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콘의 정체 이시우 2005/02/27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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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량의 월드워치] 아메리카의 戰士 네오콘의 정체
팍스 아메리카를 꿈꾸는 민주적 제국주의자
정우량 월간중앙(Chuwr@joongang.co.kr)
시카고대 교수였던 리오 스트라우스를 사상적 모태로 한 네오콘은 <위클리 스탠더드>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Ⅰ‘미국은 제국주의인가’
지난 여름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서는 내로라 하는 이론가들이 한 가지 주제를 놓고 무더운 여름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논쟁을 벌였다. 여러 싱크탱크들이 주최한 포럼, TV와 라디오 토크쇼, 그 밖의 각종 모임에서 같은 주제로 갑론을박했다.
토론의 주제는 다름아닌 ‘미국은 제국인가’였다. 처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진보 진영이었지만, 공화당 정통 보수파도 이에 못지않게 미국의 제국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조지 H. W. 부시 전(前)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C. 보이든 그레이는 한 모임에서 발표한 성명을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 제국의 위험성을 알리고, 건국 초기의 전통과 가치로 돌아가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고위 관리를 지낸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 경제전략연구소(ESI) 소장은 현재의 미국을 ‘인정받지 않은 제국’이라고 비판했다. 닉슨 센터 소장 디미트리 사임스도 현재 미국이 ‘제국의 궁지’에 몰려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미국의 제국화를 반대하는 ‘공화국을 지지하는 위원회’를 결성했다.
미국이 제국임을 인정하자는 세력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신보수주의자(네온콘서버티브, 약칭 네오콘)들이다. 네오콘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위클리 스탠더드’ 편집인 윌리엄 크리스톨은 “사람들이 우리를 제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며 미국이 제국임을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외교위원회(CFR) 선임연구원 맥스 부트도 미국이 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하는 ‘자유의 제국’임을 역설하면서, 지구 차원의 개입 확대를 위해 군사비를 지금의 2배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역사학 교수로 ‘제국:영국 주도 세계질서의 흥망과 지구제국의 교훈’이라는 책을 쓴 니얼 퍼거슨은 얼마 전 네오콘의 아성(牙城)인 미국 기업연구소(AEI)에서 가진 특별 강연을 통해 “미국은 제국이며, 제국이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미국은 더 이상 제국임을 부정하지 말아야 하며, 과거 영 제국이 세계의 번영과 진보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던 사례를 잘 연구하라”고 충고했다.
제국이라는 용어는 지금까지 주로 좌익 진영에서 미국을 공격할 때 써 왔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미국이 제국이라는 것은 가당치 않으며, 악의적 중상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세계를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국가 형성을 도와줬다. 제국의 특성을 전제(專制) 지배라고 할 때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대해온 미국은 제국의 적이다. 미국이야말로 제국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자유의 투사’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은 어떤가. 미국은 제국, 그것도 보통 제국이 아닌 ‘지구제국’이다. 현재 미국은 세계 137개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5개 지역사령부를 유지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 사령부를 겸하는 유럽사령부는 유럽·러시아·북아프리카·터키·이스라엘을 맡는다.
중부사령부는 중동·중앙아시아·아프리카, 태평양사령부는 인도를 포함해 동아시아와 태평양, 남부사령부는 중남미 35개국 그리고 지난해 신설된 북부사령부는 미국 본토·캐나다·멕시코를 담당한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처음부터 ‘팽창하는 국가’였다. 19세기 전반 서부 개척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미국은 매입 또는 정복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계속 획득해 나갔다. 미국인들은 영토 확장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명백한 운명’이라고 굳게 믿었다.
서부 개척이 끝나고 북미 대륙에 더 이상 확장할 영토가 남지 않게 되자 미국은 ‘새로운 명백한 운명’을 찾아 북미 대륙 바깥, 즉 해외 식민지로 눈을 돌렸다.
1893년 하와이를 합병한 데 이어,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다. 국무장관 존 헤이는 미국스페인전쟁을 ‘눈부신 작은 전쟁’이라고 찬양했다. 전쟁 승리 후 쿠바·푸에르토리코·괌·필리핀을 차지했다.
역사학자들은 건국 이후 서부 개척까지를 미국 제국주의의 1단계,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를 2단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붕괴까지를 3단계, 걸프전 이후를 4단계로 구분한다. 지난번 이라크 전쟁은 4단계의 본격 개막을 알리는 사건으로 평가한다. 그런 의미에서 네오콘은 21세기 미국 제국주의의 기수(旗手)들이다.
네오콘은 미국의 정치적 가치를 세계에 전파하기를 희망한다. 미국이 추구하는 이상에 따라 세계를 재편해야 하며, 미국의 활동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적성(敵性) 국가들에 대해 선제공격도 불사한다.
네오콘의 주장은 얼핏 보기에 우드로 윌슨이나 존 F. 케네디가 펼쳤던 진보적 외교정책과 흡사하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윌슨과 케네디는 미국의 이상을 국제기구와 협력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반면 네오콘은 국제기구와 국제법을 무시하고 미국의 일방적 판단을 고집한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선임연구원 아이보 달더는 네오콘을 ‘민주적 제국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공화당 안에서 네오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 본류는 네오콘을 가리켜 보수주의의 탈을 쓴 네오임페리얼리스트(신제국주의자)라고 비난한다. 네오콘 역시 자신들이 보수주의 본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작은 정부, 기업 활동 보장, 개인 자유 우선 등은 서로 공통되지만 외교정책에서 보수주의 본류가 고립주의를 내세워 국제문제에 과도한 개입을 반대하는 반면 네오콘은 대외 팽창을 지지하며 국제문제에 적극 개입을 주장한다. 보수주의 본류는 네오콘의 지나친 개입주의가 미국을 위기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Ⅱ 네오콘의 대부 리오 스트라우스
img2R네오콘은 미국 좌파 지식인의 사상 전향의 산물이다. 그들은 본래 민주당 좌파였다.
1960년대말 뉴 레프트(신좌파)가 등장하면서 좌파 진영에서 이탈했다.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네오콘은 뉴 레프트의 고립주의가 대소(對蘇) 타협 노선으로 흐를 것을 우려해 대소 강경론자인 헨리 잭슨 상원의원 휘하에 집결했다.
잭슨이 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 경쟁에서 탈락하자 공화당으로 옮겨, 1980년 레이건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특히 외교·군사 분야에서 실무를 맡아 능력을 발휘했다. 네오콘은 ‘악의 제국’ 소련을 붕괴시킨 것이 자신들의 공로라고 자랑한다.
네오콘의 사상적 모태(母胎)를 찾아 올라가면 리오 스트라우스라는 인물과 만나게 된다. 스트라우스는 네오콘의 우상과 같은 존재다.
스트라우스는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오랫동안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의 정치사상과 니콜로 마키아벨리·토머스 홉스 등 근세 정치철학을 강의했다. 네오콘은 이구동성으로 스트라우시언(스트라우스 추종자)임을 자처한다. 혹자는 네오콘을 ‘리오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3년 세상을 떠난 스트라우스가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살아나 초강국 미국과 세계의 장래를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와 함께 전율을 느끼게 한다.
스트라우스의 정치사상은 극단적 엘리트주의다. ‘불평등은 인간의 기본 조건이며, 정치는 엘리트가 맡아야 한다. 엘리트는 대중을 통치하기 위해 사실을 조작할 수 있으며, 좋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선의(善意)의 거짓말은 용납된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면서 가장 큰 이유로 내세운 사담 후세인과 테러 조직 알 카에다의 연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보유를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네오콘이 “결과적으로 후세인을 제거한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해 잘된 일 아니냐”는 위선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좋은 예다.
마키아벨리와 홉스를 신봉한 스트라우스는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영구평화보다 영구전쟁이 낫다고 생각했다. 평화가 오랫동안 계속되면 사회는 부패하므로 정부는 영구전쟁을 통해 통치를 강화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는 외부의 적이 필요하며, 없으면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고 스트라우스는 주장했다. 스트라우스의 이 같은 주장은 평화 지향의 소극적 외교정책보다 호전적이며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선호하는 네오콘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종교에 대해 스트라우스는 “대중에게 종교는 아편”이라는 칼 마르크스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종교는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불가결한 아편’이며, 대중은 아편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스트라우스의 주장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실패한 것은 대중에게 종교적, 도덕적 기초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네오콘이 자신들은 무신론자거나 종교적으로 세속주의자이면서도 공화당의 강력한 지지 기반인 남부 ‘바이블 벨트’의 기독교 우파 연합, 그 중에서도 개신교 근본주의 세력과 손잡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스트라우스는 1899년 독일 마르부르크 부근 키르히하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곡물상이었던 아버지는 정통 유대교도였지만 스트라우스는 무신론자였다.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한 스트라우스는 1921년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마쳤다.
처음 신학으로 출발해 정치철학으로 바꿨다. 스트라우스는 당시 독일 철학의 주류였던 신칸트주의를 거부했고, 막스 베버의 몰가치적 학문 입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크라테스·플라톤·스피노자·마키아벨리·홉스 등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올바로 해석하는 데 주력했다. 당대 독일 철학자들 가운데서는 마르틴 하이데거를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스트라우스의 사상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사회의 혼란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해 유대인을 집단 학살하는 것을 보면서 스트라우스는 인간성에 대한 긍정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계몽주의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또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자유민주주의는 현실적으로 무효라고 믿게 됐다. 이 같은 믿음은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에 확고히 뿌리내렸으며,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스트라우스는 실존주의가 독일 젊은이들로 하여금 나치의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했다는 이유로 하이데거에 대한 존경을 거둬들였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직전인 1932년 스트라우스는 독일을 떠났다. 친구인 정치학자 칼 슈미트의 도움으로 미국 록펠러 재단의 펠로십을 얻어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스트라우스는 홉스에 관한 저서들을 집필했는데, 지금도 홉스의 사상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책들로 평가받고 있다.
스트라우스는 1938년 미국에 도착해 ‘망명 대학’으로 유명했던 뉴욕의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 몸담았다. 뉴 스쿨에는 유럽 각지에서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도망쳐온 유대계 학자 180명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히틀러가 미국에 준 선물’이라고 불렀다.
1948년 스트라우스는 시카고 대학 철학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시카고 대학은 록펠러 재단이 제공한 엄청난 후원금을 토대로 명문 대학으로 발돋움하는 중이었다. 당시 시카고 대학 총장은 학생들에게 인문 교양 교육을 강조한 ‘시카고 계획’으로 유명한 로버트 허친스였다.
대학은 머리를 쓰는 곳이지 몸을 쓰는 곳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식축구팀을 해체하기까지 한 허친스는 거물급 학자들을 끌어오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스트라우스는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먼과 함께 당시 허친스가 유치한 세 명의 거물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스트라우스는 학생들에게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 학생들은 스트라우스라는 탁월한 교사를 통해 서양 고전 철학자들의 위대한 학문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인기 교수였던 스트라우스는 대형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을 위해 마이크로폰을 몸에 부착하고 강의했다.
학생들은 스트라우스의 강의를 녹음해 강의가 끝난 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해 들었다. 비단 시카고 대학 학생들뿐 아니라 시카고의 종교인과 사회 저명인사들도 스트라우스의 세미나와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당시 스트라우스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는 특히 유대계 좌파 지식인들이 많았다. ‘네오콘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위클리 스탠더드’ 편집인 빌 크리스톨의 아버지다. 언론인 출신 크리스톨은 트로츠키주의자였다.
크리스톨은 부인 거투드 히멜파브를 통해 스트라우스를 알게 됐다. 히멜파브는 ‘한 국가, 두 문화’라는 책을 통해 자유민주주의가 미국사회에 초래한 재앙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보수적 인물이다. 스트라우스를 ‘발견’한 히멜파브는 남편을 스트라우스에게 소개했다. 크리스톨은 1960년대말 민주당 좌파와 결별하고 네오콘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스트라우스를 그 사상적 모태로 삼았다.
현재 네오콘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과 리처드 펄 전 국방정책위원장은 스트라우스의 강의를 듣기는 했지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다.
월포위츠와 펄의 스승은 스트라우스의 수제자였던 앨런 블룸과 앨버트 월스테터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한 블룸은 시카고 대학 철학 교수로 ‘미국 정신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좌익 진보파 학자들의 무책임한 선동으로 미국의 고등교육이 얼마나 황폐해졌는가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월스테터는 안보정책 이론가로 외교정책에서 현상유지라는 수동적 자세보다 현상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이며 공격적 자세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오콘의 공격적 안보 정책은 월스테터로부터 크게 영향 받은 것이다.
Ⅲ 네오콘의 싱크탱크 PNAC
img3L레이건의 뒤를 이은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네오콘은 보수적 국제주의자들에게 밀려 영향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부시는 미국의 힘을 국제적 합의에 따라 사용하기를 원했다.
걸프전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여러 차례 결의를 거쳐 결성된 다국적군이 승리를 거둔 것이 그 대표적 예다. 그러나 네오콘은 부시의 이 같은 온건한 외교 노선이 불만이었다. 당시 국방차관으로 있던 월포위츠 현 국방부 부장관은 1992년 봄 백악관에 ‘방위계획지침’이라는 야심찬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부시와 백악관 수뇌부는 이 보고서를 ‘과격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월포위츠의 방위계획지침은 ‘미국은 잠재적 경쟁국들이 지역적 또는 국제적으로 보다 큰 역할을 맡고자 하는 의도를 미리 차단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이를 위해 ▷지속적인 대규모 군사비 지출을 통해 세계 최강의 군사력 유지 ▷적성 국가들의 WMD 보유와 불량국가 또는 테러 조직으로 확산을 막기 위한 선제공격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 행보를 보다 자유롭게 하기 위해 동맹과 국제 기구의 지위 격하(格下) 등을 권고했다. 현재 아들 부시 행정부의 외교·군사 노선은 월포위츠의 방위계획지침 내용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시의 재선 실패로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 백악관을 장악한 1990년대 내내 네오콘은 방관자로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무대로 복귀할 날을 준비했다.
1997년 워싱턴 DC에 설립한 싱크탱크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계획’(PNAC)은 그 노력의 결실이다. PNAC의 최종 목표는 지구제국 미국 건설과 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 평화, 즉 팍스 아메리카나다.
PNAC 발기인 명단에는 네오콘은 물론 리처드 체니에는 도널드 럼스펠드 등 현 부시 행정부의 실력자들이 망라돼 있다. PNAC는 기존 네오콘의 아성인 AEI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무실도 AEI 빌딩 안에 들어 있다.
PNAC가 추구하는 목표는 부시가 아직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인 2000년 9월 발표한 백서 ‘미국 방위의 재건: 새로운 세기를 위한 전략, 군 그리고 자원’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 백서는 미국이 지구제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 다섯 가지를 꼽았다.
▷남유럽·동남아 그리고 중동에 항구적 군사 기지 확보 ▷전투기·잠수함·해상 함정의 능력 제고를 포함한 미군 현대화 ▷지구 미사일 방어 시스템의 개발, 배치와 우주 공간에서 전략적 우위 확보 ▷사이버 공간에서 ‘국제 시민’ 통제 ▷군사비 지출을 현재의 국내총생산(GDP) 3% 수준에서 최소 3.8% 수준으로 늘릴 것 등이 그것이다.
PNAC 백서는 이어 미군이 맡아야 할 ‘핵심 임무들’을 제시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주요 지역에서 동시에 발생한 복수(複數)의 전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것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필요한 안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경찰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군은 지구제국을 지키는 ‘글로보캅’(지구 경찰) 역할을 맡는 것이다.
PNAC 백서에 실린 내용은 2001년 9월20일 부시가 발표한 ‘미국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 그대로 반영됐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02회계년도 국방비로 책정한 3,790억달러는 ‘GDP의 3.8%’와 정확히 일치한다.
당초 네오콘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기대했던 사람은 호전적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었다. 매케인에 비해 부시는 외교문제에 대해 식견과 적극성 모두 부족했다.
선거 기간중 부시는 미국 외교의 오만을 경계하면서 “미국이 세계에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 세계는 미국을 존경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온건한 태도로 네오콘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네오콘이 지지하는 체니가 부통령 후보가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체니는 부시에게 네오콘을 등용하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네오콘의 충고를 따른 부시의 강경 외교 노선은 대통령선거에서 보수적인 유권자, 특히 기독교 우파의 영향력이 강한 남부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2000년 겨울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부시가 당선되자 네오콘은 대거 행정부로 진출했다. 특히 권력의 핵심인 백악관과 국방부를 장악했다. 국제문제에 어두운 부시를 대신해 사실상 미국 외교를 요리하는 부통령 체니와 국방장관 럼스펠드의 측근 브레인은 거의 네오콘이다.
지난 2월26일 부시는 AEI에서 열린 네오콘 모임에 참석해 연설을 통해 “그대들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브레인 집단이다. 내 정부는 그대들 가운데 20여 명을 핵심 요직에 발탁해 쓰고 있다”고 네오콘을 극찬했다. 부시 행정부에 들어가지 않은 네오콘도 ‘네오콘 네트워크’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현 부시 정권 초기 네오콘은 국무장관 콜린 파월 등 보수적 국제주의자들의 견제로 위축돼 있었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 이후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9·11 테러는 네오콘에는 일종의 ‘축복’이었다.
미국인들은 네오콘이 9·11 테러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했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부시는 네오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다.
2002년 6월1일 부시가 웨스트포인트 졸업식 연설에서 밝힌 ‘부시 독트린’은 월포위츠를 비롯한 네오콘이 10년 동안 준비해온 ‘월포위츠 독트린’을 이름만 바꾼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시월포위츠 독트린을 구성하는 기둥은 일방주의와 선제공격 그리고 이스라엘 적극 지지 등 세 가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이 유지해 온 외교정책을 뒤엎는 것이다. 1945년 미국 지도자들은 영국의 팍스 브리타니카를 재현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의사를 힘으로 관철하기보다 국제사회의 합의를 통해 달성하는 길을 택했다.
소련 붕괴로 유일 초강대국으로 남은 지난 10년 동안 미국은 일방적으로 독주하기보다 유엔 등 국제기구를 통한 ‘신세계질서’를 구상했다. 이에 반해 부시는 미국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많이 국제조약에서 탈퇴했다.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교토(京都) 협약, 탄도탄 요격 미사일(ABM) 금지 조약,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 국제형사재판소(ICC) 등에서 탈퇴함으로써 국제사회를 실망시켰다.
네오콘은 미국이 보유한 슈퍼 파워가 일방주의 체제를 불가피하게 하고 그것을 타당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의 힘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 현재 미국의 GDP는 세계의 20%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가 황폐해진 1945년 세계 공산품의 절반을 생산하던 때에 비하면 훨씬 작은 힘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전후 복구 비용과 치안 유지에 필요한 병력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그 동안 무시해온 유엔에 협력을 구하고, 우방국들에 돈과 병력을 지원해 달라고 손을 벌리는 것을 보면 네오콘이 주장하는 일방주의 체제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불량국가’들이 보유한 WMD 공격 가능성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선제공격을 채택한 것도 미국과 국제사회의 전통을 위반한 것이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행정부 안에서 쿠바에 대한 선제공격론이 제기되자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는 “지난 175년 동안 우리는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나라가 아니었다”며 선제공격 주장을 물리치고 해상봉쇄를 관철시켰다.
선제공격은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다. 만약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과 타이완(臺灣), 이스라엘과 아랍권, 남한과 북한이 상대방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세상은 끝장나고 말 것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도 미국은 그동안 일관되게 친(親)이스라엘 노선을 유지해 왔지만 평화를 위한 중재에도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93년 오슬로 합의는 귀중한 결실이다. 그러나 유대계가 절대다수인 네오콘은 처음부터 오슬로 합의를 깰 생각이었다.
극우파 리쿠드당 출신 총리 아리엘 샤론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네오콘은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유대인 정착촌 확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의장 제거,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에 대한 무차별 공격 등 샤론의 강경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는 쪽으로 미국의 중동 정책을 바꿔 놓았다. 국무부 직업 외교관들은 이를 가리켜 ‘미국 외교의 이스라엘화(化)’라고 비꼰다.
Ⅳ 부도덕하고 위선적인 네오콘
img4R동서 냉전이 끝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으로 세계가 더 평화로워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다. 냉전 시절은 미국과 소련이 군사적 균형을 이룸으로써 역사상 유례 없는 평화의 시대였다는 것이 올바른 평가다.
미국은 마치 고삐 풀린 말처럼 멋대로 행동하고 있다. 초강국 미국은 국제사회의 기존 룰을 따를 필요가 없으며, 미국 스스로 필요한 룰을 만들어 가겠다는 태도다. 이 같은 오만한 일방주의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세력이 바로 네오콘이다.
네오콘은 미국이 당당히 제국으로 나서라고 촉구한다. 제국은 미국의 운명이며, 미국은 그 운명을 껴안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을 아무리 그럴 듯한 이론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그 본질은 감춰지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19세기 제국주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미국은 그 동안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자임을 자랑해 왔다. 미국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이기적 목적 아닌 인류 발전을 위해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 미국도 보통 강대국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라크전쟁을 앞두고 전 세계를 휩쓴 반전(反戰)·반미 데모의 물결은 미국의 국력을 시기해서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강대국 논리에 반대하는 국제사회의 강력한 의사 표시였다.
네오콘은 일종의 확신범들이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원칙에 따라 세계를 재편하고자 한다. 네오콘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마저 불사한다. 그들에게 전쟁은 자연 상태며, 평화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또 그들은 책상에서 전쟁을 치른다. 피를 흘리는 사람은 따로 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청년 시절을 보낸 네오콘은 무슨 이유에서든 거의 예외 없이 베트남에 가지 않았다. 부시 자신도 힘있는 정치가를 아버지로 둔 덕분에 베트남에 가지 않았다. 정의의 전쟁, 악과의 싸움을 외치는 네오콘의 주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다.
네오콘은 부도덕하고 위선적이다. 이라크의 WMD, 후세인과 알 카에다의 연계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지금 와서는 후세인 독재정권 타도, 이라크 민주화가 목표라고 말을 바꾸고 있다. 이라크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 타깃인 이란·시리아·리비아·북한 등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핵무기를 수백 개씩 보유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를 짓밟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제제를 가하기는커녕 한없이 관대하다. 이중 기준의 위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랍 사람들이 미국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네오콘의 첫번째 ‘제국 실험’인 이라크전쟁은 지금 혼란 속에 빠져 있다. 이라크에서는 아직 전투가 계속중이며, 이라크 국민들의 민심 잡기에도 실패하고 있다. 매월 50억달러씩 들어가는 점령 비용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불어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2004 회계년도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점령 비용으로 870억달러를 승인해줄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지난 4월 이라크전쟁 비용으로 지출한 790억달러를 합하면 1,660억달러다. 그뿐 아니라 하루 1.2명 꼴로 사망하는 미군의 인명피해도 심각하다.
노다지를 캘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석유는 전쟁 전 하루 생산량인 270만배럴의 3분의 1 수준인 78만∼100만배럴에 불과하다.
부시를 비롯한 미국 지도자들은 “미국은 제국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미국은 제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의 나라 영토를 차지하려는 야심이 없다”고 답한다. 그것이 솔직한 대답일지 모른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미국의 모습은 분명한 제국이다.
‘강대국의 흥망’을 쓴 미국 예일대 역사학 교수 폴 케네디는 얼마 전 한 신문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만약 미국이 점점 더 제국처럼 보이고, 제국처럼 행동하며, 제국처럼 소리지른다면 아마도 미국은 정말 제국이 돼 가고 있는 것일 것이다.”
■ 네오콘 누구인가
시카고대 리오 스트라우스를 사상적 모태로 한 좌파지식인들
▶ 어빙 크리스톨
네오콘의 대부. 1930년대말 뉴욕 시티 칼리지 재학중 트로츠키주의자가 됐다. 1947∼52년 미국유대인위원회(AJC)에서 발행하는 ‘코멘터리’지 편집국장으로 근무. ‘코멘터리’는 훗날 ‘네오콘의 바이블’로 불렸다. 1960년대말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 그후 ‘내셔널 인터레스트’ ‘퍼블릭 인터레스트’ 등 보수 성향의 학술지를 창간했다.
크리스톨은 네오콘의 지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로 평가된다. 미국기업연구소(AEI) 펠로로 있으며 ‘신보수주의: 한 사상의 자서전’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네오콘의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위클리 스탠더드’지 편집인 윌리엄 크리스톨이 아들이다.
▶노먼 포드레츠
어빙 크리스톨과 함께 네오콘의 창시자. 1960∼95년 ‘코멘터리’지의 총편집인으로 근무했다. 원래 좌파였으나 1970년대초 우파로 전향해 민주당 우파 상원의원 헨리 잭슨이 설립한 민주다수연합에 참가했다. 포드레츠는 9권의 책을 썼는데, ‘서열파괴’(1979년)에서 이스라엘이 미국의 안보 전략에 필수 요소라고 주장했다.
1970년대말 현존 위험위원회, 80년대초 자유세계위원회 설립에 참가. 보수 성향의 사회평론가 밋지 덱터가 부인 ‘뉴욕 포스트’지 칼럼니스트 존 포드레츠가 아들이다.
▶폴 월포위츠
네오콘의 간판 인물로 초강경파. 국방 부장관으로 이라크 전쟁을 책임져 ‘아라비아의 월포위츠’로 불린다. 시카고 대학 정치학 박사. 1990년대 민주당 집권 시절에는 존스홉킨스 대학 폴 니츠 국제관계 고등연구대학원(SAIS) 원장으로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국무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 차관. 걸프전중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 타도를 주장. 1992년 유일 초강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 적성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방위계획지침’ 제출해 물의를 일으켰다.
월포위츠의 주장은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군사 독트린으로 채택됐다.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면 국무장관이 될 것이라는 소문. 이라크 사태가 악화되면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
▶리처드 펄
월포위츠와 함께 네오콘의 쌍벽을 이루는 인물. 냉전 시절 옛소련과의 군축협상에서 초강경 노선으로 ‘사탄’(악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방부 국제안보정책차관보로 근무.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 자문기관인 국방정책위원장으로 있다 이권 개입 혐의로 지난 3월 사임. 이라크전쟁 등 과거 미국의 중동 정책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소위 ‘창조적 파괴’론의 창시자.
이스라엘 극우파 리쿠드당의 아리엘 샤론 정권과 밀착돼 있으며,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포스트’지 이사로 있다. AEI 펠로. 이 밖에 안보정책센터·국가안보를위한유대인연구소·민주주의방위를위한기금 등 여러 싱크탱크에 관여하고 있다.
▶더글러스 파이스
국방부 서열 3위인 국방차관. 레이건 행정부 시절 협상 정책 담당 부차관보로 리처드 펄을 보좌했다. 이에 앞서 국가안보위원회(NSC) 중동 정책 전문가로 활약했다. 1992년 국가안보를위한유대인위원회(JINSA) 자문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취임. 이스라엘 극우파 리쿠드당에 밀착해 있으며, 97년 아버지 달크 파이스와 함께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위한 봉사’로 재미시오니스트운동협회 창립 100주년 기념상을 수상했다.
▶루이스 리비
리처드 체니 부통령 비서실장 겸 부통령 국가안보 보좌관.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전략 및 자원 담당 수석 국방 부차관, 방위 정책 담당 부차관으로 일했다. 네오콘의 싱크탱크인 새로운 미국 세기를 위한 계획(PNAC) 창설 멤버로 월포위츠·윌리엄 크리스톨·로버트 케이건과 함께 PNAC의 ‘미국 방위 재건: 새로운 세기를 위한 전략, 병력 그리고 자원’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리비는 1992년 월포위츠와 함께 문제의 ‘방위계획지침’을 작성했다.
▶존 볼튼
군비 통제 및 국제 안보 담당 국무차관. 네오콘이 국무부에 심어 놓은 ‘제5열’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은퇴한 초보수파 상원의원 제시 헬름즈에게 “지구 종말의 아마게돈에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들었다.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었으며, 아들 부시 행정부에 들어오기 전 AEI 수석 부소장으로 있었다.
2002년 5월 보수 싱크탱크인 해리티지 재단에서 ‘악의 축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이라크·이란·북한에 이어 리비아·시리아·쿠바 등도 대량살상무기(WMD)를 보유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북한의 미사일 수출을 공해 상에서 차단하는 무기 확산 안보 계획(PSI)을 추진하는 등 북한에 초강경 입장을 취함으로써 북한이 ‘흡혈귀’ ‘인간 쓰레기’라고 부를 만큼 극도로 혐오하는 인물.
▶엘리어트 에이브럼즈
백악관 NSC 서남아·중동·북아프리카 담당 국장. 헨리 잭슨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레이건 행정부 시절 국무부에서 일했다. 네오콘과 깊은 관계인 허드슨연구소에서 1990∼96년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윤리 및 공공정책센터 소장으로 이동. 국제종교자유미국위원회 의장을 겸임했다. 1991년 이란-콘트라 사건 의회 청문회에서 정보를 은폐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92년 아버지 부시가 특별사면했다. 노먼 포드레츠의 사위.
▶로버트 케이건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 전문 저술가. 친구 윌리엄 크리스톨과 함께 PNAC 창설에 적극 개입했으며, 1998년 PNAC가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사담 후세인 타도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낼 때 공동 서명자였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 조지 슐츠의 스피치 라이터로 발탁됐으며, 국무성 미주(美洲)국 정책 담당 부국장으로 근무했다.
현재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연구원으로 ‘워싱턴포스트’지에 국제문제 관련 칼럼을 쓰며, ‘뉴 리퍼블릭’과 ‘위클리 스탠더드’에 기고하고 있다. 그가 쓴 ‘낙원과 권력: 신세계질서 속의 미국과 유럽’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부인 빅토리아 널랜드는 부통령 체니의 국가안보 부보좌관.
▶마이클 레딘
네오콘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초강경파. 언론인 출신으로 ‘뉴리퍼블릭’의 로마 특파원, ‘워싱턴쿼터리’의 초대 편집인을 지냈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에게 발탁돼 보좌관으로 근무. AEI 상임연구원으로 리처드 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JINSA 창설 멤버로 현재 자문위원으로 있다. 레딘은 ‘테러 거물들과의 전쟁’이라는 책에서 이라크·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 정권의 타도를 주장했다.
▶윌리엄 크리스톨
어빙 크리스톨의 아들. 현재 PNAC 의장과 ‘위클리 스탠더드’의 편집인을 맡고 있다. 헨리 잭슨 밑에서 일하다 1976년 공화당으로 이적(移籍). 레이건 행정부 시절 가톨릭 네오콘인 윌리엄 베네트 교육장관의 비서실장이었으며,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부통령 댄 퀘일 비서실장으로 근무. 걸프전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사담 후세인 축출을 주장해 왔으며, 친구 로런스 캐플런과 함께 ‘이라크 전쟁: 사담 독재와 미국의 임무’라는 책을 펴냈다.
2003년 11월호 | 입력날짜 200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