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新외교-Foreign Affairs 이시우 2005/02/27 233

http://monthly2.joins.com/monthly/article/mj_article_view/0,5459,aid%252D212573%252Dservcode%252D9200204,00.html

특별전재]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 2003년 11/12월호 ‘중국의 新외교’ 발췌요약
과거사 피해의식 벗고 ‘大國외교’ 나선 中國

2003년 10월7일 오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7차 (아세안+3 정상회의). 중국은 아세안 외교를 주도하

• 국무원 정보처
• 외교부

올 여름 북한 핵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호 적대 관계에 있는 워싱턴과 평양에 시선의 초점을 맞추었다. 워싱턴이나 평양보다 눈길을 덜 받기는 했지만 사태 진전의 중요성에서는 결코 덜하지 않은 제3자가 북한 핵 위기의 한가운데 있었다. 바로 베이징(北京)이다.

외교 문제에 관한 한 과묵하기로 정평나 있는 중국이 이 시끄러운 문제에 과감히 뛰어든 것이다. 중국은 대북 원유 공급을 중단했고, 평양에 고위급 특사를 파견했으며, 조·중 국경에 병력까지 배치했다.

4월의 베이징 3자회담을 주선한 것도 중국이었다. 게다가 중국은 이 3자회담 이후 북한의 핵 위기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올 여름 중국은 북한 선박 한 채를 억류하기도 했고, 다이빙궈(載秉國) 외교부 부부장은 두번째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평양과 워싱턴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이런 역할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볼 때, 과거 10년 동안 한반도 핵 문제에서 수동적이고 책임전가식 태도만 보였던 중국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거대한 변혁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즉, 능동적인 참여자로 국제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중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국은 이제 지역 문제나 국제적 현안에서 과거와 달리 대립 반목하는 자세를 많이 누그러뜨리면서 훨씬 세련되고 자신감 있게, 때에 따라서는 아주 건설적인 태도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세계 최대 인구 보유국이 10년 전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국제체제 안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 기구의 기능과 규칙·규범을 자국 국익을 증진하는 한 방편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국제 체제의 틀을 진화시키려는 시도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런 변화의 증거는 수두룩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은 양자외교 관계를 대폭 늘리면서 깊이를 더했고, 다양한 무역·안보 조약에도 가입했다. 핵심적인 다자간 기구 활동에 깊숙이 관여했고, 국제안보 현안 해결에도 도움을 주었다. 외교 정책이 개인 차원에서 결정되는 정도가 낮아지면서 더욱 제도화되었고, 외교관들은 자국의 외교 목표 달성을 위해 훨씬 숙달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더욱 괄목한 만한 변화는 외교 정책 관련자들이 마오쩌둥(毛澤東)이나 덩샤오핑(登小平) 시대의 개념인 ‘중국은 개발도상에 있는 피해 당사국’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떠오르는 강대국으로서 책임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모두 이런 평가에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많은 전략가들과 중국 문제 전문가들은 최근 이라크 위기에 베이징이 제한적으로만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아직도 중국 지도부는 세계 문제에 수동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중국은 아직도 국외문제에 최소한만 관여하면서 국익은 최대화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네만 도덕적으로 높은 점수를 따면서 다른 주요 국가들의 행동에 거저 업혀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비판론자들은 부인할 수 없는, 변화된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

즉, 과거 10년 동안 중국의 대외 정책은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민첩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훨씬 더 깊게 국제 현실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변화는 속도가 느리고 포착하기 힘들 만큼 미미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의미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더구나 그 변화는 중국의 대미 관계와 국제사회 전반에 걸쳐 아주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중국은 이제 국제 규범을 수용하고 국제 기구에 적극 참여할 뿐 아니라 외교 게임에서도 과거에 비해 훨씬 능력 있고 세련된 외교 기술을 발휘하고 있다. 또 협조의 기회가 생겼을 때 베이징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협상 테이블에 보다 많은 것을 내놓고 있다.

이런 상황 진전은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하면 할수록 그리고 세련된 외교 기술을 발휘하면 할수록, 미국의 국익과 충돌이 일어날 경우 결국 중국 자신의 국익 보호에 더욱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된 ‘외교 대장정’

어떤 의미에서 중국의 대외 정책은 이미 10년 전부터 진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이 1970년대 후반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중국은 처음으로 주요 외교 정책에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 이전의 마오쩌둥은 국제 체제의 규칙을 거부했고, 변화가 아닌 혁명을 추구하면서 국제 시스템 자체를 뒤집으려고 했다.

마오쩌둥의 외교 정책은, 과장된 외교 언어와 초강대국(미국과 소련)에 대한 강력한 반발, 개발도상국과의 긴밀한 유대관계, 국제 기관으로부터의 상대적 고립, 경제 자립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중국을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갔다. 국내 경제 현대화를 위해 그는 중국의 국제 사회 참여를 촉진시켰다. 중국은 이때부터 정부간 기구 및 비정부 기구, 특히 국제 금융기관 참여를 현격하게 늘림으로써 중국의 대외 참여를 확산시켰으며, 마오쩌둥 시대의 고립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이런 변환 모색은 국부적인 것이었다. 그의 집권기 동안 중국의 국제사회 참여는 여전히 미미했다. 사실상 중국은 국제기구 참가국들의 의무와 책임은 하지 않으면서 강대국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특권은 찾아먹었다. 이런 역동성은 특히 유엔 같은 정부간 기관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덩샤오핑 집권기에 중국의 외교 정책은 여전히 지도부 중심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했으며, 외교 관료들의 외교 기술이나 경험도 미숙했다. 더구나 중국 외교 정책 자체의 내용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종종 모호하고 종잡기 힘든 것들이었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 중국의 대외 정책은 극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우선 양자관계나 다자기구, 안보 현안에 접근하는 중국의 태도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유연하고 정교해진 것이다.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의 고립에서 벗어나 대외 이미지를 쇄신하고, 중국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며 안보를 강화한다는 것이 최근 중국 지도부들이 보여 주는 변화상들이다.

그들은 또한 전 세계에 걸친 미국의 영향력 확산을 차단하려는 시도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시도들은 중국 정부가 내놓은 발표문에서 여러 차례 드러났다. 이런 발표문들은 베이징의 계산된 영향력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나타난 변화된 모습들은 베이징이 양자관계를 확대하기 시작한 1990년 초반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1988~94년 중국은 소련뿐 아니라 18개국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경제·안보적 협조 관계를 강화하고 미국의 지역 동맹에 맞서기 위해 다양한 단계의 ‘파트너십’을 쌓아 가면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런 관계 구축의 정점은 중국이 2001년 러시아와 체결한 선린우호협력조약이다.

이 기간 베이징은 또한 다자간 기구를 혐오하던 과거의 태도를 버리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이 다자 기구를 중국을 견제하고 응징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해 늘 경계하는 태도를 고수했다. 덩샤오핑과 달리 중국의 새로운 지도부는 이런 기구들이 중국의 무역 및 안보 이익 증진과 부합하며 미국의 영향을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은 아세안(ASEAN)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는데, 95년 아세안 고위 관리들과 연례 회동을 갖기 시작했고, 2년 후에는 아세안 10개국에 중국·일본·한국을 포함하는 ‘아세안+3’라는 구도를 만들어내는 데 한몫했다.

그 다음 중국이 태동시킨 것이 아세안과 중국의 연례 회동인 ‘아세안+1’ 구도로, 통상적으로 중국의 국무원 총리가 회의를 주재한다. 중국은 또 2001년 상하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 포럼의 주최국으로서 APEC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다.

한편 중앙아시아에서도 중국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다자간 그룹 회동인 상하이협력체(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 발족을 주도했다. 상하이 협력체는 이 지역의 고질적 문제인 국경 문제를 해소하고 국경 지대 비무장화를 위해 창립된 것으로, 지금은 반테러 협력과 지역내 무역 문제에 역점을 두고 있다.

아시아·유럽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

중국은 유럽과의 관계 증진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1996년 중국은 국가 수반간 격년제 정상회담과 연례 장관급회의를 개최하는 아시아 – 유럽회의(Asia-Europe Meeting)의 창설국 가운데 한 나라로 참여했고, 2년 후인 1998년 중국과 유럽연합(EU)은 연례 정치 대화 모임도 발족시켰다.

더욱 극적인 변화는 베이징이 처음으로 지난해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까지 접근했다는 것이다. 연쇄 회동을 위한 중국의 제안이 그리 눈에 확 띄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체를 비난하던 중국의 과거 행태와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베이징의 이런 움직임을 중국이 새롭게 집단안보체제를 수용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중국은 NATO 접근을 통해 대서양 동맹국들을 관찰하고 동맹국 간의 이견을 활용하며, 특히 NATO의 중앙아시아 지역 개입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또 1990년대에 주변국들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해묵은 국경 분쟁을 해소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1991년 이후 중국은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라오스·러시아·타지키스탄·베트남 등과의 국경 분쟁을 해소했다. 일부 분쟁 문제 해결 때는 종전에 비해 훨씬 완화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국경 합의에서 중국은 마찰을 빚었던 국경 지역의 50% 또는 그보다 작은 면적의 지역만 중국에 편입되는 안을 수용했다. 예를 들어 타지키스탄과 마찰을 빚었던 파미르 고원 지역의 경우 중국은 총 2만 8,000㎢에 달하는 분쟁 지역 중 고작 1,000㎢만 가져갔다.

1962년 이래 국경 전쟁을 멈추지 않았던 숙적 인도와의 관계조차 향상되었다. 중국과 인도 사이의 국경을 둘러싼 긴장 관계는 아직 공식적으로 양국의 이견이 해소되지는 않은 상태이지만 1990년대에 체결된 상호 신뢰 구축과 병력 감축 협정에 힘입어 국경 분쟁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주변국들과의 국경 분쟁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된 상태로 접어들었다.

중국은 파라셀·스프라틀리·센카쿠 열도 등 근해의 도서 분쟁 문제에서도 더욱 실용적인 접근법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중국은 이들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국제법에 근거한 평화적 해결책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2002년 아세안과 중국은 이 도서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오랫동안 끌어왔던 행동강령안에 서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강령 초안의 최종안 문구가 아세안의 요구를 대부분 반영하고 중국의 제안은 일부만 수용했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미국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국제 포럼에서 중국이 안보 현안에 대해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3년의 아세안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새로운 안보체제 설립을 제안했다.

중국 외교부장 리자오싱(李肇星)은 아세안 지역 포럼의 규정 하에서 아시아 군 인사 간의 소통을 늘릴 회의체를 구성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아세안과는 어떤 안보 현안에 대해서도 논의하지 않겠으며 군사 문제는 별개 사안이라고 주장했던 10년 전 중국의 자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한편,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한 입장도 바꿔 점차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은 병력 사용권을 규정한 유엔 헌장 7조에 바탕한 안보리 결의안 투표에서 정례적으로 기권했다. 안보리 결의안의 주권 침해에 반대한다는 입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베이징은 이런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2002년 11월 이라크 무기 사찰을 결의한 안보리의 결의안 1441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1971년 유엔 가입 이후 유엔 헌장 7조를 지지한 횟수가 몇 번 되지 않는 중국으로서는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베이징은 이 외에도 동티모르와 콩고 및 기타 지역에서 비상사태 대처를 지원하면서 평화유지군 작전에 참여하는 횟수도 늘리고 있다.

중국이 전 세계의 군비 통제 및 핵 비확산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개입하고 있는 것도 아주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다.

1980년대 내내 베이징은 군비 통제와 핵 비확산 문제는 미국과 소련이 책임져야 할 현안이라면서 미국과 소련에 책임을 넘겼으며, 중국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책략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 이후 중국은 핵무기제한협정 및 화학무기협정을 포함해 몇 가지 주요한 군비 통제 및 핵 비확산 협정을 비준했으며,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기본 강령 준수에도 동의했다. 또 중국은 자국의 핵 탄두 현대화 노력과 직접 관련이 있는데도 1996년에는 포괄적핵실험금지협정(CTBT)에도 서명했다.

파키스탄과 이란 등 몇몇 나라들에 대한 민감한 무기 부품 수출과 관련해서도 중국은 수출품의 내용과 범위, 판매 횟수 등 전반적인 측면에서 수출 범위를 대폭 줄였으며 일부 국가에 대해서는 수출을 중단했다. 1990년대 후반 중국 정부는 수출 통제를 가함으로써 핵 비확산에 대한 약속을 아예 제도화하기 시작했고 이런 추세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더구나 정부 관료나 과학자, 군부 및 학계 인사 등 군비 통제 및 비확산 연구와 정책 결정에 관련된 인사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들은 고위급 지도자들에게 이런 현안들이 중국의 전반적인 대외 정책과 국가 안보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img2R중국의 대변신, 일시적 현대화에 그칠 것인가

대만 문제는 중국 최대의 안보 현안인 동시에 가장 민감한 외교 현안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베이징이 대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이 역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감과 세련된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1년 초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대만 정책은 불확실하고 반발적인 측면이 강했다. 베이징은 대만 독립 문제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나머지 대만 문제와 관련되지 않은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 같은) 외교사안마저 대만 문제라는 하나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았다.

게다가 대만과의 관계 설정에서도 중국은 통일 추진이나 긴장 완화라는 측면보다 독립을 강압적으로 막겠다는 쪽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관리들은 미국과 대만의 군사 유대 관계가 발전하는 것에는 예외 없이 반발했고 따라서 대만 문제는 미·중 관계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접근법은 역효과만 낳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1995년과 96년에 대만과 미국 지도부를 겁주기 위해 미사일을 실험발사했을 때에도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은 대만해협에 두 척의 항공모함을 배치했고 리덩후이(李登輝) 대만 총통을 지지하는 여론만 높여 주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중국 군부의 군사훈련과 호전적 외교 역시 아시아 지역, 특히 동남아 국가들 사이에서 중국에 대한 이미지만 나쁘게 했을 뿐이다.

4년 후에도 베이징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했다. 2000년 중국은 대만 문제에 대한 백서를 발간했다. 이 백서에서 중국은 양안협상 재개가 무한정 연기될 경우 군사력을 포함한 ‘강력한 수단’을 동원할 수도 있음을 밝힌 것이다.

베이징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통일을 위한 (구체적 시점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시간표를 작성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개월 후 나타난 결과는 베이징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대만이 처음으로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야당 지도자를 총통으로 선출한 것이다.

지난 2년 사이 중국은 마침내 이런 교훈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호전적이고 강압적인 전술 대신 인내와 온건의 외교를 수용한 것이다. 베이징은 통일을 위한 대략적인 시간표 작성 전략을 버리고 무력 사용 위협의 강도도 낮추었으며, (여전히 강압적 자세이기는 하지만) 경제를 매개로 대만을 끌어들이는 데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더구나 중국 지도부는 미국 과 대만의 군사 관계 증진에 일일이 반발하고 있지도 않다. 실제로 중국의 고위 관리들은 미국측과 회동할 때마다 대만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베이징이 대만 통일이라는 궁극적인 의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대만의 사스 위기 당시 중국이 고압적 자세를 취했던 것이나 대만의 세계보건기구(WHO) 가입을 완강히 거부했던 최근의 사례를 볼 때 대만에 대한 중국의 시각이 얼마나 바뀌었나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시된다.

그렇지만 중국의 대 대만 전술은 많은 부분에서 바뀐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현재 진행되는 사태를 보면 그렇다. 양안간 경제 교류의 폭발적 증가와 대만의 금융 문제 등을 감안할 때 중국 지도부는 시간이 중국 편이며 대만에 대해 중국이 써먹을 수 있는 카드가 많다는 데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나, 이런 자신감은 현재로서는 여전히 약한 편이다. 워싱턴이 베이징과 타이페이(臺北) 모두에 안보를 재확인해 주고 억제함으로써 사태 진전을 도와주고 있다.

마오쩌둥 집권시 중국 외교 정책의 대부분은 영화 ‘대부’의 콜리언 마피아 집안이 의사결정을 하는 것처럼 상담 역인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조언을 받아 마오쩌둥 자신이 모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식이었다.

중국이 국제 사회와 관계가 깊어진 덩샤오핑 시대에 들어서는 외교 정책결정 과정이 다소 개방되기는 했지만 궁극적인 의사결정은 여전히 집권층 중앙에서만 이뤄졌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의 외교 정책은 이전에 비해 훨씬 제도화되었고 탈 중앙집권화하고 있다. 어떤 지도자 개인에 의존하는 정도도 과거에 견주면 훨씬 덜하다.

중국 외교부의 극적 변신

주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주요 정책현안에 대한 부처간 협조체인 ‘영도소조’의 역할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2000년 후반 베이징은 ‘국가안전 영도소조’(國家安全領導小組)를 만들었다. 이 협조체는 어떤 한 개인의 역할과 권력을 제한하면서 제도 전체에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은 또한 과거와 달리 정부 안팎에서 수집되는 정책 분석 자료들도 다각도로 활용한다. 외교부 내에 새롭게 신설된 정책계획국이 좋은 사례인데, 현재는 외교부내 싱크탱크의 하나로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외교부도 핵 비확산과 미사일 방어 같은 기술적 현안에 대해 자문해줄 수 있는 전문가들을 외부에서 고용하기 시작했다.

학자와 정책분석가들이 이제는 정기적으로 내부 연구 그룹에 참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며 정책 브리핑 초안을 작성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해외 출장도 자주 다니고 관련 분야의 외국 전문가들과 교류도 가지며, 특히 중국 지도부 인사들이 국제 현안에 민감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조언하면서 정책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중국이 외교 정책결정 과정에서 이처럼 의견 수렴의 폭을 넓히는 것과 관련해 또 하나의 주요한 변화는 국제 현안에 대한 공론의 장이 점차 더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핵 비확산과 미사일 방어 같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 공개적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10년 전만 해도 전혀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관련 분야 전문가들은 이제 이런 문제들에 대해 신문 지상에서 자기 의견을 개진하고 텔레비전 대담 프로그램이나 출판물을 통해 중국의 외교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포함한 중국 언론은 토론면을 신설해 정기적으로 전문가들의 의견도 게재하기 시작했다. 특히 ‘환추신바오’(環球新報)와 ‘난팡주무’(南方周末) 같은 신문들은 논단 지면을 통해 북한 문제 등에 대한 당의 공식 정책에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미묘해지는 외교 현안을 다루는 중국의 외교관들도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외교 기술이 늘었고 관련 분야에 정통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 이는 20여 년 전 개혁 시대가 열리면서 중국 외교부가 적극적으로 외교관 훈련 프로그램을 주관해 온 결과다.

현직에 있는 중국의 고위급 외교관들과 중간 간부들의 대부분은 해외 공관에 배치되어 외교 실무를 익히고 최소한 1개 외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며, 유럽과 미국 대학에서 취득한 석·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외교부는 또 외교 이외의 다른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다른 부처의 중간급 간부들을 외교부에 배치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자국 외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중국의 새롭게 변화된 모습의 하나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정책에 대한 토론이나 브리핑은 신화사나 인민일보의 모호한 보도 또는 외교부가 발행하는 소책자에서만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국제적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는 중국의 시각을 홍보할 필요성이 있다고 베이징이 판단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은 논란거리가 되는 외교 정책에 대해 정부 백서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현안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을 적극 개진하는 자세를 취하겠다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인구 통제나 인권 문제, 대만, 티베트, 국방현안 같은 미묘한 문제를 포함해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백서를 30종 이상 발간하고 있다.

외교 정책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베이징은 인터넷도 적극 활용한다. 정부가 발간하는 모든 백서를 국무원 정보처 웹사이트(www.china.org.cn)에서 볼 수 있으며, 외교부도 지역 현안과 기자회견문, 주요 연설문 등 외교와 관련한 유용한 정보들을 외교부 웹사이트(www.fmprc.gov.cn)에 올려놓고 있다.

이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문건은 대부분 틀에 박힌 내용들이고 미묘한 문제들을 정부 입맛에 맞춰 희석시키려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자세히 전달하는 창구라는 점에서는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시대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내부 변화와 더불어 중국은 중국 주재 외국 언론인들에 대해서도 과거에 비하면 훨씬 진전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1999년 중국 외교부는 동시통역 시설을 갖춘 현대식 국제 미디어 센터를 새로 개설해 2주에 한 번씩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베이징 주재 외국 언론인들에 따르면 외교부의 대 언론정책이 매우 까다롭기는 하지만 이 격주 기자회견에서 통상적으로 알맹이 있는 문답이 오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외교부 고위 관리들도 주요 정책 문건이 발표되기 전이나, 2002년 10월 장쩌민(江擇民)의 텍사스 크로포트 목장 방문 같은 주요한 양국 정상회담이 있은 다음에는 비보도를 전제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외국인 기자들과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한때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던 외교 문제를 이렇게 공개적 절차로 풀어가고 있다는 것은 극적인 변화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외교 형태의 극적 변화는 중국 지도부의 잦은 해외 나들이다. 외국을 상대로 자국 정책을 적극적으로 알리겠다는 취지임은 물론이다.

1990년대에 장쩌민과 리펑(李鵬), 주룽지(朱鎔基)는 잦은 해외 출장을 통해 전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으며, 특히 아시아 지역 여행이 잦았다. 2002년 11월에 지명된 이들의 후계자는 훨씬 더 국제적 감각을 갖춘 인물이며 과거 지도부에 비해 이미 훨씬 많은 시간을 해외 출장에 할애하고 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신임 정치국 위원들은 임기 4년 동안 40회 이상의 해외 출장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오쩌둥은 전 생애를 통해 단 2회만 중국 바깥 나들이를 했을 뿐이고(두 번 모두 소련 방문), 덩샤오핑도 중국 최고 지도자로서 해외 출장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img3L중국의 새로운 사고방식

이처럼 중국의 외교 정책은 지난 10년 사이 그 내용과 성격, 집행의 모든 면에서 결정적으로 변화한 모습을 보였다. 90년 초반까지만 해도 국제 문제에 편협하고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베이징으로서는 괄목할 만한 진화의 과정을 거친 셈이며, 현재는 잠재적으로 더 큰 변화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봐야 한다.

지난 3년간, 특히 2001년 9·11 이후 중국의 전략가들이 발표한 글들을 보면 국제 질서와 중국의 역할에 대한 그들의 시각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주요 신문과 간행물에는 중국이 해묵은 ‘피해의식’(受害的 心態)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극적인 글들이 게재되고 있다.

이 글의 필자들은 중국이 여전히 ‘치욕과 굴욕의 150년 역사’를 강조하면서 이런 관점에서 현대 국제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장쩌민 전 주석도 2001년 7월 중국 공산당 창립 80주년 기념식사에서 이런 견해를 은근히 지지했다고 비판한다. 영향력 있는 분석가들은 이런 개념 대신 중국이 ‘대국의식’(大國心態)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롭게 부상하는 이런 개념은 이제 피해의식을 지난 20년 동안 이룩한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의 자신감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과거 국제사회에서의 책임을 의도적으로 회피했고 현재도 국제사회에서 제한된 영향력만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더 이상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기류를 반영하는 것이다.

전 국가적으로 이런 개념이 확산되면서 중국은 국제관계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따구어 관시’(大國 關係)라는 개념을 점차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 전략가들은 중국의 국익이 주요 강대국들과 유사한 선상에 있으며 개발도상국들의 국익과는 그다지 상관 없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외교 비중을 점차 낮추어 왔다.

이런 변화 하나만 보더라도 중국이 1990년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개념을 전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세계화와, 다른 주요 강대국 및 다자간 국제포럼 때문에 중국이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긴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이제 중국 관료들은 중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들과 ‘국제사회에서의 책임감 공유’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후진타오 주석은 지난 6월 (비록 ‘토론회원’ 자격이기는 하지만) G-8 정상회담에 참가한 중국 최초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중국의 신사고 개념 가운데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중국이 받아들이기 껄끄러운 일이겠지만, 어쨌든 현 국제질서가 일극화 체제이며 미국의 우위가 수십 년은 지속하리라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공개적으로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난하면서) 다극화 체제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분석가들은 이제 중국이 당분간은 미국의 세계 지배에 도전할 수 없다(도전하지도 않을 것이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중국의 한 저명한 외교 관계 전문가는 최근 ‘패권적 힘’(hegemonic power)과 ‘패권적 태도’(hegemonic behavior)를 구분하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이 전문가는 중국이 미국의 패권적 힘은 수용할 수 있지만 패권적 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학자는 또 ‘평화와 개발’ 그리고 중국의 경제적 목표라는 것은 일극화된 국제 질서 속에서, 지금도 그런 것처럼, 계속 추구할 수 있다는 점도 주장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점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즉, 중국은 미국의 군사 우위와 지난 20년 동안 아시아에서 안정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노력 때문에 경제적인 면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복잡다단한 국내 문제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지배적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심각한 문제들이 여전히 앞에 놓여 있다. 외교 분야에서의 변화 못지않게 중요한 분야다. 중국의 외교 정책은 아직도 중국 지도부가 국내에서 추구하는 목적에 봉사하고 있다. 즉, 전환기에 놓인 레닌주의 체제를 강화하고 개혁하면서 체제 생존을 확고히 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외교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활성화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지도부가 전환기의 정치·사회·경제적 변화에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국내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전염병에 대처하는 예에서 보았듯 중국의 정치 시스템은 아직도 불투명하고 주변국의 경제와 생활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베이징은 SARS 위기를 초기에 재빠르게 대처하지 못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국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의를 반감시켰다.

중국 지도부는 SARS 발생 초기에 중국내 안정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초기 단계에서 전염병 위기를 무시해 버리고 모든 정보를 혼자 장악함으로써 전염병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다행스럽게도 SARS 위기는 중국도 국제사회와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중국 지도부에 새롭게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차질이 빚어지기는 했지만 중국은 새로운 외교를 지속적으로 추구할 것이며 미국과 아시아의 정책 입안자들에게는 기회와 도전을 안겨줄 것이다. 중국이 국제기구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핵심 현안에 대한 중국의 협조를 유도해낼 기회가 많아졌다.

더구나 중국은 지금 국제 협상 테이블에 이전보다 훨씬 많은 재원을 내놓고 있고, 그만큼 영향력도 커졌다.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이해관계가 확대되고 중국 스스로 강대국으로서 이해득실에 얽매이게 되면서 중국은 전통적 측면과 비전통적 측면에서 점차 전 세계적 안보 위협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베이징이 북한 핵 위기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미국 지도부는 위협에 대한 인식을 같이하고 서로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다른 안보 현안에서도 중국의 협조를 확대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양자간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중국이 대미 관계를 점점 더 성숙시켜 나갈수록 외교 정책과 외교 관계를 중국의 국익을 위해 활용하는 데 점차 더 숙달되어 가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 중국이 훨씬 더 영리해지고 세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더 온순해지거나 친절해진 것은 아니다.

중국이 미국과 동맹국의 정책을 훼손하고 잠재적으로는 미국의 정책에 도전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때 베이징의 새로운 외교 기술은 언젠가는 워싱턴이 추구하는 목표를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미국의 허를 찌르는 중국의 책략이 먹혀들었다는 것을 미국은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과 외교관들은 국제기구에서의 중국의 능동적인 활동에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궁극적으로 중국 외교관들이 관심을 집중하고 노력을 경주하게 될 곳은 바로 이런 국제기구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은 현재 자국의 국익을 추구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규칙과 규범 안에서 움직일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국제적 시스템 모두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의 우위와 대만의 지위 같은 것에는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다. 워싱턴은 이런 상황을 인식해야 하며, 아시아 지역에서의 중국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 베이징이나 그 주변국들과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

중국은 아시아 지역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급속하게 떠오르고 있고, 아시아 지역은 중국의 커지는 영향력을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은 지금도 아시아 지역을 전략적으로 점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위치를 지키기를 원한다면 지역 우방국 및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국제사회 전체가 확실히 해 두어야 할 장기적 임무가 있다면 그것은 국제정치에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신외교와 새로운 관점이 안정과 안보(stability and security)에 들어맞아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과 무조건 경쟁하면 불필요하게 미국의 재원을 지출하게 되고, 아시아 지역에서 유지 가능한 힘의 균형이 출현하는 것을 훼손할 뿐이다.

중국이 점점 더 국제기구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은 결국 국제기구 참가국들의 인식에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중국의 국익 추구가 늘어나며, 참가국들에 대한 중국의 개입도가 더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후 20년간 중국의 주된 관심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국내 현안에 맞춰질 것이다. 세계 최대 인구 보유국이 경제·정치적인 면에서 지속적으로 현대화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중국의 최고위층 인사들은 향후 20년 간을 국가 발전의 ‘전략적 기회’로 간주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 대한 문호도 열어 놓았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중국의 부상이 가져올 도전과 기회를 현명하게 활용해야 할 것이다.

글/이반 미데이로스 랜드 코퍼레이션 정치학 전문가·테일러 프레이블 하버드대학 올린 전략연구소 연구원
요약 정리/이흥환 미 동북아국제전략포럼 KISON 프로젝트 연구원

2004년 01월호 | 입력날짜 200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