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성화된 美日동맹, 와해되는 韓美동맹 이시우 2005/02/27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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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日 방위연구소의 ‘2004 동아시아전략개관’중 한반도 문제 다이제스트
활성화된 美日동맹, 와해되는 韓美동맹
요약·정리 최영재 월간중앙(cyj@joongang.co.kr)

베이징에서 열린 북핵 6자회담에서 남북한과 미·일·중·러 대표들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는 매년 ‘동아시아전략개관’이라는 보고서를 펴낸다. 이 보고서에는 미·중관계, 미·일관계, 한반도문제, 한·미관계, 한·일관계, 동남아문제, 북·중관계, 북·일관계 등 동아시아의 국제 정치 현실을 방대한 분량으로 정리하고 있다. 일본의 국력에 걸맞게 이 보고서는 한국 국내의 그 어떤 보고서보다 탁월하고 치밀하다.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 가운데 북한 핵문제에 관한 분석만 요약해 제시한다.

북한은 2002년 12월 핵 시설 가동과 건설 재개를 발표했다. 또 2003년 1월10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1993∼94년의 핵 외교에 이어 ‘제2차 핵 외교’를 시동했다. NPT 탈퇴 선언 후 북한은 잇따라 도발적 행동을 취했다.

2003년 2월에는 경제 제재가 실시될 경우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의무 이행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MiG-19 전투기로 사실상 남북해상경계선(NLL)을 넘어 비행하고, 동해에서 지대함 미사일을 발사했다. 3월 들어서는 동해에서 북한의 MiG-29 등의 전투기 4기가 미국의 RC-135 전자정찰기에 접근해 북한 영내에 강제 착륙시키려고 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달 7일에는 핵 시설을 모두 재가동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10일에는 다시 지대함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 또 4월에는 일본이 북한의 ‘공격권 내’에 있다고 경고함으로써 탄도미사일 공격을 암시했다.

● 새로운 외교전술 :‘핵 보유’를 가지고 노는 북한

이 같은 일련의 행동은 과거의 행동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2003년 1월의 NPT 탈퇴 선언은 1993년 3월의 탈퇴 선언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2003년 2월과 3월 동해에서 지대함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1994년 5, 6월 당시와 같은 행동이었다. 또 2003년 2월 북한 전투기가 황해에서 NLL을 넘어 비행한 것은 1975∼76년 6월의 행동과 유사하며, 2003년 3월의 미국 정찰기에의 접근 사건은 1968년의 푸에블로호 사건이나 69년의 EC-121 격추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03년 4월 탄도 미사일로 위협한 것은 1998∼2000년 미사일 외교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핵 외교에서는 과거와 다른 부분도 있다. 북한은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핵 억지력 보유’를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핵 실험을 교섭 카드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핵 외교에서 북한은 어디까지나 핵무기를 보유할 의도가 없다는 주장을 반복했으며, 마지막까지 핵을 개발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핵 외교에서는 핵 계획을 구태여 숨기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도발적 행동에도 2003년 말 새로운 2차 핵 외교를 벌이는 북한의 정치적 목적은 크게 변화한 징후는 없다. 여전히 일본·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체제 유지가 목표인 것 같다. 북한은 이미 입장을 아주 명확하게 표명했다.

북한은 2002년 10월의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①불가침조약 체결 ②평화조약 체결 ③경제 제재 전면 해제 ④부시 대통령 방북을 미국이 수락하면 핵 개발을 포기할 생각임을 전했다고 보도됐다.

또 같은 달 미국의 북한에 대한 ‘자주권’ 인정(내정 불간섭), 불가침 확약, 경제발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핵문제를 교섭을 통해 해결할 용의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이어 2003년 4월 북한은 북·중·미 3자회담에서 “조·미(朝美) 쌍방의 우려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다”는 ‘일괄타결 방식’을 내놓았다. 그리고 8월에 개최된 6자회담에서도 이 제안을 반복하고 그 내용을 공표했다.

북한이 제시한 ‘일괄타결 방식’에 따르면 미국은 북·미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②북·미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③북·일 내지 남북의 경제협력 실현을 담보하고 ④경수로 제공 지연에 따른 전력 상실을 보상하고 경수로를 완성하며, 이에 대해 북한은 ①핵무기를 만들지 않고, 핵 시설에 대한 사찰을 받아들이고 ②핵 시설을 궁극적으로는 해체하며 ③미사일 발사 실험을 보류하고 수출을 중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치를 4단계로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 단계를 보면 첫째, 미국이 중유를 다시 제공하고, 인도적 식량 지원을 대폭 확대함과 동시에 북한은 핵 계획 포기를 표명한다. 둘째, 미국이 북한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전력 상실을 보상하는 시점에서 북한은 핵 시설과 핵 물질 동결·감시 사찰을 받아들인다. 셋째, 북·미 및 북·일 국교 정상화가 실현됨과 동시에 북한은 미사일 문제를 타결한다. 끝으로, 경수로가 완공되는 시점에서 북한은 핵 시설을 해체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10년 전인 1993년 10월에도 핵 문제의 해결을 둘러싸고 자국의 요구를 미국측에 비공식으로 전한 것이 있다. 그 내용이란 ①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위협도 하지 않는다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확약을 포함한 평화협정(내지 조약)의 체결 ②핵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을 위한 경수로 공급 ③완전한 외교관계 정상화 ④남북한에 대해 균형을 취한다는 정책의 서약이라는 것도 있었다. 즉, 북한의 정책목표에서 무력 불사용, 에너지 공급, 관계정상화 같은 기본적인 부분은 10년 전과 비교해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 10년 전 핵 위기 때와 변하지 않은 북한의 정치적 목적

1994년 북·미 간에 기본합의가 성립되고 나서 10년이 지났지만, 그 사이 북한과 관계 각국의 역학관계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먼저 북한이 10년 전과 견주어 유리해진 점은 첫째, 북한의 핵 개발 진전이다. ‘기본합의’에 따라 북한 핵 개발의 주요 부분인 플루토늄 생산·추출·축적은 동결되었지만, 기폭장치 개발, 소형화 추진, 발사 수단 개발은 동결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1994년 이후에도 계속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핵무기의 소형화가 진전되고 있다면 이를 탄도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의미는 크다.

또 북한은 종래의 플루토늄형에 덧붙여 우라늄 농축형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우라늄 농축형 핵 시설은, 지금 같은 속도로 개발되면 2005년께는 운전이 가능하며, 그 후에는 연간 2개 이상의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핵무기 운반 수단이 될 수 있는 장거리 탄도 미사일 개발이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은 사정거리 1,300km의 노동 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해 현재 약 175∼200기를 배치했다. 따라서 이미 일본 국토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노동 미사일은 핵 탄두, 재래식 탄두, 생화학 탄두를 장착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발사대가 붙은 차량에 실린 노동 미사일은 이동하면서 운용되며, 그 발사를 사전에 파악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선제공격은 유효한 대책이 되지 못한다. 북한이 노동 미사일을 배치한 것, 그리고 미·일 양국이 유효한 대처 수단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서울과 같이 도쿄(東京)는 군사적으로 북한에 인질로 잡힌 상태다. 그만큼 일본의 취약성은 높다.

다른 한편 10년 전에 비해 북한이 불리해진 점도 있다. 첫째, 한·미 연합군의 조선인민군에 대한 군사적 우위가 명확해졌다. 1990년대를 통해 경제적 혼란에 의한 재정난으로 북한의 전쟁 수행 능력은 떨어졌다. 이 때문에 북한이 한국을 전면 무력 침공했을 경우에도 서울 북방에서 막을 수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한·미 양국의 대 야포 공격 능력은 계속 강화되고 있으며, 북한의 야포가 사용되기 전에 파괴한다는‘적극적 능력’과, 한국에 대한 ‘압도적 반응’이라는 운용 개념도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할 수단으로 최신형 대 야포 레이더, 정밀 유도 무기, 전역(戰域)·전략 수준의 무인항공기, 정보·감시·정찰 능력 강화를 들 수 있다.

또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에 의하면 주한미군은 대지 공격용으로 개조한 지대공 미사일·패트리어트 PAC-1을, 북한의 장거리포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야포에 대한 공격 능력이 강화되면 서울을 인질로 잡는 방식으로 북한이 확보해온 억지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북한의 교섭 능력은 낮아질 것이다.

● 강화된 북한의 외교카드: 핵과 미사일 개발

한·미 연합군은 일관된 현대화로 반격 능력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미군은 군사혁신(RMA)에 따라 공격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이는 이라크전에서도 밝혀졌다.

‘한미연합작전계획 5027’은 북한이 한국을 전면공격할 것이 확실해졌을 경우 선제공격해 북한의 침공을 저지하면서 반격 작전을 벌여 북한의 정권을 타도한다고 되어 있다. 1994년 6월, 게리 럭 한·미 연합군 사령관(당시)은 전면전쟁에서 북한이 1∼2개의 핵무기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북한을 타도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러한 한·미 연합군의 작전 계획과 군사 능력이 북한으로서는 전면전이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북한 지도부가 합리적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한 전면전쟁을 선택하지 못한다는 전제에 따라 북한의 벼랑끝 외교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미국은 단독 또는 한국과 공동으로 북한의 핵 시설을 파괴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사실 1994년 6월 한반도 위기가 발생했을 때, 이미 미국은 주변에 많은 피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북한 핵 시설을 파괴할 계획을 책정하고 있었다. 또 2002년 9월 발표된 ‘미국의 국가안전보장전략’에서 미국이 ‘선제공격’을 공식 전략으로 채용하면서 북한 핵 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적 공격 가능성이 커졌다.

물론 이러한 공격은 한국에 대한 보복공격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 능력과 새로운 전략으로 북한의 벼랑끝 외교는 좀더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이 불리하게 된 두번째 이유는, 일본과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이전보다 엄격해졌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강화된 것이다. 일본은 1990년대 후반 미·일동맹을 재검토하면서 주변 해역에 만약 위험요소가 생기면 경제 제재를 위한 선박 검사 활동과, 미군 활동을 후방 지원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또 특수부대의 침입, 난민 유입에 대한 대책도 강구했다. 이 같은 작업으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위기 또는 무력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과거에 비해 훨씬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2003년 12월, 일본 정부는 북한의 노동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지상 배치용 패트리어트 미사일(PAC-3)이라든가 해상 배치용 스탠더드 미사일(SM-3) 도입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또, 2004년 2월에는 국회에서 일본의 독자적 판단으로 북한경제를 제재할 수 있는 외국위체·외국무역법(外國爲替·外國貿易法)을 일부 개정했다.

북·일 수뇌회담 이후에도 북한이 많은 일본인을 납치한 사실을 인정했으면서도 납치 피해자의 일본 귀국을 거부하기도 하고, 사망한 피해자에 대해 이해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일본 여론은 악화되었다.

2003년 4월 마이니치(每日)신문 여론조사에서는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해 ‘평화적 해결이 무리라면 경제 제재 등 강력한 수단도 부득이하다’는 회답이 54%로 반수를 넘었으며 ‘어디까지나 대화로 평화적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는 회답은 33% 정도였다. 또 같은해 8월 산케이(産經)신문의 조사에서는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에 대한 반대 급부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36.2%가 긍정적, 58.4%가 부정적 답변을 했다. 일본은 이러한 여론을 배경으로 경제 제재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북한에 의한 불법행위를 더욱 엄중하게 단속하는 등 압력을 강화했다.

중국도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애초 미국에 북한과의 양자협의를 촉구했는데, 미국이 다자간 협의 외에는 응하지 않자 미국 뜻에 따라 북·중·미 3자회담 또한 한국·일본·러시아를 추가한 6자회담에 응하도록 북한을 설득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은 소극적 태도를 취한 북한에 압력을 넣기 위해 북에 대한 석유 공급을 3일간 중지했다고 전해졌다.

북한이 불리하게 된 세번째 이유는 북한 내부의 경제·사회 상황이 크게 악화해 식량과 에너지를 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게 됐다는 점이다. 북한의 국민소득(GNI)은 1993년 205억 달러에서 2002년 159억 달러로 감소했다. 재정규모도 1993년 약 410억 원에서 2002년 약 220억 원으로 줄었다. 2002년 11월부터 2003년 10월까지의 곡물 생산량은 384만t으로 예상된다. 상업 수입 내지 국제사회의 지원을 고려한다고 해도 약 56만t의 곡물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 북한의 약점 : 군사 균형 악화, 북한 포위망 형성, 경제·사회 상황 악화

한편 한국과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은 각각 1996년 460만 달러와 9,765만 달러에서 2002년의 1억3,492만 달러와 2억5,727만 달러로 증가했다. 북한은 외부의 인도적 지원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경제 제재에 대한 북한의 취약성은 10년 전보다 높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탈북자의 경우 한국 입국자가 1993년 8명에서, 2002년에는 1,141명으로 늘어났다.

이상과 같이 핵·미사일이라는 군사적 외교 카드는 10년 전보다 강화되었지만, 전반적인 군사적 균형과 국내외 정세는 북한에 불리하게 되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북한이 10년 전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 있는가, 불리한 입장에 서 있는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향상된 반면 그 국내 상황이 악화됐음을 고려하면 무력 충돌이 발생했을 경우의 잠재적 위험 혹은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은 이전보다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핵 외교에 대해 미·일, 한·미 동맹은 대조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탄도미사일방어(BMD)에 관한 공동 기술 연구라든가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미·일 양국은 공동으로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2003년 동맹 관계가 50주년을 맞았음에도 핵 문제 대응이라든가 동맹 관계 재검토 작업을 놓고 입장 차이를 메우지 못하고 마찰이 계속되고 있다.

북한 핵 문제에 대응하는 미·일의 협조 체제는 10년 전보다 훨씬 바람직한 상태다. 그 배경으로 미·일 양국은 1990년대 후반에 동맹을 재검토한 바 있다. 1997년의 ‘미일방위협력을 위한 지침’(미일新안보가이드라인) 재검토, 99년 ‘주변 사태에 즈음하여 아국의 평화 내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에 관한 법률’(주변사태안전확보법)을 제정하면서, 한반도에서 위기 또는 무력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미·일 양국은 원활하게 공동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결정했을 경우 ‘주변 사태에 즈음하여 아국의 평화 내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에 관한 법률’에 따라 미·일이 공동으로 문제 선박을 검사할 수 있게 된다.

미·일 양국은 BMD에서도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002년 12월 양국은 BMD에 관한 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에 관해 합의했다. 2003년 들어서는 대량파괴무기(WMD) 확산을 막기 위한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을 실시하면서 미·일 양국은 협력을 추진했다.

2003년 9월 호주 외해에서 실시된 첫 PSI 해상합동저지훈련에 일본 해상보안청의 순시선과 특수부대, 방위청의 옵서버가 참가했다. 언론은 일본이 훈련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공동행동을 배경으로 미·일 양국은 북한의 핵 문제를 ‘대화와 압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 대조적인 美日동맹과 韓美동맹

이와 반대로 한·미 양국의 북한에 대한 공동 행동은 적어도 군사 면에서는 저조하다. 예를 들면 미국은 BMD를 적극 추진하고 있어, 2003년 8월에는 BMD 능력을 지닌 최신형 패트리어트 미사일(PAC-3)을 한국에 실전배치했다. 그러나 한국은 2004년부터 48기의 패트리어트 PAC-3를 도입할 예정이었던 차기 지대공 미사일(SAM-X) 계획을 2006년으로 연기하면서 BMD에 소극적으로 나왔다.

또 PSI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의 참가 문제는 북한 핵 문제의 진전 상황과 해결 노력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지리적, 전략적 특수성을 감안해 검토해 나가겠다”며 2003년 12월 현재까지 참가하지 않고 있다.

또 미국이 선제행동 전략을 채용한 것이 한·미 동맹을 긴장시켰다. 이것으로 한국은 북한보다 오히려 미국의 행동이 자국의 안전을 위협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느꼈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경우 북한의 보복공격에 노출되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인 것이다. 한국의 이러한 우려는 1994년 핵 위기 당시에도 나타난 것이지만, 미국의 선제공격으로 그 우려는 한층 명확하게 되었다. 이는 탈냉전기에 걸맞게 변화하지 못한 한·미 동맹에 9·11테러의 산물인 선제공격 전략을 도입하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알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10년 전보다 바람직한 요소도 있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인 10년 전 핵 위기 때는 북·미 관계 개선과 한·미동맹 유지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이후에는 오히려 한국이 북·미 관계 개선과 한·미 동맹 유지 양자를 원하고 있다. 또 파월 미 국무장관이 “1994년 기본합의 때는 한국이 자신의 운명에 관계된 사태 안에서 당사자 역할을 다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우리가 그것과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려고 한다”고 말한 것처럼, 미국은 10년 전과 달리 핵 문제 해결 과정에 한국을 끌어넣어 핵 문제 해결이 한·미 관계 악화로 연결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이 대조적인 상황에 놓인 원인의 한 가지는, 전자가 냉전의 종언과 새로운 안전보장 환경에 대응해 동맹의 목적과 역할분담 등 재검토 작업을 이미 끝낸 포스트 냉전형 동맹이 된 데 반해 후자는 아직 기본적으로 냉전시대의 태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한·미 양국은 한반도에서 냉전 대립을 관리하면서 WMD 확산을 방지하고 평화공존 체제를 확립한다는 냉전 과제와 포스트 냉전 과제 모두를 동시에 해결하라고 촉구받고 있는 것이다.

한·미 간의 알력을 해소하거나 적어도 억제하기 위해서는 한·미 동맹도 미·일 동맹처럼 새로운 전략 환경에 걸맞은 내용으로 재검토·재편성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양국은 2002년 12월의 한미안보협의회의(SCM)에서 ‘미래의 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를 열자고 합의하고 2003년 4월 제1회 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2003년 5월의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주한미군 기지를 몇 개의 주요한 거점에 집약시키고 서울 중심에 있는 주한미군 용산기지를 남쪽으로 옮기는 계획을 책정한다는 데 합의했다.

또 두 정상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안보 환경을 고려하면서”라는 단서를 붙이면서도 한강 이북에 있는 주한미군 기지의 재배치를 추진해야 한다는 견해에 일치를 보았다. 또한 같은해 6월에 개최된 제2회 회의에서 ①군사 능력의 발전 ②용산기지 이전 ③몇 가지 군사 임무 이전 ④주한미군 재편에 대한 실시 계획을 작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2004년 1월 한·미 양국은 한·미 연합군 사령부의 사령관실 내지 부사령관실 등 몇 개의 시설을 제외한 모든 시설을 2006년 말부터 2007년 말 사이에 용산기지에서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북한 핵 문제가 재연돼 한·미 동맹의 억지력이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한·미 동맹의 재검토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이는 한반도가 냉전 대립 구도에서 포스트 냉전적인 평화공존으로 이행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미 동맹의 탈냉전화가 한반도의 탈냉전화와 같이 진행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양방의 작업을 어떠한 속도로 진행할 것인지, 또 그 두 가지를 어느 정도 연결할 것인지 하는 점일 것이다.

북한 핵 개발 문제에서 10년 전과 현재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10년 전에는 북·미 양자가 문제 해결의 중심이었고, 이번에는 다국간 협의가 견인차라는 점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 문제는 “북·미 간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과 세계 각국 간의 문제”라고 규정하고, 이 문제를 다국 틀 안에서 다룰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배경은 첫째, 자국만이 문제 해결의 책임을 지는 것을 피하면서 관계 각국에 정치적, 경제적 비용을 분담시키고 당사자 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로는 북한 포위망을 형성해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면서 필요한 경우 유엔 안보리의 북한 제재결의를 얻기 쉬운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셋째는 중국·러시아 같은 주변 각국을 끌어들여 지역적 넓이를 지닌 평화 체제를 만들겠다는 목적이 있는 것 같다.

2003년 1월 북한이 NPT를 탈퇴한 뒤에도 관계 각국은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호소했다. 같은 달 13일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동아시아 태평양 담당)는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면 에너지 관련 원조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14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핵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면 ‘대담한 이니셔티브’를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움직임을 주변 각국도 측면 지원했다. 18일에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로슈코프 외무차관이 방북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과 회담했으며, 핵 문제의 ‘포괄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또 3월 하순에는 중국의 첸치천(錢其琛) 부총리가 방북해 3자회담에 응할 것을 요구했다고 전해졌다.

● 재검토된 동맹, 재검토될 동맹

애초 북한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면서 북·미 양자회담을 주장했다. 그리고 2월말부터 4월초까지는 각종 무력 도발 행위와 함께 공격적인 행위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러한 도발 행위가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자 북한은 4월12일 다국간 협의 수용을 시사하였으며, 그 결과 동월 23∼25일 베이징에서 북·중·미 3자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북한은 이 회담을 중국이 ‘장소 제공국’으로 역할하는 북·미 회담이라고 자리매김했다. 즉, 형식은 다국간이었더라도 그 틀 안에서 실질적인 북·미 협의가 가능하다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회담에서 북한은 핵 무기 보유를 암시하면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일괄타결방식’을 내놓았다.

3자회담 개최를 받아들이자 관계국은 계속 다국간 협의를 모색했다. 이에 대해 5월 한·미 양국 정상은 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참가가 불가결하다는 것, 그리고 러시아가 다국간 협의에서 건설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이어 6월에 열린 한·미·일 3국조정그룹회합(TCOG)에서는 확대된 다국간 협의가 필요하다는 점, 북한 핵 문제에 대해 한·일이 사활적 이익을 가지고 있으며, 양국이 다국간 협의에 참가하는 것이 불가결하다는 점에 합의했다. 7월 중순에는 중국의 외교부 부부장(외교차관)이 북한을 방문해 다국간 협의에 응하라고 북한을 설득했다.

대화에 응하라는 압력과 병행해 각 국은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 5월 미국은 WMD 같은 관련 물자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PSI를 제안하고 일본과 호주를 포함한 10개국에 참가를 호소했다.

같은 시기 일본 정부는 핵 개발 전용이 가능한 부품을 북한으로 부정 수출하려고 한 재일 조선인 경영 무역회사를 가택수색하고, 북한에서 니가타(新潟)항에 입항하는 만경봉92호에 대한 검사를 강화했다. 6월에는 에비앙 정상회담의에서 북한의 핵 문제와 납치 문제가 언급되었다. TCOG에서는 마약거래와 통화 위조 같은 북한 관계자에 의한 불법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협력하자고 논의했다.

● 핵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다국간 협의

결국 첫번째 6자회담이 2003년 8월29일 베이징에서 열렸다. 이 회담의 의의는 첫째, 핵 문제에 관한 본격적인 교섭의 출발점이자 해결을 위한 방향성이 제시된 점이다. 둘째로는 주요 관계국 모두를 끌어넣는 틀이 형성되었다는 점, 셋째는 북·미 또는 북·일 등 2개국간 협의도 개최되었다는 점이다.

회의가 끝날 무렵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한반도를 비핵화해야 한다는 점, 문제 해결은 단계를 따라 동시에 병행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표명했다. 이 의장 성명은 전 참가국에 의한 공동성명이 작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이 단독으로 발표한 것이었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문제 해결의 방향성이 과감하게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핵 문제 해결 움직임은 시간을 끌고 있다. 2003년 11월에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북한 경수로 제공 사업을 1년 기한부로 중지하기로 결정하는 등 북한에 대한 압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또한 2004년 2월에는 제2차 6자회담이 열려 몇 가지 사안이 합의되었지만, 북한은 핵 개발 계획의 ‘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하고 또한 불가역적인 폐기’(이른바 CVID)를 받아들이지 않아 큰 진전은 없었다.

북한 핵 문제를 외교 수단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최근의 움직임은 그 실현에 기대를 갖게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은 ‘일괄타결방식’을 제안해 자국이 요구하는 해결 방법을 분명히 했다. 그 제안은 북한측에 아주 유리한 것인데, 이것은 향후 교섭을 통해 북한이 양보하는 상황을 예상하고 집어넣었기 때문일 뿐, 이 제안대로 해결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미국이나 일본도 자국이 생각하는 해결책을 서서히 명확히 하고 있다.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미·일 양국은 한결같이 현안이 해결되면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시사해 왔다. 미국은 2003년 8월의 6자회담에서 3단계 청사진을 제시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도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이 있을 이유가 없다”며 “북한의 안전보장 우려에 대응하기 위해 북한이 마땅히 핵을 폐기하는 것을 전제로 6자회담 과정에서 논의를 심화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 핵문제 해결 전망

또 회의 종료 수일 후 파월 미 국무장관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 침략 또는 적대시하고 있지 않다”는 안전보장 약속을 북한에 주기 위한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같은 해 9월 말에 개최된 한·미·일 국장급회담에서는 북한이 핵 개발 포기를 약속할 경우 필요하게 될 사찰 체제를 검토했다. 그리고 10월에는 부시 대통령이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북한에 다자간 안전 보장을 제공할 생각이 있다고 표명했다.

일본은 2002년 9월 북·일 평양선언에서 국교정상화가 실현될 경우 북한에 무상 자금 협력, 저금리 장기 차관 제공 내지 국제기관을 통한 인도적 지원 같은 경제 협력, 민간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협력은행 융자, 신용 공여 등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은 분명하게 핵이라든가 납치 문제 같은 현안 사항을 일본의 경제 원조에 연결하려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이 6자회담에서 미국에 대해 북·일 경제협력 실현의 담보를 요구한 것은 극히 흥미롭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반드시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북한은 10년 전보다 많은 흥정 재료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나라의 경제·사회상황은 악화되어 있다. 약한 입장에 있는 북한으로서는 가진 외교 카드를 유효하게 살리기 위해 한층 위험한 벼랑끝 외교 전략을 쓸지도 모른다.

핵 실험은 필요 이상으로 긴장을 높이기 때문에 북한이 이를 실제로 사용할 가능성은 작지만, ‘핵 실험을 하겠다’는 위협은 계속 쓸 것이다. 또한 북한은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이라는 카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일본은 북·일 국교정상화를 목표로 경제 지원 의사를 보이고 있는데, 일본내의 대북 감정은 현저히 악화되어 있다.

미국은 PSI를 추진하는 등 WMD의 확산에 강력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북한이 재차 국제사회를 기만하는 것을 방지하면서도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상응하는 압력을 가하는 것이 불가결할 것이다. 새로운 합의에는 사찰 방식 같은 기술적인 점에서 ‘기본 합의’보다 상세한 내용이 필요하겠지만, 북한의 핵 문제 해결은 가능할 것이다.

북한에 대해 민주당보다 준엄한 태도를 유지한 공화당의 부시 정권이 북한과 무언가 합의하는 일이 생긴다면, 지난날 보여준 바와 같이 미국의 정권교체로 북·미 관계가 크게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역적 넓이를 가진 합의가 실현되면, 그것은 한반도만이 아니고 동북아시아 전체의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될 것이다.

2004년 06월호 | 입력날짜 2004.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