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88일째) 진행상황^^ [2] 김은옥 2008/02/12 10201


12/3(월) 국회출발(통일로 ~ 임진각 ~ 강원도 고성 ~ 부산 ~

12/4(화) 서강대교 건너기 조금전

12/5(수) 서강대교 지남

12/6(목) 13차 재판

12/7(금) 신촌로터리 – 이대역사이

12/8(토) 이대역지나 – 서대문방향

12/9(일) 서대문역 도착 조금전

12/10(월) 독립문역 도착

12/11(화) 서대문형무소 앞 도착

12/12(수) 무악재고개 도착

12/13(목) – 오전만 삼보일배(무악재고개 넘어감)

– 오후 2시 ‘일심회’ 선고공판 참여
– 오후 7시 ‘충남.대전평통사’ 강의관계로 대전으로 이동예정

12/14(금) 20일 재판 준비관계로 강화도 다녀올 예정입니다.

12/15(토) ‘홍제역’ 못가서 홍제삼거리부근 도착
– 이날은 ‘인권운동 사랑방’ 박래군 선생님을 포함한 네분이 삼보일배에 함께 해 주셨습니다.

12/16(일) 유진상가앞

12/17(월) -12/19(수)

; 12/20(목) 14차 재판준비 관계로 변호사님들 접촉과 증거자료 준비, 그리고, 19일 대통령선거 등으로 ‘삼보일배’를 잠시 쉬며, 21(금) 다시 시작합니다.

12/21(금) 녹번역 도착

12/22(토) 불광역 도착
-> 이날은 인천평통사 회원여러분들이 삼보일배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12/23(일) 연신내역 조금 전

12/24(월) 연신내역 지나 갈현동근처

12/25(화) 재판 증거제출 관련 숙제로 쉽니다.

12/26(수) 부산민주공원방문 및 민주노총 부산본부 강연관계로 이날도 삼보일배를 쉽니다.

12/27(목) 구파발역 조금 못가서 박석고개

12/28(금) 우천으로 쉼

12/29(토) 구파발역 지나 통일로입구 검문소-사월혁명회 정동익,노중선선생님등 격려 모임

12/30(일) 통일로 입구 검문소-한영주택정류장

12/31(월) 한영주택정류장- 동산동삼거리

1/1(화) 가족들과 ‘강화 고려산’에서 일출보며 소원빔. 동산동삼거리- 삼송주유소 전

1/2(수) 삼송주유소 전 ‘ 삼송초등학교 근처

1/3(목) 삼송리지나 신원동마을 중간쯤 – 이날은 안양의 송무호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선생님과 점심을 같이하고 선생님은 다시 민가협목요집회에 참석하러 가셨습니다.

1/4(금) 김익씨 선고재판방청 및 국보피해자가족모임

1/5(토) 신원동-신원초등학교-의정부민자고속도로-벽제화장터 전

1/6(일) 벽제화장터 전- 대자동버스정류장

1/7(월) 재판준비(최후진술문)

1/8(화) 재판준비(최후진술문)

1/9(수) 재판준비(최후진술문)

1/10(목) 15차 재판(검사 10년 구형)

1/11(금) 젖은 눈이 내리는군요.

1/12(토) 대자동-통일로휴게소.필리핀참전비

1/13(일) 필리핀참전비 – 관산동 – 벽제중학교

1/14(월) 벽제중학교 – 벽제삼거리 – 두포동.; 소녀같으신 황순영선생님과 4월혁명회 이낙호선생님, 생명평화연대박호율님이 함께하셨습니다.

1/15(화) 오전에 국정원에 갔다오고 오후부터 두포동 – 가장동 – 고골마을 – 고양정신병원 – 내유초등학교

1/16(수) 내유초등학교 – 아랫내유동 – 윗내유동 – 장곡검문소 – 한미해병참전비 – 봉일천송촌아파트

<내유동에 도착했을 때 농협의 여직원이 건널목에서 이것저것 묻고 격려의 말을 해주셨다. 건널목을 건넌 뒤 또한 남자분이 따뜻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청하셨다. 한참을 따라오다가 농협여직원과 대화 나누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서 말을 건네신 것 같았다. 마음만이라도 감사합니다라고 했지만 그럼 따뜻한 마실것이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다. 괜챦습니다는 말로 거절 하였다. 대신 깊은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고 표했다. 그러나 돌아보니 좀더 자상하게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어제는 리어카를 끌고오던 할머니와 좁은 인도에서 조우하게 되었는데 꼬깃꼬깃 구겨진 천원짜리를 찔러주실려고 해서 괜챦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만 말하고 서둘러 인사를 드렸는데 역시 할머니의 마음을 냉정하게만 받은 것 같다. 왜 삼보일배 명상을 하는지 자상한 설명도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필리핀참전비앞에서는 추운날씨 때문인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은 청년이 내가 일어날때까지 아무말을 하지 않고 서서 보고 있는 모습과 마주쳤다. 이 동네에 사십니까란 물음에 아니요 인천이에요라고 답한것이 우리 대화의 다였다. 그의 손에는 '아웃사이더'란 책이 반쯤 말린 채 들려있었다. 그러고 그 청년은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그에게도 왜 좀더 너그러이 마음을 열지 못했을까 싶다.>

< 의미없음에 대해 생각한다. 의미없음은 의미가 공유되지 않음이며 소통되지 않음이다. 의미있을 때만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이미 소통되어 눈에 보이는 구조가 형성된 것에만 반응함을 뜻한다. 그러나 아직 의미가 발견되지 않았어도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절박한 사람은 행동하고 실천한다. 의미가 발견됐건 안됐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 의미는 아직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앗을 뿐 숨어 있는 것이다. 목숨을 건 비약과 그를 통한 소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과 싸우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고개들어 옆을 보니 찬바람부는 들판에 있는 것들이 모두 그러하다.>

1/17(목) 오전. 변호사최후변론요지서검토정리 – 봉일천 송촌아파트 -공릉입구 – 캠프하우즈입구 – 봉리천사거리 -봉일천읍내

1/18(금) 김포에 오래전에 약속되었던 회의가 있어 참여하는 관계로 하루 쉼.

1/19(토) 봉일천읍내성호아파트 – 등원리 – 낙머리 PX마을 – 영태신사거리 – 캠프에드워즈 – 영태5리

봉일천을 지날 때 한 아주머니가 접시에 율무차를 받쳐들고 가게에서 나와 마시길 권하므로 조금만 마실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아주 감사히 마신 뒤 사의를 표했다. 연신내에서도 한 여인이 따뜻한 캔커피를 들고와 권하였으나 그땐 굳이 사양하였는데 이젠 그렇게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태리 한 건재상에 이르렀을 때 차에서 한남자분이 내려 자신을 경기일보기자라고 소개하시고 봉일천에서 누가 간절하게 삼보일배하며 지나가더란 이야길 듣고 찾아왔다고 하였다. 마침 건재상사장님도 동행하였던지 청하여 건재상에 들어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재상을 나와 얼마를 가고 잇자니 한 여성분이 차에서 내리더니 나의 이름을 묻자 이시우라고 답하자 그러시군요 하며 내 손을 꼭 잡으신다. 남편도 같이 내리시는데 구면이시다. 이웃과 함께 오두산전망대가는길에 삼보일배중인 나를 보고 혹시나하여 차를 세우셨다고 하셨다. 송무호선생님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었고 하셨다. 보온병에 든 율무차를 권하셨다. 오늘만 세잔 째였지만 감사히 마셨다. 저녁엔 파주연대 이재희님이 찾아오셔서 무건리훈련장확장반대대책위에 들러 많은 이야기를 듣었다.

오늘 내내 머리를 떠도는 생각이 간첩이었다. 1968년 김신조사건이후 대간첩작전에 대한 작통권을 유엔사로부터 넘겨받고 대간첩작전영역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미래의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이 보다 현재의 위협으로서의 적으로 인식되는데 성공한 간첩개념은 동원체제를 완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와함께 원한체제 역시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국가보안법이 간첩잡는 법으로 등식화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1/20(일) 영태5리 – 위전리 -월롱역 – 파주역 – 봉암리 – 봉서2리

오늘 드디어 참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제목을 ‘국가보안법가지고 놀기’ 정도로 해둔다. 비장하게만 흐르던 생각이 극적으로 돌아섰다. 약장수가 심각해선 약을 못팔듯 운동 역시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생각이 찾아왔다. 더 무르익혀 보기로 했다.
문산이 가까와 졌을 때 방송차가 지나간다. 월요일 21일은 1.21사태 40주년으로 무장공비에서 목사가 되기까지란 제목으로 김신조씨가 강연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작년 수배중에 쓴 푸에블로호 사건의 위기절차란 글이 사건 39주년 이었으니 올해가 40주년이 맞다. 1968년 1.21사건과 1.23푸에블로호사건은 우리사회의 원한체제가 완성된 결정적 계기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지금의 국가보안법이 법률 이상의 체제로 공고화 된 것이 68년이다.

1/21(월) 봉서2리 – 통일공원 – 문산읍 – 운천리 – 마정리 – 임진각

새벽부터 내리던 눈이 녹아 삼보일배를 할 수 있을까 염려되었지만 갑자기 잡힌 약식재판등으로 선고전에 임진각까지 갈 수 있는 날이 오늘밖에 없을 듯 하여 길을 나섰다. 파주에 들어서면서 느낀 것이지만 앞으로의 길은 인도가 거의 없어서 삼보일배는 무리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삼보일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상이 중요한 것이니 차도만 있는 곳에선 걷기명상을 하는 수 밖에 없겠다 생각들었다. 민통선안 동파리에 사는 이재훈선생님이 파주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 있는곳이 어디냐고 묻기에 임진각이라고 하자 금방 차를 몰고 나왔다. 집에 가서 차나 한잔 하러가는줄 알았는데 스토리사격장 근처에 있는 6.15사과농장으로 안내했다. 전환식선생님이 일손을 멈추시고반갑게 맞이 해 주셨다.
헤어질 때는 함께한 일행에게 민통선에서 농사한 쌀이며 사과등을 한보따리씩 챙겨주셨다. 저녁엔 파주시민회관에서 열린 김신조씨 강연을 들으러 갔다. 자신이 68년 체제의 도화선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북으로부터 받은 배신감 다시 남으로부터 받은 멸시, 그 출구없는 소외의 끝에서 그가 발견한 신앙의힘과 권능에 대한 이단시까지 그의 인생은 끊임없이 역전과 버려짐 그 소외로부터 생존하려는 몸부림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안보강사로서, 목사로서 성공과 실패동안 원한체제가 그의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그 스스로가 원한체제의 결정적제공자이면서 생산자이자 기획자였지만 결국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내가 든 생각이었다.
그의 설교는 듣고있기에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역사로 부터 관통당한 삶을 살아야하는 한 개인의 고뇌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기에 좋은 공부의 장이었다.

1/22(화) 한총련배후조직건으로 나와 하루상간에 구속되어 남대문경찰서에서 서울구치소까지 같이 생활을 했던 이재춘의 항소심재판을 방청하다. 김신검사가 재판날짜를 망각하여 동료검사가 전화를 하고 호출을 하고 전화를 기다리는 등 30여분이나 늦게 시작되었다. 그런이유로 심문도 준비해오지 않아서 검사심문도 없이 재판은 공허하게 끝났다.

1/23(수) 하루종일 글 한편을 썼다. 명상보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글은 따로 올린다.

1/24(목) 전날 경기미술관에서 하던 경기1번국도전이 끝났다. 전날 차를 섭외하여 친구와 안산에서 하루를 자고 아침일찍 작품을 철수하여 재판시간에 빠듯하게 맞추어 올라오고 재판을 하다. 재향군인회에서 탄원서 제출한 기사의 영향탓인지 오늘이 선고로 알고 많은 보수단체어르신들이 참석하였다. 검찰은 두툼한 참고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햇으나 재판부는 변호인측의 의견을 물었고 변호인측은 모두 증거로서 불필요하고 이미 제출했어도 됐을 자료를 구형까지 한 상황에서 다시 제출하는 것의 부적절함을 들어 거부했고 재판부 역시 거부했다. 검사는 구형후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 했지만 헛수고가 되었다.

1/25(금) 임진각 – 마정리 – 장산리 – 장산 – 임진나루 – 화석정 -율곡리 – 섭절리 – 두포리 – 파평면 – 장파삼거리 – 눌로리

오늘부터는 삼보일배명상 대신 걷기명상을 시작한다. 길의 형편 때문이다. 임진각에서 큰길로 가지 않고 산길로 가기위해 들어선 장산리로 들어섰다. 이곳은 오연호씨가 말지기자시절에 썼던 식민지아들에게란 소설겸 보고서의 무대이다. 이 길에서 우연히 한 외국인을 만났다. 인사는 한국말로 했고 국가보안법이란 글씨까지는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국가보안법이 무어냐고 그리고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국가보안법과 나에 대한 소개를 했다. 그리고 ‘민통선평화기행’이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초청되었다는 이야길 하자 자기고향이 프랑크푸르트라고했다. 독일어판과 영어판도 출판되었다고하자 그는 본격적으로 흥미를 갖고 사진기를 꺼내 나를 찍기 시작했다.
어쨌든 외국인이 동네사람들도 잘 알지못하는 이 산길까지 들어오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방금 민통선을 돌아 임진강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의 명함을 받아보고 알았는데 그의 이름은 알프레드하르트라는 세계적인 아티스트였다. 지금은 주로 뮤지션으로 활동했지만 위키피디아백과사전에 나올정도로 명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듯 했지만 해지기전에 적성에 도착해야 해서 어쩔수없이 그와 헤어져야 했다.그가 타고온 차로는 더 이상 눈내린 비포장길을 갈 수 없었기에 장산정상에서 우린 헤어졌다.

1/26(토)눌노리-식현리-설마리-적성-마지리-구읍리-관동골-객현리-율포리-전곡-한탄강-장탄1리-고탄교-장탄2리

조선후기 금강산산유록중 개성을 출발하여 첫날에 적성 둘째날에 연천 세째날에 철원정자연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보았다. 양반들은 노새를 타고 갔고 노새는 하인들의 발걸음을 따랐으니 결국 그 거리는 하인들이 하루를 가는 거리였다. 내걸음 역시 그와 비슷할것으로 여겨 오늘은 연천이나 길을 달리하면 청수를 거쳐 관인이나 동송에 이를 것으로 에상했다. 그러나 카프카의 성처럼 오늘은 길을 잃고 계곡과 산속을 헤매이다 어두어져서야 산에서 내려오니 지나갔던 길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을 보았다. 내앞선 절벽에는 수억년전 이곳 한탄강지구에서 일어난 드라마가 기록되어 있었다.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한 묽은 용암이 자갈로 이루어진 역암위로 흘러 식으면서 굳어졌다. 그리고 다시 매우 된 용암이 그위로 분출하여 식었고 굳어졌다. 다시 묽은 용암이 흘렀다. 그리고 그 용암이 채 식기전에 다시 된 용암이 흘러 묽은용암과 뒤섞이었다. 그리고 다시 된용암이 식기전에 된용암이 흘렀고 그 용암이 식어서 완전히 굳은 뒤 된용암이 흘렀다. 묽은용암이 식으면서 생긴 절리는 작고 날카로운 결로 떨어져나가니 전곡리구석기문화는 퇴적암이나 변성암지대에서의 창조와는 분명 다른 차이가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자연모방이나 수집에 의한 석기의 이용을 생각해볼 대목이다. 거대한 자연의 드라마와 그로 인한 문명의 여명을 나는 절벽앞에서 생각한다. 왜 땅이 때로 종교와 신앙의 대상으로 되는지 알듯하다. 길을 잃고 헤매이다 만난 충격적인 경험은 내게 두번째의 영감을 주었다. 내가 해야할일이 좀더 뚜렸해졌다. 이제 되새기며 다듬는 일만 남았다. 고성정에 다다를때까지의 숙제이다.

1/27(일) 장탄리-궁평리-궁평신교-신답리-고문리-재인폭포@ 개미산-백의리-백의교-옥병동-창옥병-오가리-보장초등학교-오가3리(영평로드리게즈후문)-운산리-양지말-거래-중1,3,2리 교동마을-상율리-탄신동-초과리-관인-동송

송대 음악이론서인 악론에 이르기를 일이 차례를 얻으면 그것을 예라하고 사물이 조화를 얻으면 그것을 락이라 한다고 했다. 음이 조화를 얻으면 음악이 되니 사진이 조화를 얻으면 사락이고, 서락,화락이 되겠다. 가장 지극한 조화로움은 극락이니, 구마라집은 고와 락은 다르지 않다하였으므로 고락불이이다. 오늘은 꽤 힘든 길을 걸은 모양이다. 별들과 함께 걷는 길다보니 세상을 감싸고 있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1/28(월) 철원동송읍-장흥리-고석정-승일교-문혜리-자등리

1/29(화) ‘고난을 함게하는 사람들’ 평화캠프에 함께 함.

1/30(수) ‘대학생다큐멘타리사진연합 사진캠프’에 함께 함.

1/31(목) ‘오전10시 1심재판 선고 ‘무죄판결’
명동성당 국가인권위독립 농성장 방문,
민가협목요집회 참석,
일심회조작사건피해자가족 구선옥씨 방문
안성 중앙대 방문

2/1(금) 오전10;30 민변에서 ‘이시우무죄판결환영기자회견, 1시 대검찰청 김형근교사 구속규탄집회, 철원도착

2/2(토) 급히 귀경, 1시30분 민노당에서 심상정의원과 국보피해자가족대책위 일심회조작사건관련 면담.

2/3(일) 민노당임시당대회에서 국보법피해자가족대책위와 이정훈,최기영님에 대한 탄원과 석방을 위한 서명활동. 비대위의 제명안 부결.

당대회란 것을 처음 참관해 본 소감은 정치란 극단의 공간이란 생각. 넓지 않은 공간에서 목소리경쟁에서 마이크볼륨싸움으로 시작된 대회는 양측의 기자회견으로 기자끌기 경쟁,논쟁과 비대위혁신안 부결로 인한 소수파의 좌절과 절망의 표현으로 집단이탈과 다수파의 환호까지….가족들로서는 우선 위기를 넘겼지만 더 큰 위기가 머지 않은 곳에 또 기다리고 있음이 보인다. 모두들 착잡한 듯하다.

2/4(월)~2/7(목) 설 연휴동안 걷기명상 중지

2/8(금) 강화-철원-와수리-사곡리-당고개김화지구합동순의비-육단리-문수동-잠곡리-매월대-삼각봉-잠곡리-육단리-수피령-다목리

민노당대회 이후 설연휴가 편치 않았다. 비대위는 아기장수의 부모가 되고 말았으나 다수파 역시 아기장수가 되진 못했다. 결국 아기장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자리에 있었던 이유로 나 역시 마음이 무겁다. 어제밤 강화에 도착했을 때부터 얼어버린 수도가 아침내 녹지 않으므로 집안이 어수선한데도 어쩔수없이 지을 나서야 했다. 차가 와수리까지 와버려 자등리길을 포기하고 수피령을 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수피령은 걸어서 넘어본 적이 없었다. 육단리에서 갑자기 매월대가 보고 싶었다. 불의에 떨쳐일어나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평생을 길위에서 살다간 그의 발자취를 전설의 끝자락이라도 밟아보고 싶었다. 매월대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계곡앞에서 잠시 멈추자 아까부터 따라오던 백구한마리가 자기가 길을 안다는 듯 나를 앞질러 간다. 백구를 따라 매월폭포까지 갔다. 더 올라 아예 산을 넘어 수피령으로 넘어갈기로했다. 백구는 자기가 갈수있는 곳은 거기까지라는 듯 쫒아오기를 포기한다. 노송쉼터에 이르렀을때 해는 이미 지평선으로 숨었다. 이제 금방 어두워질 산을 생각하면 여기서 결정을 해야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길을 위험과 추위가 기다리고 있는 어둠속의 산길이 내앞에 놓여 있듯 낯선 도전이 내앞에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합리적인 선택을 할것인가 무모한 도전을 할것인가?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했다. 몸은 나아가야 하다고 명령했지만 마음은 몸을 돌이켜 세우고 있었다. 수피령길은 양옆으로 군부대 밖에 없다. 갑자기 누가 어둠 속에서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지리산’ 이라고 소리지른다. 부대정문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이었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데…’ ‘아 예’하며 금방 경계를 푼다. 위험한 길이다. 민통선보다 오히려 더 전쟁에 포위된 길이 육단리 수피령길이 아닐까싶다. 김화지구합동순의비에 새겨진 원한과 영토의식의 물질적 발현인 이길을 걸으며 다시 한번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은 막막함 앞에 선다. 군부대가 끝나고 시간이 깊어갈 수록 산길을 넘는 차도 더이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내 발자국 소리로 내가 지금 이 산속에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안다. 그렇게 내딛는 발소리를 자국 자국 길위에 남기며 나는 수피령을 넘는다.

2/9(토) 다목리-구인민군사령부막사-도화동-봉오리-감골마을-일자촌-파포리-장촌리-신대리-구운리-화천읍

인민군사령부막사를 보니 전쟁 전 이곳이 북측지역이었음이 새삼스럽다. 노동당사와 함께 자유주의 대한민국에 공산주의 건축유산인 이 건물을 한국군이 계속 사용해온데서 묘한 공존을 읽는다. 보충대건물옆엔 비무장지대수색조가 무장공비를 사살한 것을 기념하는 전공비가 서 있다. 낡아보여도 이들 전공비는 정전체제를 굳건히 지탱하는 물질적 체현이다. 시간이 흐르고 화천에 가까와 질수록 더 깊어지는 정전과 원한체제의 깊은 심연을 속수무책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음걸이가 무겁다. 어디까지 갈것인가? 발에도 무리가 왔다. 하루를 화천서 쉬고 발을 고친다음에 갈까 생각했으나 왠지 그럴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해산령을 넘어 양구로 갈 생각이었으나 양구까지는 이틀거리인데다 이 겨울에 잠잘곳은 물론 민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길이기에 결국 버스로 춘천으로 나와 양구로 가기로 했다. 바로 옆이 양구인데도 꼭 춘천을 나와서 돌아가야하는 이 불편한 교통노선이 만들어 진 것은 왜일까? 지역차별이란 국가나 지자체가 결단하지 않는한 자본의 논리와 함께 굳어지는 것이다. 해산령의 높고 기나긴 고개길 만큼이나 지역차별과 소외의 구조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2/10(일) 양구 송청리-창리-송우리-청리-용하리-야촌리-아랫광치-광치령-상촌-가아리-원통

오른발목에 이상이 온지 오래여서 나도 모르게 왼발에 힘을 주고 걸었던 모양이다. 왼무릎에 심한통증이 왔다. 어제상황이다. 아픈곳을 감싸기 위해 계속타협하다보면 아픈곳이 치유안되는 것은 물론 다른곳으로 고통이 옮겨간다. 일요일이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안되므로 자세를 바로하고 통증을 참아가며 똑바로 걷는다. 광치령을 넘을 때 그토록 아팠던 발목과 무릎이 대명휴게소에 이르렀을 때는 거뜬히 걸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어도 흔들림없이 똑바로 나가면 다른곳으로 아픔이 옮겨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아니라 아픈곳도 치유된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다. 원통에 가까와 지고 있을 때 뜻하지 않게 발바닥에 통증이 오고 불위를 걷는 것 처럼 뜨겁다. 한곳이 아프지 않다고 방심하면 안될일이다. 걷는 이상 아픔은 다른곳으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한곳의 회복 은 다른곳의 통증을 수반한다는 사실. 지금 아프지 않다고 모든 것의 고통이 끝났다고 생각해선 안될 일이다. 나의 안락을 떠받치고 감당하기 위해 어디선가 누구인가 고통고 싸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2/11(월) 원통-월학리-서흥리-천도리-서흥리-정자문-용대리-진부령-장신리-광산리-교동-간성(고성)

전날 원통에서 매우 지친 채 목욕탕에 들어갔으나 그 목욕탕은 10시에 문을 닫는 곳이었다. 3-4시간의 잠을 청한 후 밤 10시경부터 원통에서 서화리로 통하는 밤길을 걷는 것으로 고성행의 마지막걸음이 시작되었다. 설악산 내린천계곡길은 차량통행이 많은 길이라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가한 길을 택한 것이다. 서흥리 설피길에서 정자문으로 넘어가는 길은 과거 군작전도로였으나 언제가 길이 포장되다 만것으로 기억에 남아있었다. 설피고개는 문화재용 소나무림으로 산에 들어서면 깊은 숲의 향기가 가득느껴지는 그런 숲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길을 들어서려니 중턱에 훈련나온 군부대가 주둔중이진 않을까 밤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가 걱정되었다. 밤에 산길을 잃을 위험도 생각해야 했다. 어쨌든 밤에 산길을 넘기는 무리해 보였다. 고개넘어 옆마을인 천도리로 가서 해가 뜨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새벽 다시 설피길에 들어섰을 때는 어제 밤의 무거움과 걱정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한 대상을 마주하는 데서 밤과 낮의 차이란 이토록 큰 것인가? 이 길은 여러번 영감과 생기를 받았던 길이었으므로 마지막 명상의 지혜가 얻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일었다. 그러나 훈련장을 지나며 포크레인으로 공폭하게 파헤쳐진 산길을 보며 이내 설레임은 근심으로 바뀌고 말았다. 산속엔 지어진지 얼마안되는 덩치 큰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었고 문화재용소나무군락지 아래턱까지 길은 파헤쳐져 있었다. 지방군도를 건설한다는 표지판을 보니 이길의 운명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꼭 보호할 가치가 있는 곳은 알리지조차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토목권력의 손길은 결국 알려지지 않은 이곳까지 파고 들어와 아무 저항없이 입성해 있었다. 알려야겠다. 널리 알려서 적극 보호하도록 관심을 일으킬때만이 토목권력의 침습을 막을 수 있다. 군대는 결코 환경의 지킴이가 될 수 없다. 군부대의 허가 없이 이 공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부대에 의지한 환경정책이 얼마나 허망한 것일 수 있는 것인가를 확인한다. 소중한 곳을 알려지지 않게 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모든 정보가 급속히 퍼져나가는 현재에 더이상 대응할 수 없다. 땅을 영토로 재단하고 있던 군사력이 자본과 손 잡을 때 개발의 이름으로 순식간에 파괴됨을 헌법영토조항-국가보안법체계가 안보 뿐아니라 개발주의로 환경민주주의의 적이 됨을 깨닫게 한다. 숲길에서의 명상대신 우려와 슬픔만을 가득안은채 하산하니 발목의 통증은 극에 달했다. 몸의 리듬이 흐트러지자 적절히 안배되던 몸의 결이 균형을 잃은 탓이었다. 간성읍내에 도착했을 때는 밤10시. 전날10시에 원통을 출발했으니 24시간을 걸어온 셈이다.
통증에 시달리는 몸은 지나가는 노선버스를 잡아타라고 유혹한다. 이제 다 온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렇게 하라고 한다.마지막 남은 길이 제일 멀다. 무엇의 마무리란 섯부른 상상과 유혹과 기대와 성과에의 도취로 실패하기 일쑤이다.
제 스스로 목표를 정해놓고 그 성취에 만족해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주관주의 인가? 갈길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