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판 푸에블로-마야구에즈호위기절차분석2007/03/31 926
캄보디아판 푸에블로호
마야구에즈호사건의 위기절차 연구
사진가 이시우 (www.siwoo.pe.kr)
작통권환수를 둘러싸고 ‘위기관리’문제가 예리한 쟁점이 될 듯하다. 사실은 ‘위기’문제가 작통권환수를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기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글에서는 위기절차의 단계에 대한 세부적인 이해보다는 유엔사를 전제로 한 한반도위기절차와의 비교를 염두에 두면서 그 특성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더 자세한 연구를 원하는 분을 위해서는 5차례에 걸쳐 진행된 백악관에서의 마야구에즈위기회의록의 원본(PDF)과 다듬지 않은 번역본(HWP)을 참고자료로 첨부하니 참고가 되길 바란다. 1차자료를 통한 연구가 항상 중요하지만 1차자료라고 해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1차자료 생산자들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되고 반응된 사실이 기록으로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1차자료도 맥락을 잡고 자료간의 교차확인이 필요한 법이니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마야구에즈위기문서는 특히 공개되지 않은, 즉 지워진 문장들이 많으니 맥락의 이해가 더 필요한 문서라 하겠다. 필자는 이제 공식수배자의 신분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글에서 어떤부분의 자료는 출처를 밝히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다. 문맥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나 자료를 생산한 분들에게 결례를 범하게 되었으며, 1차자료에 대한 확인을 필요로 하는 분께는 불편을 끼칠만한 부분이다. 이점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
사진 마야구에즈호
사진글 공산권국가들로부터 첩보함이란 의심을 받았던 미국의 컨테이너선 마야구에즈 호는 캄보디아의 영해통금조치를 어김으로서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나포된다.
들어가는 글
필자는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에 대응한 미국의 위기절차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미국의 위기절차가 전쟁절차와 차이가 없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유엔사가 있음으로 인해 한반도 위기절차가 어떤 특수성을 갖게 되는지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유엔사로 인한 한반도 위기절차의 특수성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진 미국의 위기절차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경우를 다 비교해보는 것은 필자 개인의 능력으론 벅찬 일이다. 가장 유사한 사례를 살펴봄으로서 유엔사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위기조치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생겨나는지 비교해 보는 것이 이글의 목적이다. 그러니 이글은 전에 썼던 ‘푸에블로위기절차와 유엔사’의 후속편인 셈이다. 사건의 유사함에서나 푸에블로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염두에 둔 위기조치과정에서나 필자는 캄보디아의 마야구에즈호나포사건을 비교대상으로 선택했다. 마야구에즈위기는 1975년 미국선박 마야구에즈호가 캄보디아의 영해통금조치를 어기고 항해하다 크메르루즈 해군에 의해 나포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마야구에즈위기절차에서 푸에블로위기절차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유엔변수가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대신 1973년 베트남전쟁의 영향으로 미의회에서 제정된 ‘전쟁권결의’가 주요변수로 등장한다. 한반도위기절차에서 일본의 후방기지 사용권이 중요하다면 캄보디아에서는 타이랜드 기지사용문제가 중요했다. 그리고 푸에블로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의 근본문제인 영해문제는 푸에블로위기와 달리 거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1968년 푸에블로위기절차에선 등장하지 않았던 최후통첩문제가 등장했다. 최후통첩을 둘러싸고 오가는 논쟁에서 미국위기절차의 불법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야구에즈위기문제를 공부하면서 다음 문장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각각의 위기는 독특하다. 모든 상황에 적합한 엄격한 규칙이 사용될 것으로 기대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필연적이진 않다. (합동참모장교가이드 AFSC Pub-1)
마야구에즈사건의 개요
우선 낯선 나라의 이야기니 배경설명이 필요하겠다. 마야구에즈의 정체에 대해 캄보디아를 비롯한 공산측진영은 푸에블로와 같은 미군의 위장첩보함이라고 규정지었고, 미국은 민간상선이라고 주장했다. 백악관의 위기절차회의록에서도 국가군사지휘본부가 미군배가 아니기 때문에 경고를 지연시킨 사실이 확인되지만 수없이 삭제된 회의 자료의 내용들은 또다른 내용이 있을 것이란 의심을 갖게 한다. 크메르루즈가 미국선박을 나포한 목적에 대해서도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인지 영해침범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상의 것이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는 캄보디아측 자료가 부족하여 단정 짖기는 어렵다. 그러나 당시 언론에 캄보디아측 인사들이 발표한 내용과 나포를 단행했던 크메르루즈군의 증언등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캄보디아는 공산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비엩남과의 영해분쟁에 들어가는데 비엩남어선의 캄보디아 영해출입을 염두에 둔 외국어선영해통금조치를 내린다. 마야구에즈가 영해로 들어오자 크메르루즈해군들은 나포했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프놈펜의 지도부는 미국과 싸울 여력이 없었기에 즉시 선박과 선원을 석방하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이 석방된 것을 알면서도 다음날 배가 정박했던 섬은 물론 본토까지 폭격을 감행했다. 이 정도가 크메르루즈지도부의 판단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으므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후일의 과제로 남긴다. 당시 크메르루즈의 핵심과제는 베트남과의 영해분쟁이었다. 즉 캄보디아-베트남 분쟁의 와중에 마야구에즈를 나포한 것이다. 당시 캄보디아의 상황을 사건맥락의 이해를 위해 살펴보자.
쁠로와이 꼬땅 푸꼬옥 또추(위지도아래위치)
1975년 4월 25일 크메르루즈 해군은 지도에서도 유심히 보아야 할 또추(Tochu)섬에 상륙했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함락 후 불과 일주일 후였으며 베트남의 사이공은 아직 함락되기 전이었다. 사이공 함락 후 5월 들어 베트남군은 또추를 공격해 크메르루즈군을 몰살시켰고 그에 그치지 않고 쁠로와이섬까지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도 크메르루즈군은 완패했다. 공산화 이후 캄보디아-베트남간의 최초의 군사적 충돌로 기록되는 이 전투는 그 후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빈번한 군사적 충돌과 후일 베트남의 침략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또추는 현재 베트남 영해에 속해있고 뽈로와이섬은 캄보디아 영해에 속해 있다. 결국 이 충돌은 영토분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영해문제를 발생시킨 것은 푸꾸옥(Phu Quoc)섬 때문이다. 크메르루즈가 또추섬을 점령한데는 푸꾸옥을 캄보디아 영토로 탈환하고 국경선을 재조정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결국은 쁠로와이 섬까지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프놈펜과 하노이의 협상 끝에 1975년 8월경 쁠로와이 섬은 캄보디아로 반환됐다.
역사적으로 현재의 베트남남부는 캄보디아 영토였다. 캄푸치아 크롬(Kampuchea Krom)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지금 메콩삼각주로 불리는 지역과 사이공북부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캄푸차크롬이 베트남영토로 귀속된 역사적 근거는 2차대전 후 일본군이 잠시 점령했던 인도차이나에 프랑스가 들어와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Bao Dai)를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면서 체결했던 조약에 두고 있다. 호치민의 베트민과 1차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게 된 프랑스는 코친차이나와 안남, 통킹을 하나로 통일 했는데 이때의 합병조약이 바오다이의 베트남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때 프랑스가 국경선으로 그었던 것이 브레비라인(Bravie line)이고 정확히 이 라인이 현재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국경선이다. 마치 일본이 만주국을 만든 것과 같다. 캄보디아는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캄푸치아 크롬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곳을 둘러싼 캄-베분쟁은 역사적인 원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메콩의 슬픈그림자 인도차이나 유재현 창비 p249-252)
폴폿이 사이공 함락 17일 전에 프놈펜을 함락한 것도 사이공 함락후 비엩남이 캄보디아 론놀정권을 공격하면서, 침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마야구에즈위기회의 첫날 키신저의 말은 이런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키신저국무장관: 비록 그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할지라도 그들은 우리를 이용할 수 없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2, 1975)
이런 상황배경 때문인지 캄보디아의 마야구에즈호 처리에 대한 태도는 북의 푸에블로처리에서 보여준 대결의식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났다. 그 어떤 법적 정치적 요인보다도 마야구에즈위기를 규정짓고 있던 것은 크메르루즈지도부의 전쟁의지 없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비해 미국은 푸에블로위기와 비엩남위기의 설욕을 만회할 절호의 기회를 잡은 듯이 일사천리로 움직여 나갔다. 75년 5월16일자 뉴욕타임즈는 ‘키신저국무장관과 슐레진저국방장관을 위시한 정부의 고관들은 범세계적으로 우리의 지도력을 유지하려는 포드대통령의 확고한 목적을 뒷받침해줄 극적인 방법을 찾기를 갈망해왔다고 생각된다. 선박의 포획과 더불어 때는 왔다….’ 라고 쓰고 있다. 이제 사건을 요약해보자.
마야구에즈호는 당시 타이랜드미군기지를 향해 비전투용군수물자컨테이너를 싣고 비엩남 남부해안을 멀리 돌아 캄보디아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있었다. 1975년 5월12일 크메르루즈군의 경비정이 이 선박을 보고 접근하여 정선시켰다. 그 지점은 53마일(96킬로미터)라는 주장도 있으나 백악관위기회의에서 중앙정보극장 콜비는 7마일, 국방장관 슐레진저는 30마일이라고 주장했다. 12일 2시 21분 선박은 기관을 정지하고 구난신호를 보냈다. 경비정의 크메르루즈군들은 마야구에즈호의 선장에게 시하누크빌항구로 입항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선장은 레이다가 고장나서 항구로 접근할 없다며 입항을 거부했고 경비정은 닻을 내리게 하고 1시간 정도 지체한 후 선박을 코탕섬으로 향하게 했다. 마야구에즈호는 코탕섬 해역에 닻을 내리고 전 선원들은 인근을 지나던 타이랜드어선에 실려 5월13일 저녁 7시경에 시하누크빌 항구에 도착했다. 타이랜드어선들이 영해출입이 가능했던 것은 타이랜드국경지대 마을들이 크메르루즈에 무기공급을 해주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드대통령은 3척의 군함을 즉각 현지에 급파했고 타이랜드 미군기지에서는 천명이상의 해병들이 작전을 위해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미해군 함정들은 최루탄과 위협사격을 하며 시하누크빌로 들어가는 타이랜드 선박을 정선시키려 했으나 크메르루즈군들이 동승하고 있던 어선은 결국 항구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후에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이엥사리는 “우리의 통신체제는 미국의소리(VOA)방송보다 훨씬 늦었기 때문에 미국의소리 방송에서 마야구에즈납치사실을 방송할 때까지 프놈펜지휘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시하누크빌로부터 사실을 보고받은 지도자들은 프놈펜함락 2주정도 밖에 안 된 시점에서 아직 론놀정권의 패잔병 소탕과 치안유지에 정신이 없는 크메르루즈의 입장에서는 미국정부와 어떤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즉각 선박을 풀어주라고 지시를 하였다. 그러나 지시가 내려가던 당시에 이미 미군은 코탕섬에 엄청난 폭격을 감행하고 있어서 정말 그 섬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사진 헬기추락
사진글 타이랜드기지에서 출격한 미해병대의 헬기2대가 코탕섬을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던 중 매복해 있던 크메르루즈군의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미군 최초의 피해는 5월13일 23명의 공군을 싣고 타이랜드로 향하던 헬기가 추락하여 23명 전원이 몰사한 사건이었다. 5월14일 아침 6시 30분 마야구에즈호 선원들은 백기를 단 타이랜드 어선에 태워져 공해로 나갔다. 5시간 후에 공해상에서 미 구축함 ‘윌슨호’를 만나 선원전원은 무사히 구조되었는데 ‘윌슨’에서는 이 선원들을 구하려고 미해병들이 코탕섬을 공격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5월15일 아침 170명 이상의 미 해병이 8대의 헬기에 나누어 타고 코탕섬으로 향했다. 작전에 참가했던 한 해병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 그들은 섬에 고작 30-40명 정도의 크메르루즈군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150-200명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크메르루즈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인원은 40명정도가 맞다고 했다. 그만큼 소수의 인원이 치열하게 싸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3대의 헬기는 코탕섬 상륙전 이미 피격되어 추락했다. 당시 헬기추락에서 살아남은 미해병 ‘래리버넷’의 증언에 의하면 “공격전에 우리들은 아주 빈약한 브리핑을 받았으며 그것이 결국 동료들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브리핑에서는 그저 몇 명의 저격수정도만 있을 것이라고 했다. 코탕섬으로 비행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생각은 이작전이 지휘관의 판단처럼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들이었다. 나는 이 작전이 분명한 큰 실수였다고 믿는다”라고 울분을 터트렸다. 당시 분대장이었던 ‘헌터’는 또 “우리는 아예 작전브리핑을 받지도 않았고 그저 평상시처럼 개인화기를 들고 작전지역에 도착하여 그때부터 상황을 알아서 판단, 임무수행하는 것으로 알았다. 나는 그저 내가 훈련받은 대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단지 우리 분대원 아무도 사상자가 나지 않기를 기도할 따름 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엥사리 외무장관은 뉴욕 기자회견에서 “미군이 착륙하자 우리는 이들에게 반격을 가했으며 우리병사들은 잘 은폐하여 미군에게 대항했다.”고 말해서 크메르루즈군이 의외의 공격을 받고도 질서있는 반격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작전개시 14시간 만에 미군들에게 철수명령이 하달되었다. 전투기들이 엄호사격을 하고 어둠속에서 공격을 받으며 헬기에 태워져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날 전투에서 미해병은 15명이 전사하고 수명이 부상했다. 미군의 전과보고에는 55명 이상의 크메르루즈군이 사살되었다고 했으나 크메르루즈군이 확인한 숫자는 6명이었다. 미군은 섬과 바다에 널린 미해병들의 시체를 그냥 두고 철수하였으며 그중엔 3명의 생존자도 있었다. 기관총으로 철수를 엄호하다가 마지막 헬기로 철수하게 되어있었던 이들은 결국 헬기에 타지 못했다. 바넷해병은 “아직도 이들 기관총조를 두고 온 사실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생각만 하면 몸이 떨리고 꼭 누가 심장을 후벼파는 것 같다”라고 울분을 토하였다. 그는 1975년 5월15일을 하루도 잊을 수가 없었고 생각만하면 눈물이 흘렀다고 하며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당시의 혼란스런 철수작전에서 실수로 이들을 철수시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은 비통에 잠겼다고 한다. 2000년 5월 둘째주 일요일 프놈펜에 있는 ‘켄트위더만’의 미국대사관저에서는 마야구에즈호 사건에 희생된 해병들을 추모하는 조그마한 의식이 있었다. 이 의식에서 제1서기관 ‘캐롤 로드리’씨는 처음 공식적으로 3명의 해병들을 철수시키지 못하고 남겨진 사실을 인정했다.
이제부터 마야구에즈위기절차의 특징을 분석해 보자.
영해문제
비엩남과의 영해분쟁중이던 크메르루즈는 1975년 5월부터 비엩남어선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외국선박의 자국영해 내 항해금지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영해통금조치 기간동안 마야구에즈호가 영해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경우 법적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필자가 푸에블로사건의 영해문제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확인해보자.
1960년 Caroline 사례에서 국제법은 자기방어를 위하여 일시적으로 매우 필요한 경우에 있어서는 방법의 선택이나 심의 없이 그의 영해를 넘어서는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Moore, Digest of International Low, Vol.2(1966).p412)
유엔헌장 51조에 관계된 자기방어권은 제 2조 4항에서 기본원칙을 규정지었는데, 자기방어권은‘무력침공이 일어날 경우’에는 허용되었다. 외관상 긴급한 공격을 포함하며, 이 자기방어권은 어떠한 안전특별지대 혹은 보다 중요한 상황의 수립에도 무관하다.
(푸에블로위기와 유엔사1-영해문제.이시우, 통일뉴스 2007년 01월 23일)
위의 사례는 자위조치로서 영해의 통제를 넘어 범위도 더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이다. 캄보디아는 영해확장이 아니라 영해에 대한 통제를 주장한 것이다. 영해문제의 국제법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배타성에 있다. 영해에 대해서는 군함도 몇가지 조건을 위반하지만 않으면 무해통항권이 인정되나 영해관할국이 금지한다면 그것은 우선 존중되어야 하고, 협의를 거쳐 영해관할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항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충돌을 각오하거나, 충돌을 야기할 목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캄보디아와 미국은 적대국으로서 교전상대가 아니었는가? 푸에블로위기에서는 몇차례에 걸쳐 확인하고 고민된 영해문제가 마야구에즈호위기에서는 단 한차례의 엇갈린 증언만으로 결론 내려졌다. 회의록을 보자.
키신저국무장관: 배가 나포됐을 때 섬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었나?
콜비CIA국장: 약 7-8마일이다.
슐레진저국방장관: 우리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30마일로 주장되는 지점에서 나타났다.
럼스펠드: 이건 해적행위 아닌가?
슐레진저국방장관: 그렇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2, 1975.P4)
콜비의 7-8마일과 슐레진저의 30마일 주장은 각기 다른 정보통로를 통해 확보한 것이라 해도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이것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고, 슐레진저의 교차확인 되지 않은 정보에 근거해 럼스펠드는 마야구에즈호 나포를 해적행위로 단정지었다. 그 뒤 콜비의 7마일설은 단 한번도 백악관회의에선 검토는커녕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위기조치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상황평가는 뭣인가에 쫓기듯 성급하고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것은 마야구에즈호의 영해침범이냐, 캄보디아군의 공해상 불법행위냐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사실이었다. 그러나 위기관리자들은 근본문제에 대한 확인절차를 무시한 것이다.
포드대통령과 럼스펠드는 아예 ‘해적행위법’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회의록을 보자.
포드대통령: 그것은 명백히 해적행위법에 해당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중략)
럼스펠드백악관참모: 성명서에서 사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이것이 해적행위법이라는 것에 대한 발표와 석방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2, 1975 p11, p13)
포드와 럼스펠드가 말한 국제법으로서의 해적행위(piracy)법은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다. 1926년 법 초안이 제출되었고 논의는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1982년에 가서야 제정된다. 해상을 항행하는 상선을 습격하여 화물 등을 강탈하는 행위는 로마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져 왔다.(Rubin, “Piracy”, in : Bernhardt, R. (ed.), Encyclopedia of public International Law, instalment 11 (1989) p.259.)
해적(pirate)은 해운국의 선박항행과 통상에 무차별의 위협을 가하여 선박항행의 안전이라는 국제사회의 공통이익에 손상을 입혀왔다. 공해상의 선박은 게양된 국기의 나라 즉, 기국의 관할권에만 복속된 것이라는 원칙이 있다. 즉 국기를 게양한 선박은 선박자체가 영토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해적행위에 대해서는 국가가 공해상에서 해적선박을 나포하고 해적을 자국의 재판소에서 재판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해적은 인류공통의 적(hostes humani generis)으로서 국적국(기국)에 따른 보호가 인정되지 않고 모든 나라의 관할권에 복속되어 있다고 여겨져 왔다.
(O’Connell, ,D.P., The International Law of the Sea, Vol.Ⅱ(1984), p.967.)
해적을 둘러싼 규칙은 관습법에 따라 성립된 것이지만 20세기에 들어와 국제 해운 연합시대에 해적과 관련하여 법전화작업이 시작되었다. 해운연합에 의하여 설치된 국제법 법전화 전문위원회는 1926년 1월에 ‘해적의 억지를 위한 조문 초안’(이와메루, 마타 초안)을 작성했으나, 긴급한 사항으로 여겨지지 않고 법전화는 연기되었다.
(“Draft Provisions for the Supression on Piracy”, League of Nations, Committee of Experts for the Progressive Codification of International Law [1925-1928], Vol. 2 (1972 reprint, Oceana), pp.141 ff., 參照, 村相歷 「條約上의 海賊行爲」「刑事法學의 潮流와 展望(大野埧義先生古弑祝論集)」 世界思想社 (2000 年) 332 負.)
그 후, 1933년 하버드 로스쿨(Harvard Law School)의 연구조직이 기존의 논의를 정리하여 총19조의 ‘해적에 관련된 조약 초안’(이와메루, 하버드 초안)을 발표하였다.
(The Harvard Research in Internationsal Law, “Draft Convention on Piracy”, AJIL, Vol. 26 Supp., p.739 (1932))
이 초안에는 조약에 관한 설명이 첨부되었고, 이후의 해적에 관한 조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82년 조인된 새 국제해양법의 해적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개인소유선박과 비행기들이 개인적 목적을 위하여 공해상이나 국가관할권 밖의 지역(역자주:무인도)에 있는 선박과 비행기나 혹은 거기에 탄 사람들과 재산에 대하여 가하는 폭력,억류,약탈행위이다.’ 라고 되어 있다.
(THE U.N.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PART VII, HIGH SEAS, SECTION 1.GENERAL PROVISIONS, Article101(a)(i)(ii))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적행위의 주체가 국가가 아닌 개인으로 규정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마야구에즈사건으로 돌아가보면 마야구에즈나포의 주체는 개인이 아닌 캄보디아정부였다. 캄보디아 정부가 내린 영해통금조치에 의해 캄보디아경비정이 정선시켰기 때문이다. 어디를 봐도 해적행위같다는 비유로서는 가할지 모르나 법으로서의 ‘해적행위법’을 위반했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에대해 사건이 끝난 뒤 중국등이 발표한 입장은 ‘미국이 오히려 해적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회의록에서 보고된 내용을 보자.
미군조치에 대한 베이징의 첫 반응은 부주석 리후시엔니엔은 미국의 “철저한 해적행위”라고 비난했다. 오늘 베이징 연회 연설에서 리는 “캄보디아 영해에 미국배가 침범했을 때 캄보디아는 그들이 선포한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배에 대해 합법적기준으로 나포했다” 고 말했다. 리는 추가로 “미국은 문제에 대해 논쟁을 만들 수 있는 한 갔다. 그리고 캄보디아 영해와 배에 폭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리는 미국의 조치는 “세계여론에 의해 비난받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노이라디오는 비엩남과 캄보디아에서의 패배로부터 배운 것이 아직도 없음을 보여주는 “극악무도한 해적행위”로서 작전을 특징지웠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5, 1975, p3)
이들 국가가 주장하는 해적행위의 기준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주체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국제해양법의 기준과는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해적행위법’을 위반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미국을 비난하기 위한 정치적수사로서 해적행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그 표현에 대해 법적 합치성을 따질 일은 없어 보인다. 이들 나라가 해적행위 주체를 ‘개인’만이 아닌 ‘국가’로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온 점으로 본다면 오히려 이들 국가의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다.
오늘 세계 많은 진보적 나라들이 해적행위에 대한 협약의 규정과는 별개로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나라 군함들과 군용기들이 바다와 상공에서 감행하는 폭행을 해적행위로 단죄하고 그를 저지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매우 정당한 행위이다.
(국제법사전,p452,사회과학 출판사,2002)
그러나 미국은 국가가 아닌 개인으로만 해적행위의 주체를 주장해온 마당이기에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서도 많이 멀어져 있는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어쨌든 군사조치이전에 검토되어야 할 전제와 근본문제가 간과되거나 무시된 채 위기조치절차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확인해 두자.
사진 코탕섬의 해병
사진글 마야구에즈선원들은 이미 코탕섬을 거쳐 본토에 이송됐다가 석방된 상태였지만 미해병대는 코탕섬에 상륙하여 많은 전사자를 내고 철수한다.
보고체계의 문제
위기조치계획절차의 1단계는 일반적으로 미국방성의 국가군사지휘본부에 사건이 보고됨과 동시에 시작된다. 상황발전단계는 1. 날마다의 상황모니터, 2. 사건발생, 3. 문제로서 인지된 사건, 4. 사건보고등 4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연관되며 진행된다. 마야구에즈위기와 판문점미루나무위기의 경우는 이중 3번째 요소인, 사건을 문제로서 인지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하느라 사건보고가 늦어진 경우이다. 보고의 지연과 같은 보고체계의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무엇이고, 위기절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마야구에즈위기1차회의록을 통해 살펴보자.
포드대통령:(…) 나는 지금 어떤 것을 재확인 하고 싶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배가 나포된 것은 7:45분이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에게 알릴 수 있는 더 빠른 방법이 틀림없이 있었다.
스코크로프트보좌관: 그렇다. 그 시간은 내가 그것에 대해 들었을 때이다.
럼스펠드보좌관: 나도 그렇다.
키신저국무장관: 나는 오늘 아침 나의 정규 스텦미팅까지 말 못했다. 그런 다음 그것은 곁가지로 언급되었다.
슐레진저국방장관: 이것은 관료적인 문제이다. 국가군사지휘본부는 그곳에 미해군 배가 없기 때문에 경고하지 않았었다.
포드대통령: 그건 평상시엔 괜챦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콜비CIA국장: 나는 통고절차에 포함시킬 것이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2, 1975. p10)
국가위기는 군사위기 뿐아니라 재난,재해등 광범위하다. 미국의 국가안보분야 위기관리는 백악관상황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중 군사위기절차는 국방성의 국가군사지휘본부에 사건이 보고됨과 동시에 시작된다. 주한미군사령부와 같은 지역전구사령부에는 초기위기조치반에서 위기조치반으로 발전하며 태평양사령부, 합참, 국가군사지휘본부등에 동시 보고되고 하나의 연결망을 이룬 가운데 위기조치절차에 돌입한다. 그러나 수없이 수집되는 정보중에서 지역사령부의 초기위기조치반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인지, 백악관상황실까지 보고가 되어야할 사건인지에 대한 판단에 따라 보고는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신중하게 지연될 수도 있으며, 아예 보고되지 않을 수도 있다. 위기의 종류에 따라 보고의 시점과 위기절차돌입시점이 결정되는 것이다.
팽팽한 긴장상태에서 보고가 잘 이루어지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은, 위기로 발전하기 전에 많은 사람이 공통된 정보를 기반으로 대처하기 때문에 좀더 쉽게 관리가 된다. 전광석화-납치된 항공기의 뉴욕세계무역센타 돌진-처럼 일어나는 일은 정보를 모으고 위기를 관리하는 사람들 사이에 고르게 정보를 보내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다루기가 가장 어려운 위기라고 할 수 있다.(백악관 상황실 p210)
각각의 위기는 독특하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 대하여 엄격한 규칙이 적용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합참의 교범도 지적하고 있다. 사건의 문제화, 즉 사건을 안보문제로 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미국의 국익이 무엇인가에 따라, 또는 미국의 국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즉 객관적 사건에 가치가 부여됨으로서 문제로서 인식 되는 것이며, 가치의 최고기준은 미국의 국익이다. ‘사건’에 대한 합참의 정의를 보자.
사건은 예외적이라고 평가된 일과, 미국의 이익과 안보에 역행하는 충격을 잠재적으로 가졌다고 평가된 것이다.(합동참모장교가이드 Pub-1)
위의 마야구에즈회의록에서 슐레진저가 보고지연사유를 ‘관료적인 문제’라고 말한 것은 층층이 분리되어 있는 보고의 계통과 각 단위에서 예상치 않은 위기를 만나 분석하고 판단하여 문제화 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때 역시 문제는 생긴다. 1990년 걸프전당시 리차드 하스의 푸념을 보자.
NSC참모부의 걸프전담당자 리차드하스가 말하길“당직사관들이 들어오는 정보를 간추려 주었는데, 나는 그들이 없었다면 데이터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을 겁니다.”(백악관 상황실 p210)
이처럼 보고시스템은 관료성과 신속성사이의 모순에 처해 있다. 그런데 만약 마야구에즈위기회의록에서와 같이 위기회의결정자들이 사건 발생 즉시 보고되길 원한다면 지역사령부의 초기위기조치반에서 처리할 시간 없이 곧장 국가급 위기로 발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합참문서에는 지역총사령관의 보고와 조치절차에 대한 자세한 매뉴얼이 제시되어 있지만, 위기는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에 예외적인 상황이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마야구에즈호위기시 제기된 보고체계의 문제는 대통령이 참석한 최고회의에서 지적된 것이었으나 1년 뒤 판문점미루나무위기때 다시 재연되었다. 회의록을 들여다보자.
키신저국무장관: 실질적인 문제를 하나 지적할 것이 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어젯밤 9시43분인데, 오늘 아침 9시까지도 보고를 받지 못했다.
CIA: 우리 측 잘못이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클레멘츠: CIA만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국방부와 국무부도 마찬가지로 이 채널을 통해 보고를 받지 못했다.
하비브: 정보가 들어온 것은 어제 한밤중인데, 나도 오늘 아침에야 보고를 받았다.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오늘 아침 8시30분이다.
아브라모위츠: NSA도 오늘 아침 9시30분까지는 몰랐다.
CIA: 작전센터에서 상의가 있긴 했으나 아무도 상부에 경과보고를 하지 않았다.
키신저국무장관: 최근에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또 있다. 마야구에즈 사건이다.
하비브: 자정 12시1분에는 보고를 받았어야 한다. 보고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CIA: 작전센터에서 서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긴 했으나 상부에는 보고하지 않은 것이다.
(Minutes of Washington Special Action Group, August 19, 1976./신동아 2000.4월호, p570 ~ 599 재인용)
백악관 상황실회의는 CIA의 보고로 시작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에 CIA국장은 거듭 같은 변명을 해야했다. 보고의 지연은 시간을 까먹는 것이고, 시간을 까먹는 것은 위기조치의 선택지가 줄어듦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기조치 결정자들에게 시간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위기 초기, 보고체계의 불안정성은 사실 모든 위기절차에 잠복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와 비슷한 장면은 푸에블로위기에서도 있었다.
월트로스토우안보보좌관 : 우리는 지금 협조가 필요하다. 나는 첫 접촉이 22시라는 당신들이 합의한 문서를 가지고 있다. 나는 첫 번째 구조신호를 23시28분에 받았다고 들었다. 맥나마라는 그것을 23시54분이라고 했다. 나는 0시32분에 배가 사건으로부터 떠났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 맥나마라는 배가 사건종료된 시간은 0시25분이라고 했다. 역사적인 정확도의 문제를 위하여 우리는 정확한 시간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존슨대통령: 나는 로스토우 당신이 이 문제와 관련된 모든 사실을 나에게 모아주기를 원한다. 지금까지 나는 배가 구조요청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사실을 획득하고 그들을 잘 기록해야 내가 이 문제의 미래에 대해 연구할 수 있다.
(Johnson Library, Tom Johnson’s Notes of Meetings, Pueblo II, 1:00 p.m. Top Secret.)
백악관상황실에 사건이 보고되는 위기절차1단계의 장면을 진술한 다음 글을 살펴보자.
사람들은 우선 득달같이 전화에 달려들어 정보를 교환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 대화를 나눈다. 대통령이 확실히 개입해야하는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면, NSC담당참모는 국가안보담당 부보좌관을 도와서 차관급위원회를 소집한다.(백악관상황실 p210)
대통령이 개입해야 하는 심각한 사건을 가려내는 일이 중요함에도 그리고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임에도 위기는 그런 상황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야구에즈위기와 판문점미루나무절단위기 때에 신속한 보고를 지적하게 되고 중앙정보국장 콜비가 통고시스템에 반영하겠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다음해인 판문점미루나무절단위기 때까지 이는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잠시 위기를 다루는 백악관 상황실의 회의 체계를 살펴보자
상황실을 이용하는 정책그룹들에는 일상적인 회의를 하건 위기에 대응하는 회의를 하건 그 구조와 조직을 관통하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행정부가 특별히 차관급, 즉 주요한 국가안보기관들의 지휘상에서 2인자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실제 직책과는 관계없이 장관급위원회라고 부르는 것도 있었다. 그 구성원은 물론 장관이나 기관장이었다. 대통령이 장관급회의에 참가하면 그 회의는 바로 요건을 충족한 국가안보회의나 법정에 준하는 회의가 되었다. 이같이 층층이 내려오는 구조는, 그 세부사항은 다를지라도 케네디 때부터 대부분의 대통령들에게 개념상 공통된 점이었다. 1962년 번디는 상황실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는 첫번째 그룹, 차관급위원회와 유사한 그룹을 만들었다. 국무차관, 국방차관, CIA국장과 번디가 주기적으로 만나서 대통령이 참석하는 전체 국가안보회의에서 토의에 부칠만한 안건을 상의했다. 그들은 1962년 처음으로 만나서 매주 만나기로 의견을 모았다. 카터 대통령도 비슷한 위원회들을 위계적으로 조직했다. 레이건 집권시에는 세 개의 기획 그룹이 있었는데 이들은 상황실을 ‘홈home’이라고 불렸다. 위기대책입안그룹Crisis Pre-planning Group은 본래는 차관급 위원회였으며, 부통령이 회의를 주재했다. 국가안보기획그룹 National Security Planning Group은 NSC에 참석하는 몇몇 장관만 정기적으로 레이건 대통령과 모이는 회의였다. 레이건은 자주는 아니었지만 전체 NSC 위원들과 각료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상황실이 좁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클린턴 집권 시절에는 부처간 실무진이 자주 회의실에 모여서, 가령 코소보 공습 같은 특정한 국가안보 문제에 대한 준비 토의를 가졌다. 이들은 차관급 위원회의 안건을 준비했다. 차관급 위원회Deputies Committee는 국가안보회의에 참가하는 국무부, 국방부, CIA, 합동참모본부와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처의 차관급 인사로 구성되었다. 토니 레이크수하의 국가안보담당 부보좌관 샌디버거와 그 다음 제2기의 짐 슈타인버그가 이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차관급 위원들이 더 검토가 필요한 방침을 상의했다면, 장관급 위원회 Principals Committee는 상황실에 모여 대통령에게 보고할 문제를 준비했다. 장관급 위원회는 국무장관, 국방장관, CIA, 합참의장등으로 구성됐다. 앨 고어의 국가안보보좌관인 리온 푸어스도 이 위원회에 참석했다. 클린턴의 국가안보보좌관, 즉 처음에는 레이크가, 다음에는 버거가 회의를 주재했다. (백악관상황실 p177~p179)
마야구에즈위기회의에서 슐레진저와, 판문점미루나무위기회의에서 클레멘츠가 지적한 것은 상황실회의체계문제가 아닌 상황실에서 위기절차가 시작되게 하는 전단계, 즉 국방성 탱크룸의 국가군사지휘본부 참모들의 관료성이다. 상황실 초기회의에 가장 먼저 보고를 해야 할 CIA뿐 아니라 국방부, 국무부등 모든 부서가 이 채널로부터 보고를 받는다는 것이 클레멘츠의 진술을 통해 확인된다. 결국 초기 위기절차 1단계의 시작인 국가군사지휘기구로의 상황보고와 판단과정이 위기절차의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합참의 위기절차계획문서에는 국가군사지휘본부로 보고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제로서의 사건의 인지나 잠재된 문제는 관측보고를 계속한다. 사건의 보고는 다양한 자원으로부터 온다. 총사령관, 현역의 예하부대, 부대사령관, 뉴스등. 그러나 자원과 관계없이 국가안보에 대한 예리한 정보보고가 모이는 정점은 워싱턴 디시의 국가지휘본부이다. 사건은 국가지휘본부에 가능한 방법들에 의해 보고된다. 그러나 두 개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기밀정보보고와 작전계획보고-3정점이다.(합동참모장교가이드 Pub-1)
기밀정보보고Critical Intelligence Report(CRITIC)는 기밀등급이 지정된 보고서를 말한다. 예를들면 Immediate; Limdis; Specat; Exclusive 와 같은 약자가 써 있다면 즉시배포;대외비;특별범주가 포함된 1급비밀;실행을 의미한다. 즉, 대외비를 유지하는 가운데 즉시 실행되어야 할 1급비밀이란 뜻이다. 또하나의 보고방법인 작전계획보고-3정점보고OPREP-3 PINNACLE (OPREP-3P)는 그 견본이 합동계획실행체계1장 뿐 아니라 합동문서1-03.6에 포함되어 있다.
위기절차가 시작되는 보고체계에서 기밀정보보고가 핵심이지만 너무 많은 보고들이 주목을 끌기위해 1급비밀을 지정하기 때문에 중요문서를 걸러내기 위한 목적이 사라져 기밀수준을 지정하는 것이 거의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는 베트남전쟁에서 문제가 되었는데 웨스트멀랜드사령관은 거의 1급기밀 문서더미에 파묻혀서 책상머리를 떠날 수 없었을 정도였다. 한편 기밀정보보고의 작은착오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사례도 있다. 푸에블로사건이다.
1968년 1월2일 신년휴가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스티클리준장은 책상에 놓인 NSA의 경고메시지사본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이 보고서를 며칠 전 푸에블로의 임무를 승인했던 합참, DIA및, 303위원회에 즉시 알리지 않고 그냥 묻어두었다. 우선 그는 NSA가 이보고서에 붙인 분류표를 실질적 조치를 요구하는 ‘실행Exclusive’에서 흥미로운 정보를 의미하는 ‘정보’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작전을 승인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대신 하와이에 위치한 태평양총사령관사무실로 가는 일상서류에 포함시켰다. 태평양총사령관에게 도착한 메시지는 처음에는 푸에블로의 작전승인메세지와 혼동되었다. 거의 동시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메세지에는 ‘정보’라는 분류표가 붙어 있었으므로 무시되었다. 처음 제출되었던 ‘실행’ 사본은 해군작전본부의 토머스 H. 무어러장군에게도 보내졌다. 하지만 DIA암호국의 실수로 잘못된 분류표를 붙이는 바람에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다음 한달 동안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NSA1, p357, 제임스뱀포드, 서울문화사)
미태평양함대가 NSA의 이 기밀보고에 주목했다면 푸에블로사건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군사지휘본부는 일일모니터링보고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정보를 종합하기에 이들 정보보고가 일으키는 착오의 결과는 위기에 대한 방관과 위기조치실행의 지연을 초래하게 된다. 이처럼 매뉴얼만으로 적용되지 않는 현상은 ‘위기’ 자체의 예측불가능성과 예외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참교범에 의하면 현재는 이러한 ‘관료적’ 보고체계가 현실에서 무너지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총사령관으로부터 국가지휘본부로의 작전계획보고-3정점의 수령은 시작된 위기조치절차와 더불어 있음직한 경로이다. 그러나 오늘날 즉각적인 세계통신으로 전구에서는 워싱턴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의해 위기를 알게 되는 것이 실질적이다.(합동참모장교가이드 Pub-1)
위기절차의 초기 보고단계는 아니었지만 위에서 진술한 변화에 대한 극적인 사례가 있다. 1993년 6월 클링턴은 이라크의 테러혐의에 대해 보복공격을 명령한다. 클린턴은 미사일이 목표물에 정확히 명중했는지 알기를 원했다. 그러나 모든 참모들이 그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막막해 할 때 클린턴은 CNN에 직접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나는 미사일이 명중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지만 누구도 그 증거를 내게 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없이 CNN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현재 CNN은 바그다드에 특파원을 파견하지 않았지만 요르단 지국의 카메라맨은 이라크 정보부 인근에 사는 친척이 있답니다. 결국 그 카메라맨이 친척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아봤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자 방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모든 적들에 맞서 p142)
위의 사례는 보고체계, 정보전달체계가 전통적 방식을 부정하며 급속도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같은 위기절차의 보고체계가 갖는 신속성, 다변성은 이전의 신중한 관료적체계가 설자리를 잃게 한다. 그러면서 생기는 문제는 판단이 보고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위기조치의 심각한 고민이 있다.
보고체계와 더불어 조치의 선택과 결정과정 역시 전통적인 매뉴얼은, 위기절차회의에서 평가안과, 조치에 대한 권고안이 제시되고 그것을 선택 실행하는 과정을 밟는 것이다. 9.11 테러 후 군사행동을 결정할 때, 부시 대통령은 이 매뉴얼대로 했다. 국가안보팀이 대안과 권고안을 제시했으며, 부시는 잠시 물러나서 대안을 선택하느라 고심했다. 다음날, 보도된 것처럼 부시가 국가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에게 자신의 결정사항을 하달했다. 그러나 위기절차는 매뉴얼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마야구에즈호위기는 보여주었다.대통령이 즉석에서 결정을 내린 사건이 몇몇 있었다. 그 하나가 제럴드 포드였다.
1975년 5월 12일, 포드 대통령은 군에 급히 지원군을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해군군함이 수일 걸리는 거리에서 근접해가는 동안, 미국 항공기는 마야구에즈호가 캄보디아 해안도시 콤퐁송 인근의 코탕섬에 정박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캄보디아 사람들이 그 배의 선원들을 이동시켜 감금할 것을 두려워한 포드는 현장에 있는 항공기에게 필요한 경우 침몰시켜서라도 캄보디아 배들이 코탕섬과 본토를 오가지 못하게 저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5월 13일 저녁 포드가 각료실에서 보조관들을 만나는 동안, WHCA가 마야구에즈호 위를 선회하는 항공기와 무선전화를 연결시켜주었다. 또한 타이랜드에 위치한 제7공군본부, 하와이 태평양사령부 그리고 펜타곤의 국가군사지휘본부가 연결되었다. 항공기에서는 캄보디아 군함이 방공포를 쏘는 가운데, 배 몇척을 공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해왔다. 포드의 국가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가 다음에 일어난 일을 들려줬다. “에어포스A-7의 조종사가 캄보디아 본토를 향해 가는 어떤 선박의 뱃머리에서 러시아인인 듯한 코카서스 사람들을 보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포드 대통령이 전화기를 들었고 상황실에서는 그를 전화망에 연결시켰습니다. 뱃머리를 가르며 총을 침몰시키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미국선원들이 타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대통령은 그 배를 놓아주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그러니까 5월 14일 늦게, 해군구축함이 마야구에즈호 선원들을 옮기는 캄보디아 어선을 붙잡아서 미국선원들을 구조했다. 린든 존슨 또한 6일 전쟁에서 소련과 매일 핫라인을 교환하면서 즉석결정을 내린 적이 있었다. 핫라인이 전쟁 기간에 자주 시도되었기 때문에 존슨은 상황실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머물렀다. (백악관상황실 p210-211)
몇가지 진술은 다른 증언과 일치하지 않지만 대통령의 위기조치 결정과정이 매뉴얼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례로서 주목된다. 전작권환수과정에서 벨 주한미군겸 유엔군사령관은 유엔사의 위기관리권을 주장했다. 위에서 위기절차 1단계의 보고체계를 중심으로 여러사례를 인용한 것은 바로 이점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유엔사가 위기관리권을 갖게 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살펴보자.
유엔사가 전작권환수과정에서 위기관리권을 주장하는 경우 현재와 크게 달라질 바 없는 유엔사/연합사위기조치예규에 따라 초기위기조치반을 거쳐 위기조치반-유엔군사령관-워싱턴국가군사지휘본부로 이어지는 위기보고절차는 합참문서가 지적하듯이 필연적으로 지켜지기는 어렵다. 합참문서는 거꾸로 워싱턴에서 걸려온 전화에 의해 유엔사령관이 사건을 인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각각의 독특한 위기에 완벽히 대처할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범과 현실의 이같은 괴리는 역설적으로 위기절차의 시작이 지역총사령관으로부터 국가군사지휘본부로의 보고에 의해서가 아닌, 워싱턴으로부터 한반도로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확인케 한다. 초기위기조치반에서 유엔사령관에게로 보고를 할지 말지 상의하는 시간에 이미 워싱턴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유엔사령관이 사건을 알게 되는 상황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실제 푸에블로사건도 이미 태평양사령부에서 초기조치가 취해지면서 유엔사령관에게 통지됐다. 유엔사령관이 NSA지국이나 CIA한국지부를 장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각 부서가 퍼트린 정보를 한발늦게 받아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푸에블로사건도 유엔사령관과는 전혀 무관하게 NSA와 미해군사이의 갈등과 소통단절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러나 그 과정이야 어떻든 유엔군총사령관이 한반도 정전위기를 관리하는 한 한반도 위기절차는 서울이 아닌 워싱턴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위기관리권은 전쟁권보다 상위개념이다. 구조를 보나 역사를 보나 상위개념이다. 한미연합사체계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위기조치반에 한국군 대령이 참가하게 되는데도 데프콘3이 결정되고 나서야 한국합참의장이 구두통보 받는 시점의 문제 때문에 작통권문제가 제기 되었다. 연합사해체로 일단 한국군과 미군의 작전체계는 분리가 된다. 그러나 위기관리권이 여전히 유엔사에 있게 된다면 연합사체계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유엔사위기관리반, 또는 위기조치반에는 연합사와 달리 형식적으로라도 한국군이 참가하지 않게 된다. 협조기구에서 의견을 나눌 수 있겠지만 이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고, 유엔사위기관리권 아래 워싱턴이 직접 한반도 위기를 관리하게 된다. 유엔사에 한반도위기관리권이 부여되지 않으면 미국 스스로 한반도 위기에 대처하고 한국정부에 통지를 하든 협의를 하든 그것은 미국이 알아서 할 일이다. 문제는 법적으로 위기관리권이 유엔사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연합사체계에서는 데프콘 상향시점에서 작통권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판단해왔다. 그러나 유엔사위기관리체계가 되면 워싱턴의 국가군사지휘본부에 상황이 보고되는 위기조치절차의 시작부터 작통권문제가 대두될 수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위기절차를 시작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미국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수한 정보력으로 한국보다 먼저 위기를 포착할 수 있으니 한국의 정보역량이 커질 때 까지는 미국에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존재할 수는 있다. 미국이 정보력에서 우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기절차의 관건은 앞서도 지적했듯 정보자체가 아닌 정보에 대한 판단이며, 사건 자체가 아닌 문제화된 사건이다. 모든 객관적 정보는 가치가 결합될 때만이 문제로 인식된 정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을 위기로 인식할 것인가 말것인가가 위기관리체계 가동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가장 극명한 사례는 푸에블로위기이다. 한국에 있어 위기는 푸에블로사건이 아니라 청와대피습사건이었다. 그러나 위기절차는 푸에블로사건에 적용되었다. 위기에 대한 정보는 푸에블로보다 청와대피습사건이 훨씬 빨리 보고되고 인지되었다. 그런데도 청와대피습사건에 대해 미국은 위기절차를 가동하지 않았다. 위기절차의 주도권을 미국이 쥐고 있기 때문에 위기판단의 기준은 미국의 국익이었던 것이다. 미국과의 대등한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버금가는 정보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은 일이다. 주권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동맹관계이다. 미국과 하나의 위기관리체계를 유지하며 미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맞추려는 발상자체가 문제이다. 미국과 위기관리체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국익을 중심으로 서로의 요구가 발생할 때 협조하면 된다. 그러나 한미연합사의 작통권을 환수받아도 유엔사의 위기관리권이 유지되는 한 앞으로의 체계도 ‘도로 연합사’이다. 작전권은 전쟁의 하위개념이다.’전쟁’은 ‘위기’의 하위 개념이다. 작통권을 돌려받고 위기권을 넘겨달라는 것은 미국의 조삼모사이다.
지도 u-tapao map1
지도글 미국이 마야구에즈작전에 무리하게 기지를 사용하므로써 미군철수로 이어졌던 우타파오 공군기지
타이랜드 기지사용문제
전쟁을 위해선 우리나라에서의 일본기지처럼 가장 가까운 곳에 기지가 있어야 한다. 전쟁에서의 속도와 속도를 보장할 가장 가까운 병참기지야 말로 전투자체보다 전투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요소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를 비롯한 인도차이나의 경우엔 그곳이 타이랜드였다. 타이랜드는 인도차이나에서 지금까지도 미군사고문단이 남아있는 나라이다. 미국과 타이랜드는 동 남아시아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SEATO)이전의 1954년 마닐라협정 서명당사자중 하나이다.
이 협정의 4조1항에 의하면 ‘… 무력공격의 수단에 의한 침략을 인정하는 경우에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의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을 합의한다’고 되어 있다.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3조와 같다. ‘…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두 협정 모두 각자 알아서 싸운다는 점에서 동맹으로서의 개입에 대한 구속력을 두고 있지 않다. 특히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달리 마닐라협정은 주병권(미군주둔권)을 합의하고 있지 않기에 한미상호방위조약보다는 훨씬 느슨한 조약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마닐라협정의 4조 2항에는 ‘만약 당사자의 어떤 옵션안에 조약지역 한 당사국의 영토와 주권의 불가침성이나 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성이나, 때때로 이 조항의 1항에 적용되는 다른 국가나 영토에 무장공격으로 위협하거나 영향을 미치거나 지역의 평화를 위태롭게 할 사실이나 상황에 의해 위협하는 당사국은 공동방위를 위해 취해진 조처에 합의하기 위해 즉시 협의해야 한다.’고 함으로서 조약을 위반한 당사국에 대해서 ‘협의’이상을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당시 타이랜드는 이웃이 모두 사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가 버리고 자국내에서도 공산게릴라들이 활동하는 상황에서 미군에 계속 전진기지를 제공하는 것이 안보에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고민하면서 미군의 철군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마야구에즈작전에 자국내의 미군기지가 활용되는데 있어서 거부감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러차례 타이랜드총리는 방콕에 주재한 미국의 대리대사를 불러 타이랜드가 이일에 개입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혔고 미국의 대리대사도 타이랜드의 의도에 반하는 작전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시켜줬다. 하지만 백악관은 미국의 대리대사도 물을 먹였다. 작전에 동원될 부대들은 이미 오끼나와기지에서 타이랜드의 미군기지로 증원되고 있었다. 미국은 마지막으로 작전을 펼치기 전 새벽에 우리의 연합사부사령관에 해당하는 타이랜드측 군 고위인사에게 전화로 통보했다. 타이랜드측 고위인사는 자국총리와 외교부측에 이 통보를 알리지도 않는다. 사건이 끝난 후 타이랜드는 심각한 주권침해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전반을 재고할 것이라고 천명한다.
여기서 잠시 왜 타이랜드가 인도차이나에서 유일한 미군기지로 되었는지 살펴보자. 미공군의 타이랜드주둔은 베트남전이 확전되기 훨씬 전이다. 프랑스의 제 1차 베트남전이 끝난 후 60년대 초,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의 화약고는 라오스였다. 공산계와 중도 그리고 우파로 나뉜 라오스는 내전중이었고 이에 중도를 중심으로 연립정권이 미소양진영의 합의하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양진영 모두 협약을 지킬 생각은 없었고 라오스는 여전히 북베트남군에게는 호치민 루트로, 미군에게는 비밀작전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이 당시 미국은 라오스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라오스에 소수의 고문관을 파견하고 타이랜드에는 공군제트기와 미해병기동타격대를 배치해두었다. 이것이 사실상 하노이 북폭 전력의 시초이다. 하지만 베트남전이 확전되자 공군기의 대규모 증파가 이루어졌고 비행장의 확보필요성이 커졌다. 이에 미국은 타이랜드정부와 협상하여 공군기지 사용을 허락받았고 우돈,우봉,타킬리,코라트,나콘파놈,우타파오 등의 지역에 미공군기지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국제여론을 고려한 미국은 타이랜드공군기지를 임대하는 형식을 택하였다.
타일랜드 주둔 미공군력은 68년 롤링선더작전의 종료를 기점으로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72년 봄 부활절 대공세를 펼치는 북베트남군을 저지하기 위한 라인백커작전을 기점으로 다시 강화되었다. 이 당시 타이랜드에는 미해병대 비행기까지 파견되었다. 이러한 미군의 공중전력은 73년 봄 비엩남과의 평화조약의 체결로 감소되기 시작하였으나 그때까지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캄보디아의 작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타이랜드 주둔 미군의 최후의 작전이 마야구에즈작전이 된 것이다. 1976년 마야구에즈호 위기의 여파로 주태미군은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1977년 SEATO는 해체되었다. 미국은 마닐라협정이 유효하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타이랜드의 해석은 다르다.
2001년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미국이 타이랜드군사기지사용을 요청하자 62년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타이랜드와 미국간의 방위협정인 타낫-러스크 공동성명 체결을 주도했던 타낫 코만 전 장관은 미국과의 방어조약인 동남아조약기구(시토)의 마닐라 협정과 타낫-러스크 성명에 대해 이들 조약이 이용된 것은 베트남전 때 뿐이었다면서 이번 경우에는 이 조약이 이용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미국이 함정이나 항공기의 병참기지로 타이랜드의 우타파오 해군기지를 사용할 것을 제의해올 경우 신중을 기하고 “결정을 내리기 전 국민들과 협의하고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반도에서의 일본기지사용문제와 달리 마야구에즈 위기 절차에서 타이랜드의 기지사용문제는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회의록을 보자.
포드대통령: 어떻게 하면 바로 섬을 점령할 수 있나?
존스합참의장: 우리는 타이랜드에 헬기를 가지고 있으며, 꽤 빨리 그것을 할 수 있다.
키신저국무장관: 우리는 타이랜드에서 그것을 할 수 없다.
슐레진저국방장관: 당신은 타이랜드로부터 수색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키신저국무장관: 우리는 수색임무는 벌 받지 않고 해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거기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2, 1975. p9)
포드대통령보다 때론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 키신저 국무장관은 시종일관 위기회의를 주도했다. 마야구에즈위기 1차회의에서 키신저의 인식 속엔 타이랜드기지 사용불가가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인식은 회의가 진행될수록 슐레진저에게도 전염되었다.
록펠러부통령: 어쨌든 인접한 곳에 존재하는 기지들은 없는가?
키신저국무장관: 필요 없다.
포드대통령: 좋다. 가능한 빨리 중국정부에 메시지를 보내자.
록펠러부통령: 기지사용을 위해 타이랜드의 허락을 요구할 순 없나?
키신저국무장관: 안된다.
슐레진저국방장관: 오직 수색만이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요구한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거부할 것이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2, 1975. p14)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지사용문제는 절박하게 다시 대두되었고, 다음날 마야구에즈 2차회의에서도 타이랜드기지사용에 대한 유혹은 떨쳐지지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브렌트스코크로프트는 타이랜드 기지사용문제를 지적했으나 본문에서는 4줄의 두문장 정도가 지워져 있다. 결국 90년대 중반까지 타이랜드 기지와 관련되어 비밀해제하지 못할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스코크로프트안보보좌관: 우리는 타이랜드와 관련하여 우리가 가진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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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대통령: 타이랜드에 있는 우리의 화물선과 우리의 수색정찰기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나?
스코크로프트안보보좌관: 지금까지는 좋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병력을 사용하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슐레진저국방장관: 반대반응에 대한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행동하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그들의 태도를 바꿀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들은 저항할 것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합의할지 모른다. 그들은 이전에 그렇게 해왔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3, 1975 (morning). p13-14)
마야구에즈위기 3차회의에서 여러가지 조건을 감안하여 불가피하게 타이랜드에서의 해병대 출병 시나리오가 채택됐다. 캄보디아 때문에 인도차이나의 유일한 미군의 징검돌인 타이랜드를 잃을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처음부터 타이랜드 문제를 제기했던 키신저국무장관이 상황을 진화하고 나섰다.
포드대통령: 모든 것이 준비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다음 사이클에서 그것을 한다면 당신에겐 타이랜드 문제가 생길 것이다.
키신저국무장관: 이상적인 시간은 목요일 밤이다. 그러나 나는 48시간 안에 어떤 외교적 압력이 발생하거나 다른 어떤 것이 걱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최적의 정치적 시간에 대항한 최적의 군사적 시간을 고려해야한다. 외교정책과 국내적 근거를 위해서는 내일이 더 좋다.
포드대통령: 타이랜드는 혼란될 것이다.
키신저국무장관: 맞다. 그러나 그들은 안심하게 될 것이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 p21)
그러나 키신저 역시 타이랜드에 대한 고민을 떨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미국정부는 54년 마닐라협정과 62년 타낫-러스크 커뮤니케에도 불구하고 타이랜드군부와 정부사이에 서 있었고 이제 베트남침공과 캄보디아공습을 반대해 온 국회에 의해서도 비난받을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3차위기회의에서 키신저의 발언은 이같은 상황을 잘 말해준다.
키신저국무장관:…타이랜드 일은 나에게 고민거리를 준다. 나는 타이랜드 군대는 그것을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타이랜드정부는 그것을 싫다고 말할 것이다. 국회의 자유주의자들은 타이랜드로부터 우리 군사력의 철수를 건의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들은 타이랜드정부로부터의 어떤 요구와 이것을 맞출 것이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 p23)
스코크로프트가 제기했던 비밀해제되지 않은 내용은 키신저를 통해 공개된 내용인 군부와 정부사이의 관계보다 예민한 사안임을 추측케 한다. 어쨌든 군사작전이 종료되고 난 뒤인 15일 마지막 보고평가회의에서 중앙정보국장 콜비는 타이랜드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콜비CIA국장:(…) 미군사작전의 결과 타일랜드 내각은 오늘 미국사절의 상부인원을 추방하기로 명백히 결정했다. 그리고 협의를 위해 워싱턴의 타이랜드 대사를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타이랜드신문은 오늘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미국과 타이랜드 사이의 모든 협정을 공개할 것.
–즉시 모든 타이랜드의 미군기지를 폐쇄 할 것.
좌파정치인들은 지금 방콕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그들은 보고된 대로 10일 이내에 타이랜드에서 모든 미군이 떠날 것을 요구하려고 하고 있다. 정치적 좌파는 시간이 쿠크리트정부에 정치적 위기를 만들어 낼 권리가 있다고 명확히 믿고 있다. 시위계획의 조직대중들은 총리사무실과 미대사관 양쪽에 구름같이 이동하고 있다. 타이랜드 군 지도자들은 다른 일방으로는 사적으로 미국의 조치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5, 1975 p1)
결국 미국은 1년뒤 타이랜드로부터 철수해야 했다. 인도차이나의 타이랜드는 극동의 일본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엔사에 의해 일본기지 사용권을 가지고 있는 유엔사령관과 타이랜드의 눈치를 보며 마야구에즈위기절차를 진행해야했던 태평양사령관의 입지는 현격히 다른 것이었다.
전쟁법규중 가장 많은 관련조약을 가진 해전법규와 그중에서도 1907년 10월 18일 네덜란드 헤그에서 서명되어 1910년 발효된 ‘해전의 경우에 중립국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조약’에 의하면, ‘교전국은 중립국의 주권을 존중하여야 하며 중립국의 지위를 손상시키는 일체 행위를 중립국영토 혹은 영해에서 할 수 없다. 중립국을 적에 대한 해군작전기지로 할 수 없다. 한편 중립국은 어떤 명의로든지 교전국에 직접, 간접으로 군함, 탄약등 군사용재료를 넘겨줄 수 없으며 수로안내, 정박, 수리등에서 교전 쌍방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동등하게 취급하여야 한다. 중립국이 중립국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교전일방 또는 타방에 대한 친선관계를 저애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교전국에 기지를 내어준다는 것은 전시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상대교전국의 공격을 받을 각오를 하는 일이다. 가뜩이나 공산권에 안팎으로 포위되어 있던 타일랜드로서는 큰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일이 그것도 정부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과 일본은 북미사이에 위기가 심화되면 중립국의 지위로 남을 것인가? 교전국이 될 것인가?를 고민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타일랜드보다 더 큰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것은 북과 교전자의 지위에 있는 유엔사의 지휘아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유엔군참전국이 아니면서도 교전국이 된다. 일미가 군사동맹관계에 있다해도 일본은 미국이 북과의 교전시 형식적으로는 전시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미동맹이 깨지는 것은 아니다. 한미동맹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유엔사가 존재하는 한 한국과 일본은 즉시 미국과 함께 북에 대한 교전국이 된다. 유엔사가 해체되지 않는 한,일은 북에 대해 중립이냐 교전이냐를 선택할 기회 자체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북을 주적으로 삼아 교전을 벌일 수 도 있고, 미국과의 동맹으로서 북과의 교전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북,미전쟁에서 우리가 중립을 유지할 것인가, 교전국으로 참여할 것인가를 선택할 권리는 있어야 유연한 반응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유엔사의 위기관리권을 인정하게 되면 한국과 일본에겐 선택의 권한이 없다. 이미 유엔사의 위기관리권은 연합사와 공동으로 부여되어 온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이승만대통령조차도 작전지휘권을 이양했을지언정 위기관리권을 이양한 적은 없다. 당시로서는 전쟁이 유일한 위기였고, 그런 논리는 상당기간 통용되어 왔지만 위기관리권은 전쟁권의 상위개념이다. 전쟁주권을 포함한 정치,외교,경제등을 포괄하는 내용인 것이다. 미국의 한국전쟁회의록은 한국전쟁(Korea War)이 아닌 코리아위기(Korea Crisis)였다. 78년 연합사 창설이후 연합사위기조치예규가 공식적으로 사용됐고, 95년 정전시작통권환수시에도 연합위임사항(CODA)의 1번항목으로 정전’위기관리’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전시작통권까지 환수하는 마당에서도 위기관리권의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이 사용해 온 ‘위기’의 개념에 묘한 차이가 있어왔던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위기는 전쟁의 상위개념이다. 타이랜드에 대한 한 기자의 다음 지적은 유엔사체제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경종이다.
자국내기지에 주둔한 미군의 일방적 행동에 타이랜드는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방콕에 주재한 미대사도 미군의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자국정부에도 보고를 가려야 할 만큼 친미적인 군 고위인사를 골라 미국이 작전통보의 채널로 활용했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흥철KBS기자. 2005.10.28 북한미사일부품을 둘러싼 몇가지 단상)
마야구에즈호를 구출하는데는 성공했지만 1976년 주태미군이 철수함으로서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은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략에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재는 주태 미군사고문단(Joint 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이 무기판매. 합동군사훈련 등의 연락, 조정 역할을 하고 있으며 82년부터 타이랜드만에서 미.태해군연합훈련인 COBRA GOLD훈련을 실시하는 것으로 태-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진 내각실
사진글 백악관 내각실에서의 마야구에즈위기대책회의, 상황실이 비좁아서 인원이 많을 때는 내각실이 위기대책회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전쟁권결의
군사조치에 관한한 대통령 한사람의 손에 전횡적인 권력이 집중되어 있음은 1962년 딘 러스크 국무장관의 의회증언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그 전해에 있었던 쿠바침공시도를 설명하면서 그것은 중앙정보국과 백악관이 의회와 상관없이 비밀리에 계획했던 일이라고 증언했다. 러스크는 “이 사안에서 여러분이 무시된데 대해 화를 내서는 안됩니다. 이런 일은 이미 수없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입니다.”라는 확언으로 의회를 오히려 위로하려 했다. 그런다음 그는 국무부가 수집한 일명 ‘해외에서의 미국군사력 행사 사례집 1798-1945(Instances of the Use of United Stats Armed Forces Abroad 1798-1945)이라는 자료를 제출하였다. 거기에는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미국이 실행한 127건의 군사행동들이 언급되어 있었다.(Joint Meeting of the 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 and the Armed Services Committee of the U.S. Senate, 1962.9.17/오만한 제국, 하워드 진,당대, 2001,재인용)
미국헌법2조2절1항에서 미국 대통령은 육군과 해군 그리고 민병대의 총사령관이 된다. 그러나 1조8절11항에는 연방의회가 전쟁을 선포하도록 되어있다. 이 두조항은 미국의 민군관계를 둘러싼 오랜 논쟁거리를 제공해왔다. 비엩남전쟁의 충격적인 영향으로 미국 대통령의 전쟁권을 제어하기 위해 미의회는 하워드진의 표현에 의하면 ‘용기를 짜내어’ 1973년 ‘전쟁권 결의’를 통과시켰다. 전쟁권결의 2절C항에서 대통령의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은 3가지 경우만으로 한정됐다.
‘교전이나, 상황상 교전이 확실시되는 전쟁 임박지역에 미군병력을 투입하기 위한 대통령의 총사령관으로서 헌법적 권한은 오직 1. 전쟁선포 2. 특별한 법의 위임 3. 미국과 미국 영토 또는 소유물 또는 군대에 대한 공격에 의해 초래된 국가비상사태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이중 1. 전쟁선포는 의회가 하도록 되어 있으며 미국역사상 이것은 걸프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 특별한 법의 위임을 받은 경우는 전혀 없다. 따라서 미국이 일으킨 전쟁은 99%가 3 의 경우였다. 3의 내용은 본질에 있어서 미대통령이 임의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권결의는 사실상 3의 경우를 통제하기 위한 것인 셈이다. 그래서 이법의 3절에서는 병력투입 전 의회와의 ‘협의’를 의무화하고 있다.
‘대통령은 모든 가능한 경우에, 미군병력을 교전이나 상황상 교전이 확실시되는 전쟁 임박지역에 투입하기 전 의회와 협의해야 하고, 모든 투입 후에 미군병력이 교전에 더 이상 개입할 필요가 없거나 그런 상황이 제거 될 때까지 의회와 함께 정규적으로 협의해야 한다.’
가장 논쟁이 많은 장은 4절 a 항 1.2목이다.
‘전쟁선포가 없는 경우에 1. 교전이나 상황상 교전이 확실시되는 전쟁 임박지역으로 2. 순수하게 공급, 교체, 수선이나 병력의 훈련과 연관된 배치를 제외하고 전투를 위해 장비가 갖춰진 동안 외국의 영토, 영공, 영해안으로 미군병력은 투입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2차대전 후 미국이 치른 수많은 전쟁에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한 경우는 걸프전이 유일하다. 이는 거의 대부분의 전쟁이 전쟁법을 위반해 왔다는 증명이다. 99%의 전쟁이 전쟁절차가 아닌 위기절차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미국의 역사는 위기절차가 곧 전쟁절차임을 입증한 셈이다. 미국헌법에 명시한 대통령의 전쟁권을 보장하면서 의회의 권한으로 대통령을 통제하기 위한 타협안이 전쟁권결의 4절인 셈이다. 전쟁권결의 4절(a)(1)을 인용한 최초이자 마지막보고인 마야구에즈위기보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권결의를 위반했다. 매년 전쟁권결의에 대한 전문적인 평가를 제출하고 있는 그림트(Richard F. Grimmett)의 마야구에즈사건에 대한 평가를 보자.
마야구에즈 탈환에 대한 보고서는 지금까지로서는 오직 4절(a)(1)을 특별히 인용한 전쟁권보고 였다. 그러나 시간제한에 대한 의문은 조치가 보고서에 기록된 그 시간을 넘었기 때문에 논쟁상태이다.
처음 네가지 경우에 의해 드러난 문제 중에서 ‘협의’의 의미에 대한 두부서 사이의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 포드정부는 대통령이 병력투입을 실제 개시하기 전에 의회지도자들에게 ‘통지’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요구를 협의하기 위해 만남을 잡았었다.
‘협의’에 대한 의회의 관점은 대통령이 의회의 견해를 요청하고, 병력파병 결정전에 근거를 얻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U.S. Congress. House. Committee on International Relations. War Powers: A Test of Compliance Relative to the Danang Sealift, the Evacuation of Phnom Penh, the Evacuation of Saigon, and the Mayaguez Incident. Hearings, May 7 and June 4, 1975. Washington, U.S. Govt. Print. Off., 1975. P3)
전쟁권결의의 ‘협의’와 ‘보고’ 절차중에 포드대통령은 ‘협의’가 아닌 ‘통지’를 위해 의회지도자를 만났기 때문에 의회로서는 이미 다 차려진 밥상에 협의할 내용이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마야구에즈위기가 지난 한달 뒤 열린 의회청문회에서 ‘협의’는 통지가 되어선 안되며 병력파병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보스턴 글로브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과 만났던 맨스필드의원은 노골적인 불만을 표현했다.
상원의 민주당지도자였던 마이크맨스필드 상원의원은 “나는 협의를 요청받은바 없었으며, 일이 끝난 후 통보가 있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Boston Globe,1975.5.15/오만한 제국, 하워드진,당대, 2001.재인용)
전쟁권결의가 통과된 후 첫 번째 위기였기에 백악관위기대책팀도 의회와의 협의, 보고절차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록에는 의회를 따돌리기 위해 여념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슐레진저국방장관: 앞으로의 조치에 대한 발표에 있어서 문제는 의회이다. 어느 것을 발표하더라도 의회에 보고를 필요로 한다. p10
록펠러부통령: 난 항모를 되돌리는 것은 조치라고 생각지 않는다. 의회는 법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비둘기파는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캄보디아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면 이 양상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p11
포드대통령: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1973년 여름의 규정이고, 둘째는 전쟁권이다. 군사적 옵션에 따라 의회가 무엇을 오금절여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를 나는 알고 싶다. 나는 의회와 상관없이 당신을 보증한다. 우리는 움직일 것이다.p12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2, 1975, p10-p12)
마야구에즈위기 1차회의록에서부터 보여지듯 1973년 전쟁권결의 이후 의회와의 협의,보고는 모든 위기절차의 필수고려사항이 되었다. 그러나 의회의 권한과 대통령의 전쟁권은 끝없이 충돌, 갈등하는 요소였으며 마야구에즈위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백악관의 변치않는 관점은 의회와 모든 것을 법대로 같이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포드대통령: 우리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한가지를 집요하게 만들자. 우리가 결정하기 전까지는 군사적으로 어떤 것을 할 것인지 의회에 말하지 말자.
럼스펠트:(…) 우리는 의회를 시끄럽게 할 것이기 때문에 석방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요구를 발표하지 않고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약하게 보일 요구를 해선 안된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2, 1975, p13)
마야구에즈위기회의 첫날부터 의회에 대한 포드대통령의 입장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강한 견제였다. 둘째날 밤에 이루어진 3차회의에서 키신저는 대통령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주장한다. 의회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태클을 걸지 못하도록 하며, 이미 위기조치가 되돌릴 수 없는 상태임을 인정하도록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키신저의 지론인 전쟁지도자는 압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의회와 함께 하는 것은 결국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전쟁지도자가 압도적인 권한을 갖기 위해선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지지가 필수라는 90년대의 파월독트린과 정반대편에 서있는 것이었다.
키신저국무장관:(…) 만약 의원들이 우리에게 태클을 건다면 다른 것들의 형편도 안 좋아질 것이며, 오히려 그들이 되돌릴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만들 기회로 사용해야 한다.(…) 만일 의원들이 우리가 이런 환경에서 행동하려는 방법에 대해 잘못된 인상을 받는다면 당신이 의회와 함께 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종종 그렇듯이 문제는 만약 어떤 것이 잘못되면 내 생각에 당신은 압도적인 권한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100명의 크메르루즈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미국인을 잃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협상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우리는 무조건 석방시켜야 한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p11)
위기절차는 전쟁절차를 포함하기 때문에 작전계획을 점검하고, 작계의 국내법과 국제법상의 일치성, 합법성을 검토해야 한다. 마야구에즈회의에서 위기조치의 법적근거를 찾기 위한 토론은 중구난방을 방불케하지만 일관된 흐름이 있다. 불리한 법은 무시하거나 어기는 쪽으로 합의해 간다는 것이다. 슐레진저국방장관은 3차회의에서 전쟁권결의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대신 쿠퍼처치법안을 등장시킨다.
슐레진저국방장관: 우리는 전쟁권법에 의해 강제받지 않는다. 오직 쿠퍼-처치법에 의해서만 강제받는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p16)
쿠퍼-처치개정안(Cooper-Church Amendment)은 1970년 6월30일 이후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미지상군과 군사고문단을 유지하기 위한 예산 종결, 의회승인 없는 캄보디아공중작전을 금지하고, 베트남 밖에서 남베트남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종결하는 내용이다. 1971년 1월5일 공법91-652로 법령화되었다.
쿠퍼-처치법에 의해서도 캄보디아를 상대로 한 공중작전을 포함하는 마야구에즈탈환작전은 성사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슐레진저가 전쟁권결의를 대신 염려한 쿠퍼-처치법도 다른 참가자들에 의해 결국 무시된다. 그때부터 회의는 일방적인 군사조치를 막을 아무런 법적장애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해병대가 마야구에즈호에 투입되는 과정에서 시위진압용제의 사용이 제기되자 당시 시위진압용제의 사용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의회에 알리거나 협의하지 말아야 한다는 키신저의 발언은 이 회의의 위법성을 자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키신저국무장관: 우리는 시위진압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p22)
미국은 1975년까지 1925년 제네바협약에서 규정된 화학무기작용제에서 시위진압용제를 예외로 생각했다. 그러나 1975년 1월 22일 미국이 1925제네바의정서를 비준하고 4월 8일 당시 포드대통령이 ‘명령서11850(Order 11850)’의 집행에 서명하면서 무력충돌에서의 시위진압용제의 사용은 일방적으로 금지됐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 뒤 명령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백악관은 이를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법은 커녕 스스로 정한 자국법도 지켜지지 않게 된 것이다. 전쟁을 위해 필요한 법은 적극 인용되고 해석되며, 불리한 법은 기각된다.
이제 전쟁권결의에 대한 마지막 토론을 지켜보자. 6월 청문회전에 전쟁권결의 적용의 첫 사례가 되는 마야구에즈사건에 대한 의회의 관심도 예민한 것이었다. 쟁점은 통지한 것인가 협의한 것인가였고, 의회는 협의가 아닌 통지일 뿐이라고 단정지었으며, 이는 다음달 청문회에서 다시 확인된다. 백악관은 이를 반전시킬 만한 논리대응에 실패했다. 또한 백악관참모 필립 부첸의 언급에서 법적으로 위기조치의 시작은 군사력이 투입된 시점이란 해석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미국의 위기조치에 대한 법적시점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럼스펠드와 키신저의 주장에 의해 의회에 대한 눈치보기는 끝이 난다. 의회는 대통령의 전쟁권수행에 귀찮은 존재라는 인식은 90년대 파월독트린에 의해 부정됐다가, 2000년대 럼스펠드에 의해 다시 부활했다.
하트만백악관참모: 의회와의 협의문제를 약간만 이야기 하자. 어제밤 의회지도자들에게 당신의 조치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그들은 동의했다. 그들은 그들이 충고는 했으나 협의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을 보고했다. 다시 그들은 당신을 지원했다. 오늘 하원에서는 전쟁권아래 협의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의회의 답변에 대한 개요를 가지고 있다. 나는 또한 우리의 성명에 대한 상원과 하원의 답변개요도 가지고 있다. 오후에 상하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제한된 브리핑을 제공하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더 많은 정보를 원한다. 우리는 의회지도자들을 찔러보고 있다. 우리는 초기자료들을 확장시키지 않았다. 지금의 질문은 ‘통지’와 ‘협의’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이다. 당신은 맨스필드와 알버트를 부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낼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더해서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거나 또는 그들을 부를 수도 있다.
포드대통령: 법에선 뭐라고 말하나.
부첸백악관참모: 법에선 병력을 투입하기 전에 협의하고 그 다음에 정식으로 협의하라고 말한다. 또한 조치 후 48시간 안에 보고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밤 보고해야 한다.
키신저국무장관: 법적 관점에서 이 조치는 언제 시작되었나?
부첸백악관참모: 전함을 들여보냈을 때다.
키신저국무장관: 아마도 당신은 오늘 밤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야 할 것이다.
부첸백악관참모: 그것이 의회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다.
포드대통령: 얼마의 시간이면 그들은 여기로 내려올 것인가?
마시백악관참모: 18:30분이다.
럼스펠트백악관참모: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협의는 그들이 조치를 반대할 수 있기 때문에 제때에 그들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협의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라해도 우리가 그것에 대해 걱정 할 건 없다.
키신저국무장관: 나는 그들에게 외교적 노력의 과정을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응답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예정대로 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우리의 공격계획을 상세하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p23-24)
이 토론에서 전쟁권결의의 적용과 관련된 세부사항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마시와 부통령의 대화이다. 의회와의 협의는 위기조치가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하며 실행될 작전계획까지 협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위기조치에 대한 권고안이 만들어지는 단계에도 협의해야 하며 실질적으로는 단일한 작전계획이 수립된 뒤에도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회가 반대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키신저의 결론은 밀고나가는 것이었다. 결국 의회와의 협의절차는 의회가 찬성할 때만 적용된다는 인식이 백악관에는 박혀있음이 확인된다. 전쟁권결의의 입법정신은 그 첫적용사례부터 왜곡된 것이다.
마시백악관참모: 법령에는 조치 시작 전에 협의하라고 되어 있다.
록펠러부통령: 당신은 이미 그것을 했다.
마시백악관참모: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실행하려는 것에 대해 아직 말하지 않았다.
록펠러부통령: 만약 그 그룹이 반대한다면 어떻게 하나?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하나?
키신저국무장관: 대통령은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p25)
76년 판문점미루나무위기회의에서 키신저는 의회와 협의하기 위해서는 단일통합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서, 즉 중간과정의 협의없이 모든 것을 결정해놓은 다음에 이야기하면 된다는 ‘협의’ 아닌 ‘통지’입장을 재확인 했다.
아브라모위츠: 비상대권(War Powers Act, 전쟁권법으로도 번역됨: 역주)은 어떻게 되는가?
키신저국무장관: 좋은 지적이다. 의회와 협의하려면 통합 단일 계획이 있어야만 한다.
(Minutes of Washington Special Action Group, August 19, 1976./신동아 2000.4월호, p570 ~ 599 재인용)
국제법
위기조치절차에서 검토되어야 할 합법성의 근거인 미국의 국내법에 대해 위기대책팀이 벌이는 실태를 보았다. 전쟁에서 국내법의 검토가 자국내의 단결과 권한의 집중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국제법의 검토는 외교적 명분과 전쟁의 합법성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강이다.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는 전쟁집단은 정부군이라해도 교전주체로 인정되지 않는다. 정부군이 아니라 할지라도 전쟁법의 준수를 선언하면 교전주체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다. 따라서 중국과 비엩남등이 비난했듯이 마야구에즈작전이 해적행위인지 교전행위인지는 국제법의 준수여부에 달려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선 마야구에즈위기절차에서 유엔은 처음부터 고려대상에 들지도 않았다. 한반도의 위기에선 반드시 등장한 유엔문제가 캄보디아에선 논의대상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마야구에즈위기회의록에서 유엔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은 단 한번이었다.
키신저국무장관: 우리는 오늘 유엔사무총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4, 1975. p15)
유엔과 협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캄보디아에 최후통첩을 전달할 길이 없자 면피용으로 유엔에 보내놓았다는 보고가 전부였다. 마야구에즈위기3차회의록에는 왜 유엔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이 뚜렷이 나타난다. 국제법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부첸백악관참모: 나는 두가지 문제를 본다.
–첫째는 쿠퍼-처치개정안(Cooper-Church Amendment)이고
–둘째는 국제법이다.
포드대통령: 국제법에 대해서 나는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캄보디아는 명백하게 그것을 위반했다.
부첸: 우리는 자위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직 자위이다. 쿠퍼-처치개정안은 인도차이나에 어떤 조치도 말하고 있지 않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p15)
사진 윌슨호 폭격
사진글 14일 캄보디아에서 석방된 선원들이 윌슨호에 옮겨탐으로서 전쟁의 목적이 사라졌지만 윌슨호는 다음날 코탕섬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며 캄보디아 공격에 들어간다.
부첸이 지적하고 있듯이 자위를 위해서라면 배와 선원의 석방을 캄보디아 정부에 요청하면 될 것이었다. 캄보디아는 비엩남과 전쟁중이었기에 미국과 새로운 마찰을 일으킬 의사가 없었고, 신속히 석방의사를 밝힘과 동시에, 석방시켰다. 그러나 미국의 조치계획은 본토에 대한 공격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이미 전날 포로들이 석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석방된 선원들이 윌슨호로 옮겨 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윌슨호는 다음날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여러번 제기된 쿠퍼-처치개정안은 부첸의 말처럼 인도차이나에 어떤 군사행동도 불가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이에 대한 검토나 해석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한번 미국 국내법은 위기절차 앞에서 쉽게 무시된 것이다. 유엔은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으므로 남은 것은 선전포고나 최후통첩이다.
선전포고는 국가들 사이의 평화적 관계의 단절과 전쟁의 시작을 명확히 선포하는 법적형식이며 교전국들과 중립국들과의 한계를 명확히 하도록 하는 법률적 형식이다.
선전포고의 형식에서도 보듯 먼저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전포고는 전쟁에 질 경우 전범으로 비난받을 수가 있다. 그에 비해 최후통첩은 약간 다른 방식을 취한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의 자유행동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 국교단절, 봉쇄, 일정지역의 점령, 전쟁 등의 행동을 제시한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쟁이 시작되며 그 책임은 너희에게 있다’는 통첩을 보내는 것이다. 개전(開戰)에 관한 헤그조약에 의하면 전쟁개시의 형식으로서 개전선언 외에 조건부 개전선언을 포함한 최후통첩의 형식이 인정되고 있는데(1조), 인용하면, ‘체약국들은 이유를 붙인 전쟁선포의 형식 혹은 조건부선전포고를 포함한 최후통첩의 형식으로 명확하게 또 사전에 통고함이 없이 상호 적대행동을 개시하여서는 안된다.’ 이에 의하면 상대국이 이 최후통첩의 요구를 용인하지 않는 한 소정의 기한이 경과되면 자동적으로 전쟁상태가 성립된다. 만약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면 첨예했던 분쟁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되며, 가령 최후통첩이 규정한 시간을 초과하여도 무력사용의 필요성이 제기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최후통첩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야기시키는 선전포고와 다르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안하면 전쟁이고 그 책임은 너희에게 있다’ 라고 떠넘긴다는 점에서 강도 같은 행동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선전포고는 의회가 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백악관으로서는 이 또한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남은 것은 최후통첩. 그러나 통첩을 받아야 할 캄보디아와 연결통로가 없었다. 통첩을 받지 못했는데 통첩대로 했느니 않했느니 따질 상황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적 조건에 대해 키신저의 소신은 확고했다. 공격이 우선이고 법은 나중에 짜맞추면 된다는 생각 말이다.
슐레진저국방장관: 나는 이 한 경우엔 키신저에게 동의할 수 없다. 인도차이나의 법적상황은 독특하다. 우리는 그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우리조치의 억제력은 다른 곳의 억제력과 는 차이가 있다.
키신저국무장관: 나는 공격할 것이다. 그 다음 법적용 여부를 다룰 것이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 p18)
결국 키신저는 자신들의 위기조치와 최후통첩은 무관하며 공격목적은 전쟁이 아닌 작전보호라는 궤변을 만들어 낸다. 키신저는 국제법 따위엔 주눅들지 않고 마음대로 개념을 만들어내는 개념의 생산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의 말대로 이런 상황은 위험을 정의할 수 있는 자에 의해 정의된다는 신념을 보여주었다. 부첸의 지속적인 제기처럼 최후통첩이 미국인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었고, 실제는 최후통첩 없이도 선원과 배가 석방되었지만, 역시 간단히 무시되었다. 키신저의 발언에 의해 최후통첩보다는 공격이, 선전포고 없는 공격이 위기조치로서 선택된 것이다.
키신저국무장관: (…) 우리는 베이징에 최후통첩을 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란 점에서 또한 복잡하다.
슐레진저국방장관: 지역차원의 최후통첩은 어떤가?
키신저국무장관: 난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조치가 최후통첩에 의지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공격목적은 우리작전의 보호이다.(…)우리는 우리의 국민들을 구출하고 작전을 방어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부첸백악관참모: 난 동의 할 수 없다. 그들이 섬에 없다면 당신은 다음에 최후통첩을 발표해야 한다.
(중략)
포드대통령: (…) 나는 우리가 지체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계획을 계속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음, 우리가 미국인을 발견하든지 못하든지 당신은 공격할 수 있다.
부첸백악관참모: 그러나 최후통첩은 미국인을 구출할 유일한 방법이 될지 모른다.
키신저국무장관: 최후통첩보다는 공격을 진척시킬 것이다. 나는 이 같은 종류의 상황의 본질은 위험을 정의할 수 있는 우리가 그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작전을 보호하기 위해 이것을 할 것인지 논의해야한다.(…) 우리는 100기의 비행기가 방어작전을 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의회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납득시키기가 약간 어려울 것이다.(…)
키신저국무장관: 나의 권고안은 잔인하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동하는 목표물을 정확히 맞출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것은 잘 할 수 있다.
부첸백악관참모: 나는 키신저가 어떻게 계획을 추진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키신저국무장관: 우리가 공격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다음에 우리는 우리가 최후통첩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믿을 것이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4, 1975 .p15-21)
키신저의 머릿속에 애초부터 국제법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법위반에 대한 그의 생각은 대담하고도 노골적이다. 위기조치절차는 결국 조치에 대한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판단주체의 개성과 리더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나의 권고안은 잔인하게 하자는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전쟁지도자로서의 냉정함과 구조와 개성이 어떻게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지를 읽게 된다.
최근 공개된 헨리키신저 국무장관이 포드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 “마야구에즈호의 선장및 선원들의 재 진술서”에는 선원들이 무사히 풀려난 14일 오전 11시반으로부터 하루 뒤인 15일 10시 반에 미해병의 첫 번째 공격대가 코탕섬에 상륙했다고 밝혀져 있다. 마야구에즈호는 싱가폴로 옮겨와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때 선장은 “나는 선원들과 같이 안전하게 석방될 수 있도록 미국정부의 적절한 대응을 요청한다는 것을 매스컴을 통해 발표하기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기관장은 “미군지휘관들은 우리가 코탕섬에 억류되어 있지 않았고 미군의 공격이전에 이미 안전하게 풀려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푸에블로컴플렉스
마야구에즈위기절차에서는 푸에블로위기절차에서 보여졌던 몇 개의 과정이 생략되었다. 첫 번째가 가장 중요한 영해침범문제이다. 이 문제는 푸에블로사건과 동일한 근거위에 서있는 문제였으며, 전쟁의 합법성과 위기조치의 방향을 정할 문제였으나 마야구에즈의 나포위치에 대한 확인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캄보디아가 해적행위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중국과 다른나라들로부터 오히려 미국이 해적행위를 한 것이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해적행위라는 비난은 국내법은 물론이고 국제법상의 절차와 정당성을 일방적으로 훼손하며 진행된 위기회의록에 의해 피해가기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캄보디아가 군사적인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과, 아시아의 연속된 공산화와, 푸에블로위기의 치욕으로부터 백악관의 위신을 회복할 수 있는 강력한 조치의 대상이 필요했던 시점에서, 마야구에즈위기에 대한 격렬한 대응은 아시아공산국가에 미국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반도에서의 ‘9일간 전쟁계획’과 캄보디아에서 벌인 ‘마야구에즈호 구출작전’은 미국군사전략의 새로운 전환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지적될 수 있다.(…) 한 고위 관계자는 “마야구에즈호 구출작전은 북한 등의 아시아 지역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 필요하다면 미국은 힘으로 국가이익을 지킨다는 경고를 발하기 위해 실시됐다”고 밝힘으로서 이 사건의 저의를 스스로 폭로했다.(韓桂玉,軍事民論 49호,1987,팀스피리트 p79-80재인용 )
이 같은 시각이 크게 틀리지 않은 것임은 마야구에즈위기회의록 구석구석에서 확인된다.
록펠러부통령: 나는 이것을 시험케이스로서 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남한에서 판단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푸에블로사건을 기억한다. 우리에겐 곧 강한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발표하는 것과 국민들을 준비시키는 것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격렬한 대응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우리가 행동할 것이란 것을, 그것도 빨리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조치기간에 즉각 반응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공격할 수 있는 목표가 어떤 것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이것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인질극을 벌인다면 격렬한 대응은 끊임없이 계속 되어야 한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 May 12, 1975, P7)
키신저국무장관: 나는 섬과 배를 탈취하고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캄보디아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 그리고 다른나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 p11)
키신저국무장관: 북한과 다른 나라들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을 보고 있을 것이다. 사실, 확실한 환경아래에서의 약간의 국내비용을 감수하는 것은 우리가 이같은 도전을 보는 심각성을 시위하는 것치고는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 p17)
키신저국무장관:…나는 1969년 EC-121기가 북한에 격추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우리는 미친듯이 군사력을 소집했다. 그러나 우리는 끝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어선 안된다.
(Box 1, National Security Adviser.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File, Gerald R. Ford Library/ May 13, 1975 (evening) p18)
마야구에즈위기절차의 교훈
마야구에즈위기절차의 첫 번째 교훈은 보고로부터 시작되는 1단계에 가장 혼돈이 집중되며 위기조치절차를 가장 결정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가벼운 사건이라면 초기위기조치반에서 해결이 되겠지만 근본적으로 위기관리자들은 위기초기부터 위기에 대한 정보를 받길 원한다. 위기수준을 거르는 관료적 계통과 항상 신속한 보고와 해결을 요구하는 위기자체의 절박함 사이의 모순이 연출하는 혼돈은 위기절차 1단계의 정해진 장면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위기절차에 돌입한다는 것은 미국대통령을 포함한 위기대책팀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정부에 통고하고 안하고, 협의하고 안하고는 나중문제이다. 전쟁이 군사문제라면 위기는 국가문제이다. 숙고된 전쟁계획에서는 총사령관이 위기조치를 결정한다. 그러나 위기조치계획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위기조치를 결정한다. 직접 진두지휘를 한다는 측면에서, 미육군과 해군과 민병대의 총사령관으로서의 대통령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것은 전쟁절차보다는 위기절차이다. 숙고된 계획절차보다 위기계획절차가 훨씬 넓은 범주와 높은 책임성을 요구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위기는 그 시작부터 국가통수기구가 관리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교훈은 위기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이긴자에겐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이로운 법은 지키고 불리한 법은 어기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엔 법은 승리한 자가 해석하는 것이란 패권의식이 있다. 1973년 전쟁권결의 이후 가장 중요한 협의대상인 미의회에 대해서도 극도로 경계한다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전쟁권결의를 준수했다는 마야구에즈사례에서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 뒤의 엘살바도르, 아이티, 이란, 파나마등의 위기조치절차에서 백악관은 전쟁권결읠르 단 한번도 준수하지 않았고 항상 논쟁거리를 남겼다. 전쟁권결의를 다시 개정하지 않으면 그 권위가 무효화될 지도 모른다. 자국의 의회와 협의하는 문제도 이러한데 타국정부에 통지하고 협의할 수준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미군을 대신해서 판문점에 나무를 자르러 들어갈 한국군특수부대 등과 같이 작전상 절박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 말고는 한국정부에 요청을 할지언정 협의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 한미위기조치절차의 역사이다. 위기대책팀이나 대통령의 리더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위기절차에서 이기기만 하면 나머지 문제는 주도권을 잡게된다는 승자독식의 심리 때문에 합법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나중문제로 밀린다는 것이 마야구에즈위기에서 확인되었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때 그리하여 전쟁 후 책임을 떠안을 가능성이 있을 때만 법에 대해 예민해진다는 것이 푸에블로의 교훈인 것과 대비된다. 거의 같은 양상의 사건인데도 푸에블로위기와 마야구에즈위기가 전혀 다르게 전개된 것도 이같은 이유이다. 작전계획이나 개념계획등 숙고된전쟁계획에서는 국내법과 국제법의 일치성을 신중히 적용하여 계획을 수립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긴급한 위기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고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면 합법성은 뒷전으로 밀린다.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측면에서는 미국 대통령에게 가장 강력한 전쟁권을 부여한 전쟁권결의 조차 백악관은 무시하고 따돌렸다는 사실은 전쟁을 억제하는 다른 국제법에 대해서 백악관이 어떤 태도를 갖는지 충분히 예상케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기기 힘든 상대와의 싸움이라면, 또 어렵지 않게 합법성을 획득 할 수 있다면 합법성은 전쟁의 무기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걸프전과 이라크전 당시 유엔안보리결의를 얻기 위해 미국이 그토록 노력한 것은 이런 이유이다. 그러나 전쟁수행에 장애가 된다면 이라크전 당시 유엔안보리를 포기하고 등 돌렸던 것처럼 백악관은 단호하게 합법성을 포기한다. 따라서 유엔사와 같이 세계어디에도 볼 수 없는 전쟁을 위한 법적요건을 충족하고 있는 기구가 있다면 적극 유지하려할 것은 당연하다. 미국이 다 죽어가던 유엔사강화론을 다시 꺼내드는 이유이다.
셋째 교훈은 전쟁의 성패를 좌우할 근접국기지사용문제이다. 전투이전에 병참에서 전쟁의 성패가 결정된다는 것은 고금의 원리이다. 마야구에즈작전도 마찬가지로 병참과 기지사용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전쟁은 절반의 실패를 예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야구에즈위기는 실제 타이랜드에서의 미군철수로 연결되면서 전투에서 이기고 전략에서 패배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한반도 전쟁에서의 일본기지 사용권이 미국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절박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미 일미군사관계는 동맹을 넘어 일체화의 과정을 걷고 있는 상태인데도 미국이 유엔사강화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일본이 아무리 혈맹이라도 기지 사용을 위해서는 협의의 과정이 필요한 반면, 유엔사는 이런 협의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벨사령관이 유엔사강화론에서 가장 힘을 준 부분이 일본기지 사용권이었다.
작통권환수 실무협상에서 78년 연합사에 위임된 유엔사의 작통권을 이양으로 해석하여 환수받는 것과, 유엔사의 위기관리권을 막는 것에 비상한 주목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