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진술4> 유엔사 작통권과 위기관리권의 역사 2007/10/30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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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진술4> 유엔사 작통권과 위기관리권의 역사
이시우 사진가가 옥중에서 보내온 서신

2007년 07월 10일 (화) 02:45:46 이시우 www.siwoo.pe.kr

사진가 이시우 씨가 옥중에서 본사로 ‘나의 진술’을 보내왔다. ‘나의 진술’은 유엔사 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글이다. 이 씨는 옥중서신 모두에서 “저의 혐의 사실에 대한 진술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고 밝혔다. 이 씨는 현재 국가보안법과 군사시설호보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이다. 이 원고는 ‘나의 진술’ 네 번째이다. / 편집자 주

작통권 환수에 도움이 될까하여 맹렬히 연구하다 원고를 완성하기 직전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바람에 중단됐던 원고를 이제야 전달받아 완성하게 되었다. 몇몇 참고자료는 이곳에선 결국 확인할 길이 없어 여전히 미완으로 남겨졌음을 양해해 주길 바란다. / 필자 주

위기관리권이나 작통권은 지휘체계가 구조간의 관계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만 그 시간적 전개인 역사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하나의 체계는 역사와 구조와 기능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유엔사의 작통권과 위기관리권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연관되며 발전되어 왔는지를 살펴봄으로서 현재 유엔사가 주장하는 위기관리권에 대한 진실을 연구하는데 글의 목적이 있다.

이승만 제거를 위한 작전계획 에버레디(1952)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14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에게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Transfer)하였다. 이양은 위임(Reference)과 달리 법률상으로 잠시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넘겨버린 행위가 된다. 결국 이때로부터 지루한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 행사에 대한 공방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우리에겐 누구나 한국전쟁(Korea War)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미국 백악관의 회의 문서의 제목에는 코리아위기(Korea Crisis)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문서 곳곳에서 (위기)조치절차(Course of Action)란 단어가 사용되었다. 미국은 전쟁이 아닌 위기로 보았던 것이다. 작통권은 지휘권의 한 부분으로 예하 전투사령관에게 위임되는 권한이다. 지휘권이나 작통권은 정치적 결단이 끝난 순간 군사지휘체계에서 행사되는 것이라면, 미국에서의 위기관리권은 대통령이 직접 행사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사에 이양한 것은 작전지휘권이란 군사영역이었지만 미국은 작전지휘권만을 행사해야 할 유엔사를 통해 위기관리라는 정치-군사영역 전체를 통제해 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도 유엔사의 이승만 제거계획일 것이다. 이승만은 언제든지 작전지휘권은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엔사는 부여받은 작전권의 경계를 넘어서,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계획까지 실행하려 했다. 그 실행주체는 유엔사였다. 이승만 위기를 돌파하려는 미국의 위기관리 과정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합의의사록이 체결되었다. 작통권과 관련된 역사는 위기관리권이란 맥락을 놓치고서는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는 우선 1차 에버레디 계획인 1952년 부산정치파동 위기에 대한 위기조치절차를 살펴본다.

1.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위기관리의 구조

부산정치파동은 이승만이 전시상황에서 자신의 독재권력 연장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회해산을 기도했던 사건이다. 미국은 이것을 코리아위기절차 과정에 발생한 또 다른 위기로 보고 조치를 모색하던 중 이승만 제거 또는 견제를 위한 일명 에버레디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한다.

1953년 정전협정 직전에 에버레디 계획은 다시 시도되는데 이때와 비교하기 위하여 52년 계획을 1차 에버레디 계획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이 계획이 완성되어 제출되었을 때는 이승만이 이미 사태를 전광석화와 같이 수습해 버린 뒤였다. 1차 에버레디는 그렇게 뒷북을 치는 것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1차 에버레디 계획의 무산은 어찌어찌하다보니 그렇게 된 과정으로 보이기 쉽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1차 에버레디 계획의 전개를 둘러싸고 5개의 개인이나 집단의 움직임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2차 에버레디 계획에도 거의 그대로 등장하지만 2차 에버레디는 훨씬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1952년 한국정치위기(ROK Political Crisis)의 주역들 간의 관계는 유엔군 대 공산군, 유엔사령관과 주한미대사관, 미국과 이승만, 이승만과 의회이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가장 중요한 갈등구조이지만 이 위기를 다루는 데는 거의 상수로 존재하기에 분석에서 제외한다. 유엔사령관과 주한미대사관의 관계는 위기관리의 주체로서는 가장 첨예한 대립을 나타낸다. 이 글에서 가장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 둘의 관계이다.

미국과 이승만은 위기관리자와 그 대상자의 관계로 나타난다. 이승만은 미국의 절대적인 지지 아래 전쟁에서 자신의 권력을 다져가지만 부산정치파동에서는 미국과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는 당사자가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은 이승만이 친미적이면서도 자주적이란 기묘한 해석을 이끌어내고 이승만 독재를 합리화시키는 장치로 작용하게 되기도 한다. 같은 친미파라도 장면 정권의 1959년 정치위기는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반면 이승만은 스스로 위기를 넘겼다는 점 때문이다.

마지막 이승만과 의회의 관계에서 가해자는 이승만이었지만 의회지도력의 위기해결 능력의 결핍은 1953년에 가서는 북진통일을 앞세운 이승만의 휴전반대운동에 속수무책으로 주도권을 넘겨주는 결과를 낳고 만다. 가해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 이승만과 의회의 관계도 여기서는 분석하지 않는다.

1952년 1차 에버레디 계획에서 이승만을 승리자로 만든 요인은 이승만 본인이지만 결과에 있어서 이런 조건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유엔사령관 클라크였다. 워싱턴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현지 집행자로서의 클라크는 묘한 틈을 이승만에게 계속 제공해 주었고, 이승만은 이런 틈을 민첩하게 이용, 노련하게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러나 클라크 사령관이 이승만을 노골적으로 도운 흔적도 집행상의 오류로 문책을 받은 일도 없다. 그는 자신의 원칙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의 정치적 결과는 이승만의 승리였다. 이승만이 이양한 작전통제권을 넘어서 그를 제거하려는 월권을 미국은 위기절차 중에 시도하려 했지만 위기관리체계의 문제는 이를 실패로 돌아가게 했다. 이승만은 이 과정을 통해 독재의 연금술사처럼 더욱 강력하게 부활했다. 이런 결과를 낳게 한 52년 위기관리체계의 초점을 미국의 대(對)이승만정책과 위기조치절차를 통해 정책을 실행해 가는 구조인 민군관계(Civil Military Relations)에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위기의 발생과 초기 조치

최고의 전시지도자로 추앙받는 링컨은 자신의 위기관리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무슨 상황이 일어날지를 통제하지는 못했다. 분명히 고백하건대 상황이 나를 통제했다. (Basler, Collected Works of Lincoln, Vol.7, p281/엘리엇 코언, 최고사령부, 가산출판사, 2002, p345 재인용)

트루먼 대통령 역시 예상된 위기조치절차에 따라 1952년 일차 이승만위기를 처리하지 못했다. 링컨과 달리 트루먼에게 결과적으로 가장 큰 변수는 민군갈등 문제였다.

1952년은 국회에서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였다. 이승만이 재집권하는 것은 불투명해 보였다. 1952년 5월25일 공비침투를 이유로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영남과 전라남북도 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강제로 견인하여 헌병대 앞마당에 세워놓고 이들 중 일부 의원을 국제공산당과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구속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회는 부산시 계엄령 해제를 96:3으로 가결시켰고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계엄수행을 위해 군대를 부산으로 파견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또한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훈령을 발표함으로서 군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이승만에 대립했다.

이승만이 군대를 움직여 계엄을 실시한 이 사건은 우선 작전지휘권을 이양받아 한국군을 지휘하여 일어난 사건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5월27일 원용덕 계엄사령관과 회담했는데 그는 국회의원 체포의 적법성에 관해서 헌법 49조와 계엄법 17조의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 장군은 이것이 예외적인 경우로 알았다. 명령계통에 관해서 원용덕은 대통령이 그에게 명령을 할 수도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국방장관은 단지 감독의 입장에서만 행동할 수 있었고, 국무총리는 계엄령에 의해 어떤 권력도 없으며 참모처장은 군 행동에 관한 것 이외에는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 군대가 유엔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벗어났고, 그 의도와 결과는 미국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전쟁 참가의 명분을 일거에 뒤집는 폭거로 판단되었다. 5월26일 무초 대사가 궐석중인 한국대사관의 책임자인 라이트너는 이를 국무성 전문으로 보냈다. 그러나 27일 라이트너는 밴플리트의 ‘전선을 약화시킬 어떤 부대의 전환도 없을 것이다’라는 보고를 해야 했다. (From Department State(Pusan)to the Secretary of State May 27,1952, RG59, Vol XX VI/Gross (Incoming Telegram:From Department of State(New York)to the Secretary of State(May 27, 1952) RG59)

국무부는 28일 유엔에 비밀보안정보로 보고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미국정부는 민주적 절차와 헌법적 권리와 자유, 국회의 회복과 유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② 한국정부는 유엔사령관의 권한위임(Authorities)이나 승인(approval) 또는 묵인(acquiescence) 없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미국정부는 유엔사령관 임무 중에 한국정부에 의한 일방적인 행동의 영향에 대해 고민 중이다.
③ 미국정부는 이 대통령에게 항의했고 지금 그 이상의 조치를 고민 중이다.(Outgoing Telegram Department of State to USUN NewYork, May 28, 1952. RG59)

이에 이승만은 5월29일 ‘최근 정세에 관련된 유언에 대한 경고’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한편으로 유엔본부에서 와 미국 국무성에서 대통령을 공격하는 선언이 나온다 또는 국무총리가 선언하기를 8군사령관이 어찌해서 한국정부에서 국회를 압박하는데 국군을 사용하게 하느냐는 소리를 했다는 등등 말로 음흉한 중상운동을 하고 다니는데…”라며 유엔과 미국, 미군의 조여오는 압박을 의식하며 국민에게 호소하는 선동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1-2, 공보처, p84)

그러나 미대사관과 군부측은 남한 정치파동에 대처하는 초기 국면에서부터 미묘한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공석중인 무초 대사를 대신하여 책임을 맡고 있던 라이트너는 미국이 직접적인 개입으로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건의하였다(한국책임자 라이트너가 국무부에 보내는 전문(1952.5.18) FRUS Vol 15 part1, p264).

또한 그는 6월1일에는 시간의 촉박함을 들어 유엔군하의 계엄령을 선포해서 이승만을 보호감금하고 임시적 권력을 적절히 인준하는 등의 적극적인 개입책을 국무부에 요청하였다(한국책임자 라이트너가 국무부에 보낸 전문(1952.6.1)FRUS, Vol 15, part1, p279-280).

대사관측은 당시의 중요한 쟁점을 이승만 정권의 지속여부로 생각하고 그가 이러한 억압적인 행동을 통해 재집권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반면 전쟁이란 상황 속에서 대사관보다 훨씬 남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유엔사령관 클라크 등 현지 군 장성들의 입장은 이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당시 클라크는 본국정부에 이러한 사태가 군대동원 같은 군사적 조치없이 가급적 외교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으며 현재 유엔군의 능력으로는 부산지역에 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불가피한 전력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입장을 피력함으로서 직접적인 개입에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러면서도 유엔군의 계엄령 선포와 같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1개 연대를 부산으로 출동시킬 준비를 해 놓았다고 보고했다. (From CINCUNC(Clark) to CSUSA(Chief of Staff, U.S.Army,Collins) May 30.1952 FRUS, Vol 15 part 1 p276/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같은 날 콜린스는 클라크에게 보낸 전문에서 계엄령 해제에 대해 취한 미국과 유엔통일부흥위원회의 조치를 지속시키기 위해 유엔사가 지원할 것과, 클라크와 밴플리트에게 계엄령 해제에 대한 미국의 통지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변을 대사가 받지 못한다면 방침에 따라 이승만을 만날 것을 제안했다. 그 방침은 이승만을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과 계속된 한국내의 정치적 분열이 유엔사에 참을 수 없는 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From Collins to Clark May 30. 1952. RG59. 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Records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50-1954 Vol 26.(1952.5.8-5.27)

6월1일 국무부장관에게 비밀보안정보로 전달된 한국 상황에 대한 보고에서 군사계통과 정치외교계통의 의견 차이는 분명하게 확인된다. 5월30일 국무부와 국방부의 합동전문의 지시에 따라 이승만에게 클라크는 ‘가장 강한 단어’를 사용하여 얘기는 했지만, 그러나 위협이나 최후통첩이 없었다는 것이다. 클라크는 보고하길 “이승만의 비타협성은 증가하였고 그의 고집은 증폭되었다.” 클라크는 그의 부산방문 때까지 최종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 한국의 미대사관 책임자 라이트너(Lightner)는 유엔한국부흥위원회와 긴밀히 접촉하면서 결정을 위한 시간은 지금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클라크는 전투작전 때까지 계엄령을 해제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라이트너는 각 그룹의 의견을 청취한 뒤 계엄령 해제를 위한 확실한 단기 조치를 즉각 취할 것을 제안했다. (Situation Report on Internal Conditions in Korea as of 11:00 p.m June 1,1952. RG59. 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Records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50-1954 Vol XX VI.)

이러한 미국 현지 관료들 사이의 갈등은 6월2일 이승만-클라크 회동시 매우 극명하게 드러났다. 유엔사령관과 남한 대통령의 만남으로 어떤 돌파구가 마련되기를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였다. 그러나 클라크는 회담 전 라이트너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위원들과 회합을 가진 자리에서 자신은 이승만과의 회담에서 주제를 엄격하게 군사적 문제로만 국한시킬 것이며, 국회의원 석방, 국회정상화 같은 위원단과 대사관이 주장하는 정치적 문제는 토론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유엔한국위 위원장 필림솔은 클라크의 이러한 태도가 이승만에게 미국군부가 위원단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이승만에게 줄 것이라고 지적했으나 클라크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만 그는 위원단들에게 만약 기자들이 유엔위원단의 성명을 지지하느냐고 묻는다면 100% 지지하겠다고 약속하였다(유엔미국 부대표 그로스가 국무성에 보낸 전문 FRUS, Vol.15 part 1, p286-287).

라이트너는 비공식적으로 야당지도자가 자신에게 문의한 유엔에 의한 국회의원과 국회모임 보호결의안 채택에 대한 의견을 클라크에게 문의했다. 클라크는 결의안 채택여부는 자신이 관여할 바 아니지만 만약 그러한 결의안이 채택된다 하더라도 국회의원에 대한 보호조치는 오직 유엔군에 의해 수행될 수밖에 없는데, 현재 유엔군의 능력으로는 부산지역에 파견할 병력이 없다는 이유로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시하였다(From Charge Lightner to State, 1952.6.3 FRUS, Vol.15 part 1 p288).

이날 클라크는 단독으로 이승만과 면담 후 비행장에 나온 기자들에게 회담은 지극히 ‘해명적’이고 우호적인 것이었으며, 군사적 문제에 국한된 것이었다고 표명(동아일보 1952.6.4)함으로서 클라크가 이승만에게 압력을 가해 사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했던 대사관과 유엔위원단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한편 유엔한국위원단 공보관 테오도르에 의하면 약속과 달리 클라크는 유엔위원단의 견해에 동의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응답을 회피하였다고 했다(유엔미국 부대표 그로스가 국무부에 보낸 전문 1952.6.2 FRUS, Vol.15 part1 p287).

클라크는 이날 라이트너에게 미국정부는 어쩔 수 없이 자주 독재정치를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에서 위신을 억누르고 이승만이 민주주의를 던져버리는 것을 보는 경우도 이승만과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한국책임자 라이트너가 국무부에 보낸 전문 FRUS, Vol.15 part 1, p287)는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피력한 바 있었다.

한편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도 “자신은 한국 대통령이 잘못되었다고 판명날 때까지 한국 대통령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의사를 피력한 바 있었다(한국책임자 라이트너가 국무부에 보낸 전문(1952.5.27 FRUS, Vol.15 part 1, p252)). 따라서 이날 그의 행동은 실제로는 대단히 정치적인 판단이 게재되어 있었고, 그 효과도 매우 정치적이었다.

이날 다른 사람이 아닌 유엔사령관이 이승만을 만난 것은 작전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영향력 때문이었다.

6월2일 클라크가 이승만을 만나기 전 라이트너 등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보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일본의 안보, 공산측의 추가공격 저지, 거제도 포로들에 대한 의심할 바 없는 통제를 포함한 우리의 다양한 임무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같은 시간에 우리 후방지역에서의 심각한 국내 소요를 취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승만에게 의회 해산 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이승만은 새로운 의회를 구성해서 국민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답했다. 경고를 하러간 게 아니라 경청을 하고 온 셈이 되었고 이승만은 40분간의 회담 말미에 “정전이나 미군철수 이후 한국을 접수하기 위해 일본 육군을 건설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 정부는 큰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자 클라크와 밴플리트는 그에게 그런 계획은 없다고 안심시켜 주었다고 보고했다. 혼내러간 사람들이 엉뚱한 문제를 들고 나온 노회한 정치가에게 혼이 나고 나온 셈이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에 대한 압력은 외교채널을 통해서 할 것과 국회의원들의 보호 같은 일은 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Message No.GX6204:From CINCUNC(at EUSAK ADV)SGD CLARK to CSUSA DEPTAR WASH DC(June 2, 1952 Vol 28)

클라크는 미국의 정책을 수행하면서도 매 순간 묘한 어긋남을 연출하였고 이는 결국 위기조치절차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갔다. 이 대목에서 트루먼 정부 시기 민군갈등의 구조를 짚고 가 보자.

3. 트루먼 정부의 민군갈등

1950년 트루먼 정부의 대표적인 정책은 니츠(P.H. Nitze)가 작성한 NSC68로 상징된다. 매카시 선풍과 함께 등장한 대소 강경론자 니츠는 조지 케넌의 경제, 심리적 봉쇄정책에 더하여 월등한 군사력을 강조했다. (“United States Objects and Programs for National Security:NSC68” April 14, 1950, Containment, p385-442)

NSC68의 입안자는 봉쇄를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방안으로 네 가지 옵션-①케넌의 정책을 그대로 지속 ②고립정책 ③전쟁 ④자유세계의 정치,경제 군사적인 힘을 급속하게 증강시키기 위한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는데 이중에서도 가장 많은 돈이 드는 네 번째 정책을 지지했다. (박태균,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창비, 2006, p111)

이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소련의 원폭실험에 대한 대응조치로서 1949년 겨울부터 1950년에 걸쳐 전개된 미국군사력의 광범한 확장계획인 것이다. (헌팅턴, 군인과 국가, 병학사, 1997, p407)

1950년 초 트루먼 대통령이 NSC68의 초안을 보고 놀라서 승인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재정적 부담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가적인 군사적 목적과 대외원조 목적을 위해 흡수되는 양만큼 국민총생산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란 이유가 니츠에 의해 설명되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 하나는 미국경제가 충분한 효율성을 갖고 작동될 때 한편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도 민간소비와는 다른 목적으로 엄청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냉전적 대외정책과 국내경제정책을 동시에 해결할 이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기의 효율성만을 따지면 전략핵무기가 더 효율적이고 돈이 덜 들겠지만 일자리 창출을 통한 소비확대라는 측면에서는 재래무기 생산의 확대가 더 효과적이었다. 아이젠하워가 정반대의 정책인 뉴룩정책(new look policy)을 편 것과 대비된다.

NSC68의 결론은 전체적으로 국무성과 국무성의 군인그룹에 의해 열렬히 지지되었다. 국방장관 루이스 존슨은 군비확장계획에 대한 공명도가 다른 사람보다 좀 약했다. 또한 재무성은 명확하게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세부실시계획의 완성에 기초하여 제반 필요한 비용을 고려하고 1950년 4월에 NSC68의 대강방침을 승인했다.

그리하여 1950년 봄에는 정부가 실제적으로 두 개의 국방정책을 갖게 되었다. 즉 공개적으로는 130억 달러의 국방예산을 다음 회계연도분으로 요청하는 한편 정부 내에서는 [NSC68]에 기초한 국방예산이 편성되어 있었다. 이 예산의 이중성은 한국전쟁 발발에 의해서 처음으로 결착되었다. 한국전쟁은 NSC68 지지자들에 의해 전년 가을에 주장되어 온 군사력의 증강을 1950년 여름부터 정부가 추진토록 했다. 한국전쟁으로 울고 싶을 때 뺨을 맞은 격이 되었다.

NSC68은 장기적으로 입법부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여하한 대외정책도 불가능함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미국민에게 봉쇄정책을 이해시키기에는 속이 텅 빈 트루먼 정부로서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대통령은 정책수행에 필요한 위신과 존경을 얻을 수 없었다. 국무성은 언제나 국내 지지자의 부족 때문에 고뇌했고 그 위에 국무성은 계속 강화되는 민주당의 정책에 시달렸다. 간부들은 무력함과 불성실의 낙인이 찍혔다. 그리하여 대외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대중적인 좌절감의 상징이 되었다. 1951년까지는 대부분의 민주당원들조차 트루먼의 사임에 찬성하게 되었다.

정부는 의회와 대중에게 정책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직업군인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한 경향은 문관포스트인 국무장관 자리에 마샬과 같은 사람을 임명하는 등 상당히 광범위해졌다. 외교관 선임 면에서는 군인이 문관에 상위에 있게 되었으며 그들은 대외 원조비를 변호하고, 조약의 비준을 주장하며 유럽에의 미군파견을 변호하고 맥아더 장군의 해임을 정당화했으며 한국전쟁의 지도를 변호하여 군사력의 규모나 군사예산의 정부결정을 변명했다. 그들이 이같은 역할을 즐겨한 것은 아니고 정부의 필요에 따라 거기에 휘말려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설득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1952년에는 합참의 설득력은 많은 소실을 가져왔다(헌팅턴, 군인과 국가, 병학사, 1997, p410). 미국내에서 민군간의 애매모호한 공생관계와, 이로부터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는 민군갈등의 사례가 한국에서는 1952년 트루먼 정부 하에서의 에버레디 계획과 53년 아이젠하워 정부 하의 그것에 대해 클라크가 취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정치와 전략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 전략은 정치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군인들이 원하는 모든 요구사항은 일단 정치권에서 판단이 내려지면 그후에 전략과 지휘는 정치와는 완전히 분리된 사항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정치와 전략, 보급, 작전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일단 양자를 구분하는 분명한 선이 그어진 후에는 모든 주체세력들은 월권행위를 삼가야 한다.(Huntington, The Soldier an the State p68/엘리엇 코언, 최고사령부, 가산출판사, 2002, p71 재인용)

헌팅턴는 미국육군지휘참모대학(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에서 1936년 출판한 책자의 한 단락을 흡족한 듯 인용한다.

1951년 트루만-맥아더위기는 공산주의에 대항한 싸움을 두 번째 냉전으로 생각했던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핵무기시대 초기 전쟁을 제한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위기는 대통령을 가릴 정도의 평판을 가진 전설적인 장군이 미국정책과 전략에 대한 공식적인 불일치를 중단하지 않고, 충격적인 재난 이후 교착상태를 받아들이기 위한 의지가 없었을 때 폭발했다.(Richard H. Kohn. An Essay on 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 1997)

군사력의 사용에 대하여 트루먼 정부의 합참은 어느 것에도 신중하고 보수적인 방침으로 일관했다. 1946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수대의 미국 비행기를 격추했을 때, 국무성은 군사력의 위협을 배경으로 한 최후통첩을 발하기를 바랐다. 이에 대해 합참은 미국 군사자원의 한계를 내세워 항의문의 수정을 주장했다… 급속하고 안이한 해결은 불가능하며 적의 의도보다는 그 능력에 기초한 정책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것, 많은 종류의 상이한 병력을 하나로 한 복수전략이 소망스럽다는 것, 그리고 군사목표보다는 정치적 목표가 우선할 것을 주장하는 브래들리 장군의 견해는 직업군인 윤리의 완전에 가까운 정식화였다. (헌팅턴, 군인과 국가, 병학사, p405)

트루먼은 대외정책에서의 의회와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군인들을 내세웠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국민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집단중의 하나로 자리잡아 있었기 때문이다. 합참은 정부의 정책을 홍보했다. 트루먼 정부의 기본적인 결정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한정된 정치목적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었다. 아무런 전반적 목표를 갖지 않았었다. 다만 이전의 상태 즉 원상복구에 그치고 싶었었다(헌팅턴, 위의 책, p411).

이러한 결과로 머나먼 지구의 일각에서의 분명히 불명확한 우유부단한 분쟁에 있어서의 군대사기 유지책의 확립이 문제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각종 물질적 및 심리적 수단이 시도되었다. 분쟁 말기에는 미군은 세계에서 타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육체적 향락과 쾌적을 누리며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목표와의 일체감에서가 아니라 그저 그들이 싸워야 한다고 명령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큰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이것이 처음인 것이다. 특히 근무교체가 문제였다. 호머 버거트(Homer Bigart)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자신과 국가목표와를 합치시킬 수 있는 군인은 거의 없다. 근엄하고 원시적이며 간혹 비참한 상황에 몰입됐을 때, 군인의 지각력은 상당히 둔화하므로 장래의 전망은 근무교체라는 개인적인 목표에 국한되어 보다 많은 사고의 기회를 갖는 장교는 교착상태라는 분명히 무익한 행동과 근무교체에의 열망에 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군들은 일에 대한 좌절감에 싸여 거의 광폭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New York Herald Tribune, Jan 20. 1953. p1/S.P.헌팅턴 재인용).

릿지웨이 장군을 제외하면 실제로는 맥아더, 벤플리트, 스트래트메이어, 아몬드, 클라크, 조이 등의 모든 야전군사령관들은 이전에 맥아더와 함께 일을 했던가 또는 이전에 극동문제에 관계했던가 아니었던가에 관계없이 지엔나위원회(Jenner Commite)가 ‘승리가 거부된데 대한 불유쾌감, 정치적인 고려가 군을 지배한 사실에 대해서의 어느 의미의 좌절감과 그 확인’이라고 간단하게 표현한 경우의 감정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클라크 장군은 ‘자기와 문제를 토의한 극동지역의 사령관은 모두 정부가 자기들에게 승리를 거부토록 하는 정책적인 제한을 제거하도록 희망하고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다(군인과 국가, 새뮤엘 헌팅턴, 병학사, 1997, p414). 클라크의 행보가 맥아더와 놀랄 만큼 유사하게 느껴지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4. 위기의 심화

1단계의 위기조치로서 이승만에게 미국정부의 경고를 전달했어야 할 클라크와 이승만의 만남은 트루먼 정부 내의 민군갈등의 맥락에 의해 묘하게 왜곡됐다. 이는 이승만의 정보력과 미국생활을 통해 체득한 정세판단 능력이 더해진 결과이기도 했다. 클라크와의 회담 후 이승만은 한결 자신감을 얻은 듯 ‘국난극복 위해 단결하자’며 다음과 같이 담화했다.

“우리반대분자들은 언제나 허위선전으로 전부를 곤란케 만드는 것이 유일한 수단인데 근래에는 더욱 맹렬히 활동해서 모든 랑설을 조작하여 민심을 위협하는 중 가장 심한 것은 아모아모가 정권을 잡으면 미국에서 원조가 많이 오고 그렇지 않으면 원조가 아니 온다는 등 또는 [무치오]대사의 말에 한국에 정치파동을 시키지 못하면 원조를 아니 준다는 등등의 말이다…원래 미국정부나 민중은 어떤 개인의 친불친이나 또는 자기나라의 이해관계를 막론하고 오직 어느나라 사람이든지 환란에 빠진 사람들은 힘껏 원조해 주려는 것이 그 정책이요 그나라사람들의 성질이니 이러한 선전을 하고 돌아다니는 자는 우방의 후의를 왜곡해서 저의 정치운동에 이용하려는 것이니 주의해서 들을 것이다.”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1-2, 공보처, p85)

라이트너는 이날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모임이 이승만으로 하여금 그가 무엇을 하든지 미국과 유엔은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그의 이론에 확신을 더해주었을 뿐이라고 평가하였다.(위의 전문)

라이트너의 이러한 우려는 바로 다음날인 6월3일 현실화되었다. 이승만은 이날 오전 각료회의를 열고 국회해산을 결정하였다. 당시 헌법상으로는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권한이 없었다. 이승만은 이제 완전히 헌법의 테두리를 벗어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런 파국에 직면하여 미국측에서는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직접 진화에 나섰다.

트루먼은 이날 라이트너를 통하여 “무초가 돌아오기 전에 당신이 돌이킬 수없는 행동을 취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라이트너는 본국정부의 훈령에 따라 여기서 “돌이킬 수없는 행동이란 국회해산을 의미한다”고 부언함으로서 트루먼이 편지를 보낸 이유를 명백히 했다(한국책임자 라이트너가 국무부에 보낸 전문(1952.6.3) FRUS, Vol.15 part 1, p290).

이승만은 이런 압력에 굴복하여 이미 예정되었던 국회해산을 취소하였다.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불개입정책을 표방하였으나 이승만의 독재강화가 파탄수준으로 비화되어 미국의 전세계적인 이해관계를 위협하고, 남한 정치질서에 회복 불능한 균열을 가져오는 수준에 이르게 되면 이처럼 직접적인 압력도 불사하였던 것이다. 개입과 불개입을 저울질 하던 국무부는 6월4일 마침내 급거 한국으로 귀환하는 중이었던 무초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한국정부에는 일정한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지도력은 약간의 통제력 하에서 그리고 더 세련된 분위기하에서 이승만에 의해 가장 잘 제공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유엔의 이해관계는 그 최종결과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남을 때 가장 잘 충족될 것으로 보인다.(국무장관이 한국대사관에 보낸 전문 1952.6.4. FRUS, Vol.15 part 1, p303)

국무부의 정책은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용인해 주되 지금과 같은 초헌법적인 방법이 아니라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적 절차에 입각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국무부가 결론적으로 사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장택상 국무총리가 추진하고 있는 발췌개헌안을 통한 조정에 이승만이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한국책임자 라이트너가 국무부에 보낸 전문, 1952.6.3. FRUS, Vol.15 part1, p293)

국무성의 이같은 입장표명은 대사관과 유엔한국위원단으로서는 매우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국무부 훈령이 나온 다음날인 6월5일 라이트너는 국무부의 입장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면서, 만약 미국이 야당에 대한 지원의사를 명백히 하지 않는다면 이승만이 재선되어 권력을 강화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은 “단일 정당 경찰국가”가 될 것이라고 항의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견해는 이승만을 물러나게 하겠다는 결의를 갖고 그렇게 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한국책임자 라이트너가 동북아시아문제처 국장에게 보낸 전문, 1952.6.5. FRUS, Vol.15 part1, p307-309)

발췌 개헌안에서 추구한 정부형태는 바이마르헌법의 정부형태와 유사하며 뢰벤슈타인이 말하는 소위 의원내각제와 유사한 대통령제이다. 이승만은 계속 집권의 방안으로 대통령국민직선제를 구축한 후 2차 개헌에서는 더욱 대통령중심제를 강행하고 3선의 길을 열어놓았다. 다시 뢰벤슈타인의 말과 같이 미국의 대통령제가 200년 동안 찬양받고 내려왔으나 그것이 남미 등 개발도상국가에 수입되자 신대통령제라는 이름으로 죽음의 키스로 화해버린다는 주장이 적중한 것이다. (이수화, 헌법상 정부형태의 비교적 고찰, 변호사 제7집, 1987, p65)

발췌 개헌안에 대한 원내의원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타결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보였다. 한편 한국군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당시 육군본부의 한국 수뇌부들은 6월초부터 원용덕 계엄사령관을 견제하기 위해 부산지역에 군병력을 파견할 가능성에 대해 부분적으로 논의함과 동시에 미국 쪽에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나종일 p233)

또한 미국측 자료에 의하면 한국 육군참모총장은 미국 관리들에게 부산 근교에 있는 제2 병참사령부 휘하에 훈련 중인 한국군 병력을 부산으로 파견할 것을 제안하였다고 한다(동북아시아문제처 국장이 극동문제담당 차관보에게 보낸 비망록, 1952.6.13. FRUS, Vol.15 part 1, p333).

이렇듯 6월 중순이 지나도 별다른 진전 기미가 안보이자 다시 주미대사관과 유엔한국위원단은 미국의 직접 개입을 요청했다(주한미대사 무초가 국무부에 보낸 전문 FRUS, Vol.15 part 1, p324 ;유엔문제담당 차관보가 국무부 부차관에게 보내는 비망록, 1952.6.13. FRUS, Vol.15 part 1, p326-328). 국무부 내에서도 이전의 정책기조에 대한 약간의 수정이 있게 되었다. 6월13일 국무부 동북아시아문제처 국장 영(Young)은 한국문제 전반을 재검토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동북아시아문제처국장이 극동문제담당차관보에게 보내는 비망록, 1952.6.13. FRUS, Vol.15 part 1, p328-337).

이 보고서에서 영은 무조건적인 불간섭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제한적인 차원에서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지위를 제한하고 책임은 그 주변 인물들에게 물어 이범석, 임영신, 윤치영 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정치파동의 초점을 이승만으로 보는 것과 달랐다.

영은 이어서 ①이범석과 원용덕의 제거 ②유능한 국방부장관의 취임 ③현 국회 내에서 새로운 헌법의 개정을 위한 한국인들의 노력을 미국이 고무해주어야 하며, 만약 이것이 효력을 발생하게 되면 미국은 오직 이승만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약 이승만이 타협을 거부하여 파탄적 상황이 올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한국군을 이용하여 유엔사령부 하에 군사정부를 수립해야하며, 이에 국무성과 국방부는 비공식적으로 유엔사의 계엄통치를 위한 계획과 한국인들에 운영될 임시정부를 위한 계획을 가능한 최대치까지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영의 전문, 336-337면).

이러한 영의 입장은 그 자체가 국무부의 입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군사적 개입 없이 이승만 정권을 압박하여 가능한 타협점을 찾고, 그것이 안 될 경우에 대비하여 군사적 개입을 위한 계획을 작성해 둔다는 미국정부의 정책적 틀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홍석률, 한국전쟁 직후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 역사비평, 1994년, 가을호, p147)

이에 6월25일 합참은 마침내 국무부와 합동회의 끝에 클라크에게 한국에서 정치적 타협이 실패할 경우에 실시할 비상계획을 작성하라고 지시를 내렸다(합참이 극동군사령관 클라크에게 보낸 전문, 1952.6.25. FRUS, Vol.15 part1, p358-360). 그러나 클라크가 이 계획을 작성하여 본국에 그 골자를 보고한 것은 7월4일 이승만이 경찰력을 동원하여 도피해 있던 국회의원을 끌어오고, 구속 중인 의원까지 국회에 끌어다 놓고 기립표결로 국회에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이미 상황이 종결된 바로 다음날인 7월5일이었다. 미국은 이미 내부적으로 발췌 개헌안의 통과를 “최대한으로 잘 풀린 것”이라고 평가했다(극동문제담당 부차관보가 주한미대사 무초에게 보낸 전문, 1952.7.21. FRUS, Vol.15 part 1, p414). 그런 만큼 이 계획은 사후약방문에 불과했다.

5. 위기조치계획-에버레디의 수립

1952년 6월 미합참으로부터 토쿄의 극동군사령부에 다음과 같은 문서가 전달되었다.

<미합참본부가 토오쿄오 극동군 사령관에게 보낸 1952년 6월25일자 전문 JCS912098>

국방부와 국무부는 이승만에 의해 야기된 정치정세로 인해 두 가지 다른 정책 중 하나를 추진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첫째 가능성은 갑작스런 사태발전 없이 지금처럼 정치적 대응으로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방향이다. 둘째 가능성은 사태가 악화되어 유엔의 군사작전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득이 직접 개입해야 할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상세한 정치 및 군사계획을 수립, 워싱턴에 보고하기를 요망한다. 그 계획의 누설은 미국정부를 심히 곤혹스럽게 만들 것이므로, 이 계획수립에 대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참여는 가능한 한 제한되어야 한다.

그 계획을 세우는 데서 가이드라인을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첫째, 그 계획의 실천은 미국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수행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폭동 등이 발생,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할 때는 유엔군사령관이 그 계획의 실행을 명령할 수 있다. 둘째, 그렇게 심하지 않은 비상사태에서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미국대사관, 유엔군사령부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한다. 만약 이 요구가 묵살되면 유엔군사령부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요청에 따라 미국정부에 내정간섭 허락을 요청해야 한다. ‘유엔을 대신해서 행동하라’는 미국정부의 허락이 떨어지면 유엔군사령부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

① 한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육군과 경찰 및 유사 군사집단의 모든 병력을 장악하도록 명령한 뒤 부산지역에 직접 계엄령을 선포, 그 업무를 담당하도록 지시하라. 정책상 한국군만 동원하도록 해야 한다.

② 계엄통치를 할 경우에도 한국 육군의 포고령은 한국정부의 기능을 주권의 상징으로서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조속한 민간정부로 복귀하도록 하는 선에서 발효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사항과 관련하여 한국 육군참모총장의 신뢰도를 평가하여 보고하라.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예방조치로 1950년 7월14일 유엔군에 이양한 작전권을 되찾아갈 경우를 가정하라. (The Joint chiefs of staff to the Commander in Chief, Far East(Clark)”June 25 1952 FRUS 1952-1954 Vol. XV,p358-360)

합참이 클라크 장군에게 제시한 에버레디 계획지침은 유엔사의 지위와 위기조치관리권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첫째, 갑작스런 상황(contingency)이 발생하여 즉각적인 조치(immediately action)가 필요할 때는 미 대통령의 승인이나 재가 없이도 유엔 통합군 사령관이 우발계획(contingency plan)으로서의 에버레디 계획의 실행을 명령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위기조치절차 1단계의 위기상황발생에 따른 교전수칙의 실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교전수칙은 적대적 교전자에 대해 적용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에버레디 계획의 지침에서는 우방국인 남한이 대상이 되고 있는 점이다. 즉 남한에서 발생하는 위기의 성격을 미국이 어떻게 성격규정하고 있는가 하는 단면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다. 심하지 않은 비상사태에서의 절차는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적절한 조치가 좌절되었을 때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미국정부에 요청을 한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50년 10월 7일 유엔총회 결의와 10월 12일 인사위원회에 따라 ‘통합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 유엔사령관이 북한지역의 통치와 행정면에서 유엔 한국통위와 현안문제를 논의하며 모든 책임을 수행해줄 것을 미국에 요청하였다’(James F. Schnakel. Policy and Direction )

즉 유엔사가 군사작전 또는 군정을 유엔 한국통위가 행정 또는 민간행정을 책임지고 상호 논의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급한 비상사태 시에는 유엔사가 우선 할 수 있는데서 드러나듯 민정은 군정 또는 군사작전의 하위개념이 된다. 이는 유엔 한국통위가 정치적으로 유엔을 대표한다는 총회결의와 논쟁이 될 사안이다. 문제는 50년 10월12일 총회 임시위원회 결의의 대상은 북한지역이었는데 에버레디는 남한지역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남측정부가 이미 통치권,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사는 남한지역에 어떤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 51년 4월22일 밴플리트에게 전달된 지시 내용은 중요한 단서를 준다. ‘미8군에 부여된 임무는 당신이 지금 점령하고 있는 대한민국 영토에 대한 침략을 격퇴하는 것이다’(미합참사, 한국전쟁上, p379)라고 하여 남한지역에 대한 유엔사의 지위는 점령군임을 분명히 했다. 점령(Occupation)은 정복(Conquest)과 달리 주권이나 영토합병을 의미하지 않으며, 일시적으로 주권을 위임받아 점령정책을 실시할 수 있으나 이양 받을 순 없다. 지금까지도 정전협정에는 유엔사가 남한지역을 군사통제하는 주체라는 사실은 유엔사의 점령적 지위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해석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것은 미국정부가 남한에 대한 내정간섭을 허가하는 주체란 점이다. 유엔헌장 2조 7항은 내정불간섭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의 강제조치가 결정되면 이는 무시된다. 즉 헌장 7장의 강제조치 결의가 내정간섭의 전제조건인 셈이다. 여기까지는 어디에도 미국정부가 내정개입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런데 미국정부는 “유엔을 대신해서 행동하라”고 유엔사에 명령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바로 50년 7월7일 통합군사령부 창설결의에 근거를 둔 것으로 설명한다. 미국정부가 ‘유엔의 대행기관’이란 해석이다.(미합참사, 한국전쟁上, p115)

유엔헌장에는 ‘대행기관’이란 단어나 개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미국의 주장과 가장 유사한 개념인 ‘보조기관’은 유엔 사무총장의 지시, 감독을 받는다. 더구나 ‘유엔 통합군사령부’도 아닌 미국정부 자체가 ‘대행기관’이라는 해석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검토를 다음으로 미룬다. 어쨌든 정전협정도 유엔사령관이 유엔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미국정부가 유엔을 대신해서 체결한 것이 되고,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당사자도 유엔사나 유엔이 아닌 미국정부가 된다는 논리가 성립함으로 이는 여전히 논쟁 주제이다. 또한 유엔군이 점령한 것이 아니라 미국정부가 점령한 것으로 된다는 점에서도 논쟁이 될 주제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이 작전권을 환수해 가는 것은 미국도 어쩔 수 없는 주권행사임을 인정하고 있는 대목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작통권을 환수해 가도 이에 대해 예방조치를 취할 수 있는 미국의 위기조치절차와 위기조치계획을 가동하면 작통권을 환수한 구조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한국의 통치자들이 몇 차례나 작통권을 환수해 오려고 했지만, 작통권을 얻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위기조치 계획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학습효과가 내면 깊숙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도 1.21 청와대 기습사태 후에 작통권 환수를 단단히 벼렸지만 결국 포기했던 것도 푸에블로 위기를 다루는 미국의 태도에 영향받은 바 컸다.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보다 상위에서 운용되는 위기관리권에 대한 인식은 막연히 미국의 의지나 정책 등으로 추상화된 채 그 실체가 잘 드러나 있지 않았다. 1998년 정도에 이르러서야 한국군은 위기조치절차나 위기관리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위기관리를 위해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을 행사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작통권의 환수가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위기조치절차와 구체적인 위기조치계획을 가동할 수 있다는, 가동했다는 사실은 지금의 상황에서도 간과될 사안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1952년 1차 에버레디 가이드라인 문서의 요점은 이승만이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뭔가 사건을 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어떤 형태의 위기조치가 필요하며, 여기서의 위기조치는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를 의미했다. ‘조속한 민간정부로의 복귀’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완벽한 쿠데타 계획인 것이다.

클라크는 합참의 지시를 받고 에버레디 계획을 작성했다. 이 계획의 전제사항 중 논쟁이 될 만한 부분은 유엔안보리 회부 문제였다.

5. 이 문제를 안보리에 회부하는 것은 여기서 고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계획을 공식화 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며, 이승만이 외국의 내정간섭에 대항하여 그의 저항을 조직할 수 있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FRUS 1952-1954, Vol. XV. part1. p377)

앞서 언급했듯이 내정간섭이 가능하려면 유엔헌장 7장의 군사적 강제조치들에 대한 안보리의 결의가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클라크의 에버레디 계획의 전제사항인 안보리 회부 기피, 무시는 명백한 유엔헌장 위반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클라크는 이어서 에버레디 계획의 구체안을 제시한다.

6. 개입이 필요해지는 경우를 준비해 놓기 위해 나는 다음 동선을 따라 구체적인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① 이승만을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초대하여 부산에서 벗어나게 한다.
② 유엔사령관이 부산지역으로 들어가, 독재적 행동을 한 5-10명의 지도자를 체포하고 유엔사와 한국시설을 보호한다. 그리고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한국 육군참모총장을 통해 계엄법에 의한 통제권을 접수한다.
③ 이승만에게 기정사실로서 취해진 조치들을 통고하고, 계엄법을 해제하는 성명서에 서명하도록, 이승만의 강력하게 무장된 기관들에 의해 방해 받지 않고 국회활동의 자유가 허용되고, 언론, 방송의 자유가 수립되도록 설득한다.
④ 만약 이승만이 성명서의 발표를 거부하면 보호감금하고, 장택상 국무총리에게 비슷한 성명서를 제안한다.
⑤ 장택상은 이 계획에선 수락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도 거부하면 유엔군과도정부를 착수하기 위한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⑥ 만약 이승만 장택상이 동의되는 경우, 보도발표를 통해 군사임무의 필요에 대한 취지와 유엔군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나라들의 요청에 의해 유엔임무를 방해하는 불법적인 행위를 한 몇몇 개인을 제거했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정부는 계속 활동을 지속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⑦ 어떤 우발사태에도 준비하기 위한 일반 계획으로서 위 6개 항목에 언급했다.
(“The Commander in Chief, United Nations Command(Clark) to the Joint Chiefs of Staff” FRUS1952-1954, Vol. XV, part1, p378)

유엔안보리의 보고 절차는 미국의 위기조치절차가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만 유용한 것임을 다른 위기조치에서도 누누이 보여 왔던 바 이는 앞으로 전개 될 미군의 위기조치에서 유엔과의 관계에 대한 전형이 수립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겠다. 미군 스스로가 유엔을 필요할 때만 활용했기에 모자만 바꿔 쓴다는 선동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은 미군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위 내용은 이승만 제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두 번째 항 이승만 주위의 인물을 제거하는데 초점이 있다. 그런 연후에 이승만에게 타협을 요청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용자체가 이승만 제거계획이기보다는 견제계획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었다. 만약 이승만이 타협에 불응할 때 그 다음조치가 유엔군에 의한 과도정부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유엔군 과도정부라는 발상은 군정과는 또 다른 것으로 군정에 ‘주권보유자+군사점령자+자치정부’의 3중 역할과 지위를 부여했던 해방 후 남한에서의 미군정 형태를 연상시킨다(Ernst Frankel, “Structure of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정용욱 편(1994), 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 2권, 다락방 참조). 클라크 유엔사령관의 계획에 의해 유엔사가 남한지역에 대한 점령군이란 사실은 다시 확인된다.

원래 6월25일 합참이 클라크에게 비상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면서 제시한 골자는 유엔군사령관이 가능한 한 다른 외국군대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군을 동원하여 부산지역을 계엄통치하고 한국정부의 권위와 기능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합참이 극동군사령관클라크에게 보낸 전문 1952.6.25 FRUS, Vol.15 part 1, p358-360).

또한 무초는 이 계획이 작성 중에 있던 6월30일 유엔군사령부가 비상계획을 작성하면서 ‘유엔군 군정’을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비공식 통로로 듣고, 군정 실시는 국제여론상으로도 문제가 많을 뿐만 아니라 인력을 불가피하게 동원해야 하므로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미 반대 의견을 표출한 바 있었다(주한미대사 무초가 극동문제당당 부차관보 존슨에게 보낸 전문, 1952.6.30 FRUS, Vol.15 part1, p368).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크가 유엔군의 군정을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에 대해 클라크는 한국군을 내세우게 되면 자신이 조국에 대항하여 행동한 한국군 개인들에 대해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 내전이 전개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유엔군이 직접 나서서 군정을 수행해야 된다는 논리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클라크가 이전에 대사관과 유엔 한위측으로부터 군사적 개입을 요청받았을 때 내세웠던, 유엔군의 능력상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전쟁수행상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그의 설명과 상충되는 것이다.

즉 클라크의 군정수립 계획은 유엔군의 능력이라는 군사적 측면과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이 몰고 올 국제여론의 악화라는 정치적 측면 모두에서 극히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이러한 개입 자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유엔군의 군정계획은 결국 야당세력의 권력대체 가능성을 원천봉쇄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승만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타협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엄밀한 비밀을 요구하는 이러한 비상계획이 이미 야당의원들에게 ‘유엔군 군정설’로 알려져 결국 이들로 하여금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게 만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시 국회부의장 조봉암과 국무총리 장택상이 미국측으로부터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탁통치’ 내지는 ‘유엔군 군정’이 기획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야당의원들에게 저항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는 일화가 기록에 전한다. (나종일 논문 224면,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국회에 정보가 흘러들어갈 정도였다면 정보정치의 달인이었던 이승만의 귀에 들어갔을 것은 당연하다. 클라크와 이승만의 은밀한 관계가 예상되는 대목은 비상조치의 필요성이 해소된 다음에 비상계획안이 올라간 것이다. 이런 경우의 위기는 충분히 정보를 파악하면서 조치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완만한 위기에 속한다. 더구나 현지에 사령관이 배치되어 있고 이승만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군에 대한 통제권도 가진 상태였다. 조치계획을 수립하고 건의하며 현장에서의 즉응조치를 취해야할 군사령관의 책임방기로 밖에 볼 수 없다.

6. 위기조치절차 종결에 대한 평가

클라크 사령관은 이승만의 재집권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워싱턴에서 계속 강경론을 펴니까 마지못해 따르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란 추측도 있다(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이러한 추측은 유엔사가 미국정책에 반하여 독재정권을 비호했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것이다.

또한 미국의 의도를 파악하고 정책집행의 시간차와 민군갈등구조를 예리하게 활용하며 벼랑끝 전술로 위기를 돌파해 간 이승만의 리더십이란 측면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클라크와의 만남까지는 오히려 벼랑끝 전술을 펴다가, 에버레디 계획이 작성되는 과정에서는 전광석화와도 같이 미국의 의도에 맞게 타협안을 관철시킴으로써 상황을 매듭지었고 클라크의 느린 계획수립은 이승만에게 생존공간을 넓혀준 결과가 되었다. 위기의 절정일 수 있었던 ‘유엔사 군정설’은 오히려 조봉암 등 의회 지도자들의 저항을 포기케 함으로써 이승만을 벼랑끝 위기에서 최종 승자로 뒤바뀌게 만들었다(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참조). 이는 더 좋은 조건에서도 심각한 장면정권과 비교된다.

한편, 위기조치절차를 규정하는 미국의 정책이 보인 혼선이란 측면도 고려할 대상이다. 미국은 제3세계에서 정책을 펼 때 민주주의와 반공독재 사이에서 고민했다. 민주주의는 미국식 자유주의의 상징으로서 동맹관계 유지를 위한 충분조건이었지만, 냉전체제에서 반공은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문제는 제3세계에서 반공체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미국식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이 모순된 현상은 개발독재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나오는 1960년대에 가서야 해결된다. 국민들의 반대로 더 이상 독재정부가 버틸 수 없게 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미국은 민주주의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재체제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유지되었다. (박태균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창비, p127)

이런 면에서 1952년 정치파동 당시 이승만 제거를 위한 위기조치절차는 일시적이나마 미국이 야당세력이나 한국군을 이용하여 이승만 정권을 대체하려 했던 것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오히려 당시 미국의 정책은 이승만 정권을 유지하는 것에 기본을 두고 있었고, 다만 남한 독재권력이 국제여론을 악화시키고 남한 지배블록에 파탄적인 균열을 가져와 남한사회의 안전을 위협할 때 그것을 제어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것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유엔의 틀 속에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국제여론의 조절과 남한정치의 안정이라는 미국의 국가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일차적이었다. 1952년 정치위기시 한미관계는 비민주적인 독재정권과 미국의 갈등관계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이 남한의 독재정권과 결탁속의 결탁을 해나가는 기나긴 여정의 출발점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홍석률, 「한국전쟁 직후 미국의 이승만 제지 계획」역사비평, 1994, 가을호)

미국의 위기조치절차를 규정하는 최상위 구조는 ‘정책’이다. 정책이 시대와 정세에 따라 변화되는 내용이라면 위기조치절차나 전쟁절차는 이들 내용을 담는 형식이다. 위기조치절차나 전쟁절차 등이 큰 틀에서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형식의 견고성 때문이다.

1994년 정전시 작통권 환수과정에서 게리 럭 사령관이 위기조치관리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며 연합위임사항(CODA)의 첫째 항목으로 정전위기관리권을 첨가시킨 것이나 2006년 12월 벨 사령관이 전시작통권 환수를 앞두고 다시 위기관리권 문제를 강조하고 나선 것은 50년 이상 지속되어온 미국의 위기관리권의 견고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군사영역의 작전통제권은 성격상 정치와 군사영역을 아우르는 위기관리권의 하위개념이며 1952년 에버레디 계획의 사례에서 보듯 작통권을 환수할 가능성 앞에서도 위기조치관련권을 행사하고 가동시키는 한 1952년, 53년의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이 없는가, 고찰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유엔사는 인민군의 침략에 대한 격퇴를 군사적 임무로 부여 받았지만 남측지역에 대한 점령을 당연한 전제로서 해석하고 있음을 에버레디 계획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 같은 전쟁시의 위기조치절차는 정전협정 체결과 함께 변화될 가능성을 가졌지만 정전협정에서 합의된 대로 외국군대가 철수하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됨으로써 전쟁시의 유엔군의 남측지역에 대한 점령자로서의 지위, 이에 의한 군정의 지위 등이 위기조치절차가 다시 가동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50년 전 전쟁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비교 자체가 격세지감의 대상임이 분명하다. 지금의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유엔사에 점령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이 황당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이 지난 50년간 단 한 번도 본격적으로 제기되지 않았고 당연히 답변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확한 결론도 당연히 존재치 않는다.

그럼에도 50년 넘은 정전협정에는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은 유엔군사령관의 군사통제 하에 있다고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위기조치관리권도 유엔사령부도 모두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위기조치관리권이 작통권을 넘어 점령의 기억, 군정의 기억을 다시 현실에 부활시킬 것인가는 분명 논쟁되고 토론되어야할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