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스펠드 미 국방 評傳 이시우 2005/02/27 242
2003 11월호
[특별전재] 럼스펠드 미 국방 評傳「럼스펠드, 개인적 초상화」 발췌요약
“이라크 고급 정보원들은 대량살상무기 있다고 맹세했다”
외부기고자 번역·정리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kimspoto@yahoo.com)
■ “군 장성들과 의회 견제로 가까스로 장관 인준 받았다”
■ “펜타곤은 문민 우위(civilian control) 원칙을 지켜라”
■ “미국 대도시 범죄율과 비교하면 바그다드는 안정”
■ 파월 독트린이냐, 럼스펠드 독트린이냐
■ “미군, 꼬리 잘라 기동성 갖춘 21세기형 군대로”
■ “이라크 미군 철수 시점은 부시만이 대답할 사안”
“보이지 않는 적에 맞서려면….”
2000년 12월28일, 도널드 럼스펠드는 부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의해 국방장관 내정자로 지명됐다. 미 대통령선거를 한 달 남짓 앞둔 시점에서 내정자로 지명된 것은 매우 늦은 감이 있었다.
워싱턴의 다른 어느 부서보다 덩치가 크고 복잡한 국방부를 어떻게 끌어갈 것인가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럼스펠드로서는 국방부 업무가 익숙한 편이었다(1932년 시카고 출생인 럼스펠드는 포드 행정부 시절인 지난 1975~77년 최연소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그렇지만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고, 세계는 달라졌다. 그리고 미국은 1970년대 냉전시대와는 다른 위협들에 직면해 있었다.
미 국방부도 달라졌다. 미군은 1970년대 베트남전쟁 실패라는 악몽에서 벗어나 있었고, 전원 징집병이 아닌 지원군으로 편성됐다. 그렇지만 미군은 활기가 넘치고 공세적인 제21대 미 국방장관 럼스펠드를 맞이하기에는 준비가 덜 됐다.
클린턴 행정부 아래서 펜타곤은 미 의회를 상대로 하는 업무에 상당부분 매달렸다. 펜타곤 안에 오로지 대(對)의회 업무를 보는 인력만 수백 명에 이르렀다. 미 의회가 펜타곤을 장악한 모습이었다. 워싱턴 정가는 신임 국방장관 럼스펠드에게도 그런 모습의 펜타곤을 이끌어가기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럼스펠드는 미 의회에 대한 펜타곤의 부담을 줄여야 미군이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럼스펠드는 부시 대통령 당선자와 국방부의 우선과제에 대해 견해를 같이했다. 그것은 미군을 새롭게 개편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군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채택한 ‘2.5개 전쟁’(two and a half wars) 독트린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독트린에 따르면, 미국은 두 개의 전쟁(이를테면 유럽에서 옛소련, 아시아에서 중국과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면서, 이보다 작은 규모의 전쟁 하나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군은 실제로 그런 능력이 없으면서도 2.5개 전쟁 독트린을 수정하지 않았다(닉슨 대통령은 미국의 군사력을 현실적으로 감안해 이론적으로나마 2개 전쟁을 1개 전쟁으로 하향조정했다).
9·11테러가 터지기 석 달 전인 2001년 6월, 럼스펠드 국방은 미 상원 군사위에 출석해 “보이지 않는 적의 위협에서 미국의 안보를 지키려면 새로운 미군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럼스펠드의 설명.
“나는 상원의원들에게 구체적 사례를 들어 미군의 신전략 수립이 시급한 이유를 설명했다. 1930년대초 미국이 대공황으로 허덕이던 무렵 미 국방전략은 ‘앞으로 10년 동안 전쟁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1년 미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의 주요 전쟁 억제력인 태평양함대를 잃었다.
20세기 초만 해도 없었던 항공모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2차대전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었던 소련은 원자폭탄시대에 적국이 됐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사람들은 베트남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60년대말 미국은 매우 비싼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이란은 미국의 우방이었다. 그러나 바로 몇 년 뒤 이란은 광란의 반미혁명에 휩싸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89년 3월 현 부통령인 딕 체니 당시 국방장관이 상원에 출석했을 때 그 누구도 이라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1년 반 뒤 체니는 걸프전쟁 준비로 바쁜 몸이 됐다. 우리 앞에 놓인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적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지켜내려면 새로운 독트린이 요구된다는 것이 나와 부시 대통령의 판단이었다.”
펜타곤 장성들과의 힘겨루기
img2R럼스펠드의 주장을 듣는 미 상원의원들은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르나, 미 군부 장성들은 긴장했다. 그들은 럼스펠드 신임 국방이 자기들이 짜 올리는 예산증액안을 그저 자동적으로 승인해 주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울러 그들은 수십 년 동안 몸담았던 미군에 대한 럼스펠드의 개혁이 그들의 참여가 배제된 채 이뤄지는 데 대해 불안과 아울러 불만을 품었다. 특히 펜타곤 내부의 합참본부 장성들은 신임 국방장관의 펜타곤 장악 노력을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럼스펠드와 그들 사이의 긴장과 불편이 정리되고 양자 사이의 권위가 새로운 질서 속에 재편되기까지는 여러 달이 걸렸다. 그는 문민 우위(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를 거듭 강조했다. 그의 눈에는 문민우위라는 미 행정의 근본원리가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흐려진 것으로 보였다.
펜타곤 안팎 군부의 저항에 덧붙여 럼스펠드는 또 다른 저항에 부닥쳐야 했다. 미 상원은 럼스펠드의 국방장관 인준에 부정적 분위기였다. 미 공화당 상원 지도자 트렌트 로트는 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럼스펠드의 인준을 막는 결정적 걸림돌이었다.
럼스펠드는 또한 국방부 안에 임명해야 할 자리가 43개나 있었지만, 어떤 자리는 한여름 내내 채우지 못했다. 럼스펠드와 폴 월포위츠 부(副)국방은 2001년 6월이 다 지나가도록 인준도 받지 못한 채 사실상 고립돼 있음을 느꼈다. 두 사람은 “우리가 펜타곤 장성들과 의회의 견제구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했다.
럼스펠드·월포위츠 두 사람은 켄 아델만과 그의 부인 캐럴 아델만의 소개로 오래 전에 처음 만났다. (켄 아델만은 포드 행정부에서 국방차관, 레이건 행정부에서 유엔 대사를 지낸 공화당 계열 중진이다-역자 주). 럼스펠드가 아델만에게 월포위츠와의 저녁식사 모임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졌다.
두 사람은 즐겁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 뒤부터 함께 팀을 이뤄 탄도미사일위원회 등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평소 존경하던 럼스펠드가 부국방 자리를 제의하자, 월포위츠는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애를 끓인 끝에 두 사람은 가까스로 미 의회의 인준 동의를 받았다.
그때부터 럼스펠드는 본격적인 펜타곤 장악에 나섰다. 그는 18개의 다양한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해 군부의 역할 전반에 대한 업무 재검토와 문제점 파악에 들어갔다. 베트남전쟁 뒤 미 육군 장성들은 실전에서 공을 세워 훈장을 받기보다 학위를 따는 데 더 공을 들여왔다.
그리고 업무상의 작은 실수가 경력상 하자로 기록될까봐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피하는 분위기였다. 럼스펠드는 그런 작은 실수들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군부 장성들은 신임 국방이 그들의 역할에 대한 전략적 재배치 검토를 마땅치 않게 여겼고, 그런 장관과의 관계 재설정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걱정했다.
군부의 럼스펠드를 향한 적개심은 초여름 “럼스펠드는 곧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럼스펠드가 펜타곤에 들어가 추진한 작업 가운데 하나가 국방정책의 문제점과 성과들을 정리해 하나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 작업을 바탕으로 2002년 3월 럼스펠드는 ‘국방부 원칙들’(Principle for the Department of Defense)이라는 이름의 목록집을 만들었다.
이 원칙들은 지금껏 미국이 수행해온 전쟁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언론에 대한 대응 원칙들이다. 이를테면 ‘국방부(DoD)의 신뢰성을 의심할 여지가 있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와 관련한 또 다른 원칙.
‘국방부 관리들은 진실을 말해야 하고,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방부의 명예가 더럽혀진다’(럼스펠드는 기자회견에서도 이런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 일반적인 기자회견장에서나 TV 인터뷰에서 럼스펠드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기자들이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면, 그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럴 경우 질문자는 서둘러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 밖에 럼스펠드 국방이 세운 중요한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당파성을 지닌 듯 행동해서는 안 된다. 국방부의 직무는 초당적(nonpartisan)이다.’
‘미 국민들은 비밀 등급으로 분류되지 않은 국방부의 업무에 대해서는 알 권리가 있다. 우리는 그런 정보를 완벽하게 잘 제공해야 한다.’
‘오폭(collateral damage)으로 연합군 또는 민간인들이 사망했을 경우 (변명하거나 다른 이유를 대지 말고) 조의를 나타내야 한다.’
‘끝으로, 미 대통령은 우리의 총사령관이다. 국방부 직원들은-민간인이든, 군인이든-문민 우위(civi lian control)를 준수해야 하고 우리의 직무행위가 미 합중국 헌법이 규정한 중요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빨은 날카롭게, 꼬리는 잘라라”
img3L럼스펠드의 국방장관 지명이 늦었던 탓에 부시와 럼스펠드는 대통령선거 기간중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미군이 어떤 방향으로 변형(transformation)돼야 하는가에 대해 완전한 의견일치를 봤다.
그 방향은 ▷가볍고, 빠르고, (상황변화에) 탄력적인 병력으로의 변형이고 ▷여러 다른 군 병력이 함께 보다 잦은 합동작전을 펼치고 ▷전략적 공군력을 보다 많이 사용하고 ▷군사 교리와 장비들을 첨단 기술의 진보에 걸맞게 재편한다는 것 등이다. 한 마디로 미군을 기동성 갖춘 21세기형 군대로 변형시킨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변형 대상은 군부에서 ‘이빨 대 꼬리 비율’(the teeth-to-tail ratio)이라고 일컫는 사안이었다. ‘이빨’은 전투병력, ‘꼬리’는 지원인력(비전투원)을 뜻한다.
럼스펠드는 “지난날의 징집제가 없어진 뒤 현저히 규모가 줄어든 미군에서 ‘꼬리’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은 ‘이빨’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한다”고 문제점을 제기했다.
이 같은 문제점들을 포함해 럼스펠드는 모두 28개의 사항을 개혁함으로써 미군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2003년 4월 럼스펠드가 미 의회에 제출한 미군 개혁안에는 약 30만명의 전투지원 분야 현역병을 민간인으로 대체하고, 150만명의 현역병 규모는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전투 병력을 늘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역자 주).
펜타곤 내부는 신임 국방장관의 독특한 관리 스타일과 개혁 드라이브 탓에 볼멘 소리들로 웅성거렸다. 일찍이 지난 1970년대 중반 포드 행정부 시절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럼스펠드 국방을 가리켜 ‘위태로울 정도로 숙련된 관료주의자’(dangerously skilled bureaucrat)라는 평가를 내렸다.
국방장관에서 물러난 뒤 세계적 제약회사 설(Searle)의 대표(CEO, 1977~85)로 있을 때 럼스펠드는 부하직원들 목자르기로 악명을 떨쳤다. 부시 행정부 들어 펜타곤에 복귀한 럼스펠드는 문민 우위를 강조하며 펜타곤 고급 장교들이 올린 보고서들이 마음에 안 든다며 퇴짜를 놓기 일쑤였다.
많은 경우 무려 일곱 번이나 다시 쓰라고 퇴짜를 놓았다. 국방장관에게 올려지는 월간 세계정보보고 문건이 너무 두툼해 못 읽겠다고 얇게 만들라고 호통을 치고는 했다(1년쯤 지나 정보보고는 아주 얇아졌다).
이렇듯 펜타곤 내부의 군 장성들은 럼스펠드 밑에서 ‘마취제 없이 이빨을 치료하는’(root canal without novocain) 것과 같은 심리적 고통을 겪었다. 미 육군이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추진해 오던 크루세이드(Crusade, 십자군) 대포 프로젝트를 파기한 것도 럼스펠드 국방과 펜타곤 장성들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생겨난 일이다.
한 대에 2,300만달러짜리 초대형 대포인 크루세이드를 가리켜 럼스펠드는 “가볍고 기동성 있는 미군 변형 개념에 맞지 않는다”며 프로젝트를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토머스 화이트 육군장관과 에릭 신세키 참모총장이 물러난 것은 크루세이드 프로젝트를 비롯해 펜타곤 장악을 둘러싼 럼스펠드와 장성들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암투의 결과다.
아프간전쟁이 만든 ‘섹시한 럼스펠드’
img4R2001년 9·11 동시다발 테러 공격이 벌어졌다. 9·11은 부시 대통령은 물론 럼스펠드 국방에게도 정책적인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럼스펠드는 오래 전부터 테러리즘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두고 생각을 거듭해 왔다. 그의 발언.
“테러에 맞서 미국의 모든 곳을 언제나 지켜낼 수는 없다. 테러리즘에 대한 자기방어는 결국 공격이다. 그것도 선제공격(preemption)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테러와의 전쟁은 테러리스트들을 추적해 잡아내는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에서가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어야 하고, 그들을 봐주는 자들을 선제공격해야 한다. 글로벌 테러 조직들 그리고 이들과 연계돼 있고 대량살상무기를 지닌 테러 지원 국가들은 세계평화에 참으로 큰 위협이다.”
9·11 뒤 럼스펠드는 날마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지휘했다. 그런 변화의 분위기를 타고 부시 대통령은 헨리 셸톤 합참의장을 경질하고 리처드 마이어스를 합참의장에 임명했다. 일부 미 육군 장성들의 눈에는 공군 출신의 마이어스 대장이 일종의 ‘이단자’(maverick)로 비쳤다.
그런 마이어스를 가리켜 럼스펠드는 “지적이고 행동이 빠르며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공군 장성 출신답게 마이어스는 우주 공간에서 사용될 첨단 무기 개발을 찬성하는 입장이고, 특히 방공망 구축과 관련한 레이저 유도탄(laser dazzlers) 개발에 적극적인 인물이다.
2001년 10월7일, 일요일인데도 럼스펠드 국방은 마이어스 장군과 함께 펜타곤 기자회견실 연단에 섰다. “이미 미국은 아프간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탈레반 공군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습이 벌어졌다”고 입을 열었다. 그 뒤 럼스펠드는 거의 날마다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가 털어놓는 아프간전쟁 관련 정보는 폭격·위험·사살 등 전쟁 용어들이었지만, 기자회견실은 언제나 근엄하지만은 않았다.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종종 보였던 것처럼 엄격하지도 않았다. 럼스펠드는 까다로운 기자들의 질문을 짓궂게 받아넘겨 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9·11은 럼스펠드 국방을 저명인사(national celebrity)로 만들었다. 언론매체들은 늘 그의 입을 지켜보았고,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할리우드 스타보다 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펜타곤 기자회견장에서의 럼스펠드 브리핑을 가리켜 사람들은 (럼스펠드의 이름을 따) ‘러미 쇼’(Rummy Show)라고 일컫기도 했다.
럼스펠드의 전임자 윌리암 코헨 국방(클린턴 행정부)은 4년 재임 기간중 40회 가까운 기자회견을 가졌지만, 럼스펠드만큼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CNN 방송은 그를 가리켜 ‘사실상의 록 스타’, 폭스(Fox) 방송은 ‘매력덩어리’(babe magnet)라고 불렀다. 부시 대통령마저 이런 찬사에 끼어들어, 그를 ‘럼스터드’(Rumstud, ‘섹시한 럼스펠드’라는 뜻)라고 불렀다.
아프간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 전쟁은 미국의 첨단 장비에 바탕한 공습 그리고 미 특수부대원들의 지상 작전, 미 중앙정보국(CIA)이 지난 1980년대 아프간 내전 때부터 관리해 오던 인적자산들 그리고 아프간 북부동맹이 함께 어우러져 이끈 승리였다. 이와 관련한 럼스펠드의 말.
“아프간전쟁을 통해 미군은 21세기에 들어와 마침내 새롭고 전혀 다른 세계에 적응할 수 있게 됐다. 이 전쟁에서 우리 미군은 병사 한 사람이 늙은 노새를 타고 아프간 산악지대로 올라가 GPS(위성통신장비의 하나로, 위치 추적에 쓰임)로 적이 포진한 정확한 지점을 알려줘 공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오사마 빈 라덴은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면 어디에 숨어 있는가. 이는 럼스펠드도 대답하기 어려운 불편한 질문이다. 그는 “내 마누라까지 빈 라덴의 행방을 물으며 나를 짓궂게 몰아대고는 했다”고 밝혔다. 펜타곤 출입기자들은 럼스펠드가 빈 라덴에 관한 한 진실을 다 말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파월, “럼스펠드 입에 테이프 붙여라”
2003년 3월20일. 럼스펠드 국방은 마이어스 합참의장과 함께 펜타곤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미국은 이제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일부 미국인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패배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른바 ‘아랍 거리’(Arab Street)로 일컬어지는 중동과 근동(近東)지역의 폭발적 잠재력을 건드려 혼란을 불러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다른 어떤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전쟁이 (유엔 안보리 결의를 거치지 않음으로써) 합법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의 여론조사 결과는 부시 미 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이 주도한 이라크 침공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라크전쟁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비판은 만만찮았다. 럼스펠드 국방은 반전론자로 바뀐 이들 미국의 전 우방국들에 대한 반격에 직접 나섰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을 겨냥해 ‘낡은 유럽론’으로 포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흔히 유럽을 프랑스와 독일로 여긴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들은 낡은 유럽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을 보라. 그 무게중심(center of gravity)은 동쪽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NATO 회원국은 26개 국가다.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인)독일이 문제이고, 프랑스도 문제다.”
늙은 유럽론을 꺼낸 럼스펠드 국방에 대한 비판은 거셌다. 스페인의 총리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는 부시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텍사스 목장에 머무를 때 부시 대통령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럼스펠드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낫겠다. 우리는 럼스펠드보다 더 많은 콜린 파월(a lot of Powell)이 필요하다.”
아즈나르 총리의 그런 말을 상기시키자 럼스펠드는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제기랄. 아무튼 그는 좋은 사람이다. 이라크전쟁 지지자이기도 하고…. 누구나 자기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내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런 소동에 독일에 사는 럼스펠드의 친척들도 끼어들었다. 그들은 “럼스펠드 국방을 더 이상 가문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콜린 파월의 미 국무부도 싸움에 끼어들었다. 파월은 유엔이라는 외교무대에서 프랑스와 독일을 설득하려는 참에 럼스펠드가 ‘낡은 유럽’을 들먹인 것에 화가 나 있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파월은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그의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전한다.
“(럼스펠드 탓에) 외교는 실종됐다. 럼스펠드는 입에 테이프를 붙여야 할 것 같다.”
이라크전쟁에서 미군은 어떤 모습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럼스펠드 국방은 병력 규모는 작더라도 첨단 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21세기형이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펜타곤 안팎에 포진한 이른바 ‘군사전문가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들은 ‘파월 독트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압도적 화력으로 공습한 뒤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한다는 전통적인 군사교리를 고집했다. 럼스펠드는 먼저 미 중부군사령관으로 이라크전쟁을 지휘하게 될 토미 프랭크스 대장을 설득했다.
프랭크스 대장이 참모들과 함께 먼저 1991년 걸프전쟁 뒤 이라크 봉쇄에 관한 오래 된 계획들을 검토했다. 그들은 그런 계획들이 너무 낡은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럼스펠드의 증언.
“그런 오래 된 작전 계획들은 우리가 아프간전쟁에서 배운 교훈들을 포함하지도 않았고, 이라크 실정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12년 전 걸프전쟁 사례는 작전 수립에 도움이 안 됐다. 43만명의 미군과 30만명의 연합군이 매우 제한된 목표(이라크 군으로부터 쿠웨이트 해방)를 이루기 위해 모여들었으니….
이번에 나는 전부터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새로운 형태의 작전, 다시 말해 보다 가볍고 빠른 기동력을 갖춘 미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프간에서 소수의 특수부대 투입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라크는 아프간과는 사정이 다르지만, 이라크 투입 미군 병력은 12만5,000명에서 13만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실전에 투입할 계획도 아니었다.”
펜타곤 안에서는 럼스펠드 국방이 제시한 13만명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견해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25만명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터키 정부가 제4보병사단의 터키 통과를 허용하지 않고 시일을 끄는 바람에) 이라크전쟁이 일어났을 무렵 전선에 투입된 미군 병력은 럼스펠드가 처음 제시한 수준이었다.
“럼스펠드는 작곡가, 프랭크스는 지휘자”
워싱턴 정가 주변에서 루머를 퍼뜨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럼스펠드 국방과 군부 사이의 긴장을 놓고 전부터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 왔다. 이라크전쟁 무렵에는 럼스펠드와 토미 프랭크스 대장 사이가 그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얘기인즉, 럼스펠드는 경보병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프랭크스는 더욱 중무장한 병력을 투입해야 한다고 입씨름을 했는데, 결국 둘 다 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랭크스 대장을 잘 아는 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도 포병 사령관 시절부터 혁신적인 군 작전에 관심이 높았고, 비록 세밀한 부분에서 의견 차이를 보이기는 했으나 럼스펠드와 기본적인 시각이 같았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을 모두 잘 알고 있는 미 공화당 중진 뉴 깅리치(전 하원의장)도 “럼스펠드는 작곡가이고, 프랭크스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라고 말했다.
럼스펠드 국방은 “이라크 전쟁의 기본적인 작전계획은 프랭크스 대장이 짠 것”이라고 밝혔다. 그날그날의 변화된 상황에서 즉흥적인 작전 변경도 프랭크스 대장의 몫이다. 럼스펠드는 말했다.
“나는 프랭크스 장군을 믿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작전의 권위는 결국 최고사령관(CINC, Commn der in Chief)에게서 나온다.”
럼스펠드가 말하는 CINC는 부시 미 대통령을 가리킨다.
이라크 자유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이 펼쳐지자, 미 언론매체들은 모든 종류의 군사전문가들을 동원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모으기에 바빴다. 바드다드의 사담 후세인을 겨냥한 공습이 있은 뒤 곧바로 지상군 탱크가 기록적인 스피드로 진격해 들어가는 모습이 TV로 전해졌다.
그러나 미 특수부대원들이 어둠을 타고 서부 이라크 사막지대에서 작전을 펴는 모습은 전해지지 않았다(그곳에는 이스라엘을 겨냥한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 기지가 있었고, 미 특수부대는 이를 접수했다). 이라크의 고속도로상에서 미군들이 기습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자 미 언론들은 럼스펠드가 작전을 잘못 세운 탓이라고 공격해댔다.
럼스펠드에게 적개심을 품었던 퇴역장성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흠집내려고 했다. 그들은 펜타곤의 이라크 전략이 잘못 됐다고 불만을 토했다. 전쟁 나흘째 되던 날 퇴역 장군인 배리 매카프리는 “이번 전쟁은 명백히 위험한 전쟁이다.
미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게 될지 모른다”며 럼스펠드를 비판했다. 다른 여러 군사전문가들도 다투어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대부분의 비판은 미군의 투입 병력 규모가 적고 중화기를 갖추지 못한 경보병이라는 데 모아졌다. 폭로전문기자 시무어 허시는 “럼스펠드와 그의 펜타곤 측근들이 병력 투입을 최소화하는 작전을 주장했다.
럼스펠드는 스스로 장군들보다 (전쟁, 군사작전을) 잘 안다고 여겼다”고 불을 질렀다. 럼스펠드는 그런 십자포화를 맞으면서도 느긋하게 마음의 평정을 지켰다. 펜타곤 기자회견장에서 화를 참지 못하고 반격에 나섰던 사람은 당사자인 럼스펠드가 아닌 마이어스 합참의장이었다. 그런 비난과 입씨름들도 이라크자유작전이 벌어진 지 3주 뒤 바그다드 함락과 함께 사라졌다.
파월 독트린과 럼스펠드 독트린
img5L4월9일 바그다드가 함락됐다. 그때까지 럼스펠드는 숱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칼럼니스트, 시사평론가 또는 군부의 비판에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이 지냈다.
럼스펠드는 이라크전쟁에 대한 비판이 펜타곤 내부에서 또는 그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계획의 세밀한 부분(전술)은 물론 큰 그림(전략)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럼스펠드는 “펜타곤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병참·훈련 등 각자 맡은 업무에 매달린다. 따라서 이라크전쟁 계획의 세부사항을 잘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전쟁 계획을 구체적으로 집행하는 책임은 결국 전 세계에 주둔하고 있는 현지 사령관들 손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럼스펠드의 증언.
“사실 우리는 이라크전쟁이 얼마나 끌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라크전쟁은 (후세인 세력과의 싸움뿐 아니라) 이라크 아녀자들이 미군 오폭(誤爆)으로 죽고 다치는 모습을 보도하는 알 자지라 방송과의 긴 전쟁일 것으로 예상했다. 우리는 이라크 내의 공격목표를 매우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럴 경우 이라크인들이 후세인 정권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럼스펠드가 바랐던 그런 희망적인 일은 이라크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바그다드가 함락되던 날 럼스펠드는 미 하원에 출석했다.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군 장성들과의 불화 그리고 의회와의 불편한 관계 등으로 럼스펠드는 하원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을 수 없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 짐작과 달리, 그는 하원으로 들어서면서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는 머지않은 시점에서 이런 박수를 밑천삼아 그가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미군 개혁 방향, 다시 말해 보다 효율적이고 전문적인 미군 변형(transformation) 작업에 대한 의회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라크전쟁에서 파월 독트린을 밀어내고 럼스펠드 독트린이 자리잡은 것인가.”
이라크전쟁이 터진 지 3주 뒤 럼스펠드 국방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여기서 말하는 ‘파월 독트린’이란 1991년 제1차 걸프전쟁 때처럼 몇 주에 걸친 대규모 공습 그리고 뒤이어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하는 군사전략을 가리킨다). 그는 물리학의 속도와 질량에 관한 말을 꺼냈다.
“나는 이라크전쟁에서의 미군 전략을 ‘럼스펠드 독트린’이라고 이름짓지 않겠다. 그것은 물리학의 법칙이나 다름없다. 전쟁에서 속도는 질량(mass, 즉 병력 규모)보다 더 중요하다.
1991년 걸프전쟁 때처럼 공습을 오래 하지 않고 바로 지상군을 투입한 것은 토미 프랭크스(미 중부군사령관) 대장과 그의 참모들이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collateral damage)를 가능한 한 줄이려는 뜻에서였다. 모든 사람들이 공습이 오래 갈 것으로 생각했지만 우리는 전술적인 기습으로 이라크군을 압도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제4보병사단 없이 전쟁을 시작하리라고 여기지 않았다(당시 제4보병사단은 터키의 반대에 부닥쳐 지중해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상군의 조기 투입으로 우리는 유정(油井)을 이라크군의 방화로부터 지킬 수 있었고, 대량난민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1991년 때처럼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 공격을 받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무엇보다 속도가 이번 이라크전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부시 행정부 출범 거의 초기부터 워싱턴 정가에서는 럼스펠드와 파월 두 사람이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을 펼치고 있다고 여겼다. 둘 가운데 누군가 패배하지 않는 한 이길 수 없다고 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라크전쟁에서의 럼스펠드의 승리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패배로 여겼다. 그런데 5월초 이라크 전후 복구 행정을 맡기로 한 퇴역 장군 제이 가너가 물러나고 전직 대사 출신의 외교관 폴 브레머가 그 자리를 메우게 됐다.
럼스펠드가 적극적으로 밀었던 제이 가너는 이라크의 복잡한 행정처리를 맡을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폴 브레머는 네델란드 주재 미 대사를 지냈고, 국제컨설팅 조직인 키신저협회(Kissinger Associates)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파월 국무와는 제로섬 게임?
워싱턴 정가에서 쑥덕공론(gossip) 만들기에 이골이 난 사람들은 “브레머의 지명은 콜린 파월의 국무부가 럼스펠드의 펜타곤을 눌러 이겼다는 사실을 뜻한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럼스펠드는 “처음부터 제이 가너 장군은 아주 짧은 기간만 일하기로 됐다”고 설명한다.
능력 부족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제이 가너의 사퇴와 폴 브레머의 지명이 무엇을 뜻하든, 이라크 전후 통치는 처음 럼스펠드를 비롯한 전쟁 계획자들이 처음 바랐던 것보다 훨씬 길고 복잡한 사안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외교와 군사는 발상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떠올리면, 국무부와 국방부는 누가 장관이든 어느 정도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럼스펠드·파월에 관한 한 두 부서의 갈등은 제도적인 것이라기보다 두 사람 사이의 파워게임으로 받아들여졌다.
2002년 9월 부시 미 대통령이 유엔에서 이라크 제재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했을 때는 럼스펠드와 그의 펜타곤 매파들이 파월에게 패배한 것으로 여겨졌다. 같은 맥락에서 유엔 안보리가 부시의 이라크 무력 제재 요구를 거절하자 미국이 단독으로 이라크자유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을 펼쳤을 때 워싱턴의 정치평론가들은 “럼스펠드가 파월을 이겼다”고 단정했다.
그것은 게임이었다. 어떤 이들은 럼스펠드를 위해 열심히 플레이했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파월을 위해 뛰었다. 럼스펠드를 흠집내려는 여러 다양한 종류의 말들이 미 국무부와 그 주변에서 ‘익명의 정보원(anonymous sources)에 따르면…’이라는 식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럼스펠드는 그런 게임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와 파월은 내가 국방장관으로 일하던 1970년대 중반 파월이 일행을 이끌고 처음 펜타곤에 들렀을 때부터 친한 사이였다. 그때 그는 대령이었다”(럼스펠드는 지금도 국방장관실에서 파월 대령 일행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갖고 있다).
이어지는 럼스펠드의 말.
“우리 두 사람은 사적으로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고, 공무상으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거의 날마다 아침이면 백악관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다. 하루 평균 한 번은 얼굴을 마주치는 셈이다. 그는 그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지니고 있고, 나도 마찬가지다.
요점은 우리 두 사람은 매우 강한 리더십을 지닌 대통령을 위해 함께 일한다는 점이다. 어떤 정책 결정이 내려지면, 사람들은 그것은 파월의 것이니 또는 럼스펠드의 것이니 하고 말들을 한다. 사실은 부시 대통령이 내리는 결정이다. 부시 대통령은 매우 단호한 사람이다.”
럼스펠드와 파월 두 사람의 개인적 관계가 어떠하든, 역사가 빅터 D. 핸슨이 최근 지적한 말을 상기하고 싶다. 그는 “럼스펠드 국방의 군사적 업적은 파월 국무에게 다른 어느 국무장관이 누렸던 것보다 더 유리한 외교적 지렛대를 제공한다. 그의 강력한 미군 병력은 신속하고 예상을 뛰어넘는 작전으로 이동한다. 이는 파월로 하여금 굽실거리는 외국 방문객들을 맞도록 한다”고 분석했다.
럼스펠드 국방은 현재 이라크의 혼란스러운 사태와 관련해 비판을 받아 왔다. 미군은 이라크 무장세력의 공격을 받고 사상자를 내고 있다. 전쟁은 사실상 끝나지 않은 것인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약탈 행위는 어떻게 된 것인가. 무슨 까닭에 영·미 점령당국은 이라크인들에게 전기 공급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인가. 국제 구호기관들의 활동은 왜 지지부진하고 혼란이 이어지는가. 럼스펠드 국방은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 도시의 범죄율 비교하면 바그다드는 안정”
img6R“이라크전쟁의 속도가 너무 빨랐고 따라서 전후처리 문제들은 뒤로 미뤄졌다. 우리의 목표는 바그다드 점령과 후세인 체제의 전복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전쟁 직전에 5만~10만명에 이르는 죄수들을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이들을 우리가 찾아내려면 시간이 걸린다.
후세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바트당 잔당들이 전 공화국수비대원들, 사담 페다윈(민병대)들과 더불어 게릴라 활동과 저격수로 나서고 있다. 여기에 이란 국가수비대(National Guard)를 비롯한 외국 무장세력들이 국경을 넘어와 혼란을 부채질하는 중이다.”
럼스펠드는 이런 이라크의 혼란상을 비판자들이 과장하는 것이 불만이다.
“지금 바그다드의 상황은 만족스러운 모습이 절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도시들에서 벌어지는 살인·강도·방화 등 강력범죄들과 비교한다면, 그리고 인구 500만명에 이르는 대도시 바드다드의 크기를 떠올린다면, 바그다드는 세계 어느 도시 못지않게 안정적인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기자들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받을 때 럼스펠드 국방의 얼굴은 한순간 험상궂게 보인다. 얼굴 주름살도 더 깊어진다. 이라크전쟁을 치르면서 럼스펠드의 머리카락은 더 회색으로 바뀐 느낌이 든다.
럼스펠드의 가족을 만났을 때 “머리가 더 희어지고 주름살이 늘어 보이는 것은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런 것이냐”고 묻자, 그의 아들 조이스는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답변했다.
“아니오. 사실은 아버지가 몸무게가 너무 나간다고 살을 빼는 중이에요. 당신이 본 아버지 얼굴 모습은 체중을 줄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지요.”
후세인이 가지고 있다던 화학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WMD)는 어떻게 된 것인가. 럼스펠드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 영·미 연합군이 이라크로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이 모두 파기했을 수도 있고, 아직 우리가 찾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맹세코 이라크 안에 여전히 대량살상무기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고급 정보원들도 여럿 있다. 그들이 지금도 그런 주장을 되풀이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사담 후세인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것처럼….”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춘 럼스펠드는 강조하듯 목청을 약간 높여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사담 후세인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그가 더 이상 이라크의 지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라크전쟁 승리 후 아직도 혼란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럼스펠드는 이 혼란이 승리 뒤의 일시적 혼란일 것이라고 여긴다. 이라크에 얼마나 오래 미군이 주둔해야만 할까. 그리고 어느 정도의 병력이 주둔해야 할까.
이런 질문에 대해 럼스펠드는 답변하지 않았다. 언제쯤, 얼마쯤이라는 식으로 추측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문제는 부시 대통령만이 대답할 사안”이라는 말이었다.
2003년 11월호 | 입력날짜 200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