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을 정리하며 이시우 2008/02/14 4272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을 마치며.
11월 초에 여의도에서 시작한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 88일째, 강원도 고성에 도착하여 회향한다. 중간에 재판준비등으로 하지 못한 날이 많았으니 정확한 날짜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1월 31일 나에겐 무죄 선고가 있었지만 1월달만해도 류선민학생과 김형근선생님이 구속되었고 정설교시인은 집행유예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참으로 가슴 아픈 이정훈, 최기영선생에 대한 민노당출당논쟁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의 찬바람은 안팎에서 불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철원을 지나다가 급히 서울로 내려왔다. 민노당임시당대회장 앞에 하루종일을 서 있었다. 포장지 뒷면에 매직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써서 들고 있었다. ‘국가보안법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나의 명상을 통해 얻은 지혜와 방법이 서슴없이 그 문장을 쓰게 했다.
나는 아기장수전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배자에 대항할 걸출한 영웅은 지배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야 마는 수많은 역사적 경험이 녹아져 만들어진 전설이다. 이 전설에서 민중은 아기장수의 기적을 이야기했다. 민중은 기적을 원한다. 기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영웅에 대해 가혹한 징벌을 가한다. 배신이다. 민중 스스로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영웅을 배신하면서도 그 배신으로 인한 고난을 영웅 스스로 역전시키기를 바란다. 징벌도 영웅에 대한 민중의 시험이다. 지배자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민중은 영웅에게 냉혹하기만 하다. 영웅이 자신들이 가한 배신까지도 뚫고 일어나 일거에 지배자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눈앞에 보일 때가 되어서야 민중은 돌연 변화한다. 구석에 몰려있는 민중일수록 영웅에게 점진적인 지지 따위를 보낼 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의 당대회장에서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명상의 길에 올라 내내 이 문제를 내가슴으로 안을 수 있을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를 자문하고 또 자문했다.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건축기사 K처럼 길을 잃고 헤매이다 가파른 산 비탈을 오를 때 였다. 무언가를 굳게 의지해서 힘껏 잡았는데 뿌리 채 뽑히고 마는 것이다. 낭떠러지로 뒹 굴렀다. 나무뿌리는 흔들어보고 시험한 이상으로 의지하여 힘을 실어선 안 될 일이다.
철원 근남면 육단리 당고개를 지날 때 들른 김화지구 합동순의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 있었다.
‘우리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자유대한으로 탈출 남하한 김화지역 주민은 화랑공작대를 작성하여 1947년 3월부터 대한민국이 수복될 때까지 38선을 넘어 김화지역 일원에 대하여 반공활동 거점을 구축하고 반공투쟁을 감행하였다. 북괴공산집단은 이 지역에서 북방으로 축출될 때 반공인사 및 가족 78명을 이곳에 연행하여 무참히 학살하였으며 희생된 영령들은 1955년 4월 30일 수복지구 입주와 동시에 지방유지들에 의해 합장하고 분묘를 마련하게 되었다. 1955년 9월30일 처음으로 위령제를 거행한 바로 이곳에 1984년 6월6일 김화지구합동순의비가 건립되었다.’
이 짧은 비문에는 원한체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해방기의 좌우익의 선명한 대립과 양민학살, 전후 유엔사점령지구로부터 한국정부로의 행정권이양 후 상황을 수습하자마자 가장 급박하게 추진해야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죽음으로 세워진 역사 앞에 이성과 논리가 얼마나 무색한 것인지는 정형근의원이 대북정책의 전환을 설득하기 위해 향군회관을 방문했을 때 달걀을 맞은 것으로도 증명된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 앞에 엄숙한 조의를 표함과 동시에 죽음을 이데올로기로 승화시키려는 집요한 천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수피령을 넘어 도착한 화천 다목리 보충대앞 전공비에서는 뒤얽힌 원한체제 대신 정전과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의심할 바 없는 적에 대한 명쾌한 대립선이 건조하고 간명하게 새겨있었다.
1980년 3월27일 보병제 39,50연대 합동수색조 비무장지대내 442고지 수색 중 무장공비 사격받고 응사, 적 사살 1명, AK소총 2정등 281점 노획
양구에서 인제원통으로 넘어가는 광치령고개길에는 간첩신고표어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너와 나의 방심 속에 무너지는 국가안보’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원래 있던 표어를 지우고 그 위에 덧 쓰여진 것이었다. 덮여졌으나 지워지지 않은 원래의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한마디의 주민신고 지역안정 사회안정 간첩신고는 113.112’
원한체제를 유지한 유력한 기재중의 하나가 ‘신고정신’이다. 주민을 서로 감시하게 만들었던 고도의 통제체제인 신고정신의 강조는 68년 1.21사건에서 김신조부대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파주법원리의 우씨형제들 모범따라 배우기 운동에서 절정을 이룬다. 김신조씨가 참여하는 큰 행사에는 우씨형제가 등장하여 꽃다발을 증정하고 김신조씨는 이들의 신고가 없었다면 자신은 박정희 멱을 따고 대한민국은 붕괴시켰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들의 ‘신고’야 말로 나라를 구한 애국행위요 이들이야말로 국가유공자중의 유공자라고 칭송하는 것을 매번 반복한다. ‘신고’라는 행동구호가 ‘방심’금물이라는 자기검열 구호로 바뀔만큼 세상은 변화되었고 원한체제 또한 진화했다.
스치듯 지나가던 바람과 온기마저도 겨울밤 강추위는 성에로 기록되게 했다. 온기마저 체포하여 강가에 성에밭을 만들고야 만 겨울 추위. 느껴야 할 것을 보는 것으로 만든 추위의 저력 앞에 보여지는 역사의 뒤에 가려진 치열함을 떠올린다. 아침햇살은 사물을 사물로, 세상을 세상으로 드러나게 한다. 밤의 단절에서 아침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햇빛 덕분이다. 햇빛이 기다려지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 보는 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보는 것이 소통의 전부인 존재에게 그래서 새벽은 경이로움이다. 역사란 소통의 칼자루를 쥔 소통권력의 역사가 아닌가. 그러나 듣고 느끼는 것들에게 아침 햇살은 어떠한 소통도, 소통에 뒤이을 감동도 제공하지 못한다. 보는 자와 볼 수 있도록 혜택 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소통의 새벽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소외된 자들의 역사란 이미 거짓말쟁이의 거짓말은 참이다처럼 역설이고 궤변인지 모른다.
고독한 나그네가 되어야 비로소 세상 고독한 존재들의 소리가 들릴터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버려지거나 잊혀진 채 얼고 녹고 넘치고 마르면서 꾸준히 흘러 제나름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강을 본다. 소리치지 않고도 묵묵하게 걸어온 침묵의 역사가 존재함을 보여주고야 마는 강. 쩍 쩌억거리며 금가던 얼음은 상류로 올라갈수록 처걱처걱 부서지는 소리로 바뀌고 물 흐르는 소리엔 봄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