한다면 인접국에 공산당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아시아 전역에 공산 제국을 차례차례 건설해 나간다는 노선을 이제는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중국공산당은 혁명운동을 추진하면서 ‘혁명정당’ 역할을 해야 한다며 매진해온 정당이다. 이것은 필자의 사소한 경험의 하나이지만 중국공산당의 영향이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어 있던 1980년대 당시 필리핀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키노 대통령 밑에서 중앙정부의 국장을 한 인물로부터 연락을 받은 일이 있다.
그의 요청은 마닐라에 와서 필리핀 경제인을 초청한 대규모 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 취지를 전하러 온 국장의 개인비서에게 필자는 이렇게 물었다.
“내 신변 안전을 보증할 수 있는가가 최대의 문제다. 당신이 근무하는 국(局) 안에도 NPA(人民解放軍, 즉 共産게릴라)로 생각되는 구성원이 몇 사람 있을 것이고, 당신도 그 인물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 누군가에게 나의 일을 말해 확실하게 안전이 보증될 수 있는가를 물어봐 주기 바란다. 회답은 어쩌면 3개월 걸릴 것이다. 회답을 얻으면 다시 한번 도쿄(東京)에 오라. 그 다음으로 내가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하고 싶다.”
그 사자(使者)는 아주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필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귀국했다. 꼭 3개월 반이 지났을 때 재차 일본에 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NPA 멤버로 생각되는 인물이 전날 나에게 이렇게 회답했다. ‘문의한 인물에 대한 신변의 안전은 보증할 수 없다’는….”
그 답을 듣고 나는 즉석에서 “그렇다면 마닐라행은 그만두겠다”고 답했다.
그런 교제가 있은 후 그는 필자에게 물어왔다.
“하세가와 게이타로, 당신은 어떻게 회답에 3개월이 걸린다는 판단을 했습니까. 나로서는 큰 의문입니다.”
필자는 답했다.
“NPA는 베이징의 영향 아래 있는 조직이다. 그들은 자기 임무를 벗어난 문제에 대답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내용을 베이징에 전달하여 회답을 기다린다. 베이징과 정보를 주고받는 데는 정확히 3개월이 필요하다.”
이처럼 필리핀 NPA는 확실하게 중국공산당 영향 하에 들어가 있었다.
■ ‘노선 전환’에 담겨 있는 심각한 문제
동일한 일이 홍콩에서도, 마카오에서도, 또는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도, 말레이시아에서도, 싱가포르에서도 발생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중국공산당이 ‘혁명정당’을 고집한다면 그들의 영향 아래 있는 동남아 무장조직이 이러한 테러 행위를 반복 실행할 것이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979년 중국은 베트남을 ‘징벌’하기 위하여 북부 국경에 50만명의 대병력을 집결시켜 베트남 국경을 넘어 대규모로 공격작전을 벌였다. 그 징벌이라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영향과 지원 아래 정권을 유지해온 캄보디아의 폴 포트 그룹이 인접국 베트남의 군사공격으로 무너질 위험에 직면한 데 대한 것이었다.
혁명정당인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자유세계로부터 ‘테러 조직’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化國)이 수립된 뒤 수십 년 동안 중국공산당의 기본노선으로 정착되었다. 그러한 과거를 가진 중국공산당인만큼 그 기본 노선이 일거에 바뀌어 현실에 반영됨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적어도 중국공산당 최고책임자가 자유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최고책임자인 미국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날 정도로 간단할 수 없다.
혁명정당인 중국공산당이 그 혁명정당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 방대한 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책임을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노선 전환 뒤 어떻게 자유세계 전체의 이해를 구하고 승인을 받을 것인가. 자유세계의 이해를 얻는 것은 중국의 외교 노선을 완전히 바꾸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준엄한 문제가 숨어 있는 것이다.
■ 생존이 걸린 개혁 개방의 함정
중국공산당은,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 붕괴되면서 유럽의 냉전은 동구진영의 패배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음을 알고 있다. 또 동아시아의 냉전도 곧 종결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만일 냉전 종결이 유럽에서 일어난 것과 동일한 패턴으로 일어난다면 중국공산당은 해체, 붕괴, 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포기하면 그것이야말로 공산당에 속해 있는 6,000만명의 당원은 모든 분야의 지도적 지위에서 쫓겨나고, 공산당 소속이라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한 사태를 피하고 싶다면 공산당 자신의 체질을 서서히 바꾸고, 적어도 혁명정당으로서의 활동 또는 주변 제 국가에 대한 혁명 수출을 엄금하고 주변 국가와 우호관계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대외노선을 전환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당독재 체제로 지배해온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계속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기본 노선을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자유세계의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정치 자유를 서서히 중국 국민들에게 용인해야 한다. 경제활동도 계획경제라는 이름 아래 국가권력의 개입을 폐지하고 시장경제에 자국을 편입시키는 노선밖에 없는 것이다.
1978년 당시의 최고실력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이 이른바 개혁개방 노선을 선언한 뒤 중국경제는 급속한 성장기에 들어갔다.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하면서 중국의 경제성장이 촉진되고 중국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져 가난한 농민국가에서 공업국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이는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 저변을 파 무너뜨렸다.
이런 일을 알면서도 최고실력자인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노선을 도입했다. 이 외에는 중국공산당이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할 길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 ‘개혁 개방 노선’은 볼 만한 성과를 올렸다.
그로부터 25년, 그 동안 중국의 경제규모는 미화 기준으로 거의 5배로 확대되었다. 중국의 국제수지는 거액의 흑자를 계상할 수 있었고 또한 외환보유고는 25년 만에 20배로 급증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경제성장과 함께 중국은 느린 속도지만 점차 국민의 자유를 확대해 나갔다. 이것 또한 개혁개방노선의 커다란 성과 중 하나다. 오늘날 중국은 일당독재 체제로 정치권력과 행정은 공산당이 독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저변 곧 첫번째 하부조직인 농촌에서는 촌장 선거가 서서히 자유화되었다. 공산당이 지명한 후보가 아니더라도 촌장에 선출될 가능성이 생겼다.
이것은 지방자치의 싹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중국공산당은 그것이 전면적인 정치자유화, 즉 공산당 지배가 붕괴로 연결되지 않도록 정치의 자유 범위를 말단 자치조직에만 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일반국민의 반발은 굉장하다. 공산당 간부와 함께 지방 행정기구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관료들의 부패와 타락 때문이다.
■ 중국의 완충지대 북한
img5L이제 중국은 국내의 정치투쟁만 심각해지는 것이 아니다. 개혁 개방 노선을 추진해 나가면 필연적으로 빈부격차가 생긴다. 개혁개방 노선이 개시된 25년 전, 농촌과 도시 간의 1인당 소득격차는 기껏해야 1대 1.2 정도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특히 연해지역(沿海部)의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 예를 들면 상하이(上海)에서는 극히 고액의 소득을 얻는 ‘신흥부자’(New Rich)라고 불리는 계층이 이미 탄생하였고, 그들이 소비시장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상하이와 그 주변 인구는 3,000만명에 이르며, 이는 이탈리아 전 인구의 거의 75%에 상당한다. 또 그 가운데서 1,000만위안 이상의 고소득을 얻고 있는 층은 적어도 전체의 15% 이상, 즉 500만명을 웃도는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이탈리아의 상층, 중산계급 이상의 인구를 넘는 수다. 이러한 고소득층이 있는 한편 상하이에는 중국 전 국토로부터 유입된 노동자도 급증하고 있다. 베이징도 같은 모양새다.
예를 들자면 베이징의 공식 등록 인구는 1,200만명인데, ‘정부의 승인 또는 인가’를 얻지 않고 베이징에 들어온 ‘민공조’(民工潮)라고 불리는 농촌 출신 노동자가 300만명이 있다.
따라서 현재 중국에는 세계 최고급 소비재를 구할 수 있는 고급품시장과, 방대한 극빈층 소비시장 같은 2중구조가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혁명정당인 공산당이라면 노동자와 농민, 즉 사회 최하층 근로자들을 지지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사실상 그렇게 구해왔다. 하지만 혁명정당이기를 포기한 중국공산당 당원들은 역시 관료·지식인들이다.
더욱이 제16차 당대회 이후에는 민간기업 경영자들까지 당원에 포함되었다. 그렇게 되면 점점 중국공산당은 사회 최하층이 아니라 중산층 이상의 고소득자를 대표하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사태에 가장 큰 충격을 받고 엄중한 대응을 재촉받고 있는 나라는 다름아닌 북한이다. 1948년에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을 통하여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당시 갓 출범한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에 대규모 군사력을 투입하였고 막대한 군수품의 보급을 부담했다.
그리고 전후에는 쑥밭이 된 북한의 국토를 재건하면서 사회간접자본의 정비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 노동력까지 중국이 부담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다. 그 이후 북한은 중국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실상 중국의 ‘종속국’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상의 자리에 오른 김일성은 이러한 종속관계에 얽매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중·소 대립이 표면화되면서 맞서 있던 양국에 그때그때에 따라 지지 기반을 바꾸어 요구한다는 어떤 의미로는 ‘이고고약’(二股膏藥, 허벅지 안쪽에 붙인 고약이 이쪽 저쪽 다리로 옮겨다닌다는 뜻)과 흡사한 행동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여 최대의 이익을 획득하겠다고 하는 김일성은, 주체성을 확보해 가면서 종속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는 일종의 속임수와 흡사한 교묘한 외교노선을 전개하는 외교술에 숙달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북한이 이러한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 때문이었다. 북한은 냉전이 계속되던 세계에서 휴전선의 정전 라인을 통하여 미국과 한국의 군사력과 정면 대결을 계속해 왔다.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위하기 위한 군사적 ‘완충지대’역할을 계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중국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강하게 요구할 수 있었다. 중국측에서 말한다면, 냉전이 계속되는 한 북한이 요구하는 경제원조에 응해야 한다는 처지에 몰려 버렸다.
냉전이 종결되면 그 관계가 일변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노선 전환과 함께 북한도 스스로 노선을 바꾸고 보조를 맞추어 ‘냉전 종결’후의 세계 정세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면 중국과의 대립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까지 북한의 대외 노선은 중국공산당과는 반대로 ‘혁명 노선’을 철저하게 추진하고 있다. 당연한 일로 중국과의 대립이 발생한다. 그 대립관계는 급속하게 양국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완만한 속도로 해체하지 않고는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냉엄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간극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고, 일정 단계가 되면 완전한 단절로 이어진다는 전망은 결코 망상이 아니다.
■ 북한의 특구 구상에 대타격 준 중국인 실업가 체포
2002년 7월, 북한은 그때까지의 경제정책을 크게 바꾸어 모든 소비물자의 국가 통제와 배급 제도를 철폐하고 시장을 통하여 수급 균형에 따른 가격 변동을 허용한다는 노선을 도입하였다. 더욱이 물가를 크게 인상하여 소비물자 배급은 국가권력이 아니라 시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했다. 또한 그 물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모든 복무원의 급료를 대폭 인상했다. 그리고 일한 만큼 수입이 증가하는 일종의 자유화를 도입하였다.
또 북한은 가장 부족한 자본과 기술을 외국으로부터 도입하기 위해 아주 한정된 국토의 일부에만 외국자본과 외국 기업의 진출을 용인하는 ‘경제특구’를, 나진·선봉 외에 38도선에 가까운 개성과 압록강 하구에 있는 신의주 등 2군데에 새로 만든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법안을 인민회의 임시회의에서 제정한다는 어수선한 행동을 개시했다.
신의주, 즉 압록강 하구에 전개할 경제특구는 홍콩 자본을 중심으로 중국 기업의 진출도 안중에 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그 지구의 행정장관으로 김정일한테서 행정권을 받은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인 양빈(楊斌)이라는 인물에 취임을 요청했다. 그런데 중국 당국이 양빈의 신병을 구속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양빈은 당장 베이징으로 송환되어 구속되었다. 그 결과 행정조직의 우두머리를 잃어버린 신의주경제특구는 사실상 해체, 붕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이 경제특구는 신의주라는 지역에 외국 자본을 허용한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 행정장관에 임명될 예정이던 양빈의 말을 빌린다면 “법률도, 환율도, 통화도, 행정기구 인사도, 토지 소유도, 전권을 김정일에게서 위임받는다”는 것이었다.
이 양빈이라는 인물은 꽃을 재배하고 수출하여 큰 성공을 거둔 사람만은 아니다. 상하이·홍콩·방콕·싱가포르·마닐라·도쿄와 동아시아 전역의 생화시장에 대량의 꽃가지를 공급하기 위해 자가용 제트기 3대를 보유한 새로운 유형의 비즈니스맨이다. 그는 대형 제트기를 이용하여 매일같이 선양(瀋陽)의 생화공장에서 도쿄의 꽃시장으로 꽃을 공급하는 업무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중국은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자유세계로부터 강하게 받고 있다. 이는 북한과 미국 간의 대립관계가 이제는 결정적인 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과 중국의 관계도 악화되고 있다. 김정일은 2002년 가을 이후 핵무기 재개발 움직임을 오히려 북·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지렛대로 이용한다는 노선을 내놓았다. 북한은 점점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노선을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다. 이것이 현재의 북한의 상황인 것이다.
2003년 10월호 | 입력날짜 2003.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