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진술 – 9 예술, 10판단2008/01/10 844
예술
‘문명은 세권의 책을 쓴다. 자연의 책 역사의 책 예술의 책이다. 이중 가장 신뢰할 만한 책은 예술의 책’이라고 러스킨은 말했습니다. 예술이 한시대의 문명을 대표하는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은 간절함과 민감함으로 시대의 본질을 통찰하기 때문입니다. 법의 이름으로 예술의 팔다리를 잘라 심판하려는 생각은 베니스의 상인이 피한방울의 오차없이 살을 잘라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오만과 무지의 폭력에 다름아닙니다. 사진을 몰수하겠다며 증거목록을 제출한 검사의 심리상태에서 저는 문명을 위협하는 야만의 정신상태를 읽었고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옷을 벗고 나뭇잎으로 가리거나 익히지 않은 날고기를 먹는 것만이 야만이 아닙니다. 한 사회가 헌신과 희생으로 이룩한 문명의 탑을 어떤 가치관에 따라 허물 수도 있다는 생각과 같은 위험한 정신상태가 야만입니다. 르네상스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사제였던 사보나롤라와 그의 신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불태워진 수많은 서적과 그림의 분서가 야만입니다. 다윗상을 만드는 미켈란젤로를 찾아온 교황이 다윗이 콧대가 너무 높으니 콧대를 낮추라고 교황의 권위를 내세워 명령하는 것이 야만입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젊은 날의 격정으로 저항하는 대신 돌가루를 집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다윗의 코를 정으로 쪼는 시늉을 하며 돌가루를 떨어지게 했더니 교황은 크게 만족하여 역시 콧대가 낮아지니 훨씬 조각이 좋아졌다고 만족하여 작업장을 떠났습니다. 교황의 야만에 대한 미캘란젤로의 신랄한 조롱이며 풍자였습니다. 문명에 대한 야만에 맞서 예술가는 적절히 조롱하거나 때론 거센 저항을 해왔습니다. 권력의 형태든, 법의 형태든, 관성의 형태든 예술에 대해 미학의 논리가 아닌 그 이외의 논리를 통해 개입하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탄압하고 몰살하려는 정신상태는 분명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야만입니다. 검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아마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설령 법의 이름으로 예술을 난도질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문명의 역사는 그 행위를 야만으로 기록하고 기억하며 규탄할 것입니다. 신학철화백의 ‘모내기’와 홍성담의 ‘민족해방도’와 가는패의 ‘노동자’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거쳐 이시우의 수많은 사진에 대해 자행된 국가보안법의 남용과 탄압은 예술과 문명에 대한 도발임을 다시한번 성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정신상태 앞에 제가 느낀 것은 울분과 분노가 아닌 슬픔입니다. 예술의 빛, 창조의 빛, 상상력의 빛이 공안기구가 드리운 법의 구름 뒤에 가려지지 않도록 성찰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술창작의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예술가라는 특정집단의 특혜를 요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상상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상상은 논리적이지 않고 형상적이란 점에서 미학적 사유형식입니다. 황당할 수도 있고 소박할 수도 있으나 논리도 감정도 그 속에서 잉태되고 성장합니다. 상상력의 수식어로 창조적이란 말이 항상 따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상상력은 숨어있는 고통의 구조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며 그로인해 불가능한 미래가 열리게 됩니다. 따라서 창조적이고 미학적인 상상력 그 자체를 자기실현의 토대로 하는 예술창작에 대한 탄압은 모든 사람들의 상상력에 대한 탄압과 통제로 귀결되고 만다는 사실이 성찰되어야겠습니다.
저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경기도 DMZ’라는 홈페이지가 폐쇄되었습니다. 경기도는 오래전부터 비무장지대를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오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정체가 제가 알기로는 이 홈페이지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저의 비무장지대 초소와 철책사진이 군사시설보호법 위반이라는 군대의 의견을 반박하기 위해 이 홈페이지에 올라잇는 사진들을 들어 반박하자 기무사의 조사가 들어갔고 그 뒤 얼마되지 않아 아예 폐쇄가 되었습니다. 기무사가 압력을 가해서 그런 것인지,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꺼린 경기도측에서 알아서 그런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국을 세계화하기 위한 주제 하나를 잃은 셈입니다. 또한 저를 주인공으로 비무장지대 다큐멘타리를 제작한 모 방송국은 그런 사실이 있음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조차 부담스러워하며 거절했습니다. 그 방송국에서 비무장지대관련 프로를 다시 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건의 판결이전에도 이미 사회에는 많은 파장이 일어났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공안기관은 이미 판결이전에도 승리했습니다. 사회는 알아서 통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
판단이란 진리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선택입니다. 맹자는 선택의 기준이 이로움이 아니라 의로움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로움이 관성화된 개인의 기준이라면, 의로움은 낯선 역사 앞에 겸손하고 두려워하는 군자의 기준입니다. 논리는 새로운 것도 낯익지만 가치는 오래된 것도 낯선 법입니다.
가치란 흔들리는 나침반과 같이 명확하지 않고 방향만을 예측할 수 있는 모호한 영역이지만 판단은 논리가 아님에도 모호해야할 가치 흔들림을 넘어 극과 극을 정확히 못박는 일입니다. 그런점에서 어찌보면 판단은 반가치적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치와 판단은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판단이란 결국 어느 한편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택이란 선택되지 않은 것을 버림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국보법에 대한 고문이나 자백강요는 그 자체로 국보법의 부당성을 입증하는 명확한 표징이었습니다. 명확히 소통되는 아픔이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숨어있는 고통까지는 드러나지도 드러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부당하고 드러난 행위자, 집행자로서의 검사의 모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은 사라지고 법과 구조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국보법 피해자들은 국보법이 사라지지 않은 사회에서, 설령 국보법이 사라진다해도 원한체제가 해소되지 않은 관성화된 사회에서 드러나지 않게 배제되고 소외됩니다. 이같은 처지를 설명할 언어를 가고 있지 못한 사람은 가족에게조차도 이를 알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도 배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소통되고 드러나며 복구될 가능성은 오직 재판부의 판단이란 점에서 유일한 희망은 판결입니다. 아픈 것 이전에 버려진 것들에 대한 사색과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