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원산소해작전 도왔다 이시우 2003/12/28 293
일본군 원산소해작전 도왔다.
http://www.dema.mil.kr/jour/jour01.html
군사편찬연구소는 지난 10월 24일 `한국전쟁과 일본의 군사적 역할’이라는 주제로 한·일간 최초의 한국전쟁 국제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국내 군사사(軍事史) 전문연구기관인 군사편찬연구소가 일본과 국내의 한국전쟁 전문가를 초빙하여 정부차원의 공식 세미나를 개최한 것은 한국전쟁과 군사사 연구 발전이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시기 일본의 유엔군 지원상황에 관한 내용은 자료의 미공개와 정부의 입장 등의 문제로 인해 부분적으로 연구의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금번 세미나는 그와 같은 제한을 넘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또 한·일간의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히고 공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이 총제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면 본고에서는 한·일 학술회의에서 제기된 일본측의 발표 내용을 중심으로 그 성과와 전망을 정리하기로 한다.
일본의 한국전쟁연구
먼저 일본측은 `일본의 한국전쟁 연구 동향과 자료 현황’이란 논문에서 일본의 연구경향과 시각, 그리고 자료에 관해 발표하였다. 이에 의하면 일본의 한국전쟁 연구는 공산계열, 서방계열, 중도적인 입장 등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이는 일본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았음을 반영하고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일본에서의 한국전쟁 연구는 염전(厭戰)사상과 반미감정, 그리고 북한의 영향으로 인해 좌익계열의 연구가 압도적이었다.
일본에서 한국전쟁 연구가 실증성을 거쳐서 나온 것은 1960년대 후반 시노부 세이자부로(信夫淸三郞)에 의한 일련의 연구이며, 북한측의 경향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후 1970년대 들어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등 학자들에 의하여 사실해명·이론 형성이 거듭되어 실증적 방법이 점차적으로 일본에서 한국전쟁 연구의 주류가 되었다. 1970년대말 미국의 자료와 중국의 자료가 부분적으로 해제되면서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접근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실증 연구는 1990년대 소련의 자료가 공개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소련과 북한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남침에 관한 상세한 대화내용이 처음으로 밝혀졌을 뿐 아니라, 중국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일부는 알 수 있게 되었다. 개전 경위문제는 지금에서는 가설제시에서 사실의 인정작업으로 이행되었다.
심지어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 기자 출신인 하기와라 료우(萩原 遼) 마저도 그의 새로운 저서에서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라 하였는데, 이는 소련과 북한의 문서 공개로 이루어진 새로운 연구였다.
이렇듯 최근까지 일본의 연구경향은 미국, 북한, 중국, 구소련 자료의 공개로 인해 실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향후 연구과제
일본측은 앞으로 추진해야 할 한국전쟁 연구과제로서 크게 3가지 사항을 제기하였다.
첫 번째, 내전으로의 한국전쟁에 대해서 그 발발에 이르는 군사과정에 대한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이고 두 번째, 중국·대만을 범주에 넣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며, 세 번째, 일본이 주체적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는 점을 제기하였다. 연합국 점령 하의 일본상황에 관해서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일본의 전후사의 한 페이지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현재의 전략환경을 대비할 수 있는 유용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강조하였다.
일본측은 `한국전쟁시 일본의 유엔군 지원’이란 논문을 통해 일본의 유엔군에 대한 협력에 대해서 기본자세와 역할을 세 기간으로 구분하여 발표하였다.
제1기는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의 초기 2개월간으로 일본정부가 명확한 태도를 표명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제2기는 일본이 명확한 태도를 표명한 1950년 8월 중순부터 1952년 4월 강화조약발효까지의 1년간이며, 제3기는 강화조약이 발효되고 독립한 이후부터 정전까지의 1년 3개월의 대응 기간이라고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은 전쟁이 강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전쟁이 일본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일본이 패전한 후 행동의 자유를 얻은 공산주의 이념에 의한 국내혼란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미군이 한국으로 출동한 후 국내치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가지고 한국전쟁에 대응하게 된다.
일본의 유엔군 지원실태
제1기에서 일본은 주로 주한미국인 등의 긴급피난지, 긴급보급기지, 긴급전개부대의 발진기지, 출격기지, 유엔의 전선사령부 기지 역할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지리적 환경과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한 것이었다. 1950년 7월 15일 요시다 수상은 중의원 시정방침연설에서 처음으로 “유엔행동에 참가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가능한 범위에서 이에 협력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제2기에서 일본은 전쟁이 발발한 지 2개월 후 유엔군에 대한 협력을 표명하였다. 1950년 8월 19일, 외무성은 `한국동란과 일본의 입장’을 발표하고 유엔군에 대한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일본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유엔군이 부산교두보까지 밀렸던 시점에서 일본이 유엔군에 대한 협력을 명확히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미국은 일본을 서방측의 일원, 미국의 우방으로 국제사회에 복귀시켜, 더구나 1일 100만 달러에 이르는 대일점령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도 강화조약을 앞당기는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강화교섭은 계속되어 1951년 9월 8일 49개국에 의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같은 날 요시다 수상은 미·일안보조약에 조인했다.
이렇게 일본은 독립국으로서 한국전쟁에 대응하게 되었으나 그 역할은 독립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한국전쟁 대응과 관련하여 일본이 안고 있었던 강화, 경제적 영향,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국내치안이라는 문제가 이 시점에서는 대부분 정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엔군 후방기지로서의 일본은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미군은 부대의 기계화가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들 부대에 대한 장비정비가 필요하게 됐다. 미군은 이들 정비를 일본에서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각종 차량·크레인·트렉터·불도저·토목건설장비·전차·항공기 등이 일본으로 후송하여 정비하였다. 일본이 숙련된 정비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유엔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측은 `한국전쟁시 일본의 대기뢰전’이란 논문에서 원산상륙작전 등과 관련한 대기뢰전의 작전경과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전략적 상륙작전의 일환으로 실시된 미 해군의 대기뢰전 가운데 한반도해역에 파견된 특별소해대 활동을 분석하고 한국전쟁에 출동한 특별소해대 파견의 교훈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후 미 해군은 기뢰 전력을 대폭 감축하였고 기뢰 전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20여 척의 일본 소해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연합국최고사령관에게 승인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10월 2일 미 극동해군참모부장 소해부대의 부족을 이유로 일본측의 협력을 요청, 일본은 GHQ의 명령문서를 일본정부에 지령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미 해군에 요구하였고, 5일 예정했던 소해정들은 시모노세키 가라도(唐戶)에 집결 완료하였다.
일본해군의 소해정 지원
10월 6일 17시 극동해군사령관 죠이 중장은 운수성장관에게 일본소해정 사용에 관한 지령을 하달하였으며 같은날 20시, 일본 소해대는 제7통합임무부대 지휘관 스트라블 중장의 지휘하에 제95.6소해·호위임무부대군 TE 95.66으로서 편입되어 10월 7일 09시에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이 소해대는 10월 7일 12시, 제1소해대가 인천으로 출항, 10월 8일 04시 제2소해대가 대마도를 향하여 출항, 10월 10일 이른 아침 원산만에 도착하여 소해를 실시하였다. 일본 소해대는 소해작업 중 촉뢰 사고로 부상 22명, 행방불명 1명의 손실을 입었다.
전쟁 당시 일본의 역할은 미국 측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미국은 장차전을 대비하면서 대소 전쟁차원에서 일본을 아시아의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일본의 지원활동은 비밀리에 실시되었고, 해상수송활동·기술자·노무자파견과 그 활동, 구호 및 유체 수용, 밀입국, 북한과 조총련의 활동, 난민관계, 일본 의용군 모집관련 사항 등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는 과제가 산재되어 있다.
금번 한·일 국제학술회의는 작년 중국과의 학술회의와 연장선상에서 개최된 것이었으며, 앞으로 미국, 러시아 등과도 학술회의가 계획 중이다. 한국전쟁 시기 주변국 문제에 대한 연구는 한국전쟁에 관한 시각이나 입장 표명, 그리고 연구동향에서 탈피하여 보다 실증적으로 연구될 것이며 나아가 정책 과제에 직접적으로 도움될 수 있도록 심층 분석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