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호사건과 유엔군사령부1 -영해문제2007/01/23 1211
푸에블로호사건과 유엔군사령부1 -영해문제
우연히 부암동에 갈일이 있어 광화문서 마을버스를 타고 청와대를 지나 청운동을 지나던 참이었다. 언덕 오른쪽 기념탑에 많은 조화가 도열해 있었다. 전화번호를 보려고 수첩을 펼쳤다가 그날이 1월 21일 인 것을 뒤늦게 알았다. 1968년 1월 21일은 청와대습격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기념탑은 당시 사망한 종로서장의 기념탑이다. 약속장소에서 바람을 맞은 나의 다음 행선지는 금강산이었다. 금강산서 돌아오던 날은 1월 23일. 푸른 동해바다를 쳐다보며 푸에블로호 사건을 생각했다. 우연한 일치로 두 사건의 현장을 가까이에서 사색할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68년 이틀사이 숨막히게 전개됐던 한반도의 운명을 생각하며 푸에블로호사건과 유엔사문제를 회고해보기로 했다. 아직도 푸에블로호 사건의 여진이 이 한반도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 미국의 사과문과 영해문제
1968.12.22 미국무성보도자료 280, 218과 1969년 국무성고시1,2호에 의하면 푸에블로승무원 송환시 미국이 북에게 사인해준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앞
미합중국 정부는 1968년 1월2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서 조선인민군 해군 함정들의 자위적 조치에 의하여 나포된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 여러 차례 불법 침입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중요한 군사적 및 국가적 기밀을 탐지하는 정탐행위를 하였다는 승무원들의 자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제시한 해당 증거 문건들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이 미국 함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엄중한 정탐행위를 한 데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과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실히 담보하는 바입니다.
이와 아울러 미합중국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 의해서 압수된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의 승무원들이 자기들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청원한 사실을 고려하여 이들 승무원들을 관대히 처분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간절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본 문건에 서명하는 동시에 하기인은 푸에블로호의 승무원 82명과 시체 한 구를 인수함을 인정합니다.
미 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 육군소장 길벝 H. 우드웓
1968년 12월23일』
NORTH KOREAN DOCUMENT SIGNED BY U.S. AT PANMUNJOM
To the Government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cknowledging the validity of the confession of the crew of the USS Pueblo and of the documents of evidence produced by the Representative of the Government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o the effect that the ship, which was seized by the self defense measures of the naval vessels of the Korean People’s Army in the territorial waters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on January 23,1968. had illegally intruded into the territorial waters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Shoulders full responsibility and solemnly apologizes for the grave acts of espionage committed by the U.S.ship against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after having intruded into the territorial waters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And give firm assurance that no U.S. ships will intruded again in the future into the territorial waters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Meanwhile,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earnestly requests the Government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o deal leniently with the former crew members of the USS Pueblo confiscated by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side, taking into consideration the fact that these crew members have confessed honestly to their crimes and petitioned the Government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for leniency.
Simultaneously with the singing of this document, the undersigned acknowledges receipt of 82 former crew members of the Pueblo and one corpse.
On behalf of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Gilbert H. Woodward, Major General, USA
(Dept. of State Press Releases 280,218, Dec. 22, 1968: 60 Dept. of state Bulletin 1,2 (1969))
미국이 83명의 포로를 인계받으며 판문점에서 서명한 사과문에 의하면 유엔사 군정위 수석대표 우드웓 소장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영해’라는 말을 네번이나 사용한 문서를 인정했다. 또한 유엔사를 소속으로 하지 않고 미육군소장의 직함을 사용하여 서명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영토조항에 대한 정면부인이었다. 결국 미국정부는 대한민국헌법을 부정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당시 남측의 반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서명문은 소위 `북한 영해’를 두 번이나 언급하면서 침범 인정 및 사과·재발 방지를 약속함으로써 `한반도와 그 영해를 한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한국의 헌법에 정면 배치되는 결과까지 낳았던 것이다. (국방일보 2003.5.14 온고지신 28 이재전 예.육군중장 회고록)
그러나 이는 푸에블로호 사건의 긴박함 때문에 발생했던 편법이 아니었다. 이미 1950년 10월 북진점령에 대한 유엔총회결의에서부터,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북은 주권국가이다’라는 발언에까지 면면이 이어지고 있는 미국의 일관된 입장이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대한민국헌법의 영토조항을 부정한 것은 한국전쟁과 유엔군사령부를 참칭한 통합군사령부를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통합군사령부에 의해 점령된 북측 지역에 대한 관리권에 대한 최종적인 결의는 1950년 10월 12일 유엔총회임시위원회 소총회로부터 나왔다. 다음은 관련조항이다.
3. 대한민국정부는 유엔에 의해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이 감시 및 협의 할 수 있었던 한국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지배권을 가진 합법정부로서 승인되었음과, 또한 “결과적으로 한국의 기타지역에 대한 합법적이며 효과적인 지배권을 가졌다고 유엔에 의해 승인된 정부는 없음을 상기하며”,
4. 전쟁행위의 발발시 대한민국 정부의 효과적 통치하에 있다고 유엔에 의하여 승인되지 않았으며 또한 현재 유엔군에 의하여 점령되어 있는 Korea지역의 정부와 민간행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 이지역의 행정을 고려하게 될 때까지는 통합군사령부가 임시로 담당할 것을 권고하고,
3. Recalling that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s been recognized by the United Nations as a lawful Government having effective control over that part of Korea Where 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that there is consequently no government that is recognized by the United Nations as having legal and effective control over other parts of Korea;
4. Advises the Unified Command to assume provisionally all responsibility for the Government and civil administration of those parts of Korea which had not been recognized by the United Nations as being under effective control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t the outbreak of hostilities, and which may now come under occupation by United Nations forces, pending consideration by the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of the administration of these territories; and
결의문 3항은 1947년 11월14일과 1948년12월12일 유엔결의에 의거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에 대해서 유일, 합법정부라는 대한민국의 북에 대한 통치권을 부인한 것이다. 이는 남측의 유엔결의에 대한 오역임을 2년 뒤 유엔자신이 확인시킨 셈이다. 남측정부는 남측지역에 대해서만 합법정부일 뿐 북측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정부로 유엔에서 승인된 적이 없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4항에서는 유엔군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북측지역에 대한 정부와 민정책임을 통합군사령부가 임시로 담당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북의 영토와 영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점령에 의한 붕괴든, 내부상황에 의한 붕괴든 유엔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북에서의 정변 발생시 정부에 저항하는 세력에게 무력을 지원하는 행위도 유엔헌장 2조 4항을 위반하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국제법을 어기지 않고 북측 지역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유엔을 통한 인도주의적 개입밖에는 없는 것이다.
(미국의회조사국“북의 국제적승인에 관련된 법적 분석(1996.12.6)<전략연구>제4권2호(1997년6월) 재인용 p194)
남측을 따돌리고 북,미 사이에 합의된 푸에블로호사건에 대한 사과문은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대통령을 비롯 남측정부가 직면했던 대한민국헌법 최대의 문제였음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분개만 했을 뿐 박정희정부가 어떤 대책을 세웠다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현재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북의 점령을 상정하고 있는 남측의 호전세력조차도 북 점령후 유엔사가 군정주체가 된다는 것 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된다. 유엔사문제가 진보진영이 아닌 보수진영에서 꾸준히 논의된 배경에는 앞선 문제의식이 있는 것이다. 보수세력, 나아가 호전세력조차도 유엔사의 북에 대한 점령통치권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
이는 북을 대단히 자극할 내용이지만 남측으로서는 남측대로 주권의 문제로서 풀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2004년 국감에서 문제가 됐던 통일부의 충무계획은 유엔사의 존재를 망각한 허구이며, 이는 2005년 초 북의 붕괴를 상정한 유엔사.한미연합사 공동작전계획인 5029의 존재를 통해 확인됐다. 현재의 상태대로라면 북점령과 붕괴시 군정 또는 민정 주체는 통일부장관이 아닌 유엔사령관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주국방이나 통치차원에서라도 정부는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http://www.siwoo.pe.kr/ez2000/ezboard.cgi?db=lec_peace&action=read&dbf=1493&page=1&depth=1)
1963년 5월 17일 미 육군 소형 헬기가 2명의 조종사를 태우고 비무장지대 남쪽에 설치한 비행금지경고 표식판을 점검하다가 행로를 잃고 한강하구수역을 넘어가서 북측 상공에 진입했다가 총격을 받고 판문점 부근 북에 강제 착륙 당했다. 비행금지경고표식판은 현재에도 육지에만 있지 한강하구지역에는 전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1년이나 걸려서 그것도 엄청난 사과문에 서명하고서야 인원(조종사)만 송환되었다. 푸에블로호 사건의 전조였다. 유엔군사령관 하우즈대장은 일치감치 북에 사과문을 발송하고 스타트 대위와 볼즈 대위 두명의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은 정전위반이 아닌 간첩행위가 드러났음을 들어 다시 절차를 합의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이 회신문은 워싱턴의 미국무부장관 앞으로 전달하고 그 내용이 공개되지 않도록 했다. 결국 유엔사 정전위 수석대표 콤스 미 공군소장은 1964년 5월 15일 다음과 같은 인수증을 작성 서명하고 인원을 송환 받을 수 있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는 미 육군 조종사 ‘스타트’와 ‘볼즈’ 대위가 미 8군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1963년 5월 17일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DMZ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북반부의 영공을 불법적으로 침범하고 군사정탐을 감행하던 중 조선인민군의 자위적 조치에 의해서 체포됐고, 그들이 감행한 간첩행위와 불법침투의 범죄를 시인하는 동시에 앞으로는 그 같은 범죄행위를 자행하지 않고, 정전협정을 엄격히 준수 할 것을 확약하며 조선인민군 측으로부터 미육군 조종사 스타트 대위와 볼즈 대위를 인수합니다.
(JSA-판문점,이문항 p129 소화)
위 인수증에서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반부의 영공을 불법 침입했다는 표현을 통해 48년 제정되고 72년 1차 수정되기 까지 북의 헌법이 주장해 온 영토개념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헌법의 영토조항의 전면부인이나 다름없다. 또한 푸에블로호 사건처럼 승무원 송환을 위한 형식적인 서명이라는 단서도 이 문서에는 없다. 푸에블로호사건 이전에 이미 미국은 북의 영토를 북이 요구하는 대로 인정해 왔음을 증명한다.
미국의 북측 영해에 대한 인식
사고가 발생한 68년 1월23일 백악관에서 열린 점심회의(12:58-2:30)에서 러스크국무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해의 정의에 대해 정전협정을 국무부에서 연구하고 있다. 그것은 북한과 근접한 바다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정전협정에는 해양에서의 국제경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없다. 사고 전 배가 어디 있었는지 모른다.” 합참의장 휠러제독이 그렇지 않다고 반론을 제시했으나 국방장관 맥나마라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고 전 북한 근처의 바다 안으로 배가 방황하고 있었는지 아닌지 불명확하다.”
(Johnson Library, Tom Johnson’s Notes of Meetings, Pueblo I. Top Secret. Drafted by Tom Johnson. The meeting was held in the White House.)
68년 12월23일 열린 29차 회의에서 유엔사측 수석대표인 우드웓 육군소장은 위 사과 문건에 서명하기 직전에 “문건에 서명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도적 견지에서 승무원들을 돌려받으려는 것이며, 북한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사과문에 서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방적인 성명으로 공식 서명한 문서의 권위가 미국의 희망대로 사라지는지는 의문이다. 이 서명문건은 미국이 북의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푸에블로호가 선박이란 사실로부터 영해문제는 이 사건의 기본조건이자 바탕을 이룬다. 결국 영해문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문제라는 점을 눈여겨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해교전으로 대표되는 유엔사와 인민군간의 해양분쟁과 2006년 남북장성급회담을 결렬까지 가게했던 서해해상분계선논쟁 역시 1968년 사건을 초월해본 적이 없다. 남과 미국이 애써 무시하고 있을 뿐 북에겐 푸에블로호 사건이 영해문제에 대한 역사적인 선례로 정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문제를 정석으로 푸는 길일지도 모른다.
우선 사건 전 동해바다에서의 영해문제가 어떤 맥락위에 놓여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에블로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임무였던 북 영해 정찰작전에 대한 미해군의 승인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작전의 전체적 윤곽은 1968년 월별 정찰 일정이라는 제목의 두꺼운 서류철 속에 들어 있었다. 분류표시와 암호들이 빽빽하게 적힌 이 서류철은 합참의 합동정찰본부에서 작성되었다. 검은 공책속에는 중국에 대한 U-2기 정찰부터 USNS멀러호의 쿠바근해 정찰 활동, 공격용 잠수함인 USS스코피언의 러시아 백해 침투작전까지, 다음달의 기술적 첩보작전에 대한 모든 사항들이 들어 있었다. 해군은 푸에블로호가 북한으로부터 10여km 떨어진 곳을 정찰하는 것을 가장 위험성이 적은 일로 보았다. 12월 27일 오전 11시 각 첩보기관들의 중간급 장교들이 펜타곤 ‘탱크’의 2E924호실에 모여 다양한 첩보수단과 이들의 표적에 관한 이견을 조율했다. CIA(중앙정보국),NSA(국가안보국),DIA(국방정보국),JCS(합참) 및 기타기관들 소속의 작전간부들은 의례적으로 동의를 표했으며, 한 전직관리가 언급했듯이 “시어스백화점 카달로그 크기의” 서류철들을 담당기관에 보냈다. 이틀후 이 서류철들은 최종승인을 위해 여러 기관에 일일이 전달되었다. 펜타곤에서는 국방부 부장관인 폴H.니체가 여기에 서명을 했다. 또한 비밀작전검토를 담당하는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 소속 극비 303위원회도 푸에블로호의 임무를 승인했다. 어떤 불만과 반대도 없었다.(NSA1 제임스뱀포드 서울문화사, p351)
푸에블로호의 작전승인과정은 이처럼 어떤 반대도 없이 일상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최소한 미국해군은 북이 영해를 육지로부터가 아닌 성진항과 38도선을 연결하는 직선기선으로부터 12해리로 설정하고 있음을 1968년 현재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음 자료가 이를 증명한다.
1966년 소련 국방성에서 나온 해양법 자료를 미국해군에서 ‘국제해양법매뉴얼(Manual of International Maritime Law)’이라는 제목으로 1968년에 영역 발행한 자료의 2부에 수록된 북의 영해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해는 북위 38도선으로부터 성진항까지를 일방으로 하여, 38선이 위치한 동해안의 점으로부터 이 항구와 연결되는 직선기선을 타방으로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동해안에 의해 경계 지워지는 동한만등의 해역을 포함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측정된 저조선으로부터 12마일을 영해로 한다. 외국의 전함은 내해에 기항하기 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 반드시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영해위의 영공에서의 외국항공기의 비행을 위해서도 같은 허가절차를 또한 밟아야 한다. 영해의 상선통과는 허가되고 제공된 규칙과 영해체제를 규정하는 법률을 참조한다. 영해에서의 어로권과 해양산업계약권은 북의 단체나 시민들이 보유하고 있다.
The inland waters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include the East Korea Bay, i.e., the waters bounded by the east coast of the Korean People’s Democratic Republic from the 38th Parallel North Latitude to the port of Songjin on the one hand, and a straight line connecting this port with a point on the East Korean Coast located on the 38th Parallel, on the other.
The Korean People’s Democratic Republic has a 12-mile territorial sea, measured from the low-water line. Foreign warships must have prior approval from the Government of the 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Korea before calling in the territorial sea.
A similar permission procedure has also been etablished for flights by foreign aircraft in the air space above the territorial sea. Passage of merchant ship through the territorial sea is permitted provided that rules and laws regulating the regime of the territorial sea are observed. The right to fish and engage in maritime industries in the territorial sea is reserved to citizens and organizations of the 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Korea.
영해 폭 12해리에 대한 결정은 이미 1955년 결정된 것이었다. 역시 소련해군에서 ‘해양법(Morskoy sbornik)’이란 제목으로 발행되는 정기간행물 제7호(1970), The International Legal Regime of the Pacific Ocean을 미 해군이 영역한 것이다.
영해 폭 12해리는 1955년 3월 5일자 (북한)내각결의 제 25호에 의한 것이다.
By resolution No.25 of the Cabinet of Ministers, 5 March 1955, the breadth of the territorial sea at 12 nautical miles.(한국과 해로안보 p325 김달중 편 법문사 재인용)
더구나 CIA에 의해 북이 미국의 영해침범시도에 대해 단호한 경고방송을 지속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것도 보고되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까지 수개월간 평양의 국제조선중앙통신(KCNA:KoreanCentralNewsAgency)은 북한영해로 침투하는 미국의 ‘간첩선’에 대해 종종 영어로 경고방송을 해왔다. 이 방송은 CIA소속의 해외방송정보서비스(FBIS)에서 입수했다. 11월27일 북한의 방송은 미국은 수십대의 무장선박을 청진항 동쪽의 우리 영해에 침투시켜 사악한 정찰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청진항은 푸에블로의 주요 표적중 하나였다. 11월 10일 또 다른 방송은 미국 간첩선에서 사로잡은 한 ‘간첩’의 자백을 인용해 “그는 미 중앙정보국의 첩보조직에 포섭되어 오랫동안 어부로 위장해 북으로 침투하는 훈련을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12월1일 한 보도에서 백정국소장은 “우리측이 이미 수차례에 걸쳐 공표했듯, 우리는 자기방어의 일환으로서 적국의 선박들에 대한 적대적 조치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1월 푸에블로 호를 직접 겨냥해 언급한 이 경고는 일본의 <산케이신붕>에 인용되기도 했다. 즉 푸에블로가 영해를 계속 배회한다면 북한은 이에 대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였다. 이 공개된 첩보는 일본과 하와이에 주둔하는 해군보안국 관리들과 NSA사이에도 이미 알려진 정보였다. 푸에블로가 북한의 12해리경계 밖에 잠시 정박해 있던 어느 날 또다시 다른 경고 메세지가 날아들었다. “미제국주의 침략군이 오늘 아침 일찍 또 다시 어선으로 위장한 간첩선을 우리 동부해안 외곽에 침투시킴으로서 적대적 침입행위를 자행했다. 미제국주의 침략군이 간첩선을 보내 정탐을 계속한다면 우리해군이 단호히 응징할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1월20일 북한의 백소장이 보내는 경고의 목소리가 다시한번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새해들어 미제국주의 침략군은 남한의 어선들과 섞여 무장선박과 간첩선을 우리의 영해에 침투시키는 범죄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백정국소장은 우리영해에 전함과 간첩선을 포함한 어선을 침투시키는 적대적 행위를 즉각 중단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적국에 강력히 요구했다.”고 방송은 보도했다. 영어로 방송된 내용은 한국어로 10번이나 반복되었으며 미확인선박에 대한 북한 국민들의 불안감은 높아만 갔다. 하지만 버처함장은 이 같은 경고를 전혀 듣지 못했다.(NSA1 제임스뱀포드 서울문화사 p361~364)
북의 영해 침범에 대한 위협과 불안은 이미 사건 몇년전부터 격화되고 있었다. 65년 이전까지 북은 남측의 영해침범에 대해 노골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북은 과거 여러차례 공동어로를 공식 제안한 바 있다. 58년 12월29일 개최된 군정위 제92차 본회의에서 북측 수석대표는 북측정부의 내무성과 어업성이 공동발표 한 제안을 읽으면서 동해에서는 명태잡이 계절에, 서해에서는 조기잡이계절에 남측어민들이 일정한 규칙을 지키면 북측 어장에서 고기잡이를 허락하겠다고 했다. 그 뒤 62년, 63년, 67년까지도 반복해서 제안했으나 남측정부가 계속 거절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남측의 어선들은 원산까지 배를 끌고 올라가 어업을 하고 내려오기 일쑤였고, 급기야 박정희정권은 경제전쟁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북측 영해에서의 어업활동을 독려하기에 이르고 이를 위해 군함이 어선을 호위하도록 하는 입체작전을 지시했다. 동해에 대한 제해권을 남측이 쥐고 있던 당시 상황의 반영이었다. 박경원 당시 강원도지사의 말을 들어보자.
“도민들이 집단으로 원산까지 올라갔어요. 나도 (정부시책에 따라)그걸 권장 했고, 또 우리 해군도 아주 적극적으로 도와줬어요….”
(바다위에서 길을 잃다 북위38도 37분, 강릉MBC 2005년 7월 12일 오후 7시 20분- 8시 20분 글/연출 권기덕)
그러나 65년 12월 한일간 국교가 정상화 되자 북은 한미일 군사삼각구도가 형성됐다고 결론내리고 분노를 표출했으며 이전까지의 평화적대응에서 강경대응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이전엔 안 보이던 북해군경비정이 출현하여 영해 침범어선을 나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66년 해성호 납북, 66년 7월 29일 북의 기관포 사격 교전, 66년 11월 29일 북성호 납북등으로 긴장이 고조되던 중 마침내 67년 1월 19일 해군 56호함(당포함)이 북방한계선을 넘는 고기잡이배를 저지하기 위해 북상하던 중 북의 해안포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56함(당포함)침몰사건 이후에도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68년 어선의 나포사건은 115회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정부는 68년 11월 어로저지선을 통일전망대에서 남쪽으로 8km 남하시키고 마차진리마을 주민들을 집단이주 시키기에 이른다. 미국의 영해, 영공침범에 대해서도 북의 대응은 마찬가지였다. 푸에블로호사건이 있기 3년 전인 1965년 북은 원산항에서 동쪽으로 약 128km 떨어진 공해상공을 비행하는 RB-47(스트래토스파이) 정찰기를 격추시키려한 바 있었다. 푸에블로가 정찰 임무를 수행하려는 곳이 바로 이 지역으로 해안에서 불과 20km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건 발생지역보다 북에 훨씬 가까운 곳이었다.
또한 북은 미국이 상습적으로 벌이는 전자도청활동을 간첩행위로 국내법에 따라 처리한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1907년 헤그에서 체결된 ‘육전의 법규와 관례에 의한 협약’의 부록에는 교전지대에서 하는 제복군인의 공공연한 정보수집행위를 간첩과 구별할 목적으로 간첩을 ‘전시와 평시를 막론하고 신분을 가장하고 다른 나라 내부에 침투하여 정탐활동을 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북의 국제법사전(사회과학출판사)에는
‘함선, 비행기 및 그밖의 기술기재를 가지고 정탐임무를 수행하는 자들도 간첩으로 인정되며 그러한 비행기, 배들은 간첩비행기, 간첩선으로 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헤그육전법의 간첩조항에서 주목할 것은 간첩이 체포될 경우 그들은 군인과 달리 전쟁포로로 간주되지 않고 체포한 나라의 국내법에 의해 처리되게 된다는 것이다.(http://www.tongilnews.com/article.asp?mainflag=Y&menuid=203000&articleid=59002)
이러한 상황인데도 미 해군은 새로이 취역한 푸에블로호가 북으로부터 10여km 떨어진 곳을 정찰하는 것을 가장 위험성이 적은 일로 보았고, 야심 찬 푸에블로호의 첫 임무인 북 도청작전에 대한 명령이 내려졌다.
푸에블로에 내려진 극비작전명령은 다음과 같다.
-북의 청진항, 성진항, 마양도항및 원산항 근방에서의 해군 활동범위 및 특징을 규정한다.
-해안에 설치된 레이더의 도청 및 설치에 중점을 두어 북 동해안지역의 전자환경을 시험한다
-소련 해군부대에 대한 정찰과 도청을 수행한다
-북 근방에서 공공연한 첩보수집활동을 함으로써 소련해군기지를 대상으로 하는 정찰에 대한 북과 소련의 반응을 각각 파악한다.
-미군에 대항한 공격적 행위나 적대적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는 북 및 소련군부대의 배치상황을 보고한다.
마지막으로 명령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첨부되었다.
“위험추정:최소”
(NSA1 제임스뱀포드 서울문화사, p359)
하지만 국가안보국(NSA)에서는 푸에블로의 임무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NSA에서 소련권 도청을 담당하는 K그룹의 작전담당자 K-12의 진 셰크 명의의 첫 번째 경고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다음 정보는 CINCPAC(태평양총사령관)의 위험평가활동을 보조하기 위해 제공한다
1. 북한 공군은 1965년 초부터 자국영공에 대한 정찰비행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이같은 민감한 태도는 1965년 4월28일 재확인 되었으며 당시 미공군 RB-47기가 해안으로부터 55-65km지점에서 북한전투기의 발포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2. 북한공군은 1966년말부터 해군을 지원하는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3. 북한의 해군은 북한해안에 접근하는 한국해군선박 및 어선을 포함하여 모든 선박에 대해 반격을 하고 있다.
4. 북한은 동해안에서의 항공활동과 관련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경계선을 대체로 준수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안으로부터 12해리 밖의 지역에서 북한군함들이 도발적으로 공격행위를 했다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위의 내용은 선박보호조치를 위한 필수요건평가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며 CINCPACFLT(태평양함대총사령관)의 배치목적에 반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다. (NSA1 제임스뱀포드 서울문화사 p352)
이 메시지는 펜타곤의 국방정보국 소속 암호부서의 암호기계로 전송되었다. 그곳의 담당직원은 이 메시지를 전쟁상황실로 보냈고, 전쟁상황실에서는 당직장교가 사본을 합참의 합동정찰본부대장인 랠프 스티클리준장에게 보냈다. NSA의 희망대로 임무 전체를 취소할 가능성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푸에블로의 이번 첫 임무는 해군의 단독작전이었으므로 NSA간부들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를 주저했고, 군조직의 관료적인 집행과정에서 이러한 견해는 무시되었다.
1968년 1월2일 신년휴가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스티클리준장은 책상에 놓인 NSA의 경고메시지사본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이 보고서를 며칠 전 푸에블로의 임무를 승인했던 합참, DIA및, 303위원회에 즉시 알리지 않고 그냥 묻어두었다. 우선 그는 NSA가 이 보고서에 붙인 분류표를 실질적 조치를 요구하는 ‘실행’에서 흥미로운 정보를 의미하는 ‘정보’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작전을 승인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대신 하와이에 위치한 태평양총사령관사무실로 가는 일상서류에 포함시켰다. 태평양총사령관에게 도착한 메시지는 처음에는 푸에블로의 작전승인메세지와 혼동되었다. 거의 동시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메세지에는 ‘정보’라는 분류표가 붙어있었으므로 무시되었다. 처음 제출되었던 ‘실행’ 사본은 해군작전본부의 토머스 H.무어러 장군에게도 보내졌다. 하지만 DIA암호국의 실수로 잘못된 분류표를 붙이는 바람에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다음 한달 동안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NSA의 경고메세지가 작전취소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는 아직 한번 더 남아 있었다. 한부는 비공식경로를 통해 워싱턴의 해군보안국국장에게 전해졌다. 랠프E.쿡대령은 ‘실행’분류표를 보고, 이 문제를 하와이의 고위간부들과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파견한 애버렛 B. 피트글래딩 해군대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메세지를 글래딩에게 넘겨 민첩하게 처리하도록 했다…
그는 해군보안국의 태평양지부장으로서 배너와 푸에블로를 포함해 광범위한 암호첩보임무를 담당했다…글래딩은 훗날 이 메세지를 받았음을 부인했지만 다른 장교들은 그가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어쟀든 NSA의 경고대신 ‘최소한의 위험’이라는 경고문을 단 승인서는 하와이에서 일본으로 전해졌고 푸에블로는 임무 착수준비에 들어갔다. (NSA1 제임스뱀포드 서울문화사p357~p358)
NSA와 함께 푸에블로호에 대한 공동책임을 지고 있었던 해군의 견해는 NSA에 대한 원망을 담아 소통의 단절을 문제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푸에블로호 사건은 군함의 정보수집활동을 지시하는 NSA와 선원에 대한 행정적 관리책임이 있는 해군간에 의사소통이 단절되었음을 나타낸 사건이었다. 이 결과 일본과 한국에 있던 미군사령부는 푸에블로호의 임무를 몰랐고 어느부대도 경계태세를 취하거나 피격시 근거리에서 함정을 보호할 수 없었다.
(‘불확실성의 제거’ 윌리암오웬스 21세기군사연구소p194-195)
북측이 주장하는 푸에블로호의 나포지점은 북이 만으로 규정하여 영해의 시작선으로 적용하고 있는 성진-38도선 간 직선기선을 적용하지 않아도 영해안에 있다.
푸에블로호는 북위 39도 17.4분, 동경127도 46.9분, (원산항 근해) 여도로부터 7.6마일 지점까지 침범했다. (2004-06-27연합뉴스)
그러나 1월 24일 3시에 백악관에서 NSC회의가 열리던 순간까지도 미국은 푸에블로의 위치가 북의 영해 밖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 영해침범 여부의 문제는 리차드 헬름스 CIA국장의 발언으로 거의 정리가 되었다.
리차드 헬름스: 우리는 푸에블로의 위치가 15.5마일에서 17마일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결론내리고 있으며, 이들 그림의 양측은 모두 영해 밖이다.
(National Security File, National Security Council Meetings, Vol. IV, Tab 62, January 24, 1968)
군사정전위 유엔사측 스미스 수석대표는 나포 당시 푸에블로호의 정확한 위치가 북위 39도25분, 동경 127도54분이었고, 북의 해안에서 적어도 16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었다고 말했다. 해안으로부터는 16마일이지만 북의 영토인 원산앞바다의 여도를 기준으로 하면 12해리 이내에 들어간다. 더구나 간성-성진간 직선기선으로부터 영해를 계산할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영해안이다. 캘리포니아주 코로나도(Coronado)에 있었던 미해군청문회에서 푸에블로호의 항해사였던 머피(Murphy)중위는 취재 나왔던 UPI기자의 끈질긴 질문에 자기 개인적인 말이라며 푸에블로호가 나포될 당시 북이 주장하는 12해리 영해안으로 4마일쯤 들어갔다고 한말이 기사가 되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북이 주장한 노도섬에서 7.6마일까지 침입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만 하기도 힘들 것 같다.(JSA-판문점 p27 이문항 소화) 국제사회에서도 미국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인도의 간디 총리는 1월27일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북한의 영해를 침범했을 것”이라며 “단순 표류사건이므로 양자간의 타협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밝혔다. 프랑스도 존슨 대통령의 신중함과 냉정함을 촉구했다. 소련은 한술 더떠 “푸에블로사건은 북한의 휴전협정 위반과 별개로 취급하되 승무원 송환을 우선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 뒤 “미국의 위법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는 만큼 사태가 악화될 경우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위협했다.(다시쓰는 한반도 100년 (7)’푸에블로파일’의 진실. 경향신문 한윤정기자)
어쨌든 푸에블로호사건은 미국이 영해침범을 시인하고 사죄문을 작성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에 따라 만일 미국이 주장하는 나포위치가 북측 해안으로부터 12해리 영해 밖이었다면, 북이 만으로 주장하며 내해로 규정한 38도선-성진간 직선기선으로부터 12해리 영해를 인정한 결과가 된다.
그러나 한해 뒤인 1969년에도 일본 아쯔기 미군기지에서 정기적으로 북을 도청하기 위해 발진하는 EC-121가 북의 영공을 침입 정찰활동을 벌이다 격추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닉슨대통령은 푸에블로호 사건과 똑같은 논리로 미국의 정찰기가 북의 영공이 아닌 공해상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북미가 서로 다른 영해기준을 사용하고 있음이 재차 확인되었고 그 결과는 미국정찰기의 격추였다.
푸에블로호 사건이후 북의 영해문제
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 9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반부에서 인민정권을 강화’한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영토를 한반도의 북쪽지역으로 한정했다. 이에 비해 남은 대한민국헌법 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전쟁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북측지역을 미수복지구로 해석하고 있다.
1972년 4월 17일 남측은 내무부장관부령 제 109호 선박안전조업규정(Regulations for the Safty of Shipping Operations)에 의해 특별해역이 서해와 동해 두 수역에 설정했다. 이 해역은 북에 대한 남측 영해의 외측경계 북단인 북방한계선에 접하는 두 구역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동해에, 하나는 서해에 있다. 동해의 경우 북위 37도 27분과 38도 30분 사이의 위치에 울릉도 북단과 같이 놓여 동서 150해리, 남북 74해리에 걸쳐 있다.(朝日新聞 1975년 10.29 조간 1면에 지도가 실렸고 미국 CIA의 한국해양분쟁 지도5(1978년판)에 실려있음)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에서 합의된 바가 없는 유엔사만의 일방적인 작전선이다. 그런데 남측의 특별안보해역이 북방한계선을 기준으로 함으로서 유엔사교전수칙이 적용되게 되었고 이는 그 이후로부터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해상분쟁과 교전위협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북은 1973년 12월1일 군사정전위원회 346차 회의에서 서해5도의 접속수역은 북의 영해이며, 통과하는 선박들은 북으로부터 사전허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한국일보 1977년 9월3일자) 1999년 서해교전 뒤 조선서해상군사분계선 선포와 2000년 3월 서해 5도 지역 통항질서 선포는 1973년 이미 남측이 유엔사의 북방한계선을 기준으로 특별해역을 설정한 직후에 나왔던 북측 입장의 재확인 일 뿐이었다.
동서해 특별해역의 외측경계는 남측이 주장하는 최대한의 해상경계선인 평화선까지 확장되어 있다. 이 수역설정의 가장 큰 목적은 남측의 어선들이 북측에 의해 피납되는 것을 막고 북측 간첩의 해상침투를 막기 위한 의도에서 나왔다. 따라서 안보수역(Security Zones)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이는1973,1974,1976,1978,1980년에 개정되었다.(한국과 해로안보 김달중 편 법문사 p571) 남측이 안보수역으로서의 특별해역을 설정하자 북도 뒤늦게 50해리 군사수역을 설정했다. 북은 1977년 8월1일 인민군최고사령부이름으로 ‘해상경계선’을 설정한다고 선언하였다.
남조선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수역을 확실히 수호하고 국가의 이익과 주권을 군사적으로 굳게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경계선을 설정한다.
군사경계선은 동해에서는 영해의 출발선으로부터 50마일까지이며, 서해에서는 경제수역의 한계선까지이다. 군사경계선 구역내의 수상, 수중, 상공에서 외국인, 외국함선, 외국군용기의 활동은 금지되며 민간선박(어선제외)과 민간항공기는 적절한 사전동의 또는 사전 승인하에서만 항행 또는 비행하는 것이 허용된다. 군사경계선 구역내에서의 수중 , 수상, 상공에서 민간선박과 민간항공기는 군사적 목적을 띤 행동이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적용 범위는 동해에는 50해리, 서해에는 경제수역 경계선으로 하며 규제내용은 군사경계선 구역 내의 수상, 수중, 공중에서 외국인, 외국 군용함선, 외국군용비행기의 행동을 금지하며 민용선박, 비행기등은 사전합의 또는 승인하에서만 항행 및 비행이 가능하고, 민간선박과 항공기라도 군사적 목적을 가진 행동과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활동은 금한다는 것이다. 북의 이같은 안보수역선언은 실제적인 의도와 목적상 ‘영토화’되고 있다. 국제법의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는 라킨(Larkin)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안보수역은 (영향을 받은 선박의 유형과 국가들에 관해서)일시적이거나 또는 계속적이거나, 금지적이거나, 단속적이거나, 포괄적이거나, 선택적일 수 있다.”
예를들어 미공군방어지역(ADIZ)은 규칙적이고 계속적인 경우이고 영국의 핵실험은 다른나라의 핵실험이 대내금지적인데 비해 대외금지적인 경우이며, 중국의 군사수역은 계속적이고 대외금지적이며 포괄적이다. 북의 경우도 중국과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중국과 북이 미국과 한국전쟁이후 정전상태에 있다는 사정과 무관치 않다. 왜냐하면 이들 두나라는 미국의 일상적이며, 공격적인 정찰대상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미국은 영해문제에 있어서 많은 반칙을 해온 것도 불신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은 1차대전 중 30여개의 해상방위수역을 설정했으며, 2차대전 동안에는 40여개 이상의 지역으로 증가하였다. 이중 알래스카동남해상 통제지역은 미국의 3마일 영해한계를 훨씬 초과하여 약 53마일로 책정되었고, 대서양에서는 무려 2,300마일 방어수역을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1939년 9월 5일 루스벨트는 미국연안으로부터 대서양쪽으로 수백마일을 방어구역으로 선언했다. 미국군함에 의한 ‘중립초계’에 의해서 교전국 선박이 이 구역 안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교전국 선박해역에 가까이 근접하려는 이 시도는, 연안으로부터 통상 3마일까지의 영해에만 적용하고 있는 국제법의 정당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1941년 4월 18일 킹제독은 미국의 방어구역이 동쪽으로 경도 26도W까지 확장되었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미국연안으로부터 2,300마일이고, 유럽의 리스본연안으로부터는 740마일에 불과한 거리이며, 유럽 도서군인 아조레스를 포함시키는 구역이었다. 국제법 어디에도 그런 방어구역의 확장이나 그것을 독단적으로 설정해서 사용할 수 있게 정당화시켜 놓은 곳이 없다. (10년20일, p174 되니츠.삼신각)
그러나 안전수역에 관계된 일반적인 조사에 따르면, 안전수역은 자기방어권리와 생존권에서 기인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1804년 초 미대법원 판결에서 소위 ‘타당성법칙’ 혹은 ‘이익’의 이론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연안국이 영해의 한계를 넘어 그 관할권을 확장,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 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합법적 이익이 성립한다면, 연안국은 영해의 한계를 넘어 그 관할권을 확장하여 행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할권의 확장은 사실상 합리적인 것이다. 1960년 Caroline 사례에서 국제법은 자기방어를 위하여 일시적으로 매우 필요한 경우에 있어서는 방법의 선택이나 심의 없이 그의 영해를 넘어서는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Moore, Digest of International Low, Vol.2(1966).p412)
유엔헌장 51조에 관계된 자기방어권은 제 2조 4항에서 기본원칙을 규정지었는데, 자기방어권은 ‘무력침공이 일어날 경우’에는 허용되었다. 외관상 긴급한 공격을 포함하며, 이 자기방어권은 어떠한 안전특별지대 혹은 보다 중요한 상황의 수립에도 무관하다.
미국이 북을 평화적수교국이 아닌 적대국으로 간주한다고 북이 판단하는 이상, 현재의 상태가 평화상태가 아닌 정전상태인 이상, 무력침공의 위협은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것이며, 따라서 유엔헌장상의 자기 방어권은 북으로서는 유효한 논리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 제3차 해양법회의에서 나타난 북의 견해는 이를 뒷받침 한다.
‘미군의 남조선점령과 주권행사를 침해하는 간섭행위는 멈춰져야 하지만 그러한 공격은 계속되고 있으며 일본의 군사력에 의한 남조선에 대한 착취 행위는 더욱더 극렬해졌고, 남조선의 근해와 대륙붕 또한 점차 폭력적으로 되었다. 따라서 남조선의 남해는 제국주의자와 식민주의 세력의 해양독점(Marine Monopoly)을 위한 경쟁지역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북은 안보수역 선언과 더불어 1977년 7월1일 조선중앙통신(Central Newscasts)를 통해
경제수역을 선언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북조선 중앙위원회는 1977년 6월21일 경제수역 확립법령을 채택했다.
2. 경제수역은 “ 영해의 기초(base of territorial water)”로부터 200해리로 확장한다.
3. 서해와 같이 그런 경계설정이 불가능한 곳은 중앙선원칙을 따를 것이다.
4. 북은 이 지역 내의 모든 자원에 대한 주권을 행사한다.
5. 북조선 당국의 사전 허가 없이는 어떠한 외국인, 외국선박 혹은 항공기도 어업, 군사시설의 건설, 개발등을 할 수 없으며, 그런 것들은 국가 경제발전에 이롭지 못하다.
6. 인민과 자원에 해를 끼치는 모든 행위는 금지된다.
7. 법령은 1977년 8월1일로부터 효력을 가진다.
(김찬규“북한의 경제수역에 대한 고찰”북한행정논총 Pulication of Korea University, Offcial of Legal and Administrative Reserch, vol.5(May 1982) p 91~109)
북은 경제수역 선언을 보충하기 위하여 ‘경제수역안에서의 외국인 외국선박과 항공기의 경제행위에 관한 규칙’을 1978년 8월12일 채택했다.
1.북조선은 경제수역내의 바다, 해저, 하층토에 있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자원에 대한 주권을 행사한다(Art.2)
2.규칙은 경제수역내의 경제적 활동 및 과학적 탐색에 관계된 모든 외국인, 외국선박, 항공기에 적용된다.(Art.3)
3.규칙에 포함되지 않는 행동은 협정을 통해 해결할 것이다.(Art.4)
4.어떤 외국인이나 선박도 경제수역내에서 북조선 자원관리기구 당국의 사전허가 없이 조업활동을 하지 못한다.(Art.5)
5.어떤 외국인이나 외국선박도 안전보장구역 또는 어로금지구역으로 지정된 기타 해역에서 어로작업을 할 수 없다.(Art.20)
6. 모든 외국인, 외국어업 선박은 무조건 규칙에 순응해야 한다.(Art.22)
7. 침해했을 경우, 선박과 선원의 억류, 혹은 심각한 위반을 했을 경우에 위반자는 형사상의 처벌에 따를 것이다(Art.23)
(김찬규“북한의 경제수역에 대한 고찰”북한행정논총 Pulication of Korea University, Offcial of Legal and Administrative Reserch, vol.5(May 1982) p 91~109)
이 선언에서 북은 자국의 경제수역에 대한 주권을 행사한다는 것과, 적절한 협정이 없는 상황하에서는 어떤 외국인, 외국선박, 외국항공기도 북의 관할권 행사로부터 면제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있다. 1976년 4월9일 3차 해양법 회의 제 64차 예비회의 중에 북 대표가 말한 담화문에 그 의도는 더욱 명확하다.
‘국내 관할권이 미치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논쟁은 국내법과 통제에 의하여 해결되어야 하고, 국제관할권에 속하는 논쟁일지라도 당사자들 간의 협정에 의해야 하고 자발적 기초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위의 담화는 경제수역선언의 기원을 북의 국내법으로 돌렸기 때문에 어떤 법률하에서 발생한 분쟁도 북의 국내법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제 3차 해양법회의 조약과 정신의 일반적 해석과는 다른 것으로 북이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푸에블로호 사건을 통해 얻은 역사적 경험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결국 38도선(간성북부)과 성진간 직선기선으로부터 50해리 안보수역 뿐아니라 200해리 경제수역에서는 사전인가 될 리 만무한 미국의 정찰활동은 불법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미국은 북의 동해상에서 공해를 주장하며 계속해서 정찰활동을 벌여 왔으며 북은 준비된 기습으로 미군항공기에 대한 공격을 단호히 실시하곤 했다. 북미사이의 영해분쟁은 최근에도 재연되었다.
2003년 3월 1일 오전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미군 정찰기 RC-135S 코브라 볼(Cobra Ball) 한 대가 북의 해안선으로부터 200km (약 124마일, 120해리) 떨어진 동해의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그 정찰기는 북이 동해안의 발사장에서 우주발사체를 발사할 것을 예상하고 그 활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투입된 것이다. 그 정찰기가 북의 해안으로부터 1백93km 떨어진 동해의 상공에 이르렀을 때, 북의 미그-29기 2대와 미그-23기 2대가 고속으로 돌진 요격비행을 하면서 강제착륙으로 유도한 사건이 있었다. 200km는 북이 경제수역으로 선포한 200해리 안쪽 120해리 지역이다. 당연히 북의 대응이 예상되는 지점이다. 미국 역시 자기 영토의 해안선으로부터 200해리(370km) 떨어진 바다의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에 대해서 정체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만약 이를 거부하면 요격하고 있다.
RC-135S는 제2의 EC-121기가 될 뻔 했다. 푸에블로호 사건이후에도 미국은 북의 영해규정과 관련세칙을 무시한 채 오늘도 정찰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북의 영해규정이 현행 국제법 기준들을 설득력 있게 충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해 문제의 본질은 ‘배타성’에 있다. 자국 주권의 배타적 적용이 영해 문제의 본질인 바 국제법적인 기준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영해를 규정하고 있다면 일단은 그것을 존중하면서 협상을 통해 국가간의 충돌요인을 완화 시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푸에블로호사건이후에도 북에 대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미국자신의 기준으로만 북측영해문제를 대처해 왔다. 이런 조건에서 북과 국제법의 기준을 놓고 영해문제를 풀어갈 여지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남북간 무력충돌로까지 발전한 서해교전을 규정짓고 있다.
유엔사와 북방한계선
북방한계선은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엔사가 임의로 설정한 작전선으로 정전협정상 합의된 군사분계선도 아니며, 영해선은 더더욱 아니다. 1967년 1월 북의 영해를 침범하면서 해안포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당포함사건을 정점으로 동해에서의 해양분쟁의 소지는 북,미 사이의 직접적 긴장으로만 나타났다. 북방한계선과 북의 영해선이 대체로 일치하고, 남측이 이전처럼 북측영해를 침범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서해의 영해문제는 지금까지도 심각한 분쟁거리로 남아 있으며 이 모든 긴장의 한가운데 북방한계선에 대한 유엔사와 남측의 일방적인 해석과 편견이 자리하고 있다. 푸에블로호사건 이후에도 북의 해양관할권이 미치는 해역으로의 정찰활동을 지속시킴으로서, 결과에 있어서는 북의 영해주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미군이 동해에서의 해양긴장의 원인제공자라면, 북방한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고집하며 유엔사교전수칙을 적용하고 있는 유엔군사령부는 서해에서의 해양긴장의 원인제공자이다. 그러나 유엔군사령관과 주한미군사령관이 항상 동일인물이란 점에서 한반도 해양분쟁 가능성의 원인제공자는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2002년 2차 서해교전 당시 침몰한 참수리호를 남측에서 인양하려하자 북은 인양작업 장소가 북측 ‘군사통제수역’이라고 주장했다. 남측은 참수리 357호가 침몰한 지점은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이자,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남쪽으로 5마일 정도 떨어진 남측 관할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유엔사와 북이 주장하는 기준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적용가능한 기준은 국제법일 것이다. 북의 영해 출발선이 되는 직선기선의 적용은 동해와 달리 서해에서는 국제법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에 의한 12해리 영해의 주장도 그 합법성을 부정하기 힘들다. 문제가 된다면 50해리 군사수역일 텐데 이는 북의 국내법을 법원으로 하고 있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북이 남측 침몰 선박의 인양지점을 군사통제수역이라고 한 것은 동해에서 미군정찰활동에 대해 일관되게 적용해 온 원칙이다.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시의 합의사항이 아니고 또한 영해의 개념으로 주장되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국제법의 기준을 적용하기 난감하다. 더구나 남측의 영해개념은 북방한계선에 의지하고 있기에 북방한계선이 폐기되는 상황이 닥치면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다. 때문에 유엔사가 북방한계선을 포기하는 조건에서 남북간의 영해협상이 실효성을 가지고 진행될 수 있고, 영해선이 확정되어야 공동어로수역 같은 수산협력 역시 안정된 토대에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비무장지대중 남북관리구역에 대한 남북군사안전보장합의서가 채택되지 않았고, 경의선 건설공사당시의 임시도로통행합의서에 의존하고 있지만, 개성공단으로 날마다 차들이 오가고 있듯이, 바다에서도 인천에서 해주항으로 직접 모래준설선이 오가고 있다. 이 노선은 물론 북방한계선에 대한 부정임이 틀림없다. 또한 연평도와 백령도로 가는 헬기의 항공노선은 2000년 3월 북이 제시한 서해5도 통항질서에 따른 제1수로와 제2수로를 준수하고 있다. 북은 2006년 5월 판문점 남북장성급회담에서 실로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서해해상분계선에 대한 서로의 주장을 포기하고 새로이 경계선을 확정하자는 것이다.
조선중앙통신은 2006년 5월16일 판문점 협상에서의 ‘조선서해해상에서 군사적충돌 문제를 근원적으로 막기 위한 제안’이란 이름으로 북측 제안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① 쌍방은 군사적충돌의 기본근원인 지금까지 서로 다르게 주장하여온 모든 해상경계선들을 다같이 대범하게 포기한다. ② 쌍방은 불가침에 관한 합의를 조속히 실현하기 위하여 정전협정과 공인된 국제법적요구에 맞게 서해해상군사분계선을 확정하며 여러가지 군사적 신뢰 보장대책을 세운다. ③ 새로운 서해해상군사분계선은 철저히 쌍방의 령토, 령해권을 존중하는 원칙에서 설정한다. 이에 따라 북측은 서해 5개섬에 대한 남측의 주권을 인정하며 섬주변 관할수역문제는 쌍방이 합리적으로 합의하여 규정한다. 쌍방이 서로 가깝게 대치하고 있는 수역의 해상군사분계선은 반분하는 원칙에서, 그밖의 수역의 해상군사분계선은 령해권을 존중하는 원칙에서 설정한다. ④ 쌍방은 이상과 같은 원칙적인 문제에 합의하는 경우 서해해상군사분계선확정을 위한 실무접촉을 가진다.
북은 쌍방이란 표현을 통해 남을 대화의 주체이자, 문제해결의 주체로 인정했다. 이는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자인 유엔사나 유엔사의 실체인 미국을 타방으로 하지 않고 있어서 주목된다. 조약이나 협정은 합의 쌍방에게만 그 효력이 발생한다. 만약 유엔사의 보장 없이 남북쌍방의 합의가 실행불가능하거나 그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북-유엔사 쌍방간 합의가 다시 체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은 아직까지 유엔사나 미국에 이 제안을 하지 않았다. 4항에 의해 정전협정 밖에서 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함은 명확히 확인된 셈이다. 남북이 원칙에 대해 합의하는 것은 정전협정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나 실무를 진행하고 확정을 한다는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다. 또한 이에 대해 유엔사가 그 법적 효력을 인정할리 만무하다. 1999년 6월 서해교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입장은 북방한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보지 않아 남측의 불만을 살 정도였으나, 서해교전을 기점으로 입장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유엔사강화론이 거의 완성된 현재의 추세에서는 남측보다 완강한 입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해분계선 협상은 푸에블로호사건에서 확인된 북미영해논쟁을 남북이 종결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점에서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벨사령관의 유엔사강화론이 더욱 고착되기 전에 영해문제를 매듭지음으로서 유엔사를 내세워 미국과 북이 충돌할 소재를 미연에 예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엔사는 유엔기구라는 형식지위를 유지하다가도 가끔 위급한 순간엔 미국이란 본체를 드러내곤 하였다. 이는 맥아더와 트루먼의 갈등이후 유엔사령관과 미국의 갈등요인이기도 했다.
당시 본스틸유엔사령관 역시 잘못을 저지른 쪽은 워싱턴과 하와이의 해군보안국계획가들이라고 보았다. 정작 이사건에 대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북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겪지 않았다.(NSA1 제임스뱀포드 서울문화사 p399)
푸에블로호 사건의 사과문을 공식화하려는 경향이 북의 영해사상의 축이라면 푸에블로호 사과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미국의 대북정찰활동의 축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 충돌은 푸에블로호사건 때처럼 피할 수 없는 위기상항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몰고 갈 것이란 점에서 푸에블로호사건은 아직도 우리 운명의 나침반이다.