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진술 1> 유엔사 해체 결의의 유효성 2007/10/30 632
<나의 진술 1> 유엔사 해체 결의의 유효성
이시우 사진가가 옥중에서 보내온 서신
2007년 06월 25일 (월) 18:36:25 이시우 www.siwoo.pe.kr
이시우 (사진가, www.siwoo.pe.kr)
사진가 이시우 씨가 옥중에서 본사로 ‘나의 진술’을 보내왔다. ‘나의 진술’은 유엔사 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글이다. 이 씨는 옥중서신 모두에서 “저의 혐의 사실에 대한 진술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고 밝혔다. 이 씨는 현재 국가보안법과 군사시설호보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이다. 이 원고는 ‘나의 진술’ 첫 번째이다. / 편집자 주
들어가는 글
작년 가을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질문 하나를 던졌다.
“7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사 해체 결의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사 해체를 약속하고도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유엔사 해체는 유엔안보리 결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 결의에 의해 38선 북쪽지역에 대한 점령주체가 유엔사라는 주장은 접지 않고 있다. 둘 다 유엔총회 결의인데 왜 하나는 유효하고 다른 하나는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는가?”
대사는 답했다.
“그 문제는 신중히 답할 문제인 것 같다. 나중에 알아보고 답변을 주겠다.”
만남이 끝나고 대사를 수행하고 온 대변인이 내게 다가와 “질문을 다시 한번 정리해주면 자신이 돌아가는 즉시 확인해서 이메일로 답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며칠이 지나도 그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으므로 이메일을 발송해봤다. 그러자 지금 부서들에 알아보며 답변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도 그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으므로 확인메일을 발송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어떤 답장도 오지 않았다.
미 대사관의 답변을 듣고 쓰려고 했던 글을 이제 옥방에서 쓰게 되었다. / 필자 주
75년 유엔사 해체 결의에 대하여
1975년 10월 30차 유엔 총회 연설에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76년 1월 1일부로 유엔사를 해체하고 정전협정을 대체할 제도를 남과 북이 창출할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공산측 진영과 자유진영이 각각의 유엔사 해체 결의안을 제출하여 공식 채택되기에 이른다.
이는 유엔 무대에서 급성장한 제3세계 동맹외교와 닉슨 정부 스스로의 외교정책 변화의 결과였다. 그러나 75년 30차 유엔 총회의 유엔사 해체 결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유엔사는 존속되고 있다. 정확한 근원은 확인할 수 없으나 유엔사 해체 결의를 부인하는 논리는 유엔 총회가 아닌 유엔 안보리에서의 결의를 통해서만 유엔사는 해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엔헌장상 유엔 총회는 구속력이 없고 유엔 안보리 결의만이 구속력이 있다는 것이다. 유엔 총회 결의가 구속력이 있는가, 없는가가 쟁점인 셈이다.
유엔헌장은 유엔 기안자들의 집단안보론의 취지와 해석의 범위를 한계 짓는 규정이다. 이 틀 내에서 해석을 둘러싼 경쟁이 이루어지며 때로는 이 틀을 넘어, 없던 규칙과 질서를 주조하거나 변형시키기도 한다. 정치군사적 힘의 관계라는 맥락과 조항자체 문구 사이의 긴장이 사례 또는 판례로서 만들어지며 관습법적 권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유엔사 해체에 관한 총회 결의의 효력에 대한 쟁점은 유엔헌장 조항에 대한 분석과 그것을 실제 적용해간 역사적 사례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1. 유엔헌장
유엔헌장 24조 1항은 ‘유엔 회원국은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한 일차적 책임을 안보리에 부여’함으로써 안보리를 총회보다 더 중요한 지위로 인정했다. 또한 25조는 ‘유엔 회원국이 안보리의 결정을 수락하고 이행할 것에 동의한다’고 함으로써 안보리 결정이 구속력을 가짐을 인정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후 창설됐던 국제연맹과 달리 강대국의 지위를 인정한 것이다. 실제 얄타회담에서 국제연합(유엔)에 대해 토론하던 당시 스탈린은 러시아-핀란드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여 국제연맹에서 러시아를 축출시킨 일을 상기시키자 처칠은 유엔에서는 국제연맹에서처럼 추방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추방하려면 만장일치가 되어야하고 강대국 중 하나라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정말 놀랬다. 루즈벨트는 이것이 ‘거부권’을 의미하는 바라고 확인했다. (YALTA, 클레멘스, 대림기획, 2002, p245)
그 결과 헌장 27조는 ‘안보리의 결정’은 만장일치 찬성투표로만 하도록 함으로써 안보리 이사국의 거부권을 확인했다. 국제연맹이 추구했던 평등한 집단안보의 이상과 달리 국제연합은 강대국의 지위와 강대국의 거부권을 현실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유엔헌장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었다.
따라서 유엔사 문제에 있어서도 안보리 결의의 구속력을 주장하는 것은 유엔헌장의 문구에 따른 주장으로 판단될 수 있다.
그러나 안보리 지위가 총회의 지위를 전면 부인하지 않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헌장 11조 1항에 의하면 ‘총회는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에 있어서의 협력의 일반원칙을 군비축소 및 군비규제를 규율하는 원칙을 포함하여 심의하고, 그러한 원칙과 관련하여 회원국이나 안보리 또는 양자에 대하여 권고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안보리와 마찬가지로 심의와 권고의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단, 12조 1항에 의해 안보리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어떤 권고도 못하도록 하고 있어 안보리의 주도성을 재확인한다. 그러나 이 문구는 거꾸로 ‘안보리가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기간’에는 총회의 권한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도 인정된다. 이러한 해석을 이끌어낸 것은 미국이었다.
2. 유엔헌장의 재해석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이 중공의 대표성 문제로 불출석 중인 상황을 이용하여 6월 25일과 6월 27일 참전 결의와 7월 7일 통합군사령부 창설 결의 등을 신속하게 채택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소련이 8월 안보리에 복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안보리의 기능은 마비되기에 이른다. 그러자 미국은 총회로 눈을 돌렸는데 이는 아직 친미성향의 국가들이 회원국의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미국의 의사를 관철시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오영달, 유엔과 한국전쟁, 리북, p110)
미국은 안보리의 마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집단적 조치와 관련하여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침략행위를 다룰 수 있는 총회의 권능을 인정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을 약간 수정한 것이 1950년 11월 3일 총회에서 채택된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Uniting for Peace Resolution)이다.
이것은 국제사회의 평화유지는 안보리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총회도 평화에 대한 위협이 있는 경우 잔여의 책임 ( residual responsibility )이 있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이 결의에 근거하여 이제 안보리가 그 상임이사국들의 합의 실패로 국제평화와 안전에 대한 일차책임을 이행할 수 없을 때 총회가 명시적으로 국제평화문제를 심의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고 한 것이다. (Leland M. Goodrich and Anne Simons, The UN and Maintenance of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이에 관련하여 최종적으로 채택된 결의안을 제안하면서 미국대표는 헌장 12조 1항, 즉 ‘총회는 안보리가 그 기능을 행사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분쟁이나 상황에 대해 권고할 수 없다’는 제한조항 이외에는 헌장 10조에 의해 심의와 권고를 할 수 있는 광범한 권한을 갖는다고 역설했다. (Goodrich and Simons, 위의 책, p431)
이 견해에 소련은 두 가지 근거로 강력히 반발했다.
첫째, 총회가 집단적 조치를 권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는 것은 안보리의 일차 책임 원칙과 상임이사국들의 만장일치 합의 원칙을 위배하고 있다는 것.
둘째, 헌장 11조 2항 즉 총회는 조치(Action)를 필요로 하는 어떤 문제도 그의 토론 전후에 안보리에 회부해야 한다는 원칙을 위배한다고 주장했다. (오영달, 「유엔과 한국전쟁」 중 유엔의 한국전 개입이 유엔체제에 미친 영향, p114)
첫째 반론은 얄타에서 확인한 미국과 영국의 강대국 지위와 거부권 인정에 대한 것이었고, 둘째 반론은 현재 유엔사에서 주장하는 총회 안건의 안보리 회부론이다.
소련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 다시 제기됐다.
첫 번째, 총회는 광범위한 권한 내에서 권고할 수 있는데 이 권고가 대다수의 지지를 받으면 자연적으로 큰 힘이 실리게 되어 회원국들이 행동을 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유엔의 거부권의 성격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강대국이건 약소국이건 간에 침략에 대항하는 국제사회의 합의가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운영에서는 거부권이 잘 사용되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견해이다. 집단안보론의 창시자인 그로티우스파 중 초기 단일주의(Solidarism)로 대표된다. 국제사회의 현실에선 이상적이란 비판을 면키 어렵다.
둘째, 거부권이 강대국들의 지원과 주도하에 집단안보론을 운영하는 현실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보장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강대국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마치 전기의 퓨즈 장치와 같이 만약 집단조치에 대한 강대국들의 반대가 있으면 전체 제도의 파괴보다는 일시적 불능을 통해 제도자체를 보호하는 보호장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로티우스파 중 강대국의 현실적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복합주의(Pluralism)로 대표된다.
셋째, 거부권은 국제질서에 관해 강대국에 백지수표를 준다는 의미에서 집단안보의 근본 취지를 도외시한다는 견해이다. 거부권은 바로 ‘세력균형’의 명시적 채택을 의미하며 집단안보는 이상일 뿐 현실은 강대국 사이의 힘의 역할에 의존한다는 홉스주의파의 ‘세력균형론’으로 대표된다. (Reform and Resistance in the International Order
유엔은 둘째 견해인 그로티우스파의 복합주의자들의 입장에 기초한 집단안보론을 채택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 미국이 취한 입장은 홉스주의적 ‘세력균형론’에 입각한 배제의 논리였고, 소련 역시 마찬가지로 힘의 행사로 안보리를 운영하기 시작하자 결국 안보리는 기능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강대국 간의 협력을 가정했던 2차대전 직후의 유엔 질서는 깨져버렸고 1990년 안보리에서 걸프전 결의가 채택될 때까지 40년간 끊어진 퓨즈 상태를 낳고 말았다.
두 번째, 조치(Action)란 것이 유엔헌장 41조, 42조에서 표현된 집단적 강제조치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보리에 회부된 어떤 문제가 안보리의 기능 마비로 그 기능을 행사할 수 없는 경우, 유엔헌장의 어떤 부분도 총회가 어떤 조치의 적용을 권고하는 것에 대해 금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Goodrich and Simons 위의 책, p432)
헌장에서 긍정된 조항이 아닌, 부정되지 않은 내용을 끌어낸 미국 측의 해석은 헌장 초안을 작성한 ‘질서 주조자’로서의 면모와 함께, 거의 유명무실화 되어가던 유엔을 한국전에 끌어들인 ‘질서 주도자’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대목이다.
얄타협상의 핵심 주제였던 유엔안보리를 미국의 이익에 맞게 대체할 유엔 총회의 부각에 성공함으로써 유엔 질서의 주조자와 주도자로서의 역할은 절정에 이른 듯이 보였다. 그러나 강대국의 패권적 공간인 안보리에 비해 총회는 약소국들에게도 열린 상대적으로 평등한 공간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안보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총회에서도 일방적인 주도권을 행사하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3. 유엔 총회 결의
1951년 2월 1일 총회는 중공이 한반도에서 침략행위를 하고 있으며 각 국가는 유엔에 가능한 원조를 제공할 것을 요청했고 이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추가 제반 조치를 요구하는 미국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 결의에 근거하여 그 권위를 행사했다.
‘평화유지활동’은 한국전쟁 이후 유엔총회 결의를 전면에 내세운 대표적 사례이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1956년 수에즈위기에 대한 유엔의 대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 위기에 대한 유엔의 접근은 한국전이 하나의 선례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인 프랑스와 영국이 이 위기의 당사자로서 안보리의 조치를 막았기 때문에 한국전 당시 채택 운용되었던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에 따라 이 문제를 안보리에서 총회로 이관했다.
총회에서 캐나다 대표의 발의로 유엔 사무총장으로 하여금 유엔 긴급군 (UN Emergency Forces)을 조직, 현지에서 활동하게 했다(Goodrich, The UN in a Changing World, p142~143). 총회는 이 결의를 채택하여 사무총장으로 하여금 2일 안에 유엔 긴급군의 구성에 관한 계획을 제출하고 이곳에 정전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라고 위임했다. 이에 함마슐드 사무총장이 이를 실행함으로써 유엔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 깃발 아래 안보리가 아닌 총회의 권위 아래 평화유지군대가 구성된 것이다. (Deryck Thorpe, Hammar Skjold-Man of Peace
함마슐드 사무총장은 영국 등에 즉각적인 정전 및 철수 등을 요구했고 미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에 응하여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1958년 레바논위기에서도 안보리에서 총회로 문제를 이관하여 총회 결의를 채택했고 미국이 레바논에서 미군을 철수하게 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안보리의 기능마비 상태를 타개하고 다급한 한국전 수행을 위해 미국이 발견해낸 유엔총회 질서는 이제 미국의 일방적 주도권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한편, 소련은 미국 주도의 유엔총회 질서에 일관된 반대를 표명하였다. 1960년 콩고사태에서 안보리의 합의 도출 실패로 이 문제는 총회로 이관되었는데 소련, 프랑스와 다른 안보리 이사국들은 안보리만의 무력군사조직으로서 평화유지군을 발의할 수 있는 배타적 권한을 갖는다는 입장인 반면 미국 등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총회 권한에 대한 한국전 이래 자신들의 해석을 고수했다. (Goodrich, The UN in a Changing World, p150)
유엔총회 중심의 새로운 질서에서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도 강화되었다. 총회 결의의 이행과 이행 과정의 감독에 대한 책임은 유엔 사무총장의 업무로 해석되고 인정된 것이다. 무력군사조직을 포함하는 평화유지군은 안보리 또는 총회의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유엔 사무총장의 지시와 통제 하에 놓여져 있다. 이처럼 사무총장의 역할이 중요하게 된 것은 헌장이 안보리와 총회가 사무총장에게 업무를 위임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고 사무총장은 상근직으로서 많은 직원을 거느리며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을 수행해낼 수 있다는 이해 때문이었다. (Goodrich, The UN in a Changing World, p150)
1950~60년대 가장 역동적인 사무총장직의 수행 사례를 보여준 함마슐드 총장은 소련 등으로부터 사무총장의 폭넓은 재량권 행사에 대한 경계를 받게 되자 유엔헌장 99조를 원용하여 대처해 나갔는데 99조는 사무총장이 평화의 위협사태에 대하여 유엔 안보리에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99조를 공식적으로 원용함이 없이도 사무총장은 그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때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막후에서 강대국에 행동을 촉구하고 평화를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Thomas G. Weiss, David P. Foreythe, and Roger A. Coate, The and Changing World politics,
4. 유엔사 해체 결의
유엔에 대한 하나의 부정적 평가는 유엔이 집단안보라는 목적 하에 기능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때로는 강대국 정치의 재현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에서 그 참전국들은 유엔기와 그 사령부라는 이름 하에 작전을 수행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미국 주도의 전쟁수행에 참여한 결과가 되었다. (오영달, 위의 책, p141)
유엔이 헌장에서 의도했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은 유엔헌장 기초자들이 가정했던 국제정치 상황이 유엔 설립 직후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핵무기 경쟁과 냉전의 등장으로 2차대전 연합국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의 단결이 깨어졌으며 새로 독립을 얻기 시작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이 강대국의 지도력에 반기를 드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유엔 안보리 체제에서 유엔 총회 체제로의 이행이 오히려 유엔에 활력을 부여하고 지속시킨 배경에는 제3세계 약소국의 발언권 강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 미국에게도 뜻하지 않은 압력으로 작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주도권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었다. 긴장 속의 견제를 시도하며 소련의 주도권을 차단하는데 유엔 총회의 활용은 여전히 가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닉슨독트린과 함께 등장한 헨리 키신저의 리얼 폴리틱스는 국제정치의 현실 상황과 미국의 힘의 한계를 인정하는 현상유지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대한(對韓) 정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에 대한 정책은 1950년대 이래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냉전시대의 가정에 의거할수록 시대착오적이 되고 있다… 미.소.중.일 4강의 일치된 견해는 남북 분쟁의 위험을 줄이는 방향으로 양쪽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정책목표 : 미국의 대한 정책의 목표는 한반도의 점진적인 통일을 최종 목표로 남겨둔 채 일정기간 남과 북 사이에 두 개의 한국을 형식화하고 공고화 하는 것이다…
즉시 취해야 할 조치 : A. 교차승인 B. 유엔동시가입(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해체 포함) C. 미-북 관계의 정상화(한국 정책의 재고찰 : 러시(K. Rush)가 키신저에게 보내는 비망록에 첨부된 연구보고서, 1973.5.29)
러시의 보고서대로 1973년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유엔 총회의 해체 결의와 함께 해체되었다. 1950년 10월 7일 유엔 총회가 결의한 북측 지역 점령 후의 행정기관이 될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해체는 연이어 유엔사의 해체 논의를 불러올 것이 예상되었고 미국정부는 미국안보연구각서(NSSM)의 ‘유엔사 종료’(Termination of United Nations Command)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검토를 거쳐 미국국가안보집행각서(NSDM)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NSSM과 NSDM의 초점은 유엔사의 구조만을 해체하고 실제 주한미군 병력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유지하는 방안이었다. 그것은 한미연합사 창설로 모아졌다.
어쨌든 이들 일련의 과정에서 유엔사 해체는 미국 정부 스스로가 유엔 질서 내에서 국익을 관철시켜가기 위한 이해관계 차원에서 선택한 길이라는 사실이다. 북에 이로움을 주고 남에겐 곤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나 그 반대가 아니라 미국 스스로의 이익에 대한 판단에 따라 해체를 결심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유엔 총회 결의를 통한 유엔사 해체는 유엔헌장의 정신이 실지로 한국전쟁을 통해 변경된 해석과 그에 따른 사례의 실효적인 적용, 무엇보다 이 모든 질서의 주조자였고 주도자이기도 했던 미국 스스로의 정책 판단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1975년 유엔 총회 결의의 유효성과 구속력은 의심받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맺으며
1975년에 그랬듯이 2.13조치 이후 급진전된 평화체제로의 이행상황에서 이미 미국은 놀랍게도 종전선언 얘기를 꺼냄으로써 상황을 주도할 뜻을 분명히 했다. 유엔사 해체 발표 역시 어느날 아침 미국이 발표했다는 보도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의제 설정권을 이미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고 느껴진다.
유엔사 해체는 북에 이롭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남측이 유엔사 해체 의제를 주도하면 남에 더욱 더 이로울 것이다. 미국에 가장 이로운 의제가 될 수도 있다.
이해관계는 변화하는 정세의 맥락에선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외적 변수와 작통권 환수라는 내적 변수가 어느 때보다 의제의 주도를 구사할 조건을 충족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