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평화의 목표는 즐거운 삶-부산여연 강의 2006/10/14 1107

환경과 평화의 목표는 즐거운 삶

이시우
어둠

사람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
데모크리토스가 답한다. 심장이오. 그 다음은 에피쿠로스가 답한다. 아픈곳이오.
이것은 가상문답이다. 나는 에피쿠로스 편이다. 몸에 중요한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소중하다. 다만 역할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몸이 아프면 성한 부분 모두는 아픈 곳에 집중한다. 아픈 곳이 다 나을 때까지 아픈 곳은 우리 몸의 중심이다. 몸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가장 상처받고 소외되고 어둠에 가려져 있는 곳이 중심이다. 세계도 마찬가지다. 빈곤과 기아와 전쟁으로 고통 받는 곳이야말로 지구의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중심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데모크리토스 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사회의 중심은 청와대이고, 세계의 중심은 백악관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은 빛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어둠속에 있으며,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에 있으며, 중앙에 있지 않고 변방에 있다.
근대서양사는 빛의 시대였다. 단테에서 괴테, 아인시타인에 이르기까지. 빛에 대한 열광으로부터 시작되어 빛에 대한 회의에 이르는 사이, 이성은 혁명을 거쳐 실존에서 해체로 흘러갔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이르러 빛에 대한 탐구는 그렇게 회의에 빠진다. 빛보다 더 큰 어둠을 만났기 때문이다. 현대 우주 물리학이 밝힌 사실은 우주의 비밀이 빛을 발하는 항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성사이의 암흑공간, 즉 어둠에 있다는 것이다. 빛의 시대에서 어둠의 시대로의 이행이 현대사상의 흐름이 되었다. 과학에서 카오스의 발견이 그러하고, 철학에서 타자의 발견이 그러하다. 아름다움은 어둠의 발견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낯선 것속에 있다. 매일 보아왔어도 어느날 갑자기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낯익은 관성이 아닌 낯선 새로움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새롭고 신기한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루해지고 마는 것은 낯익은 관성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낯익음이 빛이면 낯선 것은 어둠이다. 즐거움도 이와 같다.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아는 것이 세상의 진리에 대한 인식이라면 좋아하는 것은 가치와 신념에 따른 지향이며, 이에 대해 즐기는 것은 인식과 가치의 완전한 체화하고 할 수 있다. 인생은 즐기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두려워 하지말자. 세상의 ‘어둠’에 대한 인식과 그 어둠을 만들어 낸 관성의 벽을 깨려는 가치지향적 실천이 생활속에 체화되어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그 때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는 최상의 지위와 역할을 얻게 된다.
즐거움은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더 자세히 말하면 관계의 감성적 형식을 통해 만들어진다. 관계의 감성적 형식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결’이다. 바람은 존재의 개념이지만 바람결은 나와 바람이 만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관계의 개념이다. 반드시 주체가 세계와 만나는 순간에만 결은 발생한다. 숨결, 살결, 나무결, 흙의 결, 역사의 결까지 모든 결이 그러하다. 즐거움을 통해 살아있는 주체가 되려는 자는 ‘결’속에서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즐거움은 또한 완성이 아닌 과정이다. 언제나 진행형속에서만 즐거움은 발생한다. 바람결은 만지려는 순간 사라진다. 얻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결’이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무사심성無私心性’ 즉, 사심없음을 본성으로 하는 대상이다. 얻기는 쉬우나 버리기는 쉽지 않다. 얻기만 하고 버리지 못하면 그것은 관성이 된다. 버리는 자만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을 우린 알아둘 필요가 있다.

‘축 발전’

어느 개업식을 가나 선물로 들어온 거울에는 축 발전이란 글씨가 박혀 있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에 ‘발전’이란 구호만을 적게 되었을까? 투명한 거울의 상층에 박힌 이 글자는 나에 대한 성찰과 반성도 발전이 기준이 되게 하는 효과를 내었다. 거울은 흙 묻고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나를 보기보다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과 양장을 보기위한, 화려한 변신과 사회적 표준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어느 거울에나 예외없이 써 있는 ‘발전’의 이념은 봉건을 극복하려던 근대주의자들의 핵심적인 기획 내용이었다. 그리고 발전 이념은 전세계적으로 공통의 것이 되었다. 근대화의 척도는 그래서 자본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발전이 되었다. 발전은 경쟁을 수반해서 극단적일 때는 전쟁이 되었고 발전의 이념하에서 자연과 생태는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일뿐이며, 평화는 힘의 공백과 균형의 어느 지점에 우연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환경에 대한 강조도 ‘지속가능한’이란 수사를 붙이지만 ‘발전‘의 영역을 벗어던지진 못한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역설과 궤변이 아직도 건재하다. 근대적 선진국이 평화로부터 나오는 힘이 아니라 힘의 유지를 위한 평화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은 근대국가들의 숙명인 것이다. 우리가 발전을 추구하는 한 발전을 위한 개발과, 비약적 발전을 위한 전쟁을 완전히 부인하기 힘들다.
인류는 400만년의 역사속에서 일만년전의 농업혁명과 18세기의 산업혁명이라는 커다란 전환점을 거쳐, 이젠 공업문명은 앞길이 막혀 ‘환경혁명’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캐나다 출신의 역사가 윌리엄 맥닐이 말하듯 1500년경까지는 이슬람 문명과 중국문명이 우위였고, 유럽은 뒤떨어진 변경이었다. 그러나 콜럼버스 이래 500년전인 1500년경부터 유럽문명우위의 시대가 시작되어 유럽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500년은 자본주의, 근대국가, 과학기술, 군사력이 서로 뒤엉켜서 발전한, 백인남성 우위의 시대이다. 그 귀결이 ‘아메리카의 세기’라는 20세기로 1908년 자동차의 대량생산에 의한 석유낭비경제가 성립되고, 환경파괴와 전쟁의 세기‘가 되었다. 미소 냉전시대부터 미국의 일극지배시대가 되었지만 미국의 경제적 지배의 절정은 오히려 1950년대(세계GDP의 50%차지)였으며 현재는 쇠퇴과정에 들어서(세계 GDP의 20%), 방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짊어지고 있다. 미국 차입금의 3분의 2가 동아시아에 대한 것이다.(서승 週刊金曜日 2003.9.19/ 녹색평론73호 p11재인용)
잘못 탄 막차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없는 개인들이 사회의 부정에 합의하고 동의하는 사이 개인 스스로가 부정했던 사회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는 세계에서 아주 특별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독일에서 명상춤을 가르치시는 이종희선생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번역해서 보내주셨다.

전 세계를 현재 비율로 100명이 살고 있는 한 마을이라 치면 다음과 같습니다.
6명이 전세계의 재산 59프로를 가지고 있으며, 그 6명은 모두 미국인입니다.
제대로 방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 80명, 문맹자가 70명, 영양실조인 사람인 50명, 반대로 PC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1명이며,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1명입니다.
만일 당신이 오늘아침 건강하게 일어났다면,
당신은 1백만명보다 행복합니다. 지난 한 주간 그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헤어날 수 없는 배고픔과 전쟁포로의 공포속에서 살지 않는다면,
당신은 5억만명 보다 행복합니다.
만일 당신이 가진 신앙을 억압과 공포없이 지킬 수 있다면,
당신은 30억에 달하는 사람들 보다 행복합니다.
만일 당신의 냉장고 안에 먹을 것이 있고, 헐벗지 않았으며, 비 맞지 않고 잘 수 있는 이부자리가 있다면,
당신은 전 세계 인구의 75프로보다 부자입니다.
만일 당신한테 은행계좌가 있고 얼마간 지갑 속에 현금이 있으며, 동전을 모아두는 저금통이 있다면,
당신은 세계에서 8프로에 속하는 부자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역사적으로 미국정책당국자의 발언에 의해서도 교차확인 된다. 1948년 냉전체제의 기획자라고도 할 수 있는 미국무성의 조지캐넌은 “지금 세계 인구의 6.3%를 차지하는 미국은 세계의 부의 50%를 필요로 한다” 라고 말하면서 ”미국이 세계에 대해 이타주의적인 정책을 실시하거나 윤리적인 행동을 하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순진한 감상적인 생각이다. 그렇게 하면 지금과 같은 미국식 생활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경우에 따라 다른 나라를 침략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고 공언한바 있다. 1997년에 클린턴 전 대통령은 세계인구의 4%를 차지하는 미국이 세계부의 20%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불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힘(군대)도 필요하다고 내비쳤다. 전세계가 미국인과 같은 소비를 하면 5개의 지구가 필요하다.(녹색평론 73호 p 11 토다 키요시)

3C (Car,Cell-Phone,Card)와 담배와 설탕

한 목사님으로부터 3C에 반대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비록 식사자리에서 3C란 말만 들었지만 생각할수록 탁견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보았다.
차(Car)는 석유소비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석유소비는 환경오염과 석유전쟁을 합리화 한다. 차 소비자를 일종의 공범자로 만든다. 차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은 ‘속도’에 대한 물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나 권력투쟁 같은 의도된 비극대신 부주의와 실수로 인한 의도되지 않은 비극도 있다. ‘속도’를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을 때 차는 곧 살상무기가 된다. 전쟁으로 사망한 인원보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인원이 더 많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문제에 대해 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차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석유 아닌 대체에너지가 나와야하며, 운전을 개인이 하지 않고 고도의 정보통제시스템에 의해 수행하도록 하는 기술이 나와야 할 것이다. 사이버네틱스와 GPS등의 발전이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속도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걷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걷기는 불필요 교통수단의 이용을 억제하고 건강과 사색의 여유를 가져다 준다.
핸드폰(Cell-phone)의 무궁한 가능성과 다양한 부작용중 한가지만을 언급하면 그것은 도청이다. 유선전화보다 무선통신이, 무선통신보다 위성통신이 훨씬 도청을 쉽게 한다. 미국의 NSA(국가안보국)를 중심으로 한 전세계 도청감청망인 에셜론의 최종목표가 핸드폰의 확대이다. 생활도 편리해지지만 도청도 편리해지는 셈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위한 민간도청도 일일이 도청장치를 설치할 필요없이 단번에 가능하다. 핸드폰의 확산은 개인만의 비밀정보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살게 됨을 의미한다.
카드(Card)의 부작용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담배는 건강에도 환경에도 좋지 않다. 담배로 인해 죽는 사람은 매년 4백90만명에 이르며 담배연기 속에는 일종의 방사능물질인 폴로늄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알파선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라늄과 유사한 피해를 준다.
설탕은 제국주의문화가 맛의 영역에서 이룬 최후의 승리이다. 단맛은 세계보편의 맛으로 군림하여 맛의 기준이 되면서 청소년들의 식생활을 급속히 미국화시키고 있다. 일본에는 페트병증후군이란 게 있다. 페트병에 든 콜라나 주스 같은 단것에 아이들이 중독된 것이다. 설탕은 체중 1kg당 하루1g을 섭취하는 것이 적합한데 페트병증후군에 걸린 아이들은 적정 설탕 소비량의 5배내지 10배의 설탕을 먹는다. 단맛은 폭력문화와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위의 5가지 사례는 개인의 의지와 관계있는 것들이다. 동학의 내수도문內修道文에 있는 “가래나 콧물을 아무데나 뱉지 말라” 와 같은 ‘작은 이야기’의 실천도 오늘날의 위기를 대하는 행동양식으로 소중하나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을 것 같은 ‘큰 이야기’의 위기와 대응에 귀 닫고 있을 수만은 없다. ‘큰 이야기’ 하니 언뜻 생각나는 것이 영화 괴물이다. 영화의 ‘괴물’이 아닌 실제 괴물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괴물1: 주한미군의 핵무기

2005년 3월 녹색연합의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된 진해해군기지의 미 잠수함 부두에 기항한 핵추진잠수함 로스엔젤레스호(USS688)는 1995년 이후 이미 핵토마호크미사일을 위한 휴대용발사시스템의 장착이 확인 되었으며, 핵토마호크미사일의 탑재가능성도 1/4로 4대중 1대는 핵토마호크 미사일을 탑재하고 있다.
로랜데이타사(Loren Data Corp)가 95년12월29일 자사홈페이지에 개시한 자료에 의하면 미해군 산하 해양시스템사령부는 지상공격용핵장착토마호크미사일을 위한 휴대용발사시스템의 개발과 생산을 위한 요구문서를 발급할 것이며, 이 휴대용발사시스템은 로스엔젤레스급공격형잠수함(SSN688,688I)과 버지니아급신형공격형잠수함(SSN774)에 장착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http://www.fbodaily.com/cbd/archive/1995/12(December)/29-Dec-1995/12sol001.htm)
약 1년 뒤인 1997년 핵과학자 아킨(Arkin)의 보고에 의해 미 해군은 이 핵탄두토마호크 휴대용발사시스템을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91년 부시대통령과 고르바초프대통령의 전술핵폐기선언이 있었고 이에 따라 남북비핵화5원칙도 발표되었다. 1994년 미국방성의 핵태세보고서(NPR)에 따르면 더 이상 해군함정에 핵탄두토마호크미사일은 배치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되었다. 그러나 핵탄두토마호크미사일은 320개가 W-80핵탄두와 함께 조지아주 캠프 킹스베이(Kings bay)에 전략핵무기들과 나란히 보관되어 있으며, 해체된 것이 아니라 양호하게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핵탄두용토마호크(TLAM/N)는 명령만 내리면 단 30일 이내에 재배치될 수 있는 상태인 것도 보고되었다.
핵과학자협회지(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는 1997년 11월 말, 핵추진공격용잠수함 보스톤(U.S.S.Boston)호가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해군무기저장소에서 핵탄두용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성공적으로 탑재했으며, 미 해군이 휴대용발사시스템을 구입하고 있는 것은 전 부시대통령이 90년 초 공격형핵잠수함에서 핵무기를 제거토록 한 결정을 하루빨리 번복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보고하고 있다.(http://www.thebulletin.org/issues/1997/nd97/nd96arkin.html)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2000년 보고에 의하면 30일 이내로 배치 가능한 핵탄두토마호크의 재배치를 위한 훈련과 군사적통합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핵탄두토마호크작전은 지금도 미전략사령부(STRATCOM)가 매년 실시하는 지구수호자연습 (Global Guardian Exercises)에 포함되어 있다.(http://projects.sipri.se/nuclear/06A.pdf 464쪽) 핵탄두토마호크라는 무기체계와 그것을 적용할 작전술 차원의 연습체계가 모두 부활한 것이다.
더구나 2002년 정보자유법에 따라 기밀해제된 문서에 의하면 ‘핵탄두용 토마호크는 12척 정도의 핵추진공격형잠수함들에 의해 사용되도록 책정되어 있다.’
(http://www.nautilus.org/nukestrat/USA/nsnf/index.html) 라고 명시하고 있어 12척의 핵추진공격형잠수함에 핵탄두토마호크가 탑재되었음을 판단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1997년 핵토마호크를 탑재했던 보스톤호(SSN703)는 1999년 임무해제 되어 퇴역했다. 보스톤호를 제외하면, 95년 이후 휴대용핵발사시스템을 장착했을 잠수함으로서 현재 운행중인 잠수함은 총46척이다. 이들 중 최소한 12척의 잠수함에 핵탄두토마호크의 사용이 승인되어 있으므로 진해기지에 기항했던 핵추진잠수함들에 핵탄두토마호크가 실려 있을 가능성은 약1/4로, 4척 중 1척은 핵탄두토마호크를 탑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이들 핵잠수함은 91년 미국의 전술핵폐기선언 이후 한반도비핵화선언과 북미제네바합의를 거치며 지금까지도 수없이 진해기지를 드나들고 있다. 또한 한국뿐 아니라 비핵3원칙을 천명하고 있는 일본의 요코스카해군기지, 사세보기지, 오끼나와의 캠프 화이트비치에도 정기적으로 기항한다. 2003년 유엔안보리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도록 결의했을 때 오끼나와민중연대는 화이트비치의 핵잠수함기지 등에 연관된 미군의 핵을 조사하도록 유엔에 탄원하는 운동을 벌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들에게도 핵탑재잠수함이 기항할 ‘1/4’의 가능성은 한국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국경선이 미군에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선언과 1994년 북미제네바합의를 누가 먼저 어긴 것일까?

괴물2: 열화우라늄탄

2001년 미국 친우봉사회(이하 AFSC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하와이지부 카일 카지히로(Kyle Kajihiro) 간사가 미 태평양사령부 총사령관 블레어 제독에게 요청한 정보공개청구 결과 2003년에 공개된 기밀해제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수원기지에 1,360,181발, 청주기지 933,669발, 오산기지 474,576발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은 거의 280만발의 열화우라늄탄을 보유”한 셈이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이번에 확인된 게 주한미군 공군이 보유한 30밀리 열화우라늄탄의 보유 현황이라서 97년에 미군 스스로 그 존재를 밝힌 바 있는 주한미육군이 보유한 120밀리 열화우라늄탄 수까지 합할 경우 보유 규모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문서 내용을 추적해보면 관리체계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오산기지에서 24,696발의 열화우라늄탄이 분실된 것”으로 나타났고” 97년엔 습기에 의한 부식 문제까지 발생해 “6개의 콘테이너가 손상되고 1개에는 구멍까지 났다”고 되어 있다. 분실 사건의 경우 사건이 발생한 90년 이후 언급조차 되지 않다가 2003년 공개 내용에 분실로 언급된 점도 주목된다. 그간 핵분열하지 않는 열화우라늄탄을 핵무기로 볼 수 있나 없나가 큰 논쟁거리였다. 이 문제에 대해 2006년 8월 국제열화우라늄무기반대심포지엄에서 이 분야 최고의 과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두가지 점에서 열화우라늄탄과 핵무기는 같다는 것이었다. 첫째는 탱크이 철갑을 관통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마찰에 의해 3000도의 고온에서 열화우라늄탄은 파괴가 일어나며 나노(원자나 분자크기)단위의 가스와 먼지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3000도에서 핵분열하는 핵무기와 같다. 둘째는 내폭이다. 내폭이란 핵물질이 몸안에 들어가 일으키는 제2의 피폭인데 신체에 흡입되거나 흡수된 열화우라늄 조각은 핵과 똑같이 피폭을 일으키고 유전자의 변형을 가져와 기형아를 출산케하거나 각종 피폭증상을 유발한다. 97년 2월 경기도 연천군에서는 “과거 미군기지 뒷편 폐폭발물 처리장에서 행정착오로 120mm 열화우라늄탄 1발을 파괴처리”한 경험이 있다. “이 폐기장의 한 가운데로 하천이 흘러 한탄강으로 유입되는데 제대로 된 환경영향조사도 없이 이 사건은 유야무야됐다. 그리고 “오끼나와 도리지마에서는 주일미군의 열화우라늄탄 오발사고까지 발생”한 일도 일어났다. 한 마디로 단순 보유만으로도 열화우라늄탄 피해 가능성은 상존한다는 것이다. 주일미군의 경우 오끼나와 사고 이후 주민 반발이 일자 열화우라늄탄을 철수한다고 밝혔지만 이 공개 자료에 따르면 “여전히 카데나 공군기지에 보관” 중이란 사실이 밝혀졌고 8월2일 마이니치신문을 비롯한 일본 유수언론에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에서는 열화우라늄탄 반대운동이 상당히 큰 편인데 그것은 과학적 논쟁과 상관없이 열화우라늄탄을 핵무기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괴물3: 화학무기

미군 폭발물교범 FM4-30.13에 의하면 미군 탄약고에는 화재표식과 화학위험도 표식을 부착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들 중 팔각형에 1자가 써진 표식은 화재표식으로 대량 폭발을 일으키는 폭발물이 탄약고 안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화재시 소화작업을 단념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표시이다.
그리고 둥근파란색 바탕에 사람모양의 표식은 화생방 위협에 대해 전신방호복을 입어야 하는 유독성화학물질이 탄약고에 보관되어 있음을 뜻한다. 붉은 사선이 있고 불에 양동이 물이 쏟아지는 그림이 있는 표식은 물이 탄약위에 쏟아지는 것을 금지한다는 즉, 물접촉금지 표식이다. 이는 탄약고안에 물과 접촉하면 안되는 화학무기가 있음을 의미한다.
판문점을 지키는 유엔사경비대 탄약고에서 다른 기지의 탄약고와 차이가 나는 표식이 발견되었다. 현재 한국에 있는 주한 미군기지와 한국군기지의 대부분의 탄약고에는 전신방호복 표식의 색깔이 흰색이지만 이곳은 노랑색임이 확인되었다.
화학위험도를 나타내는 전신방호복 표식에는 방호복의 색깔에 따라 3가지 종류로 나뉘어 진다. 표식에서 방호복의 색이 빨강인 경우는 샤린가스와 신경가스등 가장 유독한 화학무기를 나타낸다. 노랑인 경우는 그 보다는 치사성이 떨어지지만 여전히 생명에 치명적인 아담사이트 등이 포함된 화학무기를 나타낸다. 흰색의 경우에는 백린탄 등의 무기를 나타낸다.
미육군의 탄약폭발물안전기준 (Department of the Army Pamphlet 385-64)에 의하면 노란색 전신방호복표식에 해당하는 화학작용제들이 제시되어 있다. 몇가지만 보면 다음과 같다.
포스겐(CG)은 질식제로 폐에만 작용하며 폐의 모세혈관에 손상 초래한다. 제1차 세계대전중 화학작용제 희생자 중 80% 이상이 CG에 의한 것이었다. 살상효과는 24시간 이내에 발생한다.
아담사이트(DM)는 밀폐공간에서 사용할 시 살상용이 된다. 보통은 고체상태로 있으며 폭발하면 독성 에어로졸 형성효과가 매우 빠르며 1분 정도 노출시 일시적으로 무능화 상태에 빠진다. 한편 노출농도에 따라 효과는 30분에서 3시간까지 지속된다.
BZ가스는 미국이 개발한 것으로 미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일명 ‘수면가스’로 알려져 있다.
수면과 환각증세를 유발할 수 있다. 화학무기 전문가들은 고도로 예측불가능하며 종종 동요와 흥분을 증가시킨다고 말한다. 모스크바 극장을 점거한 체첸반군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이 가스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한국과 미국은 화학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해 있다. 정부가 위의 사실에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분명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큰 이야기’의 위협에 대해 살펴보았다. 큰 위협들은 개인의 의지를 넘어서 우리에게 도래한다. 그러나 예측할 수 있고 준비 할 수 있다면 재앙이 오기 전에 우리는 난관을 무릎쓰고 라도 그 일들을 대비해야 할 것이다.

고난을 극복하고 일어선 즐거움을 ‘보람’이라고 한다. 보람이야말로 가장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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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여성과 환경
여성적인 것의 윤리와 세계관이 여성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확립할 수 있다고 보는 길리건(C.Giligan)의 정신분석학적 여성론도 따지고 보면 타자로서의 여성의 적극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여성론적 생태사회학’에서 이러한 ‘여성적인 것’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스프레트낙(Ch.Spretnak)은 [생태여성론적 영성에 대하여]라는 논문속에서 여성과 자연의 특수한 관계-임신이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낳는 과정을 몸으로 경험하는 것처럼-에 대해서 “자연주의의 진리와 여성의 총체적 소질은 인간을 자신의 살과 피로써 양육하고, 자신의 젖가슴으로 키워내는 ‘여성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그러나 육체와 영혼의 강력한 통일 속에서 영성의 총체적 진리를 경험하는 수많은 계기가 여성의 삶속에 들어있다.” 고 주장한다. 비록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이 문화의 산물이지만, 여성과 자연의 결합을 새로운 문화와 정치를 창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통해 궁극에는 자연과 문화의 차이를 변형시켜 자유로운 생태계와 온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킹(Y.king)의 주장도 같은 맥락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성이 담당해왔던 노동에 의해서도 이 같은
가사일과 생산노동의 차이를 질서와 혼돈에 대입하면 육아든 가사든 질서나 표준이 존재하지 않는 덜 조직화되고 혼돈에 가까운 일이다. 이에비해 생산노동은 정해진 틀을 전제로 하는 질서에 가까운 작업특성을 가진다. 청소나 요리는 결과보다는 과정자체가 중요한 작업인 반면 생산노동은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작업이다. 청소란 제목의 다음시를 보자.

보름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비어있던 집은 손님처럼 낯설게 주인을 맞이합니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청소를 시작합니다.
구석구석 쌓여 있는 때와 먼지를 닦아내고 또 닦아내고…
그러고 나서야 방은 낯익은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청소는
낡은 때를 닦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때를 묻히는 것임을….

‘나는 타자의 인질이다’ 라는 레비나스(E.Levinas)의 지적처럼 여성은 남성의 인질로서, 남성은 여성의 인질로서 서로 묶여 있다. 바로 이렇게 묶여 있는 남녀이기 때문에 여성해방은 남성해방을, 남성해방은 여성해방을 요구한다.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남성이 깨어나야 하고 또 남성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여성이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타자성을 오히려 적극화하는 계기로 삼자는 크리스테바(J.Kristeva)의 주장도 남성주체의 해체에는 동의하더라도 여성주체는 해체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남성주체의 해체는 여성주체의 해체를 여성주체의 해체는 남성주체의 해체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동일은 같은 것을 차이에서 밝힌 것이고, 차이는 다른 것을 동일 속에서 밝힌 것’이라는 원효대사의 금강삼매경론을 원용해서 위의 주장을 되풀이 하면, 남녀의 평등은 같은 인간이라는 문제를 차이에서 밝힌 것이고 남녀의 차이는 다른 것을 같은 인간이라는 문제에서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21세기와의 대화 송두율 p169 한겨레신문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