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기고> 작통권 환수와 비무장지대 문제2007/10/30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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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기고> 작통권 환수와 비무장지대 문제-이시우
“작통권 환수 과정에서 유엔사 강화론을 차단하자”

2007년 05월 20일 (일) 23:40:00 이시우(사진가) tongil@tongilnews.com

‘평화 사진작가’ 이시우씨가 지난 4월19일 국가보안법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지 한 달이 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맞서 33일째 단식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이시우 작가가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소회와 함께 기고문을 보내왔습니다. / 편집자 주

“수배기간 동안 간신히 복구됐다 싶었던 자료들로부터 이제는 다시 제약되어 실증적인 글쓰기가 불가능함을 절감합니다. 1차 자료에 대한 충분한 확인 없이 추측과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아 저의 입장이나 주장이라고 내놓기는 무리가 있고, 그저 관심 있는 분들께 토론과 고민거리 정도라도 되고자 글을 보냅니다.” / 필자 주

1. 비무장지대 문제

전시작전통제권(작통권) 환수와 관련된 벨 사령관의 ‘유엔사 강화론’의 제기 배경중의 하나가 비무장지대 문제였다. 연합사가 해체될 경우 비무장지대를 지키고 있는 한국군에 대한 즉시적인 접근 권한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유엔사의 존재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란 점에서 비무장지대의 법적 성격에 대한 검토는 중요한 것이다.

군사분계선은 군사‘점령’경계선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유엔 안보리 결의는 ‘공산침략 격퇴’까지가 목표였지만 1950년 10월 유엔 총회 결의는 ‘북측 지역 점령’이 목표로 조정되었고 유엔사는 북 점령지역에 대한 점령정책을 실시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38선 부근에서 끝없이 뺏고 빼앗기는 고지점령 전투의 결과로서 현재의 군사분계선이 합의되었다. 38선과 군사분계선의 가장 큰 차이는 주권정부의 존재 여부였다. 미ㆍ소는 38선을 경계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마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점령정책을 실시했으며 그 실행수단은 군정(military government)이었다.

점령은 어떤 국제법적 근거도 없었고 더구나 주권의 이양 등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38선은 ‘점령경계선’이 되었고 미군정은 3년간 주권보유자로서, 점령군으로서, 자치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미군정의 법률전문가 어니스트 프랑켈(Ernst Frankel)은 1948년 초 미군정이 주권정부, 군사점령자(군정), 자치정부의 3중 정부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주장했다. (Ernst Frankel, “Structure of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정용욱 편(1994), 『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2권, 다락방)

2차대전의 목적이 식민지 정복이나 영토 합병이 아니었으므로 미국이 일시적 군정을 실시한다 해도 주권을 무시하고 주권을 임의로 양도할 수는 없었다. 군사점령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불법선이었던 것이다.

정전협정에 의한 군사분계선은 남과 북에 정부가 존재하는 상태였기에 해방 직후의 38선과는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전쟁 목표가 ‘점령’으로 전환된 상태에서의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군사점령경계선’으로서의 성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남측의 경우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유엔 총회가 인정한 영토는 38선 이남지역이었다. 1950년 10월 유엔 총회 결의에 의해, 점령에 의한 38선 이북과 군사분계선 사이의 지역인 고성, 인제 등의 법적 성격에 문제가 생겼다. 유엔사가 대한민국 정부에 이들 점령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양도함으로써 점령자와 주권정부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는 수복지구에 대한 법률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남측 비무장지대 지역은 정전협정에 의해 유엔 사령관이 책임을 지는 지역이 됨으로써 대한민국 주권정부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존재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유엔사의 점령지인 것이다. 비무장지대 북측 지역은 주권정부와 점령지가 동일함으로 문제시 되지 않는 것이 비무장지대 남측에선 문제가 되는 것이다.

2. 비무장지대의 ‘점령’적 성격

정전협정에 의하면 유엔 사령관은 군사분계선 남측 비무장지대에 대한 민사업무(civil affairs)와 민정(Civil Government)에 대한 권한을 지닌다.

민사업무와 민정은 같은 일에 대한 다른 개념 구분으로 업무의 성격에 따라 민사업무와 군사업무(military affairs), 민사행정(Civil Administration)으로 나눈다면 통치주체에 따라서는 민정과 군정으로 나눈다.

군정과 민사업무의 범위는 그 경계가 애매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민사업무가 추구하는 목표는 군정을 통해 통제된다는 점이다. 필자가 본 신문기사에 대한 기억으로는 북 점령시 군정은 유엔사가 담당하고, 민정 혹은 민사업무는 한국정부가 맡는 것으로 합의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민정은 군정을 통해 통제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1950년 10월 유엔 총회 결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한편, 1943년 12월22일 간행된 ‘미 육해군 야전교범 27-3(FM27-3)’은 민정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민정은)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것이며, 국가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며, 국제법 아래에서 점령군의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목적 가운데 첫 번째 고려해야 할 점은 성공적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군사적 필요는 군정의 운영보다 기본적으로 우선하는 원칙이다.’ (U.S.Army and Navy Manual of Military Government and Civil Affairs, 22 DEC, 1943 [FM27-3 OPNAV50 E-3], p5 /정병준,『한국전쟁』p134 재인용)

야전교범 27-3에서 주목되는 문장은 점령군으로서의 의무 완수가 민정의 목적이라는 점이다. 이 교범에 따른다면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 대한 유엔사의 민정권은 ‘점령’의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남측 비무장지대 내 유일한 민간인 마을인 ‘대성동’의 경우 한국군이 민사업무를 대행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권한은 유엔사에 있다. 비무장지대의 민간인 출입과 관련한 민사업무 역시 마찬가지이며 민정, 민사업무, 민정경찰 등의 개념은 군정의 하부개념이며 군정은 점령정책의 기본수단이다.

1943년 12월22일판 ‘미 육해군 합동교범(FM27-5)’인 「군정과 민사업무」에 의하면, 민정조직의 두 가지 일반적인 유형을 ‘작전형(operational)’과 ‘지역형(territorial)’으로 분류했다. 이를 기준으로 할 때, 대성동은 지역형으로, 나머지 남측 비무장지대는 작전형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로 해방 후 인천에 첫발을 내디딘 미군은 향후 몇 달 동안 충분한 전면 경계를 해야 한다는 예상에 따라 군정부대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전투부대들이 군정업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남한 점령 초기에는 ‘전투형 점령(the combat of occupation)’ 방식을 적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24군단이 진주하고 나서야 지역형 점령으로 전환했다. (interview with Col. Brainard E. Prescoff, Civil Administrator, 30 Nov, 1945 [HUSFIK, Part3, Chapter1, footnotes no. 44]/ 정병준,『한국전쟁』p134 재인용)

2000년 11월17일 유엔사와 인민군 간에 합의된 ‘남북관리구역’에서 정전협정상의 ‘관리권’이 한국군에게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 유엔사가 ‘관할권(Jurisdiction)’을 주장하며 경의선, 동해선 지구의 남북 출입에 개입하고 있는 것도 민사업무의 일환이지만 ‘점령+군정’ 체제를 전제로 한 것이다.

위 야전교범들을 기준으로 본다면 민정은 군정을 전제로, 군정은 점령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해방 후 군정기의 전면적 점령정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분적이고 협소한 것이지만 그 본질만은 그대로 잔존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또한 민정이 군사작전 지원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원칙과 유엔사/연합사 작전계획, 개념계획들의 현실적 존재를 연관시켜 본다면 남측 비무장지대 지역에 대한 유엔사의 점령적 성격은 작통권 환수과정과 정전체제 해체과정을 준비하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3. 법을 압도하는 군사체제

역사를 거슬러 군사분계선의 원형인 38선 체제를 먼저 회고해보자. 38선의 법적 효력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종료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ㆍ소의 분할 점령과 점령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군정의 의도에 의해 38선은 법적 근거와 무관하게 양측의 점령 경계선이 되었다.

점령정책과 군정체제가 법률을 압도했던 것이다. 당시 38선에 대한 자유왕래 문제와 관련하여 15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은 다음과 규정하였다.

“모든 사람은 특정 허가와 세부적 규제를 받는다”
(Headquarters US-USSR Joint Conference, “Joint Agenda”, POLAD Benninghoff’s Report to the Department of State, 740.00119 Control(Korea) 12-1546의 부록 no.3/ 신복룡, 1992, 『한국분단보고서(상)』, 풀빛, p289 재인용)

특정 허가와 세부 규제를 받는 것이 어떻게 자유왕래일 수 있는가. 이는 식민지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며 38선이 불법이듯, 민족의 자유왕래에 대한 어떤 허가나 규제도 불법이었다. 그러나 1946년 여름 전국으로 퍼진 콜레라를 이유로 미군정은 아예 통행을 봉쇄했다. 그리고 콜레라가 자취를 감춘 뒤에도 봉쇄는 풀리지 않았다.

봉쇄는 명백한 전쟁행위로 되나 최근의 개념계획 5029에서도 이같은 봉쇄개념이 다시 부활했다. 1947년 미군정은 38선 이북과의 교역을 국내 상업으로 인정한다고 했다(경향신문 1947. 2. 2). 겉으로 남북의 자유왕래와 교역을 막을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정 명령 127호는 북에 대한 미곡수출금지령을 포함하고 있어 북을 적대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점령정책과 군정체제가 법을 압도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사회관계의 구조적 변화가 법적 관계를 통해 규정되지 않고 정치군사적 힘의 관계를 통해 규정된다는 것은 해방 후 지금까지도 본질적으로 변치 않는 진실이다.

불법적 38선 체제는 정전체제로 합법화되었지만 정전협정에는 점령과 군정의 기억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38선 체제의 ‘자유왕래’는 정전체제에서 허가권자와 규제 사항이 구체적으로 합법화되었으나 1968년에 이르러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전체에 인공의 철책선을 설치함으로써 유엔 사령관의 비무장지대 출입 허가권은 출입금지, 통행금지권으로 현실화되었다.

법으로서의 정전협정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점령+군정’의 잔존체제에 의해 38선 체제와 같이 쉽게 불법화되었다. 이는 북측 지역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나 남측 지역은 주권정부와 점령권자의 불일치로 인해 더 심하게 표출되었을 뿐이다.

법적 관계의 변화로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이행은 중요한 계기임에 분명하나 ‘점령+군정’체제로서의 정전체제의 변화 없이는 불행한 역사의 기억이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정전협정 폐기와 함께 자동으로 유엔사가 해체되고 정전체제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히 소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정전체제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소함으로써 법적 관계의 변화가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변화가 되도록 주도할 필요가 있다.

연합사 해체 과정이 곧 유엔사 해체가 되지는 않지만 작통권 환수 과정에서 유엔사 강화론을 차단하며 비무장지대에 잔존하는 ‘점령+군정’체제의 잔재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관철될 때, 작통권 환수와 2.13합의에 따른 평화체제 마련의 불연속성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